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청에 사람은 너무 많지 않았지만, 그들은 나중에 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기다려야 했다.어젯밤 잠을 설친 바람에 몸이 힘든 윤아는 의자에 가서 앉았다. 수현도 그녀의 뒤를 따라 흙빛이 된 얼굴로 윤아의 옆자리에 서 있었는데 앉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구청에 들어오긴 했지만, 윤아의 마음은 꽤 평온했다.그녀는 머리를 돌려 수현을 한눈 보고는 입을 열었다.“수현 씨는 안 앉아?”“난 됐어.”수현은 차갑다 못해 조금의 온도도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로 답하고는 윤아를 쳐다보지도 않았다.윤아는 금세 알아챘다. 수현이 자신을 상대하기 귀찮아한다는 것을.하긴, 곧 이혼하고 소영과 일생을 기약할 텐데 자신과 상대해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다행이었다. 애초부터 이혼한 다음 친구로 지내기를 바라지 않아서 말이다.처음에는 괜찮았지만 두 사람이 붙어있은 시간이 오랄 수록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점점 많아졌다.“이 분위기... 설마 이혼하러 왔나?”“이혼? 에이, 아닐 거야. 이 둘이 이혼이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 훈남 훈녀가 따로 없는데, 뭔 이혼이야.”“이해할 수가 없어. 저렇게 생기면 원래 배우자보다 더 훤칠하고 더 예쁜 사람 만나기 어려울 텐데. 아쉽게 이혼을 왜 해.”사람들은 늘 남 일에 관심이 많다. 특히 눈에 띄는 남이라면 더 그렇다.마치 수현과 윤아처럼 외모가 출중하고 또 서로 잘 어울리는 남녀라면 가십거리로 되기 더 쉽다.말이 꼬리에 꼬리를 이어 윤아의 귀에 들어간다. 그녀 옆에 선 수현도 당연히 들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사방을 순간 얼어붙게 만드는 차갑고 도도한 모습으로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있잖아, 저기 두 사람 되게 젊어 보이는데 아이는 있을까?”아이라는 두 글자에 윤아는 가슴이 덜컹했다.조금 어이가 없었다. 화제가 어떻게 아이로 갔는지 이해되지 않았다.“저렇게 좋은 유전자에 아이 많이 낳지 않으면 얼마나 아쉬워.”여기까지 들은 윤아는 수현을 힐끔 훔쳐보았다.역시, 그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다.그날의
이 말을 마친 윤아는 다시 고개를 숙인 채 속으로 수현이 왜 갑자기 변했는지를 생각했다.분명 전엔 얼굴이 굳어있었는데 저 사람들이 하는 소리를 들은 뒤 표정이 그나마 나아졌다. 심지어 그녀가 배가 고픈지 안 고픈지를 걱정하신다.왜?진짜 유산한 줄 알고 미안해서 그러는 건가...“아침 안 먹었잖아.”수현이 또 말을 걸어왔다.윤아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 근데 배고프지 않아.”실은 입맛이 없었다.“지금은 배고프지 않지. 근데 나중에는? 조금 있다가 요양원에 갈 때면 아침 먹을 시간 없어.”여기까지 듣자, 윤아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머리를 끄덕이며 답했다.“알겠어. 그러면 우리 먼저 아침 먹으러 갈래?”“내가 편의점 가서 사 올게. 여기서 기다려.”말을 끝낸 수현이 구청을 나갔다.밖에 나간 뒤, 그는 바로 편의점으로 가는 대신 벽에 기대어 담배 한 대를 피웠다. 찬 바람 속에 조금 있으니 정신이 들었다.그는 벽에 기대어 눈을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이 그의 눈을 가리면서 요동치는 감정도 함께 숨겨주었다.분명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는데, 그녀의 목을 조르면서 왜 이렇게 무심한지 따지고 싶었는데, 말을 내뱉고 나니 아침 먹겠냐고 물었더라. 헛웃음이 나왔다. 왜 그녀 앞에선 항상 마음이 약해지는지...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허공에 대고 물어본다. 대답이 있을 리가 없었지만, 그저 하염없이 앞을 바라보며 찬바람이라도 그의 진심을 알려주길 기다린다.-윤아도 이런 경우를 예상해 보지 못했다. 수현이 자리를 뜨자마자 아까 토론하고 있던 사람들이 몰려오면서 그녀의 앞에 그리고 옆에 자연스레 앉았다.“저기요, 예쁜 아가씨. 궁금한 게 있는데, 아까 나간 분 아가씨 남자친구예요 아니면 남편이에요?”“혼인 신고하러 왔어요? 헉, 설마 이혼 신고하러 왔어요?”“아이는 있어요?”윤아: “...”이 사람들, 묻고 있는 문제가 모순적이라는 생각은 안 드나...그리고 가십거리 주인공 앞에서 이런 걸 막 물어봐도 되나
봉지를 받은 뒤, 윤아는 수현이 인스턴트 음식을 사 왔다는 것을 발견했다. 입맛이 없어 그저 열어 보기만 하고 다시 치웠다.수현은 거기에 서서 윤아의 행동을 다 눈에 담았다.“다 싫어?”이 말을 듣자, 윤아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흔들었다.“아니, 그냥 입맛이 없어서 그래.”수현은 더는 말하지 않고 윤아의 곁에 앉았다.너무 적게 입어서인지 아니면 금방 밖에서 들어와서 그런지 수현이 옆에 앉는 순간, 윤아는 자신의 주위 온도도 함께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수현이 아직도 셔츠 한 장만 입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입을 열었다 닫으면서 뭐라도 말하려고 했지만 결국 침묵만 유지했다.둘을 이렇게 조용히 앉아있었다.비록 가까운 거리였지만 하늘 저 멀리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윤아는 자리에 앉아 아까 얘기를 나눴던 여자들을 보았다. 한명 한명씩 남자 친구와 함께 들어갔고 나올 땐 다정하게 팔짱을 끼거나 껴안으며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이 장면을 보니 수현과 혼인신고 하러 구청에 왔을 때가 떠올랐다.추억이 얼마나 아름다우면 현실은 얼마나 참혹했다. 참 많이도 변했구나...윤아가 이렇게 멍때리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와 수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었다.정신을 차린 뒤, 그녀는 제자리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달싹이며 수현에게 말했다.“우리 차례야.”수현은 무슨 생각하는지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안에서 누군가가 다시 두 사람의 이름을 부를 때, 윤아는 깊은숨을 들이쉬면서 몸을 일으키고는 수현을 향해 말했다.“가자.”말을 마치고 윤아는 먼저 발걸음을 뗐다.“잠깐만.”수현은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불렀다.그러자 윤아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물어뜯으면서 고개를 돌리려는 충동을 간신히 삼켰다. 비릿한 피 냄새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찌릿한 아픔은 흐릿해지는 정신을 더 또렷하게 했다.그녀는 자신이 낮은 목소리로 묻는 것을 들었다.“왜 그래?”고개도 돌아보지 않고
요양원에 가는 길에서 윤아는 너무 급한 나머지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고 손가락을 아무렇게나 꼬아서 부여잡았다. 심장은 벌렁벌렁 뛰었고 온몸이 덜덜 떨렸다.잘못했다.구청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아침에 깨자마자 요양원으로 갔어야 했다.아니, 어젯밤에 돌아오는 게 아니라 요양원에서 할머님을 잘 보살펴드려야 했다.오늘 수술 하신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 할머님이 거절하자마자 집으로 돌아오다니. 어쩜 그렇게 멍청할 수가 있는가.윤아는 한없는 자책에 빠졌다. 그녀는 몸을 좌석에 기댄 채 눈을 질끈 감았다.기억 속 흐릿하지만, 또 또렷한 장면이 이리저리 엉킨 채 머릿속에 펼쳐졌다.빨리 운전하여 요양원으로 가고 싶었지만, 교통 규칙은 지켜야 하므로 수현은 할 수 없이 신호등 길목에서 천천히 멈추어 섰다. 하지만 급한 마음에 그의 짙은 눈썹은 계속 찌푸리고 있었다.차를 세운 후, 수현은 점차 윤아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는 머리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제야 윤아의 입술 사이에 붉은 피가 맺혀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너 왜 그래?”아무 응답도 없었다.윤아는 지금 이맛살을 찌푸린 채 얼굴은 창백했고 눈썹은 파르르 떨렸으며 입술은 꼭 깨물고 있었는데, 그의 말을 듣지 못한 듯했다.이런 윤아의 모습을 본 수현은 안색이 확 변했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붙잡고는 꼭 깨물고 있는 입술을 열게 하려고 했다.여러 번 시도했지만, 윤아가 너무 세게 깨물고 있는 바람에 몸부림칠 때 옅은 피가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심윤아, 뭐 하는 거야. 입술 놓으라고!”수현은 힘을 주고 싶었지만, 윤아가 다칠까 봐 말로 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윤아는 마치 악몽에 빠진 사람처럼 어떻게 불러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순간, 수현은 뭔가가 떠올랐다.윤아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 곁에서 자라지 못했다. 대신 그녀의 아버지가 윤아를 무한한 사랑으로 키웠기 때문에 그녀는 겉으로 보기엔 완벽했고 뭐든 그녀를 힘들게 하는 일이
하지만 수현이 몇 번이나 윤아의 이름을 불렀음에도 윤아는 전혀 듣지 못한 거 같았다. 마치 외부 세상과 단절된 것처럼, 자신을 꼭꼭 숨겨 두었다.윤아의 이런 모습을 본 수현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신호등은 이미 초록 불로 되었다. 수현의 차가 움직이지 않는 바람에 뒤의 차들이 빵빵 경적을 울리면서 불평을 토로했다.수현은 이 시끄러운 소리를 들으면서 순간 몸을 숙여 윤아의 턱을 위로 한 채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그가 예상했던 대로 윤아의 이발이 꼭 맞물려있었다. 그래서 한참을 애써도 뚫고 들어가지 못했다.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한쪽 손을 그녀의 허리에 대고 살짝 꼬집었다.윤아는 간지러움을 심하게 탄다.평소처럼 화들짝 놀라며 피하지는 않았어도 뻣뻣하게 경직되었던 몸에 조금의 반응이 있었다.수현은 이 틈을 타서 윤아의 입을 살짝 벌리며 꼭 깨물고 있던 그녀의 아랫입술을 구해냈다. 서로의 숨을 앗아갈 듯한 거리에서 수현은 아주 짙은 피비린내를 맡았다. 윤아에게 자기 몸을 아끼지 않는다고 질책하기도 전에 찌릿한 아픔을 느끼면서 미간을 찌푸리고는 끙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너무 아픈 나머지 하마터면 윤아를 품에서 밀어낼 뻔했지만, 그런 충동을 간신히 억제했다. 그는 아픔을 참으면서 윤아의 허리를 아까보다 더 세게 꼬집다.그러고는 빨리 윤아의 입술을 놓아 주었고 다시 물어버리기 전에 즉시 그녀의 턱을 잡았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매섭게 말했다."심윤아, 빨리 정신 차리지 않으면 지금 여기서 너랑 잘 거야."그의 말투가 너무 매서웠는지 품속의 여자는 몸을 살짝 떨면서 점점 힘을 풀었다.금방 정신을 차린 윤아는 주위의 시끄러운 경적과 창밖으로 들려오는 기사들의 욕 하는 소리에 어리둥절했다.하지만 그녀를 더 놀라게 한 것은 바로 가까이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수현이었다.남성 특유의 호르몬이 거의 그녀를 감쌌고 그의 큰 손은 윤아의 턱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드디어 깼네?"윤아는 눈을 깜박거리며 피가 묻어있는 입술을 움직였다.뭐라도 말하려고
“내 뭐? 왜 말 못 해?”“...”윤아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이렇게 어색한 상황에서 그 말을 입밖에 내뱉기가 어려웠다.“못 말 하겠어?”계속 몰아붙이는 수현.윤아는 눈을 내리깔고는 침묵을 유지했다.수현은 이런 윤아를 보고 화가 나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안 죽어. 그냥 하마터면 물어뜯길 뻔했지만.”이 말을 듣자, 윤아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그렇게 심해?”“심윤아, 네 입술에 생긴 상처 보면 몰라?”“...”그런 것 같았다. 아까 화장 거울로 봤을 때 상처가 아주 심했었다. 그러니 수현이라고 멀쩡할 리가 있겠는가.그의 말에 뭐라고 반박할 수 없으니, 윤아는 축 처진 눈을 한 채 다시 한번 사과했다.“미안해. 다음번엔 나 그냥 내버려둬.”이 말을 들은 수현의 눈썹은 다시 치켜 올라갔다.“다음 번이라니. 심윤아, 자해하는 게 네 낙이야? 앞으로 이런 일 없어야 해. 들었어?”오늘 그가 아니었으면 얼마나 위험했는데...윤아는 작게 중얼거렸다.“나도 억제할 수 없는데 어떻게 막아...”수현은 윤아를 한눈 쏘아보고는 표정을 굳혔다.윤아 말이 맞았다. 방금 어떻게 부르고 말을 걸어봐도 그녀는 마치 의식이 없는 사람처럼 듣지 못하는 것 같았고 몸만 외부의 자극에 반응했었다.수현은 이제 시간 날 때 윤아를 데리고 병원에 가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윤아에게 말하며 그녀의 마음을 안정시켰다.“할머니께서는 그저 쓰러지셨을 뿐이야. 아직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파악할 수 없지만 평소 꽤 건강하셨기 때문에 별문제 없으실 거야. 문제가 있다 해도 며칠간 수술 할 수 없을 정도에만 그칠 거야. 그러니까 너무 긴장하지 마.”아까 일을 겪은 후, 윤아는 오히려 더 진정되었다.아까는 너무 긴장했다.할머님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겼다고 생각하니 좀처럼 진정이 되질 않았고 온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두려웠다. 수현의 말이 옳았다. 그녀는 진정해야만 했다.“응, 알겠어.”요양원.차를 세우자마자 수현이 먼저 운전석에서
이 말을 듣자, 윤아는 머리를 들어 수현을 보았다.그의 검고 짙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윤아는 수현에게 마음속 깊은 곳까지 다 간파당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재빨리 시선을 거두고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투로 대답했다.“응.”“그래?”수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윤아의 안경 아래에 숨겨진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런데 왜 다크서클 있어?”이 말을 마치고 수현은 뭔가 떠올랐다는 듯 중얼거렸다.“어쩐지. 그래서 안경 꼈던 거네.”“...”윤아는 손을 거두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다 닦았어. 그런데 수현 씨 입술에 난 상처는 약을 바르는 게 좋을 거야. 가자, 할머님 뵈러.”말을 끝낸 윤아는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갔고, 수현도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네 눈에 핏발 섰더라.”“피곤한 거 같은데. 어젯밤 잘 못 잤어?”연거푸 두 마디에 윤아는 참다못해 고개를 돌리고는 수현을 쏘아보며 말했다.“수현 씨, 그만해.”말을 마친 윤아는 하이힐로 땅을 쾅쾅 밟으며 앞으로 걸어갔다.의사는 선월이 너무 긴장하는 바람에 쓰러졌다고 했다. 그리고 현재 몸 상태는 정상이었고 다른 문제도 없다고 말했다. 이걸 들은 두 사람은 그제야 마음을 놓으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참 다행이었다. 긴장해서 쓰러졌을 뿐 다른 문제가 없다고 하니.“현재 환자분의 이런 심리 상태로선 수술을 진행하기엔 무리입니다.”의사는 눈썹을 찌푸리고는 소리를 낮추면서 제안했다.“심리도 아주 큰 문제입니다. 환자분의 신체적 조건은 부합되지만, 심리 상태가 안정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킬 수 있어요.”윤아는 의사의 말을 듣고 잔뜩 긴장한 채 물었다.“그럼 어떡하면 되나요? 의사 선생님, 해결할 방법이 있어요?”“네. 우선 약물치료 받으셔야 할 겁니다. 보호자분들도 환자분이 심리적 안정을 취하도록 대화도 나누면서 잘 협조해 주세요.”윤아는 알 것 같았다. 역시 심리 문제였다.그녀는 빨간 입술을 앙
‘그래서 이혼했는지 물어보려고 전화 한 거야?’-병실 밖.수현은 특별히 병실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가서 전화를 받았다.“수현 씨?”소영의 목소리가 전화 저편에서 들려왔다.수현은 비록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소영을 대할 때에는 최대한 감정을 추스르며 평소처럼 말했다.“응. 이렇게 일찍 무슨 일이야?”소영은 전화 저편에서 근심 가득 담긴 목소리로 답했다.“실은 깬 지 오래됐어. 어젯밤에 걱정돼서 잘 못 잤거든. 할머님은 어떠셔? 수술실 들어가셨어? 수현 씨, 지금 이런 부탁 하면 안 되는 거 잘 아는데 나도 할머님 뵈러 가면 안 될까? 너무 걱정돼서 그래. 절대 할머님 눈에 띄지 않고 그냥 밖에 있다가 할머님이 깨시자마자 갈게. 절대 들어가지 않을 거야.”한없이 자신을 낮추며 말하는 소영의 목소리를 들은 수현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생명의 은인으로서 이런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됐다. 그는 소영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결국 선월의 병세를 고려해 입을 닫기로 결심했다.“소영아, 할머니께서 아직 수술실 들어가지 않으셨어.”이 말을 듣자, 소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물었다.“아, 그래? 수술이 지연된 거야? 아니면...”“응. 수술 지연됐어. 할머니께서 너무 긴장한 바람에 쓰러지셨거든.”이 말을 하면서 수현은 선월의 병실 쪽을 한눈 보고는 말을 이었다.“한동안 미루기로 했어.”“어? 미, 미루다니?”윤아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지금 앞에 준비해 둔 와인과 스테이크, 심지어 향초를 바라보았다.원래 소영은 선월이 수술을 마쳤고 또 수현이 윤아와 순조롭게 이혼도 했으니, 그와 함께 축하 파티나 하자고 말하고 싶었다.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응. 얼마나 미룰지는 모르겠어. 할머니께서 아직 혼수상태라서. 나중에 연락할게.”말을 마친 수현은 전화를 끊고 병실 쪽 방향으로 걸어갔다.뚜뚜-소영은 핸드폰에서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서 있었다.친구 한 명이 옆방에서 걸어오면서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