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뻐, 아주 기쁘지. 근데… 난 그저 우해영 씨 말이 맞다고 생각할 뿐이야. 난 정말 확실한 패배자야. 내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실패했어.”김승엽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주먹을 꽉 쥐었다. 이렇게 무기력한 느낌은 처음이었다.“헛소리. 언니 허튼소리는 한 귀로 흘려.”우해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언니는 지금 입으로만 잘난 척 하고 있어. 네가 왜 패배자야? 적어도 지금은 여기 이렇게 멀쩡하게 앉아있는 너와 비교하면 그저 방안에 누워만 있는 언니가 인생의 패배자 아니겠어?”“난 지금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 이런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해. 너를 빼고 다른 사람들은 다 나를 싫어해. 이런 내가 패배자가 아니고 뭐란 말이야?”김승엽이 말했다.“누가 네가 가진 게 없다고 했어? 너한텐 내가 있잖아.”우해민은 김승엽에게 사과를 내밀었다. 그가 얼굴을 찡그리며 사과를 한 입 베어물고 나서야 그녀는 비로소 웃음을 터뜨렸다. 우해민은 사과를 계속 뜯어먹으며 말했다.“나는 태어나서부터 내 목숨조차 내 것이 아니었어. 하지만 지금의 나를 봐. 그러니까 너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내가 반드시 너를 도와 네가 마땅히 받아야 할 모든 것을 되찾아 줄 거니까.”우해민은 진심으로 그를 위로했다.“그래, 그래. 역시 우리 해민이가 최고야.”순간, 김승엽은 문득 궁금했다. 그는 무술 실력이 만만치 않던 우해영이 갑자기 무력을 잃어버린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아, 맞다. 보니까 네 언니는 무력이 아예 없어진 것 같던데…”김승엽은 슬쩍 우해민을 떠봤다.그러자 우해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예 잃어버린 건 아니야. 언니는 지금 독에 중독됐어. 지금 언니 몸은 극도로 쇠약하고 나약한 상태지. 아마 얼마 버티지 못할 걸?”“뭐? 중독?”김승엽은 깜짝 놀라 몸을 꼿꼿이 세웠다.“왜? 그런 것 같지 않아?”우해민은 김승엽을 쳐다보며 태연하게 말했다.“그런데 독을 넣었는데, 어떻게 눈치채지 못할 수 있
김승엽은 오랜만에 깊이 푹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우씨 가문은 김서진이 보낸 사람들이 들어오고 싶다고 해서 들어오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는 계속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다가 한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는 곤히 잠든 우해민을 빤히 바라보았다.아름다운 얼굴에, 잠자는 자태마저 달콤한 우해민은 더 이상 한때 그가 생각했던 순하고 어린 여자가 아니었다. 그는 오늘 우해영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그녀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예상하기 어려운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김승엽은 자신이 우해영을 꿰뚫어 볼 수 없는 것처럼 우해민조차도 쉽게 꿰뚫어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두 자매의 얼굴이 그의 머릿속에 번갈아 떠올라 그는 한동안 골머리를 앓았다.자리에서 일어나 베란다로 가서 담배를 피우는데, 그는 순간 우해민과 함께라면 어쩌면, 자신이 다시 재기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슬금슬금 피워올랐다. 어쨌든 우씨 가문의 재산은 전부 우해민 것이고, 그런 우해민이 김승엽의 여자였기 때문이다.——밤잠을 설친 김승엽은 아침 늦게까지 잠을 잤다. 아래층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몸을 일으켜보니 우해민은 어디로 갔는지 방에 없었다.대충 옷을 걸쳐 입은 김승엽은 계단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계단 입구에 이르자 아래층에서 누군가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우해민 씨도 제가 이번에 온 의도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김서진의 목소리였다. 깜짝 놀란 김승엽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여기는 우씨 가문이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두려운 것이 없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내밀고 아래층을 내려다보았다.거실에는 편한 옷차림의 우해민이 소파에 앉아있었고, 그녀의 맞은편에는 김서진이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치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는 듯 보이지만 왠지 모르게 표정에서 긴장이 역력하다.우해민은 김서진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서슴없이 말을 이어갔다.“이왕 이렇게 된 거,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낫겠네요. 승엽이는 지금 저한테 있어요. 어떻게 할 생각
“물론이죠.”우해민이 자신있게 소리쳤다.“전 약속을 정말 잘 지키는 사람입니다. 또한 감정에도 충실한 편이죠. 누구와는 달리, 가족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상처주는 짓은 하지 않아요.”그녀는 차갑게 김서진을 한 번 쳐다보고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이미 승엽이를 김씨 가문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은 거 아닌가요? 그럼 저와 승엽이 혼사도 당신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러니까 앞으로 이런 일로 다시는 저를 귀찮게 하지 마세요. 전 아주 바쁜 사람이니까요.”우해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김서진은 가만히 앉아서 입꼬리를 치켜올렸다.“그 일은 당사자가 얘기하는 게 더 적절한 일 아닌가요?”“그이는 당신들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해요. 그러니까 당신들도 그와 이야기할 자격 없어요. 얼른 돌아가세요.”“에이, 그럴 마음이 없었으면 이렇게 오래 숨어서 대화를 엿듣고 있지 않겠죠, 안 그래요? 삼촌?”김서진은 고개를 들고 계단을 향해 소리쳤다.김서진의 말에 김승엽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와 꽤 멀리 떨어져있고 들키지 않게 잘 숨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도 들킬 줄이야…김승엽은 지금 바로 내려갈지, 아니면 계속 없는 척할지 망설였다.우해민도 어안이 벙벙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김승엽이 이미 깨어났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다. 고개를 돌려 계단을 바라보았지만 텅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눈썹을 찡그렸다.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는 당신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어요.”“숨결이 이렇게 뚜렷한데, 바로 알아차리지 못한다니… 무력이 많이 떨어졌나봐요?”그의 한마디에 우해민은 숨을 죽였다.우해민은 우해영처럼 무술을 할 줄 모르니 당연히 사람의 숨결을 그렇게 예리하게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예전에 우해민이 집 구석에 숨어 있을 때도 우해영은 한 번에 눈치채곤 했는데 이게 바로 무술을 연마하는 사람들의 특이점인 건가?바로 그때, 김승엽이 천천히 계단에서 내려왔다.그는 눈을 내리깔고 천
“그래, 내 집을 내가 불태우는데 뭐가 문제야?”김승엽도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지금도 그 부동산들은 내 명의로 되어 있어. 너희가 아무리 몰수하려고 해도 정상적인 법적 절차를 밟아야 해.”버럭 화를 내는 모습에 김서진은 가볍게 웃었다. “자기가 자기 명의로 된 집에 불을 질렀다고 해도 고의 방화는 불법인 거 아시죠?”“무슨 증거로 그가 고의로 불을 질렀는지 증명할 수 있죠? 집에 우연히 불이 나는 바람에 그의 재산마저 몽땅 불타버려서 이 사람도 지금 마음이 아프다고요.”어찌된 일인지 우해민은 오늘 유달리 말주변이 뛰어났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말주변이 좋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압박감을 주지는 못했다.“우해민 씨, 기어코 저희 가문 일에 끼어드려는 겁니까?”김서진은 얼굴의 미소를 거두었다. 쳐다보기만 해도 아주 위험해 보였다.우해민은 살짝 몸을 떨었다.“당신들의 집안 싸움에는 관심없지만, 제 약혼자에 관한 일이라면 제가 직접 나서야겠는데요?”그녀의 말에 김승엽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온 세상이 자신을 버렸다고 느낄 때, 우해민은 확고하게 그의 곁에 서서 이렇게 그를 지켜주고 있었다. 이런 사실만으로도 그는 살아갈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느꼈다.“아까 법적 절차를 밟겠다고 하셨죠?”김서진이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정말 법적 절차를 밟고 싶으신 겁니까? 정식으로 법적 절차를 밟게 되면 삼촌이 직면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잘 알아두셔야 할 겁니다.”그는 김승엽을 쳐다보며 말했다.입술을 꽉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김승엽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졌다. “나를 꼭 궁지로 몰아가야만 속이 시원해?”“아무도 삼촌을 궁지로 몰지 않았어요. 길은 삼촌 스스로 선택한 거예요. 삼촌이 어떻게 가느냐에 달려 있어요.”오랫동안 우씨 가문에 있으면서 할 말은 다 한 김서진은 자리를 뜨려고 했다.“저랑 같이 가지 않으셔도 돼요. 하지만 여기에서 평생 숨어 살 수는 없어요. 삼촌은 아직도 제 삼촌이에요. 만약 삼촌이 계속 제 삼촌이
그는 앞으로의 나날을 상상할 수 없었다.김서진이 떠나기 전에 한 말을 김승엽은 확실히 이해했다. 삼촌으로 남고 싶냐던 그 말… 김씨 가문에 가서 직접 상의하라는 건가? 혹시, 그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겠다는 뜻이란 말인가? 김승엽은 믿기지 않았지만 한 번 실험해보고 싶었다. “본가에 좀 다녀올게.”김승엽은 우해민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한창 기쁨에 겨워 행복해하던 우해민은 그의 말에 두 눈을 부릅떴다.“미쳤어? 그들은 너를 집에서 쫓아냈다고. 심지어 어머니조차 너를 원하지 않는데 왜 돌아가려고 하는 거야? 스스로 모욕을 자초하려고 그래?”“아니.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그는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대체 뭘 확인하겠다는 거야? 어머니가 직접 당신을 낳은 게 맞는지 확인하려는 거야? 아니면 어머니가 당신을 배신하고 지금 이 지경으로 만든 게 맞는지 확인하려는 거야?”우해민은 뒤에서 김승엽을 꼭 껴안았다.“난 당신 이해해. 가족의 사랑을 갈망하는 마음도 이해하고. 하지만, 이익 앞에서 가족애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야. 이익을 위해서라면 친딸도 죽일 수 있고,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게 바로 사람이야. 그러니까 가지마. 당신한텐 내가 있잖아. 나 하나만으로 부족해? 오직 나만이 영원히 당신 곁에 있을 거야. 나만이 당신을 떠나지 않을 거라고.”그녀는 김승엽을 꼭 껴안았다. 그러고는 놓으려 하지 않았다.김승엽은 그녀의 압박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는 우해민의 손을 살며시 풀며 그녀를 달래주려고 했지만 헛수고였다.그는 어쩔 수 없이 우해민이 자신을 안고 있도록 내버려두었다. “나도 잘 알아. 당신이 세상에서 제일 나를 관심하고, 나한테 잘해준다는 거… 당신은 절대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잘 알아. 하지만… 언제까지 우리 둘만 이렇게 살 수는 없잖아.”“왜 안 되는데?”우해민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 언니가 죽으면 우리 부모님한테는 딸이 나 하나밖에 없어. 두 분도 그렇게 많
김승엽은 그녀와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그저 그녀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설득하기에는 더 이상 무리였다.그도 그럴것이 우해민의 성장환경은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뒤틀려진 환경에서 자란 탓에 친구나 동창도 없었고 가족애와 우정마저 얻지 못했기 때문에 결핍이란 감정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오랜 시간이 흘러, 김승엽을 만나 그에게서 처음으로 사랑의 감정을 맛 본 그녀는 김승엽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으려고 했다.김승엽은 요 몇 년 동안 그녀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놓치면 안되는 존재였다. 마치 작은 배 위에 엎드려 떠내려가는 파도에 몸을 맡긴 사람처럼, 가진것도 없어 그저 배가 가라앉기만을 기다리다가 누군가 필사적으로 배가 가라앉지 못하게, 파도에 쓸려가지 못하게 배를 꽉 잡았다. 김승엽이 그녀에게 그런 존재였다.하지만 이런 우해민의 집착에 김승엽은 숨이 콱콱 막혀왔다.——한편, 김씨 어르신은 병원에 입원했다. 연세가 연세인지라 계속해서 외부에서 오는 이러저러한 자극에 몸이 견디기 힘들어서 그런지 결국 입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녀는 다른 친지들의 방문도 사양한 채 전담 간호사를 제외하고 가문의 몇 몇 고용인들과 김지영의 간호하에 여유롭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김서진은 일이 워낙 바쁜 탓에 병원에 가끔씩 들르기만 할 뿐이었다. 한소은은 임신 중이라 김씨 어르신이 일부러 외출을 자제하라고 했지만 그녀는 시간 날때마다 틈틈이 병원에 찾아와 김씨 어르신을 뵙곤 한다.오후, 따사롭게 내리쬐는 해볕에 김씨 어르신은 잠시 눈을 붙였다. 잠시 후, 비몽사몽한 상태에서 누군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어렴풋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김씨 어르신은 겨우 눈을 뜨고 문 쪽을 바라보았다.강한 햇빛 때문에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김씨 어르신은 체형만으로 누군지 대략 알 수 있었다.“승엽아.”김씨 어르신이 애절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몇 초 동안 문 앞에 서 있다가 천천히 걸어
그의 말에 김씨 어르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다. 김승엽의 말이 맞았다. 자신이 그 손을 놓아버린 것이였다. 하지만… 그 선택 말고는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만약 처음부터 제때에 조직했다면, 그를 부추겨 싸우고, 빼앗으려 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오늘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김씨 어르신은 후회했다. 애초에 김씨 가문을 김서진에게 넘겨줄 거라는 남편의 말을 들었더라면 상황이 조금 달라졌을까? 당시 김씨 어르신은 그녀의 남편 말을 따를 수 없어 반항하고 김승엽에게 싸움을 붙였었다. 만약 김승엽을 편애하고 총애하지 않았다면…하지만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건 그녀가 마땅히 받아야 하는 벌이다.막 밖에서 돌아온 김지영은 두 사람을 보고 깜짝 놀라 김승엽을 밀치면서 소리쳤다.“너 여긴 왜 왔어? 아직도 엄마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 난거야?”“내가 엄마를 괴롭혔다고? 말은 똑바로 해. 내가 아니라 엄마가 날 괴롭힌 거야. 그리고, 누나도 무슨 좋은 사람인 척 코스프레하고 있어? 애초에 DNA를 찾으라고 부추긴 거 누나 아니었어? 누나가 마음대로 우리의 DNA를 가지고 가서 조사한 거잖아. 누나가 아니었다면, 일이 이렇게 되지도 않았어.”김승엽의 말에 김지영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못마땅해하며 입을 열었다.“난 너한테 서진이를 반드시 우리 가문에서 쫓아내라고 한 적 없어. 네가 멍청해서 자기 살 길도 알아보지 않고 막무가내로 행동한 거잖아. 다른 사람 탓할 거 없어.”“하하, 그래. 위험은 다 나한테 떠넘기고 누나랑 엄마는 하나같이 다 좋은 사람 코스프레를 하네?”김승엽은 고개를 들고 눈가에 눈물을 살짝 흘렸다.“승엽아…”김씨 어르신은 한껏 흥분했는지 심장 박동이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김지영은 버럭 화를 냈다.“빨리 여기서 나가. 엄마가 너 때문에 화난 거 안 보여?”“…”김승엽은 가만히 서 있다가 김씨 어르신이 자신을 향해 손을 휘젓는 것을 보고 이를 꽉 악문 채 주먹을 불끈
한소은은 조금 전 그말이 조금도 힘이 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더 좋은 위로의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김서진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할머니가 많이 늙으셨네요.”그의 말에 한소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저한테 할머니는 항상 의기양양하고 당당하고 씩씩하고 저랑 맞서는 분이셨어요. 삼촌을 편애하고, 잔꾀를 부리고… 근데 이런 건 다 참을 수 있어요.”김서진은 마치 지난 일을 떠올리는 듯 추억에 잠긴 듯한 눈빛으로 천천히 말했다.한소은은 그의 말을 그저 묵묵히 들어주었다. 모처럼 김서진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방해하려는 마음은 없었다. “예전에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할아버지는 항상 할머니에겐 이런저런 결점이 많다고 하셨죠. 하지만, 할아버지에 대한 할머니의 마음과, 가문을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이라고 하셨어요. 이 말은 제가 확실히 기억했거든요. 그래서 할머니가 아무리 잔꾀를 부려도 전 우리 가문이 절대 흩어지지 않을 거란 걸 잘 알아요.”김서진은 한숨을 푹 쉬었다.김서진과 그의 할아버지는 평소 사이가 각별했다. 때문에 그의 할아버지가 김서진을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이다. 김서진도 그런 할아버지의 뜻대로 항상 그의 말을 마음속에 새겨두고 김씨 어르신에게 포용을 베풀었었다.이런 생각을 하자, 그는 새삼스럽게 그가 그동안 왜 그렇게 김씨 어르신의 잔꾀를 너그럽게 포용했는지 이해가 갔다.김서진의 권력으로 그는 분명히 여러 일들을 복잡하게 할 필요 없이 바로 깔끔하게 처리하면 되었었다. 예를 들어 김승엽의 일도 원래 김씨 어르신이 가족 회의를 열지 못하게 하면 될 일인데 그는 김씨 어르신을 염려하여 사건의 진상을 폭로하지 않았다.하지만 사건의 발전 방향은 사람이 인위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할머니께서 이번에 많이 속상해하셨겠네요.”김승엽에 대한 편애가 워낙 깊었던 김씨 어르신이었던지라 많은 사람들 앞에서 김승엽의 출신을 발설했으니 가장 마음이 아플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