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우빈이를 데리고 놀이터에 놀러 갔어요.”“아빤 집에 가셨어?”“네. 그리고 아빠가 내일은 우빈이를 데리고 동물원에 놀러 간다고 하셨어요. 이모, 내일 같이 동물원에 안 가실래요?”오늘 하루 종일 아빠와 함께 즐겁게 논 주우빈은 기분이 좋아서 재잘거리며 아빠 얘기에 신이 났다.“이모는 내일 바비큐 먹으러 가. 엄마도 가는데, 우빈이는 안 갈래?”주우빈은 생각지도 않고 바로 대답했다.“저도 갈래요. 그럼, 아빠랑 동물원에 안 갈래요.”주우빈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야 하예정은 심효진과 성소현에게 전화해서 내일 여행 겸 같이 서원 리조트에 가자고 약속했다.서원 리조트는 경치가 그림처럼 아름다운 곳이라고 들었다. 물론 누구나 서원 리조트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여보, 어서 와서 밥 먹어.”전태윤이 마지막으로 볶은 두 가지 요리를 들고 주방에서 나와 테이블에 차려놓고는 베란다를 향해 소리쳤다.하예정은 급히 성소현과 통화를 끝내고 몸을 일으켜 키친룸으로 들어갔다.테이블에 다가간 하예정은 자신이 좋아하는 새우가 있는 것을 보고 손을 뻗어 새우를 집어 입에 넣었다.“새우 껍질을 까서 먹어.”“까기 귀찮아요.”그녀가 다시 손을 뻗어 음식을 집으려고 하자 전태윤은 하예정의 손을 가볍게 두드렸다. “다 큰 어른이 아직도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다니.”하예정은 히죽 웃으며 다시 새우 한 마리를 집어 입에 넣고 나서야 주방에 들어가 수저를 가져왔다.부부가 식사하려고 의자에 앉자마자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더니 전씨 할머니가 들어오셨다.형기로운 음식 냄새를 맡은 전씨 할머니가 다가와서 물었다.“밥 먹고 있었어? 맛있는 냄새가 나는구나.”전씨 할머니가 주방에 들어가 그릇과 수저를 들고 나오며 말했다.“내가 먹을 복이 있다니깐.”“할머니.”하예정은 전씨 할머니에게 의자를 당겨 드린 후 할머니의 손에서 국그릇을 받아 국을 떴다. 할머니의 식사량을 잘 알고 있는 전태윤은 밥그릇에 밥을 절반만 담았다. “할머닌 오늘 집에 안 계시고, 하
전태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두 여자를 바라보았다.“여보, 국물 먼저 먹어.”하예정이 웃으며 말했다.“다행히 방금 국물을 먹지 않았으니 말이지, 아니면 모두 뿜어냈을 지도 몰라요.”“밥이나 먹자.”전씨 할머니가 웃으며 좋아하는 음식을 집어 맛을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예정아, 이 음식은 네가 한 거 아니지? 맛이 예전과 조금 다른 거 같은데.”“맛없어요?”전태윤이 말했다.“음식이 입에 안 맞으시면, 지금 호영이에게 전화해서 할머니를 호텔에 모시고 가서 산해진미를 대접하게 할게요. 어쨌든 여기 반찬은 할머니 입에 안 맞으니까.”“말투를 보니 태윤이가 요리한 게 틀림없구나.”전씨 할머니는 아무렇지 않게 계속 음식을 집으면서 하예정에게 말했다.“예정아, 태윤의 요리 솜씨가 별로 늘지 않았구나. 주말이면 하루 세 끼를 모두 시켜라. 연습을 많이 해야 음식도 맛있게 할 수 있는 거다.”전태윤이 부르튼 어조로 말했다.“할머니께선 불만을 토하시면서도 계속 드시네요.”“넌 예전에 요리를 전혀 할 줄 몰랐잖니. 만약 예정이가 아니었다면 이 할미가 언제 네가 만든 요리을 먹어보겠니? 기회가 있을 때 많이 먹어야지. 물론 5성급 요리사의 수준은 아니지만 먹을 수는 있다. 먹고 죽지는 않겠지.”“...”“할머니, 우리 내일 바비큐 먹으러 가요.”하예정이 할머니와 손자가 끊임없이 말다툼할까 봐 제꺽 화제를 바꾸었다.“너희 젊은이들이나 가거라, 이도 없는 늙은이가 뭘 먹는다고?”할머니는 두 사람 사이에 끼고 싶지 않았다.전씨 할머니는 지금 넷째 손자의 신붓감을 물색하고 있는데, 아직 목표가 없다.집에 장가보내야 하는 손자가 너무 많아서 걱정이다.“바비큐 먹으러 서원 리조트로 가요.”전태윤이 한마디 덧붙였다. “처형도 가요.”“예진이도 간다고? 그럼 할머니도 너희들과 함께 가서 구경할 테니, 좀 있다가 부모님께 전화해서 잘 준비하라고 해라. 예진이는 비록 젊었지만 친정 가장을 대표하잖아.”“알겠어요.”하예정은 할머니와 손자의 대화를 듣
전태윤이 점점 야위어 가고 위가 나빠져서 식사도 제대로 못 하자 마음이 아파 난 하예정은 그제야 그가 신분을 감추고 그녀를 속인 일을 용서해 주었다.이미 코트를 입은 하예정이 전태윤의 코트를 가지고 방에서 나왔다.“오늘 밤은 바람이 세요. 꽃샘추위가 여전하니 코트를 입어요.”하예정이 다가와 전태윤에게 자상하게 코트를 걸쳐주자, 그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전씨 할머니는 흐뭇한 미소를 띠며 다정하게 손을 잡고 바람을 쐬러 나가는 젊은 부부를 바라보았다.... 주씨 집 셋방.문을 여는 소리를 듣고 마중 나온 김은희가 아들을 보고 관심 조로 물었다.“어떻게 됐어? 문 열었어? 예진이가 우빈이를 데리고 어디 간 거야? 우리가 시끄럽게 굴어서 예진이가 우빈이를 데리고 숨은 건 아니지?”그녀는 아들이 서현주와 헤어지고 다시 하예진과 재혼하기를 바라고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희망이 크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여 이젠 손자마저 잃을까 봐 두려웠다.만약 하예진이 주우빈을 데리고 숨어버리면, 그들은 어떻게 찾아야 할지?주형인이 나지막한 소리로 물었다.“엄마, 현주는?”“반찬 사러 나갔다. 밥을 하랬더니 냉장고에 음식 재료가 너무 적다고 하면서 반찬 몇 가지를 사 오겠다고 하더라. 정말 살림할 줄 하나도 몰라. 너희 부부는 지금 직장이 없어서 수입도 없는데, 여전히 절약하는 법을 모르니.”김은희는 새 며느리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안도의 숨을 내쉬며 집으로 들어간 주형인이 주방에 가서 냉장고를 열어보니 냉장고에는 야채와 계란 세 알뿐이었다. 재료가 너무 적긴 했다.“엄마 아빤 집에서 그렇게 한가하신데 장도 좀 보고 그러실 거지. 매일 야채와 계란만 먹으니 나도 견디기 어려운데, 현주는 더 말할 것도 없잖아.”부모가 요리하는 한, 끼니마다 야채 한 그릇과 삶은 계란 세 알뿐이다.삶은 계란 3알마저도 아빠, 엄마와 주형인이 1알씩이고, 서현주 몫은 없다.한두 번은 참을 수 있었지만, 횟수가 많아지니 서현주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소파에 앉아 잠시 침묵을 지키던 주형인이 입을 열었다.“노 대표가 예진이를 좋아하는 것 같아. 아니, 진짜 좋아하고 있어. 예진이를 좋아하는 게 아니면 왜 자꾸 가게에 가겠어?”“형인아, 내 말 좀 들어봐. 예진이가 꾸린 토스트 가게는 아침 손님이 많아서 장사가 잘될 거야. 예진이는 워낙 요리 솜씨가 좋고 부지런하고 살림살이도 잘하니... 지금 살도 빠져서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졌더라. 노 대표 같은 남자도 좋아서 쫓아다니는 걸 보면, 예진이가 여전히 몸값이 꽤 간다는 걸 알 수 있어.”김은희는 이 기회에 아들에게 권유했다.“중요한 것은 예진이에게 대단한 친정 식구들이 생겼다는 거야. 하예정이 전씨 가문 사모님인 건 말할 것도 없고, 예진이의 이모만 보더라도 대단한 부잣집 사모님이더라. 엄마가 여기저기 수소문해 봤는데 그 성씨 사모님이 성씨 일가에서 매우 존경받고 있다고 하더라.”“그래서요?”“네가 예진이와 재혼하면 성씨 가문이든 전씨 가문이던 모두 너한테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야. 네가 직접 회사를 차리고 사장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김은희는 꿈도 야무졌다. “서현주는 젊고, 예쁘고, 몸매도 좋아서 애인으로는 좋지만, 좋은 마누라는 될 수 없어. 너도 보다시피, 매일 날이 밝자마자 나가서 저녁 늦게 돌아오면서 집안일도 하지 않잖아. 이렇게 게으른 여자는 돈을 모을 수 없어. 매일 요란하게 차려입고 나가서 무엇을 하는지... 일자리를 찾는 것도 아니고. 형인아, 현주가 바람을 피우지 않는지 조심해. 엄마가 예전에 너한테 말했잖니, 집 살림은 예진이가 잘한다고.”주형인의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허탈하게 말했다.“엄마, 몇 번이나 말했어, 신혼집 인테리어는 현주가 맡아서 한다고. 현주가 매일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 것도 인테리어 작업하는 것을 보러 가는 거야. 나도 자주 가 보잖아. 인테리어가 쉬운 일이라고 생각해? 예전에 예진이도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돌아오면서 인테리어 작업하는 것을 지켜보던 거 기억 안 나?”“...”“현
“...”문 여는 소리가 들리자, 서현주가 돌아온 것을 눈치챈 주형인이 바로 입을 다물었다아니나 다를까, 문이 열리더니 서현주가 도시락 두 개를 포장해 왔다.“여보, 마침 잘 오셨어요, 내가 도시락 두 개 사 왔어요.”서현주는 도시락을 들고 다가와 주형인 옆에 앉더니 그중 하나를 꺼내 주형인에게 건넨 뒤 자신의 몫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도시락 뚜껑을 열고 먹기 시작했다.주형인이 엄마와 서현주를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왜 두 개만 사 왔어? 엄마 아빠 도시락은?”서현주가 음식을 먹으며 말했다.“아버님, 어머님 도시락은 사지 않았어요. 드시고 싶으면 직접 해 드시라고. 집에 라면 두 개가 있으니 두 분이 한 개씩 드시면 돼요. 그리고 계란도 세 알 있으니, 당신들 세분이 한 개씩 넣어서 드시면 돼요.”시부모는 언제나 쌀을 적게 넣어서 밥을 짓는다. 시어머니는 시아버지와 주형인, 그리고 자기 밥만 뜨고 절대 서현주에게 밥을 떠주지 않는다. 서현주가 밥을 뜨려고 하면 밥솥에는 밥이 한 숟가락밖에 남아있지 않다.시어머니는 일부러 그런 것이다. 매번 집에서 밥을 먹을 때마다 시어머니는 일부러 장을 보지 않고, 장을 보더라도 서현주가 좋아하지 않는 음식만 골라 샀다.야채 한 접시와 삶은 계란 세 알, 며느리 몫은 없다.주형인이 매번 자기의 그릇에 담긴 밥을 절반씩 나눠주고, 삶은 달걀을 그녀에게 주지 않았다면 서현주는 이 집에서 더 이상 버텨낼 수 없었을 것이다.오랜 시간을 함께할수록 서현주는 하예진이 왜서 이혼 후 자기에게 감사하다고 했는지 이해가 갔다.그들이 이렇게 나오면 그녀도 곱게 대하지 않을 것이다.도시락은 주형인 것만 사 오고, 시부모님 몫은 당연히 없다.화가 나서 가슴이 막힌 김은희가 맛있게 먹고 있는 서현주를 가리키며 욕설을 퍼부었다.“엄마, 이걸 자셔, 난 라면 먹을게, 오랜만에 라면을 먹고 싶네.”주형인은 고부간에 또 다른 충돌이 일어날까 봐 서둘러 엄마 손에 자신의 도시락을 쥐여주었다.김은희는 벌떡 일어나서 도시락을
다음날, 날이 밝자 노동명은 얼른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아침도 먹지 않고 집을 나섰다.엄마가 일어나면 손은경을 데리고 다니라고 할까 봐 걱정 돼서이다.보기만 하면 항상 결혼을 재촉하는 엄마에게는 삼십육계 줄행랑이 상책이다.노동명은 사실 엄마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그는 스물여섯 살이 아닌 서른여섯이나 먹은 노총각이니까. 노동명의 큰 조카가 곧 아내를 맞는데 작은삼촌인 그가 아직 여자 친구 하나 없으니, 왜 조급해하지 않을까.그는 이른 아침 발렌시아 아파트로 달려가 동네 입구에서 전태윤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예정을 끌어안고 침대에 누워있던 전태윤은 친구의 전화를 받자, 얼굴이 푸르뎅뎅해서 소리쳤다.“이른 아침부터 왜 전화질이야? 꺼져!”“...왜 화를 이렇게 내는 거야? 우리의 오랜 친분으로 너희 집에 가서 아침을 좀 얻어먹으면 안 돼?”“지금이 몇 신데, 아침부터 전화질이야? 왜, 집에 호랑이라도 와서 너를 잡아먹으려고 하냐? 아침도 안 먹고 이렇게 뛰어와?”전태윤이 화가 나서 노동명에게 소리 질렀다.그는 오늘 요리를 하지 않으려고 특별히 전호영에게 호텔에서 아침을 포장하여 서원 리조트로 가는 길에 그걸 자기 집으로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전호영:한 길이 아닌데요... 하지만 형의 분부이니, 가는 길에 들르는 수밖에요.’노동명이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7시가 다 되어가네. 난 어떻게든 너희 집에서 아침을 먹을 거니 그렇게 알아둬. 그리고 태윤아, 너 참 귀신처럼 잘 알아맞혔어, 우리 집에 정말 호랑이가 왔어. 암호랑이에게 물리면 뼈도 남기지 못하고 죽을 것 같아서 너의 집에 피난을 온 거야, 넌 나의 든든한 방패잖아.”노동명의 말에 전태윤은 말문이 막혀버렸다.하예정이 눈을 뜨니 전태윤이 억이 막힌 표정을 짓고 있었다.“누구 전화예요?”전태윤이 노동명과의 통화를 끊으며 대답했다.“피난민.”피난민?어리둥절해난 하예정이 궁금해서 물었다.“누가 피난을 와요?”“노동명 말고 누가 있겠어. 소정남은 인제 심효진이 있으
“노 대표님도 오셨는데 빨리 일어나서 모시고 들어와요.”하예정은 다시 자기를 끌어안으려는 전태윤을 피해 침대에서 일어났다.그녀가 갈아입을 옷을 가지러 가는 뒷모습을 보며 전태윤이 말했다.“내가 동명이를 부른 것도 아니고, 자기 절로 온 건데 기다리라지 뭐. 호영이가 오면 강일구가 나가서 두 사람을 데리고 들어오면 돼. 그럼, 강일구도 두 번 가지 않아도 되고.”하예정이 자신이 갈아입을 옷과 전태윤의 양복 한 벌을 가져왔다.“휴가 중인데, 정장 안 입을래.”하예정은 양복을 들고 돌아가서 곧 다른 옷으로 바꾸어 가져왔다.그녀가 옷을 갈아입으려고 욕실에 들어가자, 전태윤은 자기 옷을 들고 사랑하는 와이프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여보, 우리 사이에 이젠 같이 옷을 갈아입어도 부끄러울 게 없지 않아?”하예정은 못 들은체하였다.둘만 있으면 전태윤은 점점 더 느끼해지고, 점점 더 질척거린다.어떤 건 정말 남자의 천성이라서 가르치지 않아도 된다.하예정이 욕실에서 나오니 전태윤은 여전히 상의를 벗은 채 침대에 앉아 있다가 잘생긴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며 하예정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여보, 안아줘.”하예정이 다가가서 그가 들고 있던 상의를 한 손으로 빼앗은 다음, 그를 끌어당겨 상의를 입혀주었다.“옷을 입지 않고 감기에 걸리면, 매일 한약을 마시게 할 거예요!”전태윤이 웃음을 거두며 원망했다.“여보, 내가 그렇게 매력 없어? 당신 마음 안 끌려? 내가 복근이 몇 개인지 세어보지 않을래?”“당신 말대로 우리 사이에 내가 아직도 당신 몸매가 어떤지 모를까 봐요? 쇼는 여름에 하시고, 추운데 무슨 몸매 자랑이에요? 감기에 걸리면 어쩌려고요.”그를 도와 상의 단추를 채운 후, 하예정은 발끝으로 서서 그의 귓가에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전태윤은 싱글벙글 웃으며 힘껏 하예정을 껴안은 후, 진지한 성인군자의 모습을 되찾았다.“여보, 날 속이면 강아지야.”“그래요, 내가 당신을 속이면 강아지예요. 어차피 사람을 속
전태윤이 담담하게 말했다.“할머니는 내 요리 솜씨가 별로라면서요?”“별로지. 그래도 난 네 할미잖니. 아무리 맛없게 해도 우리 손주 자신감 불어넣어 줘야지 않겠어?”“...”“띠리링...”이때 전태윤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전화 받는 핑계로 더는 할머니와 옥신각신하지 않았다. 어차피 할머니를 이기지도 못하니까.“형, 나 아파트 입구야. 형이 출입문 카드를 안 줘서 못 들어가고 있어. 동명 형도 여기 있어. 무려 30분이나 기다렸다는데.”전호영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할머니는 어젯밤 가족 단톡방에서 무릇 관성에 있는 사람들은 오늘 전부 리조트에 돌아가라고 통보를 내렸다.큰형수님 친정 식구들이 처음 방문하시니 무조건 집에 돌아가 잘 접대하라고 하셨다. 이는 큰형수님에 대한 존중과 중시라고 했다.어쨌거나 큰형수님은 장차 전씨 가문의 안방마님으로 거듭날 분이니 차츰차츰 위엄을 쌓아가야 한다.“너 참 빨리도 왔네.”전태윤이 담담하게 말했다.“일구한테 너희 마중 가라고 할게.”너무 이른 시간이라 강일구와 숙희 아주머니도 아직 하루 토스트에 나가지 않았다.“알았어.”빨리 왔다는 형의 말에 전호영은 센스 있게 바로 전화를 끊고는 도어에 손을 올리고 맞은편 차에 있는 노동명에게 말했다.“형, 나는 아침밥 챙겨오느라고 빨리 왔다고는 하지만 형은 왜 이렇게 빨리 왔어요? 나보다 더 빠르잖아요. 우리 형이 아까 내가 참 빨리도 왔다면서 칭찬하던데 아무래도 8시 이후에 오길 바랐나 봐요. 그럼 동명 형이 더 오래 기다릴 거잖아요. 말해봐요, 우리 형 또 어떻게 건드렸는지?”노동명이 마른기침을 하더니 솔직하게 털어놓았다.“엄마가 친구 집 딸을 우리 집에 데려와서 나랑 엮으려고 하셔. 실은 오늘 손은경 씨랑 종일 함께 보내라는 걸 내가 싫어서 너희 형이랑 바비큐 파티한다고 대충 둘러댔거든. 엄마는 그래도 한사코 손은경 씨를 데리고 가라고 하시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만 너희 형이 가족 이외의 젊은 여자를 곁에 두는 걸 싫어한다고 방패막이로 삼아서 겨우
하예진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부부 사이에 한쪽이 바람을 피우면 금방 금이 생기게 되는 법이죠. 이혼을 안 했어도 서로 고된 삶을 살 테니, 차라리 이혼하는 게 나아요. 저의 전남편도 바람을 피우고 저를 폭행하여 이혼했잖아요. 한번이 있으면 두 번, 세 번이 있을 수 있으니 그들이 고치기를 기대하지 마세요. 차라리 이혼하는 게 나아요. 이혼하면 죽는 것도 아닌데.”이윤미가 말을 이었다.“우리 아버지는 절대 떠나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 아버지는 자신이 이혼하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점을 잘 아시거든요. 정씨 집안의 친척들도 우리 가문에서 아무런 이익도 보지 못할걸요. 어쩌면 전에 받은 혜택들도 전부 토해내야 할지도 몰라요. 어쨌든 요즘 우리 가문은 편안할 날이 없어요. 저는 왠지 큰 문제가 생길 것 같아요.”이은화의 모진 마음으로는 정말 해낼 수 있을 것이다.하예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이경혜가 하예진을 강성으로 빨리 오게 한 것은 아마도 이씨 가문이 요즘 혼란스러워 이은화가 하예진을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야 하예진이 그 틈을 타 사업을 일으킬 수 있고 옛날 사고에 관해 더 많이 알게 될 수 있었다.이 기회를 잡아 이씨 가문의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도 있다.민심을 얻는 자는 천하를 얻는 것과 다름없다.하예진은 비록 이씨 가문에서 자라지 않았고 강성에서도 사업이 없지만, 그녀의 뒤에는 든든한 후원자들이 서 있다. 그리고 하예진의 외할머니는 이씨 가문의 전임 가주였다. 이씨 가문의 친척들을 끌어들여 그들의 지지를 얻을 수만 있다면 일이 쉽게 풀릴 것이다.“예진 씨, 비행기를 몇 시간 타고 방금 도착하셔서 힘드실 텐데 얼른 가서 쉬세요. 일이 있으면 그 번호로 저에게 연락해 주세요.”하예진이 관심하며 물었다.“저랑 같이 안 갈실래요?”이윤미는 입을 오므리다가 대답했다.“여기 좀 더 있고 싶어요. 마음도 추스를 겸 조용히 있고 싶거든요. 집으로 돌아가도 엉망진창이에요.”“그
수십 년이 지난 탓으로 법률조차도 이은화의 사형을 선고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다.이윤미는 적어도 그녀가 큰이모의 후손에게 주인 자리를 돌려줄 수 있었다.그녀는 이씨 가문을 떠나 자신의 회사로 돌아가 생활해도 좋다고 생각했다.이윤미는 이런 원한과 복수에 관한 일을 멀리하고 싶었고 그녀의 소소한 삶을 더 좋아했다.이은화가 옛날 일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이윤미는 이은화가 그 해에 정말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했다고 믿었다.단지 가주 자리의 권력을 탐내는 것뿐만이 아닌 사랑 때문에 벌인 짓일 수도 있다.이은화는 지금 70세이고 정군호와 결혼한 지 수십 년이 지났으며 아들딸도 네 명이나 낳았다.하지만 이은화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여전히 그 능력이 뛰어난 남자가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이은숙의 특별 비서일 것이다.“제가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아요. 저는 제 행동으로 제가 우리 엄마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게요.”하예진은 한참 동안 이윤미를 바라보며 웃었다.“윤미 씨의 진지한 얼굴은 정말 멋있고 아름다워요. 당신 엄마가 보신다면 눈에 거슬릴지도 모르지만요. 이씨 가문의 상황은 어때요? 윤미 씨 아버지가 바람을 피우다가 이 대표님께 붙잡혔다고 들었는데. 요 며칠 동안 윤미 씨 아버지는 모습조차 내놓지 않는다면서요.”하예진은 이은화와 정군호의 일을 알고 있었다.강성에서 이 불륜 사건은 빅뉴스였다.평소에 정군호랑 같이 다니던 늙은 남자들은 대부분 정군호에게 동정심을 품었다. 이은화가 정군호를 너무 엄하게 관리하여 그에게 자유로울 틈도 주지 않고 용돈도 적게 준다고 생각했다.아무리 사이좋은 부부 사이라도 오랜 시간 동안 작은 일에 얽매이게 되면 감정이 깨지기도 한다.여자들은 대부분 이은화의 편을 들었다. 이은화가 남편을 관리하는 것이 좀 엄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정군호가 만약 이은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람을 피우는 것이 아닌 이은화에게 이혼을 제기했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다.정군호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우리 엄마가 예진 씨가 오신 것을 알게 되면 아무것도 안 할 리가 없는데. 조심하세요. 아시고 싶은 것이 있으면 제가 다 알려드릴게요. 제가 모르는 일은 할 수 없지만요.”하예진은 웃음을 거두며 한참 동안 이윤미를 찬찬히 바라보았다.“윤미 씨, 우리 만난 적 있잖아요. 저도 윤미 씨가 정의롭고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 대표님 결국 윤미 씨와 피가 섞인 모녀지간인데, 저는 윤미 씨가 이 대표님과 맞서지 못한다고 생각해요.”이윤미의 웃음도 점차 사라졌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글쎄요. 우리 두 사람은 모녀 맞아요. 저를 저의 어머니와 같은 편에 서지 말라고 하면 제가 분명 스트레스도 받고 또 엄청나게 큰 용기도 필요하겠죠. 예진 씨가 저를 경계하는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저는 정말 예진 씨가 걱정돼서 이러는 거예요. 우리 엄마가 마음이 너무 독하세요. 해본 말이 아니에요. 예진 씨가 여전히 저를 경계하면 저도 더는 묻지 않을게요. 그런데 여기에서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에 맞서게 되면 저를 찾아오셔도 돼요. 제가 최대한 도와드릴 테니까.”“사실 저와 엄마는 모녀간의 정이 별로 없어요. 저는 엄마의 곁에서 자라지 않았고 또 이씨 가문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스무 살이 넘었거든요. 윤정이가 아직 이씨 가문에 남겨졌고 여전히 부모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어요. 제가 저의 엄마와 모녀간의 정이 별로 없다고 해도 우리 두 사람이 친 모녀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을 저도 잘 알아요.”“만약 당신들이 없다면 제 생각에는 제가 이씨 가문의 주인 자리를 짊어지고 리더가 되어 우리 가문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갔을 거예요.”이윤미는 이씨 가문의 규정을 수정하고 싶었다.그렇게 딱딱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비록 대가가 좀 클 수도 있지만, 이씨 가문을 더 멀리, 더 잘 발전시키기 위해서라도 수정하고 싶었다.이윤미는 명함 한 장을 꺼내 하예진에게 건네며 말했다.“이것은 제 다른 전화번호에요. 아는 사람이 적으니 무슨
“그럼 안전에 유의하시고 무슨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저에게 전화하세요.”방윤림이 이윤미에게 당부했다.이윤미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제가 항상 방 비서에게 의지할 수는 없잖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암살을 당하더라도 이윤미는 자신을 스스로 보호할 능력을 갖추었다.자신을 보호할 능력이 없다면 이렇게 자라지 못하고 일찍이 양어머니의 학대를 받아 죽었을 것이다.방윤림과의 통화를 마친 이윤미는 곧바로 약속 장소로 차를 몰았다.그녀가 도착했을 때 하예진은 이미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하지만 하예진은 차에서 내리지 않고 누군가의 차가 오는 것을 보더니 창문을 조금 눌렀고 이윤미가 하예진의 차 옆에 주차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선글라스를 먼저 벗은 이윤미는 얼굴의 가죽을 벗어 던져 본모습을 드러냈고 차에서 내려 하예진과 웃으며 인사를 나눴다.하예진은 그 모습을 보고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어떻게 저인 것을 알았어요? 두렵지 않아요?”“지금 이 시각에, 또 이렇게 외진 곳에 주변에 주택도 없는데 겁이 많은 사람들은 아마 이 밤에 이런 곳으로 오지 못할걸요. 그리고 저기에 묘지도 있는데 이런 곳에 예진 씨 말고는 아무도 오지 않을 겁니다.”하예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윤미가 온 후에야 약속 장소가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라는 것을 발견했다.하예진도 한참 후에야 차를 세울 곳을 찾아 이윤미가 오기를 기다렸다.지금 그녀들이 주차한 곳은 방윤림이 그녀들에게 준 주소에서 수백 미터 떨어져 있었다.“묘지에서 이렇게 가까운 줄은 몰랐어요. 만약 제가 알았더라면 아마 혼자 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귀신이 무서워서요.”이윤미도 웃었다.“귀신이 뭐가 무서워요? 사람이 더 무섭죠.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는 말 못 들어보셨어요? 예진 씨 분장 기술도 꽤 좋네요. 제가 제 부하들을 하루 호텔 입구에 보내 예진 씨를 기다리게 했거든요. 여기로 오시는 길에 예진 씨를 몰래 보호하라고 지시했는데 예진 씨가 나오는 것을 못 봤다고 하더라고요.”
곧 하예진은 차를 몰고 지하 주차장에서 나왔다.하예진은 방윤림이 그녀에게 준 그 주소대로 내비게이션을 켜고 차를 몰았다.노동명이 전화했다.하예진은 차의 속도를 늦춘 다음 노동명의 전화를 받았다.“동명 씨, 저 지금 나가서 필요한 물건들을 사려고 해요. 지금 운전 중이니 좀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요.”“알았어. 운전 조심하고.”“네.”하예진은 하예정과 달리 천천히 차를 몰았다.다행히 하예정이 시내에 살고 있어서 차를 빨리 몰지 못했다. 만약 차가 적은 외진 곳으로 가게 되면 하예정은 비행기를 운전하는 것처럼 매우 빨리 몰 것이다. 전태윤이 그 모습을 보지 못해서 다행이지, 그가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면 아마 하예정이 운전대조차 잡지 못하게 할 것이다.차를 몰고 있는 하예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노동명은 이내 전화를 끊었다.하예진이 변장하고 남몰래 혼자 차를 몰고 이윤미를 만나러 간 것을 알면 노동명은 아마도 걱정되는 마음에 바로 비행기를 타고 올지도 모른다.하예진은 노동명이 자신을 얼마나 신경 쓰는지 알고 있어서 그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방윤림이 준 그 주소는 가까운 곳이 아닌 꽤 외진 곳에 있었기에 내비게이션에는 차로 한 시간 이상 가야 도착할 수 있다고 나와 있었다.하예진이 차를 몰고 호텔을 나서자 이윤미가 방윤림에게 물었다.“예진 씨 나오는 거 봤어요?”방윤림이 대답했다.“제가 종업원에게 부탁해서 쪽지를 보냈으니 바로 떠날 겁니다. 하예진 씨가 방금 관성에서 왔기 때문에 낯선 곳이고 차량도 없으니 택시를 탈 것 같습니다. 아가씨도 출발하시면 됩니다. 하예진 씨가 곧 약속 장소로 갈 겁니다.”방윤림은 하예진을 만난 적 있었는데 하예진이 대담하고 세심하다고 추측했다. 하예진이 강성으로 온 목적이 이씨 가문과 연관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 말을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방윤림은 하예진이 이씨 가문 때문에 강성으로 왔으니, 이윤미가 만나자고 하면 반드시 만나러 갈 것으로 생각했다.“사람을 시켜 예진 씨를 은밀히 보호하라고 하세요.
고현은 전호영을 흘겨보았다.전호영은 코를 만지며 웃었다.“현이 씨가 만든 요리가 당연히 맛있죠.”“그럼 저는 뻔뻔스럽게 얻어먹으러 갈게요. 그럼 저는 이만 내려가서 쉴게요.”하예진은 눈치껏 두 사람이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하예진은 그녀가 묵고 있는 방으로 돌아와 소파에 앉자마자 노동명의 메시지에 답장하려고 했다.그러나 답장하기도 전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누구세요?”하예진은 일어나 문을 열러 갔다.“호텔 종업원입니다.”종업원은 그녀가 문을 열자 웃으며 말했다.“실례지만 하예진 씨 맞습니까? 누군가가 당신에게 편지 한 통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셨어요.”종업원은 하예진에게 봉투 하나를 건네주며 말했다.하예진은 봉투를 받아들고 종업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방에 돌아온 그녀는 호기심에 봉투를 뜯었고 그 안에는 작은 편지 한 장만 들어있었다.편지의 내용은 매우 간단했다. 강성의 어느 주소가 들어있었다.주소 밑에는 말 한마디만 남겨져 있었다.[예정 씨,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혼자 오세요. 제가 예정 씨 안전을 보장해 드릴게요.]오른쪽 아래 끝에 “방”이라는 글자가 쓰였다.‘방? 방씨? 이름은 뭐지?’하예진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 중에 “방”자가 들어간 이름을 가진 사람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녀는 “방”이라는 글자가 이름은 아닐 것으로 추측했고 아마도 성씨가 “방”씨 일 것으로 짐작했다.방씨 성을 가진 사람이라...이윤미 주변에 “방”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는 것 같긴 한데...하예진이 하루 레스토랑을 개업하는 날 이윤미가 방윤림을 보내 그녀에게 선물을 전해주도록 했다.하예진은 아마도 이윤미가 그녀를 만나고 싶어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하지만 사람들에게 알려서는 안 되었다.시간을 보던 하예진은 망설임 없이 캐리어에서 단독으로 포장된 검은색 마스크와 선글라스, 눈에 띄지 않는 낡은 옷 그리고 가발을 꺼냈다.그녀는 변장하고 나서 휴대전화와 편지를 들고 조용히 룸을 나섰다.다행히 그녀가
하루 호텔.맨 위층에 있는 로얄 스위트룸.하예진과 고현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고 전호영은 두 여자에게 물과 과일을 가져다주러 갔다.“언니, 우리 집에 묵는 건 어때요? 저 혼자 살아요. 집도 크고 방도 많아서 저랑 같이 살면 편하실 거예요”고현은 하예진을 그녀의 개인 별장에 초대했다.하예진은 그녀를 보며 웃었다.“제가 고 대표님 집에 가면 강성의 연예 기자들은 고 대표님이 호영 씨와의 감정이 깨졌다고 보도할걸요. 호영 씨가 헛수고했다면서, 고 대표님은 여전히 여자를 좋아하는 거라면서 기사를 낼 거에요.”고현은 말문이 턱 막혔다. 그녀는 여전히 남자 차림으로 다녔기에 하예진이 그녀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 보도되면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불필요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었다.하예진은 강성에 막 왔기 때문에 사업도 일으키지 못한 채 사람들의 원한을 사게 되면 그녀에게도 좋은 점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고현을 사모하는 여자가 너무 많기에 그녀들이 전호영을 이길 수는 없지만, 하예진은 이길 수 있다고 자신했다. 적어도 그녀들은 자신이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고 대표님과 호영 씨 감정도 이제 점점 안정되고 있는데 저는 적절한 시기에 고 대표님이 여자라는 사실을 외부에 솔직하게 말하셔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항상 두 사람이 동성애자라고 오해하잖아요. 사실도 아닌데.”고현은 잠자코 있다가 입을 열었다.“외부 사람들에게 해명할 필요 없어요. 언젠가 호영 씨와 결혼하게 된다면 제가 결혼식에서 웨딩드레스를 입고 입장하면 사람들도 진실을 알게 될 거에요.”하예진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사람들이 고 대표님이 여자 분장을 하고 나온 줄로 알 거예요. 고 대표님이 여자 행세를 한다고 여전히 오해하실 거예요. 저는 보통 다른 사람에게 결혼이나 이혼을 권유하지는 않거든요. 저도 과거에 결혼생활 때문에 소란을 피우다가 이혼을 당했거든요.”“형인 씨가 저를 폭행했을 때 저는 부엌에 있는 칼을 들고 거리에서 쫓아다녔기도 했고 그 사람을 때려 얼굴이 시퍼렇게 멍들고
이은화가 말을 이었다.“난 정말 먹고 싶지 않아. 너라도 얼른 밥 먹으러 가. 엄마는 좀 더 앉았다가 돌아갈 거야. 내가 약속할게. 이 정도 일 때문에 쓰러지지 않을 거야. 엄마도 이틀 지나면 기분이 금세 좋아질 거야. 내일 나도 네가 알고 있는 엄마로 돌아올게. 약속할게. 늙은 영감탱이 때문에 죽느니 마느니 하면서 난리 피우지 않을 거야. 말이 나온 이상 너한테 좀 물어보자. 예정이가 오면 어떻게 임할 생각이야?”“제 원칙을 깨뜨리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대처할 거에요.”이은화는 멈칫하더니 칭찬했다.“역시 내 친딸이야! 엄마가 관성에 있을 때 경혜를 만났는데 나한테 원한을 품고 있더라고. 내가 어떤 말을 해도 경혜는 마음속으로 날 진범으로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나에게 민감하게 말을 하더라고. 경혜가 나보고 예진이한테도 기회를 주어 배양하라고 제안하더군. 예진이와 너를 평등하게 경쟁시켜 예진이가 지면 네가 이씨 가문을 이어받아도 아무런 의견이 없다고 했어. 그런데 예진이가 이기면 우리 모든 사람은 권세 중심에서 손을 떼라고 말하는 거야.”이경혜가 이렇게 명확하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뜻은 비슷했다.이은화는 딸 이윤미에게 말했다.“윤미야, 우리 집을 남에게 양보할 수는 없잖니? 그래서 엄마가 승낙하지 않았어. 예진이가 이번에 강성에 온 목적도 너무 단순하지 않을 거야. 잘 감시해. 예진이가 우리 가문의 친척들과 너무 많이 접촉하게 해서는 안 돼. 강성에서 사업을 펼쳐나가려면 돈이 있어야 할 거야. 예진의 사업의 앞길을 막아 돈을 벌지 못하게 하면 강성에서 버티지 못할 거야.”“강성은 우리 구역이야. 예진의 배후에 큰 세력이 있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을 거야. 여기는 우리 이씨 가문의 구역이니까. 만약 감쪽같이... 그러면 더 좋고.”이은화는 자신의 목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이윤미에게 하예진을 처리하라는 의미였다.“하지만 흔적을 남기면 안 돼. 만약 정말 그렇게 한다면 증거는 반드시 깨끗이 지워야 하거든. 예진의 뒤에 있는 몇몇 세력은 우리가 건
“엄마, 우리 이모의 특별 비서는 아직도 살아 계세요?”이윤미는 화제를 돌렸다.이은화가 가문의 규정을 바꾸는 것을 동의하지 않을 것을 뻔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네 이모가 사고를 당한 뒤로 이은숙의 비서도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생사는 누구도 몰라.”이은화가 이씨 가문의 주인 자리에 오른 후, 사람들을 보내 그 특별 비서를 찾도록 했지만 아무 소식도 없었다. 마치 갑자기 세상에서 사라진 것 같았다.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은화는 여전히 그 특별 비서를 찾아다녔다.그 당시 사고에 관한 일을 그 비서도 많이 알고 있을 것이고 그의 손에도 증거가 있을 것 같았다.그를 찾지 않고 증거를 인멸하지 않으면 폭탄을 남겨둔 거나 다름없는 일이다. 그가 언제, 어디에서 갑자기 나타나 이은화의 살인 증거를 내놓을지 누가 알겠는가!비록 어렸을 때 이은화의 짝사랑 상대일지라도, 이은화는 그녀의 후손을 위해서라도 그 비서를 찾으면 반드시 그를 죽이고 입을 닫게 하려고 했다.수십 년 동안 그 비서의 소식도, 두 조카의 소식도 없었다. 이은화는 자신의 외조카가 죽거나 영원히 나타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면 그녀는 평안하고 순조롭게 이씨 가문을 그녀의 딸에게 넘겨줄 수 있었으니까.하느님은 여전히 이은화에게 잠재적인 위험을 남겨 주셨다.두 조카 중 비록 한 명이 죽었지만, 죽은 조카가 두 딸을 이 세상에 남겨두었다.살아 있는 조카딸 이경혜는 부잣집에 시집가서 아들과 딸을 낳고 권세도 있어 건드리기가 쉽지 않았다.작은 조카 이경희의 두 딸 하예진과 하예정도 건드리기 어려운 존재였다.그녀들의 배후에는 여러 가문의 큰 세력이 서 있었고 그녀들을 건드리는 것은 그 가문들을 적수로 삼는 거나 다름없었다.요즘 이씨 가문의 실력은 예전만 못하기에 이은화는 그 세력들과 감히 맞서지 못했다.“나는 네 이모 가족의 죽음은 그 비서가 꾸민 음모라고 의심하고 있어. 그 비서는 네 이모를 좋아하지만 네 이모가 이모부와 결혼해서 마음속으로 원한이 맺혔을 거로 생각해. 사람들은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