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아의 어머니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주현아는 통화할 때마다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로서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주현아는 어릴 적부터 철이 들었다. 아버지가 자기 노릇을 잘못한 탓도 있겠지만, 어머니에 진짜 잘해줬었다. 때로는 기분이 나쁘다고 해도 억지로 밝은 척하며 미소를 보여줬다. 어머니를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그녀가 얼마나 속 깊은 사람인지 알기에 그녀의 어머니는 별다른 말 없이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그래, 우리 딸은 태양 같은 사람이야. 언제나 주변 사람을 환하게 밝혀줘.”이 말을 들은 주현아는 만족스럽게 눈웃음을 지었다.“그럼!”“다른 사람을 밝히는 것도 좋지만, 너도 밝혀야 한다는 걸 잊지 마. 집에도 종종 돌아오고. 돈 버는 게 그렇게 좋아?”이 말을 듣고 주현아는 앞으로 이어질 말도 예상이 갔다. 그래서 한발 빨리 대답했다.“알았어, 엄마.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나 건강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챙긴다니까?”그녀의 말에 그녀의 어머니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현아야, 엄마 뜻은 그게 아니라...”“응? 그게 아니면 뭔데?”“너 집 나간 지도 한참 됐는데 왜 아무런 소식도 없어?”“무슨 소식?”주현아는 뒤늦게 눈치채고 눈을 크게 떴다.“무슨 소식? 그걸 진짜 몰라서 물어? 윤아는 벌써 애가 둘이야. 그런데 넌 어쩌면 남자친구도 없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다른 여자애들은 일하면서도 잘만 연애하던데, 넌 왜 소개 한 번 안 시켜줘?”“...”연애 얘기가 나오자 주현아는 또 배주한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그에게 도움 한 번 받았다고 자칫 전에 미워하던 이유를 깜빡할 뻔했다.배주한은 일에 미친 사람이다. 더군다나 부하직원에게 아주 엄격해서 대부분 직원이 연애로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직업 특성상 그녀는 잘난 남자를 꽤 많이 알게 되었다. 그러나 데이트는 한 번도 한 적 없었다. 심지어 서로 마음이 안 맞는 것도 아니다. 데이트를 하지 못한 유일한 이유는 바로 시간에 있었다.이런
이때 인기척이 들려서 고개를 돌린 주현아는 허연우가 돌아온 것을 발견했다.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허연우가 먼저 물었다.“현아 씨 어머니랑 통화하고 있었어요?”주현아는 약간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저 다 들었어요. 어머니가 연애하라고 잔소리하는 거예요?”허연우가 금방 온 줄 알았던 주현아는 그녀가 이런 것까지 들었을 줄은 몰랐다. 그래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네, 부모님은 다 그러잖아요. 연애하라는 잔소리 한 번 안 들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요?”허연우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니까요. 저도 집에서 계속 들어요. 가끔 다른 곳에서 지내면 전화까지 해서 잔소리하더라고요.”말을 마친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무언가 생각난 듯 말을 이었다.“그나저나 현아 씨 회사에서 꽤 오래 근무하지 않았어요? 퇴사한 다음에는 집에 돌아가는 거예요?”이 일에 관해 숨길 것이 없었던 주현아는 솔직하게 대답했다.“네, 일단은 집에 갈 거예요. 다음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죠, 뭐.”“아이고... 집에 가면 선보라는 잔소리를 또 질리도록 듣겠네요.”“...”“정말이에요. 집에 있으면 절대 벗어나지 못해요.”집에 있는 장면을 잠깐 상상해 본 주현아는 크게 머리를 끄덕였다.“맞는 말이에요. 그게 제 미래가 될 것 같네요.”“설마 진짜 선을 보게요?”“하아... 안 보면 어쩌겠어요. 어차피 저도 그렇게 싫은 건 아니라 거절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아요.”그녀는 연애하고 싶었다. 어차피 만나는 사람도 없는데 선보는 것으로 기회를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물론 이건 주현아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허연우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네? 그렇게 싫은 건 아니라고요? 저는 요즘 젊은 사람들은 다 선보는 걸 싫어하는 줄 알았어요.”“왜 그렇게 생각해요?”“선을 본다는 건 큰 문제 없으면 결혼한다는 말이잖아요.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자리는 약간 직설적인 면이 있기도 하고요. 서로 전혀 관심이 없는데 결혼 날짜가 정
심윤아는 바로 답장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주현아도 급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시차가 있으니 천천히 기다리면 되었다....심윤아와 진수현은 저녁이 된 다음에야 집에 도착했다. 떠난 지 얼마 안 되기는 하지만, 심윤아는 아이들이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차에서 내리자마자 심하윤과 심서훈에게 가려고 했다.이때 그녀는 심하윤과 심서훈은 잠들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혹시라도 아이들을 깨울까 봐 만나는 것은 아쉬운 대로 내일에 미뤘다.“반 시간만 일찍 왔어도 애들이랑 만날 수 있었을 텐데.”이선희의 말에 심윤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어쩔 수 없죠. 저희 이미 최대한 빨리 돌아왔거든요.”“둘 다 길에서 고생했어. 얼른 가서 쉬어. 너희들이 돌아온 걸 알면 애들이 참 좋아하겠다.”“네, 어머님.”심윤아는 먼저 씻으러 올라갔다. 뒤따라가려던 진수현은 이선희가 가로막았다.“둘이 이번엔 뭐 하러 갔어?”진수현은 이선희를 힐끗 보며 되물었다.“궁금해요?”“안 궁금하면 왜 물었겠어?”“왜 윤아한테 안 묻고 저한테 물으세요?”“넌 내 아들이니까 그렇지. 너한테 물어보는 게 편해. 그리고 윤아는 피곤해서 이제 쉬어야 해.”“아하. 윤아는 쉬어야 하고, 전 아닌가 보네요.”“사내놈이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이선희의 편애에 진수현은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별다른 말은 없었다. 가족들이 심윤아를 좋아하는 건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어머니 아들도 쉬어야 해요. 저도 이만 올라갈게요.”말을 마친 그는 이선희가 어떤 표정을 짓든 상관하지 않고 올라가 버렸다. 부리나케 올라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이선희는 어이없는 듯 피식 웃었다.‘아들은 정말 믿을 구석이 못 돼... 됐어. 나한테 수현이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제는 손주들도 있잖아. 역시 우리 윤아 대단해. 단번에 쌍둥이를 낳을 줄은 누가 알았겠어.’그녀는 원래 손주 한 명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이혼하고 나서, 진수현
아이들이 이 학교에 다닐 때 심윤아는 기억을 잃었었다. 하지만 약간의 익숙한 느낌은 들었다. 아이들이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녀의 머릿속에는 문득 한 장면이 떠올랐다.그러나 너무 빨리 사라진 탓에 심윤아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생각에 잠긴 그녀가 우뚝 멈춰 서자 곁에 있던 진수현도 따라 멈춰 섰다.“왜 그래?”진수현은 손을 뻗어 심윤아의 허리를 잡았다. 그의 신경은 전부 심윤아에게 집중된 것 같았다.심윤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아무것도 아니야.”그녀가 이렇게 대답했는데도 진수현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가자, 나도 들어가서 보고 싶어.”심윤아는 진수현의 손을 밀어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기억은 특정한 곳에 가면 약간씩 떠오르는 것 같았다.지금까지 그녀는 충분히 즐겁게 지냈다.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난번 일 때문에 진실을 알 필요성은 있을 것 같았다.그 진실을 알게 된 결과가 기쁨이 아니라는 것은 당연히 알았다. 그래도 그녀는 알고 싶었다.진수현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뒤따라갔다.안으로 들어간 심윤아의 눈길은 아이들만 쫓았다. 그렇게 그녀의 눈앞에는 점차 익숙하고도 낯선 장면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이번에도 역시나 너무 빨리 지나가 버려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 심윤아는 한숨을 쉬며 천천히 시도해야겠다고 생각했다.오늘은 아직 첫날이다. 이 정도 기억해 내는 것만으로도 대단했다. 앞으로 자주 다니다 보면 더 긴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녀는 직접 아이들 등하교를 책임지겠다고 진수현에게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서도 진수현은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지금 어머니 일을 뺏겠다는 건가?”심윤아는 잠깐 멈칫하다가 되물었다.“어머님 다른 일로 충분히 바쁘지 않아?”진수현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어머니가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결혼하고부터 손주를 보는 게 유일한 소원이었어.”“...”이선희가 심하윤과 심
“내 회사 말이야... 내가 없는 동안 누가 관리하고 있었어? 관리하는 사람이 있기는 해?”회사는 심윤아가 고른 훌륭한 직원 덕분에 잘 운영되고 있었다. 그녀가 사고를 당한 다음에도 큰 문제 없을 정도로 말이다.후에는 이민재도 적당한 인재를 찾아서 보냈고, 오민우의 월급까지 올렸다. 오민우의 직속 상사는 지금 진수현이 되었다. 월급도 그가 주고, 심윤아가 해야 하는 일도 그가 했다.진수현은 오민우의 이력서를 본 적 있다. 이력서로 보기에는 더 큰 회사에 가야 맞지만, 어쩐지 자그마한 회사에서 임원으로 일하고 있다. 아무래도 회사의 규모보다 직위가 더 중요했던 모양이다.이민재와 일 얘기를 할 때 오민우는 아주 솔직히 털어 놓았다.“제 아내도 아이도, 그리고 부모님도 다 이 도시에 있어요. 가족이 없는 곳이라면 아무리 좋은 기회가 있다고 해도 가고 싶지 않네요. 사람마다 인생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다른 법이잖아요. 남들은 그게 일일 수도 있겠지만, 저에게는 가족이에요. 그래서 저는 이 도시에서 적당한 일을 하고 싶어요. 그 외에 바라는 것은 없어요.”그래서 진수현은 그에게 최상의 대우를 해줬다. 오민우에게는 이보다 완벽한 상황이 있을 수 없었다.진씨 그룹의 투자 덕분에 오민우는 심윤아의 회사를 꽤 좋게 봤다. 심윤아가 자주 자리를 비우는데도 떠날 생각이 없었다.월급을 올린 다음에는 더 그랬다. 진수현이 주는 월급은 대기업에서도 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오민우는 점점 회사를 집처럼 생각하게 되었다.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이뤘다. 가족 곁에서 높은 월급을 받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매니저가 회사 관리를 책임졌다는 것을 알게 된 심윤아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나 회사에 안 간 지 한참 됐는데 아직도 관리하고 있다고? 회사가 망할 거로 생각할 법도 한데?”진수현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아무래도 회사를 좋게 봐서 그런 거겠지?”“그래?”“응. 대기업 임원 출신이라면 그 정도 안목은 있을 거야.”“...”진수현의
심윤아가 이런 생각을 할 때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한 사람이 들어왔다.사람이 늘어나면서 진수현은 어쩔 수 없이 두 발짝 정도 움직였다. 심윤아는 따라서 휘청거리다가 무의식적으로 그의 허리를 꽉 잡았다.그렇게 두 사람은 전보다 훨씬 밀착하게 되었다. 이때 위에서 듣기 좋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진작 이렇게 할 것이지.”이 말을 듣고 심윤아는 그의 허리를 꽉 꼬집었다.“씁...”진수현은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고 마구 움직여대는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하지 마.”엘리베이터에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곧 있으면 심윤아의 회사에 도착하는데 이러다가 진수현은 멀쩡하게 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두 사람의 몸은 밀착되어 있었다. 그래서 심윤아도 무언가 느꼈다. 그녀는 눈빛이 약간 변하더니 속으로만 투덜거리고 더 이상 그를 꼬집지 않았다. 그저 살포시 안고 있을 뿐이었다.엘리베이터는 계속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사람으로 가득한 주변을 보고 진수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회사 위치를 바꿀까?”그녀의 회사가 있는 건물에는 다른 회사도 있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는 하나뿐이라 이동하는 게 아주 번거로웠다.심윤아는 눈을 깜빡이다가 대답했다.“됐어, 바꾸고 싶었으면 진작 바꿨을 것 같아. 지금까지 미룰 건 없지.”비록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이곳을 선택한 데에는 경제적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안 그러면 누구나 단독 건물을 마련할 테니 말이다.그녀의 말을 듣고 진수현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이제는 내가 있잖아. 내가 바꿔줄게.”얼핏 들으면 아주 달콤한 말 같았지만 심윤아의 귀에는 다르게 들렸다. 그는 진수현을 바라보며 눈을 깜짝이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내가 있다는 게 무슨 뜻이야?”이 말을 듣고 진수현은 안색이 약간 변했다. 입가에 퍼졌던 웃음기도 줄어들었다. 뒤늦게 말실수를 깨달은 그는 다행히 임기응변 능력이 놓은 덕분에 곧바로 말을 바꿔 대답할 수 있었다.“내 말은 나한테 애교 한 번 부리면 회사 위치 정도는 바꿔줄 수 있다는 거
“그러니까. 이렇게 모여 있으니까 더 보기 좋네. 추남이랑 미녀의 조합은 이제 지긋지긋해.”엘리베이터 안은 금세 떠들썩해졌다.사람들의 말소리에 부끄러워진 심윤아는 얼굴을 붉히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이제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진수현이 그러지 못하게 꽉 붙잡고 있었다.곧 회사에 도착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진수현은 심윤아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조금 전 말하던 여자들 곁으로 지나갈 때 그녀들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해 줬다.“예쁜 사랑하세요.”심윤아는 따라 미소를 지으며 감사 인사를 하자마자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마음 따듯해지는 축복에 그녀는 기분이 다 좋아졌다.엘리베이터에서 나와 앞으로 조금 더 걸어가면 회사에 도착했다. 심윤아는 기억도 없으면서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회사 외부에 간판이 없는 것도, 내부 인테리어가 깔끔하게 되어 있는 것도 전부 그녀의 스타일이었다.‘이게... 내 회사라고? 내가 직접 만든 회사?’심윤아는 무의식적으로 명패를 쓰다듬었다. 피부가 닿으니 전류가 통하는 기분이었다.진수현은 뒤에서 그녀를 묵묵히 바라보다가 물었다.“왜? 뭔가 기억이 났어?”그녀의 머릿속에는 이 명패를 직접 걸어 올릴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의 곁에는 다름 아닌 오민우가 서 있었다. 그는 마찬가지로 신난 얼굴로 박수치면서 말했었다.“축하드려요. 이 명패 너무 예쁘게 만들었는데요? 언제 시간이 있을 때 저도 하나 만들어주세요.”그때 그녀는 아주 기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이런 생각을 하다 말고 심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조금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해.”진수현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이어서 물었다.“뭐가 기억났는데? 기억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그 정도는 아니고... 아직 첫날이나 나도 잘 모르겠어. 앞으로 꾸준히 와보면 도움이 될 것 같아.”“그러게. 네가 원하는 대로 해. 그렇다고 해서 무리하지는 말고.”진수현은 회사를 옮길 생각을 완전히 접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대로 지내는 게 기억
“왜 그래?”심윤아가 생각에 잠긴 것을 보고 진수현이 물었다. 심유나는 생각하던 것을 전부 말했고 진수현은 한참이나 말을 잃었다.이건 그가 가장 걱정하던 일이다. 기억을 잃은 그녀가 부모에 관해 묻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 전에 겪었던 고통을 다시 한번 겪게 된다.‘아버지 얘기를 괜히 했나? 이럴 줄 알았으면 말을 아끼는 건데...’“왜 아무 말도 안 해?”진수현이 침묵에 잠긴 것을 보고 심윤아는 더욱 궁금해졌다.“그렇게까지 말하기 어려운 일이야?”진수현은 이제야 살짝 정신을 차렸다. 그는 심윤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야, 네가 퇴근한 다음에야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중이었어. 여기까지 왔는데 안 들어가 볼 거야? 들어가 보면 다른 힌트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진수현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그래서 심윤아는 바로 납득했다.“좋아, 들어가 보자.”‘내가 직접 떠올려 낸다면 누구한테 물어볼 것도 없겠지’말을 마친 심윤아는 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누군가 들어오자 안내 데스크 직원은 습관적으로 몸을 일으켜 인사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심윤아인 것을 보고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넋이 나가버렸다.“대... 대표님?”심윤아는 잠깐 멈칫했다. 그녀가 직원이 부르는 사람이 자신이 맞는지 헷갈리고 있을 때 직원은 이미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대표님이 돌아오셨어요!”“...”그녀의 말을 듣고 원래 일하고 있던 직원들은 우르르 달려 나왔다.“대표님이라고요? 어디요? 어디요?”“대표님이 돌아오셨어요?”“어디 대표님이요?”심윤아가 자리를 비운 동안 오민우와 진씨 그룹 직원이 회사를 가꾸고 있었다. 그래서 심윤아의 빈자리는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오민우가 새로 뽑은 직원들은 여자 대표가 따로 있다는 것만 알았다. 그가 시도 때도 없이 칭찬했기 때문이다.심윤아를 본 적 없는 직원들도 오민우의 칭찬 덕분에 그녀에게 좋은 인상이 있었다. 그래서 만날 수 있는 날을 아주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돌아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