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림한 몸매에 수려한 얼굴, 그리고 차가운 눈매까지.그와 눈이 마주치자 윤아는 걸음을 멈췄다.“수현아?”여기에서 진수현을 마주칠 줄은 김선월도 몰랐다.“할머니.”동굴 같은 중저음 보이스. 그의 목소리는 살짝 갈라진 듯 푸석했으나 오히려 퇴폐적인 관능미가 묻어났다.윤아는 작게 실소를 터뜨렸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수현은 놓치지 않고 시선을 돌려 윤아를 진득하게 쳐다봤다.“어떻게 된 거니? 윤아가 너 밤을 새워서 못 일어났다고 했는데. 난 또 너 오늘 못 오는 줄 알았다.”수현은 윤아가 그런 변명을 댔을 줄을 생각도 못 했다. 그는 입술을 앙다물고는 달래는 말투로 선월에게 말했다.“밤을 꼴딱 새웠어도 할머니 뵈러는 와야죠.”“말은 번지르르하게 잘하는구나.”그녀는 언뜻 싫은 척 하긴 했지만 얼굴에 번지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수현은 윤아의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내가 밀게.”수현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윤아는 그의 몸에서 술 냄새가 나지 않음을 느꼈다. 아니, 오히려 상쾌한 비누 향이 맴돌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입고 있는 옷도 어제와는 다른 옷이었다. 입고 있는 검은색 셔츠는 반듯하게 다려졌고 몸에 잘 맞았다. 윤아는 누구의 정성인지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아마 어젯밤 수현과 함께 밤을 보낸 그 누군가가 다려준 거겠지?윤아가 생각에 잠겨 있는데 수현이 가까이 다가와 휠체어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다가오는 걸 본 윤아는 재빨리 휠체어를 잡고 있던 손을 빼고 크게 두 발자국 이동해 그와 거리를 유지했다. 마치 수현이 가까이하면 안 될 맹수라도 되는 듯이.몇 초 정도의 정적 후 수현의 낯빛이 어두워지더니 온몸으로 서늘한 기운을 내뿜었다. 양훈의 추측을 듣고 잠시나마 기대했던 자신이 우스웠다. 역시 괜한 생각을 하던 거였나. 그는 자소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왜 그러냐?”수현이 휠체어를 잡고도 아무 미동이 없자 김선월이 물었다. 그제야 수현은 정신을 차리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가요, 할머니.”수현
문자를 본 윤아는 고개를 돌려 진수현을 바라보고 그도 마침 윤아를 보고 있었다. 윤아는 밤하늘보다도 새까만 수현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고개를 휙 돌렸다. 그는 입술을 꼭 깨물고 수현을 못 본 체했다.수현은 그런 윤아의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그 순간 윤아의 핸드폰이 다시 한번 진동했다. 「이리와.」아니. 싫다.「할머니 수술 마치시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좋아. 하지만 지금은 순순히 협조해주는 게 어때. 네가 말했잖아. 우린 협조 관계라고.」뒤의 말에 윤아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하긴. 애초에 둘은 계약관계다. 이 모든 게 원해서 한 일인데 인제 와서 무슨 교태를 부리는 건가.윤아는 숨을 크게 한번 들이쉬고는 천천히 발을 옮겨 그의 곁으로 갔다. 마음의 준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수현에게 다가가는 그 한 걸음은 여전히 참 어려웠다. 윤아가 드디어 그의 곁으로 다가왔을 때 수현은 이미 얼굴이 흙빛이었다. 그는 눈앞의 윤아를 보며 기가 막혔다.그때 갑자기 손을 뻗어 윤아의 손목을 잡는 수현.윤아는 깜짝 놀라 그를 피하려 했지만 이미 수현에게 잡혀버린 뒤였다. 수현은 윤아의 손목을 당겨 자신 팔에 두르며 여전히 서늘한 얼굴로 말했다.“손잡지.”선월 앞에서 이런 말을 하다니. 윤아는 말없이 그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그를 보았다. 하지만 선월이 더 중요하기에 여기에서 그를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그제야 수현은 한숨을 내쉬고 시선을 거두었다.“잘 잡고 따라와.”윤아는 짜증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알았어.”가만히 앉아 기다리던 선월이 그제야 웃음을 띠며 말했다.“화해했니?”“네?”“수현이 오늘 너랑 같이 안 왔을 때부터 이상하다 했어. 내가 요양원에 와서부터 너희 둘 한 번도 따로 오는 걸 본 적이 없는데 말이야.”그 말에 윤아는 고개를 떨구고 입술을 깨물었다. 나름 잘 연기했다 생각했는데 할머님 눈은 못 속이나 보다. 할머님 앞에선 아무것도 감춰지지 않는 것 같았다. 게다가 다 알면서도 아무
윤아는 서늘한 얼굴로 몇 번이고 손을 씻었다. 그냥 단순히 강소영과 닿는다고 해도 이런 반응은 아니었을 거다. 강소영이란 사람 자체가 껄끄럽다 여겨지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어젯밤 그와 강소영이 함께 있었을 그 장면을 떠올리면 기분이 더러웠다. 역겹고 기분 나쁜 감정이었다. 날씨가 추운 탓에 찬물로 여러 번 씻은 그녀의 손은 다시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조금 전 겨우 회복한 온기도 이미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윤아는 손을 닦고 그제야 밖으로 나왔다.문을 열고 나온 순간 윤아는 벽에 몸을 기대고 있는 수현을 보고 그 자리에 멈춰버렸다. 그의 시선은 바닥을 향하고 있었고 그 아래 드리워진 속눈썹은 그의 백옥같은 피부와 대조되며 더 수려하게 안겨 왔다. 옆으로 향한 얼굴 덕에 안 그래도 뚜렷한 이목구비가 더 정교하게 도드라져 보이며 마치 하나의 살아 있는 조각상처럼 보였다.그때 인기척을 느낀 수현이 고개를 돌려 윤아를 바라봤다. 그의 시선은 이윽고 하도 씻어 붉어진 윤아의 손을 향했다. 수현의 눈빛은 슬픔과 분노로 뒤섞였다. 그는 입술을 깨물고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물었다.“손을 오래도 씻네. 무슨 더러운 거라도 만졌나 봐?”윤아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응. 그래서 좀 여러 번 씻었어.”윤아의 말에 수현의 얼굴은 무섭게 일그러졌다.‘이 여자가!’윤아는 그와 더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선월이 있는 곳으로 가려면 수현의 곁을 반드시 지나야 했다. 윤아는 굳이 몇 걸음 더 걸어 수현이 기대고 있는 벽의 반대편으로 돌아서 갔다.수현은 눈앞의 이 황당한 행동을 보며 참을 수 없다는 듯 성큼성큼 윤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확 낚아챘다.“심윤아. 내가 성격이 좋은 줄 아나 봐? 내가 더럽다고? 내가 뭘 어쨌길래 더럽다 하는 거지?”힘을 줘서 잡은 수현의 손에 윤아는 아파하며 빠져나가려 몸부림쳤지만 그럴수록 수현에게 더 단단히 잡힐 뿐이었다. 윤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진수현. 이거 놔.”하지만 놓지 않는 수현
윤아는 저도 모르게 부정했다.“아니? 누가 그래?”그녀의 말에 수현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아니라며. 누가 말했는지는 왜 궁금하지?”“어...”윤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누가 이런 헛소리를 하는지 궁금해서 그러는 거야. 고석훈 씨? 아니면 김양훈 씨? 그래 그날 밤 양훈 씨가 나한테 전화했었어. 당신 많이 취했으니 나더러 와달라고. 내가 거절하기도 전에 전화를 꺼버리더라고.”수현은 눈썹을 찌푸리며 덤덤하게 말하는 윤아를 바라봤다.“집사님한테 널 데리러 가달라고 말하려 했어. 근데 시간도 늦었고 나이도 있으신 분이니 깨우기도 죄송스러워 부르지 않았어. 양훈 씨도 있고 석훈 씨도 있고 친구들이 어련히 알아서 잘 챙길 테니 당신 좀 취해도 괜찮잖아?”“그래서?”윤아의 말은 앞뒤가 들어맞아 흠잡을 곳이 없었다.“그래서 난 그냥 잤어.”윤아는 말을 마치고 수현을 쳐다봤다.“그래서 누가 그러는 건데? 내가 널 찾으러 갔다고. 대신 고맙다고 좀 전해줘. 날 참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줬네.”수현은 침묵했다. 말을 잇는 윤아.“아 참. 네 친구는 우리가 계약관계인걸 모르나 봐? 그래서 안 갔어. 우리가 싸우다 들키기라도 하면 안 되잖아?”말을 마친 윤아는 자신의 손을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윤아의 손을 으깰 듯이 점점 더 조여왔다. 윤아는 고통을 참으며 싱긋 웃었다.“기회가 있을 때 그 사람들한테도 얘기해줘. 앞으로 너 취할 때마다 나한테 전화 오는 일 없게 말이야. 나 일찍 자는 거 알잖아. 그 늦은 밤에 사람을 깨우면...”윤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현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성큼성큼 자리를 떴다.진수현이 가고 그 자리에는 윤아 혼자 덩그러니 서 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 방금까지도 수현에게 잡혔던 자신의 손을 묵묵히 바라봤다. 이번에는 다시 화장실로 향하진 않았다. 사실 별일 아니다. 그저 계약관계일 뿐이니. 윤아는 수시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매주 선월을 보러 와야 하니까.
윤아는 허리를 굽혀 모니터의 수치들을 봤다. 매일 식사량과 수면시간 모두 기록되어 있었다. 요양원에 환자가 많아 간병인 분들도 매일 세심하게 환자 한 명 한 명의 생활습관을 체크 할 수 없으므로 간편한 구분을 위해 이렇게 매일 기록을 한다. 윤아는 기록된 수치들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확실히 간병인 말대로 미세한 변화는 있었지만 굳이 신경 쓸 정도는 아녔다. 요양원에서 지정한 정상범위가 있는데 그 범위를 벗어나지 않으면 모두 정상으로 간주한다고 한다.윤아는 그래도 마음이 편하지 않은 듯 입을 앙다물었다. ‘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한 건가?’윤아는 할머님의 기분이 미묘하게 달라진 것을 느꼈다. 그것도 나쁜 쪽으로.“사모님. 어르신 기분을 신경 써주시는 거 알아요. 하지만... 괜한 걱정 하시는 걸 수도 있지 않을까요?”그 말에 윤아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네. 아무래도 제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요.”윤아의 말은 언제나 격식을 갖췄다. 윤아가 이렇게 말하니 간병인분도 더는 설명하지 않았다. 윤아는 그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근 몇 주간의 수치를 프린트해주실 수 있을까요?”간병인은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고마워요.”“고맙긴요.”간병인은 윤아의 행동이 이상하다 여겨졌지만 프린트는 어려운 일도 아니니 바로 해줬다.윤아는 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다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떠나기 전에 받으러 올게요. 일단 가지고 계셔 줄래요?”“네. 사모님.”윤아는 곧바로 선월을 보러 갔다. 그녀가 방으로 돌아갔을 땐 이미 진수현이 선월의 곁에서 말동무를 해 주고 있었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선월을 따뜻한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수현은 효심 깊은 손자였다. 그 사실은 윤아도 늘 알고 있었다.“윤아 왔니?”“할머님.”윤아는 선월에게 다가가 그들의 대화에 참여했다.진수현은 입가에 웃음이 잠시 옅어지는 것 같더니 이내 원래 상태로 되돌렸다. 둘은 마치 조금 전의 모든 불쾌했던 일들을 다 털어버린 듯
김선월은 잠시 멈칫하더니 물었다.“수술 날짜를 앞당겨?”“네.”수현의 말에 선월은 말을 잇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던 윤아가 생각 끝에 입을 열었다.“할머님. 수술이 듣기에는 무서워도 과정은 아닐 거예요. 그냥 잠 한숨 푹 주무시고 나면 병이 다 나아있을 거예요.”윤아는 일부러 가벼운 말투로 장난스레 말했다. 그런 윤아의 모습에 수현도 저도 모르게 눈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참 오랜만에 보는 윤아의 눈빛을 반짝이는 모습이었다.윤아의 기분 좋은 말투에 선월의 얼굴도 웃음을 되찾았다.“이 할미 웃게 만드는 데는 선수라니까.”“뭘요. 다 사실인데요. 할머님. 못 믿으시겠으면 내일 의사 선생님께 물어보세요.”“그래그래. 네가 나 걱정해 주는 거 다 안다. 할미는 하나도 안 무서워.”윤아와 수현이 요양원에서 나왔을 땐 이미 밤 여덟 시가가 되어가고 있었다.윤아는 선월과 좀 더 있고 싶었지만 선월도 휴식해야 하니 이만 나왔다.병실에서 나올 때까지도 금슬 좋던 부부는 한참을 걷고 나서야 본색을 드러냈다. 윤아는 아무런 표정 없이 그의 손을 놓고 걸어갔다. 수현도 그런 윤아를 보며 표정이 어두워졌다.“먼저 가.”윤아의 말에 수현이 미간을 찌푸렸다.“뭐 하려고?”“할머님 최근 수치 기록부 좀 가지고 올게.”“같이 가지.”같이 가자는 수현의 말에 윤아는 멈칫하더니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혼자 가면 돼.”“내일 아침에 이 요양원 전체에 내가 널 버리고 먼저 떠났다는 말이 돌길 원하는 거야?”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윤아는 그의 말에 어쩔 수 없이 수현과 함께 갔다.간병인은 그들에게 두꺼운 종이를 한 아름 줬고 윤아가 그걸 받아 조심스레 가방에 넣었다.“고마워요.”“고맙긴요. 이제 가시는 건가요?”“네.”“네. 조심히 가세요.”“그래요. 고마워요.”인사를 전하고 나가는 길에 수현은 윤아 손에 들린 두꺼운 프린트 더미를 보더니 물었다.“왜?”수현의 할머니 일이기도 하니 윤아는 그에게 자기 생각을 모두 말해주었다. 윤아의 말에
운전기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고용주가 아직 차에 타지 않았는데... 그는 조심스레 차창을 내리고 밖에 덩그러니 서 있는 수현을 봤다. 그는 얼굴빛이 흙빛이 돼서는 온몸으로 어두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운전기사는 낮은 소리로 윤아에게 말을 건넸다.“사모님. 대표님이 아직...”“수현 씨는 일이 있어서 안탑니다. 가죠.”운전기사는 윤아의 말에 감히 대답하지도, 그렇다고 정말 차를 몰고 떠날 수도 없었다. 비록 그의 고용주는 진수현이라지만 그도 알다시피 뒷좌석에 앉아계신 분은 진수현의 부인이시다. 대표님은 평소에 사모님 말씀이라면 뭐든 따르며 그에게 극진해 대부분 사모님이 주도권을 잡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 어느 쪽에도 밉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차 문이 벌컥 열리더니 진수현이 몸을 굽혀 차에 탔다.윤아가 그를 쳐다봤지만 수현은 그녀의 시선은 신경도 안 쓴 채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는 차갑게 운전기사를 보며 말했다.“운전하세요.”그의 목소리는 차갑다 못해 한기를 내뿜는 듯했다. 기사님도 더 지체하지 않고 얼른 액셀을 밟았다.차 안에는 불편하고 어색한 기류가 맴돌았다. 윤아는 자신이 그렇게 하면 그가 차에 타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이런 경우는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하지만 윤아는 이제 수현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그 말도 수현이 자기 입으로 내뱉은 말인데 쪽팔린 사람도 장본인이겠지. 윤아는 부끄러울 사람은 자신이 아닌 수현이라 생각했다.기왕 이렇게 된 김에 윤아는 조금 전에 받은 프린트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윤아는 수현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수현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차 안은 오직 윤아가 종잇장을 넘기는 소리만 간간이 들려왔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수현이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윤아를 바라보았다. 밝지도 않은 차 안에서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종잇장을 넘기며 열심히 보고 있었다. 보기 좋게 올라간 속눈썹은 그녀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위아래로 흩날렸다. 윤아는 매우 집중하고 있었고 수현에게 말을 할 생각이
맞는 말이다. 그가 받아온 수치는 미세하지만 분명 변화가 있었고. 이는 윤아의 감이 맞았다는 걸 의미한다.윤아는 짧게 대꾸하고 말없이 프린트를 정리에 도로 넣었다. 이윽고 무언가 떠오른 듯 수현에게 말했다.“사실 할머님이 수술을 두려워하시는 것 같아. 오늘 오후에 수술 얘기를 하지 말았어야 했어.”그 말에 수현은 멈칫했다.“그래?”“응.”수현은 윤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니 요양원에서 들었던 선월에게 잘하는 이유는 자기 때문이 아니라던 윤아의 말이 그저 홧김에 한 거짓말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윤아는 그를 정말 친할머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수현은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그래. 알겠어. 앞으로 더 주의하지.”선월의 얘기에 두 사람은 오랜만에 평화를 만끽했다. 그러나 그 얘기가 끝나니 또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운전석에 있는 기사님은 이 상황들이 조금 믿기지 않았다. 윤아와 수현이 차에 탈 때까지만 해도 금방이라도 대판 싸울 것 같이 꽁꽁 얼어있던 분위기였는데 얼마 안 돼 도란도란 어르신 얘기를 나누고 있으니 말이다. 그는 역시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 생각하며 감탄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두 사람은 다시 말이 없어졌다. 잠시나마 풀렸던 분위기가 다시 처음처럼 꽁꽁 얼어붙어 찬 바람이 쌩쌩 불고 있었다.기사님:”...”‘됐다 됐어. 도통 이해를 못 하겠네. 운전에나 집중하자.’집에 도착한 후, 윤아는 수현보다 먼저 차에서 내려 곧장 출입문 쪽으로 또각또각 걸어갔다. 그 속도는 빠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았다. 얼마 안 가 수현은 윤아의 뒤에 멀리 떨어져 있었다.저택의 도우미들은 윤아가 무표정으로 먼저 집에 들어오고 뒤따라 수현도 그늘진 얼굴도 따라 들어오는 모습을 봤다. 그들은 사모님이 비를 홀딱 맞고 돌아왔던 그 날부터 집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혹여 실수라도 했다간 윤아와 수현의 불똥이 튈까 봐 더더욱 일에 차질이 없도록 애썼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