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수현 얘기에 윤아는 어젯밤 술집에서의 화면이 불현듯 떠올랐다.‘어디 갔지?’당연히 강소영이 데려갔을 거다. 지금까지 어르신을 뵈러 나타나지 않은 것을 보아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뭘 했는지 윤아는 선명히 알 것 같았다.윤아는 속이 뒤틀렸다. 하지만 선월 앞에서 티를 낼 수는 없기에 들키지 않을만한 좋은 변명거리를 생각해냈다.“그이는 어제 밤을 새워서요. 오늘 못 일어났어요.”생각해보니 이 말도 사실이다. 어젯밤 밤을 새운 건 맞으니까. 하지만 밤을 새우며 뭘 했는지는 알 수 없다.선월은 그 말을 듣더니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그 나이 먹고 아직도 밤을 새운다니.”윤아는 그저 웃었다.선월은 윤아의 성깔 좋은 모양새를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너나 되니까 그놈 성질을 받아주는 거지.”“아니에요.”윤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작게 말했다. 윤아는 화제를 돌리려 휠체어를 타고 정원을 산책할 것을 제의했고 선월도 동의했다.간호사분이 휠체어를 밀고 와 선월을 부축해 태웠다.사실 선월의 다리는 큰 문제는 없었지만 장시간 걷는 데는 무리가 있어 그저 방에서 몇 걸음 정도 걷는 것만 가능했다. 윤아는 익숙한 듯 서랍에서 걸칠 담요와 외투를 꺼내 선월의 몸에 덮어주고 나서야 휠체어를 밀고 밖으로 나갔다.선월은 만족한 듯 보들보들한 담요를 몸에 둘렀다.“촉감이 편안하니 참 좋네. 나 젊을 때는 이런 소재는 무겁다고 싫어했는데 말이야. 다 늙어서야 이런 게 좋아.”그녀의 말투는 지나간 날을 아쉬워하는 듯 미련이 묻어났다. 윤아는 그녀의 미묘한 감정을 눈치채고는 서둘러 위로의 말을 건넸다.“할머님, 저는 지금 할머님의 모습이 이 담요와 더 어울리는 것 같은데요. 맞춤제작 하신 한복과도 어울리고요. 정말 너무 아름다우세요. 할머님 미모와 분위기는 제가 늘 동경 하던 것들인걸요.”윤아가 한 말은 전부 진심이었다. 진씨 일가의 여자들은 모두 미모가 출중했다. 선월뿐만 아니라 수현의 어머니도 말이다. 진씨 집안의 남자들의 여자 보는 눈은 정
슬림한 몸매에 수려한 얼굴, 그리고 차가운 눈매까지.그와 눈이 마주치자 윤아는 걸음을 멈췄다.“수현아?”여기에서 진수현을 마주칠 줄은 김선월도 몰랐다.“할머니.”동굴 같은 중저음 보이스. 그의 목소리는 살짝 갈라진 듯 푸석했으나 오히려 퇴폐적인 관능미가 묻어났다.윤아는 작게 실소를 터뜨렸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수현은 놓치지 않고 시선을 돌려 윤아를 진득하게 쳐다봤다.“어떻게 된 거니? 윤아가 너 밤을 새워서 못 일어났다고 했는데. 난 또 너 오늘 못 오는 줄 알았다.”수현은 윤아가 그런 변명을 댔을 줄을 생각도 못 했다. 그는 입술을 앙다물고는 달래는 말투로 선월에게 말했다.“밤을 꼴딱 새웠어도 할머니 뵈러는 와야죠.”“말은 번지르르하게 잘하는구나.”그녀는 언뜻 싫은 척 하긴 했지만 얼굴에 번지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수현은 윤아의 옆으로 다가와 말했다.“내가 밀게.”수현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윤아는 그의 몸에서 술 냄새가 나지 않음을 느꼈다. 아니, 오히려 상쾌한 비누 향이 맴돌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입고 있는 옷도 어제와는 다른 옷이었다. 입고 있는 검은색 셔츠는 반듯하게 다려졌고 몸에 잘 맞았다. 윤아는 누구의 정성인지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아마 어젯밤 수현과 함께 밤을 보낸 그 누군가가 다려준 거겠지?윤아가 생각에 잠겨 있는데 수현이 가까이 다가와 휠체어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다가오는 걸 본 윤아는 재빨리 휠체어를 잡고 있던 손을 빼고 크게 두 발자국 이동해 그와 거리를 유지했다. 마치 수현이 가까이하면 안 될 맹수라도 되는 듯이.몇 초 정도의 정적 후 수현의 낯빛이 어두워지더니 온몸으로 서늘한 기운을 내뿜었다. 양훈의 추측을 듣고 잠시나마 기대했던 자신이 우스웠다. 역시 괜한 생각을 하던 거였나. 그는 자소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왜 그러냐?”수현이 휠체어를 잡고도 아무 미동이 없자 김선월이 물었다. 그제야 수현은 정신을 차리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가요, 할머니.”수현
문자를 본 윤아는 고개를 돌려 진수현을 바라보고 그도 마침 윤아를 보고 있었다. 윤아는 밤하늘보다도 새까만 수현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고개를 휙 돌렸다. 그는 입술을 꼭 깨물고 수현을 못 본 체했다.수현은 그런 윤아의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그 순간 윤아의 핸드폰이 다시 한번 진동했다. 「이리와.」아니. 싫다.「할머니 수술 마치시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좋아. 하지만 지금은 순순히 협조해주는 게 어때. 네가 말했잖아. 우린 협조 관계라고.」뒤의 말에 윤아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하긴. 애초에 둘은 계약관계다. 이 모든 게 원해서 한 일인데 인제 와서 무슨 교태를 부리는 건가.윤아는 숨을 크게 한번 들이쉬고는 천천히 발을 옮겨 그의 곁으로 갔다. 마음의 준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수현에게 다가가는 그 한 걸음은 여전히 참 어려웠다. 윤아가 드디어 그의 곁으로 다가왔을 때 수현은 이미 얼굴이 흙빛이었다. 그는 눈앞의 윤아를 보며 기가 막혔다.그때 갑자기 손을 뻗어 윤아의 손목을 잡는 수현.윤아는 깜짝 놀라 그를 피하려 했지만 이미 수현에게 잡혀버린 뒤였다. 수현은 윤아의 손목을 당겨 자신 팔에 두르며 여전히 서늘한 얼굴로 말했다.“손잡지.”선월 앞에서 이런 말을 하다니. 윤아는 말없이 그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그를 보았다. 하지만 선월이 더 중요하기에 여기에서 그를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그제야 수현은 한숨을 내쉬고 시선을 거두었다.“잘 잡고 따라와.”윤아는 짜증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알았어.”가만히 앉아 기다리던 선월이 그제야 웃음을 띠며 말했다.“화해했니?”“네?”“수현이 오늘 너랑 같이 안 왔을 때부터 이상하다 했어. 내가 요양원에 와서부터 너희 둘 한 번도 따로 오는 걸 본 적이 없는데 말이야.”그 말에 윤아는 고개를 떨구고 입술을 깨물었다. 나름 잘 연기했다 생각했는데 할머님 눈은 못 속이나 보다. 할머님 앞에선 아무것도 감춰지지 않는 것 같았다. 게다가 다 알면서도 아무
윤아는 서늘한 얼굴로 몇 번이고 손을 씻었다. 그냥 단순히 강소영과 닿는다고 해도 이런 반응은 아니었을 거다. 강소영이란 사람 자체가 껄끄럽다 여겨지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어젯밤 그와 강소영이 함께 있었을 그 장면을 떠올리면 기분이 더러웠다. 역겹고 기분 나쁜 감정이었다. 날씨가 추운 탓에 찬물로 여러 번 씻은 그녀의 손은 다시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조금 전 겨우 회복한 온기도 이미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윤아는 손을 닦고 그제야 밖으로 나왔다.문을 열고 나온 순간 윤아는 벽에 몸을 기대고 있는 수현을 보고 그 자리에 멈춰버렸다. 그의 시선은 바닥을 향하고 있었고 그 아래 드리워진 속눈썹은 그의 백옥같은 피부와 대조되며 더 수려하게 안겨 왔다. 옆으로 향한 얼굴 덕에 안 그래도 뚜렷한 이목구비가 더 정교하게 도드라져 보이며 마치 하나의 살아 있는 조각상처럼 보였다.그때 인기척을 느낀 수현이 고개를 돌려 윤아를 바라봤다. 그의 시선은 이윽고 하도 씻어 붉어진 윤아의 손을 향했다. 수현의 눈빛은 슬픔과 분노로 뒤섞였다. 그는 입술을 깨물고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물었다.“손을 오래도 씻네. 무슨 더러운 거라도 만졌나 봐?”윤아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응. 그래서 좀 여러 번 씻었어.”윤아의 말에 수현의 얼굴은 무섭게 일그러졌다.‘이 여자가!’윤아는 그와 더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선월이 있는 곳으로 가려면 수현의 곁을 반드시 지나야 했다. 윤아는 굳이 몇 걸음 더 걸어 수현이 기대고 있는 벽의 반대편으로 돌아서 갔다.수현은 눈앞의 이 황당한 행동을 보며 참을 수 없다는 듯 성큼성큼 윤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확 낚아챘다.“심윤아. 내가 성격이 좋은 줄 아나 봐? 내가 더럽다고? 내가 뭘 어쨌길래 더럽다 하는 거지?”힘을 줘서 잡은 수현의 손에 윤아는 아파하며 빠져나가려 몸부림쳤지만 그럴수록 수현에게 더 단단히 잡힐 뿐이었다. 윤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진수현. 이거 놔.”하지만 놓지 않는 수현
윤아는 저도 모르게 부정했다.“아니? 누가 그래?”그녀의 말에 수현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아니라며. 누가 말했는지는 왜 궁금하지?”“어...”윤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누가 이런 헛소리를 하는지 궁금해서 그러는 거야. 고석훈 씨? 아니면 김양훈 씨? 그래 그날 밤 양훈 씨가 나한테 전화했었어. 당신 많이 취했으니 나더러 와달라고. 내가 거절하기도 전에 전화를 꺼버리더라고.”수현은 눈썹을 찌푸리며 덤덤하게 말하는 윤아를 바라봤다.“집사님한테 널 데리러 가달라고 말하려 했어. 근데 시간도 늦었고 나이도 있으신 분이니 깨우기도 죄송스러워 부르지 않았어. 양훈 씨도 있고 석훈 씨도 있고 친구들이 어련히 알아서 잘 챙길 테니 당신 좀 취해도 괜찮잖아?”“그래서?”윤아의 말은 앞뒤가 들어맞아 흠잡을 곳이 없었다.“그래서 난 그냥 잤어.”윤아는 말을 마치고 수현을 쳐다봤다.“그래서 누가 그러는 건데? 내가 널 찾으러 갔다고. 대신 고맙다고 좀 전해줘. 날 참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줬네.”수현은 침묵했다. 말을 잇는 윤아.“아 참. 네 친구는 우리가 계약관계인걸 모르나 봐? 그래서 안 갔어. 우리가 싸우다 들키기라도 하면 안 되잖아?”말을 마친 윤아는 자신의 손을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윤아의 손을 으깰 듯이 점점 더 조여왔다. 윤아는 고통을 참으며 싱긋 웃었다.“기회가 있을 때 그 사람들한테도 얘기해줘. 앞으로 너 취할 때마다 나한테 전화 오는 일 없게 말이야. 나 일찍 자는 거 알잖아. 그 늦은 밤에 사람을 깨우면...”윤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현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성큼성큼 자리를 떴다.진수현이 가고 그 자리에는 윤아 혼자 덩그러니 서 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 방금까지도 수현에게 잡혔던 자신의 손을 묵묵히 바라봤다. 이번에는 다시 화장실로 향하진 않았다. 사실 별일 아니다. 그저 계약관계일 뿐이니. 윤아는 수시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매주 선월을 보러 와야 하니까.
윤아는 허리를 굽혀 모니터의 수치들을 봤다. 매일 식사량과 수면시간 모두 기록되어 있었다. 요양원에 환자가 많아 간병인 분들도 매일 세심하게 환자 한 명 한 명의 생활습관을 체크 할 수 없으므로 간편한 구분을 위해 이렇게 매일 기록을 한다. 윤아는 기록된 수치들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확실히 간병인 말대로 미세한 변화는 있었지만 굳이 신경 쓸 정도는 아녔다. 요양원에서 지정한 정상범위가 있는데 그 범위를 벗어나지 않으면 모두 정상으로 간주한다고 한다.윤아는 그래도 마음이 편하지 않은 듯 입을 앙다물었다. ‘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한 건가?’윤아는 할머님의 기분이 미묘하게 달라진 것을 느꼈다. 그것도 나쁜 쪽으로.“사모님. 어르신 기분을 신경 써주시는 거 알아요. 하지만... 괜한 걱정 하시는 걸 수도 있지 않을까요?”그 말에 윤아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네. 아무래도 제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요.”윤아의 말은 언제나 격식을 갖췄다. 윤아가 이렇게 말하니 간병인분도 더는 설명하지 않았다. 윤아는 그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근 몇 주간의 수치를 프린트해주실 수 있을까요?”간병인은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고마워요.”“고맙긴요.”간병인은 윤아의 행동이 이상하다 여겨졌지만 프린트는 어려운 일도 아니니 바로 해줬다.윤아는 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다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떠나기 전에 받으러 올게요. 일단 가지고 계셔 줄래요?”“네. 사모님.”윤아는 곧바로 선월을 보러 갔다. 그녀가 방으로 돌아갔을 땐 이미 진수현이 선월의 곁에서 말동무를 해 주고 있었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선월을 따뜻한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수현은 효심 깊은 손자였다. 그 사실은 윤아도 늘 알고 있었다.“윤아 왔니?”“할머님.”윤아는 선월에게 다가가 그들의 대화에 참여했다.진수현은 입가에 웃음이 잠시 옅어지는 것 같더니 이내 원래 상태로 되돌렸다. 둘은 마치 조금 전의 모든 불쾌했던 일들을 다 털어버린 듯
김선월은 잠시 멈칫하더니 물었다.“수술 날짜를 앞당겨?”“네.”수현의 말에 선월은 말을 잇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던 윤아가 생각 끝에 입을 열었다.“할머님. 수술이 듣기에는 무서워도 과정은 아닐 거예요. 그냥 잠 한숨 푹 주무시고 나면 병이 다 나아있을 거예요.”윤아는 일부러 가벼운 말투로 장난스레 말했다. 그런 윤아의 모습에 수현도 저도 모르게 눈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참 오랜만에 보는 윤아의 눈빛을 반짝이는 모습이었다.윤아의 기분 좋은 말투에 선월의 얼굴도 웃음을 되찾았다.“이 할미 웃게 만드는 데는 선수라니까.”“뭘요. 다 사실인데요. 할머님. 못 믿으시겠으면 내일 의사 선생님께 물어보세요.”“그래그래. 네가 나 걱정해 주는 거 다 안다. 할미는 하나도 안 무서워.”윤아와 수현이 요양원에서 나왔을 땐 이미 밤 여덟 시가가 되어가고 있었다.윤아는 선월과 좀 더 있고 싶었지만 선월도 휴식해야 하니 이만 나왔다.병실에서 나올 때까지도 금슬 좋던 부부는 한참을 걷고 나서야 본색을 드러냈다. 윤아는 아무런 표정 없이 그의 손을 놓고 걸어갔다. 수현도 그런 윤아를 보며 표정이 어두워졌다.“먼저 가.”윤아의 말에 수현이 미간을 찌푸렸다.“뭐 하려고?”“할머님 최근 수치 기록부 좀 가지고 올게.”“같이 가지.”같이 가자는 수현의 말에 윤아는 멈칫하더니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혼자 가면 돼.”“내일 아침에 이 요양원 전체에 내가 널 버리고 먼저 떠났다는 말이 돌길 원하는 거야?”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윤아는 그의 말에 어쩔 수 없이 수현과 함께 갔다.간병인은 그들에게 두꺼운 종이를 한 아름 줬고 윤아가 그걸 받아 조심스레 가방에 넣었다.“고마워요.”“고맙긴요. 이제 가시는 건가요?”“네.”“네. 조심히 가세요.”“그래요. 고마워요.”인사를 전하고 나가는 길에 수현은 윤아 손에 들린 두꺼운 프린트 더미를 보더니 물었다.“왜?”수현의 할머니 일이기도 하니 윤아는 그에게 자기 생각을 모두 말해주었다. 윤아의 말에
운전기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고용주가 아직 차에 타지 않았는데... 그는 조심스레 차창을 내리고 밖에 덩그러니 서 있는 수현을 봤다. 그는 얼굴빛이 흙빛이 돼서는 온몸으로 어두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운전기사는 낮은 소리로 윤아에게 말을 건넸다.“사모님. 대표님이 아직...”“수현 씨는 일이 있어서 안탑니다. 가죠.”운전기사는 윤아의 말에 감히 대답하지도, 그렇다고 정말 차를 몰고 떠날 수도 없었다. 비록 그의 고용주는 진수현이라지만 그도 알다시피 뒷좌석에 앉아계신 분은 진수현의 부인이시다. 대표님은 평소에 사모님 말씀이라면 뭐든 따르며 그에게 극진해 대부분 사모님이 주도권을 잡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 어느 쪽에도 밉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차 문이 벌컥 열리더니 진수현이 몸을 굽혀 차에 탔다.윤아가 그를 쳐다봤지만 수현은 그녀의 시선은 신경도 안 쓴 채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는 차갑게 운전기사를 보며 말했다.“운전하세요.”그의 목소리는 차갑다 못해 한기를 내뿜는 듯했다. 기사님도 더 지체하지 않고 얼른 액셀을 밟았다.차 안에는 불편하고 어색한 기류가 맴돌았다. 윤아는 자신이 그렇게 하면 그가 차에 타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이런 경우는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하지만 윤아는 이제 수현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그 말도 수현이 자기 입으로 내뱉은 말인데 쪽팔린 사람도 장본인이겠지. 윤아는 부끄러울 사람은 자신이 아닌 수현이라 생각했다.기왕 이렇게 된 김에 윤아는 조금 전에 받은 프린트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윤아는 수현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수현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차 안은 오직 윤아가 종잇장을 넘기는 소리만 간간이 들려왔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수현이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윤아를 바라보았다. 밝지도 않은 차 안에서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종잇장을 넘기며 열심히 보고 있었다. 보기 좋게 올라간 속눈썹은 그녀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위아래로 흩날렸다. 윤아는 매우 집중하고 있었고 수현에게 말을 할 생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