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소은은 조금 전 그말이 조금도 힘이 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더 좋은 위로의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김서진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할머니가 많이 늙으셨네요.”그의 말에 한소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저한테 할머니는 항상 의기양양하고 당당하고 씩씩하고 저랑 맞서는 분이셨어요. 삼촌을 편애하고, 잔꾀를 부리고… 근데 이런 건 다 참을 수 있어요.”김서진은 마치 지난 일을 떠올리는 듯 추억에 잠긴 듯한 눈빛으로 천천히 말했다.한소은은 그의 말을 그저 묵묵히 들어주었다. 모처럼 김서진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방해하려는 마음은 없었다. “예전에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할아버지는 항상 할머니에겐 이런저런 결점이 많다고 하셨죠. 하지만, 할아버지에 대한 할머니의 마음과, 가문을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이라고 하셨어요. 이 말은 제가 확실히 기억했거든요. 그래서 할머니가 아무리 잔꾀를 부려도 전 우리 가문이 절대 흩어지지 않을 거란 걸 잘 알아요.”김서진은 한숨을 푹 쉬었다.김서진과 그의 할아버지는 평소 사이가 각별했다. 때문에 그의 할아버지가 김서진을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이다. 김서진도 그런 할아버지의 뜻대로 항상 그의 말을 마음속에 새겨두고 김씨 어르신에게 포용을 베풀었었다.이런 생각을 하자, 그는 새삼스럽게 그가 그동안 왜 그렇게 김씨 어르신의 잔꾀를 너그럽게 포용했는지 이해가 갔다.김서진의 권력으로 그는 분명히 여러 일들을 복잡하게 할 필요 없이 바로 깔끔하게 처리하면 되었었다. 예를 들어 김승엽의 일도 원래 김씨 어르신이 가족 회의를 열지 못하게 하면 될 일인데 그는 김씨 어르신을 염려하여 사건의 진상을 폭로하지 않았다.하지만 사건의 발전 방향은 사람이 인위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할머니께서 이번에 많이 속상해하셨겠네요.”김승엽에 대한 편애가 워낙 깊었던 김씨 어르신이었던지라 많은 사람들 앞에서 김승엽의 출신을 발설했으니 가장 마음이 아플 사람
“그들이 어떤 사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우씨 가문에 있는 우해영은 진짜 우해영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해요.”그는 우씨 가문에 다시 한 번 가본 후에 생각을 굳혔다.김서진은 우씨 가문에 두 번이나 찾아갔는데 한 번은 김승엽을 마지막으로 설득하기 위해서였고, 다른 한 번은 그의 마음속의 추측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그러니까 당신 말은 지금 우씨 가문에 있는 우해영이 지난번 우리가 호텔에서 만났던 그 사람이라는 거예요?”한소은의 말에 김서진은 피식 웃었다. 역시 그의 아내답게 똑똑했다.“어쩐지. 풍기는 분위기가 전이랑 너무 달라서 놀랐다니까요? 아무리 똑닮은 사람이라고 해도 허점은 분명히 있어요. 근데 왜 굳이 자신과 닮은 사람을 만들어낸 걸까요? 뭘 하고 싶은 걸까요, 대체?”한소은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자신과 닮은 사람을 만들어 낸 걸까? 만약 지금 우씨 가문에 있는 우해영이 가짜 우해영이라면 진짜 우해영은 또 어디로 간 것일까?“아니면 혹시 저희가 전부 잘못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사실 지금 우해영이 진짜고 전에 봤던 카리스마 있던 우해영은 오히려 가짜일 수도 있어요.”한소은은 눈살을 찌푸렸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진짜 우해영이 무술을 전혀 못 해 무술 실력이 뛰어난 보디가드를 찾아 그 보디가드가 자신이라고 소식을 흘려보냈을 수도 있었을 것 같았다.“아니요.”김서진은 단호하게 부정했다.“만약 그렇다면 보디가드일 뿐인 사람이 각종 무학 서적에 집착하지 않있을 거예요. 만약 그저 보디가드 신분이라면, 어느 보디가드가 상사의 지시없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겠어요?”“그것도 맞는 말이예요.”김서진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한소은은 이 일이 토론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그럼 지금 이 가짜는 대체 누구고, 진짜 우해영은 어디로 갔단 말이예요?”“그건 잘 모르겠어요.”김서진은 고개를 저었다.“하지만 전 가짜가 진짜로 변할 수 없다고 믿어요. 곧 진짜 우해영이 자취를 드러낼 거예요.”우해영을 떠올리
김승엽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김씨 어르신이 생사를 넘나드는 장면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이런저런 생각에 술을 잔뜩 마시고 곤드레만드레 취해서 돌아왔다.안으로 들어서자, 우해민은 자지않고 굳은 표정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취해서 돌아온 것을 보고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왜 이제야 온 거야? 전화를 그렇게 많이 걸었는데 받지도 않고…”“못 들었어.”술집이 워낙 시끄럽고, 안에서 술만 마셨는지라 휴대폰을 꺼내 볼 틈이 없었다.“어디 갔었어? 설마 또 그 여자를 보러 간 거 아니야? 그녀는 당신을 원하지 않는데, 당신은 무슨 볼 일이 있다고 자꾸 거길 가는 거야?”우해민이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사실 그의 행적은 대략 파악할 수 있었다. 오늘 그가 병원에 갔다고 들었을 때, 그녀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런데다가 이렇게 취한 상태로 집으로 돌아오니 우해민은 말문이 막혔다. 김씨 가문이 가족 회의를 한 이후로 그녀는 사실 마음속으로 기뻐했다. 이전의 김승엽은 그녀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느낌이 들었었다. 비록 그를 좋아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차이가 분명했다.우해민은 부모님에게 홀대를 받고, 줄곧 그늘진 구석에서 혼자 살고 있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런 그녀에 비해 김승엽은 어머니의 품에서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근심 걱정 없는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우해민은 두 사람간의 격차가 없어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귀한 신분인 줄 알았던 김승엽은 사실 출신도 불분명한,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었고 줄곧 그를 총애하는 것처럼 보였던 어머니는 결정적인 순간에 그를 버렸다. 사랑을 받는 것처럼 보였던 건 전부 거짓이었던 것이다. 이제 김승엽도 오직 우해민뿐이고, 우해민도 오직 김승엽뿐이었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가장 적합한 커플이다.하지만 우해민의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 그녀는 김승엽의 마음이 여전히 흔들린다는 것을 느
“난…”한순간에 말이 막히더니 김승엽은 조용해졌다.“알아. 당신이 지금 얼마나 힘든지 다 알아. 힘들면 울어, 내 앞에서 참지 말고 뭐든지 다 해도 괜찮아.”우해민은 가볍게 그를 껴안았다. ——다음날 아침.김승엽이 일어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제법 큰 인기척이 들려왔다. 잠을 깬 김승엽이 베란다로 나가보니 고용인들이 급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다급히 옷을 걸치고 황급히 아래로 내려갔다. 두세 명의 본채 고용인들이 소파와 탁자 등에 헝겊을 씌우고 있는 것을 보고 급히 한 사람을 불러 세워 물었다.“뭐하는 거예요?”“아가씨가 분부하신 건데, 여기는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을 거니까 물건을 모두 정리하라고 하셨어요.”“오랫동안…”어제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지 머리가 아파왔다. 하지만 어렴풋이 어제 우해민이 했던 말이 생각이 났다. 내일 떠나자고 했는데 괜히 해본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던 것이다.“그 사람은 지금 어디있어요?”김승엽은 무의식적으로 묻더니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지하실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아니나 다를까, 그 어두운 지하실 문은 정말 열려 있었다. 그가 채 들어가기도 전에 안에서 우해민의 목소리가 들렸다.“언니, 나는 언니를 이렇게 빨리 놓아줄 생각은 없었어. 언니는 아직 내 고통을 제대로 맛보지도 못했거든… 하지만 나한테 시간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언니를 배웅하러 온 거야.”그녀의 섬뜩한 말이 들려왔다.“…”김승엽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늦추었다. 잠시 후, 우해영의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도 들려왔다.“하하, 너 정말 참을성이 없는 아이구나.”“난 당연히 언니보다 인내심이 없지. 언니처럼 뛰어난 무술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서 말이야. 난 빨리 집에 돌아가야 해. 밖은 너무 위험하거든. 어쨌든 언니를 노리고 있는 원수는 너무나 많으니까, 안 그래?”이 점은 우해민이 김승엽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다. 그녀의 또다른 걱정거리이기도 했다. 그녀가 이렇게 급히 돌아가려고 하는 이유는 한편으로는 김승엽이 결국 자신
인기척에 우해민이 고개를 돌리자 가만히 서 있는 김승엽을 발견했다.“깼어?”그는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좋아, 당신도 와서 언니의 마지막 길을 봐.”우해영은 잠시 숨을 헐떡이다가, 고개를 들고 쓴 웃음을 지으며 조롱하듯 우해민을 바라보았다.그 웃음은 우해민을 불쾌하게 만들었다.“왜 웃어?”“이 바보같은 게.”우해영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넌 저 사람이 진심으로 너를 좋아하는 줄 알아?”“물론이지.”우해민은 자신 있게 말했다.그녀는 이미 그에게 여러 번 반복해서 물었고, 그는 모두 긍정적인 대답을 했었다. 우해민은 김승엽이 틀림없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다.“웃겨 죽겠네. 너 거울도 제대로 안 봐? 머리부터 발끝까지 너를 사랑해 줄 점은 단 한개도 없어. 나를 닮은 얼굴 빼고는 자랑할 만한게 아무것도 없잖아.”우해영은 한껏 비아냥거렸다. 그녀는 경멸이 가득한 눈빛으로 우해민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넌 공부도 못하고 무술도 못하고, 그저 나를 대신해서 몇 가지 간단한 일을 완성했을 뿐인데, 정말 나를 대신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그야 당연하지.”우해영의 조롱에 우해민은 화가 단단히 났다.“언니가 죽기만 하면 우씨 가문의 모든 것은 다 내꺼야. 그러니까 당연히 언니를 대신할 수 있고 말고.”“순진하긴.”우해영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크게 숨을 헐떡이는 것을 보니, 확실히 몸이 좋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내가 오늘 이 자리에 앉게 된 게 단지 내가 우씨 가문의 자제여서 그런 거라고 생각해? 이건 전부 내가 노력해서 만든거야. 네가 내 무술 실력이 퇴화했다고 대외에 말할 거라고? 그게 뭘 의미하는 지 알아? 바로 우리 우씨 가문이 몰락했다는 뜻이야. 수백 년 동안 우리 가문이 왜 점점 더 몰락하는지 알아? 바로 우리 윗세대, 윗윗세대 조상님들의 무력이 남보다 못하기 때문이야. 이제 네가 내 무공이 없어졌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이 널 가만히 내버려둘 줄 알았어? 천만에, 남들은 더 힘껏 우리 가문을 짓밟으려 할 거야
우해민은 계획이 있었다.그녀는 우해영에게 천성적으로 두려움이 있었다. 어쨌든 어릴 때부터 그녀의 그늘에서 살았기 때문에 만성 독극물을 조금 넣어서 그녀의 몸을 망가뜨리는 것은 괜찮지만, 직접 그녀를 죽이는 건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그리고 그녀는 김승엽이 자신을 떠날까 봐 두려워했다. 때문에 만약 자신이 김승엽의 약점을 잡고 있다면 그는 영원히 자신을 떠나지 못할 거라고 우해민은 확신했다. 그야말로 일석이조였다.“…”김승엽은 잠시 주저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못할 것 같았다.“왜? 못하겠어?”우해민은 일부러 화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당신은 내가 아니라 우리 언니를 사랑하는 거 아니야? 그래서 차마 언니한테 손을 대지 못하는 거지? 맞지?”“아니. 무슨 소리야? 내가 사랑하는 건 너야, 당연히 너지. 근데...”약은 따뜻하지만, 왠지 너무 뜨겁게만 느껴졌다. 너무 뜨거워서 그는 당장이라도 버리고 싶었다.머뭇거리는 그의 모습을 보고 우해민은 다시 부드럽게 그를 설득했다.“알아. 당신 마음. 하지만 나도 일정을 이미 다 준비해놨어. 언니만 해결하면 우린 이제 아무런 걱정이 없어. 우린 곧 비행기를 타고 본가로 돌아갈 거야. 우리 집은 넓고 엄청 예뻐. 당신도 틀림없이 좋아할 거야. 돌아가면 바로 결혼식부터 올리고 앞으로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거야.”이건 그녀가 전부터 계획한 아름다운 미래였다. 그녀는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하지만 이런 미래는 김승엽이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당장 눈 앞에 있는 난제가 그의 애간장을 태웠다.“지금 언니 꼴을 봐. 버티는 것도 고통이야. 당신이 언니의 고통을 끝내주는 건 언니를 돕는 일이야.”우해민은 김승엽을 조용히 구슬렸다. 그녀는 김승엽의 안색을 살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잘 생각해 봐. 언니가 전에 당신한테 어떻게 대했어? 당신을 때리기도 하고 언제 당신을 사람으로 본 적이 있는지 생각해 봐. 심지어 당신을 이용하기까지 했어.”그녀는 일부러 지난 일을 하나하나 들먹이며 그
‘그래, 맞아. 내 약점을 잡으려고 하는 거일수도 있어.’김승엽은 자신이 손을 대면, 앞으로 그에게 살인자라는 꼬투리가 붙게 될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면 우해민에게 약점이 단단히 잡히게 될 거고 그러면 우해민은 김승엽이 그녀의 말을 듣지 않을 때마다 이 일로 그를 위협할 수 있었다. 며칠 전만 해도 가끔 미친 듯한 집착적인 성향을 보이던 그녀를 떠올리자 앞으로 그녀한테 얽매여 있을 것을 생각하니 숨이 턱턱 막힐 것 같았다.생각을 끝낸 김승엽은 돌아서서 우해민에게 말을 걸었다.“아니면 그만 두자. 어쨌든 네 친언니잖아. 본가로 같이 데려가는 건 어때? 어차피 본가는 섬이잖아. 섬에 가둬도 되는 거 아니야? 게다가, 너도 그냥 죽게 내버려두는 게 아깝다고 했으니까 데려가서 네가 전에 겪었던 고통을 다시 맛보게 하는 거야.”“미쳤어?”우해민은 갑자기 분노했다.“섬으로 데려가면 우리 부모님이 언니를 도와줄 수 있다는 거 몰라? 어릴 때부터 엄마, 아빠는 언니만 편애했어. 언니 상황을 알면 부모님이 꼭 도와줄게 뻔해. 그럼 난 죽게 될거라고. 언니가 죽어야만 엄마 아빠는 이제 딸이 하나밖에 없다고 나한테 잘해 주실 지도 몰라. 그러니까 언니는 여기에서 죽어야 해.”우해민은 마치 자신을 세뇌하는 듯이 말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화가 치밀어 올라 김승엽을 노려보며 분풀이했다.“나를 위해 이까짓 일도 못 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야? 나는 당신을 위해 감히 내 친언니에게도 손을 댔어, 난 당신이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도 전혀 신경 안 써, 근데 당신은 이렇게 작은 일도 못 해?”“못하는 게 아니라 그냥...”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우해영이 끼어들었다.“그냥 너한테 약점을 잡히고 싶지 않은 거야. 평생 네 손에 잡히기 싫은 거야. 아직도 모르겠어? 그는 너와 평생 함께하는 걸 원하지 않아. 아무도 너와 같은 미치광이와 평생을 함께 하는 걸 원치 않을 거야. 네가 이겼다고 생각해? 넌 그냥 평생 내 그림자에 불과해, 내가 없어도 넌 행복하게 살 수
두 사람은 깜짝 놀라 동작을 멈췄다.우해영은 이 틈을 타서 몸을 비틀었다. 그러자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그릇이 땅에 떨어져 맑은 소리를 내며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뭐야? 죽고 싶어?”우해민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바깥의 고용인의 인기척인 줄 알고 잔뜩 화를 내며 밖으로 나갔다.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가슴이 갑자기 아파오기 시작하더니 우해민은 순식간에 뒤로 날아갔다.“펑.”우해민은 그대로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해민아.”뒤따라 나온 김승엽은 깜짝 놀라 서둘러 우해민에게 다가가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 하지만 그도 밖에 나가자마자 가슴이 답답하게 막히는 것 같았다. 곧이어 김승엽도 우해민처럼 바람에 밀려났다.방이 너무 작은 탓에 두 사람은 함께 벽에 부딪혔다가 다시 바닥에 쿵하고 떨어졌다.먼지가 풀풀 피어올라 방안은 어느새 난장판이 되었다.“콜록콜록...”두 사람은 기침을 하며 피를 흘렸다.그들은 누군지 정체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가슴은 갈비뼈가 부러질 정도로 아파왔다. 간신히 눈을 뜨자, 한 남자가 온몸에 매서운 기운을 풍기며 무릎을 반쯤 꿇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늦어서 죄송합니다.”“데일?”우해민은 그를 알아보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우해민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남자의 정체를 확인하자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네가 왜 여기에… 넌 이미…”“이미 당신이 섭외한 킬러에게 암살당하지 않았냐고요?”데일은 여전히 무릎을 반쯤 꿇고 매서운 눈빛으로 말했다.“…”우해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확실히 그렇게 지시했었다.그녀는 거의 자신의 모든 재산과 우해영에게서 훔친 돈과 보석을 팔아 세상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킬러를 섭외해 데일을 죽이도록 명령했었다.우해민도 데일의 실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보다 더 강한 킬러를 섭외한 것이다.“네가 섭외한 킬러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생각해?"겨우 정신을 차린 우해영은 한 손으로 가슴을 툭툭 두드리며 입가에 비아냥거리는 미
소은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요.”“무슨 일이에요?” 임남을 달래던 임상언이 무심히 되물었다.“로사 왕자는 감금된 것이 아니라 그날 Y국으로 송환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동안 로사 왕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던 걸까요?” 소은의 말에 임상언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신호가 나쁘거나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로사 왕자가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을 수도...”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둘 다 이미 답을 얻은 듯했다. 로사 왕자가 그토록 연락을 피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는 건가?...3일 후. 소은은 마지막 침을 놓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여왕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시술로 폐하의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실 겁니다. 하지만 일어서는 건 천천히 시도하셔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안 돼요.”소은은 말을 마치고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무엇 때문에 웃는 거지?” 여왕은 여전히 자신의 다리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이미 이틀 전부터 약간의 감각이 돌아왔음을 느낀 터라, 소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사실 R10 실험을 고집하신다면 결국 폐하께서는 이 몸을 떠나게 되실 텐데, 제가 이 몸에 애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여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계속한 거지?”“어쩌면, 폐하께서 마음을 바꾸실 지도 모르니까요.” 소은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쩌면 자신의 몸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요.”“우리 모두 이 세상에 올 때 두 손은 비어있지만, 이 몸만은 오로지 우리 자신의 것이죠. 몸마저 버리신다면, 그 영혼은 여전히 진짜 자신일 수 있을까요?”“그렇구나.”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
소은은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여왕을 쳐다보았다. “물론이죠.” 소은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는 원망이나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그렇다면... 조금 아쉽네.” 여왕은 생각에 잠긴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균형을 맞추려 하죠. R10이 폐하께서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면, 저는 그것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때가 되어 성공하든 실패하든, 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할 테니 부디 후회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소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릭은 여전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녀와 여왕의 대화가 거의 다 들렸던 듯, 둘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다. 소은이 그를 지나쳐 나가자, 릭은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여왕 폐하.” 릭은 여왕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다리에 꽂힌 은침을 보자 릭의 눈빛이 굳어졌다. “이건...”“괜찮아. 곧 소은이가 와서 침을 빼줄 거야.” 여왕은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릭은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만약 한소은이 폐하께...”“그럴 리 없다.” 여왕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릭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 여자를 믿으시는 겁니까?”여왕은 대답 대신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릭의 질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소은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누구도 쉽게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녀는 소은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은침에 독이 묻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제가 가서 잡아오도록 하죠.”여왕이 생각에 잠기자 릭은 바로 뒤돌아섰다.“거기 서!”여왕은 결연히 말했다. “난 믿어.”릭은 한참을 침묵하며 여왕의 결정을 받아들였다....임상언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비록 아들을 구하려는 결심을 굳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희망이 사라지는 듯했다.
소은은 허리춤에서 허리띠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풀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가느다란 은침을 꺼냈다.“이건...” 여왕은 깜짝 놀라며 소은을 쳐다봤다. 소은이가 은침을 항상 가지고 다닐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말해봐, 네 요구가 뭐지?” 여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너무 무리한 요구라면 거절하면 그만이다. 여왕은 절대 소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소은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로사 왕자님 덕분입니다. 그러니, 왕자님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그게 다야?” 여왕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소은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과 조건을 따지는데, 결국 요구한 게 단지 로사를 처벌하지 말라는 거라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로사는 내 아들이다. 내가 정말 내 아들에게 손을 댈 리는 없지. 괜히 기회를 헛되게 쓴 건 아닌가?” 여왕은 고개를 저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전 폐하께서 정말 로사 왕자님께 처벌을 내리시지 않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왕자 폐하께서 저를 구해준 건 사실이기에 저도 왕자 폐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소은은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 왕자 폐하를 감금하시고 자유를 제한하고 계시지 않나요?”여왕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야. 난 단지 로사를 Y국으로 돌려보냈을 뿐이야.”“로사가 여기서 내 일을 여러모로 방해하긴 했지만, 우리 모자 사이가 더 악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로사가 필요하니 Y국으로 돌려보낸 것뿐이다.” 여왕은 담담하게 말했다.“그런데 왜 왕자 폐하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죠?” 소은은 잠시 멈칫했다. 단지 귀국했다면 국제전화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연락이 닿지 않았기에 여왕이 로사를 가둬놓았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여왕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날 내가 화가 났던 건 사실이지만, 곧바로 Y국으로 돌아가도록
“삼일이면 됩니다.” 소은은 여왕을 쳐다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삼일? 고작 삼일?” 여왕의 눈에는 믿기지 않는 놀라움이 서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아니 최소한 몇 년은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고작 삼일이라니,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한 시간이었다.삼일쯤이야. 십 수년을 이렇게 버텨왔는데, 삼일쯤 더 기다린다고 달라질 게 뭐 있겠는가?“삼일 안에 정말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다시 일어서서 걸을 수 있는 건가?” 여왕은 두 손으로 자신의 다리를 힘껏 눌렀지만 여전히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녀는 소은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다리가 감각을 잃은지 너무 오래되어 치료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여왕은 여러 나라의 명의를 찾아 다녔지만, 그들은 단지 병의 악화를 늦출 수 있을 뿐 다리를 완전히 회복시키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금 소은은 그녀 앞에 서서 확신에 찬 얼굴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이전처럼 완벽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순 없어요.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근육이 많이 위축됐거든요. 하지만 서서히 일어나서 조금씩 회복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소은은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여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정도라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젊었을 때처럼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휠체어와 지팡이 없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희망이었다.“좋아. 삼일, 기다리겠네. 필요한 게 있나?” 여왕은 기분이 좋아져 말을 한층 부드럽게 했다.“임남...” 소은이 말을 꺼내자마자 여왕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건 안 돼. 그런 요구는 하지 마라.”“제가 말한 건 임남을 바로 풀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아이가 괜찮은지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아버지와 한 번 만날 기회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실험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프레드 뿐이기 때문입니다.” 소은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아니면 주효정을 믿으실 건가요?”“나는... 아무도 믿지 않아.” 여왕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휠체어를 돌렸다.“여왕 폐하께서 이 실험에 집착하고 계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요? 세상을 둘러보고 싶다거나,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신가요? 수십 년간 왕좌에 오르셨지만, 정말로 아직도 그 삶이 좋으신가요? 언제나 긴장하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디는 고단한 나날, 정말 아직도 벗어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소은은 여왕의 등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여왕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무릎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녀는 시선을 다리로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걷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잊어버렸어.”여왕은 오랜 세월 동안 다리를 쓰지 않았고,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일어설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악화되었고 이제는 아예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휠체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소은이 ‘세상을 둘러보라’는 말을 꺼내자 가슴이 아팠다.“만약... 폐하께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면요? 제가 다시 걷게 해드린다면요?” 소은은 조용히 여왕의 뒤에 서서 말했다.여왕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휠체어를 돌려 소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말이냐?” 여왕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희망과 깊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소은은 대답 대신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여왕의 다리로 내리고, 천천히 다가가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왕의 무릎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여왕은 살짝 몸을 떨었다. 사실, 그녀의 다리는 거의 완전히 감각을 잃은 상태라서 소은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아마도 너무나 간절히 다시 일어서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소은은 아무 말 없이 여왕의
“맞아요, 임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폐하 때문이기도 합니다.” 소은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정말로 떠나버렸다면, 가장 초조해지는 사람은 사실 여왕 폐하 아닐까요?”여왕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초조해질 이유가 뭐지? 어차피 내 손엔 네 약점이 있잖아. 너를 다시 잡아오는 것도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고.”“약점이요? 임남 말씀이신가요?” 소은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잊지 마세요, 임남이는 제 아들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제 친자식이 셋이나 있어요. 만약 제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남을 포기해 제 아이들을 지키려 한다면, 그 약점이 과연 제게 약점이 맞을까요?”여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에겐 목숨을 걸고서라도 구하려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만약 임상언이 폐하께 끝까지 맞서기로 결심한다면...” “폐하께서야 높은 자리에 있으니 이런 평범한 상인을 하찮게 여기실 수 있지만, 임상언 씨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임상언 씨의 사업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어요. 임상언 씨가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어떤 일도 할 수 있겠죠. 혹시라도 바깥에 소문이 퍼져 폐하와 Y국의 명망이 손상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너...” 여왕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반박할 말이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여왕이 화가 난 것을 보고, 소은은 한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화내지 마세요. 제가 돌아온 건 폐하를 자극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최선의 방향을 찾고자 돌아온 거예요. 사실 폐하께서 H국에 오신 일이 밝혀진 건 아니지만, 꽤 오랜 시간 H국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정말로 H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여왕은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폐하의 체면을 살려드린 겁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이곳에서 계속 머무르시며 혹여 무리수를 두신다면, 얼마나 더 체류하실 수 있을까요? Y국도 계속해서
릭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여왕은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소은을 데려와. 어디 한번 무슨 변명을 할지 들어보자. 또 어떤 이야기를 꾸며낼지 궁금하네.” 여왕은 휠체어를 살짝 돌려 더 이상 모니터를 보지 않았다.“여왕 폐하?” 릭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한소은이 거짓말을 할 걸 아시면서도 굳이 왜...” 그러나 여왕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듣고 싶어!” 이 한마디에 릭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곧장 소은이 있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소은이 정말로 잠이 들려고 하던 순간,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녀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문이 열리면서 릭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왕께서 한소은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소은은 차분한 표정으로 릭을 쳐다보았다. 마치 모든 상황을 예견한 듯 고요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임상언은 소은보다 먼저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문에 도착하자마자 릭이 손을 들어 그의 앞을 막았다. “그쪽은 남아 계시죠.” “뭐? 우리 둘은 같이 온 거야!” 임상언은 소은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릭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왕 폐하께서 그쪽을 부르지 않았으니 여기 남으시죠.” 릭은 더 이상 임상언에게 말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소은은 임상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절 기다리고 있어요.” 임상언은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며 그녀가 릭과 함께 방을 나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조심해요.” 임상언은 소은을 향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소은은 미소를 지어 그에게 답했고, 릭을 따라 여왕의 방으로 향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걷는 그녀는 곧 여왕의 방에 도착했다. 릭이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왕 폐하, 데려왔습니다
소은이 임상언을 데리고 대사관에 도착하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한 사람이 서둘러 소식을 알리러 가더니, 이내 주변 구석구석에서 누군가가 몰래 그들을 엿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곧이어, 소은이 잘 알고 있는 여왕의 측근 몇 명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와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소은과 임상언의 몸을 샅샅이 검사하며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철저한 검사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경계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왕을 만나지 못했고, 한적하고 깊숙한 방에 대기하도록 배정받았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곳은 소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익숙한 것은 이 장소였지만, 낯선 것은 지금의 마음가짐이었다. 예전에는 이곳이 싫고 불쾌하기만 했으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임무와 사명을 가지고 돌아왔고, 그녀의 목표는 단순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닌, 중요한 일을 완수하고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었다.반면, 임상언은 눈에 띄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두 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놓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다리를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소은은 그의 초조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임남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여기까지 왔으니 임남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긴장 좀 풀어요.” 소은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상언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땅에 꾹 눌러 다리를 멈췄다. 겉으로는 조금 안정된 듯 보였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긴장감이 가득했고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이 그의 불안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소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여왕을 만나러 오라는 사람은커녕 상황을 확인하러 오는 사람조차 없었다. 긴장했던 임상언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무슨 의도인 거죠? 왜 아직
“제발 부탁이에요. 안에서는 소은 씨 말만 따를게요. 소은 씨가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절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임상언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소은에게 간청했다. 자존심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아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그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했다. 소은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순간, 임상언은 이미 마음을 굳혔다.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같이 가면 의심을 받거나 제지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임상언은 계속 설득을 이어갔다. “임남이 그 안에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잖아요. 제가 아들을 만나고 구하려고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이해될 수 있는 일이죠. 그러니 제가 가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에요.” 긴 침묵 끝에, 소은이 입을 열었다. “임상언 씨 말이 맞아요. 전 동의합니다.” 소은은 말을 마치고 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원청현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동의하지.” 잠시 침묵하던 진정기 역시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원철수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고 손을 펼쳤다. “모두 동의했는데 내가 뭐라고 반대하겠어. 나도 찬성이야.” 사실 원철수의 의견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임상언에게 지지를 표현하는 의미였다. 임상언은 눈시울이 붉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들 고마워요.” “이게 뭔 감사할 일이라고. 어쨌든 안에 들어가면 절대 신중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네 입으로 한 말 반드시 지켜!” 원철수는 그의 결심을 칭찬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원철수는 속으로 임상언의 결단에 감탄했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는 분명 최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