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수현은 잠시 멈칫했다. 잠시 후 그는 손가락으로 윤아의 입가에 묻은 붉은 핏자국을 꾹 누르며 반쯤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정말 질투 하는 거면 뭐 어때서? 잊었나 본데 넌 법적으로 내 아내야.”그의 퇴폐적인 목소리는 사람을 홀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수현은 말을 하는 동시에 윤아에게로 바짝 다가갔다. 그의 얇은 입술이 윤아의 입술에 다가가자 윤아는 뜨거운 열기가 얼굴을 감도는 것을 느꼈다.두 사람의 입술이 거의 닿으려 할 때, 윤아가 말했다.“법적으로 아내면 또 어때서? 그렇다고 수현 씨가 질투할 자격 있어?”수현은 멈칫했다.윤아는 옅은 미소와 함께 조롱을 곁들이며 말했다.“말을 바꿔서 그럼 질투했다고 쳐. 그럼 강소영 씨는 어쩌려고?”제3자의 등장에 수현은 야릇하던 감정이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사라졌다. 윤아의 입에서 강소영이 나올 줄 몰랐던 그는 어느새 눈빛이 차게 식었다.“강소영이 여기서 왜 나오는데?”윤아: “왜? 하면 안 돼? 그럼 수현 씨는 찬영 오빠에 대해 왜 얘기했는데?”수현: “...”둘은 한참을 정적 속에서 눈을 맞추다 결국 수현이 잡았던 손을 풀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윤아도 몸을 일으키고는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수현이 세게 잡은 탓에 그녀의 손목은 붉게 부어올랐다.“짐승같은 놈.”윤아는 낮은 소리로 한마디 내뱉고는 땅에 떨어진 노트북을 챙겼다. 바닥에 제대로 떨어져 버린 탓에 윤아는 노트북이 고장 나진 않았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렇게 일 분을 노트북을 켜보려고 시도했으나 아무래도 완전히 망가져버린듯 했다. 윤아는 일하기도 글렀으니 어쩔 수 없이 핸드폰을 꺼내 연수에게 문자를 남겼다.「노트북이 고장 나서 오늘은 이만하고 내일 회사에서 계속하죠.」메시지를 전송한 윤아는 노트북을 닫고 정리를 했다.수현은 윤아의 움직임을 옆에서 가만히 바라보았다. 대형 냉장고 못지않게 냉기를 뿜어내면서도 윤아의 곁에서 떠나질 않았다.윤아가 노트북을 닫자 수현이 입을 열었다.“일은 안 하나?”그걸 질문이라
순식간에 선을 그어버린 윤아. 계산까지 이 정도로 정확히 한다니. 수현은 이해할 수 없었다.‘혹시 이러는 이유가... 그 사람 때문인가.’이튿날, 윤아는 노트북을 수리하러 갔다. 십만 원 정도가 들었지만 나름 괜찮았다. 이제 이 회사에 있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새 노트북을 사는 건 낭비였다.윤아는 연수와 함께 아침을 먹으러 회사 근처의 브런치 가게로 향했다. 그녀는 밥을 먹으면서도 어김없이 일 얘기를 시작했다.연수는 잔뜩 풀이 죽어 커피만 마셔대며 윤아를 힐끗 봤다.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윤아가 요즘 들어 너무 무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쩍 많은 걸 가르쳐주려고 하기도 한다. 전부 감탄만 나오는 것들을 말이다. 생각에 빠져있던 연수는 입안의 커피를 꿀꺽 넘기고는 물었다.“윤아 님. 저 뭐 좀 물어봐도 돼요?”윤아는 연수를 한 눈 보고는 말했다.“말해요.”연수는 주변을 한번 살피고는 경계태세로 잔뜩 수상하게 윤아의 곁에 다가왔다.“혹시 회사 그만두시려는 거예요?”윤아:“...”‘참 눈치도 빠르네.’윤아는 입술을 앙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연수는 곤란해하는 윤아의 기색에 되려 당황하며 말했다.“윤...윤아님. 제가 일부러 떠보려거나 그런 게 아니라요. 그냥 요즘 갑자기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아서... 게다가 부쩍 많은 걸 가르쳐주시기도 하고요. 그래서 든 생각이에요.”“맞아요.”윤아는 지금 연수에게 알려도 괜찮겠다는 생각에 부정하지 않았다.“그니까 잘 배워둬요. 남은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믿을 수 없다는 듯, 연수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윤아 님...”윤아는 하던 일을 끝마치고 노트북을 접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아직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하지 말아줘요.”연수는 그저 멍하니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는 충격적인 소식에 뒤늦게 슬픔이 밀려왔다. 마음속에 큰 파도가 덮쳐 심장을 집어삼키는 느낌이었다. 어제 윤아가 갑자기 그렇게 화를 낼 때는 자신이 한 말 때문에 화가 난 줄 알고 어리둥절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어제 분명 거절의 의사를 밝혔는데도 불구하고 또 도시락을 가져다주겠다고 찾아온 소영. 윤아는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애를 쓰는 소영의 모습이 그저 우스웠다. 이제는 그녀의 속셈을 추측하고 싶지도, 그녀를 상대하고 싶지도 않았다.“윤아 씨. 전에 한번 아프더니 몸이 많이 안 좋아졌네요. 오늘은 특별히 삼계탕을 준비했어요. 정말 한 입도 안 먹어줄 거예요?”윤아는 턱을 괸 채 여유만만하게 소영을 바라봤다.이곳엔 둘 뿐인데 왜 여기서까지 착한 척을 하는 것인지 윤아는 보기만 해도 자기가 덩달아 피곤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신나게 돌리던 펜도 내려놓고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안 피곤해요? 이러면?’이렇게 착한 척 하는 게 피곤하지 않냐는 질문이었다.하지만 소영은 윤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듯 화제를 돌렸다.“직접 좋아하는 사람에게 줄 음식을 하는 건데 힘들긴요. 맛있게 먹어주는 모습만 봐도 행복한걸요.”소영은 이 정도로는 윤아를 비꼬기에 부족한지 말을 더 보탰다.“윤아 씨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제 기분 알게 될 거예요. 평생을 하라고 해도 하고 싶은걸요?”말을 마친 소영은 윤아를 빤히 쳐다봤다. 윤아의 발끈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윤아는 잔잔한 호수마냥 평온한 얼굴로 말을 던졌다.“그래요? 그럼 그 소망 꼭 이루길 바랄게요.”소영은 주먹으로 솜뭉치를 친 것만 같은 밋밋한 타격감에 힘이 쭉 빠지며 짜증이 확 밀려왔다.‘왜! 왜 이 여자는 매번 아무렇지 않은 거야. 분명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는데.’윤아는 항상 그랬듯 별일 아니라는 듯 소영의 공격을 흘려버렸다. 그 바람에 소영은 자기만 안달 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에 매번 기분을 잡쳤다.마침 그때, 연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강소영을 한 눈 보고는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치려다가 윤아가 어제 했던 말을 떠올리고 간신히 참아냈다. 연수는 목을 가다듬고 윤아에게 말했다.“윤아 님. 이 비서님이 찾으러 오셨어요.”“들어오시라 해요.”사무실에 들어온 이성민은 소
더 챙겨달라고?이성민의 말에 소영은 얼이 빠진 사람처럼 그 자리에 멀뚱히 서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고 재차 확인했다.“뭐...뭐라고요?”성민은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밝게 웃었다.“그냥 얻어먹으려는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얼마 필요하신지 말씀해주시면 저희가 드리겠습니다.”윤아는 입을 꾹 닫은 채 어이가 없다는 듯 수현의 조수 이성민을 바라봤다. 윤아는 이 사람이 지금 소영에게 아부를 떠는 것인지 뭘 하려는 건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반면 강소영은 이미 똥 씹은 표정이 되어 있었다.‘얼마 주면 되냐고? 지금 날 뭐로 보는 거야? 내가 도우미 아줌마야? 아니면 뭐 식당 아줌마로 보이는 거야?’소영은 성민이 드디어 사태파악을 한 줄 알았는데 전보다 더 재수가 없어져서 돌아올 줄은 몰랐다. ‘이거 지금 나 엿 먹이려는 거지?’더 최악인 것은 소영은 지금 진 씨 집안의 안주인이 아니기에 화를 내지도 못한다는 거다. 소영은 간신히 입꼬리를 올리고는 애써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돈은 필요 없어요. 좋아하신다니 내일부터는 사무실 직원들 몫까지 준비할게요.”“정말입니까?”성민은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너무 번거롭게 해드린 게 아닌지. 그리고 대표님이 허락하실까요? 저희 혼나는 거 아니겠죠?”소영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잘 말해볼게요.”“그래 주시면 너무 감사하죠.”소영은 더는 윤아의 사무실에 있을 수 없을 것 같아 고개를 휙 돌려 나가버렸다.소영이 떠나자 사무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성민은 곧바로 들고 있던 도시락을 책상 위에 올려놓더니 불쾌한 듯 손을 탈탈 털며 말했다.“누가 이런 걸 먹기 좋아한다고. 반은 가공품인 음식을 가져다가 직접 한 거라고 말하고 다닌다니. 참 뻔뻔하기도 하지.”윤아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어리둥절해졌다.“그럼 조금 전엔 왜?’성민은 윤아를 보며 씩 웃고는 말했다.“심 비서님 대신 골탕 좀 먹여주려는 거죠. 제가 모시는 사모님은 심비서님뿐이니까
윤아의 사무실에서 나오는 소영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고 두 손은 주먹을 꽉 쥔 채 부들거리고 있었다.고작 조수 나부랭이 주제에 자신을 농락했다는 사실을 그녀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안에서 화를 내진 못했지만 소영은 이미 머리끝까지 화가 차올라 더는 참을 수 없었다.소영은 수현의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말투에서는 조금의 분노도 보이지 않았다. 소영은 애써 부글거리는 마음을 감추며 수현이 마음 아파하는 모습을 보려고 했다.그러나 그녀의 말이 끝나도록 아무런 반응도 없는 수현.“수현 씨?”소영이 의아해서 그를 쳐다봤다. 수현은 노트북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정신은 딴 데 팔려있는 듯 보였다. 무슨 생각에 잠겨있는지 그저 멍하니 앉아있는 수현을 보며 소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소영이 그를 두 번이나 더 부른 후에야 정신을 차리는 수현.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소영을 보며 말했다.“어. 왔어?”소영:“...”‘온 지 한참이나 됐는데... 그럼 여태 한 말을 하나도 안 들었다는 건가.’소영은 급격히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녀는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응. 한참 전에 왔는데. 말해도 반응도 없고...”소영은 수현을 한번 떠봤다.“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수현은 이제 사색에서 벗어났는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야.”수현은 소영이 들고 있던 도시락을 사라진 걸 보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윤아가 네가 준 걸 받았어?”‘어제는 다시 돌려보내더니...’그의 말에 소영이 고개를 저었다.“아니. 내가 만든 음식은 별로 먹고 싶지 않은가 봐. 수현 씨. 내가 한 음식이 혹시 맛없는 건 아닐까?”수현은 먹는 데에 딱히 별다른 감흥이 없는 사람이었다. 음식은 그에게 그저 허기를 채울 수 있는 도구일 뿐, 뭐가 맛있고 뭐가 맛없는지는 딱히 구분해내지 못했다. 하지만 소영은 그를 구해준 은인이기에 대충 대할 수가 없었다. 수현은 어쩔 수 없이 가벼운 위로를 건넸다.“아니.
‘수현의 팔에 왜 이빨 자국이 있는 거지? 남자가 물었을 리는 없고.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소영은 낯빛이 창백해졌다. 심윤아 그 여자가 약속을 어길 줄이야._이튿날,소영은 윤아에게 도시락을 가져다준다는 핑계로 사람이 없는 틈을 타 그녀에게 따져 물었다.“심윤아 씨. 신세를 이딴 식으로 갚는 사람이었어요?”소영이 또 착한 척 ‘연극’을 하러 온 줄 알았던 윤아는 뜻밖의 가시 돋친 말에 눈썹을 추켜올리며 그녀를 바라봤다.“그게 무슨 뜻이에요?”“모르는 척하는 거예요?”소영이 이를 갈며 말했다. 그녀는 들고 있는 도시락통 모서리를 다 뜯어먹을 기세로 꽉 쥐고 있었지만 이글거리는 분노를 간신히 누르며 낮게 말했다.“저희가 약속한 제3조항, 이혼하기 전에는 수현 씨와 그 어떤 스킨십도 하지 않는다. 잊은 건 아니죠?”윤아는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네. 기억하죠. 그게 왜요?”“기억한다고요? 그렇게 했나요?”“네.”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할머님 앞에서 협조한 것 말고는 수현 씨와 그 어떤 스킨십도 없었어요.”윤아는 떳떳하게 말했지만 소영은 그런 윤아의 모습에 더 화가 났다.“거짓말! 당신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잔뜩 흥분한 소영의 모습에 윤아는 미간을 찌푸렸다.“어제 수현 씨 팔에 찍힌 이빨 자국을 봤어요.”소영은 말을 꺼내는 것조차도 불쾌해 치를 떨었다. 남자와 여자가 대체 무슨 상황이었길래 여자가 남자를 문단 말인가? 소영은 상상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렸다.소영의 말에 윤아는 잠시 멈칫했다. 이빨 자국이라는 말이 아니었으면 그 일을 완전히 잊을 뻔했다.“왜 말이 없어요? 찔리나 봐요?”소영이 이를 갈며 말했다.“심윤아 씨. 당신 애초에 약속을 지킬 생각도 없었죠?”“아니에요.”윤아는 고개를 들어 부정했다. 진 신세를 갚는 일인데 어떻게 약속을 어기겠는가. 하지만 수현과의 그 일은 윤아도 유감이었다.“아니라고요? 그럼 왜...”윤아는 하는 수 없이 소영의 말을 끊고 말했다.“확실히 설명하고 넘어가야 할
“그것도 아니면 사실 소영 씨도 수현 씨를 못 믿는 건가요?”윤아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가볍게 웃었다.“저도 걱정을 안 하는데 소영 씨는 뭐가 그렇게 걱정인 거죠?”소영이 그 자리에서 꿈쩍하지를 않자 윤아가 말을 이었다.“걱정 마요. 며칠 뒤면 할머님 수술도 끝나니까 조금만 참으면 소영 씨 뜻대로 될 거예요. 할머님 수술만 잘 되면 전 이곳을 떠나 5년 동안은 안 돌아올 거니까.”윤아의 말에 소영은 그제야 점차 이성을 찾았다.그래.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이야 어떻든 며칠 후면 모든 게 끝나 있을 것이다. 윤아와 수현의 말 같지도 않은 이 사이도. 그때가 되면 소영은 더는 지금처럼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될 것이다.“그래요. 일단은 윤아 씨를 믿어볼게요. 그때 가서도 한 말은 지켜요.”소영이 떠나자 방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윤아는 시선을 내려 자신의 아랫배를 가볍게 쓸었다.“아가야. 다 잘되길 기도해줘. 그때가 되면 엄마가 우리 아가 데리고 할아버지가 계시는 해외로 가서 살 거야. 할아버지도 분명 널 아주 좋아하실 거야.”아버지 얘기에 윤아는 얼마 전 그와 했던 통화를 떠올렸다.소영과 카페에서 만났던 그 날 이후에 심인철은 윤아에게 다시 전화했었다. 하지만 일이 바쁜 탓인지 통화 중에도 주변 사람들의 말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윤아는 아버지가 정신없이 바빠 보여 그 사실을 먼저 알리지 않았다. 결국 그저 짧은 몇 마디를 끝으로 통화를 끝났다._김선월의 수술 전날은 마침 주말이라 윤아는 수현과 함께 온종일 요양원에서 그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윤아는 행여나 할머님이 수술 때문에 긴장하실까 봐 일부러 재밌어 보이는 장난감도 이것저것 사다 드리고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 진상 고객들을 만났던 일들을 해주며 긴장을 풀어드렸다. 선월은 윤아의 이야기에 어느새 함박웃음을 터뜨렸다.수현은 그저 옆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월과 윤아의 즐거워하는 모습에 무표정이던 그의 얼굴에도 어느새 웃음이 옮아 은은한 미소로 번졌다. 모든 것이 순조
"알겠어."윤아는 사양하지 않았다. 그러나 갈아입을 옷을 챙기러 가려 할 때 잠시 고민하더니 머리를 돌려 물었다."내가 물어볼 게 있는데."이미 외투를 벗은 채 넥타이를 풀려고 하던 수현이 이 말을 듣자, 동작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말해봐.""내일 이혼 신고는 언제 하러 가? 할머님께서 수술하시기 전에? 아니면 수술 끝마치신 다음에?"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윤아는 수현 주위의 공기가 순간 차가워진 것을 느꼈다. 이어서 수현은 사나운 눈길로 윤아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이 눈빛...윤아는 수현의 시선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리고 지금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절대 적절하지 않음을 느꼈다.할머님께서 내일이면 곧 수술하실 텐데, 수현이라고 마음이 편할 리가 없을 것이다.생각을 정리한 윤아는 수현에게 사과했다."미안해. 내가 지금 이 얘기를 꺼내는 게 아닌데. 생각이 짧았어. 할머님께서 수술 끝마치신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 수현 씨도 얼른 가서 쉬어."이렇게 말한 윤아는 몸을 돌려 옷을 챙기러 가려 했다. 그러나 바로 이때, 수현이 갑자기 성큼성큼 걷더니 윤아의 앞길을 막고는 서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내일 그렇게 이혼하고 싶어?""아니, 난 그게 아니라...""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수현의 이 말을 들은 윤아는 멈칫하며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수현의 목소리와 눈빛은 눈서리가 몰아치는 시커먼 밤보다 더 차가웠고 더 추워 보였다."내일 구청이 문을 열자마자 가는 거야."말을 마치고 수현은 더는 그녀와 대치하지 않고 몸을 돌려 욕실에 들어갔다."..."'나더러 먼저 씻으라고 했으면서!'펑!욕실 문이 사정없이 닫기면서 큰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또다시 정적이 흘렀다.윤아는 눈을 내리깔며 제자리에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서랍에서 혼인 관계 증명서와 이혼 신고서를 꺼냈다. 그녀는 이 두 서류를 잠시 바라보다가 머리를 들었다. 시선이 마침 벽에 걸려있는 결혼사진에 닿았다. 액자는 등불 아래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