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지금까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양준회는 마치 갑자기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동남아에서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남서훈은 걱정되어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엄마.”양나나가 서재로 뛰어와 남서훈 앞에 서더니 작은 머리를 쳐들고 검은 두 눈을 깜빡이며 남서훈에게 물었다.“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며칠 동안 정신이 계속 딴 데 팔려있던데. 혹시 아빠 보고 싶어서 그래요?”남서훈은 양나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응, 아빠 보고 싶어.”“나나도 아빠 보고 싶어요.”양준회는 지금까지 양나나를 직접 키웠다. 전에 남서훈을 찾으러 M 국에 갔을 때 말고는 지금처럼 출장 간 지 보름이나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은 적은 없었다.그리고 이삼일에 한 번 영상통화를 하거나 양나나에게 문자를 보내는 좋은 습관이 이었다. 연락이 오랜 시간 끊긴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양나나도 걱정하기 시작했다.“엄마, 아빠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죠? 왜 우리한테 전화 안 해요?”남서훈은 양나나가 걱정하는 걸 원치 않아 웃으며 말했다.“그런 거 아니야. 아빠가 너무 바쁘셔서 전화할 시간이 없어서 그래.”‘절대 그런 거 아니야. 예전에는 아무리 바빠도 전화했었어. 게다가 이젠 가장 사랑하는 엄마도 생겼는데 나한테 연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엄마에게까지 하지 않을 리는 없어. 그러니까... 아빠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해. 어쩌면 더 위험한 일을 당했을지도 몰라. 그런데 엄마는 내가 걱정하는 걸 싫어하니까 그냥 모른 척해야겠어.’그때 남기준이 헐레벌떡 뛰어왔다.“주인님, 찾았...”양나나도 옆에 있자 남기준은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남서훈이 양나나에게 남기준과 따로 할 얘기가 있으니까 잠깐 나가서 놀라고 얘기하려던 그때 눈치 빠른 양나나가 먼저 말했다.“엄마, 기준 삼촌이랑 할 얘기 있는 거 맞죠? 먼저 밖에서 놀다가 이따가 들어올게요.”남서훈이 대답했다.“그래.”양나나는 바로 서재를 뛰쳐나가 문을 닫았다. 남서훈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
그녀는 휘둥그레진 까만 눈동자로 남기준을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이건 명령이야! 이번에 나 혼자서 동남아로 갈 거야. 이제 준회 씨의 사람들과 만날 거야. 너는 여기에 남아서 할아버지와 나나를 잘 보살펴줘.”남기준은 순순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네!”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지금까지 둘의 대화를 양나나가 전부 들었다는 것을. 물론 양나나가 문밖에서 몰래 들은 것은 아닐 것이다. 양나나가 문 앞에서 들었다면 청각이 예민한 남기준과 남서훈이 모를 수가 없을 테니.이 서재에서 양나나가 모든 대화를 엿듣게 된 것은 양준회와 양나나가 전에 숨바꼭질을 할 때에 숨겨놓은 장난감 도청 장치 덕분이었다.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어서 양준회와 양나나도 남서훈에게 얘기하지 못했었다. 비록 장난감 도청 장치지만 기능은 나쁘지 않았다. 몇 년 전에 장착했지만 아직도 멀쩡히 작동하고 있었던 덕분에 모든 대화 내용이 양나나에게 전달되었다.순간, 양준회가 중독되었다는 소식에 양나나는 눈시울이 붉어 지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자, 까만 눈동자에서는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 같았다.남서훈이 서재에서 나와 양나나를 찾아갔을 때, 그녀는 이미 방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그녀는 양나나에게로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상냥하고도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나나야, 아빠 쪽에서 조금 일이 생겼어. 그래서 엄마가 아무래도 가봐야 할 것 같아.”“나나가 기준 삼촌이랑 잠깐 할아버지 집에 가 있으면 안 될까?”양나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그래요!”그리고 양나나와 남기준은 남서훈을 배웅해 주면서 비행기에 타고 날아가는 모습까지 지켜보았다.“아가씨, 이제 가시죠.”“네.”양나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떠났고 남기준과 차에 앉고 나서야 그에게 물었다.“기준 삼촌, 할아버지 집 말고 먼저 우리집에 가요. 챙겨올 물건이 있어요.”남기준은 별다른 의심 없이 차를 몰고 양나나를 별장까지 데려다주었다.이윽
양나나는 고개를 들고 남기준을 쳐다보며 물었다. “기준 삼촌, 어린 시절 엄마랑 비교하면 저도 그럴듯하니 멋있어 보이지 않아요?”“네!”남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면 양나나의 오관은 양준회를 많이 닮아 있었고 또래 아이들에 비해 키도 훨씬 컸기에 지금 남자아이와 같은 모습을 한 양나나는 어린 시절 남서훈과 훨씬 닮아 있었다.“갑시다.”양나나와 남기준은 함께 출발했다. 그들은 남서훈이 떠난 그날 밤, 비행기를 타고 X국으로 떠났다.X 국.남서훈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 되었다. 비행기에서 빠르게 내린 그녀는 자신을 마중 나온 남자 림평을 만났다. 서른 살쯤 되는 그 남자는 양준회의 부하이자 X 국의 책임자였다. 이전의 그는 양준회와 마찬가지로 한 명의 우수한 용병이었다. 용병으로 있을 때 그는 양준회의 오른팔이고 왼팔이었으며 능력 또한 뛰어났다.양준회가 용병조직에서 물러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림평 역시 부상을 입어 조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 이후로 그는 여기 X 국에 남아 태운 그룹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남 선생님.”림평의 태도는 무척 공손했다.그와 남서훈은 공항 밖으로 나가 차에 앉았다.림평이 차를 운전했고 그는 액셀을 밟았다. 평범해 보이던 까만색 자가용차는 마치 어둠 속을 달리는 치타마냥 눈 깜짝할 사이에 공항을 빠져나갔다. 남서훈은 뒷자리에 앉아있었다. 림평은 한편으로 운전하면서, 한편으로 이곳에 있었던 모든 상황을 상사하게 설명했다. 또한 방금 조사해 낸 모든 것들까지 전부 남서훈에게 보고했다. 그뿐만 아니라 X 국에 있는 태운 그룹 지사가 초기에 위험에 처했을 때, 양준회가 급히 달려와 처리하는 와중에 X 국의 아라벨라 가문의 마샤 아가씨는 그에게 집착하면서 미친 듯이 사랑을 표현했다는 얘기도 전했다. 양준회는 마샤 아라벨라에 대해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그녀의 집착과 사랑에도 양준회는 매번 냉정하게 거절했다. 심지어 한번은, 그녀의 체면 따위를 고려하지 않고 곧바로 마샤를 밖으로 내치기까지
남자는 안목이 없는 것인지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몇 번이고 거절하면서 자기 여인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했다.여기까지 생각한 마샤는 화가 치밀어 미칠 것만 같았다! “허!”마샤는 차갑게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남서훈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질투심을 제외하고도 이 바보 같은 여자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니까 이 멍청한 여자가 지금 양준회를 위해 일부러 나를 찾아온 건가?역시! 남서훈이 걸어왔다. 그녀는 까맣고도 여우 같은 눈빛으로 마샤를 쳐다보며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듣자 하니 내 남편이 X 국에 온 이후로, 당신이 무척이나 따라다녔다고 하던데요. 거기다 마샤 아가씨가 사랑 때문에 원한을 품었다고! 내 남편의 마음을 얻지 못하게 되자, 음모를 꾸며 비겁하게 해치기까지! 풍운파와 손을 잡고 우리 남편을 잡아갔다지요. 그러니 내가 묻고 싶은 건, 우리 남편 지금 어디 있어요?”남서훈은 목적이 명확했기 때문에 그녀는 직설적으로 물었다.그녀의 말에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경악했다! 아라벨라 가문은 X 국에서는 명망 높은 가문이자 권세 있는 집안으로 올바른 길을 향해 가고 있었다. X 국에서 가장 큰 검은 세력과 연결고리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사적인 일이니 대대적으로 떠벌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 이렇듯 담대하게 감히 면전에서 이런 얘기들을 꺼낼 줄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마샤는 남서훈이 멍청한 짓을 골라 한다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전 당신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는데요? 당신 남편이 어디 있는지는 아내라는 사람이 더 잘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왜 여기까지 와서 나에게 묻는 거죠?”남서훈은 놀랄 만큼 싸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러고는 까만 눈동자로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듣자 하니 오늘 용준 씨도 마샤 아가씨의 생일파티에 참석한다고 하던데요! 혹시 지금 여
“당분간 목숨은 붙어 있을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길어서 3일 정도는 살아 있을 거니까!”“3일 동안은 몸의 고름들이 점점 커지고 몸에는 지독한 악취가 서서히 퍼질 거예요! 두 눈은 실명이 되어가면서 점차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겠죠!”“거기다 온몸의 모든 뼈들이 부러지는 고통에 실제로 죽음보다 더 한 고통을 체감하게 될걸요? 물론 그대로 죽지는 않을 테지만요!”남서훈은 마샤가 자살하지 않는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음보다 몇백 배, 몇천 배의 고통을 주겠노라고 알려주었다. 그녀는 마샤가 절대로 자살하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남서훈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아무리 살려고 발버둥 쳐도 소용없어요! 해독제를 먹지 않는다면 3일 후면 아무리 살고 싶어도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거예요!”마샤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공포감에 놀란 눈으로 남서훈을 바라보았다.“도대체 어쩌려고 이러는 거죠?”“제 남편에게 독을 쓰고 해치기까지 했으니,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하세요. 이제는 제가 직접 당신을 위해 만든 독을 느껴보세요. 당신에게 시간을 드릴게요.”“3일, 제 남편을 제 곁으로 데려오면 해독제를 드리죠.”“그게 아니면...”남서훈은 그 뒤의 말들을 말하지 않았다. 물론 말하지 않아도 모두 다 알고 있었다.이때, 마샤의 부모님도 그녀의 상황을 접하게 되어 이쪽으로 오고 있는 길이었다.남자 몇 명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남서훈이 주위를 둘러보니, 금속 가면을 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소식이 잘못된 걸까? 오늘 마샤 아가씨의 생일연회에 용준이 나타나지 않은 걸까?“마샤...”마샤의 아버지가 그녀를 불렀다.딸의 얼굴과 몸의 곳곳에 고름이 생긴 모습을 보고 너무도 놀라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심지어 마샤의 몸에서 나는 악취로 인해 억지로 움직이려던 발마저 떨어지지 않았다.“아빠, 엄마.”마샤는 그들을 부르면서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그러고는 벌어진 모든 상황과 남서훈이 독으로 그녀를 위협한 것까지 말했다.
남기준은 양나나의 부탁으로 마샤 아가씨의 생일파티 장소를 알아냈다. 그렇게 둘은 연회장에 진입하게 된 것이다.“이제 가요.”양나나는 남기준과 함께 자리를 떴다.두 사람은 연호장을 빠져나와 택시를 불러 탔다. 양나나는 차에 앉자마자 자랑스럽게 말했다.“기준 삼촌, 방금 엄마가 너무 멋있지 않았어요? 놀라운 실력이죠?”남기준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네.”그러자 양나나는 어깨가 으쓱해서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마샤 아가씨는 생긴 것도 추한데 성격까지 악독하던데요! 감히 아빠에게 접근해서 다치게 하다니, 엄마가 그녀에게 벌을 내린 것도 마땅한 것 같아요.”“아무튼 순순히 아빠를 내놓는 게 좋을 거예요.”“아니라면...” 양나나는 서서히 눈을 가다듬다가 어느새 날카롭게 서늘한 분위기로 변했다.꼭 남서훈을 닮은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직은 아이여서 기세가 그녀만큼은 못되었다. 그저 차갑게 말을 이어갔다.“흥! 저도 엄마도 절대로 그 여자를 순순히 놔주지 않을 거예요!”“작은 아가씨, 지금 어디로 갈까요?”남기준은 묻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이제 주인님이 계획이 있으시고 마샤 아가씨도 벌을 받고 있으니 아라발라 가문도 남기준 씨를 주인님에게 모셔 오실 겁니다. 아가씨, 아니면 저희도 바로 주인님을 찾아가죠?”주인님의 명령은 그가 운성에 남아 증조할아버지와 작은 아가씨를 돌보라는 것이었다.그러나 현재, 남기준은 작은 아가씨의 명령대로 아가씨를 X 국에 데려왔다. 이미 주인님의 명령을 어긴 셈이다. 하지만 주인님의 처벌을 받더라도 지금은 주인님과 작은 아가씨를 만나게 하고 싶었다. 그래야 그가 주인님과 작은 아가씨를 함께 보호할 수 있었다.아무래도 혼자서 아가씨를 돌보는 방법보다는 더 나은 선택이었다. 만약 예기치 못한 사고라도 당하면 주인님 앞에서 목숨을 부지 못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하지만 양나나의 의지는 너무도 확고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엄마 찾으러 가지 않을 거예요.”남기준의 미간은 순간 찌푸려졌고 양나
다른 거지 아이들도 따라 불렀다.“대장님.”“대장님.”양나나는 손에 있던 떡과 만두를 전부 그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싸우던 거지 아이들과 친구가 되었고 그들의 대장이 되었다. 그들은 떡과 만두를 먹으면서 양나나를 둘러싸고 앉아 각종 아첨을 떨기 시작했다. 그 뒤 양나나는 그들을 데리고 몇몇 가게 주인에게서 먹을 것을 얻어오는 데 성공했다. 양나나는 얻어 온 음식을 하나도 먹지 않고 전부 거지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밤이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거지 아이들은 배불리 먹고 양나나와 함께 그들의 근거지로 돌아갔다. 그곳은 황폐된 가택이며 귀신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하여 여기에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고 단지 굶어 죽는 것이 제일 두려운 거지 아이들만 모여서 살고 있었다. 배부르게 먹은 뒤 다들 누워 쉬고 있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폐가의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쉬고 있던 거지 아이들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가 금방 다시 드러누웠다. 이 정도로 놀랄 아이들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 무리의 어른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들의 목표는 명확하였고 양나나만 콕 집어 잡아갔다. 나서서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고 양나나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아무래도 여기에 있는 거지 아이들은 전부 아이들이었고 어른들과 대적하여 싸울 상황이 아니다. 그리고 양나나는 그저 그들에게 음식을 나눠줬기에 거지 아이들의 대장이 된 것이지 거지 아이들과 친분도 별로 없었다. 게다가 양나나의 목적이 바로 잡혀가는 것이었다. 양나나가 잡혀간 뒤 양나나를 대장으로 인정했던 거지 아이들이 한곳에 모였다. 그중 한 아이가 눈매가 무서운 남자아이에게 물었다. “대장, 우리 새 대장을 상관 안 해도 되는 건가요?”남자아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는 방금 자신에게 물음을 던진 거지 아이에게 되물었다.“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이 사람들이 딱 보기에도 재주가 있고 영특해 보이는 거
세돌이는 태어나서부터 이름이 없었다. 집에 오래된 하인이 아이를 가엽게 여겨 할머니한테로 보내줬고 할머니가 남들 모르게 키웠다. 할머니는 자애로우셨으나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다. 할머니는 아빠가 이제 생각이 바뀌면 아빠에게 부탁하여 이름을 지어 받으라고 했다. 평소 할머니는 형제 순위에 따라 아이를 세돌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할머니가 갑자기 중독되면서 아이의 존재가 발각되었다. 아빠는 다시 아이를 내쫓아버렸고 그 아이를 돌봐주던 집의 오래된 하인도 몽둥이에 맞아 죽었다. 비록 남자아이의 이름이 세돌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지만 그래도 양나나는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세돌아, 우리가 먼저 힘을 합쳐 싸우는 것이 어때? 힘을 합쳐 여기에 있는 마스티프부터 먼저 죽여버리자.”이 네 마리의 마스티프는 보기만 해도 엄청 사나워 보였다. 그리고 양나나는 이미 규율을 알아냈다. 이 네 마리의 마스티프가 죽으면 오늘의 격투는 끝난다.“쟤들은 협력을 안 할 거야.”세돌이는 냉담하게 말했다.“이 중에 많은 사람들은 진짜로 풍운파의 후계자가 되어 싶어 해. 그렇게라도 자신의 운명을 바꿔보려고. 이것을 위해서라면 저 애들은 그 어떤 대가도 안 두려워해. 그리고 오늘 우리가 진짜로 힘을 합쳐 이 마스티프들을 죽여버린다 쳐도 내일이면 두 배가 넘는 마스티프가 들어올 거야.”하여 그들은 단독 작전을 벌이든가 아니면 두세 사람씩 힘을 합쳐 한편으로는 격투를 벌이면서 한편으로는 수시로 덮쳐들어 뜯어 죽일 것만 같은 마스티프를 대처할 방법을 강구했다. 세돌이의 싸움 실력이 상당하여 격투장의 적지 않은 아이들이 무서워하고 쉽게 건드리지 못했다. 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제일 먼저 세돌이를 목표로 정하여 먼저 세돌이를 제거하고 나중에 차례대로 공격하기로 했다. 어떤 아이가 세돌이와 양나나를 향하여 돌진해 왔다. 하지만 의외로 보기에는 연약한 양나나가 싸움에서는 엄청 이악스러워 어느새 세돌이의 조력자가 되어있었다. 그러다 보니 양나나도 격투장에서는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는
남서훈은 싱긋 웃었다.아직 임신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맥으로 정확히 짚어 낼 순 없었지만 느낌은...“아마 남동생일 거야.”“아... 남동생...”양나나는 눈을 굴리더니 남서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남동생도 좋은 것 같아요. 동생 태어나면 저랑 엄마가 동생한테 의술도 가르쳐주고 아빠랑 사업하는 것도 배우고요. 그리고 남자애는 너무 응석 받아줄 필요도 없고 내가 맘껏 부려 먹을 수 있잖아요.”자기 뒤꽁무니를 쫄랑쫄랑 따라다니며 누나, 누나 하고 부르는 장면을 상상하니 양나나는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어떻게 생긴 남동생이 엄마 배 속에서 태어날까, 양나나도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그러나 남서훈이 임신 다섯 달째로 접어드는 어느 날, 양나나는 실종됐다.양준회와 남서훈은 매일 안절부절못하여 속이 타들어 갔다.둘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세력을 동원해 전 세계 각 곳을 샅샅이 뒤졌지만 여전히 양나나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양나나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그때 양나나는 이미 8살이었다.남서훈은 딸을 찾지 못해 날마다 눈물로 얼굴을 적셨다. 그녀는 점점 야위어갔다.그걸 보는 양준회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는 아내를 꼭 끌어안고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나는 똑똑한 아이야. 당신이 의술과 독 쓰는 법도 잘 가르쳐줬으니까 별일 없을 거야. 나나는 너와 내가 낳은 딸이야. 전에 풍운파에 혼자 몰래 들어가서도 그 안을 마구 헤집고 다녔잖아.”아무튼 그는 양나나가 어디에 가서 어떠한 상황에 부딪히던 자신을 잘 보호할 거라고, 아무 일 없이 잘 살아 있을 거라고 남서훈을 위로했다.남서훈도 굳게 믿고 있었다. 양나나의 시체를 보게 되지 않는 한 그들의 딸은 세상 어딘가에 꼭 살아있을 거라고.그 후 넉 달이 지났다. 9달이 된 배는 불룩하게 튀어나왔다.양나나는 아직도 찾지 못했고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그러다 남서훈은 아들을 낳았다. 강보에 싸여 품에 안겨있는 아들을 보며 남서훈은 양나나를 그리워했다.“나나야,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네 뒤꽁무
그리고 바로 그날 오후.양준회와 남서훈, 그리고 백나연과 성진훤, 이렇게 네 사람은 백무산을 찾아갔다.그를 만나자마자 양준회와 성진훤은 백무산한테 사과부터 했다.어리둥절한 백무산은 그들이 왜 갑자기 찾아와서 사과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 후 양준회는 남서훈의 어깨를 와락 감싸안았고 성진훤도 보란 듯이 백나연의 손을 꼭 잡았다. 성진훤은 원래 양준회처럼 백나연을 확 끌어안고 싶었지만 미래 장인어른이 될 사람 앞이라 행동을 조심스럽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여 손만 잡았다.백무산은 더 혼란스럽고 얼떨떨해졌다.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그는 눈알이 튀어져 나올 듯하게 그들 넷을 번갈아 쳐다봤다.그때 양준회가 입을 열었다.“어르신, 우리 서훈이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입니다. 남씨 집안의 특수한 사정으로 어릴 때부터 남장을 했던 것이고, 백나연 씨와의 혼약도 그저 소동극이었습니다. 이 일은 서훈이한테 책임 묻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노여움이 있으시면 저한테 푸세요.”그 말에 백무산은 눈살을 찌푸렸다.남서훈이 여자라니... 어떻게 그런 일이?여자가 그의 딸과 약혼했다니,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었다.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란 말인가.백무산은 불같이 화를 냈다.그러자 백나연이 나섰다.“아빠, 이 일은 서훈이 탓이 아니에요, 제가, 제가 꼭 도와달라고 했어요.”“뭐야? 널 도와줘?”“네.”백나연이 설명했다,“아빠랑 오빠가 자꾸 소개팅 주선하는 바람에 제가 너무 골치 아파서 서훈이한테 도와달라고 부탁한 거예요, 나랑 약혼하자고. 그럼 아빠랑 오빠가 나한테 선 자리를 더는 강요 안 할 거 아니에요. 서훈이는 싫다고 했는데 내가 억지 써서 해주기로 한 거예요.”백나연은 자기 잘못이라고 매우 강조했다.그녀의 눈빛에 아픔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전 그때 결혼할 생각이 없었어요... 그리고 저랑 서훈이는 서로 약속했어요. 누가 먼저 운명의 상대를 만나게 되든, 그때 되면 파혼하기로요. 절대 서로의 앞날을 방해하지 않기로 했어요. 이제
그 순간 용준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한 번 떨어지기 시작한 눈물은 그칠 줄을 모르고 펑펑 쏟아졌다.이게 얼마 만인가.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고 싶은 생각을 항상 했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그는 오늘 끝내 그녀를 안을 수 있었다. 팔을 뻗어 그녀를 껴안고 얼굴을 그녀의 어깨에 파묻은 채 용준은 또 한참을 울었다.예서는 그가 평생 사랑한 유일한 여자였다.그는 품속에 있는 그녀를 부드럽고 진실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난 네가 고마워. 넌 너무 용감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용감해. 옛날 일은 이미 다 지나갔어. 넌 이것만 기억해. 난 널 사랑하고, 네가 있어야만 내가 살 수 있어. 네가 있으니까 내가 괴물로 변하지 않은 거야. 아니면 난 모든 걸 다 망가뜨렸을 거야. 스스로도 혐오하는 그런 나쁜 인간으로 돼버렸을 거야.”예서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도 알고 있었다. 남자가 하려는 말이 뭔지 그녀는 모두 알고 있었다.이날, 둘은 아주 오랫동안 얘기를 나눴다.예서는 더는 용준을 불편해하지 않았다. 용준이 있으므로 하여 그녀는 더 빨리 회복될 것이었다.그렇게 예서가 하루하루 나아지고 있을 때. 남서훈과 양나나는 한 번 나가 돌아다니기로 했다.한 거리의 상가 앞을 지나가고 있는데, 남자애 몇 명이 갑자기 튀어나와 양나나를 에워쌌다.그들은 매우 들뜬 소리로 말했다.“대장! 살아 있었어요?”“너무 잘 됐어요!”“대장, 대장을 그 사람들이 데려간 후로 우린 계속 대장의 소식을 기다렸어요. 대장도 그 애들처럼 상처투성이가 돼서 돌아오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다고요.”“지금은 어떤 상황이에요? 대장이 후계자가 된 거예요?”양나나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 라고 대답했다.그리고 주변을 둘러싼 남자애들한테 말했다.“난 후계자 되는 것에 관심 없어. 풍운파에 지금 남아있는 건 의술을 배우기 위해서야.”양나나는 시선을 남서훈한테 향하며 그들한테 남서훈을 소개했다.“이분이 내 스승님이야, 우리 스승님 엄청 대단해!”그날, 양나나는 그
지난 날에 발생한 그 끔찍한 과거를 스스로 입에 올리는 용준은 피가 흘러나올 듯이 눈이 시뻘겋게 물들었고 감정이 폭발할 한계치까지 다다랐다.그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몇 분 후에야 그는 비로소 다시 입을 열었다.“그놈들은 죄다 죽여버려야 할 놈들이에요. 예서가 이쁘니까, 내 앞에서 예서를... 그때 예서는 이미 내 아이를 임신했는데...”용준의 온몸에서 난폭한 기운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돌아서서 주먹으로 나무를 세게 한 방 내리쳤다. 그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낙엽이 우수수 떨어졌다.그 큰 나무가 흔들릴 정도면 얼마나 센 펀치를 날렸는지 알 수 있었다.그의 손마디도 살이 찢겨나가 새빨간 피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는 감각을 느낄 수 없는 사람처럼 상처에 무덤덤했다. 아마도 손보다 마음이 더 아팠을 터였다.용준은 그때 일만 생각하면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심장이 뜯겨나가는 것처럼 아팠다. 예서가 피투성이가 된 채 텅 빈 눈으로 누더기 인형처럼 맥없이 쓰러져서 누워있던 참혹한 장면만 머릿속에 떠올리면 그놈들을 무참하게 도륙을 내고 싶었다.그리고 그는 그렇게 하였다.풍운파의 보스가 된 후 첫 번째로 한 일이 바로 예서의 복수를 하는 것이었다.그놈들의 범죄증거를 전부 찾아내 한 명도 빠짐없이 직접 처단했다.그때 그들은 무릎을 꿇고 울며불며 용서를 빌었다. 막다른 길에 몰려 살려고 해도 안 되고 죽으려고 해도 죽지 못할 때, 그들은 찌질이같이 눈물 콧물을 쥐어짜며 애원했다. 제발 살려달라고, 잘못했다고.정작 그들은 용준이나 예서한테 그런 자비를 베푼 적이 없는데 말이다.용준의 목소리는 점점 차가워졌다.“그것들이 나와 예서의 모든 것을 망치고 날 시궁창에 몰아넣었죠. 여전히 난 이렇게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생지옥에서 살고 있어요. 그것들은 백번 죽어도 마땅해요!”그러나 그놈들이 죽는다고 해서 상처가 아무는 것은 아니었다.용준은 피로 물든 주먹을 으스러지게 잡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들은 예서가 그들이 한
용준은 원래 정직한 사람이었고, 금호의 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그는 어둠이 없는 밝은 햇빛 아래에서 사는 반듯한 사람이었다.그러나 일부 국제조직에서는 용준을 불안하게 여겼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고, 심지어 그가 의심되어 오랫동안 그에게 전자발찌를 채웠다.아무 일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그는 범죄자 취급을 당했고, 그리하여 생활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더더욱 생각지도 못한 건, 그 당시 그와 깊은 사랑에 빠져있었던 여자친구마저 누구한테 몹쓸 짓을 당하게 된 것이다.그러므로 용준이 점점 나쁘게 변하여 나중에 어떤 일을 저지르게 되었던, 모두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요 몇 년 동안 풍운파는 용준의 관리하에 동남아에서 제일 큰 폭력조직으로 성장하였고, 닥치는 대로 무슨 일이나 다 저지르는 편이었지만 딱 한 가지 철칙이 있었다. 그건 바로 노약자와 여자, 아이들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거였다.의리도 지켰다.하지만...“그건 중요하지 않아요.”남서훈이 말했다.“이 세상은 원래 흑과 백으로 나뉘는 게 아니니깐요. 동남아는 원래 상황이 어수선하잖아요. 무장세력과 폭력조직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일시적으로 바꿀 수도 없어요. 오히려 풍운파와 같은 조직이 있다는 게 더 도움이 될지도 몰라요.”양준회가 그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어떤 측면으로 보면 용준은 꽤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둘은 원수지간이다. 양준회가 그의 아버지를 죽였다. 비록 지금까지는 아무 짓을 안 했어도, 또 그가 원래 정직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풍운파를 이렇게 여러 해 동안 다스린 용준이 지금은 어떤 사람인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그리하여 양준회는 안심할 수 없었다. 여전히 남서훈과 같이 풍운파를 즉시 떠나려고 했다.“하지만 나나도 여기 있어요.”남서훈이 예상치도 못한 폭탄을 터트렸다. 양준회는 깜짝 놀랐다.양나나가 여기에 있다는 건 상상도 못 했다.하지만 놀란 것도 잠시, 그는 바로 말했다.“그럼 나나도 같이 떠나면 돼.”갇힌 두 달
강하영이 부케를 내던지는 일순간 우양주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부케를 향해 몸을 날렸다. 공중에서 부케를 잽싸게 낚아채는 그의 모습이 정지화면인 양 사람들의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부케를 손에 쥔 그다음 순간, 그는 부케와 함께 바다에 떨어졌다.모두가 경악했다.강하영은 크루즈 난간 쪽으로 달려가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남자를 보며 입을 떡 벌리고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선원들이 즉시 튜브를 던졌고, 또 어떤 사람들은 즉시 뛰어내려 구조하려 했지만 강주환이 그들을 말렸다.왜 구하지 말라는 건지 이해 안 된다는 듯한 눈빛으로 윤성아는 강주환을 쳐다봤다.그러다 팔로 물살을 가르며 바다에 둥둥 떠 있는 우양주가 크루즈 위에 있는 강하영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치는 걸 듣고 왜 그러는지 알 것만 같았다.“여보, 어쨌든 내가 부케 받았으니까 당신 나랑 결혼식 치러야 돼요! 안 그러면...”그 뒤엔 위협적인 말이 따라야 하는데 우양주도 무엇으로 강하영을 협박할 수 있을지 몰랐다. 남은 건 자신의 이 몸뚱이 하나뿐인데...“안 그러면 나 안 올라갈 거야. 여기 바다에 계속 있을 거야, 결혼식도 못 하는데 그냥 빠져 죽지 뭐.”강하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바다에 빠진 남자를 까만 눈동자로 차분하게 내려다보며 끝내 입을 열었다.“빠져 죽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 안 말려요.”“...”우양주는 서럽게 그녀를 쳐다봤다.역시나 아내는 매정했고 자신에 대해 애정이 없었다.그러나 그때 윤성아 곁에 서있는 강주환이 무덤덤하게 한마디 했다.“내 기억이 맞다면, 이 바다에 상어가 출몰한다고 했어요. 식인 상어.”강주환은 고개를 돌려 강하영한테 말했다. “지금 아직 상어가 오지 않아서 그렇지, 나타나기만 하면 한꺼번에 열 몇 마리씩 무리 지어서 나올 거예요. 그게 게네들 습성이라. 이야... 쟨 아마 그러면 뼛조각도 남지 않겠네.”“...”그 말에 강하영이 급해 났다. 말투도 전처럼 차분하고 담담하지 않았다.난간에 기대어 우양주를 향해 내리 소리 질렀다.“뭐
미리 준비한 축사를 울먹이며 끝까지 다 읽고는 원이림을 향해 볼멘소리를 했다.“너 이 놈 자식, 내가 죽을 때까지 네가 결혼하는 걸 못 보는 줄 알았다. 아이고... 드디어 결혼하는구나. 너도 이제 가정이 생겼어.”“너 똑바로 들어. 은진이한테 평생 잘 해줘야 돼, 아내한테 잘 하는 건 우리 집안 내력이야. 나도 네 엄마 말을 엄청 잘 들었어. 너도 똑같아, 알겠니? 오늘부터는 은진이한테 더 잘해야 돼, 말도 잘 듣고, 은진이부터 생각하고 배려해 주고. 은진이가 조금이라도 맘고생을 하게 되는 날엔 내가 너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알겠어?!”원이림은 새카만 눈동자로 여은진을 깊게, 애틋하게 들여다보며 그녀와 깍지를 낀 두 손에 힘을 더 주었다.“걱정 마세요. 난 평생 우리 여보 맘고생 안 시킬 거예요.”여보라는 호칭이 지금 이 시각부터 명실상부하게 되었다.원이림은 그녀의 손을 잡고 크루즈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그리고 미리 준비된 데이지 꽃을 바다로 뿌렸다. 하얀 꽃잎들이 파도에 실려 멀리 떠내려갔다.둘은 거기에 선 채 눈물을 머금고 울먹이며 말했다.“어머니, 아버지. 저 너무 행복해요. 우리 너무 행복해요.”결혼식의 마지막을 장식할 부케 토스하는 시간이 다가왔다.강주환과 윤성아, 그리고 나엽과 안효연은 모두 기혼자로서 나가지 않고 구경만 했다. 하객 중에 미혼인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다.우양주도 강하영의 손을 잡고 그리로 향했다.강하영은 몸을 뒤로 빼면서 말했다.“우린 결혼했는데 왜 부케를 받으러 가요? 다른 사람한테 갈 좋은 축복을 왜 우리끼리 받겠다고 달려들어요, 쓸데없이. 그렇게 할 일 없고 힘이 남아돌면 내가 다른 일 하게 해 줄게요.”“무슨 일?”강하영은 푸른 바다를 향해 눈을 힐끔 하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당신 수영 좋아하잖아요. 내가 엉덩이 확 걷어찰 테니까 바다로 들어가서 수영이나 할래요?”“...”저번에 강하영과 같이 수영하면서 그녀가 자신한테 새빨간 수영팬티를 사줘 창피를 당하고 나서부터 우양주는 수영하는
여은진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예쁘게 미소 지었다.“나 다 알아요.”지난 1년 동안 그가 어떻게 해왔는지 잘 아는 그녀는 더 이상의 맹세와 언약 같은 건 필요 없었다.“응!”여은진을 안은 채로 원이림은 그녀의 여린 입술에 쪽쪽거리며 뽀뽀를 했다.장내의 플래시 세례가 정신없이 터지는 가운데 그는 돌아서서 무대 아래에 앉아있는 모든 사람한테 당찬 목소리로 선포했다.“오늘 저의 이 행복한 순간을 지켜본 여기 계신 모든 증인 분들한테 제가 선물을 준비할 생각입니다. 나중에 저희 베린 그룹에 가셔서 선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 달 20일에 저와 은진이의 결혼식이 있을 예정이니 여러분들께서 모두 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여은진을 안고 시상대를 내려가려 했다.여은진이 내려달라고 했지만 그는 내려놓지 않았다. 그렇게 안은 채로 시상식장을 걸어 나와 차에 올라탔다.럭셔리한 롤스로이스가 천천히 내달리고 있었다.여은진은 아직도 그의 품에 안긴 채로 있었다.“이번 달 20일에 결혼한다고요? 그럼 열흘밖에 안 남았는데, 너무 촉박하지 않아요?”그녀가 눈을 들어 바라보며 물었다.“아니, 전혀.”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떨구며 원이림이 말했다.“시간이 모자라지만 않았으면 내일에라도 당장 결혼식 치르고 싶어.”반년이 넘는 동안, 그는 매일 결혼식에 관한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결혼반지, 웨딩드레스, 그리고 결혼에 필요한 모든 물품과 디테일한 사항들을 전부 준비하고 체크했다. 그녀가 결혼을 동의하는 그 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그리고 그 순간이 끝내 다가왔다.웨딩사진을 찍는 것 외에는 크게 시간을 들일 일도 없었다.다만 여은진이 임신했기 때문에 너무 빠듯하게 스케줄을 잡지 않고 싶었을 뿐이다.결혼식에 참석할 하객을 초대하는 일도 있긴 하지만 10일이면 충분했다.촉박하지 않을뿐더러 시간적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여보, 우리 지금 바로 혼인신고 하러 가.”원이림은 한시라도 더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기사한테 얘기하여 구청으로 가자
원이림은 금방 샤워를 마친 여은진한테로 다가가 그녀의 팔을 끌어당겨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다음에는 당연히 침대로 향했다.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수순을 밟아갔다.한창 격렬해지려던 찰나, 원이림은 짧게 비명을 질렀다. 크게 지르진 않았다. 본능적으로 소리를 내질렀지만 그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여은진이 알아차리지도 못한 새에 살에 푹 찔린 그 가는 물건을 빼내야겠다고 머릿속으로 빨리 반응했다.하지만 역시 늦었다.여은진이 몸을 일으켜 스탠드를 켰고, 어두웠던 방안은 환한 빛으로 채워졌다.이어 급히 그를 살피던 여은진은 원이림의 엉덩이에 바늘이 하나 꽂혀있는 걸 발견했다.짧고 가는 옷을 꿰맬 때 쓰는 그런 바늘이었다.여은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얼굴로 남자를 보며 물었다.“어떻게 바늘에 찔릴 수 있어요? 침대에 왜 바늘이...”“...”꽂힌 바늘을 빼며 원이림은 이야기를 얼버무렸다.“괜찮아, 그냥 바늘인데 뭐. 별로 아프지도 않아.”그러고는 또 다짜고짜 몸을 뒤집으며 여은진을 몸 아래로 깔았다.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손을 뻗어 스탠드를 끄고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탐했다. 잠깐 벌어진 에피소드를 그녀의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진행 중이었던 일을 마무리하려는 의지였다.하지만 여은진은 그의 키스를 받아내면서도 오후 그의 당황스러운 표정과 난데없이 침대에 나타난 바늘을 함께 떠올렸다. 정신을 쏙 빼놓으려는 지금의 행동도 분명 그것과 연관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잠깐만.”여은진은 원이림을 밀어내고 다시 한번 스탠드를 켰다.의심이 부풀어 오른 눈으로 빤히 그를 노려봤다. “똑바로 말해요. 아까 그 바늘로 수작 부린 거 맞죠? 말해요, 몇 개나 찔렀어요?”“...”끝내는 발각되었다. 원이림은 이실직고했다. 강주환이 원흉이라고, 그가 시켜서 했다고 불었다.“여보, 나 며칠 전에 운봉 비즈니스 회담에 참석했는데 거기서 강주환을 만났어. 그 자식이 날 비웃는 거야. 그리고 이렇게 하라고 아이디어를 내줬어. 바늘로 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