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이는 아저씨가 너랑 윤이의 아빠로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수현은 훈이가 원하느냐가 아니라 본인의 자격이 충분한지 물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똑똑한 훈이는 곧 수현의 말뜻을 이해했다. 한참 동안 멍해 있던 훈이가 대답했다 “그건... 엄마가 동의하시는지 봐야죠.”“아저씨의 뜻은, 엄마가 아니라 너 자신만 볼 때 아저씨가 너랑 윤이의 아빠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는지 물어본 거야. 아저씨는 네 가장 솔직한 생각이 궁금해.”훈이는 말이 없었다.“두려워하지 마.”수현은 훈이의 어깨에 큰 손을 얹으며 모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진심을 말하면 돼.”비록 그동안 고독현 밤 아저씨가 많은 것을 해주고 항상 라이브까지 보러 오곤 했지만 훈이가 하려는 말은 아마 수현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것이다. ‘고독현 밤'이라는 이름은 두 어린아이에게 큰 힘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낯선 사람, 설령 그들의 친아빠라고 할지라도, 만약 ‘고독현 밤'이라는 타이틀이 없다면, 아이들이 그렇게 빨리 이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아니, 큰 거리감이 있었을 것이다.거리감이란, 아주 치명적인 것이고 습관은 많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 마치 두 아이가 매번 라이브 때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고독현 밤이라는 남자가 달려와 그들의 라이브를 보고 선물을 주는 것에 익숙해진 것처럼. 아이들은 이미 생활에 고독현 밤이라는 존재가 있는 것에 익숙해졌다.그래서 당시 수현이 고독현 밤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자마자 순식간에 두 녀석의 마음속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위치를 차지했다.하지만 그렇다고 쳐도...훈이는 그래도 고개를 가로저었다.“고독현 밤 아저씨, 솔직하게 말하면 안 돼요.”답은 수현의 예상대로였다.훈이가 안 된다고 말 할 것을 예상한 듯 수현의 마음속에는 실망이나 다른 감정이 들지 않았다. 그저 훈이를 담담히 바라보며 평온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저씨가 뭘 더 해야 하는지 말해줄 수 있어?”그 말은 들은 훈이는 수현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런 마음이라면...만약 자신이 선우 아저씨를 더 좋아한다고 말한다면, 그땐...이런 생각에 훈이는 직접적으로 말했다.“선우 아저씨가 저희랑 함께한 시간이 더 길어요.”그 말에 수현은 숨이 막혔다. “그래서...”“그런데 고독현 밤 아저씨는 라이브에 자주 오시고 별풍선도 많이 줬어요.”이 말 한마디에 수현의 가라앉은 마음이 다시 들떴다.원래 수현의 생각대로라면 훈이가 자신의 희망을 없앨 것이라고 생각했다. 뜻밖에도 훈이의 말은 또 바뀌어, 수현의 애간장을 태웠다. “그래서?”수현은 긴장된 마음으로 물었다. 자신이 한 아이의 생각에 이렇게 신경을 쓸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지금 아이가 자신을 선택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선택할까 봐 두려웠다.“그래서...”훈이는 일부러 말끝을 길게 늘어뜨렸다. 수현의 호흡이 거칠어지는 것을 보고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그래서 고독현 밤 아저씨랑 선우 아저씨는 무승부예요.”무승부?수현이 어리둥절했다.“무승부라니?”“고독현 밤 아저씨, 선우 아저씨한테 질 것 같았어요?”수현은 입술을 살짝 틀어 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확실히 자신이 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하간에 그의 부재는 많았으니까.곁에 함께 있는 것만큼 상대의 마음을 울리는 일은 없었다. 수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훈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이렇게 말해줘서 아저씨는 너무 기뻐.”말을 마치자마자 윤이를 데리고 옷 구경을 마친 윤아가 걸어 나와서 대화가 끊겼다. 무승부, 이는 머지않아 두 녀석 마음속 선우의 위치를 넘어설 수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기에 현재로서는 수현이 매우 만족하는 결과다.갑자기 그동안 계속 아이들의 라이브를 보려 달려간 자신을 칭찬하고 싶었다....오후가 되자 윤아는 여권, 신분증 등 서류 준비가 끝나서 언제든지 티켓을 살 수 있고 귀국 준비를 할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우진의 소식이 없었다. 선우도 다쳐서 이대로 가버리기엔 윤아 본인도 내키지
비록 어떻게든 윤아를 찾았을 거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을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됐어.”윤아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말을 더 하려고 했다. 그러자 수현의 커다란 손이 윤아의 가녀린 허리를 감싸안았다. “그만 생각해, 내가 남기로 선택했으면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것을 의미해.”“하지만... 이 일들은 원래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아니잖아.”“윤아야.”수현은 나지막이 윤아의 이름을 불렀다.“해야 할 것, 말아야 할 것 같은 건 없어. 그저 마음에서 우러러나오는지 하는 문제야.”“내가 남는 게 정말 미안하다면 귀국한 후에 나에 대한 태도를 바꿔주는 건 어때?”윤아는 수현이 호칭 문제를 말한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 수현은 두 아이가 자신을 ‘고독현 밤' 아저씨가 아닌 아빠라고 부르기를 원했다.그렇다면, 수현이 이렇게 많은 일을 한 것은 다 이 작은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였던 걸까?수현의 말에 윤아는 멈칫했다. “당신이 애들한테 말 안 할 거야?”수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윤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수현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안 만날래. 다음에 만날 거야. 다음에 다시 만날 때 당신이 내 소원을 들어줘서 아이들이 더 이상 날 고독현 밤 아저씨라고 안 부르기를 바라.”아이들이 뭐라고 불러야 할지, 수현이 원하는 것은 이미 분명했다.“가.”윤아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수현에게 떠밀려 방으로 정리하러 들어갔다. 그리고 수현은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슬펐는지 곁에 머물지 않고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커다란 방에 홀로 남겨진 윤아는 텅 빈 방을 둘러보았다. 수현이 자신과 함께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남아 진우진을 찾으려 한다는 생각에 점점 쓸쓸해졌다....귀국한다는 말을 들은 두 아이는 기쁨에 환호했다. 집에 돌아가면 앨리스 이모를 만나러 갈거라고, 학교도 그리웠다고 조잘조잘 말했다. 저녁 9시 항공편이라 출발까지 4시간 남았다. 저녁은 늘 그렇듯 다 함께 먹기로 했는데 윤아와 아이들이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수현은 없었
저녁 식사는 윤아가 예상한 대로 흘러갔다. 그들이 식사를 거의 끝내고, 음식이 다 식을 때까지 기다렸으나 여전히 수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공항에 출발하기까지는 아직 한 시간이 남았다. 윤아는 두 아이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궁금증을 참지 못한 윤이가 물었다.“엄마, 고독현 밤 아저씨는요? 언제 돌아와요?”윤아는 민재가 대답했던 것처럼 윤이에게 말했다. “엄마도 민재 아저씨처럼 잘 몰라. 엄마에게 어디 갔는지 말하지 않아서 엄마도 언제 돌아오는지 모른단다.”윤아의 대답에 윤이는 짧게 대답하더니 고민하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그럼 엄마, 고독현 밤 아저씨가 우리 공항 갈 때까지 안 들어오시는 거 아니죠? 그럼 오늘 아저씨를 못 보는 거 아니에요?”두 아이가 큰 기대를 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윤아는 솔직하게 말했다. “음, 그럴지도 모르지. 아저씨가 할 일이 많으셔서 다 해결되면 나중에 우리를 찾아올 거야.”이렇게 말하면 아이들이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수현을 다시 만날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기대를 하지 않으면 실망의 감정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역시나 윤아의 설득에 넘어간 윤이는 더 이상 이 일을 묻지 않았다. 한 시간 후, 민재가 문을 두드렸다. “윤아 씨, 공항으로 출발할 시간이에요.”공항과 거리가 멀어서 길이 막힐까 봐 미리 출발해야 했다. 민재의 부름을 들은 윤아가 대답했다.“금방 갈게요.”대답 후 윤아는 캐리어를 챙기고 두 아이를 불렀다.“가자.”두 아이는 자신의 미니 캐리어를 끌고 윤아의 뒤를 따랐다.문이 열리자마자 민재가 앞으로 나와 윤아와 두 아이의 캐리어를 가져갔다.특별한 행동이 아니었는데 윤아는 순간적으로 우진이 자신을 도와줬던 일을 떠올렸다.전에 외출할 때 우진이 함께하면 늘 윤아와 아이들의 캐리어를 모두 들어줬다. 벌써 며칠이 지났다. 지금 우진은... 대체 어떻게 되었을까.떠날 때까지 우진의 소식을 듣지 못할 줄은 몰랐다. 진우진이 무사하길 바랐다. 적어도..
그러나 그 사람은 윤아의 의도를 눈치챈 듯 비명을 지르기 전에 손을 뻗어 입을 막았다.“흡.”윤아의 외침은 순식간에 신음으로 변했다. 방 안은 불을 켜지 않아 어두웠다. 게다가 윤아가 들어온 후 방문이 닫혀버렸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미약한 불빛을 빌어서야만 커다란 사람의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윤아는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고, 손과 발이 묶여서 상대방이 그녀의 입술을 가리고 있던 손을 치울 때까지 움직일 수 없었다.윤아는 손을 치운 틈을 타 소리를 내려고 했지만 눈앞의 사람이 빠르게 몸을 숙여 먼저 입을 맞추었다.거친 호흡과 뜨거운 기운이 윤아의 얼굴을 덮쳤다. 윤아도 마침내 상대방의 향기를 분명히 맡았다. 이것은...윤아가 의아해하며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상대방은 더 깊이 들어와 뜨겁게 키스했다.두 사람의 숨결이 뒤엉키고 방안엔 서로의 냄새로 가득했다. 심지어 윤아는 진한 담배 냄새까지 맡았다.수현 씨가... 담배를 피웠던가?한 번도 안 피웠던 것 같은데, 뭐지?입술이 쓰라린 윤아는 정신을 차렸다. 그러자 윤아를 문에 밀치고 있던 사람이 나지막이 말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딴생각하고 있어? 그 사람 생각하는 거야?”‘그 사람이 누구지?’윤아는 한참 동안 넋을 잃고 있었다. 상대방의 입술이 다시 입술에 닿아서야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깨달았다. 다만 너무 늦게 알아채 수현의 질문에 대답할 기회가 없었다. 키스는 점점 더 격렬하고 거칠어졌으며 점점 더 깊숙이 들어왔다. 마지막에 윤아의 목은 한계까지 젖혀진 채 수현의 폭풍 키스를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음...”윤아는 숨 막히는 느낌에 무의식적으로 웅얼거리며 손을 뻗어 수현의 가슴을 밀쳤다. 하지만 앞에 있는 사람은 키스가 부족한 듯 아예 윤아의 손목을 등 뒤로 끌어당겨 자기 허리를 감쌌다.윤아는 어쩔 수 없이 수현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키스는 계속됐고, 열기는 계속 올랐다.키스가 끝난 후, 윤아는 고막에 물이 들어간 것처럼 윙윙 울렸고 머릿속도 완전히 멍해졌
“가기 전에 윤이와 훈이가 언제 너를 만날 수 있냐고 물었어.”윤아는 수현의 품에 안겨 작은 소리로 말했다.“응.”수현은 한마디 대꾸 후 계속 말했다. “아이들은 안 만날래.”수현의 품에서 고개를 든 윤아는 의아한 듯 물었다. “왜? 날 만나러 왔으니 겸사겸사 애들도 만나지 그래?”수현은 고개를 숙이고 윤아를 진지하게 바라본 후 붉은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돌아가서 만날래. 하지만 그때는... 아이들이 날 다시 만났을 때 호칭을 고쳤으면 좋겠어. 그래줄 거지?”윤아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말을 잇지 못했다.“혹시 싫은 거야?”수현은 다정하게 윤아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키스하게 놔뒀으면서 왜 아직도 싫은 거야?”원래 수현은 자신이 이선우와 경쟁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조금 질투가 났다. 그런데 키스할 때 윤아가 자신에게 응답하고 의존하는 것이 느껴져 질투심이 눈 녹듯 사라졌다. 이제 이쪽 일을 다 처리하고 돌아가면 네 식구가 함께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수현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돌아가면 어머니와 아버지도 계실 텐데 그때 부모님이랑 먼저 만나보는게 어때?”윤아는 말이 없었다.윤아가 대답하지 않자, 수현은 어느 정도 수그러들었다.“물론 당신이 원치 않다면 그냥 못들은 거로 해. 부모님께는 말하지 않을 거야.”수현은 윤아가 항상 누군가가 아이를 뺏을까 봐 걱정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윤아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수현은 윤아를 걱정시키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윤아가 잠시 머뭇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수현은 이미 먼저 꼬리를 내리고 그녀에게 미움을 살까 봐 눈치를 살폈다.예전과 달리 비굴한 반응에 윤아는 속으로 푸념했다.윤아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내가 말했어?”“어?”“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왜 이렇게 성급하게 나 대신 결론을 내?”이 일을 언급할 때면 수현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예전에 윤아와 함께 지내고, 키스할 때처럼 담담하고 주도권이 있는 모습은 전혀
세 사람이 마침 방문 앞까지 다가와 목소리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윤아의 귀에 또렷이 들려왔다.윤아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돌려 수현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나가야겠어. 아니면...”수현이 몸을 숙여 다가가자 윤아는 말을 멈췄다.수현의 뜨거운 숨결이 윤아의 얼굴에 닿았고 곧바로 윤아를 감쌌다. 얇은 입술이 윤아의 입가에 닿더니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키스 한 번 더 해.”말이 끝나자마자 윤아가 반응하기도 전에 또다시 키스했다. “흡.”윤아는 다시 입을 맞추는 수현을 미처 밀쳐내지 못한 채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냈다.그러다 문밖의 사람에게 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른 목구멍으로 소리를 삼켰다. 그녀는 당황한 기색으로 손을 뻗어 수현의 가슴을 막았다.아이들과 이민재가 찾아왔을 때 이런 짓을 하다니, 정말 간이 배 밖으로 나왔네...밖에 있는 아이들이 소리를 들을까 봐 윤아는 몸부림도 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나중에 들긴다면 엄청 민망해 죽을 것 같았다.“민재 아저씨, 엄마 어디 갔어요?”경계심이 강한 민재는 혹시 윤아가 사라진 것이 선우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짐작하며 둘러보던 중 갑자기 굳게 닫힌 방문이 보였다. 이윽고 무슨 생각이 난 듯 민재는 두 아이에게 대뜸 말했다.“엄마가 깜박하고 두고 온 물건이 있어서 가지러 갔나 봐. 우리 먼저 캐리어를 가지고 밖에 나가서 엄마를 기다리자.”그런데 윤이가 집요하게 물었다.“엄마가 뭘 가지러 갔어요? 우리가 도와주러 갈까요?”“아니야. 엄마가 물건 가지는데 네 도움이 필요하겠어? 얼른 가자. 우리 밖에 나가서 기다리자.”말을 하면서 민재는 윤이가 번복할까 봐 얼른 손을 뻗어 윤이를 품에 안고 밖으로 나갔다.그리고 방 안의 윤아는 수현에게 키스를 당하면서도 문밖의 상황에 정신이 쏠려 키스에 그다지 집중하지 않았다. 문밖의 사람들이 떠나고 나서야 윤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몸의 긴장이 풀렸다.수현이 허리를 살짝 꼬집자 윤아는 정신이 번쩍 들어 눈앞의 사람을 쳐
올 때와 돌아갈 때의 기분은 완전히 다르지만, 모두 좋은 편은 아니었다.그나마 다행인 것은 올 때나 갈 때나 두 아이가 곁에 있다는 것이다.수현의 소식을 접한 민재는 비행기에 오르기 전에 두 아이에 대한 모든 일을 태범과선희에게 전했다.태범 부부는 이 사실을 알고 한참 동안 놀라움에 말을 잃었다가 끝내 입을 열었다.“바로 돌아갈게요. 몇 시 비행기에요? 마중 나갈게요.”민재에게 태범 부부가 한 말을 전해 들은 윤아는 약간 민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윤아도 태범 부부와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다. 5년 동안 떠나있다가 다시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나눠야 할지 몰랐다.민재는 윤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윤아의 표정을 보고 추측할 뿐이다. 달가운 것 같지 않은 것이 분명해 조심스럽게 물었다.“윤아 씨. 불편하거나 걱정이 되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저희 대표님께서 이 일은 언제든지 그만둬도 된다고 하셨어요.”민재의 말을 들은 윤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민재를 바라보았다.“언제든지 그만둬요?”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두 분께 다 말씀드리지 않았어요?”말하기 전에는 상관없지만 이미 모든 것을 말했는데 어떻게 그만 두겠는가? 공공연히 사람을 실망할 수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맞아요.”민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저희 대표님은 모든 것이 윤아 씨의 뜻에 따라야 한다고 하셨어요. 모든 결정권은 윤아 씨에게 있으니 만약 윤아 씨가 걱정되거나 불편하시면 언제든지 그만두면 돼요. 뒷일은 제가 다 처리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윤아는 수현이 말한 것들이 모두 진심일 줄은 몰랐다.그러자 윤아는 붉은 입술에 미소를 머금고 담담하게 웃었다.“불편한 것은 없어요. 단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5년 전이어서 지금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예상 밖의 대답에 민재는 수현 대신 기뻐하며 얼른 윤아를 위로했다. “윤아 씨, 안심하세요. 전에 제가 진 사모님이랑 통화했을 때 윤아 씨를 엄청 걱정하고 많은 것을 물어보셨어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