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놀란 이후, 심윤아도 뭔가를 알아차린 듯싶었다.그녀는 입술을 말아 물고는 입을 열었다.“그럼 다행이네요.”두 사람 모두 침묵을 유지했다.심윤아가 고개를 돌려 진수현을 힐끗 보았다. 눈이 마주친 진수현은 말 없이 눈썹을 치켜올렸다.그의 모습을 보니 완전히 심윤아의 뜻을 따르려는 것 같았다.그와 몇초 간 눈을 마주친 심윤아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이제 돌아갈까?”진수현이 싱긋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더 꼭 껴안았다.“네가 결정해.”“응.”심윤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고민 없이 입을 열었다.“만나지 않겠다고 하니 저흰 먼저 가볼게요.”말을 마친 심윤아가 위층의 방향으로 눈을 옮겼다.그곳엔 초소형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심윤아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카메라 뒤에 서 있는 이선우는 그녀가 이쪽을 향해 바라볼 때 저도 모르게 숨을 참게 되었다.순간 심윤아의 눈은 카메라 렌즈를 통과한 듯 그와 똑바로 마주쳐졌다.하얗게 질린 입술이 달싹였고, 한쪽으로 처진 손이 저도 모르게 주먹 쥐어졌다.심윤아를 만나고 싶은 순간은 끝도 없이 많았지만...자신을 만나게 되면 곧 모든 마음의 짐을 풀고 자신은 기억도 못 한 채 잘 살아갈 그를 생각하니...이선우는 차라리 현재 이대로 있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가 자신을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영원히 자신을 놓지 못하도록.힘껏 주먹 쥐었던 손을 천천히 풀었다.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아.위층을 바라보는 심윤아의 표정과 눈빛은 평온하기에 그지없었다. 몇 번 바라본 그녀는 이내 시선을 돌렸다.그리고 곁에 서 있는 남성을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이제 가자.”“응.”진수현이 고개를 끄덕였고 곧이어 함께 자리를 떴다.조금의 망설임도 고민도 없이 깔끔하게, 두 사람은 이내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자리에 서서 동태를 살피던 진우진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결국 직접 위층으로 올라갔다.계단을 올라가면서 그는 카메라가 있는 곳을 무심코 훑어보았다.문을 열어보니 이선우는 이
진우진이 떠난 이후 주위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모든 사람이 떠났다. 심윤아도 함께.그리고 다시는 오지 않을 수도 있다.주변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듯 고요했고 잿빛 세상에는 더 이상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남은 것은 일정하게 뛰는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뿐이었다....돌아가는 길은 매우 순리로웠다. 그들의 출발시간이 마침 러시아워를 피했기 때문에 차는 순조롭게 고속도로에 오를 수 있었다.고속도로에 오르자 창밖의 바람이 거세졌다.심윤아는 창밖의 바람 소리를 들으며 고속도로에 오르기 전 진수현이 그녀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정말 확실하게 생각한 거 맞지? 고속도로 오르면 후회해도 다시 돌아오기 힘들어.”심윤아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둘 사이에는 알 수 없는 침묵이 흘렀고, 아무런 지령을 받지 못한 운전기사는 무사히 고속도로를 향해 차를 몰았다.진수현이 이 일에 대해 신경 쓰는 것 같아지자 심윤아는 그제야 마침내 무언가 깨달았다.이선우가 끝까지 그녀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사실 내가 이선우를 만나지 못했더라도 넌 신경 쓸 필요 없어.”조용한 차 내부에서 심윤아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그녀의 말에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던 진수현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창밖을 내다보던 심윤아가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네가 신경 쓴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선우의 목적을 이루게 하는 거야.”진수현: “...”그녀의 말을 듣고서야 진수현은 마침내 무언가 깨달은 것 같았다.그런거 였구나...그는 멍하니 심윤아와 잠시 눈을 마주친 후 대답했다.“맞는 말이네.”만약 그가 계속 이 일에 대해 신경 쓰고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결국 이선우가 원하는 바를 이루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전에 그렇게 설득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야말로 맥락을 정확히 짚고 진수현의 요점을 정확히 찔렀기에 효과가 있었다.그가 문득 깨닫고 납득하며 웃어 보였다.“네 말이 맞아. 전엔 내가 너무 과하게 걱정했
사실 허연우가 일을 빨리 배울수록 주현아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회사에서 인수인계 기간을 한 달로 정한 것은 일 량이 많은 데다가 학습 기간도 필요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인수인계를 받는 사람이 업무에 익숙하고 속도가 빠르다면 인수인계 기간도 단축된다.바로 허연우처럼 말이다. 그녀의 필사적인 학습 진도를 따르면 아마 보름 정도면 모든 일을 인수인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주현아도 일찍 회사를 떠날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주현아는 이런 방법으로 이득을 취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허연우가 건강한 모습으로 일을 맡을 수 있기를 바랐다. 나중에 병이 나거나 몸이 버틸 수 없게 되면 그녀를 대신해 일을 맡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몸 건강이야말로 모든 노력에서의 밑천이라는 것이다.이 몇 년 동안 주현아는 나이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방면에서도 크게 성장했다.그녀는 나이가 들수록 가장 중요한 것은 몸 건강이며 나머지는 부가적인 것으로 생각했다.이번 사직에 몸 건강이 좋지 않은 것 역시 일조했다. 그녀는 몸이 전처럼 팔팔하지 않았기에 전만큼의 업무량을 소화할 수 없다고 느꼈다.보고서를 처리한 이후, 주현아는 허연우를 시켜 보고서를 배주한의 사무실로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허연우는 보이지 않았다.“연우 씨? 어디 갔어요?”여러 번 소리 쳐봤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어쩔 수 없이 주현아는 직접 사무실로 가려 했다.그녀가 사무실 앞에 서서 노크하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고 주현아는 문을 열었다.그녀가 들어갔을 때 배주한은 창문 앞에 서서 통화 중이었다. 주현아가 들어오는 모습을 한번 힐끗 보더니 다시 통화에 집중했다.주현아는 조용히 보고서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보고할 필요가 없는 문건이므로 내려놓은 후 주현아는 물러나려 했다.그녀가 막 문 쪽으로 걸어갔을 때 뒤에서 배주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시만요.”그의 목소리에 주현아가 걸음을 멈추고 의심스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말하는 사이에 배주한은 이미 주현아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갑자기 다가온 남성의 숨결에 주현아는 어리둥절했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뒤로 두 걸음 물러서며 거리를 두었다.그녀의 행동은 배주한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왜 왔어요?”“허연우 씨가 안 계셔서 보고서 대신 올리러 왔습니다.”그제야 주현아가 아직도 보고서를 들고 있는 것을 의식한 배주한이 손을 뻗어 받았다.고개를 숙여 보고서를 훑는 그를 보고 더 이상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한 주현아가 입을 열었다.“그럼 먼저 나가보겠습니다.”말을 마친 주현아가 얼른 자리를 뜨려 했다.“제 사무실에 사람고기를 먹는 호랑이라도 있습니까?”배주한의 이상한 질문에 주현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대표님, 무슨 말씀이세요?”“못 알아듣겠어요?”배주한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자꾸 허겁지겁 떠나려고 하니까요. 제 사무실에 맹수가 도사리기라도 하듯이 말입니다.”주현아: “...”아, 그 뜻이었구나.“사직서를 낸 이후로 계속 절 피하는 것 같은데. 왜요, 제가 전에 가혹하게 대했나요?”가혹하다는 말이 배주한의 입에서 나오자 주현아는 깜짝 놀랐다.주현아가 급하게 해명했다.“그럴 리가요. 대표님은 저에게... 잘해주셨죠. 가혹하게 대한 적 없습니다.”물론 일 때문에 야근을 많이 했기에 주현아는 그를 원망하기도 했고 까칠한 사람이라 생각했다.본인이 워커홀릭이라 야근하는 것은 상관없었지만 항상 다른 직원들도 함께 야근하게 하는 것이 너무한 점이었다. 그저 알바일 뿐이었는데, 마치 모든 일이 그녀의 임무인 것처럼 혹독하게 대했다.“그런가요?”배주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없이 그녀를 훑어보았다.“그럼 왜 사석에서 저더러 히틀러라고 했어요?”주현아: “...”당황한 그녀가 몸이 굳은 채 억지스럽게 웃었다.“대표님, 왜 아직도 그걸 기억하고 계세요... 그때는 실수로 말한 것이지 절대 고의가 아니었어요.”“게다가...”주현아가 뻔뻔스럽게 진지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들은 배주한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시선이 꽂혔다.“한 달도 안 걸린다고요?”“네. 보름이면 충분할 것 같아요.”“그럼 보름 뒤면 현아 씨가 회사를 나간다는 말인가요?”퇴사 얘기가 나오자 주현아는 순간 기분이 좋아졌다.“만약 연우 씨가 지금 학습 속도를 유지한다면 보름 전에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요.”기쁨과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눈썹을 치켜올리는 그녀의 표정에서 기분이 정말 좋음을 알 수 있었다.심지어 이 며칠간 주현아는 매일 메이크업했을 뿐만 아니라 옷도 예전의 평범한 직장인 룩이 아닌 예쁜 옷들을 입기 시작했다. 지어는 손목에 팔찌까지 차고 다녔다.이러한 그녀의 변화는 배주한으로 하여금 자신이 예전에 정말 심하게 대한 건 아닌지 조금 반성하게 했다. 전에 주현아는 넘치는 업무량으로 새 옷으로 갈아입거나 메이크업할 시간도 없었고 옷을 코디할 시간은 더더욱 없었다.배주한이 입술을 잘근잘근 짓씹었다.“대표님?”주현아가 배주한의 앞에서 손을 두어 번 휘휘 저었다.“다른 일 없으시면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아직 처리해야 할 일들이 남아있어서요.”이에 배주한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가세요.”그녀가 떠난 후 배주한은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사무실로 들어오라고 명령했다.비서가 들어오자 배주한이 물었다.“올해 연차 휴가 있습니까?”그의 질문에 비서가 고개를 저었다.“없는데요. 우리 회사에 연차 휴가를 쓸 새가 어디 있나요?”“?”믿기지 않는다는 듯 배주한이 컴퓨터의 달력을 살펴보았다. 벌써 새해가 다 되어가는데 아직 연차를 쓴 직원이 한 명도 없다라...“그럼 주현아 씨는요? 주현아 씨도 연차 휴가가 없나요?”그의 질문에 비서가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대표님 설마 잊으신 건 아니죠? 전에 우리가 연차를 쓰려고 할 때 마침 큰 프로젝트를 따낸 바람에 올해 연차는 없애고 연말에 보너스를 더 준다고...”이때 비서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아니면 혹시, 보너스에 대한 일도 잊으신 거예요?”“...”비
‘갑자기 왜 그러시지?‘비서는 생각에 빠진 대표님을 바라보며 설마 연차도 주지 않았던 자신을 반성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잠시 뒤 정신을 차린 배주한이 입을 열었다.“혹시 주현아 씨의 퇴사 결정이 연차휴가와 관계가 있는 것 같나요?”비서가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한참 뒤에야 대답했다.“그건 아닌 것 같아요.”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덧붙였다.“연차휴가 때문에 그만둘 생각이라면 지금까지 기다리진 않았을 거예요.”배주한은 말이 없다.비서는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그는 왠지 관련이 있을 것 같았다. 몇 년 동안 연차 휴가를 쓰지 못했으니 회사의 제도에 실망했고 이에 따라 퇴사를 원하는 것도 당연한 일인 것 같았다.역시 기회가 된다면 확실히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대표님, 현아 씨가 그만두게 하고 싶지 않았다면 사직서에 왜 서명하신 겁니까?”“그럼 계속 회사에 갇혀 살게 해야 하나요?”비서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그건 그렇네요.”비서가 떠난 후 배주한은 핸드폰을 꺼내 주현아와의 카카오톡 대화창에 들어갔다.두 사람의 채팅창은 매일 업데이트되었지만 모두 업무로 시작해 업무로 끝나는 사무적인 대화였다.배주한이 넋이 나간 듯 한참 대화창을 바라보다가, 주현아가 왜 자신을 일중독자에 히틀러라고 말한건지 이해가 되었다.배주한은 일을 한번 시작하면 끝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남에게 엄격히 요구할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기준이 높았다.하여 일에 미쳐있을 때는 밤낮없이 몸을 사리지 않았기에 주변 사람들의 감정에 신경 쓰지 못했다.지금 가만히 보니 히틀러라 부르는 것도 무언가 납득이 되었다.여러모로 급여 부분만 제외하고 보면 히틀러와 다를 바도 없어 보였다.배주한은 불쾌한 듯 입술을 말아 물었다....한편.배주한의 이러한 생각을 알 리 없는 주현아가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가 남은 일을 끝내자 마침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다소 피곤했던 그녀는 전화가 걸려 오자 이내 정신을 차리고 얼굴에 미소를 띠며 전화를 받았다.
주현아의 어머니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주현아는 통화할 때마다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로서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주현아는 어릴 적부터 철이 들었다. 아버지가 자기 노릇을 잘못한 탓도 있겠지만, 어머니에 진짜 잘해줬었다. 때로는 기분이 나쁘다고 해도 억지로 밝은 척하며 미소를 보여줬다. 어머니를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그녀가 얼마나 속 깊은 사람인지 알기에 그녀의 어머니는 별다른 말 없이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그래, 우리 딸은 태양 같은 사람이야. 언제나 주변 사람을 환하게 밝혀줘.”이 말을 들은 주현아는 만족스럽게 눈웃음을 지었다.“그럼!”“다른 사람을 밝히는 것도 좋지만, 너도 밝혀야 한다는 걸 잊지 마. 집에도 종종 돌아오고. 돈 버는 게 그렇게 좋아?”이 말을 듣고 주현아는 앞으로 이어질 말도 예상이 갔다. 그래서 한발 빨리 대답했다.“알았어, 엄마.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나 건강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챙긴다니까?”그녀의 말에 그녀의 어머니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현아야, 엄마 뜻은 그게 아니라...”“응? 그게 아니면 뭔데?”“너 집 나간 지도 한참 됐는데 왜 아무런 소식도 없어?”“무슨 소식?”주현아는 뒤늦게 눈치채고 눈을 크게 떴다.“무슨 소식? 그걸 진짜 몰라서 물어? 윤아는 벌써 애가 둘이야. 그런데 넌 어쩌면 남자친구도 없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다른 여자애들은 일하면서도 잘만 연애하던데, 넌 왜 소개 한 번 안 시켜줘?”“...”연애 얘기가 나오자 주현아는 또 배주한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그에게 도움 한 번 받았다고 자칫 전에 미워하던 이유를 깜빡할 뻔했다.배주한은 일에 미친 사람이다. 더군다나 부하직원에게 아주 엄격해서 대부분 직원이 연애로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직업 특성상 그녀는 잘난 남자를 꽤 많이 알게 되었다. 그러나 데이트는 한 번도 한 적 없었다. 심지어 서로 마음이 안 맞는 것도 아니다. 데이트를 하지 못한 유일한 이유는 바로 시간에 있었다.이런
이때 인기척이 들려서 고개를 돌린 주현아는 허연우가 돌아온 것을 발견했다.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허연우가 먼저 물었다.“현아 씨 어머니랑 통화하고 있었어요?”주현아는 약간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저 다 들었어요. 어머니가 연애하라고 잔소리하는 거예요?”허연우가 금방 온 줄 알았던 주현아는 그녀가 이런 것까지 들었을 줄은 몰랐다. 그래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네, 부모님은 다 그러잖아요. 연애하라는 잔소리 한 번 안 들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요?”허연우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니까요. 저도 집에서 계속 들어요. 가끔 다른 곳에서 지내면 전화까지 해서 잔소리하더라고요.”말을 마친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무언가 생각난 듯 말을 이었다.“그나저나 현아 씨 회사에서 꽤 오래 근무하지 않았어요? 퇴사한 다음에는 집에 돌아가는 거예요?”이 일에 관해 숨길 것이 없었던 주현아는 솔직하게 대답했다.“네, 일단은 집에 갈 거예요. 다음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죠, 뭐.”“아이고... 집에 가면 선보라는 잔소리를 또 질리도록 듣겠네요.”“...”“정말이에요. 집에 있으면 절대 벗어나지 못해요.”집에 있는 장면을 잠깐 상상해 본 주현아는 크게 머리를 끄덕였다.“맞는 말이에요. 그게 제 미래가 될 것 같네요.”“설마 진짜 선을 보게요?”“하아... 안 보면 어쩌겠어요. 어차피 저도 그렇게 싫은 건 아니라 거절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아요.”그녀는 연애하고 싶었다. 어차피 만나는 사람도 없는데 선보는 것으로 기회를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물론 이건 주현아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허연우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네? 그렇게 싫은 건 아니라고요? 저는 요즘 젊은 사람들은 다 선보는 걸 싫어하는 줄 알았어요.”“왜 그렇게 생각해요?”“선을 본다는 건 큰 문제 없으면 결혼한다는 말이잖아요.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자리는 약간 직설적인 면이 있기도 하고요. 서로 전혀 관심이 없는데 결혼 날짜가 정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