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윤희는 행복했다.진심으로 행복했다.구경민의 집에서 지내게 된 밤, 그녀는 이불속에서 펑펑 울었다.여태 누구도 그녀를 사람으로 대한 적이 없었다.고윤희는 왜 부모님이 굳이 그녀를 이 세상에 데려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랑을 주지도 않을 거면서 왜 그녀를 낳았는지 알 수 없었다.고윤희는 부모님에게 왜 자기에는 사랑을 주지 않는지 따지기도 했었다.하지만 그때마다 부모님은 구구절절한 이유와 핑계를 늘어놓았다.고윤희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윤희야. 우리는 너한테 생명을 주고 하루 세끼 밥도 먹여주잖아. 그러면 너는 엄마 아빠한테 고마워해야지 이런 걸 따져서 되겠어? 넌 대체 누굴 닮아서 이렇게 속이 좁은 거야?”고윤희는 울면서 물었다.“언니 오빠, 그리고 동생들은 다 자기 방이 있는데 왜 난 아무 데서나 자야 해요?”“널 빼면 다 쌍둥이잖아?”고윤희의 어머니도 옆에서 한마디 했다.“네 언니 오빠는 애교도 많고 너처럼 삐딱하지도 않아! 그리고 엄마 아빠한테 아이가 아홉인데 어떻게 모두 똑같은 사랑을 주겠어? 우리도 어쩔 수 없어. 다들 쌍둥인데 너만 혼자니까 엄마 아빠는 먼저 쌍둥이들부터 챙길 수밖에 없지.”고윤희의 아버지도 계속 말했다.“엄마 아빠는 아홉 명의 아이 중에서 여덟은 잘 보살폈지만. 너한테는 관심을 많이 주지 못했어. 하지만 이게 우리 최선이야. 우리도 할 만큼 했어. 열 손가락도 길이가 다 다른데 어떻게 똑같게 해주겠어? 우리가 책임감이 없었더라면 집에 아이도 많은데 널 이미 입양 보냈겠지. 그런데 해외에 입양 보냈다가 혹시라도 입양한 부모가 이혼이라도 하면 넌 버려질 거 아니야?”고윤희의 엄마도 뒤질세라 한마디 거들떴다.“지금 이상한 부모들이 얼마나 많은데. 만약에라도 널 그런 집에 입양 보내면 너 얼마나 상처받겠어. 넌 상상도 못 할 거야. 우리가 널 입양 보내지 않고 계속 키우고 있는데 넌 오히려 우릴 원망해? 너 어쩜 그렇게도 양심이 없니.”고윤희의 부모는 몇 번이고 똑같은 말을 했었다.그녀는 쭉 이렇게
구경민의 말을 들은 고윤희는 사실 마음이 아팠다.하지만 고윤희는 애써 웃어 보이며 말했다.“응, 그럴게. 그럼, 임플라논으로 하자.”구경민은 고윤희를 데리고 임플라논 시술을 받았다.그날 이후, 구경민은 고윤희를 더 잘 대해주었다.구경민은 5억에 그녀를 사 간 정씨 집안 사람들에게 법적 책임을 물었으며 고윤희와 함께 고윤희의 고향 집으로 가서 그녀의 부모님이 혈연 포기 각서에 사인하도록 했다.고윤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에서 나왔다.그녀의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윤희의 어머니는 고윤희를 향해 애타게 소리쳤다.“윤희야, 너 엄마 아빠 버리고 갈 거야?”고윤희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한참 눈물을 흘리던 고윤희는 머리를 돌리고 말했다.“두 사람의 딸 고윤희는 이제 이 세상에 없어요.”“....”“당신들 모두 에어컨 빵빵한 방에서 잠자고 있을 때, 윤희만 베란다에서 잠을 잤다죠. 베란다에서 떨어지기라도 했다면 뼈도 못추렸을거에요.”“....”“또, 윤희는 시댁의 지하실에 감금되어 있었죠. 만약 그곳에서 죽기라도 했다면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시체도 다 썩고 뼈도 안 남았겠죠.”“....”“또, 윤희의 시동생한테 머리채 잡히고 가차없이 폭행당해서 서울에서 죽을 뻔했어요.”“윤희야...”고윤희의 어머니는 눈물을 보였다.“난 이젠 두 사람의 딸 고윤희가 아니에요. 미안해요! 다시 보는 일 없어요!” 말을 끝낸 고윤희는 뒤돌아서 자리를 떠났다.“윤희야...”고윤희의 아버지도 눈물을 흘렸다.아마 그제야 두 사람은 고윤희도 친자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모양이다.고윤희는 다시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 말했다.“드릴 말씀이 있어요. 나 임플라논 했어요. 아마 평생 아이는 안 낳을 거 같아요. 혹시라도 아이가 생기면 나도 그 아이에게 불공평하게 대할까 봐 겁이 나요. 아이가 원해서 태어난 게 아닌데 말이죠. 왜 내가 낳았다고 무조건 나한테 고마워해야 하죠? 언젠가 내가 정말 아이를 가지게 된다 해도 하나만 낳아서
“....”구경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윤희는 차갑게 변해버린 구경민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급히 말했다.“미안해, 경민 씨.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안 되는데. 앞으로 조심할게. 다신 안 할게.”구경민은 아무 말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고윤희는 눈치가 빠른 여자다. 그녀는 구경민의 손에 들려있던 수저를 내려주고 두 팔로 구경민의 목을 감싸며 말했다.“내가 말 잘 못했으니 오늘 벌 받아야지. 어때?”구경민이 물었다.“정말 나 사랑해?”“....”그녀는 머리를 푹 숙이고 한참 지나서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사랑해. 사랑해서 사랑한다고 말했어.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어쩌면 이러면 지금의 행복이 사라질 줄 알면서도... 하지만 경민 씨 걱정하지 마. 나 부담 주려는 거 아니야. 나 성인이야. 어린애 아니야. 전혀 신경 쓸 필요 없어. 언젠가 내가 지겨워졌는데도 말하기 미안하다면 나한테 그렇게 말해줘. 인테리어 다시 해야 하니까 잠시 다른 곳에서 지내다가 돌아와. 이렇게 하면 돼. 그럼 내가 조용히 나갈게. 다시 돌아오지 않을게. 응?”구경민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고윤희의 이런 안쓰러운 모습은 자꾸만 구경민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구경민은 고윤희를 사랑하지 않았다.그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최여진이 자리하고 있었다. 구경민은 최여진이 열여섯 살 때부터 5년을 짝사랑했던 첫사랑이다.5년이나 말이다.구경민은 그녀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최여진은 구경민을 버리고 해외로 갔다. 구경민은 더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구경민은 비록 고윤희를 사랑하지 않지만, 그녀를 아꼈다.아껴줄 수 있는 만큼 지독히도 아꼈다.구경민은 몸을 뒤집어 고윤희의 몸에 올라탔다.고윤희는 깜짝 놀랐다.“경민 씨... 화... 화난거야?”“자기라고 불러!”구경민은 나지막하지만, 강한 어조로 말했다.고윤희는 이내 목소리를 바꿔 애교스럽게 말했다.“자... 자기야!”구경민은 고윤희의 입을 맞추고 사랑을 나눴다.하지만 이
고윤희는 한 번도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달라고 조르지 않았다.여자는 적금이 있어야 한다며 그가 건넨 돈도 전부 거절했다.그때마다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경민 씨, 나 손발 멀쩡해. 스스로를 먹여 살릴 힘 정도는 있다고. 나 요리도 잘해. 마사지도 잘하고. 그래서 당신 돈은 필요 없어.”그녀가 매번 거절했기에 그도 더 이상 그녀에게 억지로 돈을 건네지 않았다.사실 남자도 사심이 있었다.그녀를 오랜 시간 옆에 데리고 있었지만 그녀를 향한 진심이 무엇인지 헷갈렸다.사랑일까?아닐 것이다.그는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그냥 서로의 존재에 습관이 되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그는 그녀에게 돈을 주었다가 그녀가 정말 다른 남자와 가정을 이루고 애를 낳을까 봐 두려웠다. 구경민은 그녀의 남자를 살려둘 자신이 없었다.그래서 그녀가 돈을 거절하면 억지로 쥐여주지는 않았다.어차피 그에게는 그녀를 평생 먹여 살릴 만한 돈이 있었다. 그녀는 평생 그의 곁에서 안락한 삶을 살면 된다. 그의 옆에서 애교를 부리고 싶으면 부리고 자기라고 불러도 받아줄 수 있었다.그녀가 원하는 건 뭐든 만족해 줄 수 있다.두 사람이 함께한 세월이 오래되면서 피임에 주의한다고 했지만 원치 않은 아이가 두 번이나 찾아왔다. 그때마다 그녀는 그에게 매달리는 대신 혼자서 처리했다.그렇게 사려 깊은 그녀의 모습이 구경민은 마음에 들었다.그들이 함께한 시간이 벌써 6년이 되어간다. 그리고 한 달 전, 고윤희는 세 번째 아이를 지웠다.그녀는 이번에도 수술 뒤에 그에게 사실을 고했다.그날 그녀가 미치도록 안고 싶어서 침대에 쓰러뜨리자 창백해진 얼굴로 힘없이 말하던 모습이 떠올랐다.“경민 씨, 오늘은 그냥 하지 말까?”“왜, 어디 아파?”그의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대꾸했다.“미… 미안해. 내가 부주의해서… 일 끝나고 바로 약을 먹었어야 했는데… 또 임신했거든. 오늘 오후에 수술하고 오는 길이야.”그렇게 말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는 건 그의 착각일까.구경민은
구경민은 한참 동안 복잡한 시선으로 악몽을 꾸며 흐느끼는 고윤희를 바라보았다.그러고 보면 그는 함께한 6년 동안 한 번도 그녀의 마음을 들여다 본 적 없었다.너무 온순해서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구경민은 원래 여자에게 관심을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그는 고윤희를 위로해야 할지 아니면 흔들어서 깨워야 할지 착잡했다.그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울던 고윤희가 잠에서 깼다.그녀는 멍한 눈빛으로 그의 팔에 남아 있는 눈물자국을 바라보았다.조금 전 꾸었던 꿈이 아직도 머리에 선했다.꿈속에 나타난 건 금방 걸음마를 뗀 여자아이였다.짧고 가냘픈 팔다리로 뒤뚱뒤뚱 걷는 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아이는 그녀의 부름을 듣지 못한 것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걸었다.그렇게 정처 없이 걷던 아이는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수술이 끝난 뒤, 산부인과 의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이도 있으신데 이렇게 자꾸 중절 수술을 하시고 몇 년 지나면 정말 아이를 갖지 못하게 될지도 몰라요. 그리고 오늘 수술한 아이는 여자아이였어요. 환자분이 워낙 피부가 하얗고 예쁘시니 아이가 태어났으면 엄청 예뻤을 거예요. 참… 안타깝네요.”그 말을 들었을 때 고윤희는 누군가가 칼로 가슴을 도려내는 기분이었다.예전에는 아이를 원치 않았던 적이 있었다.자신의 삶이 너무 고통스러웠기에 아이에게 행복을 줄 자신이 없었다.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리고 구경민과 함께 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이가 갖고 싶어졌다. 그녀는 구경민과의 아이를 원하고 있었다.하지만 그의 사랑이 자신을 향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그는 한 번도 그녀를 사랑한 적 없었다.구경민은 그녀를 데리고 각종 모임에 참석했고 그의 지인들도 그녀를 친근하게 제수씨라고 불렀지만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를 향한 구경민의 애정은 데리고 있는 애완동물을 향한 관심과 크게 다르지 않는다는 걸.그는 그녀에게 이 나라 어떤 여자도 누릴 수 없는 관심과 애정을 쏟았다.하지만 남녀 간의 사랑은 아니었다
구경민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아이가 갖고 싶었어?”고윤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그런 거 아니야! 난 아이 같은 거 원한 적 없어!”“진심이야?”남자가 다시 물었다.고윤희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경민 씨, 나도 여자야. 아이를 지운 지 얼마나 됐다고… 속상한 건 당연한 거야. 하지만 나는 성인이야. 내가 뭘 해야 하고 뭘 하지 말아야 하는지 알아. 아이를 낳으려면 그 아이의 미래도 책임질 수 있어야 해. 그러니까 나는 엄마가 될 수 없어. 경민 씨 옆에서 6년이나 살았던 것만으로 만족해. 당신은 나한테 예전에는 꿈도 꿀 수 없었던 행복을 주었어. 난 욕심 부리지 않아, 경민 씨.”말을 마친 그녀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당신 옆에서 당신을 보살피고 매일 볼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 나는 큰 은혜를 입은 거야. 절대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라고. 복에 겨워 눈앞의 행복을 망치는 짓은 절대 하지 않아.”구경민은 그제야 시름이 놓였다.그는 여자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고개를 숙여 여자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당신은 내가 만났던 여자 중 가장 착한 여자야.”그가 부드럽게 말했다.고윤희는 그의 품에서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자기야, 사랑한다는 말 듣고 싶지 않아?”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 세 글자가 듣고 싶어서 허락한 건 아니었다.매번 그 말을 할 때마다 수줍게 애교를 부리던 그녀의 표정이 보고 싶었다.구경민보다 6개월 연상인 고윤희는 그의 앞에서 애교를 부리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그래서 그녀의 애교가 보고 싶었다.“자기야… 사랑해!”그녀는 수줍게 달아오른 볼을 들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그 표정 하나가 구경민의 몸에 불을 지폈다.그는 그녀를 거칠게 밀치고 욕실로 들어갔다.한 시간 뒤, 욕실에서 나온 그가 차갑게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방에 돌아가서 자!”고윤희는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이것 역시 자신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은 그의 서툰 배려라는 것을 잘 알기 때
또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한 달 전쯤에 아이를 지운 뒤로 아이는 자주 꿈에서 나왔다. 하지만 문밖에서 작은 주먹으로 문을 두드리며 앳된 목소리로 소리치는 아이의 음성은 꿈이 아니었다.도대체 이 시간에 누가 아이를 밖에 내보낸 걸까?고윤희는 옷장에서 대충 가운을 찾아 걸치고 나가서 문을 열었다.지금도 꿈인지 현실인지 약간 헷갈렸지만 아이의 얼굴이 궁금했다.문이 열리자 핑크색 원피스를 예쁘게 차려입은 아이가 그녀를 향해 생긋 미소 지었다.“이모, 너무 예쁘시네요. 우리 엄마보다는 아주 조금 못하지만 그래도 예뻐요.”아이는 투명한 눈망울을 깜빡이며 고윤희를 올려다보았다.눈앞의 예쁜 이모를 칭찬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절대 1위의 자리를 엄마 아닌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 모습을 본 고윤희는 또다시 가슴이 뭉클했다.그녀는 무릎을 굽혀 아이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누가 왔나 했더니 너구나. 미인인 네 엄마를 닮아서 너도 예쁘고 똑똑하구나. 네 엄마보다는 예쁘지 않지만 너는 네 엄마보다 더 예쁜걸.”“이모, 우리 엄마가 누군지 알아요?”아이는 문에 기댄 채,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자신의 엄마가 무척 자랑스럽다는 표정이었다!고윤희는 눈을 곱게 휘며 예쁜 미소를 지었다.“그래. 너희 엄마 이름이 신세희지? 어디 보자…. 너는 신유리구나!”신유리가 아쉽다는 듯이 고개를 떨구었다.“쳇! 놀래켜주려고 했는데 이미 들통이 나버렸네요.”“하지만 이모는 예쁜 너를 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아.”아이도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도 이모가 좋아요.”“나도 네가 좋아.”“우리 엄마도 이모가 좋다고 그랬어요. 우리 아빠한테 하는 얘기를 제가 들었거든요. 오늘 이모랑 같이 백화점 쇼핑하고 싶다고 하길래 제가 이모 보고 싶다고 엄마한테 졸랐거든요. 이모, 오늘 우리랑 쇼핑하러 가요. 엄마의 다른 두 친구분도 오신다고 했어요.”아이는 쉬지도 않고 종알종알 열심히 떠들었다.그러면서 통통한 손으로 고윤희의 손을 잡았다.부드럽
세상에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가 있을까!그녀는 구경민이 평소에 하던 말이 떠울랐다.“부소경 그 녀석은 요즘 아주 딸바보가 따로 없어! 예전에 단호하고 냉철했던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다니까. 아무한테도 정을 안 주고 잘 웃지도 않던 놈이 퇴근하면 곧장 집으로 달려가. 딸내미가 보고 싶다고 말이야.”‘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가 집에 있는데 당연한 게 아닐까?’“가요, 이모. 엄마가 밑에서 기다리고 있어요.”고윤희가 준비를 마치고 나오자 신유리는 그녀의 손을 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어젯밤 엄마에게서 예쁜 이모와 백화점 쇼핑을 갈 거라는 얘기를 들었다.신유리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이 너무 좋았다.물론 유치원에도 친구가 많았다.하지만 엄마의 친구라면 자신에게도 친구라고 생각했다.그렇게 핑크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와 고윤희가 아래층 거실로 내려왔다.고윤희는 구경민과 함께 나갈 때면 항상 정숙하고 단아한 차림을 고수했다.유독 오늘만 신유리의 성화에 못 이겨 어린애들이나 입을 법한 귀여운 차림을 했다.여자 나이 서른넷이면 적지 않은 나이건만, 구경민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서 스트레스도 없이 지내다 보니 그녀는 신세희와 또래 나이로 보였다.한편, 신세희는 거실에서 구경민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구경민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을 건넸지만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신세희는 들어주는 편에 속했다. 거실에서 고윤희를 기다린 지도 시간이 꽤 흘렀지만 구경민이 질문하고 신세희는 대답을 간단하게 해주는 정도였다.“어제 사격 연습 안 힘들었어요?”“괜찮았어요.”“건축 설계도는….”신세희가 물었다.“설계도가 왜요?”“일은 순조롭죠?”“네.”구경민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무릎을 탁 치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부소경이랑 두 사람이 평소에 어떻게 지내는지 상상이 가네요.”신세희도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사실 평범해요.”지금 부소경과 함께 있을 때면 신세희도 전보다 말이 많아졌다. 회사에서 동료들과 지낼 때도 말수가 너무 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