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서훈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양준회와 대화를 이어갔다.“지금 나연이와 아주 잘 지내고 있는데. 나연이를 배신하는 일은 저지르고 싶지 않아요!”양준회는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라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이때, 또 하나의 침이 그를 잠재울 혈 자리에 꽂혔다. 이윽고 양준회는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그대로 쓰러졌다. 남서훈은 양준회의 잘생긴 얼굴을 마주 보며 말했다.“미안해요.”남궁 집안의 그분은 오래전부터 남씨 가문을 벼르고 있었다. 언젠가는 남서훈이 여자라는 신분을 밝히기 위해! 심지어 1년 전에는 할아버지도 실종되다시피 자취를 감춰버렸다.때문에 이 모든 일들이 해결되기 전까지 그녀는 무조건 양준회와 거리를 두어야만했다!하지만 오늘 밤은 그저 그녀의 욕심이라고 해두자.마음 한구석의 애정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낳은 이 남자의 아이까지! 그렇게 그녀와 양준회, 그리고 이들의 딸까지, 오늘 밤, 이 작은 방에서 잠깐의 여유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사랑해.”남서훈은 속삭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입술에 살짝 입맞추고는 얼른 떼어냈다. 남자의 팔을 베고 누운 남서훈은 양나나를 꼭 끌어안으며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번졌다. 그렇게 남서훈도 눈을 감으면서 스르르 잠에 들었다.다음 날.양준회는 혼미한 정신으로 깨어났고 커다란 침대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오늘은 토요일, 양나나는 학교에 가지 않는다.남서훈이 양나나와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양준회는 약재 창고로 찾아왔지만, 주위에는 뜨거운 수증기로 가득 찼고 그 사이로 남서훈의 가녀린 뒷보습이 보였다.그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단번에 남서훈의 손목을 잡고 진귀한 약재가 가득한 선반 쪽으로 밀쳤다. 이윽고 커다란 그림자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양준회는 눈을 부릅뜨며 남서훈에게 물었다.“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한 것도 모자라 침으로 나를 기절시켜? 네가 감히? 응?”남서훈의 아름다운 두 눈이 남자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이게 놔요.”“안 놔!”양준회는
남서훈은 다급하게 말했다. 양준회의 안색이 점차 어두워졌다. 그의 주변공기는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고, 극도의 저기압 상태였다.“나를 위해 약을 제조했다?”양준회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눈보라가 몰아치듯 차가웠다.남서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잡아먹을 듯한 남자의 어두운 표정을 억지로 피하며 말했다. “양준회, 내가 당신을 위해 제조한 약을 먹으면, 당신은 아내를 맞이할 수 있다고! 나나에게 엄마를 찾아 줄 수도 있고.”“그래?”양준회의 목소리는 더더욱 낮아졌고 무서워졌다. 그는 남서훈의 턱을 들고는, 억지로 자신을 쳐다보게 했다. 양준회의 어두운 눈동자는 마치 폭풍우가 휘몰아칠 것만 같았다. 그는 남서훈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네가 만든 약이 효과가 있다고 확신해?”“확신해!”남서훈은 자신의 의술에 대해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었다. “허.”양준회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차갑게 웃어 보였다. 그는 남서훈을 보며 계속 말했다. “몸은 치료가 됐다고 쳐. 마음은?”그가 이미 매료되어 버린 마음은, 어떻게 치료하지?양준회는 남서훈을 불렀다. “작은삼촌!”한 쌍의 까만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렇게까지 번거로울 필요가 있을까? 내 몸을, 아무 여자나 다 만질 수 없는 것도 아니야!”남서훈은 순간 덜컹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양준회의 말을 들었다. “나나의 친 엄마면 돼! 그때 그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비록 내가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그때 그 냄새는, 내가 지금껏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거든.”양준회는 말을 하면서도, 두 눈은 남서훈의 표정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작은삼촌.”그가 그녀를 또 불렀다. 양준회의 낮은 목소리는 무게감이 있었다! 그가 그녀에게 물었다. “나나가 계속해서 엄마가 필요하다네! 당신 능력이라면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를 도와 나나의 친 엄마를 찾아줄 수 있을까? 당신이 찾아주기만 한다면, 나는 다시는 당신에게 집착하지 않을게! ”남서훈은 말이 없다.“...”그저 양준회를
양준회의 호흡은 뜨거워졌고 남서훈은 그대로 굳어버렸다.더는 참지 못하고 바로 양준회를 밀치면서 일어났다. 하지만 양준회는 손쉽게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양준회, 이거 놔!”“싫어!”양준회는 다시금 가까이 다가와서 말했다.“작은삼촌, 당신과 6년 전의 여자 중 누가 더 맛있을까?”말이 끝나기 바쁘게 그는 남서훈을 기다란 단상 위로 눌렀다. 남서훈도 물론 가만히 있을 사람은 아니었다.둘의 격렬한 몸싸움으로 인해...긴 단상의 도자기 병들이 넘어졌다. 거기에는 남서훈이 방금 양준회를 위해 만든 약도 들어있었다!검은 알약들이 우르르 굴러 나오면서 동시에 넘어뜨린 액체와 혼합되어 기존 약효의 10배 되는 효능을 발휘했다!남서훈은 냄새를 맡자마자 숨을 참았다. 그녀가 특수한 혈액이어서 다행이지 이토록 강력한 약효는 누구도 견디지 못했다.하지만 양준회는...그는 얼굴이 터질 듯이 빨개지면서 곧바로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현재 양준회의 체내의 들끓는 혈액 때문에 당장이라도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남서훈이 곧바로 한가닥씩 침을 내리 찔렀다. 그러자 양준회는 터져버릴것 같이 빨개진 눈으로 노려보며 말했다.“무슨 일이야?”“내가 당신을 위해 만든 약을 쏟았어요. 또 마침 다른 약과 섞이면서 10배의 효능을 발휘했죠. 지금 피를 빼내고 있어요 그러지 않으며 죽어버릴 거예요!”남서훈은 퉁명스럽게 말하면서 재빨리 양준회를 위해 피를 빼줬다.단지...남서훈이 거의 모든 약효를 체내에서 빼내려고 할 때, 오히려 양준회가 말렸다!“작은삼촌.”양준회는 여전히 터질 것 같은 눈빛으로 말했다.“남은 약효는 다른 방법으로 빼지!”말을 마치고 양준회는 남서훈의 손을 잡고서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면서 잘생긴 얼굴을 들이밀며 입맞춤했다.남서훈은 최근 들어 부쩍 입맞춤하기 좋아하는 양준회가 한심했다.양준회가 방심한 틈을 타 남서훈 손에 있던 은침은 기절시키는 혈 자리로 향했다. 얼마 남지 않은 약효는 빼지 않아도 양준회가 하루 밤 자고 깨나면 괜찮을
며칠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사그라들 줄 알았던 실시간 검색어가, 아직도 계속 올라와 있었다! 지금은 병원에까지 소문이 나, 윤성아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결혼을 재촉받았다!어렵사리 간호사분들에게서 탈출했건만 병실에 들어서서 윤성아가 남자에게 따지기도 전에! 강하성과 윤지안 두 녀석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윤성아에게 그녀가 일상적으로 받던 결혼 재촉을 해댔다.“엄마, 도대체 언제 아빠랑 결혼하실 거예요?”두 아이는 동시에 말을 꺼냈다.이어서 강하성이 말했다.“비록 아빠가 멍청하고, 이전에 엄마에게 상처도 줬지만! 아빠가 앞으로는 절대로 그러지 않을 거에요! 아빠는 엄마에게 잘해줄 거라고요!”“그럼요!”윤지안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얼굴을 들고 윤성아를 쳐다보며 똑 부러지게 말했다. “엄마가 아빠랑 결혼하면, 우리 네 식구가 정말로 함께 있는거에요! 아빠는 엄마랑 결혼하게 되면, 지안이에게도 인츰 동생이 생긴다고 했어요. 엄마, 지안이는 동생이 너무 갖고 싶어요!”...윤성아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결혼을 재촉한다 해도, 그녀는 버틸 것이고, 응답하지 않을 것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자 윤성아는 남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모든 사람이 당신 편에서 결혼을 재촉한다고, 내가 결혼 해 줄 거란 생각은 하지 말아요! 흥! 분명히 말하는데, 이렇게 해도 아무 소용이 없어요! 그리고 이 화젯거리를 실시간 검색어에서 얼른 내려요! 나랑 결혼하고 싶다면, 그거...”윤성아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강주환은 다급해 났다. “그거 뭐?”윤성아는 말해줄 생각이 없었다.두 사람은 병원 휴게실의 작은 침대에서 장난을 쳐댔다.고요한 밤이 찾아오고, 바람이 살랑거리며 창문으로 은은한 꽃향기가 풍겨왔다. 달빛이 환히 비추며 세상의 모든 것을 밝혀주는 것만 같았다. 강주환은 윤성아를 자신의 몸 아래로 눕혔다. 그의 까만 눈동자에는 욕망의 눈빛이 서려 있었다. “여보, 말해줘, 어떻게 하면 나랑 결혼해 줄 거야?”
강주환은 너무 심하게 아파 기절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는 억지로 참으면서 얼굴에는 미소를 지으며 세 사람을 달래고 있었다.“걱정 마, 난 괜찮아.”하지만 검사 결과가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았다!강주환의 위가 다시금 감염되어, 검은 그림자가 작게 나타났다. 검사 결과가 나오자 강주환은 인츰 병원에 입원했다.간호사는 그에게 링거를 꽂아주었다. 강주환은 아파서 견디기 힘들었지만, 여전히 참고 있었다. 강하성과 윤지안 두 작은 녀석들이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아빠.”윤지안이 강주환을 불렀다. 아이는 빨개진 큰 눈으로 강주환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빠가 지안이를 돌보다가 힘들어서 쓰러진 거예요?”강주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그는 온화하고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지안이에게 말했다. “아빠의 건강이 조금 문제가 있었을 뿐이야, 하지만 그렇게 심한 건 아니야! 지안이를 돌본 거랑은 절대 아무 상관이 없어!”윤지안은 믿지 않았다. 아이는 아빠가 자신을 돌보다가 힘들어서 쓰러진 것만 같았다!“아빠.”강하성은 늘 그렇듯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강주환과 똑같이 닮은 아이는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강주환을 보며 말했다.“아빠는 지금, 분명 많이 아프잖아요! 아빠의 얼굴색이 창백해지고 땀도 많이 나고 있어요. 눈을 감고 좀 주무세요. 나와 지안이가 곁에서 지켜줄게요!”강주환은 대답했다.“그래.”그가 눈을 감는 그 순간, 너무 아파서 기절할 지경이었다.“오빠.”윤지안은 강하성을 보며 말했다. “아빠는 분명히 지안이를 돌보다가 지쳐쓰러진거지?”“그런 거 아니야.”강하성도 부정하며 대답했다.강하성의 성격은 비록 강주환과 마찬가지로 차가웠지만, 그건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만이고! 엄마와 동생을 대할 때면, 강하성은 늘 부드럽게 잘 챙겨주곤 했다!강하성은 병실에서 아빠를 지키는 동시에, 동생을 위로해 주었다. 윤성아쪽.그녀는 지금 의사 사무실에서 강주환의 병에 대해 자세한 얘기를 듣고 있었다.“강대표님이 이전에 위를 수
주환은 억울하다는 듯 성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여보. 그게 아니라 나 이제 곧 수술실 들어가는데 아직도 나와 결혼 안 해줄 거야?”주환의 말에 성아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그녀는 떨어지는 눈물을 막지 못한 채 병상에 누워있는 주환을 바라보며 말했다.“주환 씨. 아직 나한테 청혼도 안 한 거 알아요? 수술 무사히 마치고 건강 회복하면 그때 다시 프러포즈 해요. 그땐 받아줄 테니까.”“그래.”주환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었다.금세 기분이 좋아진 그는 이렇게 한번 아픈 것도 나름 괜찮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사랑하는 여자가 걱정으로 마음을 졸인다는 것이다.“여보. 사실...”사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프러포즈를 준비해 오고 있었다. 눈앞의 그녀가 감동의 눈물을 흘릴 정도로 로맨틱하고 성대한 프러포즈 현장을 말이다. 계획대로라면 지안의 건강이 회복되는 대로 그는 성아에게 청혼했을 것이다.정말 오랫동안 준비했는데. 지금은...주환은 무언가 결심한 듯 결연한 눈빛으로 성아를 바라보며 약속했다.“조금만 기다려줘. 수술실에서 나오고 몸이 회복되는 대로 반드시 우리 여보한테 프러포즈할 테니까.”울며 고개를 끄덕이는 성아.“네.”곧이어 주환은 수술실로 들어갔고 윤아와 하성,지안,그리고 안진강과 서연우까지 모두 수술실 밖에서 그를 기다렸다.장장 네시간이라는 시간이 흘러 드디어 수술실 문이 열리더니 서훈이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그 모습을 본 성아는 급하게 몸을 일으키느라 휘청대면서도 그녀에게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러나 막상 입을 떼려니 쉬이 말이 나오지가 않는 성아. 그녀는 걱정 반 기대 반으로 겨우 떨리는 입술로 한마디 내뱉었다.“그이는...”“수술은 성공적이에요. 환자분도 괜찮고요.”성아는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고마워요. 서훈 씨.”“아니에요.”그때, 다시 수술실 문이 열리더니 간호사분들이 주환의 베드를 밀며 나왔다.서훈은 싱긋 웃더니 성아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가서 함께 있어줘
하지만 준회는 서훈이 뭐라 하든 개의치 않았다. 다만 이 아득한 어둠 속에서 검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그녀를 바라볼 뿐이다.“내가 이렇게까지 안 하면 언제까지 피해 다니려고?”그날 남 씨 저택의 약방에서 또다시 찝쩍대는 준회를 서훈이 다시 기절시킨 그 사건이 이 일의 서막이었다. 다음 날 잠에서 깬 준회는 서훈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서훈은 진작에 도망쳤고 그때부터 준회를 피해 다녔으니 말이다.그러다 드디어 남서훈을 잡아둔 지금, 그는 그날의 수모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다 되갚아줄 작정이었다.준회는 서훈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나 피하지 마. 어차피 나한테서 벗어나지 못하니까.”170CM가 넘는 서훈의 키도 이 남자에 비해선 머리 하나만 한 차이가 난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턱을 들어 올려 그를 노려봤다.“하고 싶은 게 뭔데?”“이미 말하지 않았나?”어딘가 슬퍼 보이는 준회의 짙은 눈망울은 매끈한 그녀의 작은 얼굴을 진득하게 향하고 있었다.“모든 건 네가 자처한 거야. 뿌린 대로 거둬야지.”“내가 자초한 모든 건 준회 씨가 끝낸다고 해서 끝내지는 게 아니에요.”준회:“...”준회를 바라보는 서훈의 심장은 지금 미친 듯 날뛰고 있다.‘나한테 이렇게 집착하는 이유가 대체 뭐지. 설마... 날 사랑하게 되기라도 한 건가.’그때 갑자기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준회. 또 한 번 그의 수려한 용모가 서훈을 미치게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의 검게 빛나는 눈동자는 어느새 두 볼이 발그레 상기되어 있는 서훈의 모습을 담은 채 여유롭게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다시 입을 여는 준회.“이 세상에 당신처럼 중성적인 매력을 갖고 있으면서 여자보다도 요염한 사람은 없을 거야.”“저 눈 높아요. 그리고 저 지금 서른셋이예요. 막살아도 될 나이 아니라고요.”준회는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열여덟 살 때 네가 몰래 나한테 입 맞춘 이후로 나까지 어떻게 돼 버린 게 분명해. 나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지
준회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그럼 네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또 그 얘기다.서훈은 이를 꽉 깨물었다.“최선을 다하죠.”서훈은 이렇게 하면 준회가 그녀를 놓아줄 거라 생각했다.하지만...순식간에 그녀를 안아 올려 그대로 샤워실을 나와 휴게실 침대에 그녀를 내려놓는 준회.“양준회씨. 뭐 하는 짓이에요?”“자자.”말을 마친 그는 냅다 좁은 침대에 몸을 뉘고 눈까지 꼭 감은 뒤 졸린 듯한 말투로 다시 말을 이었다.“요 며칠 널 찾느라 제대로 쉬지 못해서 너무 피곤해.”많이 피곤했던 건지 말 몇 마디를 끝으로 정말 잠자리에 들어버린 준회.서훈:“...”피곤한 건 서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점차 안정되는 준회의 숨소리를 들으며 서서히 잠이 들었다. 준회는 잠이 얕다. 이것은 습관적으로 몸을 방어하는 습관에서 생긴 버릇으로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잠시 후...서훈이 이제 막 잠이 들었을 그때, 이미 잠이 든 줄 알았던 준회가 눈을 슬며시 뜨더니 낮게 속삭였다.“남서훈.”그녀에게 바싹 다가가는 준회. 그의 입술은 어느새 서훈의 귓가에 닿을 듯했다.“넌 도망 못 가.”이튿날.잠에서 깬 준회는 또 서훈을 곤란하게 하진 않았다. 다만 떠나기 전 다시 한번 그녀에게 말했다.“잊지 마. 한 달이야. 그때까지 못 찾으면 널 나한테 주는 거야.”준회는 그렇게 떠났다.그가 서훈의 사무실에서 나올 때 마침 이쪽을 향해 오던 윤성아와 마주쳤다.“준회 씨. 왜 여기에...?”이 이른 아침에 서훈의 사무실 앞에서 준회를 마주칠 줄 몰랐던 성아는 적잖이 당황했다.하지만... 안될 것도 없긴 하다.사실 성아는 진작부터 준회와 서훈 사이에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정황상 준회는 아직 서훈이 여자란 사실을 모를 확률이 높다.준회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미소로 그녀를 맞았다. 그런 그의 표정에서는 그 어떤 감정도 보아낼 수 없었다.“성아야.”성아의 이름 한번 부르는 것으로 그는 그녀에게 인사했다.“강주환
남서훈은 싱긋 웃었다.아직 임신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맥으로 정확히 짚어 낼 순 없었지만 느낌은...“아마 남동생일 거야.”“아... 남동생...”양나나는 눈을 굴리더니 남서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남동생도 좋은 것 같아요. 동생 태어나면 저랑 엄마가 동생한테 의술도 가르쳐주고 아빠랑 사업하는 것도 배우고요. 그리고 남자애는 너무 응석 받아줄 필요도 없고 내가 맘껏 부려 먹을 수 있잖아요.”자기 뒤꽁무니를 쫄랑쫄랑 따라다니며 누나, 누나 하고 부르는 장면을 상상하니 양나나는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어떻게 생긴 남동생이 엄마 배 속에서 태어날까, 양나나도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그러나 남서훈이 임신 다섯 달째로 접어드는 어느 날, 양나나는 실종됐다.양준회와 남서훈은 매일 안절부절못하여 속이 타들어 갔다.둘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세력을 동원해 전 세계 각 곳을 샅샅이 뒤졌지만 여전히 양나나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양나나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그때 양나나는 이미 8살이었다.남서훈은 딸을 찾지 못해 날마다 눈물로 얼굴을 적셨다. 그녀는 점점 야위어갔다.그걸 보는 양준회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는 아내를 꼭 끌어안고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나는 똑똑한 아이야. 당신이 의술과 독 쓰는 법도 잘 가르쳐줬으니까 별일 없을 거야. 나나는 너와 내가 낳은 딸이야. 전에 풍운파에 혼자 몰래 들어가서도 그 안을 마구 헤집고 다녔잖아.”아무튼 그는 양나나가 어디에 가서 어떠한 상황에 부딪히던 자신을 잘 보호할 거라고, 아무 일 없이 잘 살아 있을 거라고 남서훈을 위로했다.남서훈도 굳게 믿고 있었다. 양나나의 시체를 보게 되지 않는 한 그들의 딸은 세상 어딘가에 꼭 살아있을 거라고.그 후 넉 달이 지났다. 9달이 된 배는 불룩하게 튀어나왔다.양나나는 아직도 찾지 못했고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그러다 남서훈은 아들을 낳았다. 강보에 싸여 품에 안겨있는 아들을 보며 남서훈은 양나나를 그리워했다.“나나야,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네 뒤꽁무
그리고 바로 그날 오후.양준회와 남서훈, 그리고 백나연과 성진훤, 이렇게 네 사람은 백무산을 찾아갔다.그를 만나자마자 양준회와 성진훤은 백무산한테 사과부터 했다.어리둥절한 백무산은 그들이 왜 갑자기 찾아와서 사과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 후 양준회는 남서훈의 어깨를 와락 감싸안았고 성진훤도 보란 듯이 백나연의 손을 꼭 잡았다. 성진훤은 원래 양준회처럼 백나연을 확 끌어안고 싶었지만 미래 장인어른이 될 사람 앞이라 행동을 조심스럽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여 손만 잡았다.백무산은 더 혼란스럽고 얼떨떨해졌다.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그는 눈알이 튀어져 나올 듯하게 그들 넷을 번갈아 쳐다봤다.그때 양준회가 입을 열었다.“어르신, 우리 서훈이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입니다. 남씨 집안의 특수한 사정으로 어릴 때부터 남장을 했던 것이고, 백나연 씨와의 혼약도 그저 소동극이었습니다. 이 일은 서훈이한테 책임 묻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노여움이 있으시면 저한테 푸세요.”그 말에 백무산은 눈살을 찌푸렸다.남서훈이 여자라니... 어떻게 그런 일이?여자가 그의 딸과 약혼했다니,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었다.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란 말인가.백무산은 불같이 화를 냈다.그러자 백나연이 나섰다.“아빠, 이 일은 서훈이 탓이 아니에요, 제가, 제가 꼭 도와달라고 했어요.”“뭐야? 널 도와줘?”“네.”백나연이 설명했다,“아빠랑 오빠가 자꾸 소개팅 주선하는 바람에 제가 너무 골치 아파서 서훈이한테 도와달라고 부탁한 거예요, 나랑 약혼하자고. 그럼 아빠랑 오빠가 나한테 선 자리를 더는 강요 안 할 거 아니에요. 서훈이는 싫다고 했는데 내가 억지 써서 해주기로 한 거예요.”백나연은 자기 잘못이라고 매우 강조했다.그녀의 눈빛에 아픔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전 그때 결혼할 생각이 없었어요... 그리고 저랑 서훈이는 서로 약속했어요. 누가 먼저 운명의 상대를 만나게 되든, 그때 되면 파혼하기로요. 절대 서로의 앞날을 방해하지 않기로 했어요. 이제
그 순간 용준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한 번 떨어지기 시작한 눈물은 그칠 줄을 모르고 펑펑 쏟아졌다.이게 얼마 만인가.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고 싶은 생각을 항상 했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그는 오늘 끝내 그녀를 안을 수 있었다. 팔을 뻗어 그녀를 껴안고 얼굴을 그녀의 어깨에 파묻은 채 용준은 또 한참을 울었다.예서는 그가 평생 사랑한 유일한 여자였다.그는 품속에 있는 그녀를 부드럽고 진실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난 네가 고마워. 넌 너무 용감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용감해. 옛날 일은 이미 다 지나갔어. 넌 이것만 기억해. 난 널 사랑하고, 네가 있어야만 내가 살 수 있어. 네가 있으니까 내가 괴물로 변하지 않은 거야. 아니면 난 모든 걸 다 망가뜨렸을 거야. 스스로도 혐오하는 그런 나쁜 인간으로 돼버렸을 거야.”예서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도 알고 있었다. 남자가 하려는 말이 뭔지 그녀는 모두 알고 있었다.이날, 둘은 아주 오랫동안 얘기를 나눴다.예서는 더는 용준을 불편해하지 않았다. 용준이 있으므로 하여 그녀는 더 빨리 회복될 것이었다.그렇게 예서가 하루하루 나아지고 있을 때. 남서훈과 양나나는 한 번 나가 돌아다니기로 했다.한 거리의 상가 앞을 지나가고 있는데, 남자애 몇 명이 갑자기 튀어나와 양나나를 에워쌌다.그들은 매우 들뜬 소리로 말했다.“대장! 살아 있었어요?”“너무 잘 됐어요!”“대장, 대장을 그 사람들이 데려간 후로 우린 계속 대장의 소식을 기다렸어요. 대장도 그 애들처럼 상처투성이가 돼서 돌아오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다고요.”“지금은 어떤 상황이에요? 대장이 후계자가 된 거예요?”양나나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 라고 대답했다.그리고 주변을 둘러싼 남자애들한테 말했다.“난 후계자 되는 것에 관심 없어. 풍운파에 지금 남아있는 건 의술을 배우기 위해서야.”양나나는 시선을 남서훈한테 향하며 그들한테 남서훈을 소개했다.“이분이 내 스승님이야, 우리 스승님 엄청 대단해!”그날, 양나나는 그
지난 날에 발생한 그 끔찍한 과거를 스스로 입에 올리는 용준은 피가 흘러나올 듯이 눈이 시뻘겋게 물들었고 감정이 폭발할 한계치까지 다다랐다.그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몇 분 후에야 그는 비로소 다시 입을 열었다.“그놈들은 죄다 죽여버려야 할 놈들이에요. 예서가 이쁘니까, 내 앞에서 예서를... 그때 예서는 이미 내 아이를 임신했는데...”용준의 온몸에서 난폭한 기운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돌아서서 주먹으로 나무를 세게 한 방 내리쳤다. 그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낙엽이 우수수 떨어졌다.그 큰 나무가 흔들릴 정도면 얼마나 센 펀치를 날렸는지 알 수 있었다.그의 손마디도 살이 찢겨나가 새빨간 피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는 감각을 느낄 수 없는 사람처럼 상처에 무덤덤했다. 아마도 손보다 마음이 더 아팠을 터였다.용준은 그때 일만 생각하면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심장이 뜯겨나가는 것처럼 아팠다. 예서가 피투성이가 된 채 텅 빈 눈으로 누더기 인형처럼 맥없이 쓰러져서 누워있던 참혹한 장면만 머릿속에 떠올리면 그놈들을 무참하게 도륙을 내고 싶었다.그리고 그는 그렇게 하였다.풍운파의 보스가 된 후 첫 번째로 한 일이 바로 예서의 복수를 하는 것이었다.그놈들의 범죄증거를 전부 찾아내 한 명도 빠짐없이 직접 처단했다.그때 그들은 무릎을 꿇고 울며불며 용서를 빌었다. 막다른 길에 몰려 살려고 해도 안 되고 죽으려고 해도 죽지 못할 때, 그들은 찌질이같이 눈물 콧물을 쥐어짜며 애원했다. 제발 살려달라고, 잘못했다고.정작 그들은 용준이나 예서한테 그런 자비를 베푼 적이 없는데 말이다.용준의 목소리는 점점 차가워졌다.“그것들이 나와 예서의 모든 것을 망치고 날 시궁창에 몰아넣었죠. 여전히 난 이렇게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생지옥에서 살고 있어요. 그것들은 백번 죽어도 마땅해요!”그러나 그놈들이 죽는다고 해서 상처가 아무는 것은 아니었다.용준은 피로 물든 주먹을 으스러지게 잡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들은 예서가 그들이 한
용준은 원래 정직한 사람이었고, 금호의 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그는 어둠이 없는 밝은 햇빛 아래에서 사는 반듯한 사람이었다.그러나 일부 국제조직에서는 용준을 불안하게 여겼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고, 심지어 그가 의심되어 오랫동안 그에게 전자발찌를 채웠다.아무 일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그는 범죄자 취급을 당했고, 그리하여 생활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더더욱 생각지도 못한 건, 그 당시 그와 깊은 사랑에 빠져있었던 여자친구마저 누구한테 몹쓸 짓을 당하게 된 것이다.그러므로 용준이 점점 나쁘게 변하여 나중에 어떤 일을 저지르게 되었던, 모두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요 몇 년 동안 풍운파는 용준의 관리하에 동남아에서 제일 큰 폭력조직으로 성장하였고, 닥치는 대로 무슨 일이나 다 저지르는 편이었지만 딱 한 가지 철칙이 있었다. 그건 바로 노약자와 여자, 아이들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거였다.의리도 지켰다.하지만...“그건 중요하지 않아요.”남서훈이 말했다.“이 세상은 원래 흑과 백으로 나뉘는 게 아니니깐요. 동남아는 원래 상황이 어수선하잖아요. 무장세력과 폭력조직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일시적으로 바꿀 수도 없어요. 오히려 풍운파와 같은 조직이 있다는 게 더 도움이 될지도 몰라요.”양준회가 그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어떤 측면으로 보면 용준은 꽤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둘은 원수지간이다. 양준회가 그의 아버지를 죽였다. 비록 지금까지는 아무 짓을 안 했어도, 또 그가 원래 정직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풍운파를 이렇게 여러 해 동안 다스린 용준이 지금은 어떤 사람인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그리하여 양준회는 안심할 수 없었다. 여전히 남서훈과 같이 풍운파를 즉시 떠나려고 했다.“하지만 나나도 여기 있어요.”남서훈이 예상치도 못한 폭탄을 터트렸다. 양준회는 깜짝 놀랐다.양나나가 여기에 있다는 건 상상도 못 했다.하지만 놀란 것도 잠시, 그는 바로 말했다.“그럼 나나도 같이 떠나면 돼.”갇힌 두 달
강하영이 부케를 내던지는 일순간 우양주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부케를 향해 몸을 날렸다. 공중에서 부케를 잽싸게 낚아채는 그의 모습이 정지화면인 양 사람들의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부케를 손에 쥔 그다음 순간, 그는 부케와 함께 바다에 떨어졌다.모두가 경악했다.강하영은 크루즈 난간 쪽으로 달려가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남자를 보며 입을 떡 벌리고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선원들이 즉시 튜브를 던졌고, 또 어떤 사람들은 즉시 뛰어내려 구조하려 했지만 강주환이 그들을 말렸다.왜 구하지 말라는 건지 이해 안 된다는 듯한 눈빛으로 윤성아는 강주환을 쳐다봤다.그러다 팔로 물살을 가르며 바다에 둥둥 떠 있는 우양주가 크루즈 위에 있는 강하영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치는 걸 듣고 왜 그러는지 알 것만 같았다.“여보, 어쨌든 내가 부케 받았으니까 당신 나랑 결혼식 치러야 돼요! 안 그러면...”그 뒤엔 위협적인 말이 따라야 하는데 우양주도 무엇으로 강하영을 협박할 수 있을지 몰랐다. 남은 건 자신의 이 몸뚱이 하나뿐인데...“안 그러면 나 안 올라갈 거야. 여기 바다에 계속 있을 거야, 결혼식도 못 하는데 그냥 빠져 죽지 뭐.”강하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바다에 빠진 남자를 까만 눈동자로 차분하게 내려다보며 끝내 입을 열었다.“빠져 죽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 안 말려요.”“...”우양주는 서럽게 그녀를 쳐다봤다.역시나 아내는 매정했고 자신에 대해 애정이 없었다.그러나 그때 윤성아 곁에 서있는 강주환이 무덤덤하게 한마디 했다.“내 기억이 맞다면, 이 바다에 상어가 출몰한다고 했어요. 식인 상어.”강주환은 고개를 돌려 강하영한테 말했다. “지금 아직 상어가 오지 않아서 그렇지, 나타나기만 하면 한꺼번에 열 몇 마리씩 무리 지어서 나올 거예요. 그게 게네들 습성이라. 이야... 쟨 아마 그러면 뼛조각도 남지 않겠네.”“...”그 말에 강하영이 급해 났다. 말투도 전처럼 차분하고 담담하지 않았다.난간에 기대어 우양주를 향해 내리 소리 질렀다.“뭐
미리 준비한 축사를 울먹이며 끝까지 다 읽고는 원이림을 향해 볼멘소리를 했다.“너 이 놈 자식, 내가 죽을 때까지 네가 결혼하는 걸 못 보는 줄 알았다. 아이고... 드디어 결혼하는구나. 너도 이제 가정이 생겼어.”“너 똑바로 들어. 은진이한테 평생 잘 해줘야 돼, 아내한테 잘 하는 건 우리 집안 내력이야. 나도 네 엄마 말을 엄청 잘 들었어. 너도 똑같아, 알겠니? 오늘부터는 은진이한테 더 잘해야 돼, 말도 잘 듣고, 은진이부터 생각하고 배려해 주고. 은진이가 조금이라도 맘고생을 하게 되는 날엔 내가 너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알겠어?!”원이림은 새카만 눈동자로 여은진을 깊게, 애틋하게 들여다보며 그녀와 깍지를 낀 두 손에 힘을 더 주었다.“걱정 마세요. 난 평생 우리 여보 맘고생 안 시킬 거예요.”여보라는 호칭이 지금 이 시각부터 명실상부하게 되었다.원이림은 그녀의 손을 잡고 크루즈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그리고 미리 준비된 데이지 꽃을 바다로 뿌렸다. 하얀 꽃잎들이 파도에 실려 멀리 떠내려갔다.둘은 거기에 선 채 눈물을 머금고 울먹이며 말했다.“어머니, 아버지. 저 너무 행복해요. 우리 너무 행복해요.”결혼식의 마지막을 장식할 부케 토스하는 시간이 다가왔다.강주환과 윤성아, 그리고 나엽과 안효연은 모두 기혼자로서 나가지 않고 구경만 했다. 하객 중에 미혼인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다.우양주도 강하영의 손을 잡고 그리로 향했다.강하영은 몸을 뒤로 빼면서 말했다.“우린 결혼했는데 왜 부케를 받으러 가요? 다른 사람한테 갈 좋은 축복을 왜 우리끼리 받겠다고 달려들어요, 쓸데없이. 그렇게 할 일 없고 힘이 남아돌면 내가 다른 일 하게 해 줄게요.”“무슨 일?”강하영은 푸른 바다를 향해 눈을 힐끔 하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당신 수영 좋아하잖아요. 내가 엉덩이 확 걷어찰 테니까 바다로 들어가서 수영이나 할래요?”“...”저번에 강하영과 같이 수영하면서 그녀가 자신한테 새빨간 수영팬티를 사줘 창피를 당하고 나서부터 우양주는 수영하는
여은진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예쁘게 미소 지었다.“나 다 알아요.”지난 1년 동안 그가 어떻게 해왔는지 잘 아는 그녀는 더 이상의 맹세와 언약 같은 건 필요 없었다.“응!”여은진을 안은 채로 원이림은 그녀의 여린 입술에 쪽쪽거리며 뽀뽀를 했다.장내의 플래시 세례가 정신없이 터지는 가운데 그는 돌아서서 무대 아래에 앉아있는 모든 사람한테 당찬 목소리로 선포했다.“오늘 저의 이 행복한 순간을 지켜본 여기 계신 모든 증인 분들한테 제가 선물을 준비할 생각입니다. 나중에 저희 베린 그룹에 가셔서 선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 달 20일에 저와 은진이의 결혼식이 있을 예정이니 여러분들께서 모두 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여은진을 안고 시상대를 내려가려 했다.여은진이 내려달라고 했지만 그는 내려놓지 않았다. 그렇게 안은 채로 시상식장을 걸어 나와 차에 올라탔다.럭셔리한 롤스로이스가 천천히 내달리고 있었다.여은진은 아직도 그의 품에 안긴 채로 있었다.“이번 달 20일에 결혼한다고요? 그럼 열흘밖에 안 남았는데, 너무 촉박하지 않아요?”그녀가 눈을 들어 바라보며 물었다.“아니, 전혀.”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떨구며 원이림이 말했다.“시간이 모자라지만 않았으면 내일에라도 당장 결혼식 치르고 싶어.”반년이 넘는 동안, 그는 매일 결혼식에 관한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결혼반지, 웨딩드레스, 그리고 결혼에 필요한 모든 물품과 디테일한 사항들을 전부 준비하고 체크했다. 그녀가 결혼을 동의하는 그 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그리고 그 순간이 끝내 다가왔다.웨딩사진을 찍는 것 외에는 크게 시간을 들일 일도 없었다.다만 여은진이 임신했기 때문에 너무 빠듯하게 스케줄을 잡지 않고 싶었을 뿐이다.결혼식에 참석할 하객을 초대하는 일도 있긴 하지만 10일이면 충분했다.촉박하지 않을뿐더러 시간적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여보, 우리 지금 바로 혼인신고 하러 가.”원이림은 한시라도 더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기사한테 얘기하여 구청으로 가자
원이림은 금방 샤워를 마친 여은진한테로 다가가 그녀의 팔을 끌어당겨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다음에는 당연히 침대로 향했다.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수순을 밟아갔다.한창 격렬해지려던 찰나, 원이림은 짧게 비명을 질렀다. 크게 지르진 않았다. 본능적으로 소리를 내질렀지만 그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여은진이 알아차리지도 못한 새에 살에 푹 찔린 그 가는 물건을 빼내야겠다고 머릿속으로 빨리 반응했다.하지만 역시 늦었다.여은진이 몸을 일으켜 스탠드를 켰고, 어두웠던 방안은 환한 빛으로 채워졌다.이어 급히 그를 살피던 여은진은 원이림의 엉덩이에 바늘이 하나 꽂혀있는 걸 발견했다.짧고 가는 옷을 꿰맬 때 쓰는 그런 바늘이었다.여은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얼굴로 남자를 보며 물었다.“어떻게 바늘에 찔릴 수 있어요? 침대에 왜 바늘이...”“...”꽂힌 바늘을 빼며 원이림은 이야기를 얼버무렸다.“괜찮아, 그냥 바늘인데 뭐. 별로 아프지도 않아.”그러고는 또 다짜고짜 몸을 뒤집으며 여은진을 몸 아래로 깔았다.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손을 뻗어 스탠드를 끄고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탐했다. 잠깐 벌어진 에피소드를 그녀의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진행 중이었던 일을 마무리하려는 의지였다.하지만 여은진은 그의 키스를 받아내면서도 오후 그의 당황스러운 표정과 난데없이 침대에 나타난 바늘을 함께 떠올렸다. 정신을 쏙 빼놓으려는 지금의 행동도 분명 그것과 연관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잠깐만.”여은진은 원이림을 밀어내고 다시 한번 스탠드를 켰다.의심이 부풀어 오른 눈으로 빤히 그를 노려봤다. “똑바로 말해요. 아까 그 바늘로 수작 부린 거 맞죠? 말해요, 몇 개나 찔렀어요?”“...”끝내는 발각되었다. 원이림은 이실직고했다. 강주환이 원흉이라고, 그가 시켜서 했다고 불었다.“여보, 나 며칠 전에 운봉 비즈니스 회담에 참석했는데 거기서 강주환을 만났어. 그 자식이 날 비웃는 거야. 그리고 이렇게 하라고 아이디어를 내줬어. 바늘로 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