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적인 영양실조로 피부도 창백하네요. 영양실조에 햇빛도 많이 못 봤는지 골격 연령이 실제 나이보다 다섯 살은 어리게 나왔어요. 피부는 하얗고 부드러워 보이는데 오랫동안 건강이 좋지 않은 데다가 온몸이 상처투성인 거로 보아서는 가정폭력을 당하고 있는 거 같아요.”“....”구경민은 한참 머뭇거리다가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일단 치료부터 해주세요. 나머지는 그 뒤에 얘기하죠.”“그럴게요!”의사가 답했다.고윤희는 병원에서 일주일 내내 입원해 있었다.그사이 발생한 모든 비용은 구경민이 내주었다. 경상이라 병원비용은 많이 들지 않았지만, 구경민은 그녀의 몸에 좋은 영양제품만 해도 몇백만 원어치 사다 주었다.그리고 그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구경민은 고윤희의 사정을 다 알게 되었다.구경민은 분노했다. 법치국가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다니.하지만 병상에 누워있는 고윤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이 세상에는 우리가 상상도 못 할 일들이 많아요. 큰 도시의 대학생들도 유괴되어 몇 년씩 갇혀 있으면서 아이를 가득 낳아요. 뉴스에도 나왔잖아요. 비록 나는 갇혀져 있었지만 다행히도 아이가 안 생겼어요. 그 바보가 나와 결혼하고 바로 죽어버렸어요. 그리고 그 바보의 동생. 그 사람은 바보는 아니지만... 무능해요.”고윤희는 자기의 기구한 팔자를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깊은 생각을 하던 구경민이 입을 열어 말했다.“그 집 사람들은 이미 벌 받았어요. 주범과 공범 모두 평생 감방에서 썩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부모님은 어디 있어요? 집으로 데려다줄까요?”“싫어요!”고윤희는 단칼에 거절했다.“집은 안 돼요. 아픈 데가 나으면 떠날게요. 혼자 살 수 있어요. 그러니 제발 집에는 데려가지 마세요. 아니면... 지금 당장 여기서 나갈게요. 더는 폐 끼치지 않을게요.”말을 끝낸 고윤희는 다급히 몸을 일으켜 병실 밖으로 도망가려 했다.그런데 몇 걸음 못 가 그녀는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구경민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제발요, 놔주세
구경민이 고윤희를 구해주고 일주일이 지난 뒤, 구경민은 고윤희를 자기의 여자로 받아들였다.병원에서도 고윤희는 구경민이 직접 데리고 온 여자라 다들 고윤희를 구경민의 여자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의사들도 기분이 다 달랐다.특히나 젊고 미혼인 여의사나 간호사들은 배가 아팠다.서울에서 구경민은 젊음과 권력의 상징이었으니 말이다.서울에서 구경민과의 결혼을 꿈꾸는 여자들은 마치 남성에서 부소경과의 결혼을 꿈꾸는 여자처럼 많았다.그녀들은 두 눈 뻔히 뜨고 구경민이 밤새 다른 여자의 병실에 머무르는 꼴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구경민은 고윤희를 직접 씻겨주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고윤희의 창백하던 작은 얼굴에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 뒤로 고윤희는 구경민을 ‘자기.’라고 불렀다.고윤희는 병원의 수많은 여의사와 여간호사, 그리고 여성 환자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구경민의 차에 올라 그의 집으로 갔다.도우미들은 모두 그녀를 ‘아가씨’라고 불렀다.하지만 그녀는 초심을 잃지 않았다.그녀는 자기의 신분을 잘 알고 있었다.고윤희가 구경민의 여자가 된 그해, 고윤희도 곧 서른이 되어갔다. 어릴 적부터 불공평한 대우를 받고 자라 온 그녀는 이 지저분한 세상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평온한 얼굴로 구경민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구세주님.”그녀는 더는 병원에서처럼 구경민을 ‘자기야’라고 부르지 않았다.하지만 구경민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오히려 사리가 분명한 이 여자가 더 좋아졌다.구경민은 그제야 연상의 좋은 점을 알게 되었다. 연하는 대체로 멋대로 행동하는 기분파이지만 연상은 성숙하고 속이 깊으며 사람을 귀찮게 굴지 않는다. 물론 고작 6개월 연상이지만.구경민은 그녀가 좋았다.“왜 그래요?”구경민은 고윤희에게서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고윤희는 구경민을 존경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난 경민 씨의 아내가 되겠다는 헛된 꿈은 꾸지 않아요. 경민 씨의 여자친구도 바라지 않아요. 난... 사실 경민 씨의 썸녀도 아니에요
“맞아요.”고윤희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친자 확인까지 했었죠.”“....”고윤희는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우리가 한살 두살 나이를 먹어가다 보니 지출도 많아지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때 부모님의 사업도 적자가 나면서 살던 집을 팔아 언니 오빠와 동생들에게 주었어요. 당연히 내 몫은 없었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부모님과 함께 고향으로 내려갔어요. 부모님은 날 돈 때문에 바보한테 팔아넘겼어요. 난 그곳에서 4년을 감금당했죠. 4년을 햇빛도 못 보고 살았어요. 나 피부 엄청 창백하죠? 이건 지하실에서 감금되어 있다 보니 햇빛을 보지 못해서 그래요. 울어도 보고 외쳐보기도 했어요. 하지만 동네 사람들은 우리는 법적 부부라고 알고 있었기에 가정사에 끼어들려고 하지 않았어요. 내가 얼마나 절망했는지 알아요? 좀 지나서 그 바보는 죽었어요. 하지만 그날 보셨던 그 자식이 날 데리고 서울로 왔어요. 맨날 도박으로 돈은 다 탕진했죠. 경민 씨가 날 도와주었던 그날, 그 자식은 내 몸을 오야지한테 팔려고 했어요. 내가 싫다고 반항하니 날 그렇게 만든 거죠.”고윤희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내려왔다.그녀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더니 미소를 지으며 구경민을 바라보았다.“비록 고졸이긴 하지만 공부도 잘했어요.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싶어서 공부 엄청 열심히 했어요. 공부라도 잘하면 나에게도 눈길을 줄줄 알았죠. 그래서 난 눈치가 빨라요. 내가 뭘 하면 안 되는지, 뭘 해야 할지 다 알 수 있어요. 내 진짜 남편도 아닌 사람의 빚을 갚아주느니 차라리 다른 남자에게 내 몸을 주는 게 나아요. 내 구세주에게 다 바치고 싶어요. 내 구세주 옆에 있는 게 제일 행복한 날이 될 거 같아요. 나 말인데요. 일 년이라도 그렇게 행복하게 살 수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고윤희의 말을 들은 구경민은 마음이 복잡했다.구경민도 당연히 청순하고 부드러우며 사람의 마음도 잘 이해해 주는 그녀가 탐났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가볍게 대하기 싫었다.하지만 고윤희는 오히려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윤희는 행복했다.진심으로 행복했다.구경민의 집에서 지내게 된 밤, 그녀는 이불속에서 펑펑 울었다.여태 누구도 그녀를 사람으로 대한 적이 없었다.고윤희는 왜 부모님이 굳이 그녀를 이 세상에 데려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랑을 주지도 않을 거면서 왜 그녀를 낳았는지 알 수 없었다.고윤희는 부모님에게 왜 자기에는 사랑을 주지 않는지 따지기도 했었다.하지만 그때마다 부모님은 구구절절한 이유와 핑계를 늘어놓았다.고윤희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윤희야. 우리는 너한테 생명을 주고 하루 세끼 밥도 먹여주잖아. 그러면 너는 엄마 아빠한테 고마워해야지 이런 걸 따져서 되겠어? 넌 대체 누굴 닮아서 이렇게 속이 좁은 거야?”고윤희는 울면서 물었다.“언니 오빠, 그리고 동생들은 다 자기 방이 있는데 왜 난 아무 데서나 자야 해요?”“널 빼면 다 쌍둥이잖아?”고윤희의 어머니도 옆에서 한마디 했다.“네 언니 오빠는 애교도 많고 너처럼 삐딱하지도 않아! 그리고 엄마 아빠한테 아이가 아홉인데 어떻게 모두 똑같은 사랑을 주겠어? 우리도 어쩔 수 없어. 다들 쌍둥인데 너만 혼자니까 엄마 아빠는 먼저 쌍둥이들부터 챙길 수밖에 없지.”고윤희의 아버지도 계속 말했다.“엄마 아빠는 아홉 명의 아이 중에서 여덟은 잘 보살폈지만. 너한테는 관심을 많이 주지 못했어. 하지만 이게 우리 최선이야. 우리도 할 만큼 했어. 열 손가락도 길이가 다 다른데 어떻게 똑같게 해주겠어? 우리가 책임감이 없었더라면 집에 아이도 많은데 널 이미 입양 보냈겠지. 그런데 해외에 입양 보냈다가 혹시라도 입양한 부모가 이혼이라도 하면 넌 버려질 거 아니야?”고윤희의 엄마도 뒤질세라 한마디 거들떴다.“지금 이상한 부모들이 얼마나 많은데. 만약에라도 널 그런 집에 입양 보내면 너 얼마나 상처받겠어. 넌 상상도 못 할 거야. 우리가 널 입양 보내지 않고 계속 키우고 있는데 넌 오히려 우릴 원망해? 너 어쩜 그렇게도 양심이 없니.”고윤희의 부모는 몇 번이고 똑같은 말을 했었다.그녀는 쭉 이렇게
구경민의 말을 들은 고윤희는 사실 마음이 아팠다.하지만 고윤희는 애써 웃어 보이며 말했다.“응, 그럴게. 그럼, 임플라논으로 하자.”구경민은 고윤희를 데리고 임플라논 시술을 받았다.그날 이후, 구경민은 고윤희를 더 잘 대해주었다.구경민은 5억에 그녀를 사 간 정씨 집안 사람들에게 법적 책임을 물었으며 고윤희와 함께 고윤희의 고향 집으로 가서 그녀의 부모님이 혈연 포기 각서에 사인하도록 했다.고윤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에서 나왔다.그녀의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윤희의 어머니는 고윤희를 향해 애타게 소리쳤다.“윤희야, 너 엄마 아빠 버리고 갈 거야?”고윤희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한참 눈물을 흘리던 고윤희는 머리를 돌리고 말했다.“두 사람의 딸 고윤희는 이제 이 세상에 없어요.”“....”“당신들 모두 에어컨 빵빵한 방에서 잠자고 있을 때, 윤희만 베란다에서 잠을 잤다죠. 베란다에서 떨어지기라도 했다면 뼈도 못추렸을거에요.”“....”“또, 윤희는 시댁의 지하실에 감금되어 있었죠. 만약 그곳에서 죽기라도 했다면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시체도 다 썩고 뼈도 안 남았겠죠.”“....”“또, 윤희의 시동생한테 머리채 잡히고 가차없이 폭행당해서 서울에서 죽을 뻔했어요.”“윤희야...”고윤희의 어머니는 눈물을 보였다.“난 이젠 두 사람의 딸 고윤희가 아니에요. 미안해요! 다시 보는 일 없어요!” 말을 끝낸 고윤희는 뒤돌아서 자리를 떠났다.“윤희야...”고윤희의 아버지도 눈물을 흘렸다.아마 그제야 두 사람은 고윤희도 친자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모양이다.고윤희는 다시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 말했다.“드릴 말씀이 있어요. 나 임플라논 했어요. 아마 평생 아이는 안 낳을 거 같아요. 혹시라도 아이가 생기면 나도 그 아이에게 불공평하게 대할까 봐 겁이 나요. 아이가 원해서 태어난 게 아닌데 말이죠. 왜 내가 낳았다고 무조건 나한테 고마워해야 하죠? 언젠가 내가 정말 아이를 가지게 된다 해도 하나만 낳아서
“....”구경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윤희는 차갑게 변해버린 구경민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급히 말했다.“미안해, 경민 씨.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안 되는데. 앞으로 조심할게. 다신 안 할게.”구경민은 아무 말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고윤희는 눈치가 빠른 여자다. 그녀는 구경민의 손에 들려있던 수저를 내려주고 두 팔로 구경민의 목을 감싸며 말했다.“내가 말 잘 못했으니 오늘 벌 받아야지. 어때?”구경민이 물었다.“정말 나 사랑해?”“....”그녀는 머리를 푹 숙이고 한참 지나서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사랑해. 사랑해서 사랑한다고 말했어.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어쩌면 이러면 지금의 행복이 사라질 줄 알면서도... 하지만 경민 씨 걱정하지 마. 나 부담 주려는 거 아니야. 나 성인이야. 어린애 아니야. 전혀 신경 쓸 필요 없어. 언젠가 내가 지겨워졌는데도 말하기 미안하다면 나한테 그렇게 말해줘. 인테리어 다시 해야 하니까 잠시 다른 곳에서 지내다가 돌아와. 이렇게 하면 돼. 그럼 내가 조용히 나갈게. 다시 돌아오지 않을게. 응?”구경민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고윤희의 이런 안쓰러운 모습은 자꾸만 구경민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구경민은 고윤희를 사랑하지 않았다.그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최여진이 자리하고 있었다. 구경민은 최여진이 열여섯 살 때부터 5년을 짝사랑했던 첫사랑이다.5년이나 말이다.구경민은 그녀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최여진은 구경민을 버리고 해외로 갔다. 구경민은 더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구경민은 비록 고윤희를 사랑하지 않지만, 그녀를 아꼈다.아껴줄 수 있는 만큼 지독히도 아꼈다.구경민은 몸을 뒤집어 고윤희의 몸에 올라탔다.고윤희는 깜짝 놀랐다.“경민 씨... 화... 화난거야?”“자기라고 불러!”구경민은 나지막하지만, 강한 어조로 말했다.고윤희는 이내 목소리를 바꿔 애교스럽게 말했다.“자... 자기야!”구경민은 고윤희의 입을 맞추고 사랑을 나눴다.하지만 이
고윤희는 한 번도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달라고 조르지 않았다.여자는 적금이 있어야 한다며 그가 건넨 돈도 전부 거절했다.그때마다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경민 씨, 나 손발 멀쩡해. 스스로를 먹여 살릴 힘 정도는 있다고. 나 요리도 잘해. 마사지도 잘하고. 그래서 당신 돈은 필요 없어.”그녀가 매번 거절했기에 그도 더 이상 그녀에게 억지로 돈을 건네지 않았다.사실 남자도 사심이 있었다.그녀를 오랜 시간 옆에 데리고 있었지만 그녀를 향한 진심이 무엇인지 헷갈렸다.사랑일까?아닐 것이다.그는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그냥 서로의 존재에 습관이 되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그는 그녀에게 돈을 주었다가 그녀가 정말 다른 남자와 가정을 이루고 애를 낳을까 봐 두려웠다. 구경민은 그녀의 남자를 살려둘 자신이 없었다.그래서 그녀가 돈을 거절하면 억지로 쥐여주지는 않았다.어차피 그에게는 그녀를 평생 먹여 살릴 만한 돈이 있었다. 그녀는 평생 그의 곁에서 안락한 삶을 살면 된다. 그의 옆에서 애교를 부리고 싶으면 부리고 자기라고 불러도 받아줄 수 있었다.그녀가 원하는 건 뭐든 만족해 줄 수 있다.두 사람이 함께한 세월이 오래되면서 피임에 주의한다고 했지만 원치 않은 아이가 두 번이나 찾아왔다. 그때마다 그녀는 그에게 매달리는 대신 혼자서 처리했다.그렇게 사려 깊은 그녀의 모습이 구경민은 마음에 들었다.그들이 함께한 시간이 벌써 6년이 되어간다. 그리고 한 달 전, 고윤희는 세 번째 아이를 지웠다.그녀는 이번에도 수술 뒤에 그에게 사실을 고했다.그날 그녀가 미치도록 안고 싶어서 침대에 쓰러뜨리자 창백해진 얼굴로 힘없이 말하던 모습이 떠올랐다.“경민 씨, 오늘은 그냥 하지 말까?”“왜, 어디 아파?”그의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대꾸했다.“미… 미안해. 내가 부주의해서… 일 끝나고 바로 약을 먹었어야 했는데… 또 임신했거든. 오늘 오후에 수술하고 오는 길이야.”그렇게 말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는 건 그의 착각일까.구경민은
구경민은 한참 동안 복잡한 시선으로 악몽을 꾸며 흐느끼는 고윤희를 바라보았다.그러고 보면 그는 함께한 6년 동안 한 번도 그녀의 마음을 들여다 본 적 없었다.너무 온순해서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구경민은 원래 여자에게 관심을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그는 고윤희를 위로해야 할지 아니면 흔들어서 깨워야 할지 착잡했다.그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울던 고윤희가 잠에서 깼다.그녀는 멍한 눈빛으로 그의 팔에 남아 있는 눈물자국을 바라보았다.조금 전 꾸었던 꿈이 아직도 머리에 선했다.꿈속에 나타난 건 금방 걸음마를 뗀 여자아이였다.짧고 가냘픈 팔다리로 뒤뚱뒤뚱 걷는 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아이는 그녀의 부름을 듣지 못한 것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걸었다.그렇게 정처 없이 걷던 아이는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수술이 끝난 뒤, 산부인과 의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이도 있으신데 이렇게 자꾸 중절 수술을 하시고 몇 년 지나면 정말 아이를 갖지 못하게 될지도 몰라요. 그리고 오늘 수술한 아이는 여자아이였어요. 환자분이 워낙 피부가 하얗고 예쁘시니 아이가 태어났으면 엄청 예뻤을 거예요. 참… 안타깝네요.”그 말을 들었을 때 고윤희는 누군가가 칼로 가슴을 도려내는 기분이었다.예전에는 아이를 원치 않았던 적이 있었다.자신의 삶이 너무 고통스러웠기에 아이에게 행복을 줄 자신이 없었다.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리고 구경민과 함께 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이가 갖고 싶어졌다. 그녀는 구경민과의 아이를 원하고 있었다.하지만 그의 사랑이 자신을 향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그는 한 번도 그녀를 사랑한 적 없었다.구경민은 그녀를 데리고 각종 모임에 참석했고 그의 지인들도 그녀를 친근하게 제수씨라고 불렀지만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를 향한 구경민의 애정은 데리고 있는 애완동물을 향한 관심과 크게 다르지 않는다는 걸.그는 그녀에게 이 나라 어떤 여자도 누릴 수 없는 관심과 애정을 쏟았다.하지만 남녀 간의 사랑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