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이혼했는지 물어보려고 전화 한 거야?’-병실 밖.수현은 특별히 병실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가서 전화를 받았다.“수현 씨?”소영의 목소리가 전화 저편에서 들려왔다.수현은 비록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소영을 대할 때에는 최대한 감정을 추스르며 평소처럼 말했다.“응. 이렇게 일찍 무슨 일이야?”소영은 전화 저편에서 근심 가득 담긴 목소리로 답했다.“실은 깬 지 오래됐어. 어젯밤에 걱정돼서 잘 못 잤거든. 할머님은 어떠셔? 수술실 들어가셨어? 수현 씨, 지금 이런 부탁 하면 안 되는 거 잘 아는데 나도 할머님 뵈러 가면 안 될까? 너무 걱정돼서 그래. 절대 할머님 눈에 띄지 않고 그냥 밖에 있다가 할머님이 깨시자마자 갈게. 절대 들어가지 않을 거야.”한없이 자신을 낮추며 말하는 소영의 목소리를 들은 수현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생명의 은인으로서 이런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됐다. 그는 소영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결국 선월의 병세를 고려해 입을 닫기로 결심했다.“소영아, 할머니께서 아직 수술실 들어가지 않으셨어.”이 말을 듣자, 소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물었다.“아, 그래? 수술이 지연된 거야? 아니면...”“응. 수술 지연됐어. 할머니께서 너무 긴장한 바람에 쓰러지셨거든.”이 말을 하면서 수현은 선월의 병실 쪽을 한눈 보고는 말을 이었다.“한동안 미루기로 했어.”“어? 미, 미루다니?”윤아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지금 앞에 준비해 둔 와인과 스테이크, 심지어 향초를 바라보았다.원래 소영은 선월이 수술을 마쳤고 또 수현이 윤아와 순조롭게 이혼도 했으니, 그와 함께 축하 파티나 하자고 말하고 싶었다.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응. 얼마나 미룰지는 모르겠어. 할머니께서 아직 혼수상태라서. 나중에 연락할게.”말을 마친 수현은 전화를 끊고 병실 쪽 방향으로 걸어갔다.뚜뚜-소영은 핸드폰에서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서 있었다.친구 한 명이 옆방에서 걸어오면서
평소에 소영은 거의 화내지 않았다.사람들 앞에서 그녀는 늘 다정하고 상냥한 모습이었다.예쁘기도 한데 성격마저 좋으니, 소영은 늘 여신의 대접을 받았다.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버럭 소리 지르며 화내니 친구들은 깜짝 놀라서 이상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봤다.사방은 삽시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친구들의 시선과 조용한 환경 속에서 소영은 정신이 번쩍 들었고 아까 자신이 뭘 했는지가 떠올랐다.“얘들아, 미안해. 내가 기분이 좀 안 좋아서 예민하게 굴었어. 미안해.”그녀는 선홍빛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이 한마디 말을 내뱉었다.여신의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소영은 눈시울을 붉히며 계속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 진주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소영이 버럭 지른 소리에 어안이 벙벙해졌던 친구들도 소영이 울면서 사과하는 모습을 보자 금세 마음이 아팠다.“소영아, 도대체 무슨 일이야. 울지마.”“그래, 소영아. 아까 수현 씨에게 전화하지 않았어?”다들 한편으로는 소영을 위로하고 한편으로는 그녀에게 휴지를 건네면서 어렵게 달래고 있었다.소영은 원래 예쁘게 생겼는데 흐느끼면서 울기까지 하니 애처로움이 더해져 더 아름다워 보였다. 그녀는 새하얀 손끝으로 눈가를 살살 닦으며 슬픔에 겨운 말투로 말했다.“응. 전화했어. 그런데 당분간은 이혼하지 않을 거래.”선월이 쓰러지는 바람에 수술이 지연됐으니, 수현과 윤아의 이혼 날짜도 뒤로 미루게 생겼다.소영은 이 일이 조금 창피했으나 끝까지 숨길 수도 없는 일이라서 어쩔 수 없이 사실대로 말했다.“뭐? 당분간은 이혼 안 한다니! 왜?”“그러게. 전에 잘 말해뒀잖아. 어르신께서 수술만 마치시면 이혼하기로. 왜 이런 변수가 생겼대?”“난 알 것 같아. 분명 그 심윤아 나쁜 년이 수현 씨와 이혼하기 싫어서 수작 부리는 거지? 와, 진짜 얼굴 두껍다.”소영이 입술을 움직이며 뭐라고 해석하려고 할 때 다른 친구 한 명이 또 옆에서 말했다.“난 그 여자가 말 고분고분 듣지 않을 줄 알았어. 전에 우리가 찾아갔을 때 어땠는지
“소영아, 걱정하지 마. 이번 일은 우리가 꼭 네가 당한 만큼 다 갚아줄게.”“얘들아, 이러지마...”소영은 눈시울을 붉히며 앞에 있는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너희들이 날 위해서 이러는 건 알겠는데 윤아 씨 요즘 요양원에서 할머님을 돌보고 있어. 정성이 지극해.”이 말을 듣자 친구들은 계속 말했다.“그래? 그러면 심윤아가 어르신을 다 돌본 다음에 혼쭐을 내주면 되지. 꼭 널 위해 복수해 줄게.”소영은 정말 난처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얘들아, 날 위해서 그런 창피한 일 하지 마. 나중에 내가 윤아 씨 만나서 얘기 나눠볼게.”“자, 지금은 저녁으로 준비했던 음식들을 해결해 볼까. 다행히도 넉넉하게 마련했어. 부족하면 더 시킬게.”“소영아...”“아까 일은 다시 꺼내지 말자. 우리 오늘 술도 마시면서 제대로 놀자. 슬픈 일은 잊는 거야.”소영은 와인 한 병을 따고 몸을 돌려 와인잔을 가져왔다.친구들은 이런 소영을 보고는 서로 시선을 맞추며 마음속으로 씨앗 하나를 묻어두었다.-윤아는 하루 동안 수현과 함께 요양원에서 선월의 곁을 지켰다.이 시간 동안 윤아는 입맛이 없어 옆의 병상에 반쯤 기대었는데 기운이 없어 보였다.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픈 게 윤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수현은 그런 윤아를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뭐라도 좀 먹어.”윤아는 눈썹을 찌푸렸다.“입맛 없어.”수현은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신선 놀이 하는 거야?”하루 종일 입맛이 없다며 도통 먹지를 않으니.수현은 심지어 윤아가 요즘 들어 부쩍 말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윤아를 보며 수현은 그녀에게 죽 한 그릇을 담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조금이라도 먹어.”윤아는 눈앞의 죽을 보며 이상을 찌푸렸다. 거절하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뭔가 떠오른 후 손을 뻗어 죽 그릇을 받아왔다, 그녀는 숟가락으로 죽을 떠서는 억지로 삼켰다.배고프지도 않았고 입맛도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수현이 그녀에 대한 보살핌은 아마 소꿉친구 사이의 우정을 보아서, 혹은 양가가 대대로 맺은 친분을 보아서 그녀를 동생으로 여기고 있을지도 모른다.그래서 결혼이라는 틀이 있든 말든 수현은 그녀에게 잘해줄 것이다.웃긴 건 이런 사이에 그녀가 수현에게 다른 마음을 품었다는 사실이다.윤아는 자소 섞인 웃음을 지으며 눈을 질끈 감고는 수현에게 닿았던 시선을 거두었다.선월은 저녁 여덟 시에 깼다.그녀가 깨자마자 윤아는 선월의 병상에 다가가 엎드리고는 그녀와 눈을 맞추었는데 잔뜩 긴장한 모양이었다.“할머님, 깨셨어요? 몸은 어떠세요? 불편한데는 없어요? 배고프지는 않으세요?”선월은 눈앞에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하는 윤아를 보았다. 자신을 걱정한 나머지 눈마저 동그랗게 뜬 그녀를 보며 선월은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올린 채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윤아 요것, 정말 마음에 든다니까.’선월이 머리를 흔들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더 긴장한 윤아는 입술을 핥으며 선월의 앞에서 손짓했다.“할머님, 저를 보세요. 이게 몇이에요?”선월은 자신의 앞에 놓인 손가락 두 개를 보면서 ‘이’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윤아를 놀리려는 생각에 결국 ‘일’ 이라고 했다.그러자 윤아는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할머님...”그녀는 당장 몸을 일으켜서 의사를 찾으러 가려 했다. 이때 옆에 서 있던 수현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윤아는 놀란 토끼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거 놔. 의사 선생님 모셔 올 거야.”수현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끝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그는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다시 물어보지 그래?”그러자 선월이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됐다. 이 할미가 널 놀렸어. 난 괜찮단다.”윤아는 선월을 바라보았는데, 그제야 그녀의 입가에 웃음이 걸려있는 것을 발견했다.‘그러니까 방금 일부러 일이라고 하신 거야?’‘하... 멀쩡하시구나. 놀릴 기분도 있으시고.’이렇게 생각한 윤아는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할머님
”돌아가. 윤아 데리고 가서 푹 쉬어. 여긴 간병인들이 있잖니.”윤아는 깨어나자마자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을 거부하는 선월이 왜 이러는지 도통 몰랐다. 수현도 선월의 말을 들은 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얇은 입술을 꼭 다물고는 굳은 표정으로 제자리에 앉아있었다.“수현아, 이젠 이 할미 말도 안 듣는 거니?”그러자 수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윤아는 얼른 그의 앞을 막아서며 살랑살랑 말했다.“할머님, 무슨 염려가 있으세요? 저희에게 얘기해주시면 안 될까요?”쓰러진 후 이런 말을 한 선월이 윤아는 몹시 걱정되었다.“염려라니. 그냥 나이를 많이 먹었으니까, 생각도 바뀐 거야. 젊은이들이 나 때문에 바쁜 시간 쪼개며 왔다 갔다 하는 게 싫어서 그래.”선월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는데, 윤아를 대하는 태도는 그래도 아주 부드러웠다.“윤아야. 사실 이 할미에겐 수술하든 말든 상관없어. 그렇게 중요하지가 않단다.”이 말을 들은 윤아는 순간 안색이 변했다.“어떻게 안 중요해요. 할머님, 왜 상관없으세요. 할머님 지금 상태 되게 좋아지셨다고 했어요. 그래서 수술도 아주 성공적일 거라고 의사 선생님이 그러셨잖아요. 할머님 두려우신 거예요? 그러면 저 오늘부터 여기 있을래요. 할머님 수술 마치실 때까지 곁에 있을게요. 네?”수술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들은 순간, 윤아는 거대한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녀는 재빨리 선월의 손을 꼭 잡고 병상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마치 수술을 해야 하는 사람이 그녀인 것마냥 더 신경 썼다.이런 윤아를 보며 선월은 마음이 아팠다.이렇게 오랫동안 함께 지냈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는가. 윤아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사랑이 부족했었다. 그래서 어쩌다가 선월같은 여성 어른을 만나니 더욱 기대고 의지했다. 선월이 나이가 많지만 않았어도 그녀는 윤아가 자신을 어머니로 여기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할머님, 네?”선월이 대답하지 않자, 윤아는 작은 얼굴을 쳐든 채 웃음을 띠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제가 요양원에서 할머님과 함께 있을게
병실을 나온 수현은 윤아의 손목을 잡고 병실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윤아는 온 힘을 다해서 겨우 그의 손에서 벗어났다.“진수현. 무슨 짓이야?”수현은 수심 가득한 눈으로 윤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오늘은 이만 가지.”윤아는 그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아까 할머님 모습 못 봤어? 할머님은 요양원을 떠나고 싶어 하셔. 여기 계시고 싶지 않아 하신다고.”윤아는 바로 전에 일로 할머님이 요양원을 떠나고 싶지만 가족들에게 폐를 끼칠까 봐 계속 계시는 거라 추측했다. 할머님은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시지만 막상 돌아갈 엄두를 못 내는 것이다.윤아는 매주 주말마다 할머님을 뵈러 오면서도 그의 기분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사실이 속상했다. 조금 일찍 알아챘다면 집으로 모시고 가서 보살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수술 전날인 오늘 할머님이 쓰러지시는 일은 없었겠지.“알아.”수현이 낮게 말했다.“너도 봤잖아. 할머니는 지금 나에게 화를 내고 계시는 거야.”수현은 잠시 멈칫하더니 뭔가 떠오른 듯 말을 보탰다.“너에겐 아니고.”윤아는 멈칫했다.확실히 방금 할머님이 안 좋은 소리는 모두 수현에게 했었다. 윤아에게는 늘 그랬듯 친절하게 대하셨지.생각을 마친 윤아는 더 마음이 아팠다. 분명 기분이 안 좋으신데 자신에게까지 감정을 감추려 하신다니.“그니까 오늘은 할머니께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드리자. 우린 이만 돌아가서 방을 정리하고 내일 다시 모시러 오자.”윤아는 생각에 잠겼다. 수현의 말은 모두 맞다. 하지만 밤은 유독 길고 어둡다. 그녀는 기나긴 밤 동안 혼자 계실 할머님이 혹여 마음이 더 안 좋아지실까 염려되었다.고민 끝에 윤아가 입을 열었다.“오늘 밤에 모시고 가는 건 어때?”“오늘 밤?”“그래. 아직 시간은 이르잖아. 방 정리는 도우미분들한테 부탁하고 할머님께 두 시간 후에 집으로 모시겠다고 말하는 건 어때? 생각 정리하시는데 두 시간이면 충분하실 거야.”수현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그럼 지금 바로
덕분에 방 준비는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윤아가 집사와의 통화를 마치자 때마침 수현의 핸드폰이 울렸다.유유히 울리는 핸드폰 벨 소리가 차 안에 가득 울려 퍼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윤아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입가에 머금고 있던 미소가 점차 걷혔다. 그녀는 창문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방금까지 활기가 넘치던 차 안이 삽시에 조용해지며 오직 핸드폰 벨 소리만이 외롭게 울려 퍼졌다.분위기가바뀐 걸 눈치챈 수현은 곁눈질로 윤아를 슬쩍 보고는 말했다.“심 공주. 전화 좀 받아줘.”그의 말에 윤아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거절했다.“직접 받아.”“나 운전하잖아.”“차 옆에 세우고 받아.”수현은 그녀의 말에 실소를 터뜨렸다.“전화 좀 대신 받아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아니.”이렇게 된 마당에 윤아도 더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근데 내가 도와주기 싫어.”수현은 윤아의 막무가내인 모습이 그리 낯설지는 않았다. 마침 주변에 차를 세울만한 곳이 있어 그는 어쩔 수 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차를 세운 수현은 검은 눈동자로 윤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전생에 네 원수지.”수현은 투덜대며 핸드폰을 꺼내 들어 발신인을 확인했다.“어머니네.”수현의 말은 들은 체도 안 하던 윤아가 어머님이라는 말에 몸을 발딱 세우며 물었다.“그럴리가...”한참동안 받는 사람이 없는 탓에 전화벨 소리는 자동으로 끊겼다.수현의 시선은 윤아의 청초한 얼굴에 머무른 채 낮은 소리로 말했다.“그러면 누군 줄 알았어?”윤아는 얼굴을 돌리며 화제를 바꿨다.“어서 전화나 다시 걸어.”수현도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어머니께 다시 연락했다.신호음이 울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전화를 받는 이선희. 수현이 스피커모드로 해놓은 덕분에 그녀의 목소리가 차에 울려 퍼졌다.“현아. 나와 네 아빠 방금 비행기에서 내렸어. 지금 바로 요양원으로 갈 건데 네 할머니는 좀 어떠시니?”“수술 못 했어요.”수현은 오늘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설명해 드리고는 미간을 찌푸
아니나 다를까 수현도 선희의 부드러운 말투에 모든 화가 눈 녹듯 사르르 풀려버렸다.“됐어요. 오늘 밤 저와 윤아가 할머니 모시고 집으로 갈 거예요. 어머니 아버지도 요양원에 가실 필요 없으니 댁으로 돌아가세요.“집으로 모신다고?”이선희는 뜻밖의 소식에 조금 어리둥절해하더니 이윽고 말을 이었다.“윤아는 옆에 있니?”수현은 굳이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돌려 윤아에게 눈짓했다. 스피커모드로 해놓았으니 윤아도 다 듣고 있었다.자신을 찾는 선희의 말에 윤아가 입을 열었다.“어머님.”윤아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로 선희의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윤아도 있었구나. 수현이 할머니 일은 네가 참 고생이 많았어.”“아니에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고마워요.”비록 김선월만큼 윤아에게 극진하지는 않지만 선희도 윤아를 대함에 있어서는 예를 갖췄다. 여태까지 윤아에게 쓴소리 한번을 안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윤아와 수현이 결혼을 한다고 했을 땐 그녀도 조금 놀랐다.“이렇게 빨리 결혼할 줄은 몰랐네. 난 그놈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기까지 조금 더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이선희는 당시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결혼을 동의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윤아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채지 못했다.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린다고? 윤아는 그저 어머님이 진수현이 자기를 좋아한다고 오해하고 하시는 말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어차피 가짜 결혼일 뿐이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그래. 어머님은 너희가 잘 보살피니 나와 수현이 아빠도 안심이야. 시간도 늦었으니 오늘은 이만하고 내일 모여서 밥이나 먹자.”“네.”윤아는 흔쾌히 선희의 말에 동의했다.수현도 그녀와 잠깐 얘기를 나누다 전화를 끊었다.돌아가는 길에 수현과 윤아는 침묵을 유지했다. 집에 거의 다 와서야 고개를 돌려 수현을 바라보는 윤아.“실망이겠네.”수현:“?”갑작스러운 그녀의 쌀쌀맞은 말에 수현이 어리둥절해했다. 반면 윤아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할머님 수술이 미뤄졌으니 우리의 이혼도 미뤄졌잖아.”윤아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