사실 그 물건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칠지는 주효영도 확신이 없었다.이 제품은 이제 막 개발한 신제품이었고, 그녀가 보물처럼 아끼던 것이다.자기가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것인 데다 아직 안정성을 확인하지 못했고 효과가 어느 정도까지 발휘될지 확실하지 않았다.하지만 보스는 그런 물건이 있다는 걸 알 뿐만 아니라, 이 물건을 진정기에게 사용하라고 말한다.주효영은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왜, 마음이 약해져서 못 하겠어?”남자는 두 번이나 조롱 섞인 웃음을 지으며 주효영에게 말했다.“난 네가 정말 얼음처럼 차가운 사람인지 알았는데.”“마음이 약해진 게 아니라 물건을 그 사람에게 쓰기 아까워서 그래요.”주효영이 주저하며 대답했다.“이걸 한 병 만들어 냈으니, 앞으로 두 병, 세 병 심지어 셀 수 없이 많이 만들어 낼 수 있을 거야. 그래도 아까워? 진정기를 통제해서 백신 기지 프로젝트를 손에 넣으면 충분히 큰 실험실을 내어주지. 자금도 아낌없이 쏟아부을게. 그래도 아까운가?”남자는 주효영이 마음을 굳게 먹지 못할까 봐 한마디 덧붙였다.“방금 임상언씨가 한 말도 틀리지 않았어. 이곳 연구소에 더 머물어서는 안 돼. 빠른 시일내로 다른 연구소를 알아볼 필요가 있어. 이렇게 계속 정처 없이 연구소를 떠돌아다니거나 다시 해외로 돌아가고 싶은 거야?”“다만 네 부모님은…… 파산하게 된다면 살아가는 것조차 힘이 들겠지. 어차피 넌 신경도 안 쓸 테지만…….”이 말에 주효영이 고개를 숙이더니 담담하게 대답했다.“알겠습니다.”그녀는 뒤로 두발 물러서서 남자가 돌아보지 않는 걸 확인하고 그대로 방에서 나갔다.--원 어르신 댁에서 늦은 시간 집으로 돌아온 한소은은 잠이 오지 않았다.최근 며칠간 발생했던 일들을 떠올리자, 침대에서 뒤척이기 만 할뿐 잠에 들지 못했다.침대에 누워 두 시간 동안 눈을 뜬 채 천장을 바라보던 한소은은 조금도 자고 싶은 생각 없자 그대로 침대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한번 보았다.새벽 2시가 되었는데도 김서진으로부터 연락이 없
한소은은 잠시 멈칫하다 말을 이어갔다.“전에 내 핸드폰이 도청되고 있었어요. 하지만 새 번호로 바꾸고 보안도 강화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새 폰으로 바꾸기까지 했으니, 당분간은 괜찮을 거예요.”“당신아 나와 아이들을 걱정한다는 거 잘 알아요. 하지만 내가 당신을 찾아가지 않는다고 해서 위험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게다가 당신 때문에 우리가 위험해진 것도 아니고. 그래서 꼭 당신을 만나러 가야겠어요.”한소은의 말이 그를 설득하는데 성공했는지 그가 더 이상 이 일로 말다툼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김서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결국 그녀가 자기를 찾아오는 것을 허락했다.“꼭 조심해서 와야 해요. 경호원들도 데려오고 위험이 있다 싶으면 바로 돌아가요. 절대로 무리하지 말아요.”“알았어요.”한소은은 작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더 말하고 싶은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김서진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먼저 전화를 끊어버렸다.잠시 후 김서진이 그녀에게 주소 한 개를 문자로 보내왔다.역시 전에 핸드폰 신호가 잡혔던 그 도시였다. 한소은은 곧바로 일어나 차가운 물로 얼굴을 한번 씻고는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이었기에 기사와 경호원을 부르지 않았다.사실 경호원들의 실력은 그녀보다 못했다. 사람을 많이 데려갔다가 오히려 눈에 띌 수 있다 생각해 그녀는 홀로 가기로 결정했다.한소은은 집에서 가장 평범한 차를 운전해 쥐도 새도 모르게 김서진이 준 주소로 향했다.——지하실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며칠 동안 이곳에 갇혀있던 원철수는 자기가 환청이 들린 것으로 생각했다.처음에는 대충 시간을 어림잡아 날짜를 계산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벌써 며칠째 갇혀있는지 알 수 없었다.밖이 낮인지 밤인지도 몰랐고 지치고 배고픔에 정신마저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전에 이 교수가 가져다준 물과 빵, 그리고 자기가 연구해 낸 약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버티지도 못했을 것이다.원철수는 힘겹게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
“다리는 어쩌다 다친 거야?”임상언은 이제야 원철수의 다리에 상처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피는 오래전에 멈추었고 아무렇게나 상처를 처리한 흔적은 정말이지 처참해 보였다.“이게 다 당신들 때문이잖아.”원철수는 일부러 말을 비꼬았다. 지금 임상언이 자기를 걱정하는 척하고 있다고 생각했다.그의 말에 임상언은 눈썹을 한번 치켜올리더니 말했다.“말은 똑바로 해. 내가 그런 게 아니잖아.”“당신네 다 똑같은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원철수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는 임상언이 자기를 구하러 온 사람이 아닌 이상 주효영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그러자 임상언이 반쯤 내밀었던 손을 다시 거두며 차갑게 그를 바라보았다.“이렇게 나오시겠다? 그럼, 이만 가지. 당신은 계속 여기서 썩게 내버려 두면 되겠네.”“......”원철수는 그가 무슨 말을 하건, 태도가 강력하게 그들에게 반항하고 싶었다. 하지만 임상언이 정말 가려 하자 살고 싶은 심정은 그의 보잘것없는 자존심을 집어삼켰다.“잠깐!”나가는 시늉을 하던 임상언이 몸을 돌려 눈을 가늘게 뜨며 원철수를 바라보았다.“당신과 가지.”원철수는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섰다. 쩔뚝거리는 다리를 겨우 움직이며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두 사람이 문 앞까지 갔을 때 밖에서 지키고 있던 사람이 그들을 멈춰 세웠다.“임상언님…….”“왜, 나도 막을 셈이야?”엄숙한 얼굴을 한 임상언의 눈빛은 사람을 얼릴 듯이 차가웠다.“그게 아니라, 주효영 님께서…….”“그 여자가 뭘 하라고 했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야. 이곳에서는 내가 갑이지 그 여자가 갑이 아니야! 주효영은 너희 프로젝트의 팀장일 뿐이지 그까짓게 무슨 큰 벼슬이라고 설쳐!”임상언은 차갑게 말하며 손을 번쩍 들었다.“저리 비켜!”그가 이렇게 말하자 두 사람을 막았던 자들을 더 이상 막지 못하고 그들이 가는 뒷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원철수는 임상언이 어떤 신분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으로 봐서는 주효영보다 조금 높은 신분인 게 확실
원철수가 그렇게 성가신 사람인 줄 알았다면 그를 데리고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임상언이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임상언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원철수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특히 차를 원전하고 있는 임상언과 익숙하지만, 또 낯선 거리의 풍경이 눈앞에서 지나가자 더는 참지 못하고 한마디 더 덧붙였다.“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집으로 데려다주려고? 우리 집이 어딘지는 알아? 아니면 경찰서로 가는 건가? 그래, 그냥 경찰서로 가지. 다친 다리 감정서도 받아야 하고…….”"내가 당신을 구한다고? 누가 그래?"임상언은 백미러를 힐긋 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날 구하려는 게 아니라면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야?"원철수는 확신하지 못했다. 그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왜 거기서 자신을 데리고 나온 건지…… 혹시 다른 곳에서 그를 죽이려고 한 것인지 도무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이런 가능성을 생각하니 원철수의 경계심이 높아졌다.“그럼, 뭐 하려는 거야? 날 죽이려고?”임상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운전에만 집중했다.“차 세워! 내릴 거야! 빨리 차 세워!”원철수는 황급히 손에 들었던 음식을 버리고 몸을 돌려 차 문을 열려 했다.하지만 운전석에서 차 문을 걸어둔 바람에 어떻게 해도 열 수가 없었다.임상언의 의미심장한 웃음은 그의 눈에 더욱 소름 돋쳐 보였다.그의 모습은 주효영보다 더욱 악마 같았다. 처음에 그가 자기를 지하실에서 데리고 나왔을 때 원철수는 그를 믿고 있었다.하지만 그들이 사실은 같은 사람이라는 걸 이제야 알아차렸다."당, 당신들……."원철수가 무슨 말을 더 하려고 했을 때 순간 어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이런 어지러운 느낌은 약초를 다루는 사람으로서 너무 잘 아는 느낌이었다.“당신, 음식에 무슨……”“준다고 덥석 받아먹다니, 목숨이 몇 개라도 되는 거야?”임상언은 여전히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원철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는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당신…….”원철수는 목구멍을 찔러 먹었던
길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핸드폰의 신호는 점점 더 약해졌다.한참을 더 가서 마침내 울창한 숲에 가려진 작은 오두막을 발견했다.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그런 오두막집 같았지만 현실 상황은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오두막집은 단순하고 소박하며 지붕에는 약간의 이끼가 생겨있었다. 이런 집이 숲속에 숨겨져 있으니 자세히 보지 않고는 찾기가 쉽지 않았다. 외부도 울타리로 둘러싸여 단순하며 평범한 농가처럼 보였다.핸드폰에 저장된 주소를 다시 한번 확인한 한소은은 눈앞에 있는 집을 올려다보았다.그녀는 주소에 찍힌 그 집이 바로 눈앞에 있는 집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외에는 주변에 다른 주택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차를 세우고 내려서 한참을 걸어가다 보니 차가 정말 들어올 수 없는 길이었다.한소은이 문 앞에 다다랐을 때 집이 겉으로 보기만큼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감시 카메라가 몇 대 설치되어 있었고 간단하게 적을 방어 할 수 있는 설비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것들을 본 한소은은 마음이 조금 안심되었다. 적어도 김서진이 자신을 잘 보호하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 전처럼 그렇게 걱정되지는 않았다.감시 카메라가 있으니, 그녀가 문 앞까지 걸어갔을 때 누군가 집안에서 마중 나오며 말했다."한소은 씨?"상대방은 콧수염이 덥수룩하고 매우 거칠어 보이는 남자였다. 한소은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한소은을 알고 있는듯한 눈치였다.남자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따라오세요!"그렇게 말한 후 문을 열고 한소은이 들어올 수 있게 몸을 살짝 비켰다.그녀가 들어오자, 그 남자는 신중하게 울타리 문을 닫고 빠른 걸음으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한소은은 그의 뒤를 바짝 따라가며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사실, 이곳은 은밀한 곳에 있었기에 몸을 숨기기에는 정말 좋은 곳이다. 게다가 핸드폰 신호가 좋지 않으니 도청당할 위험도 많이 줄어든다.다만, 그녀는 김서진이 왜 이런 곳으로 정했는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김씨 가문의 가주로서 모든 일
여기까지 왔으니, 앞을 예측할 수 없다고 해서 이대로 물러설 한소은이 아니었다.그녀는 남자의 뒤를 따라가며 허리춤에 숨겼던 비수를 꼭 쥐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조금 내려가다 보니 입구와는 달리 희미한 빛이 있었다. 이곳은 지하실이자 밀실이다.이런 숲속 오두막집 아래 이러한 밀실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다. 이곳은 확실히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요양할 수 있는 좋은 곳이다.몇 발짝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을 때 부드러운 기침 소리가 들렸다. 몇 번의 기침 소리에서 한소은은 김서진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원래 침착했던 그녀는 더 이상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고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 김서진을 불렀다.“서진 씨!”그녀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김서진은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지 않았다. 서재 같은 내부에는 책장과 컴퓨터가 있고 심지어 네트워크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쪽에 큰 침대가 놓여 있었고 침구는 깔끔하게 접혀 있었다. 김서진은 책상 앞에 앉아 부드럽게 기침하며 두 눈은 무엇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당신……"그런 그를 보며 한소은은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김서진은 그녀를 흘끗 쳐다보더니 서둘러 옆에 있던 마스크를 집어 착용한 뒤 눈을 들어 그녀를 진지하게 바라보았다."왔어요?"오랜만에 만난다는 설렘과 흥분보다는 차분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서 얼마나 반가운지 알 수 있었다."충분히 쉬어야지, 왜 아직도 일을 하고 있어요!"한소은은 조금 화가 났다.자기에게는 계속 쉬라고 말하면서 정작 자기는 아픈데도 일어나 일을 하고 있다니!병으로 인해 핼쑥해진 그의 모습을 보니 한소은은 마음이 아팠다."계속 쉬고 있었는데 잠시 앉으려고 일어났어요."힘없이 웃으며 입으로는 이렇게 말했지만, 눈 밑에 다크서클이 있는 걸 보면 제대로 쉬지 못한 게 분명해 보였다."당신은 항상 이래요!"화를 내며 그를 노려보던 한소은은 그의 앞으로 재빨리 걸어가 그의 얼굴을 주의 깊게 살폈다.김서진의 얼굴은
마스크를 벗은 그의 얼굴은 생각보다 정상적이었다. 피부색이 조금 더 창백한 것 외에는 평소와 다른 점은 없었다. 단지 몸이 많이 허약해진 게 눈에 보였다.이 전염병은 매우 빠른 속도로 퍼지고 있었지만 실제로 병에 걸린다면 상황이 그렇게 나쁜 것 같지 않았다.뉴스에 따르면 감염된 후에는 기침, 심각한 구토, 알 수 없는 증상이 나타난다고 했다.하지만 김서진의 모습을 보았을 때 적어도 당분간은 정상 범위 내에 있다고 할 수 있다."혀 내밀어 봐요!"한소은이 김서진을 자세히 보다 한마디 덧붙였다.김서진은 얼어붙었다가 웃으며 말했다."이런 것까지 물어보다니, 정말 배운 게 있나 봐요?”"헛소리 집어치우고! 혀 내밀어요!"그녀는 매우 엄격하고 진지한 의사처럼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김서진은 해맑게 웃으며 순순히 협조하며 혀를 내밀었다.그의 혀에 흰색 설태가 꺼져있고 양옆은 톱니 모양으로 되어있었다.원 어르신의 제자가 되어서 부터 지금까지 수년 동안 의학을 배워왔던 한소은은 처음으로 진지하게 진료하는 것이다. 전에는 환자를 볼 기회가 적었기도 했고 원 어르신의 옆에서 그저 어깨너머 보기만 했었다.나중에는 가끔 작은 병을 치료해 주긴 했지만, 오늘처럼 심각한 전염병에 걸린 환자를 진료한 것은 처음이다. 만약 병에 걸린 사람이 김서진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손 놓고 보기만 했을 것이다."어때요? 살 가망이 있나요?"김서진은 굳은 얼굴로 몸을 곧추세우는 그녀를 보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어떻게 전염병에 걸린 거예요? 불편한 곳은?"한소은은 그의 농담을 받아주지도 않고 옆에 앉아서 따뜻한 목소리로 물었다.얼굴에 미소가 얼어붙은 김서진은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어떻게 걸리게 됐는지 사실 잘 모르겠어요. 그곳에 간 후에는 다른 곳에 거의 가지 않았고 대부분의 시간을 공장에서 보냈었어요. 외부 사람들과 거의 접촉하지도 않았어요.”“당신도 알다시피, 그곳에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건 위험하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 갑
김서진은 철저하게 준비했다. 게다가 경씨가 준비한 것들을 보면 아마 김서진이 지시한 것들일 것이다 보호 조치는 생각보다 잘 되어 있다.“그럼…….”한소은 낮은 목소리로 머뭇거리며 물었다.“서한 씨는요?”이 이름을 들은 김서진은 침묵을 지키며 얼굴이 굳어졌다.서한의 상황이 좋지 않은 게 분명했다. 한소은도 따라서 기분이 가라앉았다. 한편으로는 답을 듣고 싶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답을 듣는 게 두려웠다.정말 나쁜 소식이라면 오이연이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공장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김서진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전쟁에서 죽은 사람들도 있었고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들도 많았어요. 난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돌아와야 했어요."잠시 머뭇거리다 김서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당시 상황은 혼란스러웠고 공교롭게도 그곳을 떠나는 길에 반란군과 맞닥뜨렸어요. 서한은 나를 구하려 총에 맞았어요.……""그럼, 서한 씨…… 죽었나요?"마음속의 슬픔을 억누르며 한소은은 그 잔인한 말을 내뱉었다."아마도요."김서진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내가 떠날 때 그는 아직 살아있었어요. 다만 나와 함께 떠나지 않고 내가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어요. 그가 없었다면 지금쯤 난 아직 돌아오지 못했을 거예요.”그는 아주 짧게 말하며 최대한 가볍게 말하려고 노력했지만, 이렇게 듣는 것만으로도 한소은은 당시 상황이 얼마나 복잡하고 위험한지 느낄 수 있었다.‘반란군, 총상, 게다가 살아 돌아오지 못할뻔했다니…….’생각만 해도 심장이 꽉 조여오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지금 비록 전염병에 걸렸지만, 적어도 김서진은 자기 앞에 멀쩡히 살아있다. 이렇게 담담한 목소리로 자기에게 말하고 있다. 마치 그가 겪었던 일들이 자기의 일이 아닌 것처럼, 그저 다른 사람이 하는 얘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담담하게 말하고 있다.‘자칫하면, 정말 자칫하면 난 서진 씨를 잃을뻔했고, 아이들은 아빠 없이 크게 될뻔했어!’그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