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아의 사무실에서 나오는 소영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고 두 손은 주먹을 꽉 쥔 채 부들거리고 있었다.고작 조수 나부랭이 주제에 자신을 농락했다는 사실을 그녀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안에서 화를 내진 못했지만 소영은 이미 머리끝까지 화가 차올라 더는 참을 수 없었다.소영은 수현의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말투에서는 조금의 분노도 보이지 않았다. 소영은 애써 부글거리는 마음을 감추며 수현이 마음 아파하는 모습을 보려고 했다.그러나 그녀의 말이 끝나도록 아무런 반응도 없는 수현.“수현 씨?”소영이 의아해서 그를 쳐다봤다. 수현은 노트북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정신은 딴 데 팔려있는 듯 보였다. 무슨 생각에 잠겨있는지 그저 멍하니 앉아있는 수현을 보며 소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소영이 그를 두 번이나 더 부른 후에야 정신을 차리는 수현.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소영을 보며 말했다.“어. 왔어?”소영:“...”‘온 지 한참이나 됐는데... 그럼 여태 한 말을 하나도 안 들었다는 건가.’소영은 급격히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녀는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응. 한참 전에 왔는데. 말해도 반응도 없고...”소영은 수현을 한번 떠봤다.“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수현은 이제 사색에서 벗어났는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야.”수현은 소영이 들고 있던 도시락을 사라진 걸 보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윤아가 네가 준 걸 받았어?”‘어제는 다시 돌려보내더니...’그의 말에 소영이 고개를 저었다.“아니. 내가 만든 음식은 별로 먹고 싶지 않은가 봐. 수현 씨. 내가 한 음식이 혹시 맛없는 건 아닐까?”수현은 먹는 데에 딱히 별다른 감흥이 없는 사람이었다. 음식은 그에게 그저 허기를 채울 수 있는 도구일 뿐, 뭐가 맛있고 뭐가 맛없는지는 딱히 구분해내지 못했다. 하지만 소영은 그를 구해준 은인이기에 대충 대할 수가 없었다. 수현은 어쩔 수 없이 가벼운 위로를 건넸다.“아니.
‘수현의 팔에 왜 이빨 자국이 있는 거지? 남자가 물었을 리는 없고.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소영은 낯빛이 창백해졌다. 심윤아 그 여자가 약속을 어길 줄이야._이튿날,소영은 윤아에게 도시락을 가져다준다는 핑계로 사람이 없는 틈을 타 그녀에게 따져 물었다.“심윤아 씨. 신세를 이딴 식으로 갚는 사람이었어요?”소영이 또 착한 척 ‘연극’을 하러 온 줄 알았던 윤아는 뜻밖의 가시 돋친 말에 눈썹을 추켜올리며 그녀를 바라봤다.“그게 무슨 뜻이에요?”“모르는 척하는 거예요?”소영이 이를 갈며 말했다. 그녀는 들고 있는 도시락통 모서리를 다 뜯어먹을 기세로 꽉 쥐고 있었지만 이글거리는 분노를 간신히 누르며 낮게 말했다.“저희가 약속한 제3조항, 이혼하기 전에는 수현 씨와 그 어떤 스킨십도 하지 않는다. 잊은 건 아니죠?”윤아는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네. 기억하죠. 그게 왜요?”“기억한다고요? 그렇게 했나요?”“네.”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할머님 앞에서 협조한 것 말고는 수현 씨와 그 어떤 스킨십도 없었어요.”윤아는 떳떳하게 말했지만 소영은 그런 윤아의 모습에 더 화가 났다.“거짓말! 당신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잔뜩 흥분한 소영의 모습에 윤아는 미간을 찌푸렸다.“어제 수현 씨 팔에 찍힌 이빨 자국을 봤어요.”소영은 말을 꺼내는 것조차도 불쾌해 치를 떨었다. 남자와 여자가 대체 무슨 상황이었길래 여자가 남자를 문단 말인가? 소영은 상상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렸다.소영의 말에 윤아는 잠시 멈칫했다. 이빨 자국이라는 말이 아니었으면 그 일을 완전히 잊을 뻔했다.“왜 말이 없어요? 찔리나 봐요?”소영이 이를 갈며 말했다.“심윤아 씨. 당신 애초에 약속을 지킬 생각도 없었죠?”“아니에요.”윤아는 고개를 들어 부정했다. 진 신세를 갚는 일인데 어떻게 약속을 어기겠는가. 하지만 수현과의 그 일은 윤아도 유감이었다.“아니라고요? 그럼 왜...”윤아는 하는 수 없이 소영의 말을 끊고 말했다.“확실히 설명하고 넘어가야 할
“그것도 아니면 사실 소영 씨도 수현 씨를 못 믿는 건가요?”윤아는 입꼬리를 씩 올리며 가볍게 웃었다.“저도 걱정을 안 하는데 소영 씨는 뭐가 그렇게 걱정인 거죠?”소영이 그 자리에서 꿈쩍하지를 않자 윤아가 말을 이었다.“걱정 마요. 며칠 뒤면 할머님 수술도 끝나니까 조금만 참으면 소영 씨 뜻대로 될 거예요. 할머님 수술만 잘 되면 전 이곳을 떠나 5년 동안은 안 돌아올 거니까.”윤아의 말에 소영은 그제야 점차 이성을 찾았다.그래.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이야 어떻든 며칠 후면 모든 게 끝나 있을 것이다. 윤아와 수현의 말 같지도 않은 이 사이도. 그때가 되면 소영은 더는 지금처럼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될 것이다.“그래요. 일단은 윤아 씨를 믿어볼게요. 그때 가서도 한 말은 지켜요.”소영이 떠나자 방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윤아는 시선을 내려 자신의 아랫배를 가볍게 쓸었다.“아가야. 다 잘되길 기도해줘. 그때가 되면 엄마가 우리 아가 데리고 할아버지가 계시는 해외로 가서 살 거야. 할아버지도 분명 널 아주 좋아하실 거야.”아버지 얘기에 윤아는 얼마 전 그와 했던 통화를 떠올렸다.소영과 카페에서 만났던 그 날 이후에 심인철은 윤아에게 다시 전화했었다. 하지만 일이 바쁜 탓인지 통화 중에도 주변 사람들의 말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윤아는 아버지가 정신없이 바빠 보여 그 사실을 먼저 알리지 않았다. 결국 그저 짧은 몇 마디를 끝으로 통화를 끝났다._김선월의 수술 전날은 마침 주말이라 윤아는 수현과 함께 온종일 요양원에서 그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윤아는 행여나 할머님이 수술 때문에 긴장하실까 봐 일부러 재밌어 보이는 장난감도 이것저것 사다 드리고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 진상 고객들을 만났던 일들을 해주며 긴장을 풀어드렸다. 선월은 윤아의 이야기에 어느새 함박웃음을 터뜨렸다.수현은 그저 옆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월과 윤아의 즐거워하는 모습에 무표정이던 그의 얼굴에도 어느새 웃음이 옮아 은은한 미소로 번졌다. 모든 것이 순조
"알겠어."윤아는 사양하지 않았다. 그러나 갈아입을 옷을 챙기러 가려 할 때 잠시 고민하더니 머리를 돌려 물었다."내가 물어볼 게 있는데."이미 외투를 벗은 채 넥타이를 풀려고 하던 수현이 이 말을 듣자, 동작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말해봐.""내일 이혼 신고는 언제 하러 가? 할머님께서 수술하시기 전에? 아니면 수술 끝마치신 다음에?"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윤아는 수현 주위의 공기가 순간 차가워진 것을 느꼈다. 이어서 수현은 사나운 눈길로 윤아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이 눈빛...윤아는 수현의 시선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리고 지금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절대 적절하지 않음을 느꼈다.할머님께서 내일이면 곧 수술하실 텐데, 수현이라고 마음이 편할 리가 없을 것이다.생각을 정리한 윤아는 수현에게 사과했다."미안해. 내가 지금 이 얘기를 꺼내는 게 아닌데. 생각이 짧았어. 할머님께서 수술 끝마치신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 수현 씨도 얼른 가서 쉬어."이렇게 말한 윤아는 몸을 돌려 옷을 챙기러 가려 했다. 그러나 바로 이때, 수현이 갑자기 성큼성큼 걷더니 윤아의 앞길을 막고는 서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내일 그렇게 이혼하고 싶어?""아니, 난 그게 아니라...""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수현의 이 말을 들은 윤아는 멈칫하며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수현의 목소리와 눈빛은 눈서리가 몰아치는 시커먼 밤보다 더 차가웠고 더 추워 보였다."내일 구청이 문을 열자마자 가는 거야."말을 마치고 수현은 더는 그녀와 대치하지 않고 몸을 돌려 욕실에 들어갔다."..."'나더러 먼저 씻으라고 했으면서!'펑!욕실 문이 사정없이 닫기면서 큰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또다시 정적이 흘렀다.윤아는 눈을 내리깔며 제자리에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서랍에서 혼인 관계 증명서와 이혼 신고서를 꺼냈다. 그녀는 이 두 서류를 잠시 바라보다가 머리를 들었다. 시선이 마침 벽에 걸려있는 결혼사진에 닿았다. 액자는 등불 아래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평소 떠올리지 않으니 때로는 맑은 정신으로, 또 때로는 흐릿하게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예전의 순간들을 머리 속에 재현할수록 그 무심코 한 스킨십이 칼날처럼 그녀의 마음을 사정없이 베고 있었다.윤아는 온몸에 힘을 잃은 듯 벽에 스르륵 기대어 앉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조금, 조금이라도 그녀에게 마음이 있었다면 이토록 절망스럽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윤아가 마음을 정리하고 서류를 서랍에 다시 넣으려던 순간, 샤워를 마친 수현이 굳은 얼굴로 욕실에서 나왔다. 수현은 그녀의 곁을 지날 때 마침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두 장의 서류를 발견했다. 눈썰미가 좋은 그는 첫눈에 알아챘다. 혼인 관계 증명서와 이혼 신고서란 것을.수현의 표정은 더 굳어졌다. 그는 우뚝 멈춰선 채 싸늘한 시선으로 윤아를 바라보았다.잠시 후, 그는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정말 급하네, 심윤아.”윤아는 멈칫했다. 얇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뭐라도 말하려고 했으나 결국엔 손에 들고 있던 두 장의 서류를 꼭 쥔 채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뭘 말해야 할까.할 말이 없었고 더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이혼 얘기는 그가 꺼낸 것이고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도 그의 생명의 은인이었다.그리고 그녀는 지금 그의 생명의 은인에게 진 신세를 갚는 중이었다.그냥 이대로 내버려둬야지.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다. 더는 미련도 없었다. 이미 이년 동안이나 그와 함께 생활하며 그를 품었으니까. 그러니 앞으로의 삶을 살아 나가면서 이 이년이란 시간을 평생을 두고 떠올리고 회상하며 아끼리라. “내일이면 할머니께서 수술 마치셔. 그니까 더는 연기할 필요 없어. 난 오늘 서재에서 잘게.”결국 수현은 이 한마디를 남긴 뒤, 베개를 가지고 방을 나갔다.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윤아도 서류를 서랍에 도로 넣고 갈아입을 옷을 챙긴 뒤 욕실로 들어갔다.-이튿날.윤아는 핸드폰 알람 소리에 잠이 깼다. 그녀는 눈을 비비며 알람을 끄고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몸을 일으켰다.어젯밤, 거의 뜬눈으로 지새웠다고 할 수
집사: “...”사실 그는 수현과 윤아 사이의 이상한 낌새를 살짝 눈치챘다. 그리고 어젯밤, 수현이 서재에서 잔 것도 알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 서재 불이 켜져 있음을 발견하고는 들어가 보니 수현이 안에 앉아있었다.그의 눈 밑은 퀭했고 얼굴색도 여간 나쁜 게 아니었다. 수현은 잠긴 목소리로 집사에게 물었다.“뭐합니까?”집사는 순간 수현의 모습에 놀라 아무 말도 못 했다.결국 수현은 아침도 먹지 않고 굳은 얼굴로 주차장에 갔다. 그리고 지금 밖에 나가려는 윤아를 보며 집사는 속으로 옅은 한숨을 내쉬면서 어쩔 바를 몰라했다.시간이 아직 일렀기 때문에 바깥 기온은 제법 낮았고 주차장은 더 추웠다.그런데 이렇게 추운 곳에 있으면서 수현은 그저 얇은 셔츠 한 장만 달랑 입고 있으면서 담배를 손에 들고는 차에 기대어 서있었다.가까이하고 보니 수현과 그녀의 상태는 정반대였다.두 사람 다 잠을 설치긴 했지만 이미 화장한 윤아와 비교했을 때 수현은 더 초췌해 보였다. 발걸음 소리를 들은 수현은 머리를 들었다. 그는 윤아의 좋은 상태를 보자 얼굴색이 더 어두워졌다.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어젯밤 잘 잤어?”수현이 입을 열자마자 윤아는 그의 목소리가 많이 쉬었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잠시 멈칫하다가 머리를 끄덕였다.“응, 잘 잤어. 수현 씨는?”수현은 담뱃불을 끄고는 시커먼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나도 잘 잤어.”“그럼 됐네.”윤아는 수현의 눈에 가득한 핏발과 눈 주위의 다크서클을 보며 생각했다. 모양새가 초라하다고. 화장하고 안경까지 쓰기를 잘했다고.두 사람 사이에는 또 침묵이 흘렀다.수현은 차에 기대어 서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운전할 생각도 없는 듯, 그저 굳은 얼굴로 윤아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 날카로운지라 윤아는 조금 불편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이제 갈까?”수현은 되물었다.“그렇게 급해?”“그저 그래. 수현 씨가 급해할까 봐.”수현은 이
구청에 사람은 너무 많지 않았지만, 그들은 나중에 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기다려야 했다.어젯밤 잠을 설친 바람에 몸이 힘든 윤아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수현도 그녀의 뒤를 따라 흙빛이 된 얼굴로 윤아의 옆자리에 서 있었는데 앉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구청에 들어오긴 했지만, 윤아의 마음은 꽤 평온했다.그녀는 머리를 돌려 수현을 한눈 보고는 입을 열었다.“수현 씨는 안 앉아?”“난 됐어.”수현은 차갑다 못해 조금의 온도도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로 답하고는 윤아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윤아는 금세 알아챘다. 수현이 자신을 상대하기 귀찮아한다는 것을.하긴, 곧 이혼하고 소영과 일생을 기약할 텐데 자신과 상대해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다행이었다. 애초부터 이혼한 다음 친구로 지내기를 바라지 않아서 말이다.처음에는 괜찮았지만 두 사람이 붙어있은 시간이 오랄 수록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점점 많아졌다.“이 분위기... 설마 이혼하러 왔나?”“이혼? 에이, 아닐 거야. 이 둘이 이혼이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 훈남 훈녀가 따로 없는데, 뭔 이혼이야.”“이해할 수가 없어. 저렇게 생기면 원래 배우자보다 더 훤칠하고 더 예쁜 사람 만나기 어려울 텐데. 아쉽게 이혼을 왜 해.”사람들은 늘 남 일에 관심이 많다. 특히 눈에 띄는 남이라면 더 그렇다.마치 수현과 윤아처럼 외모가 출중하고 또 서로 잘 어울리는 남녀라면 가십거리로 되기 더 쉽다.말이 꼬리에 꼬리를 이어 윤아의 귀에 들어간다. 그녀 옆에 선 수현도 당연히 들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사방을 순간 얼어붙게 만드는 차갑고 도도한 모습으로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있잖아, 저기 두 사람 되게 젊어 보이는데 아이는 있을까?”아이라는 두 글자에 윤아는 가슴이 덜컹했다.조금 어이가 없었다. 화제가 어떻게 아이로 갔는지 이해되지 않았다.“저렇게 좋은 유전자에 아이 많이 낳지 않으면 얼마나 아쉬워.”여기까지 들은 윤아는 수현을 힐끔 훔쳐보았다.역시, 그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다.그날의
이 말을 마친 윤아는 다시 고개를 숙인 채 속으로 수현이 왜 갑자기 변했는지를 생각했다.분명 전엔 얼굴이 굳어있었는데 저 사람들이 하는 소리를 들은 뒤 표정이 그나마 나아졌다. 심지어 그녀가 배가 고픈지 안 고픈지를 걱정하신다.왜?진짜 유산한 줄 알고 미안해서 그러는 건가...“아침 안 먹었잖아.”수현이 또 말을 걸어왔다.윤아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 근데 배고프지 않아.”실은 입맛이 없었다.“지금은 배고프지 않지. 근데 나중에는? 조금 있다가 요양원에 갈 때면 아침 먹을 시간 없어.”여기까지 듣자, 윤아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머리를 끄덕이며 답했다.“알겠어. 그러면 우리 먼저 아침 먹으러 갈래?”“내가 편의점 가서 사 올게. 여기서 기다려.”말을 끝낸 수현이 구청을 나갔다.밖에 나간 뒤, 그는 바로 편의점으로 가는 대신 벽에 기대어 담배 한 대를 피웠다. 찬 바람 속에 조금 있으니 정신이 들었다.그는 벽에 기대어 눈을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이 그의 눈을 가리면서 요동치는 감정도 함께 숨겨주었다.분명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는데, 그녀의 목을 조르면서 왜 이렇게 무심한지 따지고 싶었는데, 말을 내뱉고 나니 아침 먹겠냐고 물었더라. 헛웃음이 나왔다. 왜 그녀 앞에선 항상 마음이 약해지는지...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허공에 대고 물어본다. 대답이 있을 리가 없었지만, 그저 하염없이 앞을 바라보며 찬바람이라도 그의 진심을 알려주길 기다린다.-윤아도 이런 경우를 예상해 보지 못했다. 수현이 자리를 뜨자마자 아까 토론하고 있던 사람들이 몰려오면서 그녀의 앞에 그리고 옆에 자연스레 앉았다.“저기요, 예쁜 아가씨. 궁금한 게 있는데, 아까 나간 분 아가씨 남자친구예요 아니면 남편이에요?”“혼인 신고하러 왔어요? 헉, 설마 이혼 신고하러 왔어요?”“아이는 있어요?”윤아: “...”이 사람들, 묻고 있는 문제가 모순적이라는 생각은 안 드나...그리고 가십거리 주인공 앞에서 이런 걸 막 물어봐도 되나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