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식간에 선을 그어버린 윤아. 계산까지 이 정도로 정확히 한다니. 수현은 이해할 수 없었다.‘혹시 이러는 이유가... 그 사람 때문인가.’이튿날, 윤아는 노트북을 수리하러 갔다. 십만 원 정도가 들었지만 나름 괜찮았다. 이제 이 회사에 있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새 노트북을 사는 건 낭비였다.윤아는 연수와 함께 아침을 먹으러 회사 근처의 브런치 가게로 향했다. 그녀는 밥을 먹으면서도 어김없이 일 얘기를 시작했다.연수는 잔뜩 풀이 죽어 커피만 마셔대며 윤아를 힐끗 봤다.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윤아가 요즘 들어 너무 무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쩍 많은 걸 가르쳐주려고 하기도 한다. 전부 감탄만 나오는 것들을 말이다. 생각에 빠져있던 연수는 입안의 커피를 꿀꺽 넘기고는 물었다.“윤아 님. 저 뭐 좀 물어봐도 돼요?”윤아는 연수를 한 눈 보고는 말했다.“말해요.”연수는 주변을 한번 살피고는 경계태세로 잔뜩 수상하게 윤아의 곁에 다가왔다.“혹시 회사 그만두시려는 거예요?”윤아:“...”‘참 눈치도 빠르네.’윤아는 입술을 앙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연수는 곤란해하는 윤아의 기색에 되려 당황하며 말했다.“윤...윤아님. 제가 일부러 떠보려거나 그런 게 아니라요. 그냥 요즘 갑자기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아서... 게다가 부쩍 많은 걸 가르쳐주시기도 하고요. 그래서 든 생각이에요.”“맞아요.”윤아는 지금 연수에게 알려도 괜찮겠다는 생각에 부정하지 않았다.“그니까 잘 배워둬요. 남은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믿을 수 없다는 듯, 연수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윤아 님...”윤아는 하던 일을 끝마치고 노트북을 접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아직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하지 말아줘요.”연수는 그저 멍하니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는 충격적인 소식에 뒤늦게 슬픔이 밀려왔다. 마음속에 큰 파도가 덮쳐 심장을 집어삼키는 느낌이었다. 어제 윤아가 갑자기 그렇게 화를 낼 때는 자신이 한 말 때문에 화가 난 줄 알고 어리둥절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어제 분명 거절의 의사를 밝혔는데도 불구하고 또 도시락을 가져다주겠다고 찾아온 소영. 윤아는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애를 쓰는 소영의 모습이 그저 우스웠다. 이제는 그녀의 속셈을 추측하고 싶지도, 그녀를 상대하고 싶지도 않았다.“윤아 씨. 전에 한번 아프더니 몸이 많이 안 좋아졌네요. 오늘은 특별히 삼계탕을 준비했어요. 정말 한 입도 안 먹어줄 거예요?”윤아는 턱을 괸 채 여유만만하게 소영을 바라봤다.이곳엔 둘 뿐인데 왜 여기서까지 착한 척을 하는 것인지 윤아는 보기만 해도 자기가 덩달아 피곤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신나게 돌리던 펜도 내려놓고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안 피곤해요? 이러면?’이렇게 착한 척 하는 게 피곤하지 않냐는 질문이었다.하지만 소영은 윤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듯 화제를 돌렸다.“직접 좋아하는 사람에게 줄 음식을 하는 건데 힘들긴요. 맛있게 먹어주는 모습만 봐도 행복한걸요.”소영은 이 정도로는 윤아를 비꼬기에 부족한지 말을 더 보탰다.“윤아 씨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제 기분 알게 될 거예요. 평생을 하라고 해도 하고 싶은걸요?”말을 마친 소영은 윤아를 빤히 쳐다봤다. 윤아의 발끈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윤아는 잔잔한 호수마냥 평온한 얼굴로 말을 던졌다.“그래요? 그럼 그 소망 꼭 이루길 바랄게요.”소영은 주먹으로 솜뭉치를 친 것만 같은 밋밋한 타격감에 힘이 쭉 빠지며 짜증이 확 밀려왔다.‘왜! 왜 이 여자는 매번 아무렇지 않은 거야. 분명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는데.’윤아는 항상 그랬듯 별일 아니라는 듯 소영의 공격을 흘려버렸다. 그 바람에 소영은 자기만 안달 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에 매번 기분을 잡쳤다.마침 그때, 연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강소영을 한 눈 보고는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치려다가 윤아가 어제 했던 말을 떠올리고 간신히 참아냈다. 연수는 목을 가다듬고 윤아에게 말했다.“윤아 님. 이 비서님이 찾으러 오셨어요.”“들어오시라 해요.”사무실에 들어온 이성민은 소
더 챙겨달라고?이성민의 말에 소영은 얼이 빠진 사람처럼 그 자리에 멀뚱히 서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고 재차 확인했다.“뭐...뭐라고요?”성민은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밝게 웃었다.“그냥 얻어먹으려는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얼마 필요하신지 말씀해주시면 저희가 드리겠습니다.”윤아는 입을 꾹 닫은 채 어이가 없다는 듯 수현의 조수 이성민을 바라봤다. 윤아는 이 사람이 지금 소영에게 아부를 떠는 것인지 뭘 하려는 건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반면 강소영은 이미 똥 씹은 표정이 되어 있었다.‘얼마 주면 되냐고? 지금 날 뭐로 보는 거야? 내가 도우미 아줌마야? 아니면 뭐 식당 아줌마로 보이는 거야?’소영은 성민이 드디어 사태파악을 한 줄 알았는데 전보다 더 재수가 없어져서 돌아올 줄은 몰랐다. ‘이거 지금 나 엿 먹이려는 거지?’더 최악인 것은 소영은 지금 진 씨 집안의 안주인이 아니기에 화를 내지도 못한다는 거다. 소영은 간신히 입꼬리를 올리고는 애써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돈은 필요 없어요. 좋아하신다니 내일부터는 사무실 직원들 몫까지 준비할게요.”“정말입니까?”성민은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너무 번거롭게 해드린 게 아닌지. 그리고 대표님이 허락하실까요? 저희 혼나는 거 아니겠죠?”소영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잘 말해볼게요.”“그래 주시면 너무 감사하죠.”소영은 더는 윤아의 사무실에 있을 수 없을 것 같아 고개를 휙 돌려 나가버렸다.소영이 떠나자 사무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성민은 곧바로 들고 있던 도시락을 책상 위에 올려놓더니 불쾌한 듯 손을 탈탈 털며 말했다.“누가 이런 걸 먹기 좋아한다고. 반은 가공품인 음식을 가져다가 직접 한 거라고 말하고 다닌다니. 참 뻔뻔하기도 하지.”윤아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어리둥절해졌다.“그럼 조금 전엔 왜?’성민은 윤아를 보며 씩 웃고는 말했다.“심 비서님 대신 골탕 좀 먹여주려는 거죠. 제가 모시는 사모님은 심비서님뿐이니까
윤아의 사무실에서 나오는 소영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고 두 손은 주먹을 꽉 쥔 채 부들거리고 있었다.고작 조수 나부랭이 주제에 자신을 농락했다는 사실을 그녀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안에서 화를 내진 못했지만 소영은 이미 머리끝까지 화가 차올라 더는 참을 수 없었다.소영은 수현의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말투에서는 조금의 분노도 보이지 않았다. 소영은 애써 부글거리는 마음을 감추며 수현이 마음 아파하는 모습을 보려고 했다.그러나 그녀의 말이 끝나도록 아무런 반응도 없는 수현.“수현 씨?”소영이 의아해서 그를 쳐다봤다. 수현은 노트북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정신은 딴 데 팔려있는 듯 보였다. 무슨 생각에 잠겨있는지 그저 멍하니 앉아있는 수현을 보며 소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소영이 그를 두 번이나 더 부른 후에야 정신을 차리는 수현.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소영을 보며 말했다.“어. 왔어?”소영:“...”‘온 지 한참이나 됐는데... 그럼 여태 한 말을 하나도 안 들었다는 건가.’소영은 급격히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녀는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응. 한참 전에 왔는데. 말해도 반응도 없고...”소영은 수현을 한번 떠봤다.“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수현은 이제 사색에서 벗어났는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야.”수현은 소영이 들고 있던 도시락을 사라진 걸 보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윤아가 네가 준 걸 받았어?”‘어제는 다시 돌려보내더니...’그의 말에 소영이 고개를 저었다.“아니. 내가 만든 음식은 별로 먹고 싶지 않은가 봐. 수현 씨. 내가 한 음식이 혹시 맛없는 건 아닐까?”수현은 먹는 데에 딱히 별다른 감흥이 없는 사람이었다. 음식은 그에게 그저 허기를 채울 수 있는 도구일 뿐, 뭐가 맛있고 뭐가 맛없는지는 딱히 구분해내지 못했다. 하지만 소영은 그를 구해준 은인이기에 대충 대할 수가 없었다. 수현은 어쩔 수 없이 가벼운 위로를 건넸다.“아니.
‘수현의 팔에 왜 이빨 자국이 있는 거지? 남자가 물었을 리는 없고.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소영은 낯빛이 창백해졌다. 심윤아 그 여자가 약속을 어길 줄이야._이튿날,소영은 윤아에게 도시락을 가져다준다는 핑계로 사람이 없는 틈을 타 그녀에게 따져 물었다.“심윤아 씨. 신세를 이딴 식으로 갚는 사람이었어요?”소영이 또 착한 척 ‘연극’을 하러 온 줄 알았던 윤아는 뜻밖의 가시 돋친 말에 눈썹을 추켜올리며 그녀를 바라봤다.“그게 무슨 뜻이에요?”“모르는 척하는 거예요?”소영이 이를 갈며 말했다. 그녀는 들고 있는 도시락통 모서리를 다 뜯어먹을 기세로 꽉 쥐고 있었지만 이글거리는 분노를 간신히 누르며 낮게 말했다.“저희가 약속한 제3조항, 이혼하기 전에는 수현 씨와 그 어떤 스킨십도 하지 않는다. 잊은 건 아니죠?”윤아는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네. 기억하죠. 그게 왜요?”“기억한다고요? 그렇게 했나요?”“네.”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할머님 앞에서 협조한 것 말고는 수현 씨와 그 어떤 스킨십도 없었어요.”윤아는 떳떳하게 말했지만 소영은 그런 윤아의 모습에 더 화가 났다.“거짓말! 당신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잔뜩 흥분한 소영의 모습에 윤아는 미간을 찌푸렸다.“어제 수현 씨 팔에 찍힌 이빨 자국을 봤어요.”소영은 말을 꺼내는 것조차도 불쾌해 치를 떨었다. 남자와 여자가 대체 무슨 상황이었길래 여자가 남자를 문단 말인가? 소영은 상상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렸다.소영의 말에 윤아는 잠시 멈칫했다. 이빨 자국이라는 말이 아니었으면 그 일을 완전히 잊을 뻔했다.“왜 말이 없어요? 찔리나 봐요?”소영이 이를 갈며 말했다.“심윤아 씨. 당신 애초에 약속을 지킬 생각도 없었죠?”“아니에요.”윤아는 고개를 들어 부정했다. 진 신세를 갚는 일인데 어떻게 약속을 어기겠는가. 하지만 수현과의 그 일은 윤아도 유감이었다.“아니라고요? 그럼 왜...”윤아는 하는 수 없이 소영의 말을 끊고 말했다.“확실히 설명하고 넘어가야 할
“그것도 아니면 사실 소영 씨도 수현 씨를 못 믿는 건가요?”윤아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가볍게 웃었다.“저도 걱정을 안 하는데 소영 씨는 뭐가 그렇게 걱정인 거죠?”소영이 그 자리에서 꿈쩍하지를 않자 윤아가 말을 이었다.“걱정 마요. 며칠 뒤면 할머님 수술도 끝나니까 조금만 참으면 소영 씨 뜻대로 될 거예요. 할머님 수술만 잘 되면 전 이곳을 떠나 5년 동안은 안 돌아올 거니까.”윤아의 말에 소영은 그제야 점차 이성을 찾았다.그래.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이야 어떻든 며칠 후면 모든 게 끝나 있을 것이다. 윤아와 수현의 말 같지도 않은 이 사이도. 그때가 되면 소영은 더는 지금처럼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될 것이다.“그래요. 일단은 윤아 씨를 믿어볼게요. 그때 가서도 한 말은 지켜요.”소영이 떠나자 방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윤아는 시선을 내려 자신의 아랫배를 가볍게 쓸었다.“아가야. 다 잘되길 기도해줘. 그때가 되면 엄마가 우리 아가 데리고 할아버지가 계시는 해외로 가서 살 거야. 할아버지도 분명 널 아주 좋아하실 거야.”아버지 얘기에 윤아는 얼마 전 그와 했던 통화를 떠올렸다.소영과 카페에서 만났던 그 날 이후에 심인철은 윤아에게 다시 전화했었다. 하지만 일이 바쁜 탓인지 통화 중에도 주변 사람들의 말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윤아는 아버지가 정신없이 바빠 보여 그 사실을 먼저 알리지 않았다. 결국 그저 짧은 몇 마디를 끝으로 통화를 끝났다._김선월의 수술 전날은 마침 주말이라 윤아는 수현과 함께 온종일 요양원에서 그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윤아는 행여나 할머님이 수술 때문에 긴장하실까 봐 일부러 재밌어 보이는 장난감도 이것저것 사다 드리고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 진상 고객들을 만났던 일들을 해주며 긴장을 풀어드렸다. 선월은 윤아의 이야기에 어느새 함박웃음을 터뜨렸다.수현은 그저 옆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월과 윤아의 즐거워하는 모습에 무표정이던 그의 얼굴에도 어느새 웃음이 옮아 은은한 미소로 번졌다. 모든 것이 순조
"알겠어."윤아는 사양하지 않았다. 그러나 갈아입을 옷을 챙기러 가려 할 때 잠시 고민하더니 머리를 돌려 물었다."내가 물어볼 게 있는데."이미 외투를 벗은 채 넥타이를 풀려고 하던 수현이 이 말을 듣자, 동작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말해봐.""내일 이혼 신고는 언제 하러 가? 할머님께서 수술하시기 전에? 아니면 수술 끝마치신 다음에?"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윤아는 수현 주위의 공기가 순간 차가워진 것을 느꼈다. 이어서 수현은 사나운 눈길로 윤아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이 눈빛...윤아는 수현의 시선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리고 지금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절대 적절하지 않음을 느꼈다.할머님께서 내일이면 곧 수술하실 텐데, 수현이라고 마음이 편할 리가 없을 것이다.생각을 정리한 윤아는 수현에게 사과했다."미안해. 내가 지금 이 얘기를 꺼내는 게 아닌데. 생각이 짧았어. 할머님께서 수술 끝마치신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 수현 씨도 얼른 가서 쉬어."이렇게 말한 윤아는 몸을 돌려 옷을 챙기러 가려 했다. 그러나 바로 이때, 수현이 갑자기 성큼성큼 걷더니 윤아의 앞길을 막고는 서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내일 그렇게 이혼하고 싶어?""아니, 난 그게 아니라...""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수현의 이 말을 들은 윤아는 멈칫하며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수현의 목소리와 눈빛은 눈서리가 몰아치는 시커먼 밤보다 더 차가웠고 더 추워 보였다."내일 구청이 문을 열자마자 가는 거야."말을 마치고 수현은 더는 그녀와 대치하지 않고 몸을 돌려 욕실에 들어갔다."..."'나더러 먼저 씻으라고 했으면서!'펑!욕실 문이 사정없이 닫기면서 큰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또다시 정적이 흘렀다.윤아는 눈을 내리깔며 제자리에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서랍에서 혼인 관계 증명서와 이혼 신고서를 꺼냈다. 그녀는 이 두 서류를 잠시 바라보다가 머리를 들었다. 시선이 마침 벽에 걸려있는 결혼사진에 닿았다. 액자는 등불 아래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평소 떠올리지 않으니 때로는 맑은 정신으로, 또 때로는 흐릿하게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예전의 순간들을 머리 속에 재현할수록 그 무심코 한 스킨십이 칼날처럼 그녀의 마음을 사정없이 베고 있었다.윤아는 온몸에 힘을 잃은 듯 벽에 스르륵 기대어 앉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조금, 조금이라도 그녀에게 마음이 있었다면 이토록 절망스럽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윤아가 마음을 정리하고 서류를 서랍에 다시 넣으려던 순간, 샤워를 마친 수현이 굳은 얼굴로 욕실에서 나왔다. 수현은 그녀의 곁을 지날 때 마침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두 장의 서류를 발견했다. 눈썰미가 좋은 그는 첫눈에 알아챘다. 혼인 관계 증명서와 이혼 신고서란 것을.수현의 표정은 더 굳어졌다. 그는 우뚝 멈춰선 채 싸늘한 시선으로 윤아를 바라보았다.잠시 후, 그는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정말 급하네, 심윤아.”윤아는 멈칫했다. 얇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뭐라도 말하려고 했으나 결국엔 손에 들고 있던 두 장의 서류를 꼭 쥔 채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뭘 말해야 할까.할 말이 없었고 더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이혼 얘기는 그가 꺼낸 것이고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도 그의 생명의 은인이었다.그리고 그녀는 지금 그의 생명의 은인에게 진 신세를 갚는 중이었다.그냥 이대로 내버려둬야지.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다. 더는 미련도 없었다. 이미 이년 동안이나 그와 함께 생활하며 그를 품었으니까. 그러니 앞으로의 삶을 살아 나가면서 이 이년이란 시간을 평생을 두고 떠올리고 회상하며 아끼리라. “내일이면 할머니께서 수술 마치셔. 그니까 더는 연기할 필요 없어. 난 오늘 서재에서 잘게.”결국 수현은 이 한마디를 남긴 뒤, 베개를 가지고 방을 나갔다.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윤아도 서류를 서랍에 도로 넣고 갈아입을 옷을 챙긴 뒤 욕실로 들어갔다.-이튿날.윤아는 핸드폰 알람 소리에 잠이 깼다. 그녀는 눈을 비비며 알람을 끄고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몸을 일으켰다.어젯밤, 거의 뜬눈으로 지새웠다고 할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