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뭐라고?”

이시연은 자기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박강현은 쌀쌀하게 방금 한 말을 반복했다.

“하고 있는 모든 일을 멈추고, 진정되면 다시 돌아오라고. 네가 맡은 그 영화 프로젝트도 잠시 비서에게 넘겨.”

이시연은 몸을 흠칫했다.

“네가 뭔데?”

그녀는 심호흡하고 나서야 겨우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

“다른 일은 안 해도 돼. 이 영화 프로젝트는 내가 직접 계약서를 따 온 거니 네가 가져갈 권리가 없어.”

박강현은 무슨 우스갯소리를 들은 듯 피식 웃었다.

“네가 계약한 거? 무엇으로 계약했어? 내 인맥 자원이 없다면 프로젝트 책임자가 너를 만날 거로 생각해? 이시연, 너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니야?”

이시연은 갑자기 낯설어진 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번 훑어보았다.

“내가 너의 인맥 자원에 의지한다고? 박강현,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양심이 없는 거야? 넌 내가 직접 챙겼고 네 모든 자원은 내가 알아서 해결했어. 이제 와서 내가 너한테 의지하고 있다고?”

남자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이시연, 너 옛날얘기 하고 싶어? 예전에는 이렇게 억지 부리지 않았잖아?”

이시연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본 박강현은 마음이 조금 아팠다.

“이시연, 그만해. 아무도 내 마음속의 네 자리를 대신할 수 없어.”

이시연은 우습다고 생각했다.

“조민아는? 그 여자는 뭔데?”

박강현은 짜증스러운 기분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나는 민아를 여동생으로만 생각한다고.”

그녀는 손을 들어 눈을 가리고 나서야 시고 떫은 느낌을 억제했다.

“박강현, 자신을 속이지 마. 조민아가 귀국하고 네가 내 매니저 자리를 없애고 싶어 했을 때부터, 난 네 마음속에서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아니었던 거야.”

“너!”

박강현의 마음속에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민아는 민아고, 매니저 자리랑 아무 상관없어. 매니저를 바꾼 건 그냥 패션계의 자원이 필요해서. 그때 마침 그 사람이 있었고. 내가 쓸데없는 말 싫어하는 걸 알잖아. 하지만 그래도 난 너를 위해 계속 설명했는데 넌 왜 만족하지 못하는 거야? 게다가 매니저를 그만둔 뒤에야 하고 싶었던 감독과 촬영을 발전시킬 수 있는 시간이 생기는 거잖아. 안 그래? 널 위해서 그런 건데 이것도 잘못한 거야?”

이시연은 그의 마지막 말에 화가 나서 웃었다.

‘나를 위해서 그랬다고?’

그때 박강현은 그 매니저가 가지고 있던 자원을 원했고, 마음속으로는 이미 이시연을 뺄 생각이 있었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을 뿐이었다.

이시연이 눈치챈 후 그 사람의 자원을 제대로 손에 넣기 위해 자진해서 사임했다.

하지만 지금 박강현은 그녀를 위해 한 것이라고 한다.

이시연은 문득 자신이 지난 5년 동안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박강현은 그녀가 이렇게 이성을 잃은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눈동자가 붉어지고 자신을 의심하며 온몸에 가시를 세우고 있었는데 손을 내밀면 찔려 피가 흐를 것 같았다.

박강현은 이런 이시연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가 키우는 '시연 고양이'는 깨끗하고 고귀하며 도도하게 그의 주변을 맴돌아야 한다.

“이시연, 그만해.”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감정을 억눌렀다.

“네가 그 팔찌를 좋아한다면 며칠 후에 가져올게.”

이 말에 이시연은 주먹으로 솜뭉치를 내리치는 듯한 무력감을 느꼈다.

그녀가 이러는 게 박강현의 눈에는 그저 억지를 부리는 것이었다.

그냥 팔찌를 갖고 싶은 거라고 하지만 이건 분명히 그녀를 짓누르는 마지막 짐이었다.

박강현은 그녀의 안색이 풀리지 않자 또 한마디 했다.

“네가 내 매니저가 되고 싶은 거라면 2년만 더 안정되면 너한테 돌려줄게? 응?”

그녀는 혀끝에 쓴맛이 감도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이젠 다 싫어.”

‘너도 이젠 싫어졌어.’

박강현은 그녀의 절망적인 말투에 정신이 사납다.

“그럼 뭘 원해? 프러포즈? 좋아. 올해 말에 일이 안정되면 약혼식하고 내년에 결혼하자.”

이시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바라던 아름다운 미래도 지금 이 순간 그다지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필요 없어.”

박강현은 침묵을 지키며 냉담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인내심도 그 순간 사라졌다. 그녀는 눈을 들고 또박또박 말했다.

“너랑 헤어지기만 하면 돼.”

박강현은 순간 마음이 조여왔는데 머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손은 이미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이시연, 너는 정말 고집불통이야!”

그녀가 눈을 감자 눈물이 주르륵 흘러 줄 끊어진 구슬처럼 박강현의 손등을 내리쳤다.

그는 뜨거움을 느끼고 나서야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깨닫고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이시연을 알고 지낸 지 7년, 함께한 지 5년, 아무리 힘들어도 눈물 흘리는 걸 본 적이 없다.

박강현은 당황했지만 그 감정도 잠시뿐이었다.

그는 이시연이 자신을 사랑하고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시연,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널 너무 오냐오냐해서 이렇게 함부로 이별을 말하게 된 거야. 기분이 안 좋으니 일을 잠시 접고 돌아가서 잘 생각하고 다시 만나자.”

그는 명령하듯 말하고는 몸을 돌려 떠났다.

이시연은 그 자리에 서서 오랫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때 카톡이 눈치 없이 문자 몇 개를 띄웠다.

박강현은 팀 총책임자였다.

[이시연 씨, 모든 일을 잠시 중단하세요. 최근에 진행하던 영화 프로젝트에 관해서도 잠시 비서에게 인수인계하시고요.]

그리고 그녀의 비서에게 특별히 한 번 더 통지했는데 이시연은 이 모든 것이 가소롭게만 느껴졌다.

그녀는 더는 여기에 머무르고 싶지 않아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

긴 복도 끝에 이르자 안방에서 가십 소리가 들려왔다.

“강현 오빠가 정말 이시연 씨 하던 일을 다 멈추라고 했어요?”

“물론이죠. 제가 똑똑히 들었어요. 사람은 역시 겸손해야 해요. 전에는 유명 배우가 좋아한다는 것을 믿고 종일 나대더니 이젠 어떻게 까불지 두고 봐요.”

“그러니까요. 고아 주제에 회사에 올 자격도 없어요.”

“지금 모든 일을 중단했으니 강현 오빠가 회사에서 쫓아내는 건 시간문제예요.”

누군가 문을 나서다가 마침 이시연과 시선이 마주쳤다.

“어머, 강현 오빠가 좋아하는 그분 아니에요?”

그녀는 버리려고 했던 반쯤 식어버린 차 반 잔을 이시연의 몸에 부었다.

“미안해요, 손이 미끄러워서요.”

이시연은 직접 그 컵을 그녀의 발 옆에 깨뜨렸다.

이 사람은 박강현 팀의 홍보 책임자인데 늘 박강현을 따라다닐 수 있는 이시연을 질투해 그녀에게 불만이 많았다.

“뭐 하는 거야?”

그녀가 소리 질렀다.

“일을 전부 중단당했으면 팀에서 쫓겨나는 건 시간문제야. 상갓집 개가 감히 여기서 짖다니!”

이시연은 차갑게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며 대답했다.

“그렇게 내가 가는 걸 보고 싶어 하는데 나를 대신해서 박강현 옆에 있겠다는 거야?”

“너!”

“그럼 실망이 크겠네.”

그녀는 조롱하듯 피식 웃었다.

“오늘 실시간 뉴스를 봤지? 내가 있든 없든 너에겐 기회가 없어.”

그 사람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시연은 덤덤하게 구경하러 나온 다른 사람들을 훑어보다가 말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야.”

그녀는 발걸음을 옮겨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그때 뒤에서 그녀의 한마디가 들려왔다.

“나에게 기회가 없다니. 너도 마찬가지잖아. 몇 년 동안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어! 버려진 개가 뭐가 그리 득의양양해!”

이시연은 걸음을 멈칫했다. 심장이 무언가에 세게 찔린 것처럼 아파졌다.

기분이 우울해진 그녀는 택시를 불러 숙소로 돌아갔다.

송운 별장은 강현시에서 가장 유명한 부자 동네이지만 이곳 집은 돈만 있으면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녀를 아는 사람들이 그녀가 여기에 있는 것을 본다면 분명 그녀를 비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밖 경비원은 그녀를 보고는 공손히 문을 열어주며 인사를 건넸다.

“이시연 씨 오셨어요?”

그녀는 예의를 갖춰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가운데 있는 집으로 걸어갔다.

여기는 그녀의 거처가 아니라 아저씨 유태경의 집이었다.

유씨 가문은 국내 최고 갑부이고 이시연의 부모님은 유태경의 형 부부와 옛 친구였다.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후 그녀는 그들에게 입양되어 유씨 가문에서 자랐다.

혈연관계가 없어도 유씨 가문은 그녀를 잘 대해주었지만 그녀는 이 모든 것을 태연하게 즐길 수 없었다.

유씨 가족은 모두 능력자들이었다. 그녀도 자신의 노력에 의지하여 사업을 이루고 싶었는데 그렇게 해야만 유씨 가문의 보살핌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시연은 사실 여기서 살지 않은 지 오래되었는데 오늘은 길을 잃은 것처럼 유씨 가문 말고는 갈 곳이 없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