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희는 어머니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들을 위해 일반인들이 쉽게 열 수 없는 초대형 자물쇠를 하나 샀다.문이 잠기지 않은 걸 보니 모두 집에 있는 모양이다. 선희는 출입문 옆의 초인종을 누르고 아이들과 함께 문 앞에서 기다렸다.안에서 작은 발소리가 나더니 곧이어 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누구요?”두 아이는 노인의 목소리를 듣고 매우 감격하여 고개를 들어 말했다.“할머니, 증외할머니의 목소리예요?”선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나야.”익숙한 소리에 안에서 발소리가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다급해진 걸음으로 다가오는 듯했다.듣고 있던 선희가 말했다.“엄마, 천천히 와요.”현관문이 열리자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과 캐주얼한 중국식 실내복을 입은 우아한 노인이 세 사람 앞에 나타났다.서훈과 하윤은 어릴 때부터 예의 바르게 인사해야 한다는 윤아의 가르침에 따라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증조할머니, 안녕하세요.”선희의 어머니 이명인은 오랜만에 만난 딸에 깜짝 놀랐다. 자식 걱정은 늘 있지만 혹시나 방해할까 봐 전화도 안 했는데 이렇게 딸이 찾아왔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그녀는 마음속으로 기뻐했다. 문을 열자 보인 딸의 얼굴에 놀라기도 잠시, 곧이어 귀여운 목소리로 인사를 해오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잠시 멈칫했다.‘증조할머니?’‘누굴 부르는 거지? 내가 나이가 들어 환청을 듣나?’그녀가 소리를 따라 고개를 숙여 보니 귀여운 녀석 둘이 거기에 서서 일제히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그런데 놀랍게도 이 두 녀석은 손자 수현과 아주 비슷하게 생겼다.명인은 놀란 눈으로 두 녀석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딸 선희를 바라보았다.선희는 그녀를 향해 웃으며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마치 그녀에게 보여주려고 작은 증조 외손자를 데리고 왔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이게...”명인은 한참 후에야 어떻게 된 일인지 가늠이 되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두 꼬마가 진실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녀가
두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선희는 불안한 듯 입술을 오므렸다.그러나 걱정과는 달라 명인은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어서 들어와. 증조할머니가 맛있는 음식 해줄게.”그녀는 옆으로 물러나 자리를 비켜주고 사람들을 불러들였다.뒤이어 들어온 운전기사가 짐을 내려놓으며 선희에게 말했다.“그럼 사모님. 전 이만 돌아가 보고 때 되면 다시 모시러 오겠습니다.”선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운전기사는 나가며 마당 문을 닫고 다시 자물쇠를 채웠다.두 녀석은 따라 들어온 후에야 비로소 마당 안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뜰에 아주 큰 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이 날씨에 위쪽의 잎은 이미 다 떨어져 벌거벗은 모습이었다.두 아이는 호기심에 달려가 살펴보았다.명인은 두 꼬마가 달려가는 것을 보고 그들과 거리가 좀 멀어지자 자신의 딸 선희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너희 셋만 왔어?”선희는 고개를 끄덕였다.“네.”“아이의 엄마 아빠는? 왜 같이 안 왔어?”“일이 있어서 당분간은 올 시간이 없을 거예요.”선희는 나이도 있으신 분들에게 괜히 충격을 드리고 싶지 않아 그들의 사고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젊은이들은 바쁘게 돌아치느라 몸을 잘 돌보지 않는다니까. 너 돌아가면 아이들한테 너무 무리해서 일하지 말라고 전해라. 그게 다 만병의 근원이 되는 거야. 나중에 늙으면 어쩌려고?”“네. 돌아가면 그렇게 말해줄게요. 그리고 애들 데리고 한번 찾아뵈라고도 할게요.”“그런데...”명인은 살짝 감격한 듯 말했다.“그 둘은 이미 이혼하지 않았더냐? 어떻게 이렇게 큰아이가 있지? 설마...”명인의 마음속에 어렴풋한 추측이 하나 있었다.그녀의 추측에 선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짐작했지만 막상 확인해 보니 또 다른 심정이다. 이혼 후에도 혼자 두 아이를 낳을 줄이야. 이제 명인은 두 아이 모두 왜 심 씨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엄마. 두 아이 모두 윤아가 직접 키웠어요. 성씨 얘기라면 전 뭐라 하고 싶지 않아요. 그건...”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재.두 아이가 집에 없다는 소식을 들은 선우는 눈살을 찌푸렸다.“없다고요? 윤아가 아이를 다른 사람 손에 맡겼을 리는 없는데. 잘 알아본 거 맞아요?”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보낸 사람들 말에 따르면 아이들은 없었답니다. 정확히 어디로 갔는지는 아직 확인이 어렵다고...”우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어디로 갔는지 알아보려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얼마나요?”“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 집에서 나온 차가 30분 뒤부터 시시티비가 잡히지 않는 곳으로 사라져서요. 아직 행방을 찾지 못했습니다.”선우는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찾아간 사람들이 한발 늦었다는 거 아닌가. 그 사람들이 어떻게 알고 미리 몸을 피했을 리도 없으니.그는 순간 뭔가 떠오른 듯 우진을 노려봤다.“그 사람들이 어떻게 알고?”우진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되물었다.“네?”“진 비서가 정보 흘린 거 아니냐고요.”그는 버러지 보듯 우진을 보며 매섭게 말했다.“윤아를 죽이려는 거예요?”“?”우진은 잘못 들은 줄 알고 잠시 황당해하고 있다 드디어 선우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제가 미리 언질을 줬다고 생각하십니까?”“아니에요? 그게 아니면 어떻게 알고 집을 나가냔 말입니다. 그것도 하필 시시티비가 없는 길로. 무슨 수작을 부린 거죠?”그 말에 우진은 침묵했다.한참 뒤에야 입을 여는 우진.“제가 미덥지 않으시면 다른 사람 시켜서 하세요.”“내가 왜 진 비서를 남겨둔 건지 알잖아요.”“네. 윤아 님을 보호하라는 거죠. 저도 윤아 님이 걱정됩니다. 지금 윤아 님 상태가 이런데 제가 무슨 쓸데없는 데에 신경을 팔겠습니까?”선우는 우진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말투에 진심이 묻어나는 걸 보아 거짓말하는 것 같진 않았다. 하긴, 윤아를 생각하는 마음 없이는 생명의 위험까지 무릅쓰고 그녀를 탈출시키진 않았겠지.지금 윤아의 상태가 안 좋으니 우진도 그녀를 배신할 리는 없을 거다.하지만... 혹시 모를 고의성을 완전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걸까?’‘왜... 왜 이렇게 된 거지?’‘어떻게 해야 윤아 님이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까? 설마... 대표님은 정말 윤아 님이 이곳에서 생을 마감해야 놓아줄 건가?’우진은 선우가 이토록잔인하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어쩌면 그 말들은 그저 겁을 주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딴생각 말고 두 아이나 빨리 데려오게 하기 위해서.그 생각에 우진은 그제야 조금 진정이 되기 시작했다.‘그래. 대표님도 윤아 님이 잘못될까 봐 걱정 하시는 거야. 그게 아니면 이렇게 급하게 아이들을 데려오라고 할 리도 없지.’우진은 정말로 그쪽에 정보를 전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발 아이들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한 것인지. 그것도 별장 내 사용인들조차 어딜 가는지 모르게 말이다.우진은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두 아이를 찾지 못하면 윤아는 더 이상 살아갈 희망조차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 아이들까지 데려온다면 그때는 다시는 돌이킬 수 없게 된다.빨리 결정해야 한다.우진은 깊은 고민 끝에 결국 선택을 마쳤다.-우진이 나간 후 혼자 서재에 남아있는 선우.그의 어두운 표정과 어울리는 한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그때, 들려오는 핸드폰 벨 소리에 발신인을 확인한 선우는 눈에 생기가 돌더니 바로 전화를 받았다.“할아버지?”말투가 친근한 건 아니지만 조금 전보다 훨 듣기 좋았다.그러나 곧 들려오는 말은 선우의 표정을 굳게 만들었다.“무슨 말씀이세요?”핸드폰 너머로 그의 할아버지의 쌀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뜻인진 네가 더 잘 알겠지. 심윤아 그 아이 지금 너랑 같이 있지? 너 이 자식아,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선우는 입술을 꾹 닫은 채 말이 없었다.“당장 그 아이 집으로 돌려보내고 나 속 좀 그만 썩여라!”“진씨 집안 어르신이 알려드린 거예요?”“누가 알려줬든 그건 네가 상관할 바 아니다.”그의 말투엔 독재와 강압적인 느낌이 물씬 풍겼다. 이건 상의가 아닌 명령이었다.선우가 대
선우의 할아버지인 그는 선우가 반드시 자기 말을 듣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이 큰 가업을 순조롭게 물려받으려면 그의 눈에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그는 자기 손자지만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남자란 동물은 원래 여자 좀 만나보고 그러는 것도 정상이다. 큰 문제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다 넘어갈 수 있는 일이지.그는 그때 심씨 가문의 그 아가씨는 제법 괜찮아 보인다고 생각했지만 후에 그 집이 쫄딱 망하면서는 별 볼 일 없다고 여겼다. 게다가 진수현과 이혼하고 나서는 애 둘 딸린 이혼녀에 불과했으니 더더욱 곱게 보이지 않았다.그런데 손자놈이라는 것이 무슨 정신인지 그 여자한테 빠져서 이리도 멍청한 짓을 하고 있으니 정말 골치가 아팠다. 나중에는 몽둥이를 들고 찾아가 봤지만 선우는 여전히 그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선우와 실랑이를 하는 바람에 그의 혈압은 내려갈 생각을 안 했다. 결국 그의 비서가 말했다.“어르신, 왜 이리 노하셨어요? 어차피 그렇게 오래 붙어있고도 사귀지 않았잖아요. 대표님도 그냥 갖고 노는 거일 거예요. 애 둘 딸린 엄마일 뿐인데 놀다 질리면 자연스레 떨어지겠죠. 뭣 하러 이렇게까지 관여하세요? 인간이란 게 원래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지는 법이에요. 이렇게 떼어놓지 못해서 안달이면 저쪽에선 오히려 그 여자를 더 갖고 싶어 할 거라고요. 괜한 일로 두 분 사이만 나빠지시겠어요.”비서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둘이 정말 사귀는 것도 아니고 결혼한다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냥 잠깐 데리고 노는 거일 수도 있었다.그래서 그 뒤론 선우를 말리지 않았고 윤아에게도 잘 해줬었다.그러다 윤아가 귀국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두 사람이 이제 관계가 정리된 줄 알고 내심 기뻤었다.그 뒤로는 줄곧 손자를 위해 명문가의 며느릿감 여자들을 물색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진씨 집안에서 연락이 와서는 윤아를 내놓으라 하지 않는가.그는 그 전화를 받고 나서야 윤아가 선우와 함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진씨 집안에서 이런 일로 전화가 오자 그는
선우는 잠시 멈칫하더니 말했다.“아직 떨어질 위신이 있나?”그 말에 할아버지는 다시 한바탕 꾸짖었다.“이놈의 자식이! 넌 우리 집안 사람이 아니더냐?”선우는 말을 받지 않았다.“그 아가씨나 빨리 풀어줘!”그가 위협했다.그러나 선우는 쉽게 꺾이지 않았다.“할아버지는 내게 명령할 자격이 없어요.”“네가 내 손자인데 내가 명령할 자격이 없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선우는 냉소를 지었다.“꿈 깨세요.”말을 마친 그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이 개자식!”그가 막 욕을 하려고 입을 열었으나 전화는 이미 끊겨 반복되는 기계음만 들려올 뿐이었다.그 모습에 옆에 있던 비서가 급히 다가와 그를 진정시켰다.“어르신. 노여움 푸셔요.”“이놈이 내 전화를 끊다니. 이 망할 놈의 자식.”“한창 젊고 기세도 왕성할 때잖아요. 너무 따지지 마세요. 그러다 몸 상하시면 수지가 맞지 않잖아요.”비서의 위로가 있었기에 그의 마음은 비로소 조금 풀리는 듯했다.그러나 얼마 안 가 그의 얼굴에는 다시 근심 어린 표정이 떠올랐다.-전화를 끊은 뒤 선우는 휴대전화를 그대로 꺼놓은 채 내팽개쳤다.그는 어두운 얼굴로 그곳에 앉아 있었는데 머릿속은 온통 할아버지가 방금 한 말들뿐이었다.‘왜?’그는 단지 그녀를 원했을 뿐인데 왜 모든 사람이 그와 맞서는 것인지. 모두가 그녀를 자기 곁에서 빼앗고 싶어서 안달인 것만 같았다.심윤아...그의 눈동자가 가라앉더니 잠시 후 일어나 윤아의 방으로 향했다.오늘은 정신과 의사도 와있었다. 그는 자기가 매일 와서 그녀에게 말을 좀 하고 두 사람의 신뢰를 쌓는다면 언젠가는 윤아도 마음을 터놓기를 원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선우가 원하고 있는 것도 그것이었다.그러나 별 소용이 없었는지 첫날과 달리 다음날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말을 걸어보아도 아예 눈을 감고 듣지 않았다.나올 때 지태는 사람들을 보며 어쩔 수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아직도 대화를 거부하시니 내일모레 다시 시도할 수밖에 없겠네요.”여기까지 말한 지태
“헛소리 그만 하세요!”선우의 호통에 정윤은 깜짝 놀라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서있었다.어느새 눈가가 붉어지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모습으로 그녀는 바들바들 떨었다.옆에서 보고 있던 지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지금은 일단 그럴 일 없습니다. 지금으로선 다른 의사분을 찾아 음식물 섭취가 아닌 다른 경로로 영양분을 채울 방법을 알아보는 게 최선입니다. 방법은 늘 있지만 그래도 정상적으로 식사를 하시는 게 가장 좋겠죠. 그 방법도 오래는 못 버틸 겁니다. 계속해서 이렇게 음식을 먹지 않으면 몸이 망가져요. 죽진 않겠지만 죽어가겠죠. 그러다 결국엔...”그는 말을 잇지 않았지만 무슨 뜻인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선우는 검은 눈으로 굳게 닫힌 방문을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은 칼로 난도질당한 듯 아려왔다.“대표님... 그럼 전 이만 들어가 볼게요.”그때, 선우가 방에 들어가려는 정윤을 불러세웠다.“따라와요.”“네?”무슨 일로 보자는 건진 모르지만, 집주인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으니 정윤은 그를 순순히 따라갔다.가기 전에 선우는 우진을 힐끗 쳐다보고 말했다.“윤아 잘 지키세요. 무슨 일 있으면 부르고.”우진은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선우와 정윤이 간 후에도 우진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었다. 고개를 들어 윤아의 방문을 보자 그때 그의 선택이 떠올랐다.선우가 일부러 그에게 기회를 준 건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면 왜 그날 정윤과 함께 밖에 나가게 했겠는가.정말 그런 거든 아니든 우진은 그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방 안은 커튼이 쳐져 있어 한 줌의 빛도 없었다. 창문도 허약한 윤아의 몸 상태를 고려해 아주 작은 틈만 벌어지게 열려있었다.방 안의 공기는 후덥지근했고 오래 있으면 질식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우진은 이런 환경에 있으면 병이 더 악화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생각이 들었다.윤아는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는데 아마도 잠에 든 모양이다. 우진은 다가가 자는 윤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윤아 님.”그러나 그의
‘아이. 아이가 있었어?’‘어쩐지 뭔가 중요한 걸 잊고 있는 기분이라 했더니.’윤아는 다시 생기를 되찾은 듯 보이자 우진은 문 쪽을 한번 보고는 서둘러 말했다.“윤아 님. 이 일은 다른 사람한테는 일단 말하지 마세요. 제가 대표님과 상의해 볼 수도 있을지 몰라요. 대표님도... 윤아 님이 설득한다면 성공할 수 있을 거예요.”그를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윤아뿐일 거다.“설득이요?”윤아는 조금 전의 시체 같은 모습 대신 든든한 기둥을 부여잡고 있는 듯 강인한 모습이었다. 심지어 허약한 몸을 일으키려고까지 했다.“날 내보내달라고 설득하라고요? 지금 제가 이 꼴이 되도록 절대 안 풀어주던 사람이 그걸로 설득한다고 받아줄까요?”“어쨌든 시도는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기 몸을 망쳐가는 것보다 나을 테니까요.”예전이었으면 몸이 망가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우진이 아이에 대해 말해준 뒤로는 그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그래요. 해볼게요. 그런데 제가 기억이 전혀 없어서 혹시 전의 일들을 좀 알려주실 수 있어요? 제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그럼요.”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대표님이 곧 돌아올 거예요. 지금 말씀드리긴 힘들고 듣고 싶으시면 오늘 밤 저를 찾아오세요.”“네.”“그럼... 식사는 하실 건가요?”윤아는 잠시 멈칫하더니 미소를 띠어 보였다.“아이를 위해서라도 먹어야죠.”얼마 만에 보는 그녀의 웃는 얼굴인가. 우진은 그 모습에 잠시 멈춰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전 이만 나가볼게요. 대표님도 아마 금방 돌아오실 거예요. 먹을 걸 준비해 오실 테니 좀 드세요. 내일은 의사분께도 좀 협조하시고 치료받는 척이라도 하세요.”“그럴게요.”윤아는 말을 멈추었다가 우진이 나가려 하자 다시 입을 뗐다.“참,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방을 나서려던 우진의 발걸음이 멈추었다.“네.”“내 아이... 어떻게 생겼어요? 사진 같은 건 없어요? 좀 보고 싶은데.”우진은 잠시 멈칫하더니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