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아는 아버지의 이런 결정을 몰랐을뿐더러 한연 그룹 경영을 모두 자신에게 맡긴다는 중대 발표를 파티장에서 할 줄을 꿈에도 몰랐다. “아버지...” 그녀는 뭔가 말하려고 하였으나 안진강이 딸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이 자애로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건 아빠가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정이란다. 이넨 나도 나이가 있고 너의 엄마도 몇 년 사이 건강도 부쩍이나 안 좋아 졌잖니 그래서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둘이서 여행이나 다니고 가끔은 너희들 바쁠때 애들이나 돌봐 주려고 한단다. ” 안진강은 하루라도 빨리 무거운 짐들을 벗어 던지고 행복한 만년을 보내고 싶어 했다. 많고 많은 이유 중 이것은 그저 그의 원인 중 하나에 불과했다. 안진강이 하루빨리 윤성아에게 한연 그룹의 경영을 떠맡기려고 한 제일 큰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성아야, 이젠 너는 안씨가문의 딸이고 한연 그룹을 이끌어 나갈 차기의 대표란다. 이런 너를 앞으로 그 누가 깔볼 수 있겠어? 한연 그룹의 상속자가 아니어도 이젠 그 누구도 너를 함부로 막 대할 수 없다는 걸 아빠도 알지만, 그저 하루빨리 우리 딸의 승승장구 하는 모습을 보고 싶구나.” 윤성아는 아버지 안진강의 말에 감동되었다. “하지만...” 그러자 그는 불쑥 무언가 말하려는 딸의 말을 끊었다. “더 이상 말할 필요 없다. 한연 그룹을 너에게 주기로 한 결정은 아빠 혼자 한 것이 아니라 너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뜻이기도 해.” “효연이 걱정은 안 해도 된다. 걔는 회사경영에 관심이 없는 애야. 온통 연기에만 집중 하는 모습을 보면 딱 너희 엄마 젊었을 때랑 똑같아! 성아 너도 알다시피 효연이는 지금 그때의 너희 엄마만큼이나 유명한 배우로 거듭나려고 열심히 연기에만 집중하잖니? 또 엄마가 받지 못했던 트로피도 받아 드리겠다고 약속했는걸?” 안잔강의 말속에서는 큰 딸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했다. 그는 자애로운 눈빛으로 윤성아를 보며 말했다. “나는 우리 딸의 능력을 믿어! 네가 있기에 우리 한연 그룹은 더욱 성장할 수밖에 없
그 모습을 본 원이림은 강주환을 막아섰다. 강주환은 살기로 가득 찬 눈빛으로 그를 보고 말했다. “비켜!” 원이림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모습을 보고 놀랄 윤지안이 걱정된 그는 한 발짝 물러서기로 생각했다. 하지만... 윤성아가 말했다. “이림씨, 난 괜찮으니까 우리 지안이 잠깐 봐줘요.” 원이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주환은 윤성아의 손목을 끌고 옆 방으로 데려갔다. 그는 방문을 쾅 닫은 뒤 윤성아를 문으로 밀어붙이고는 천천히 다가와 그녀를 팔로 휘감았다. 그의 낯빛은 몹시 어두웠다! 검은 눈동자 속에는 엄청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강주환은 이젠 자신이 싫어진 거냐고 필요 없냐고 윤성아한테 묻고 싶었지만, 그런 질문조차할 수 없는 처지가 된 그였다. 정녕 묻는다 한들 그녀는 반드시 상처 되는 말만 할 것이 뻔했다. 그는 창피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강주환은 자신의 답답함을 뒤로하고 성아에게 물었다. “당신, 진짜 하성이를 나 몰라라 할 거야?” 윤성아는 차가운 눈빛으로 눈앞의 분노로 가득 찬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성이는 제 아들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나 몰라라 하겠어요?” “그럼 도대체 왜 원이림이랑 아직도 얽혀있는 건데!” 강주환은 몹시 화가 났다. 안씨 가문으로 간 뒤로부터 그녀는 자신을 사랑해 주는 엄마, 아빠와 가족들이 생겼다는 사실에 강주환은 아주 기뻤지만, 머리 아픈 일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안씨 가문에서 강주환은 환영받지 못하였다. 윤성아가 안씨 가문으로 돌아온 기념으로 주최한 파티에도 그는 초대받지 못하였다. 이것뿐만이 아니라 안씨 가문에서는 원이림을 미래의 사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행히 파티가 끝난 뒤 원이림이 F국으로 돌아갔다. 그와 그녀는 각자의 길에서 바삐 돌아쳤다. 그리고 방금 트러블이 생긴 그들은 서로 진정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 결과는? 먼저 그녀를 영주시에 데려오기도 전에 원이림이 회사를 운성시로 옮겼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당신이 정녕 하성이를
프라이빗 룸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마치 안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말이다.윤지안은 눈을 깜빡이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파파, 엄마가 안에 안 계시는 거 아니에요?”“응.”원이림은 윤지안을 보며 말했다.“엄마가 정말로 이 룸 안에 없나 봐!”정말로 그럴까?윤지안은 작은 미간을 구겼다.“하지만... 아까 여기 이모가 지안이 엄마가 이 안에 있다고 했는데요?”“...”원이림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거울 속에 비친 그의 두 눈동자에선 서늘한 한기가 맴돌고 있었다.하지만 그저 그 순간뿐이었다.그는 이미 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었고 저도 모르게 가슴이 아파졌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윤지안을 보며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아마도 여기 이모가 잘못 보셨나 봐. 파파랑 먼저 갈까? 엄마는 이따 돌아오실 거야.”윤지안이 답했다.“네.”원이림은 윤지안을 안고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 룸으로 들어갔다.한편, 원이림과 윤지안이 갔다는 것을 알게 된 윤성아는 바로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밀어내려고 버둥거렸지만 실패했다. 그래서 발을 들어 남자의 발등을 힘껏 밟으려고 했다.이미 그녀의 행동을 눈치채고 있었던 강주환은 바로 발을 들며 피해버렸다.윤성아는 그 기회를 틈타 그를 확 밀어냈다. 그리곤 입술을 벅벅 닦으며 분노에 휩싸인 눈길로 남자를 보았다.“강주환 씨, 제가 저한테 손끝도 대지 말라고 경고하지 않았던가요?”“응, 경고했었어.”그의 칠흑 같은 두 눈동자엔 오로지 화가 난 윤성아로 가득하였다.“내 여자한테, 내가 손을 대겠다는데 뭐가 문제야?”말을 마친 그는 다시 한번 그녀에게 다가가더니 손을 뻗어 윤성아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며 확 끌어당겼다.그렇게 그의 품에 꽉 안기게 된 윤성아는 있는 힘껏 벗어나려고 애를 썼지만, 강주환은 점점 더 그녀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그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그리고 너도 내가 너한테 이러는 거 좋아하잖아, 안 그래? 너 같은 여자들은 말로만 항상 싫다고 하는 거잖아.”
하지만...“제발 고집 좀 그만 부려. 나 밀어내지 마, 응? 나도 상처받는다고! 지금 내 마음이 어떤 줄 알아? 피가 흐르고 있어. 네가 밀어낼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혀서 죽을 것 같다고. 난 다른 여자랑 결혼하고 싶은 생각 전혀 없어! 하지만 만약 네가 내 곁에 있지 않고 원이림이랑 계속 함께할 거라면 난 어쩌면 하성이한테 새엄마를 찾아주게 될 거야. 그리고 아름 씨가 제격이고.”‘아름 씨?'‘그러니까 사모님 친구 딸 이름이 아름 씨인 거야? 하, 다정하게도 부르네!'“강 대표님, 결혼하고 싶으면 하세요. 하지만 제 아들에겐 새엄마가 필요하지 않아요!”윤성아는 차가운 눈빛으로 강주환을 보며 말을 이었다.“하성이는 제 아들이에요! 대표님이 저한테 빚졌다고 말하는 아이가 아니라고요!”강주환은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뜻이야?”그러나 윤성아는 더 말해주지 않았다. “전 하성이를 꼭 데려올 거예요! 아무리 대표님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해도 절 막을 수 없어요!”말을 마친 윤성아는 바로 문을 열고 룸을 나가버렸다.한편 불안해하며 윤성아를 찾는 윤지안에 원이림은 하는 수 없이 윤지안을 안고 룸에서 나오려고 했다.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마침 나와버린 윤성아를 발견했다. 윤지안은 바로 원이림 품에서 내려오더니 윤서아에게 쪼르르 달려가 작은 얼굴을 갸웃거리며 물었다.“엄마, 아까 어디 갔었어요? 지안이랑 이림 파파랑 계속 엄마 찾고 있었는데 못 찾았어요...”윤성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룸의 문이 열리더니 강주환이 걸어 나왔다.“어라? 땅속에 사는 아빠?”윤지안은 자그마한 미간을 찌푸리며 소곤거렸다.“저 아저씨가 왜 옆 방에서 나와요? 방금 엄마가 그 방에 들어가지 않았어요?”윤성아는 윤지안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순간 조금 전 원이림과 윤지안이 밖에서 노크하던 때가 강주환이 그녀에게 키스해버린 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게다가 눈썰미가 좋은 윤지안은 단번에 그녀의 입술이 살짝 찢어졌다는 것을 발견했다.“엄마, 입술 왜 그래요? 왜 부었어요? 혹
윤성아는 윤지안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돌아가는 길 내내 윤지안은 각종 신박한 것을 떠올리며 그녀에게 물었고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귀여운 모습에 윤성아는 웃어버리게 되었다. 기분도 한결 나아졌다.안씨 가문으로 돌아오자 서연우는 바로 윤지안의 작은 손을 꼬옥 잡으며 사랑스러운 손녀를 품에 조심히 안았다.안진강도 옆에서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윤지안을 보며 서연우와 함께 윤지안이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아빠, 엄마.”윤성아는 안진강과 서연우를 보며 말했다.“저 며칠 뒤에 영주시에 한번 갔다 오려고요.”서연우와 안진강은 윤성아와 안효주가 태어나자마자 윤정월이 몰래 바꿔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바로 윤성아를 데리고 왔다. 게다가 그들은 윤성아가 이렇게나 사랑스럽고 귀여운 윤지안을 낳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물론 강주환의 아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안효주는 애초에 아이를 낳은 적도 없고 강주환이 데리고 있는 아이 또한 윤성아의 아이를 훔쳐 강주환에게 데려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안효연이 만삭이 된 윤성아와 함께 지내고 있을 때 안효주가 윤성아를 죽이려 하고 눈밭에서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도 그들에게 말해주었다.그리고 나엽은 그들에게 자신이 윤성아를 데리고 강주환의 곁에서 벗어날 때 하마터면 크루즈에서 불에 타 죽을 뻔한 일도 말해주었다.“그때 불 지른 사람은 아마도 윤정월일 가능성이 아주 커요! 하지만 증거가 없어요. 증거만 있었더라면 윤정월이 저지른 악행 반드시 밝혀 법적 처벌을 받게 할 수 있었을 거예요!”모든 사실을 알게 된 안진강은 분노치가 극에 달했다. 그는 당시 바로 교도소로 쳐들어가 윤정월을 죽여버리고 싶었다. 절대 자신의 딸들에게 악행을 저지른 윤정월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었다!윤정월은 몰래 그들의 딸을 뒤바꾼 것도 모자라 안효주를 이용해 윤성아를 여러 차례 죽이려 했다. 그는 윤성아의 친아빠로서 반드시 갚아줄 생각이었다.그러나 안효연과 윤성아가 그를 말렸다. 그녀들은 안진강에게 윤정월과 안효주는 이미 벌을 받았
윤지안이 앙증맞으면서도 확고한 목소리로 윤성아에게 말했다.“엄마, 지안이는 앞으로도 영원히 엄마와 함께 있을 것이고 오빠에게도 엄마와 함께 살자고 얘기할 거예요. 나중에 오빠를 만나면 아빠랑 말고 우리랑 같이 살자고 꼭 얘기할래요...”하지만...샤워를 마친 후 윤지안은 공주 침대에 누웠다. 커다란 두 눈에 졸음이 마구 쏟아져 거의 잠들 무렵 윤성아를 보며 말했다.“엄마, 아빠랑 다시 함께할 가능성이 있어요? 그러면 오빠와 나에게도 엄마와 아빠가 다 있잖아요.”말을 마친 윤지안은 곧바로 잠이 들었다.그 시각 원이림은 호텔로 돌아왔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혼자 방에서 술을 마셨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술 한 병을 다 비웠지만 여전히 술기운 없이 정신이 멀쩡했고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대체 왜?’그는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윤성아가 왜 아직도 강주환과...강주환이 윤지안을 끌어안고 룸 문 앞에 서 있었을 때 인기척이 들려왔다. 그때 윤성아와 강주환이 뭔가를 했겠지?원이림의 눈빛이 침울해졌다. 온몸에서 싸늘하고 음산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그는 계속하여 술을 마셨지만 술로도 이 우울함과 고통스러움을 떨쳐낼 수 없었다.원이림은 휴대 전화를 꺼내 문자를 보냈다.「내 방으로 와.」몇 분 후, 초인종 소리가 울리자 원이림이 다가가 문을 열었다.문밖에 서 있는 여자를 본 순간 원이림은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고 방안으로 끌어당기더니 문을 닫는 동시에 옴짝달싹 못 하게 그녀를 문 쪽으로 확 눌러버렸다.그의 준수한 얼굴이 싸늘해졌고 얇은 입술로 여자의 입술을 막아버렸다. 아주 강압적이고 조급하게 그녀의 숨을 삼켜버렸다.짙은 술 냄새가 여자의 입안에 순식간에 가득 퍼졌다.“빨리 왔네?”원이림의 목적은 명확했고 술기운이 올라온 두 눈으로 여자를 그윽하게 쳐다보았다.“나랑 자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 한 번 자고 만족하겠어?”원이림은 그녀의 아래턱을 들어 올리며 자신을 쳐다보라고 강요했다.“잘 들어
두 사람의 천한 자식이 언제까지 별장에 있나 끝까지 두고 볼 심산이었다.“덜컥...”그때 누군가 강씨 본가의 별장 대문을 열었다. 그 소리에 천우혁은 자세를 벌떡 고쳐 앉고 섬뜩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페라리 한 대가 별장에서 나왔다. 운전석에 송아름이 앉아있었고 강하성이 조수석에 앉아있었다.“하성아, 오늘 네 아빠가 저녁에 집에 와서 식사한다고 하니까 신선한 음식 재료 많이 사 와서 맛있는 거 만들어 먹을까?”강하성이 대답했다.“네.”두 사람은 그 근처의 시장으로 향했다. 천우혁은 그 차에 강하성이 타고 있는 걸 확인하고는 바로 차에 시동을 걸고 따라갔다.시장에 도착하자 송아름은 차를 주차한 후 강하성을 안고 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강하성의 손을 잡고 시장으로 들어갔다. 강하성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신선한 음식 재료를 열심히 골랐다.그때 천우혁도 시장으로 들어왔다. 그는 손에 싸늘함이 감도는 비수를 꽉 쥐고 있었는데 기회를 포착한 후 망설임 없이 강하성을 찌르려 했다.“죽어!”송아름이 그를 발견했을 때 비수는 이미 강하성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조심해!”그녀는 소리를 지르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강하성을 밀쳐내면서 자신의 몸으로 막았다.“푹!”날카로운 비수가 송아름의 몸에 꽂히면서 시뻘건 피가 순식간에 사방으로 튀었다.“세상에나!”“누가 사람을 죽여요!”갑작스러운 상황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고 본능적으로 뿔뿔이 도망쳤다.강하성을 죽이지 못한 걸 알아차린 천우혁은 조급한 나머지 송아름의 몸에 꽂혀있던 비수를 다시 뽑았다.그의 눈빛이 무서울 정도로 섬뜩했고 피가 묻은 비수를 높게 든 채 다시 한번 강하성을 찌르려 했다.송아름은 자신이 다친 곳 따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비수를 높이 든 그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녀는 있는 힘껏 말리면서 강하성에게 소리를 질렀다.“하성아, 얼른 도망쳐!”강하성의 작은 얼굴도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어찌나 세게 놀랐는지 제자리에 멍하니 얼어붙었다. 강하성은 문득 예전
송아름은 칼에 찔리면서 피를 많이 흘렸다. 방금 수술을 마치고 상처를 꿰맨 후 병실로 돌아와서야 겨우 깨어났다.지금 그녀는 몸이 아주 허약한 상태였고 안색도 백지장처럼 새하얬다. 그런데도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성이가 다치지 않고 무사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하성이만 무사하다면 전 더 심하게 다쳐도 상관없어요.”고은희가 뭐라 하려던 그때 강주환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송아름이 한 얘기를 마침 다 들었다.“주환 씨...”강주환을 보자마자 송아름의 눈빛이 삽시간에 반짝였다가 이내 다시 어두워졌다.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늘어뜨리며 자책했다.“미안해요. 하성이 데리고 시장에 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데려가지만 않았어도 오늘 같은 일은 없었을 것이고 하성이도 놀라지 않았을 거예요.”고은희가 말했다.“무슨 그런 말을 해. 오늘 아름이 네가 목숨 걸고 하성이 대신 칼을 맞지 않았더라면 하성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지 아무도 몰라.”그러면서 강주환을 쳐다보았다.“하성이가 무사한 건 다 아름이 덕이야. 아빠로서 아름이에게 제대로 감사의 인사를 해야지.”강주환이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고은희가 먼저 결정해버렸다.“그냥 아름이와 결혼하는 게 좋겠어.”강주환이 눈살을 찌푸리자 고은희가 말했다.“왜? 아름이는 네 아들을 지키겠다고 목숨까지 내걸었어. 그런데도 결혼 안 할 거야? 아름이 같은 좋은 여자를 어디 가서 찾아? 너에게 진심이고 하성이도 목숨처럼 아끼는데. 너 그거 알아? 아름이가 하성이를 데리고 시장에 간 건 네가 저녁에 집으로 온다니까 맛있는 거 해주려고 간 거야.”고은희는 계속하여 잔소리를 늘어놓으려 했다.“콜록콜록.”송아름이 힘들게 기침하자 고은희는 다른 걸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송아름을 쳐다보았다.“왜 갑자기 기침해? 상처 안 아파?”“저 괜찮아요, 이모.”송아름은 고은희를 보며 말했다.“전에 저와 주환 씨의 일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그런데 왜 또 저와 결혼하라
남서훈은 싱긋 웃었다.아직 임신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맥으로 정확히 짚어 낼 순 없었지만 느낌은...“아마 남동생일 거야.”“아... 남동생...”양나나는 눈을 굴리더니 남서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남동생도 좋은 것 같아요. 동생 태어나면 저랑 엄마가 동생한테 의술도 가르쳐주고 아빠랑 사업하는 것도 배우고요. 그리고 남자애는 너무 응석 받아줄 필요도 없고 내가 맘껏 부려 먹을 수 있잖아요.”자기 뒤꽁무니를 쫄랑쫄랑 따라다니며 누나, 누나 하고 부르는 장면을 상상하니 양나나는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어떻게 생긴 남동생이 엄마 배 속에서 태어날까, 양나나도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그러나 남서훈이 임신 다섯 달째로 접어드는 어느 날, 양나나는 실종됐다.양준회와 남서훈은 매일 안절부절못하여 속이 타들어 갔다.둘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세력을 동원해 전 세계 각 곳을 샅샅이 뒤졌지만 여전히 양나나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양나나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그때 양나나는 이미 8살이었다.남서훈은 딸을 찾지 못해 날마다 눈물로 얼굴을 적셨다. 그녀는 점점 야위어갔다.그걸 보는 양준회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는 아내를 꼭 끌어안고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나는 똑똑한 아이야. 당신이 의술과 독 쓰는 법도 잘 가르쳐줬으니까 별일 없을 거야. 나나는 너와 내가 낳은 딸이야. 전에 풍운파에 혼자 몰래 들어가서도 그 안을 마구 헤집고 다녔잖아.”아무튼 그는 양나나가 어디에 가서 어떠한 상황에 부딪히던 자신을 잘 보호할 거라고, 아무 일 없이 잘 살아 있을 거라고 남서훈을 위로했다.남서훈도 굳게 믿고 있었다. 양나나의 시체를 보게 되지 않는 한 그들의 딸은 세상 어딘가에 꼭 살아있을 거라고.그 후 넉 달이 지났다. 9달이 된 배는 불룩하게 튀어나왔다.양나나는 아직도 찾지 못했고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그러다 남서훈은 아들을 낳았다. 강보에 싸여 품에 안겨있는 아들을 보며 남서훈은 양나나를 그리워했다.“나나야,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네 뒤꽁무
그리고 바로 그날 오후.양준회와 남서훈, 그리고 백나연과 성진훤, 이렇게 네 사람은 백무산을 찾아갔다.그를 만나자마자 양준회와 성진훤은 백무산한테 사과부터 했다.어리둥절한 백무산은 그들이 왜 갑자기 찾아와서 사과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 후 양준회는 남서훈의 어깨를 와락 감싸안았고 성진훤도 보란 듯이 백나연의 손을 꼭 잡았다. 성진훤은 원래 양준회처럼 백나연을 확 끌어안고 싶었지만 미래 장인어른이 될 사람 앞이라 행동을 조심스럽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여 손만 잡았다.백무산은 더 혼란스럽고 얼떨떨해졌다.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그는 눈알이 튀어져 나올 듯하게 그들 넷을 번갈아 쳐다봤다.그때 양준회가 입을 열었다.“어르신, 우리 서훈이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입니다. 남씨 집안의 특수한 사정으로 어릴 때부터 남장을 했던 것이고, 백나연 씨와의 혼약도 그저 소동극이었습니다. 이 일은 서훈이한테 책임 묻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노여움이 있으시면 저한테 푸세요.”그 말에 백무산은 눈살을 찌푸렸다.남서훈이 여자라니... 어떻게 그런 일이?여자가 그의 딸과 약혼했다니,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었다.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란 말인가.백무산은 불같이 화를 냈다.그러자 백나연이 나섰다.“아빠, 이 일은 서훈이 탓이 아니에요, 제가, 제가 꼭 도와달라고 했어요.”“뭐야? 널 도와줘?”“네.”백나연이 설명했다,“아빠랑 오빠가 자꾸 소개팅 주선하는 바람에 제가 너무 골치 아파서 서훈이한테 도와달라고 부탁한 거예요, 나랑 약혼하자고. 그럼 아빠랑 오빠가 나한테 선 자리를 더는 강요 안 할 거 아니에요. 서훈이는 싫다고 했는데 내가 억지 써서 해주기로 한 거예요.”백나연은 자기 잘못이라고 매우 강조했다.그녀의 눈빛에 아픔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전 그때 결혼할 생각이 없었어요... 그리고 저랑 서훈이는 서로 약속했어요. 누가 먼저 운명의 상대를 만나게 되든, 그때 되면 파혼하기로요. 절대 서로의 앞날을 방해하지 않기로 했어요. 이제
그 순간 용준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한 번 떨어지기 시작한 눈물은 그칠 줄을 모르고 펑펑 쏟아졌다.이게 얼마 만인가.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고 싶은 생각을 항상 했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그는 오늘 끝내 그녀를 안을 수 있었다. 팔을 뻗어 그녀를 껴안고 얼굴을 그녀의 어깨에 파묻은 채 용준은 또 한참을 울었다.예서는 그가 평생 사랑한 유일한 여자였다.그는 품속에 있는 그녀를 부드럽고 진실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난 네가 고마워. 넌 너무 용감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용감해. 옛날 일은 이미 다 지나갔어. 넌 이것만 기억해. 난 널 사랑하고, 네가 있어야만 내가 살 수 있어. 네가 있으니까 내가 괴물로 변하지 않은 거야. 아니면 난 모든 걸 다 망가뜨렸을 거야. 스스로도 혐오하는 그런 나쁜 인간으로 돼버렸을 거야.”예서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도 알고 있었다. 남자가 하려는 말이 뭔지 그녀는 모두 알고 있었다.이날, 둘은 아주 오랫동안 얘기를 나눴다.예서는 더는 용준을 불편해하지 않았다. 용준이 있으므로 하여 그녀는 더 빨리 회복될 것이었다.그렇게 예서가 하루하루 나아지고 있을 때. 남서훈과 양나나는 한 번 나가 돌아다니기로 했다.한 거리의 상가 앞을 지나가고 있는데, 남자애 몇 명이 갑자기 튀어나와 양나나를 에워쌌다.그들은 매우 들뜬 소리로 말했다.“대장! 살아 있었어요?”“너무 잘 됐어요!”“대장, 대장을 그 사람들이 데려간 후로 우린 계속 대장의 소식을 기다렸어요. 대장도 그 애들처럼 상처투성이가 돼서 돌아오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다고요.”“지금은 어떤 상황이에요? 대장이 후계자가 된 거예요?”양나나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 라고 대답했다.그리고 주변을 둘러싼 남자애들한테 말했다.“난 후계자 되는 것에 관심 없어. 풍운파에 지금 남아있는 건 의술을 배우기 위해서야.”양나나는 시선을 남서훈한테 향하며 그들한테 남서훈을 소개했다.“이분이 내 스승님이야, 우리 스승님 엄청 대단해!”그날, 양나나는 그
지난 날에 발생한 그 끔찍한 과거를 스스로 입에 올리는 용준은 피가 흘러나올 듯이 눈이 시뻘겋게 물들었고 감정이 폭발할 한계치까지 다다랐다.그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애써 가라앉혔다.몇 분 후에야 그는 비로소 다시 입을 열었다.“그놈들은 죄다 죽여버려야 할 놈들이에요. 예서가 이쁘니까, 내 앞에서 예서를... 그때 예서는 이미 내 아이를 임신했는데...”용준의 온몸에서 난폭한 기운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돌아서서 주먹으로 나무를 세게 한 방 내리쳤다. 그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낙엽이 우수수 떨어졌다.그 큰 나무가 흔들릴 정도면 얼마나 센 펀치를 날렸는지 알 수 있었다.그의 손마디도 살이 찢겨나가 새빨간 피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는 감각을 느낄 수 없는 사람처럼 상처에 무덤덤했다. 아마도 손보다 마음이 더 아팠을 터였다.용준은 그때 일만 생각하면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심장이 뜯겨나가는 것처럼 아팠다. 예서가 피투성이가 된 채 텅 빈 눈으로 누더기 인형처럼 맥없이 쓰러져서 누워있던 참혹한 장면만 머릿속에 떠올리면 그놈들을 무참하게 도륙을 내고 싶었다.그리고 그는 그렇게 하였다.풍운파의 보스가 된 후 첫 번째로 한 일이 바로 예서의 복수를 하는 것이었다.그놈들의 범죄증거를 전부 찾아내 한 명도 빠짐없이 직접 처단했다.그때 그들은 무릎을 꿇고 울며불며 용서를 빌었다. 막다른 길에 몰려 살려고 해도 안 되고 죽으려고 해도 죽지 못할 때, 그들은 찌질이같이 눈물 콧물을 쥐어짜며 애원했다. 제발 살려달라고, 잘못했다고.정작 그들은 용준이나 예서한테 그런 자비를 베푼 적이 없는데 말이다.용준의 목소리는 점점 차가워졌다.“그것들이 나와 예서의 모든 것을 망치고 날 시궁창에 몰아넣었죠. 여전히 난 이렇게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생지옥에서 살고 있어요. 그것들은 백번 죽어도 마땅해요!”그러나 그놈들이 죽는다고 해서 상처가 아무는 것은 아니었다.용준은 피로 물든 주먹을 으스러지게 잡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들은 예서가 그들이 한
용준은 원래 정직한 사람이었고, 금호의 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그는 어둠이 없는 밝은 햇빛 아래에서 사는 반듯한 사람이었다.그러나 일부 국제조직에서는 용준을 불안하게 여겼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고, 심지어 그가 의심되어 오랫동안 그에게 전자발찌를 채웠다.아무 일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그는 범죄자 취급을 당했고, 그리하여 생활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더더욱 생각지도 못한 건, 그 당시 그와 깊은 사랑에 빠져있었던 여자친구마저 누구한테 몹쓸 짓을 당하게 된 것이다.그러므로 용준이 점점 나쁘게 변하여 나중에 어떤 일을 저지르게 되었던, 모두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요 몇 년 동안 풍운파는 용준의 관리하에 동남아에서 제일 큰 폭력조직으로 성장하였고, 닥치는 대로 무슨 일이나 다 저지르는 편이었지만 딱 한 가지 철칙이 있었다. 그건 바로 노약자와 여자, 아이들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거였다.의리도 지켰다.하지만...“그건 중요하지 않아요.”남서훈이 말했다.“이 세상은 원래 흑과 백으로 나뉘는 게 아니니깐요. 동남아는 원래 상황이 어수선하잖아요. 무장세력과 폭력조직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일시적으로 바꿀 수도 없어요. 오히려 풍운파와 같은 조직이 있다는 게 더 도움이 될지도 몰라요.”양준회가 그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어떤 측면으로 보면 용준은 꽤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둘은 원수지간이다. 양준회가 그의 아버지를 죽였다. 비록 지금까지는 아무 짓을 안 했어도, 또 그가 원래 정직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풍운파를 이렇게 여러 해 동안 다스린 용준이 지금은 어떤 사람인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그리하여 양준회는 안심할 수 없었다. 여전히 남서훈과 같이 풍운파를 즉시 떠나려고 했다.“하지만 나나도 여기 있어요.”남서훈이 예상치도 못한 폭탄을 터트렸다. 양준회는 깜짝 놀랐다.양나나가 여기에 있다는 건 상상도 못 했다.하지만 놀란 것도 잠시, 그는 바로 말했다.“그럼 나나도 같이 떠나면 돼.”갇힌 두 달
강하영이 부케를 내던지는 일순간 우양주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부케를 향해 몸을 날렸다. 공중에서 부케를 잽싸게 낚아채는 그의 모습이 정지화면인 양 사람들의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부케를 손에 쥔 그다음 순간, 그는 부케와 함께 바다에 떨어졌다.모두가 경악했다.강하영은 크루즈 난간 쪽으로 달려가 바다에서 허우적대는 남자를 보며 입을 떡 벌리고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선원들이 즉시 튜브를 던졌고, 또 어떤 사람들은 즉시 뛰어내려 구조하려 했지만 강주환이 그들을 말렸다.왜 구하지 말라는 건지 이해 안 된다는 듯한 눈빛으로 윤성아는 강주환을 쳐다봤다.그러다 팔로 물살을 가르며 바다에 둥둥 떠 있는 우양주가 크루즈 위에 있는 강하영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치는 걸 듣고 왜 그러는지 알 것만 같았다.“여보, 어쨌든 내가 부케 받았으니까 당신 나랑 결혼식 치러야 돼요! 안 그러면...”그 뒤엔 위협적인 말이 따라야 하는데 우양주도 무엇으로 강하영을 협박할 수 있을지 몰랐다. 남은 건 자신의 이 몸뚱이 하나뿐인데...“안 그러면 나 안 올라갈 거야. 여기 바다에 계속 있을 거야, 결혼식도 못 하는데 그냥 빠져 죽지 뭐.”강하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바다에 빠진 남자를 까만 눈동자로 차분하게 내려다보며 끝내 입을 열었다.“빠져 죽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 안 말려요.”“...”우양주는 서럽게 그녀를 쳐다봤다.역시나 아내는 매정했고 자신에 대해 애정이 없었다.그러나 그때 윤성아 곁에 서있는 강주환이 무덤덤하게 한마디 했다.“내 기억이 맞다면, 이 바다에 상어가 출몰한다고 했어요. 식인 상어.”강주환은 고개를 돌려 강하영한테 말했다. “지금 아직 상어가 오지 않아서 그렇지, 나타나기만 하면 한꺼번에 열 몇 마리씩 무리 지어서 나올 거예요. 그게 게네들 습성이라. 이야... 쟨 아마 그러면 뼛조각도 남지 않겠네.”“...”그 말에 강하영이 급해 났다. 말투도 전처럼 차분하고 담담하지 않았다.난간에 기대어 우양주를 향해 내리 소리 질렀다.“뭐
미리 준비한 축사를 울먹이며 끝까지 다 읽고는 원이림을 향해 볼멘소리를 했다.“너 이 놈 자식, 내가 죽을 때까지 네가 결혼하는 걸 못 보는 줄 알았다. 아이고... 드디어 결혼하는구나. 너도 이제 가정이 생겼어.”“너 똑바로 들어. 은진이한테 평생 잘 해줘야 돼, 아내한테 잘 하는 건 우리 집안 내력이야. 나도 네 엄마 말을 엄청 잘 들었어. 너도 똑같아, 알겠니? 오늘부터는 은진이한테 더 잘해야 돼, 말도 잘 듣고, 은진이부터 생각하고 배려해 주고. 은진이가 조금이라도 맘고생을 하게 되는 날엔 내가 너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알겠어?!”원이림은 새카만 눈동자로 여은진을 깊게, 애틋하게 들여다보며 그녀와 깍지를 낀 두 손에 힘을 더 주었다.“걱정 마세요. 난 평생 우리 여보 맘고생 안 시킬 거예요.”여보라는 호칭이 지금 이 시각부터 명실상부하게 되었다.원이림은 그녀의 손을 잡고 크루즈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그리고 미리 준비된 데이지 꽃을 바다로 뿌렸다. 하얀 꽃잎들이 파도에 실려 멀리 떠내려갔다.둘은 거기에 선 채 눈물을 머금고 울먹이며 말했다.“어머니, 아버지. 저 너무 행복해요. 우리 너무 행복해요.”결혼식의 마지막을 장식할 부케 토스하는 시간이 다가왔다.강주환과 윤성아, 그리고 나엽과 안효연은 모두 기혼자로서 나가지 않고 구경만 했다. 하객 중에 미혼인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다.우양주도 강하영의 손을 잡고 그리로 향했다.강하영은 몸을 뒤로 빼면서 말했다.“우린 결혼했는데 왜 부케를 받으러 가요? 다른 사람한테 갈 좋은 축복을 왜 우리끼리 받겠다고 달려들어요, 쓸데없이. 그렇게 할 일 없고 힘이 남아돌면 내가 다른 일 하게 해 줄게요.”“무슨 일?”강하영은 푸른 바다를 향해 눈을 힐끔 하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당신 수영 좋아하잖아요. 내가 엉덩이 확 걷어찰 테니까 바다로 들어가서 수영이나 할래요?”“...”저번에 강하영과 같이 수영하면서 그녀가 자신한테 새빨간 수영팬티를 사줘 창피를 당하고 나서부터 우양주는 수영하는
여은진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예쁘게 미소 지었다.“나 다 알아요.”지난 1년 동안 그가 어떻게 해왔는지 잘 아는 그녀는 더 이상의 맹세와 언약 같은 건 필요 없었다.“응!”여은진을 안은 채로 원이림은 그녀의 여린 입술에 쪽쪽거리며 뽀뽀를 했다.장내의 플래시 세례가 정신없이 터지는 가운데 그는 돌아서서 무대 아래에 앉아있는 모든 사람한테 당찬 목소리로 선포했다.“오늘 저의 이 행복한 순간을 지켜본 여기 계신 모든 증인 분들한테 제가 선물을 준비할 생각입니다. 나중에 저희 베린 그룹에 가셔서 선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 달 20일에 저와 은진이의 결혼식이 있을 예정이니 여러분들께서 모두 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여은진을 안고 시상대를 내려가려 했다.여은진이 내려달라고 했지만 그는 내려놓지 않았다. 그렇게 안은 채로 시상식장을 걸어 나와 차에 올라탔다.럭셔리한 롤스로이스가 천천히 내달리고 있었다.여은진은 아직도 그의 품에 안긴 채로 있었다.“이번 달 20일에 결혼한다고요? 그럼 열흘밖에 안 남았는데, 너무 촉박하지 않아요?”그녀가 눈을 들어 바라보며 물었다.“아니, 전혀.”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떨구며 원이림이 말했다.“시간이 모자라지만 않았으면 내일에라도 당장 결혼식 치르고 싶어.”반년이 넘는 동안, 그는 매일 결혼식에 관한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결혼반지, 웨딩드레스, 그리고 결혼에 필요한 모든 물품과 디테일한 사항들을 전부 준비하고 체크했다. 그녀가 결혼을 동의하는 그 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그리고 그 순간이 끝내 다가왔다.웨딩사진을 찍는 것 외에는 크게 시간을 들일 일도 없었다.다만 여은진이 임신했기 때문에 너무 빠듯하게 스케줄을 잡지 않고 싶었을 뿐이다.결혼식에 참석할 하객을 초대하는 일도 있긴 하지만 10일이면 충분했다.촉박하지 않을뿐더러 시간적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여보, 우리 지금 바로 혼인신고 하러 가.”원이림은 한시라도 더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기사한테 얘기하여 구청으로 가자
원이림은 금방 샤워를 마친 여은진한테로 다가가 그녀의 팔을 끌어당겨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다음에는 당연히 침대로 향했다.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수순을 밟아갔다.한창 격렬해지려던 찰나, 원이림은 짧게 비명을 질렀다. 크게 지르진 않았다. 본능적으로 소리를 내질렀지만 그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여은진이 알아차리지도 못한 새에 살에 푹 찔린 그 가는 물건을 빼내야겠다고 머릿속으로 빨리 반응했다.하지만 역시 늦었다.여은진이 몸을 일으켜 스탠드를 켰고, 어두웠던 방안은 환한 빛으로 채워졌다.이어 급히 그를 살피던 여은진은 원이림의 엉덩이에 바늘이 하나 꽂혀있는 걸 발견했다.짧고 가는 옷을 꿰맬 때 쓰는 그런 바늘이었다.여은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얼굴로 남자를 보며 물었다.“어떻게 바늘에 찔릴 수 있어요? 침대에 왜 바늘이...”“...”꽂힌 바늘을 빼며 원이림은 이야기를 얼버무렸다.“괜찮아, 그냥 바늘인데 뭐. 별로 아프지도 않아.”그러고는 또 다짜고짜 몸을 뒤집으며 여은진을 몸 아래로 깔았다.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손을 뻗어 스탠드를 끄고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탐했다. 잠깐 벌어진 에피소드를 그녀의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진행 중이었던 일을 마무리하려는 의지였다.하지만 여은진은 그의 키스를 받아내면서도 오후 그의 당황스러운 표정과 난데없이 침대에 나타난 바늘을 함께 떠올렸다. 정신을 쏙 빼놓으려는 지금의 행동도 분명 그것과 연관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잠깐만.”여은진은 원이림을 밀어내고 다시 한번 스탠드를 켰다.의심이 부풀어 오른 눈으로 빤히 그를 노려봤다. “똑바로 말해요. 아까 그 바늘로 수작 부린 거 맞죠? 말해요, 몇 개나 찔렀어요?”“...”끝내는 발각되었다. 원이림은 이실직고했다. 강주환이 원흉이라고, 그가 시켜서 했다고 불었다.“여보, 나 며칠 전에 운봉 비즈니스 회담에 참석했는데 거기서 강주환을 만났어. 그 자식이 날 비웃는 거야. 그리고 이렇게 하라고 아이디어를 내줬어. 바늘로 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