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필무렵은 도심 한복판에 있어 관성 호텔까지 멀지 않아 두 사람은 금방 도착했다.여천우는 어디로 가려는 건지 가방을 메고 마침 호텔에서 나오고 있었다.전이진은 급히 차에서 내리면서 여운초에게 말했다.“천우 어디로 외출하려고 하는 것 같아. 내가 먼저 가서 불러세울 테니까 천천히 내려. 조심해.”“그래, 빨리 가. 나 혼자 내릴 수 있으니까.”그녀는 전이진의 차를 자주 타고 외출하여 차 구조에 이미 익숙해졌다. 그래서 자유롭게 타고 내릴 수 있게 되었다.전이진은 빠른 걸음으로 여천우에게로 향했다. 여천우는 미리 차를 예약한 건지 호텔 입구에 있는 차량으로 향했다. 그는 차 문을 열고 차에 오르려고 했다.“천우야.”여천우는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곧 시선을 전이진의 뒤쪽으로 옮겼다. 여운초가 지팡이를 짚고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이때 어떤 사람이 급히 호텔에서 달려 나오다가 여운초와 부딪쳤다.여천우는 본능적으로 달려가려고 발을 내디뎠지만, 이내 동작을 멈췄다.다행히 여운초도 아무 일 없었다. 그 사람은 여운초가 장님인 것을 발견하고는 연신 사과했다.“눈이 보이지도 않는 사람이 저렇게 오는 걸 그저 보고만 있는 거예요?”여천우는 참지 못하고 전이진에게 한마디 했다.전이진은 고개를 돌려 여운초를 바라보았다. 그는 방금 그 장면을 보지 못했기에 여운초가 하마터면 다른 사람에게 부딪힐 뻔했다는 것을 몰랐다.“운초는 여기를 자주 다녀서 혼자 천천히 걸어오는 것 정도는 괜찮아. 운초도 네가 떠날까 봐 나더러 먼저 널 잡으라고 했어. 어디 가는 길이야?”전이진은 여천우에게 물어보면서 시선은 약혼녀를 향하고 있었다.여천우는 조금 화가 났다. 방금 그 장면은 못 봤으니까 그렇다 쳐도 아직도 누나를 바라보기만 하고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까딱하지도 않는다니... ‘가서 누나를 좀 부축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평소에도 누나에게 이렇게 대해요? 누나 혼자 더듬으며 걸어오게 내버려둘 생각이에요?”여천우의 말투에는 비난이 담겨 있었다
여천우는 최씨 일가와 김씨 일가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이렇게 계획하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큰누나가 여씨 기업을 인수하자 최씨와 김씨는 아무런 이득도 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여씨 일가의 저택도 지금은 여운초가 장악하고 있기에 큰고모들은 친정에 가서 이익을 얻으려고 해도 어렵게 되었다.다른 방법이 없어서인지 고모들은 여천우의 앞에서 여운초의 나쁜 말을 억수로 해댔다.“네 누나는 독립적인 성격이라 모든 것을 나에게 의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운초도 자기가 장님인 게 나한테 영향 줄까 봐 항상 걱정하고 있어. 난 내가 볼 수 있는 범위내에서는 운초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으니까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는 게 운초에게도 좋을 거로 생각해.”전이진은 부드럽게 말했다.“신의의 제자인 정겨울 의사에게도 이제 와서 눈을 봐달라고 부탁했지만 최악의 상황도 대비해야 하잖아. 만약 겨울 의사도 회복될 가망이 없다고 말한다면 네 누나는 평생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해. 그럴 경우 난 네 누나가 크게 영향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 삶에 나쁜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스스로도 자신을 잘 돌볼 수 있다고 생각해야 나와 남은 인생을 함께할 자신을 가질 수 있을 거야”여천우는 전이진을 바라보며 조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정겨울 의사가 신의의 유일한 제자라고 하지 않았어요? 정겨울 의사조차도 우리 큰누나의 눈을 치료할 수 없대요?”큰누나의 실명은 부모님에 의한 것이다. 만약 큰누나의 눈이 치료된다면 여천우의 죄책감도 조금이나마 덜어질 수 있다.“정겨울 의사가 실력이 있긴 하지만 아직은 운초의 눈을 치료해 줄 상황이 아니라서. 그리고 반드시 눈을 치료할 수 있다고 단정 지을 수도 없잖아. 항상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고 있어야 해. 천우 넌 걱정하지 마. 너와 작은고모가 날 믿고 운초를 맡겼으니 난 반드시 운초를 행복하게 해줄 거야. 평생 잘 보호해 줄 거라고 약속할게.”여천우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나를 찾아온 거예요?”전이진은 그의 물음에 응했다.“어디 가려
전이진이 여운초를 부축하자 여운초는 부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널 좀 부축하게 해 줘. 천우가 나에게 널 돌보지도 않고 혼자 걷도록 내버려둔다고 배려심이 부족하다고 말하잖아. 길을 잘 몰라서 부딪히거나 넘어질까 봐 걱정하고 있어.”그 말에 여운초는 전이진이 자신을 부축하도록 내버려뒀다.“천우는 그래도 날 걱정하고 있네...”“너희들은 친남매잖아.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당연히 널 걱정하지.”여운초는 걸으면서 말했다.“천우는 착한 아이야. 어릴 때부터 날 존중하고 배려해 줬어. 다행히 부모님이 잘 보호해 줘서 나쁜 습관에 물들지 않은 거야.”예전에 여운초는 비록 여천우에 대해 태도가 좋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동생을 걱정하고 있었다.여씨 집안에서 그녀를 정말 가족처럼 대한 사람은 이복동생인 여천우 뿐이었다.커피숍에 들어간 후 여천우는 커피 석 잔을 주문했다.자리에 앉은 여운초는 손을 뻗어 동생을 더듬었다.여천우는 피하고 싶었지만 큰누나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피할 생각을 단념했다.큰누나의 눈은 매우 예뻤다.둘째 누나는 큰누나의 눈이 예쁜 것에 매우 질투했다. 둘째 누나는 세 사람 모두 같은 어머니의 배에서 태어난 건데 왜 여천우와 여운초만 눈이 이쁘냐고 말한 적도 있다. 둘째 누나의 눈은 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쌍꺼풀도 없었다. 둘째 누나의 쌍꺼풀은 후에 수술하여 만든 것이다. 비록 쌍꺼풀 수술을 하였지만 여전히 여운초의 타고난 눈처럼 예쁘지는 않았다.이렇게 예쁜 눈은 거의 11년 동안 아름다운 세상을 보지 못했다.밝은 세계에서 어두운 구렁텅이로 추락한 몇 년 동안 큰누나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굳은살이 박인 두 손이 부드럽게 자기 얼굴을 만지자 여천우는 마음이 누그러지고 말았다. 굳었던 얼굴빛도 다소 누그러져 누나가 얼굴을 만지도록 내버려두었다.그러다 전이진이 쏘아보는 질투의 눈빛이 느껴졌다.‘질투심이 너무 강한 거 아니야? 동생마저 질투하다니...’여운초의 눈에 여천우는 아직 어린아이였다. 18세 미만이라 아직 성년이 되지
잠시 침묵에 잠겼던 여운초는 부드럽게 말했다.“천우야, 여씨 그룹은 우리 여씨 일가의 회사니까 도와준다 해도 네가 누나를 도와줘야 하는 거야. 여씨 집안의 재산에는 네 몫도 있다는 걸 잊지 마. 이제 개학하면 공부 열심히 해, 딴생각하지 말고. 어른들의 일은 어른들이 알아서 할 테니까 학교에서도 돈 너무 아끼지 말아. 부족하면 누나랑 말해, 계좌로 돈을 보내줄 테니까.”여천우는 누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갑자기 물었다.“정말 재산을 나에게 나눠줄 생각이야?”다른 가족들은 모두 여천우에게 여운초는 부모님을 원망하기 때문에 절대 여씨 그룹을 독점할 것이라고, 여천우가 간섭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절대 재산을 나눠주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설령 같은 어미니 배에서 태어난 남매라고 할지라도 말이다.하지만 어머니가 큰누나에게 한 행동을 봐서는 큰누나의 마음속에는 친어머니가 백설 공주의 계모보다도 더 악랄한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여천우는 생각했다.“아야.”여운초가 갑자기 여천우의 얼굴을 세게 꼬집었다.여천우는 화가 나서 누나를 노려보며 비꼬아 말했다.“내 의심이 맞는 거지? 누나가 지금 나를 대하는 태도는 다 가식인 거지? 내가 아직 학교에 다니지만 않았다면 어떻게 해서던 날 감옥에 들여보냈을 거야. 그러면 여씨 집안의 전부를 가지게 되니까. 누나 아버지 대신 복수하기 위해서 말이야.”여운초는 이번에는 동생의 얼굴을 꼬집는 대신 뺨을 때렸다.여천우도 피하지 않고 뺨을 그대로 한 대 얻어맞았다. 그의 얼굴은 화끈거리고 아파 났다. 누나를 보는 그의 눈은 빨개졌지만 고집스럽게 눈물을 흘리려 하지 않았다.“여천우! 날 이렇게까지밖에 생각하지 않는 거니?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다 믿을 수 있어도 내가 하는 말은 믿기지 않는 거야?”여운초는 동생의 의심에 화가 났다.전이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여운초의 손을 잡고 위로했다.“운초야, 천우가 하는 말은 거칠더라도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 아직 어려서 많은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 이해하는
전이진은 일어나서 지팡이를 들어 여운초의 손에 쥐여준 다음 그녀를 부축하고 갔다.덩달아 일어선 여천우는 돌아가는 누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벌리고 작은 소리로 불렀다.“누나.”여운초는 듣지 못했는지, 아니면 듣고도 못 들은 척하는 건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돌아서지도 않았다.여운초가 커피숍을 나서려 하자 머뭇거리던 여천우가 갑자기 의자를 밀치더니 빠른 걸음으로 뒤쫓아오며 큰 소리로 불렀다.“누나.”이번에 여운초는 걸음을 멈췄다.그러나 여전히 돌아서지 않았다.커피숍 안의 사람들은 모두 남매에게 시선을 돌렸다.“부족한 것 있으면 가서 사, 비행기 표도 예약하고. 출발하는 날, 운전기사를 보내 데리러 올게. 원한다면 집으로 돌아와도 돼, 거긴 언제든지 너의 집이니까.”여운초는 말을 마친 후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누나, 미안해.”여천우는 큰소리로 사과했다.방금 큰누나를 그렇게 비꼬지 말았어야 했다.여천우의 기억 속에 여운초는 덤덤했고 때로는 냉담하기도 했다. 항상 그를 상대하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하지만 그의 거듭되는 관심 하에 큰누나도 차차 그를 동생처럼 대했고, 그에 대한 사랑도 차가운 표정 속에 숨겨져 있었다.남들이 하는 몇다디에 큰누나를 의심하고 비꼬았다가 뺨을 맞은 자신이 뺨을 맞아도 싸다고 생각되었다.전이진이 그에게 큰누나가 잘못된 일을 하였냐고 물었었다.그 물음에 여천우는 당당히 큰누나가 잘못한 것이라고 답할 수 없었다.부모님과 둘째 누나가 한 일은 모두 불법적인 행동이라 큰누나가 고발하지 않았더라도 법적 처벌을 피할 수는 없을 테니까.어머니와 둘째 누나는 모두 하예정을 해하려다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고 아버지는 친동생을 해한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여천우는 자기 아버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하지만 아버지는 아직 살아계시고 재판날짜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다.큰누나도 그처럼 이미 저세상으로 간 아버지가 그립고, 생각하면 마음이 아플 것이다. 큰누나의 친아버지이자 그의 둘째 삼촌은 부모
“내가 회사를 관두면 네가 관리할 수 있겠어? 학교에 다니면서 사업까지 도맡을 수 있겠어? 그건 무리잖아. 네가 회사를 잘 관리하지 못하면, 고모네들이 회사를 관리해 주겠다고 자진할 거야. 회사를 손에 넣은 이상 다시 돌려줄 것 같아? 돌려준다고 해도 빈 껍데기뿐일걸.”여운초는 말을 마친 뒤 다시 전이진에게 말했다.“가자.”“그래.”전이진은 약혼녀를 자상하게 부축하고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둘은 호텔에서 나온 후 이내 멀리 떠나갔다.여천우는 더 이상 쫓아가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미안함 가득한 얼굴로 큰누나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한참 후 그는 시선을 거두고는 우울한 표정으로 자리에 돌아가 앉아 말없이 커피를 들고 한 모금 마신 후 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커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누나한테 맞은 얼굴을 만져보니 얼얼한 게 아마 부은 것 같았다.‘너무 화가 나서 나를 때린 걸 거야.’여천우는 뺨을 한 대 맞았지만 큰누나를 원망하기는커녕 점점 더 죄책감을 느꼈다. 자신이 너무 나쁜 놈이라고 생각되었다. 누나에게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을 그렇게나 많이 했으니까.“천우, 천우야. 여기 있었네. 네 룸에 가서 문을 두드렸는데 응답이 없어서 아래층으로 내려와서 한참이나 찾았어.”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여천우는 즉시 가방을 메고 일어나 의자를 떠나려고 했다.“천우야.”최성욱은 여천우를 붙잡고 입을 열었다.“어디 가? 앉아봐, 형이 커피 살게.”그는 여천우를 제자리로 돌아가 앉히려 했다.여천우는 그의 손을 힘껏 뿌리치며 차갑게 말했다.“형님, 저는 커피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리고 밖에 나가볼 일이 있어서요.”여천우는 다시 밖으로 나가려 했다.최성욱은 또 그를 붙잡더니 방금 앉았던 테이블로 끌고 갔다.그는 사실 전이진이 여운초를 부축해 커피숍을 나가는 것을 보았다. 여운초가 사촌 동생을 찾아왔을 거로 짐작했다. 그는 피해 있다가 전이진과 여우초가 멀리 떠나는 걸 보고서야 다시 여천우를 찾아온 것이다.제자리로 돌아와 앉은 여천우의 애티
최성욱의 질문에 여천우도 숨기지 않고 큰누나가 때린 것이라 인정하고는 감히 여운초를 찾아갈 담이 있냐고 반문했다.최성욱은 말이 막혀 잠시 침묵하다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큰누나가 때린 거였어? 너를 찾아왔었어? 왜 찾아온 거래? 왜 널 때린 거지? 쯧쯧, 네 누나 정말 지독하네, 얼굴 반쪽이 다 부었잖아. 천우야, 이제 네 큰누나가 어떤 사람인지 알겠지? 평소에는 아주 담담해 보이지만 사실 마음이 독한 사람이야. 눈이 보이지 않아도 이렇게 독한데 눈을 치료해서 시력이 회복하게 되면 얼마나 더 독해질지 몰라. 그때가 되면 너는 살길도 없게 될걸. 네 누나와 네 부모님의 사이에는 아버지를 죽인 원한이 있다는 걸 잊지 마. 네 부모님에게 원한이 있는데 너는 놔줄 거라고 장담할 수 없겠어?”“...”“지금 너에게 아주 잘해준다고 해도 그건 긴장을 늦추려는 계략일 거야. 때가 되면 너에게 손을 대서 모든 것을 잃게 할지도 몰라. 어쩌면 널 불법적인 일을 하도록 유도한 후에 신고해서 감옥에 들여보내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만약 너까지 들어간다면 여씨 집안의 모든 것은 정말 네 누나의 수중으로 들어가는 거야.”여 대표 부부는 아직 형을 선고받지 않았지만 곧 재판일이 다가오자 최씨 집안이나 김씨 집안은 모두 긴장하고 초조해하며 여기저기 알아보았는데, 여 대표 부부의 결과는 좋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이제 그들이 나서서 여운초를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여운별은 형기가 만료되어 풀려난다고 해도 여운초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도 몇 년의 형을 선고받았다.그녀가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여운초는 진작에 여씨 그릅을 완전히 장악했을 것이다.지금 최씨와 김씨는 더는 여씨 그룹의 비즈니스에 손을 댈 수 없게 되었다.그들은 라이벌 그룹을 이용해 여씨 그룹을 상대할 생각까지 했었는데 안타깝게도 모두 여운초와 한동호에 의해 해결되었다. 또한 전씨 그룹까지 옆에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니... 전씨 그룹은 여씨 그룹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여씨 그룹의 라이벌을 노리고
최성욱은 더 이상 여천우를 붙잡지 않고, 그가 카페를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그가 떠난 후, 최성욱은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가 전화를 받자, 그는 말했다.“어머니, 여천우는 여전히 고집이 세요. 하지만 여천우가 여운초와 다툰 것 같아요. 여천우가 여운초에게 뺨을 맞아서 얼굴이 반쯤 부었거든요.”여미란은 이 말을 듣고 약간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우리 방법이 효과가 있다는 뜻이야. 너희는 여천우를 좀 더 챙기고, 그의 앞에서 여운초의 나쁜 점을 말해. 납매의 관계를 망가뜨렸는데 여천우가 신경 쓰지 않을 리가 없지.”그녀가 여운초와 여러 차례 대화를 시도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주로 그들이 여운초를 항상 경시했기 때문이었다. 큰오빠와 친하게 지내며 오빠에게서 받은 이득이 더 컸기 때문에 자연히 여운초에게 잘해줄 이유가 없었으니까.여운초가 여씨 그룹의 사업을 맡자마자, 최씨와 김씨를 겨냥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여미란은 여운초를 몹시 미워했다.여운초가 어떻게 그런 행운을 가졌는지 모르겠지만, 장님인 그녀가 전씨 가문의 둘째 아들의 사랑을 받을 줄이야. 이전에는 믿기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전이진이 여운초와 약혼했고, 또 약혼식마저 성대하게 치른 걸 보니 실감이 났다.약혼식에 관성의 유력 인사들을 초대했지만, 유독 최씨와 김씨는 초대하지 않았다. 이는 여운초 본인도 두 가문을 미워한다는 것을 의미했다.이는 두 가문을 관성에서 웃음거리로 만들었다.“알겠어요. 하지만 여천우도 우리가 자꾸 그런 말을 하는 걸 싫어해요. 아까 저랑도 말다툼했고, 지금은 떠났어요.”여미란은 말했다.“아직 사회에 발을 들이지 않은 아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거지. 그가 우리 말 듣기 싫어하면, 당분간 그런 말 하지 마. 이제 곧 개학이잖아. 여천우가 필요한 게 뭐 있는지 보고 같이 사주도록 해.”“개학 전에 그가 합격한 대학에 등록하러 데려다주면 화가 풀릴 거야. 아이 하나 달래는 거야, 엄마는 네가 잘할 수 있을 거라 믿어.”“그리고 그 장
원림성 A시.전창빈은 모든 요리를 다 하고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그는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온종일을 바쁘게 보냈다.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이 전부 오늘 저녁 식사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저녁이 되어서야 주인공이 돌아왔다.잠시 기다린 후, 전이진이 오후 내내 준비한 요리들이 하나둘씩 하인들에 의해 운반되어 나갔다. 물론 그는 나갈 필요가 없었다.선우민아가 그의 요리를 맛본 후 만족스럽다면 전창빈을 불러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통보도 없이 주방에 머물다가 선우씨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고 떠나면 집으로 돌아야 한다.비록 전창빈은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지만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도 선우민아의 면담 요청이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여전히 뉴스를 보며 담담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조금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그는 송일우처럼 세 번이나 도전하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송일우는 몇 년이나 도전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 실패한 뒤로는 다시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점점 들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한편 선우씨 가족들이 이미 식사를 마치고 있었다.선우민아도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선우민아의 어머니 한경주가 관심 있게 물었다.“민아야, 이번 지원자가 만든 음식은 어때?”선우민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한경주는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생각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채용하는 게 어때?”선우민아의 남동생 선우민기는 의자에 털썩 앉아 배를 만지며 말했다.“누나, 나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이번 요리는 정말 맛있었어. 오랜만에 이렇게 배불리 먹었어.”선우민아는 손을 뻗어 선우민기의 배를 가볍게 톡 치며 눈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너는 굶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많이 먹었어? 이번만 먹고 다음 끼니는 못 먹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 좀 앉아 이따
도아영이 홀로 관성까지 찾아온 것도 전이혁을 위해서였다.관성에서 그녀의 안전은 그의 책임이다.앞으로 도아영과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할머니께서 정해주신 아내 후보였다. 혹여 도아영이 관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도씨 가문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은 물론 전씨 할머니께서도 그를 혼쭐 내실 것이 분명했다.전이혁은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태윤이 전화를 받자 전이혁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형, 오늘은 형의 스위트 룸에서 하룻밤 자도 돼?”“안방만 빼고 다른 방은 마음대로 써.”전태윤은 거절하지 않았지만 안방 사용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평소 이곳에 머무를 때면 항상 안방을 사용했기 때문이다.“알았어. 고마워. 형.”“도아영 씨는 괜찮아?”“심하게 취해서 토하다가 물 달라고 하길래... 떠날 수 없어서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려고. 새벽에 아영 씨를 룸으로 데려다준 후 떠날 계획이야. 같이 묵었다는 사실을 알면 나에게 달라붙을까 봐 겁이 나.”전태윤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진심으로 도아영 씨와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아. 그분 명성을 망가뜨리면 안 되지.”전이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형,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영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이고 할머니의 눈썰미는 틀린 적이 없으셨지. 도아영 씨와 함께 지내보니 나랑 잘 맞는 것 같긴 한데... 왠지 그 ‘여우’랑 함께 있을 때가 더 편안하단 말이야.”“‘여우’라고?”“내 꿈에 자꾸 등장하는 그 여자 말이야. 별명이 ‘여우 같은 여자’거든. 화장을 잘하는 건지... 본명도, 고향도, 행적도 전혀 알 수가 없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서 나도 자꾸 정복하고 싶어져.”전태윤이 말을 이었다.“이름도 모르는 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분이 혹시 만성의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과 연관 있는 거 아니야?”만성 남씨 가문의 큰 사모님은 모연정의 사촌 형수이자 A시 허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인데 그녀도 이중생활로 유명한 인물이다.허씨 가문
“네.”우빈이는 전태윤의 말을 믿으며 다시 물었다.“이모부, 그 모기는 어디 갔어요?”전태윤은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 우빈에게 보여주었지만 우빈은 모기를 찾을 수 없었다.“날아갔어. 이모부가 조금 늦는 바람에 잡지 못했어.”“그래요?”우빈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대답했다.하예정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우빈이가 아무리 영리해도 결국은 어린아이일 뿐, 어른을 이길 수는 없었다.“우빈아, 이모부는 일하러 가야 해. 우리도 집에 가자. 이모부한테 잘 가라고 인사해야지.”우빈은 바로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이모부, 잘 가요!”“집에 가서 빨리 쉬고 이모의 말도 잘 듣고. 이모를 귀찮게 하면 안 돼. 말 잘 들으면 겨울방학에 예진 리조트로 가서 용정이랑 놀게 해줄게.”우빈은 급히 약속했다.“절대로 이모 귀찮게 안 하고 말 잘 들을게요.”“여보, 빨리 일하러 가요. 우리도 갈게요.”하예정은 전태윤에게 일하러 가라고 재촉한 뒤 운전 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전태윤은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사랑하는 아내를 태우고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차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비로소 자신의 차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전이혁과 도아영의 일에 대해서 전태윤은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도아영이 취하면 전이혁이 그녀를 방으로 데려다줄 것이니까.전이혁은 도아영을 그녀의 방까지 데려다주고 외투와 양말을 벗겨 준 뒤 편안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그가 떠나려던 참에 도아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옆으로 토해버렸다.전이혁이 쓰레기통을 가져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미 바닥과 침대를 모두 더럽혔다. 그는 이 광경을 보자 정말로 토할 것 같았다.흠... 전이혁도 토했다. 그는 입을 막은 채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정신없이 토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나왔다.도아영은 시원하게 토한 뒤 다시 침대에 철썩 누워버렸다.전이혁은 침대 반대쪽으로 돌아가 구토물을 보지 않으려 애썼고 최대한 빨리 도아영을 일으켜 안고
도아영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꿈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결국 취했네. 내일 아침이면 정말 고생할 텐데.”전이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도아영의 이마를 쿡쿡 찌르더니 체념했는지 그녀를 안아 들어 로얄 스위트룸 나섰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참! 난 도아영 씨가 어느 룸에 묵고 있는지 모르는데.'그는 걸음을 멈추고 도아영을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부축하면서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하예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형수님, 도아영 씨가 묵고 계신 룸 번호를 아세요?”하예정이 대답했다.“저도 잘 몰라요. 그냥 관성 호텔에 묵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어요. 아영이가 취했어요? 잠깐만요. 제가 알아볼게요.”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말했다.“여보, 아영의 룸 번호를 알아봐 줘요. 취했대요. 이혁 도련님이 아영이를 모셔다드리려고 하는데 룸 번호를 몰라서.”전태윤은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하예정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우빈의 손을 잡고 걸어 나갔다가 이내 돌아왔다. 그는 이미 전이혁과의 통화를 끝낸 상태였다.“알아봤어요?”“내가 이혁한테 이미 알려줬어.”전태윤은 여전히 표정이 굳은 표정으로 하예정에게 말을 건넸다.“아까 내가 물어볼 때 프런트 직원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내가 바람피우는 거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내 동생이 도아영 씨를 데려다주기 위해 그러는 거라고, 내가 대신 물어보는 거라고 설명까지 했어.”하예정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남편의 팔을 다정하게 끌며 달콤하게 웃었다.“설명했으면 그만이죠. 사람들이 뭐라 생각하든 우리 감정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걸요. 제가 의심하지 않으면 되잖아요.”“다음부턴 이런 일 나에게 시키지 마. 이혁의 일은 이혁이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둬.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나도 예전엔 아무 도움 없이 오직 내 진심과 깊은 정으로 너의 마음을 얻었는데.”“알았어요.
전이혁은 침묵했다.도아영은 눈썹을 치켜들며 물었다.“왜요? 전이혁 씨는 그분을 보호하려고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저는 공정하게 경쟁하고 싶을 뿐이에요. 수작 부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런 건 못해요. 남자 하나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고. 제가 이렇게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라서 한번 도전해 보는 거예요. 다른 남자였다면 그냥 양보했을 거예요.”도아영이 눈여겨본 건 전이혁이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전이혁의 뒤에 있는 전씨 가문이 마음에 들었다. 전씨 가문의 훌륭한 가풍은 소문이 자자했으니까.전씨 가문의 어르신들은 사상이 모두 개방적이어서 후손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지지해 주었다.심지어 반대한다고 해도 다른 집안 어르신들처럼 억지로 가로막지는 않았다.게다가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특히 아내를 아끼기로 유명했고 한번 정한 인연과 결혼은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이런 남자들이 흔치 않았다. 여자라면 누구든 한결같은 남자와 결혼하고 싶을 것이다.하여 도아영은 꼭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정말 안 된다면 그건 그녀와 전씨 가문의 인연이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애초에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한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것 같았다.도아영은 평생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였다.전이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는 ‘여우’의 이름을 몰랐으니까. 마음의 절반을 뺏긴 주제에 정작 상대방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니...도아영은 그가 연적을 보호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더는 따져 묻지 않았다.“전이혁 씨가 그녀를 보호할수록 저는 더 궁금해지네요. 도대체 누가 저 도아영을 이길 수 있는지. 근데 괜찮아요. 언젠가는 제 연적이 누군지 알게 될 거니까.”그녀는 전이혁에게 잔을 들며 말했다.“전이혁 씨, 자! 우리 한잔하죠.”전이혁은 잔을 들고일어나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그리고 도아영이 단숨에 그 술을 들이마시는 걸 지켜보았다.도아영은 더 이상 전이혁과 사랑에 관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아영은 요즘도 이런 식으로 자식들의 혼사를 정하는 어르신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요즘은 연애와 결혼이 자유로운 시대인데 아직도 자식들의 혼사를 결정해 주는 집안이 있다고?’도아영은 곧바로 자기 집 안 어르신들을 떠올리더니 다시 묵묵히 조금 전의 의문을 거두어들였다.재벌 가문에서는 많은 혼사가 부모님들에 의해 결정되었고 대부분 어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곤 한다.그들에게는 결혼의 자유가 많지 않았고 가장 중요한 건 이익뿐이었다. 두 가문 사이에서 이루어진 혼인으로 인해 두 회사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주느냐가 가장 관건이었다.“그럼 전이혁 씨 할머니께서 왜 저를 선택하셨어요? 저는 할머니를 본 적도 없는데.”도아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그녀는 전씨 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아마 봤을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하지만 전씨 할머니는 도아영을 유심히 관찰하고 알아본 뒤에야 전이혁의 미래 아내로 선택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진을 전이혁에게 건네주며 도아영에게 구애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저도 모르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나이가 많으시지만 아직도 자주 돌아다니시니까. 우리가 감당하기도 힘들 정도로 말이죠. 다행히 할머니의 건강은 좋으시고 관리도 잘 되어서 겉으로 보기엔 예순 정도로 보이세요.“전이혁도 할머니가 어떻게 도아영을 선택하셨는지 모른다.도아영만 궁금한 게 아니라 고현과 여운초도 전씨 할머니께서 언제 그녀들을 눈여겨보셨는지 궁금해했었다.“그래서 저를 알게 되었고 저를 쫓아다녔던 거예요? 전이혁 씨가 저에게 한 행동이 애정 공세가 아니라고 하면 당신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죠?”전이혁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정해요. 제가 당신에게 구애했다는 것을.”전이혁은 도아영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모든 면에서 그와 잘 어울렸으니까.하지만...“그런데 왜 한동안 사라지고 저를 무시했어요? 일부러 관심을 끌려는 작전이었던 거예요?”전이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전이혁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너무 늦었다.그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자리에 앉아서 몸만 돌려 옆에 앉은 도아영을 돌아보았다. 전이혁의 깊고 검은 눈빛은 도아영이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했다.이때 도아영은 몸을 굽혀 천천히 전이혁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전이혁은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도아영이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는 몰랐지만 강하지 않은 은은한 향기가 너무 좋았다.“전이혁 씨.”도아영은 그의 이름을 부드럽게 불렀다.“말해봐요, 듣고 있어요.”그도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답했다.“제가 한 가지만 물을게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저를 대하는 거예요? 저에게 잘해주는 게 저를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저에게 애정 공세를 하면서 왜 또 저를 무시하는 거죠?”전이혁은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한 가지 물음보다 더 많이 물어본 것 같은데.”잠시 침묵이 흐른 뒤로 전이혁이 말을 이었다.“저도 제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다고 하면 도아영 씨는 저를 나쁜 놈이라고 욕할 거죠?”그는 그녀에게 구애하고 싶었다.전이혁은 도아영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할머니의 눈썰미가 결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없었다면 전이혁은 도아영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도아영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겼다.하지만 그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당당함, 대담무쌍함, 의협심, 기발한 성격, 고요할 때의 차분함과 활발할 때의 성격은 전이혁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던 것이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바로 그 ‘여우 같은 여자' 말이다. 도아영 같은 재벌가 따님이 아니라.도아영의 아름다운 눈이 반짝이며 전이혁이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할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전이혁을 내려다보았다.전이혁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순간 도아영의 동작과 표정이 마
“예정 언니, 벌써 다 드셨어요?”하예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우리가 좀 빨리 먹는 편이긴 하지. 평일엔 일이 바빠서 먹는 시간도 쪼개 써야 하다 보니 빨리 먹는 버릇이 생긴 것 같아.”도아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하예정은 우빈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로얄 스위트룸을 빠져나왔고 거기에 문을 닫아주는 센스까지 보였다.전태윤은 경호원들에게도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지시했다.전이혁과 도아영은 이 모든 것이 하예정이 그들에게 특별히 남겨준 기회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얄 스위트룸 안에는 전이혁과 도아영만 남았다.도아영은 와인잔을 들어 우아하게 음미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전이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역시 피할 수 없었군.'전이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도아영 씨,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도아영은 대답 대신 잔을 기울이며 그를 바라만 보았다.‘정말 잘생겼어...'그녀는 전씨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잘생겼다는 소문을 들었다. 실제로 본 전태윤도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지만 지나치게 차가운 인상에, 인사할 때 잠깐 마주친 뒤로는 도아영을 전혀 쳐다보지 않았다.오직 하예정만 바라보는 모습에서 ‘아내 바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태윤의 차가운 카리스마와 달리 전이혁은 훨씬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전태윤 앞에서 전이혁은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단둘이 있을 때면 전이혁의 우수함이 빛을 발했다. 그는 도아영이 만난 남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였다.전이혁이 잘해줄 때면 도아영은 그에게 정말 빠져들 것만 같았지만 그녀를 소홀히 대할 때면 화가 치밀어 주먹으로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을 지경이다.‘내가 무슨 애완동물도 아니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애완견이야?'마음 내키면 그녀와 잠시 놀아주다가도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버리는 그의 태도에 도아영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전이혁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전이혁 씨, 왜 자리
하예정은 두 사람 사이의 암투를 모른 척하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좋은 술 두 병 시킵니다. 저는 임신 중이라 못 마셔요. 우리 배 속의 아기 건강 생각해서라도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거든요. 태윤 씨도 술을 잘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이혁 도련님이 도아영 씨랑 같이 마실 수밖에 없네요. 도련님, 아영 씨를 잘 모셔야 해요. 저와 태윤 씨가 있으니 도련님이 취해도 괜찮아요. 저희가 책임질게요.”하예정은 도아영에게 윙크했다. 도아영은 슬쩍 OK라는 사인을 보내며 자신 있다는 듯 웃었다.하예정은 그제야 도아영의 주량이 꽤 괜찮음을 눈치채고 안심했다. 하예정은 도아영이 전이혁에게 꼬치꼬치 캐묻다가 술에 취할까 봐 걱정하고 있던 참인데 도아영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니 그제야 시름을 놓았다.술과 여러ㅓ 요리가 나오자 도아영은 직접 전이혁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자! 전이혁 씨, 건배하죠.”전이혁은 잔을 받지 않고 오히려 도아영의 잔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도아영 씨, 공복에는 술에 취하기 쉬워요. 이 술은 독해서 마실 땐 괜찮다가도 나중에 훅 가버릴 수 있어요. 먼저 요리들을 좀 드시고 또 국물도 한 그릇 드세요.”그 말과 함께 전이혁은 도아영에게 국물을 떠주었다.“국물부터 드셔보세요.”도아영은 평소 국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이혁이 떠준 거라 예의상 한 수저 떠먹었다.“하 대표님, 이 국물이 정말 맛있네요. 저 원래 국물을 잘 안 마시는데 이 국물은 진짜 맛있어요.”“그럼 많이 드세요. 우리 집은 항상 식사 때 국물을 준비하는 게 습관이에요.”하예정은 우빈에게도 국물을 떠주며 물었다. 식습관은 바꾸게 하기 어려운 법이다.도아영은 관성의 사람이 아니라서 관성의 식습관과 달랐다.국물을 마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이 국물이 맛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니 그 국물이 정말로 맛있었던 모양이다.“몇 살이에요? 동갑인 것 같은데.”“하 대표님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제 생일은 연말이라 하 대표님보다 몇 개월 어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