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돌아온 후에도 이선희는 윤아에게 아주 친절했다. 윤아의 손을 맞잡고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였다.윤아도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지,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서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두 아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라고 부르지만 윤아는 어머님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어쨌든... 벌써 5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났으니깐.눈빛이나 표정을 통해 윤아의 생각을 눈치챈 이선희는 손을 뻗어 윤아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살며시 넘긴 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아가야, 그동안 밖에서 고생했어.”이선희의 한마디에 윤아는 눈시울이 붉어졌다.이선희가 어떤 말을 할지 상상했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말과 마음속에 있는 털어놓을 수 없는 수많은 억울함에 윤아는 마음이 괴로웠다.윤아는 어릴 때부터 늘 자신에게 엄마가 있기를 바랐다. 지금 이선희한테 예전에는 없었던 가족 같은 친근감이 있었다. 윤아가 눈시울을 붉히자 이선희도 괴로운 마음에 손을 뻗어 윤아의 얼굴을 만졌다. “아가야, 괜찮아. 돌아왔으면 됐어. 예전에 현이가 너를 힘들게 했지? 앞으로 어머니가 잘해 줄게.”어머니?윤아는 이미 눈앞이 흐릿해져 이선희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렴풋이 안쓰러운 표정을 한 이선희가 보였다.문득 이선희가 자신을 가리키는 호칭에 윤아는 어리둥절했다.‘방금 자신을 어머니라고 한 거야?’‘그러면... 앞으로도 계속 어머님이라고 불러도 돼?’윤아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나직하게 말했다.“저는... 5년이 지났으니 어머님이 저를 미워하실 줄 알았어요.”“아가야, 그럴리가 있겠니? 넌 내가 너 어릴 때부터 봐온 아이야.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도 알고 있잖니. 네가 떠났을 때 나도 한동안 많이 자책했었어. 너희 둘 사이의 문제를 어머니라는 내가 제때 알아차리지 못하고 제때 해결해 주지 못한 건 내 잘못이지.”“아니에요.”윤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눈에 맺혔던 눈물이 순간 실이 끊어진 구슬처럼 뚝뚝 떨어져 하얀 얼굴을 더 청초하게 만들었다. “어머님과는
부상이 있는 몸으로 아직 해외에 있는 수현이 떠올라 윤아의 입가에 웃음이 조금 사라졌다.“자, 다른 건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하루 종일 비행기 탔더니 배고프지? 음식 거의 다 됐을 거야. 이따가 아무 생각 말고 밥이나 꼭꼭 씹어먹어. 나머지 일은 내일 얘기하자꾸나.”외국에서 먹었던 것과 달리 저녁은 푸짐하고도 익숙한 냄새를 풍겼다. 가장 중요한 것은...음식의 맛이 뜻밖에도 윤아에게 아주 익숙한 맛이었다...윤아는 고개를 들고 이선희와 진태범을 바라봤다. 비록 마음의 응어리가 풀리긴 했지만 서로 떨어져 있었던 시간이 길어 윤아는 조금 쑥스러워하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아버님, 어머님, 혹시 집안의 주방장이 아직도 바뀌지 않고 그대로에요?”이선희는 윤아를 다정하게 바라봤다. “주방장이 진씨 가문에 오래 일한 것도 있고 우리도 맛에 익숙해져서 안 바꿨어. 왜? 익숙한 맛이 느껴져?”“네, 엄청 익숙한 맛이네요.”음식도 익숙하고, 집안의 장식품조차도 변한 것이 없어 5년 전과 거의 똑같게 느껴졌다.굳이 다른 점을 꼽자면 아마... 밥상에 꼬맹이 두 명이 더 생긴 것이다.두 꼬맹이는 진태범과 이선희 사이에 앉아있었다. 두 사람은 윤아의 질문에 대답한 후 다시 아이들에게 반찬을 집어주기 시작했다. “자자. 윤이야, 이거 네가 좋아하는 거지? 많이 먹거라.”“훈이야. 이것도 먹어.”아이들은 이미 윤아가 돌볼 필요가 없었다. 윤아는 자기 밥만 잘 먹으면 됐다. 저녁 식사 후, 이선희는 윤아에게 말했다. “방은 원래 너랑 현이가 쓰던 방이야. 도우미가 매일 청소하고 이불도 모두 새것으로 바꿨으니까 바로 그 방을 쓰면 된단다.”“네.”“참, 너랑 상의할 일이 있단다.”이선희는 쑥스러운 듯 윤아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어머님, 무슨 일이세요?”“그게 말이다, 너희들이 오늘 하루 종일 피곤했잖니. 그래서 오늘 밤이라도... 윤이랑 훈이를 우리가 데리고 잤으면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떠니? 물론 네 의견이 더 중요하단다. 네가 싫으면.
진씨 집안이 남성에서 수원으로 거처를 옮기려 한다는 사실에 윤아는 경악했다.동시에 그녀는 수현을 더더욱 리스펙하게 되었다.하지만 그녀도 수현의 어머니가 결정했을 때 미리 물었었다.“진 씨네 뿌리는 남성이잖아요. 수원으로 이사 가면 혹시...”“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니. 나와 네 아버지 모두 이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이니 신경 쓰이는 건 너희 아이들뿐이야. 지금 우리는 손자가 둘이나 더 생겼으니 기쁜 마음으로 너희들을 제일 먼저 배려할 거야. 하물며 우리 부부는 어디서 살든 상관이 없단다. 그쪽이 여기보다 산 좋고 물 좋은 곳 아니냐. 네 회사도 거기에 있는 거 아니니? 모르는 거 있으면 아버지한테 물어보고, 열심히 하고 싶은 일 하렴. 아이는 전혀 걱정하지 말고, 나와 네 아버지가 물심양면으로 잘 보살피마.”그 말을 끝으로 선희는 아이들을 방으로 데려가랴, 친아버지와 이사에 관한 일을 상의하랴 바쁜 탓에 더 대화를 이어가지 못했다.윤아는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계속 이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회사는 지금 막 시작한 단계라지만 그럭저럭 성과를 내고 자리를 잡는다고 해도 진 씨 가문에 비하면 여전히 볼품없다.하지만 지금 그들은 그녀가 볼품없는 회사 하나를 붙잡고 있는 것도 전혀 개의치 않을뿐더러 그녀를 따라 수원까지 함께 가준다고 하고 있다.‘정말 이제는 회사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지신 건가?’ 이런 생각을 하며 윤아는 재빨리 익숙한 문 앞으로 다가갔다. 멈춰 섰을 때, 그녀는 계속 딴생각을 하며 걸어도 몸이 자연스레 방을 찾아갔음을 알아채고 새삼 놀랐다. 5년이나 흘렀는데 몸은 아직도 이 집이 익숙한 모양이다. 방문을 열자 낯익은 풍경이 보였다.그녀는 멍하니 걸어 들어가 5년 동안이나 거의 변하지 않은 실내장식을 바라보았다. 침대 위의 이불만 새것으로 교체했고 다른 것들은 크게는 커튼, 작게는 탁자 위의 장식품까지도 모두 교체하지 않았다.그때와 달라진게 없는 낯익은 방의 모습에 윤아는 왠지 5년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이
그러나 곧 수현의 눈빛이 변했다. 아무래도 그녀의 뒷배경을 본 모양이다. “집이야?”윤아는 그의 뒤를 훑어보다가 왠지 모르게 조금 마음이 불편해졌다. 사실 자신이 이렇게 빨리 그를 용서했다는 것을 그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달갑지 않은 마음이 줄곧 있긴 했다. 비록 두 사람 사이에는 오해가 있었지만 그래도 그에게 받았던 마음의 상처는 그대로니. 윤아는 그와 함께 있고 싶은 건 맞지만 이렇게 빨리 그를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말없이 시선만 떨구는 윤아를 보자 수현의 눈빛이 약간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는 곧 생각을 바꾸고 화제를 돌렸다.“훈이랑 윤이는 자?”다른 이야기를 들은 윤아는 그제야 다시 눈을 떴다.“아마 잠들었을 거야. 밤에 같이...”윤아는 또다시 말을 멈추었고 덩달아 멈칫하던 수현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훈이랑 윤이 지금 혹시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있는 거야?’윤아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어, 어른들이 좋아하시더라.”자꾸만 말을 잇지 못하는 윤아의 모습에 분위기가 이상해진 탓인지 이야기가 끝난 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한참 뒤에야 수현은 자신의 얇은 입술을 오므리고 스크린 너머의 윤아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진 비서 일은 걱정하지 마. 오늘은 아직 아무 소식이 없지만 계속 조사해볼게. 소식이 있으면 바로 너한테 알려줄 거야.”윤아는 그를 향해 웃었다.“응.”수현은 아직 외출복 차림인 그녀를 보고 물었다.“아직 안 씻었어?”“응. 씻으러 가려고 하는데 네 전화가 왔어.”“내가 방해한 건가?”“아니야.”윤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잠깐 영상통화 하는 건데 뭐. 늦게 씻어도 괜찮아.”어차피 지금은 잘 시간도 아니었다.비록 온종일 비행기를 타서 좀 피곤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영상통화 한 통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수현은 화면 너머로 윤아의 매끈한 피부와 오밀조밀한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입으로는 괜찮다고 하지만 자세히 보니 윤아의 눈에 피로감이 언뜻 비쳤다.‘내가 계속 붙잡고 있으면..
세수를 마친 윤아는 침대에 누웠다.이불이 하도 푹신푹신해 거의 이불 속에 몸이 통째로 빠져들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윤아는 원래 그녀가 5년 전의 일을 거의 잊었다고 생각했다. 그를 떠나고 초반에는 국내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 특히 그녀와 수현 사이의 사소한 일들이 떠올라 잠 못 이룬 밤이 많았기 때문이다.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옛 추억은 서서히 잊혀졌다.나중에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차분하게 자신의 삶을 살았다.그렇게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이 침대에 누우니 수현과의 추억이 또다시 머릿속에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두 사람 사이의 추억이 어느새 떨어지는 벚꽃잎처럼 붙잡을 수도 없이 떨어져 내렸다.그도 그럴 것이 이 침대는 윤아가 수현과 사랑을 나눈 곳이었다.그렇게 얼마나 생각했을까, 윤아는 어느새 지쳐 잠자리에 들었다.다음 날, 윤아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훈이가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핸드폰을 확인해보니 어느새 아침 10시가 되었다.“엄마. 오늘 엄청 많이 잤어요.”서훈은 그녀를 보며 감탄하듯 말했다.윤아는 약간 헝클어진 긴 머리를 정돈하며 말했다.“나도 모르게 늦잠을 잤네. 어젯밤 알람 맞추는 것도 까먹고 잠들었나 봐.”“엄마, 할머니가 요리사한테 맛있는 거 많이 해달라고 했는데 엄마가 안 일어나서 먼저 먹었어요. 엄마 지금 배고프죠? 먹을 걸 좀 가져다 달라고 할까요?”“괜찮아.”윤아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밥 한 끼 먹는데 방까지 가져다주는 건 조금 부담스러웠다.“우리 아들 먼저 내려가. 엄마 옷 갈아입고 갈게.”“네.”서훈이 떠난 뒤 윤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렇게 깊은 잠에 빠질 줄은 정말 몰랐다. 예전의 낯익은 곳으로 돌아와서 그런가. 예전에는 이렇게 잠을 자는 경우가 거의 없었는데 말이다.계단을 내려간 뒤 윤아가 아침 식사를 하자 하윤은 바로 옆에 앉아 선희의 품에 안겼다. 윤아는 손목에 예쁜 팔찌를 차고 있는 하윤을 보며 물었다.“무슨 팔찌니?”“할머니가 윤이한테 주신 거예요.”
윤아는 쳐놓은 호칭을 모두 지우고 다시 입력했다.“우리는 오늘 수원으로 출발할 거야.”‘이러면 조금 자연스러워 보이겠지.’그녀는 두 번 관찰하고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소식을 보냈다.소식이 발송된 지 오래되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윤아는 수현이 오랫동안 답장을 하지 않자 대수롭지 않게 여겨 휴대전화를 치웠다.시차 때문에 연락이 쉽지 않아 윤아는 수현이 답장을 하지 않아도 자고 있거나 바쁘겠거니 했다.아무 때든 시간 될 때 답장이 올 것이다.수원에 도착했을 때는 밤이었고, 거리는 네온사인이 번쩍였고, 곳곳에 고층건물이 있었다.선희는 이런 건축물이 이미 익숙했지만 이번에 수원에 와서 윤아가 심리적 압박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에 괜히 더 호들갑을 떨었다.“수원의 건물도 난청보다 나쁘지 않아. 방금 일기예보를 확인해봤는데 살기 좋은 곳인 것 같네. 앞으로 여기서 오래 있고 싶으면 수현도 본사를 이쪽으로 옮기라고 해.”그녀의 말 속에는 온통 윤아를 향한 마음이었다.윤아는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그건 수현 씨 마음이죠.”“쟤 마음 아니고 우리 마음이야.”선희는 윤아의 가냘픈 손목을 잡으며 약속이라도 하듯 말했다.“널 위해서라면 기꺼이 이사를 하겠다고 할 거야. 싫다고 그러면 내가 도와줄게.”‘날 위해 이사를?’왜서인진 모르겠지만 윤아는 그녀의 말이 제법 신뢰가 갔다. 그리고 최근 수현의 모습을 보니 확실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기도 했다.다만 회사를 옮기는 건 작은 일이 아니다. 어쨌든 진 씨 그룹의 직원 대부분은 현지 거주자이기 때문에 만약 정말로 회사를 옮긴다면 수현뿐만 아니라 직원들도 심각한 피해를 보게 될 거다. “나중에 보죠.”“그래, 나중에 보자. 어차피 돌아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야.”선희는 배려심에 굳이 그가 왜 해외에 남아 있는지 묻지 않았지만 윤아는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일은 분명히 다 해결되었지만 그녀의 이기심 때문에 수현이 해외에 머무는 것이지 않은가.게다가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고 말이다.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윤아는 곧바로 연락처에서 수현의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려고 했다.그러나 막상 전화를 걸려니 조금 머뭇거려졌다. 그녀는 2초 뒤 아직 걸지 않은 전화를 다시 눌렀다.그가 자신의 메시지에 답장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지금 바쁜 상태이거나 답장이 불편한 상태라는 것을 의미한다.‘괜히 전화했다가 방해라도 하면...’‘됐어. 안전을 위해서 당분간 먼저 전화 걸지 말고 기다리자. 일이 끝나면 바로 답장할 거야.’이런 생각에 윤아는 핸드폰을 가까이 두고 어딜 가나 들고 다녔다. 그 정도는 점점 심해져 이젠 세수를 할 때도 옆 테이블에 올려놓고 수시로 살폈다.하지만 여전히 수현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자 윤아는 마음이 불편해 샤워할 때도 핸드폰을 들고 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혹시나 문자가 오진 않았는지 수시로 살피고 핸드폰이 울리면 곧바로 달려들어 확인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기다리는 사람의 소식이 아님을 발견하고는 낙담하여 내려놓았다.그렇게 윤아는 샤워를 한 시간이나 했다.그녀는 방에 서서 착잡하게 머리를 닦으며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다가 머리를 말리고 누울 때까지 하얀 천장을 쳐다봤다.그러다 문득 그를 너무 의식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윤아.‘그냥 답장이 없을 뿐이잖아? 내가 이렇게 넋을 잃을 정도로 긴장했다고?’‘이런 식으로 어떻게 그를 시험한다고.’ 윤아는 몸을 뒤척이며 검은 핸드폰 화면을 보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래도 그녀는 자기 생각을 통제할 수 없었다.한참을 기다리던 윤아는 참다못해 민재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를 받은 민재의 목소리는 잠결에 잠에서 깬 것이 분명해 보였다.“윤, 윤아 님. 무슨 일이세요?”그제야 시간을 확인한 윤아는 이 잠깐 사이에 벌써 12시가 넘었다는 것을 알았다.하긴, 그녀들이 수원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이미 늦은 시간이었으니.그는 입술을 오므리며 말했다.“늦은 시간에 전화드려서 죄송해요.”“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저는 원래 진수현 대표님 사람입니다.
중요한 일?‘왜 나한텐 한마디도 하지 않고?’하지만 윤아는 곧 마음이 놓였다. ‘어쩐지 답장이 없더라니, 정말 바빴구나.’‘괜히 문자를 보내서 귀찮게 한 건 아니겠지?’ ‘윤아 님. 걱정 마세요. 대표님은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시간도 늦었는데 일찍 쉬시겠어요?”윤아는 그의 말에도 걱정되는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하지만 시간도 늦었는데 괜한 사람을 붙잡고 귀찮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그래요. 비서님도 일찍 쉬세요.”“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 주세요. 대표님 쪽 소식은 제가 알게 되는 대로 바로 전달 드리죠.”“고마워요.”전화를 끊은 뒤 윤아는 핸드폰을 쥔 채 다시 몸을 뒤척이며 생각에 잠겼다.그녀는 마음이 뒤숭숭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그렇다고 그녀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결국 윤아는 복잡한 마음을 뒤로 한 채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잠자리에 들었다.다음날, 그녀는 핸드폰 진동 소리에 잠에서 깼다.잠에서 깬 후에야 그녀는 자신이 설정한 알람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엊그제 너무 늦게 깨서 좀 일찍 알람을 맞춰놨는데 알람 소리가 너무 컸는지 아니면 진동 소리를 너무 오래 들어서 그런지 일어나서도 눈꺼풀이 계속 미친 듯이 뛰었다.심장박동도 정상이 아니었다.알람을 끈 후, 윤아는 벽에 기대어 감정을 추스르고 오랫동안 숨을 돌렸다. 그제야 심장 박동은 조금 나아졌지만 눈꺼풀은 여전히 떨렸다.그녀는 줄곧 미신을 믿는 사람이 아니어서 무슨 눈꺼풀이 떨리면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한다는 것을 줄곧 믿지 않았다.그러나 지금 그녀의 마음속에는 강렬한 불길한 예감이 떠올랐다.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다시 핸드폰을 보니 두 사람의 대화창은 여전히 자신이 보낸 메시지에만 머물러 있었고 이후로는 별다른 메시지가 없었다.‘어제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지났는데, 아무리 바쁜 일이 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바쁘다고?’‘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지?’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가자 윤아는 이불을 들추고 점퍼를 한 벌 집어 입고 밖으로 나갔다.선희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