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이시연은 그가 단번에 알아맞힐 줄 몰랐다.

올 때 잘 생각하고 할 말 있으면 바로 하려고 했지만 막상 선생님과 사모님을 마주하니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박강현이 아쉽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실망하는 모습을 볼까 봐 두려웠다.

안필훈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 사모는 영화제에서 박강현 그 자식이 네가 어렵게 받아온 팔찌를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는 걸 보고 이틀째 화를 내고 있어. 휴, 일단 들어와 얘기해.”

이시연은 그의 한숨에 가슴이 아파졌다.

“강현이 그 자식이 참 염치가 없어요. 날 말리지 말라고 했잖아요. 불러와서 한번 혼내줘야 해요. 그 팔찌는 시연이가 한 계단에 한 번씩 무릎을 꿇고 어렵게 구해 온 것인데 남에게 주다니.”

“강현이는 당신이 사업을 도와준 거 알아요. 하지만 시연이도 당신 학생인데 그렇게 그 녀석만 감싸고 시연이는 신경 안 쓸 거예요? 왜 말을 안 해요?”

사모님은 남편이 한참 동안 대꾸하지 않자 화가 나서 고개를 돌려 다시 한번 크게 싸우려 했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는 그녀는 이시연의 눈빛과 마주했다.

“시연아?”

세월의 흐름으로 사모님이 더는 젊지 않았지만 여전히 분위기가 우아했는데 젊은 시절의 아름다운 모습도 엿보였다.

그녀가 급히 일어나자 이시연이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했다.

“사모님, 저 왔어요.”

박강현과 이별을 얘기할 때도 울지 않았던 그녀는 사모님 앞에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이고, 착한 시연이가 마음고생이 많구나.”

사모님은 가슴이 아파 이시연을 품에 안았다.

목이 메어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몸을 느끼며 사모님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고 따라서 눈물을 흘릴 뻔했다.

“억울한 일이 있으면 나에게 다 말해. 내가 다 들어줄게. 박강현 그 자식 정말 너무 했어. 이렇게 너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니 나도 화가 나. 네가 헤어지더라도 나는...”

“쿨럭.”

안필훈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말할수록 이상하게 흘러가.”

그는 한숨을 내쉬며 위로했다.

“시연아, 너도 너무 슬퍼하지 마. 이 연예계라는 곳이 워낙 복잡해서 널 소중히 여기지 않은 게 아닐 수도 있어. 두 사람 어렵게 이 자리까지 왔는데 무슨 일이 있으면 앉아서 잘 이야기해야 해. 전에 너에게 어떻게 했는지 우리도 너도 다 잘 알잖아. 손에 쥐면 부서질까 놓으면 날아갈까 걱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어.”

사모님은 이 말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옛날에 한 건 다 옛날 일이에요. 게다가 시연이 강현이의 여자친구니 그것들은 모두 걔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에요. 그리고 시연이가 강현이랑 함께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강현이는 잘 알지 않아요?”

“연예계가 복잡한 건 인정해요. 하지만 박강현이 선물한 게 다른 것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지만 팔찌는 안 돼요. 그 팔찌를 어떻게 구해왔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때 박강현은 유명해지려고 필사적으로 일했는데, 결국 큰 병에 걸려 계속 혼수상태에 빠졌어요. 시연이가 밤낮으로 돌봤지만 나아지지 않아 팔찌를 구해온 일은 급한 마음에 한 일이긴 하지만 시연이의 정성이 깃든 거잖아요.”

“그걸 어떻게 짓밟을 수 있어요?”

사모님의 마지막 말투엔 비분이 교차했다.

안필훈은 침묵한 채 반박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그도 두 사람이 여기까지 오기가 정말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어떻게든 설득해서 헤어지는 걸 말리고 싶었다.

이시연은 사모님 나선영의 손에 이끌려 옆에 앉았는데 울면서 얘기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두 눈에 눈물이 맺힌 채 말했다.

“사건의 진실이 어떤지 저는 이미 잘 알고 있어요. 이렇게 찾아온 건 두 분에게 저 이미 박강현이랑 헤어졌다고 말하려는 거예요. 오늘 이후로 우리는 더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저에게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나선영의 손이 잠시 멈칫하더니 마음 아파하며 말했다.

“바보같이 무슨 말이야. 이건 네 잘못이 아닌데 우리가 어떻게 너에게 실망할 수 있겠어?”

말을 마친 그녀는 남편을 힐끗 봤다. 그녀는 방금 그녀에게 이별을 권유할 뜻이 있었지만 안필훈의 말처럼 그녀도 마음속으로 두 사람은 잘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두 아이를 진심으로 아끼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것도 그들이 줄곧 바라던 바였다.

“하지만 시연아, 너 정말 진심이야? 사실 네 선생님 말씀도 일리가 있어. 너희들 잘 이야기 좀 해봐. 정 안 되면 나랑 필훈 씨가 박강현을 불러서 혼내주고 사과도 잘하라고 할게. 절대 감정적으로 대하지 마. 나중에 정말 이런 다툼으로 감정이 소진되면 후회해도 늦었어.”

나선영은 생각해보더니 또 한 번 말렸다.

이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 온 것은 심사숙고 끝에 온 것이에요. 헤어지려는 것도 홧김에 한 말이 아니에요. 전 이미 회사에 박강현의 팀을 떠나겠다고 신청했고 앞으로는 신인을 캐어할 거예요.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감독 일과 촬영을 발전시키기로 했어요. 선생님의 오랜 가르침에 부응할 수도 있고요.”

안필훈은 어리둥절해졌다. 원래는 그녀가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한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이렇게 주도면밀하게 생각할 줄은 몰랐다.

사모님은 잠시 침묵하고 있다가 그녀의 손을 다시 꼭 잡고 얼굴 가득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말했다.

“나는 네가 자기 주견이 뚜렷하다는 생각을 늘 해왔어. 하지만 너와 박강현은 여러 해 동안 서로를 도우며 살았는데 걔 마음속에서는 네가 절대 대체될 수 없어. 강현이가 지금 이해하지 못한다고 앞으로도 계속 모르는 건 아닌데 정말 다시 한번 생각해보지 않을래?”

“사모님, 저는 조선 시대 여자가 아니에요. 남자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살 수 있으니 생명을 낭비하는 것은 더더욱 원하지 않아요. 불확실한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무의미해요.”

“하지만 네가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인데 정말 괜찮겠어?”

이 말에 이시연은 입안에 쓴맛이 느껴졌다.

“그 사람이 저를 사랑하지 않으니 저도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공평한 거죠. 뿌리가 잘 빠지지 않을지 몰라도 조금씩 마음속에서 깨끗하게 뽑아야 해요.”

사모님은 그녀의 의연한 눈빛을 보면서 칭찬하는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시연은 연약해 보이지만 마음은 누구보다 단단하다는 것을 그녀는 일찍이 알고 있었다. 절벽에 핀 꽃처럼 바람에 우뚝 서서 백절불굴할 수 있었다.

그녀와 안필훈은 모두 그녀의 마음이 이미 결정되어 더는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시연아.”

그녀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이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앞으로 또 억울한 일을 당하면 혼자 참지 마. 나랑 네 선생님은 비록 업계의 일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몇 마디 말은 할 수 있을 거야.”

그 말에 이시연은 다시 눈시울이 붉어지며 2년 동안 쌓인 설움이 오늘 한꺼번에 쏟아지는 것 같았다.

사모님은 그녀에게 남아서 밥을 먹으라고 하며 식사 자리에서 이리저리 물어봐서야 박강현과 조민아가 소꿉친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떠난 후 나선영은 순간적으로 얼굴을 차갑게 변했다.

“당신도 일단 화내지 마. 무슨 오해가 있을 수도 있잖아. 그 여자가 무대 위에서 여러 사람 앞에서 물건을 요구하는데 친분이 있는 박강현이 그 여자의 체면을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 그랬을지도 몰라.”

안필훈이 말리려고 했다.

“걔만 체면이 필요하고 시연이는 필요 없어요? 만약 이 팔찌가 시연이가 준 것이고, 박강현이 몇 년 동안 절대 빼지 않던 걸 소꿉친구에게 선뜻 내줬다는 걸 다른 사람이 알게 된다면 시연이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들 두 사람만 친분이 있고 시연이는 없어요? 젊은이들이 하는 그런 수작을 부리지 말아요. 우렁각시도 아니고. 난 박강현의 흔들리는 마음이 눈에 거슬리니까 지금 당장 사람을 불러 조사해요. 이 두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야겠어요.”

나선영은 말할수록 화가 났다.

안필훈은 지체하지 않고 즉시 전화를 걸어 알아보아서야 박강현이 조민아에게 2년 동안 길을 닦아주며 자원을 보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선영은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원래 박강현이 사람을 아낄 줄 안다고 생각해서 안심하고 시연이가 그 자식과 함께 하도록 내버려 둔 건데 이렇게 분별이 없는 사람일 줄은 몰랐어요. 어쩐지 시연이가 강현이에 대한 감정이 너무 식었다 싶었어요.”

“당신도, 이런 일들을 일찍 조사하지 않고 뭐 했어요? 시연이만 그렇게 많은 억울함을 당했잖아요.”

안필훈은 아내에게 달달 들볶였지만 감히 반박하지 못했다.

사모님은 책상을 ‘탁' 쳤다. 그녀는 뮤지컬 계의 예술가로 몸과 마음을 다스린 지 오래되었고, 이미 여러 해 동안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지금 당장 박강현한테 전화해서 오라고 해요. 시연이는 이 분을 참을 수 있을지 몰라도 난 못 참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