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맙소사,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어떻게 이런 걸 생각한 거지.’“너무 가까워서 이상하게 느껴져.”임유진이 말했다.“그래.”그가 손을 놓더니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책상 위의 물건을 정리했다.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볼을 만졌는데, 매우 뜨거웠다.“참, 누나, 아까 가까웠을 때 키스하고 싶었어?”그가 갑자기 질문하자 그녀는 순간 멍해졌다.새까만 눈동자가 깜박거리자 그녀는 손바닥 아래로 볼이 더 뜨거워진 것 같았다.“질문에 대답하기 어려워?”그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나…… 나는 당연히…….”“누나라면 난 좋아.”그가 그녀의 말을 끊고 말했다.“나는 다른 여자가 나에게 키스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그러나 만약 누나라면 나는 괜찮아.”햇빛이 그 좁은 유리창을 통해 방안으로 쏟아져 그의 몸에 떨어졌다.그의 표정은 마치 그녀에게 그의 말이 결코 농담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진지했다.한순간, 그 뒷부분의 ‘너를 동생으로 생각한다’는 말은 마치 목구멍에 걸린 것처럼 나오지 않았다.————오후에 임유진은 아주 한가했다. 휴대전화를 닦을 때 소민영에 관한 뉴스를 보았다. 뉴스에서 소민영이 어젯밤에 병원에 실려 갔다고 했다. 어떤 사람에게 미움을 사서 한쪽 발이 골절이 되었다고 하는데 치료 후에 또 어떤 후유증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이 때문에 며칠 뒤 소 씨 가문과 진 씨 가문 두 집안의 약혼식에 소민영은 참석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기사를 내보낸 파파라치 기자는 소민영이 도대체 누구에게 미움을 샀는지 아직 알아내지 못했지만, 소 씨 가문의 태도는 지금 모호하고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일을 추궁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그래서 이 기자는 소민영이 미움을 산 사람은 아마도 배경이 소 씨 가문 위에 있을 것이기 때문에 소 씨 가문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임유진은 이 뉴스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다시 고개를 들어 강지혁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다쳤을 때, 그는 소민영이 대가를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은 결국 자신에게 의지하는 것보다 못해. 오직 자신에게 의지해야만 아무런 실망도 없을 거야.”그렇지 않으면 기대가 커질수록 실망도 커진다.“그런데, 나는 누나의 배후가 되고 싶은데, 어떡하지?”그는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고 한가로이 그녀를 바라보았다.“만약 혁이라면…….”그녀는 웃으며 말했다.“좋아, 나는 앞으로 혁이가 내 배후가 돼주기를 기다릴게.”“왜 갑자기 마음을 고쳐먹었어?”그가 물었다.“혁이는 나를 실망하게 하지 않을 거니까, 왜냐하면…….”그녀는 잠시 주춤했다.“너는 어쨌든 나를 버리지 않을 거야, 그렇지?”그는 그 말을 듣고 낮게 웃었다.“맞아, 나는 누나를 버리지 않을 거야.”————밤, 강지혁은 임유진이 깊이 잠든 것을 본 후에야 임대주택을 나와 임유진이 사는 임대주택에서 멀지 않은 한 집으로 왔다.다만 임유진의 그 좁은 임대주택과 달리 이 스위트룸은 넓고 밝으며 훨씬 크고 인테리어도 상당히 신경을 썼다.그리고 이때 고이준은 방에서 강지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리자마자 문을 열고 BOSS를 맞이했다.고이준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이 BOSS 는 평소에 아무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는데 신분을 낮춰 누군가를 돌본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다. 하지만 임유진을 돌보기 위해 뜻밖에도 직접 이 동네의 집 한 채를 샀다. 그리고…… 그것은 임유진이 잠든 틈을 타서 편리하게 업무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고이준은 낮에 회사의 일을 보고하고 있다. 보스는 낮에 임유진을 돌보느라 바쁘니 말이다.강지혁은 한들으면서 신속하게 지시를 내린 뒤 고이준에게 직접 해외지사의 임원들과 연락해 영상회의를 진행하라고 분부했다.그러자 잠시 후 해외 지사 임원들이 스크린에 등장하며 회의를 시작했다.그러나 어떤 임원들은 강지혁이 지금 처한 배경에 대해 비교적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이 방의 인테리어는 비교적 정교한 편이지만, 그것은 단지 평범한 소시민에 비할 뿐
바로 그때 강지혁이 통화를 끝내고 고이준에게 말했다.“오늘 못다 한 회의는 고비서가 마무리하고 정리해서 나한테 전해줘.”“강 대표님은요?”“임유진이 잠에서 깨고 지금 나를 찾고 있어, 이만 돌아가 봐야겠어.”지혁이 말을 이었다.“회의의 대체적인 흐름은 이미 파악을 끝냈고 자잘한 문제는 네가 알아서 처리해 줘.”말을 마치고 지혁은 곧장 방을 나갔다. 기다리고 있던 해외 고위층들은 대표가 떠나는 모습에 다시 술렁였다.그리고 이준의 등장에 사람은 저마다 입을 열었다.“고 비서,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강지혁 대표는 어딜 가시는 겁니까?”“아까 누구의 전화였습니까?”“방금 통화하신 모습을 보아하니 연애 중인 게 분명해요.”해외 로맨티스트가 입을 열었다.이준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자자, 회의를 이어가도록 하죠.”‘연애? 대표님이 지금 연애를 하는 거라고 할 수 있나?’착잡해진 이준이었다.정말 지혁이 유진이랑 연애라도 한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전 도시가 술렁일 게 분명했다!-전셋집에서.유진은 이제야 돌아온 지혁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왜 이렇게 늦었어? 일어났는데 없어서 깜짝 놀랐잖아.”‘사고라도 생긴 줄 알았네.’“잠이 오지 않아서 밖에 나갔다 왔어.”지혁이 대답하며 방금 침대에서 내려온 유진을 다시 공주님 안기로 침대 위로 조심스레 올려놓았다.“이젠 어디도 가지 않을 테니까 다시 자. 옆에 꼭 붙어있을게.”“다음에 내가 잠이 들었는데 나갈 일이 생기면 쪽지라도 남겨줘.”“알겠어.”지혁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 누나, 나 내일 저녁 약속이 있어. 잠시 나갔다 올게.”“회사 일인 거야?”유진이 물었다.“그런 셈이지.”“그런데 크게 중요한 약속 자리는 아니야. 참석하지 않아도 큰 문제가 없긴 한데.”“아니야, 일 보러 가. 나 혼자 있어도 돼. 이틀 동안 발이 크게 아프지도 않았어. 이젠 가볍게 움직일 수도 있는걸.”오히려 지혁이 계속 품에 껴안고 옮겨주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강지혁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치 지혁에겐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그러나 고이준은 이런 지혁도 부드러운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걸 알고있다. 예를 들어 임유진에게 전화를 걸 때와 같은 상황에서 였다.이준은 강 대표의 눈은 늘 차가운 게 아니라 예외인 경우도 있다는 그때 알아차렸었다.“대표님, 차는 이미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어요.”이준이 말했다.“그럼 이만 나가지.”지혁이 덤덤하게 말했다.오늘 밤엔 소씨 가문과 진씨 가문, 양가의 약혼식이 있었다. 전에는 참석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소민준, 유진과 만났었던 남자. 유진의 마음속에는 이미 그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고 두 사람이 다시 만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러나 지혁은…… 일말의 가능성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유진과 민준이 다시 만날 가능성이 단 1%도 없었으면 했고, 오늘 밤 이야말로 그 남은 1%의 가능성마저 말살되는 날이었다.그러니 이 약혼식을 지혁은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유진은 전셋집에서 저녁밥을 먹고 따분한 마음에 핸드폰을 꺼내 들고 무료하게 이것저것 살펴보고 있었다.오늘 모든 소셜 미디어에서 소씨 가문과 진씨 가문의 약혼식에 대한 기사를 떠들썩하게 말하고 있었다. 비록 약혼식에 불과했지만 재벌에게 있어 이러한 약혼식은 거의 결혼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약혼식은 결혼 전의 작은 절차일 뿐이었다.유진은 기사에 실린 사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민준이 꿈에 그리던 약혼식 사진이었다.하얀색 예복을 입은 진세령과 하얀색 턱시도 차림의 민준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한 쌍의 어울리는 커플 같아 보였다.기사 아래로 수많은 사람이 부러운 마음을 담은 댓글을 썼다.“잘생기고 예쁘고 돈 많은 사람들의 약혼이라, 정말 재벌의 스케일은 다르네!”“너무 어울린다.”“진세령이 고른 남자인데 당연히 대단한 사람이겠지!”세령의 팬들은 오늘의 약혼식이 얼마나 호화로웠는
어릴 때부터 임유진은 아버지의 칭찬을 갈구하고 새어머니의 미움을 받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모든 사람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갔다. 많은 것을 얻었지만 너무 피곤한 삶이었다.소민준과의 연애가 유진에게 남긴 건, 세상에 마음 편히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었다.하지만…… 혁은 유진을 또다시 의지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 혁을 떠올리기만 해도 유진은 슬그머니 미소를 짓게 되었다. 출소 이후 가장 행운이었던 건 아마도 혁을 만난 것일 것이다.유진은 이러한 생각을 하며 웹페이지를 아무렇게나 둘러보고 있는데 호텔 입구에서 강지혁을 목격했다는 글을 확인했다. 지혁의 주변에는 경호원으로 둘러싸여 사진 촬영이 거의 불가능했으며 기자들도 사진 한 장 건지지 못했다고 했다.만에 하나 찍힌 사진은 현장에서 모조리 삭제되었고 이는 너무 횡포다운 행동이었지만 지혁의 이러한 횡포는 모두 자본에서 나온 것인 만큼 아무도 뭐라고 할 수 없었다.이 목격 글을 올린 사람은 자신이 목숨을 걸고 지혁의 뒷모습을 촬영했다고 했다.지혁은 예전부터 기자들의 인터뷰를 거절하고 인터뷰를 자주 하지 않기로 소문난 신비주의자였다.심지어 유진이 지혁의 약혼녀 진애령을 죽일 뻔한 죄목으로 감옥에 들어가던 해에도 유진은 지혁을 만나지 못했었다.법정 내내 지혁은 단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었다.한지영의 말에 따르면, 일전에 지혁을 만나 진애령의 죽음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려고 지혁을 찾아갔으나 얼굴 한번 만나보지 못하고 쫓겨났었다고 했다.유진은 가끔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을 뒤집어 보며 정말 헛웃음이 나왔다. 지혁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지만, 유진의 인생은 무슨 이유인지 지혁과 계속해서 연결된 것 같았다. 유진이 사고에 휩쓸리고 아무도 유진을 변호하지 않아 감옥에 수감되고 감옥에서 온갖 수모를 당한 것도 어쩌면 지혁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유진은 그 게시물을 가장 아래로 당겨 찍힌 사진을 확인했다. 경호원들에게 겹겹이 둘러싸인 그 뒷모습이 어쩐지 눈에 익숙했다.넓은 직각 어
“촉이 틀렸나 보지 뭐.”강현수가 힐긋 시선을 돌리자, 연회장 안을 두리번거리는 한 여인을 발견했다.“이 자리에도 있어. 소개해 줄까?”강지혁이 현수의 시선을 따라갔다가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임유라?”“설마 아는 사이야?”지혁의 반응에 현수가 오히려 의아한 반응이었다. 지혁과 유라의 연결고리를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기에.“그런 셈이지.”지혁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네 새 여자친구분 말이야. 네가 그 사람한테 정말 진심이라면 앞으로 말썽을 일으키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말해줘. 사고가 벌어진다면 너라도 감당하지 못할 거야.”“널 건드린 적 있어?”현수가 눈을 가늘게 뜨고 지혁을 바라보았다.“날 건드렸다면 지금 이 자리에 멀쩡하게 나타날 수 있을 것 같아?”지혁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앞으로의 처신은 똑바로 하는 게 좋을 거야.”이 말을 끝으로 지혁이 그 자리에서 벗어났고 마침 유라가 현수를 발견하고 쪼르르 달려왔다.“현수야!”유라는 현수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연회장에 처음 들어올 때부터 유라는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공인들이며, 연예계의 유명 인사들을 눈에 담았다. c급 연예인으로서 유라는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게 꿈만 같았다.그리고 유라는 이 모든 게 현수 덕분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도착해서 연락하지 그랬어. 그러면 문 앞으로 데리러 갔을 텐데.”현수가 손을 들어 유라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유라는 지금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유명 인사와 연회장을 함께 누비고 있다니 정말 믿기지 않았다.‘다들 강현수가 연예계의 큰손이라고 했어. 그의 눈에 든 사람이면 무조건 대박이 나고!’그리고 그 소문은 사실이었다. 촬영장에서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무명 배우 신세이던 유라는 현수를 만나고 촬영장 스태프들의 명백한 태도 변화를 느꼈다.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들어오자마자 네가 보였는 걸.”유라가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현수의 팔에 손을 걸었다.“아, 오늘 유명한 연예인들 많이 만났어. 전에
‘내 입술이 예쁜 편인가?’임유라는 조금 의아스러웠다. 자신의 이목구비에서 입술은 눈에 띄는 편이 아니었다. 그리고 너무 못생긴 입술만 아니면 보통 입술에서는 크게 차이가 없지 않은가.그래서 유라는 강현수가 자기 입술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걸 예상하지도 못했었다.어찌 되었든 현수의 마음에 든 건 유라의 행운이었다!‘어떻게든 강현수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가장 핫한 여배우가 되겠어! 그리고 어쩌면…… 재벌가에 시집을 가서 팔자를 고칠 수 있을지도 몰라!’유라는 벌써 자신의 호화로운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이 점점 흐려지고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아, 혹시 강지혁이라는 사람을 알아?”강현수가 갑작스레 물었다.유라가 고개를 저었다.‘강지혁 같은 사람을 내가 어떻게 알아?’강현수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앞으론 말썽을 피우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정말 강지혁의 눈 밖에 난다면 나도 감당할 수 없어.”솔직히 말한다면 감당하고 싶지 않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었다.강현수에게 있어 유라는 그냥 대역에 불과했다. 그리고 겨우 대역 때문에 강현수와 맞설 필요는 없었다.강현수의 눈은 마치 안개가 씌운 것처럼 흐려졌다.‘지금껏 얼마나 오랫동안 그녀를 찾아왔던가.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대역으로 그녀의 빈자리를 채워야 하는 걸까.’‘그 사람…… 그 사람을 찾아서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말해주고 싶어!’-약혼식이 시작되기 전 소민준이 직접 지혁을 만나러 찾아왔다.“강 대표님, 저와 세령 씨의 약혼식에 참석해 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소민준씨 약혼식에 응당 참석해야 지요.”지혁이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아 그때 임유진 씨하고 확실하게 헤어진 건 참 잘하셨어요. 만약 당신이 매몰차게 떠나지 않았다면 임유진 씨는 아직도 단념하지 않았을 거예요.”그 말에 민준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대꾸하기가 참 난처했다.“아, 그쪽 여동생은 아직도 얼마나 더 입원해야 합니까?”지혁이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소민준은 몰래 발걸음 소리도 내지 않고 자리에서 벗어났다.약혼식이 시작되고 강지혁은 민준과 진세령이 약혼반지를 교환하고 소감을 전하는 모습을 보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아마 내일 소민준과 진세령의 약혼식 사진이 공개되고 나면 임유진과 소민준은 정말 아무 가능성도 없는 사이가 되겠지.’약혼식이 끝나고 두 사람을 향한 축하 인사가 쏟아졌다. 그러나 지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뚜벅뚜벅 연회장을 벗어났다.회색 벤틀리가 문 앞에 주차되어 있었다. 이어 고이준이 공손히 차 문을 열었고 지혁이 차에 올랐다.“대표님, 지금 전셋집으로 돌아갈까요?”이준이 물었다.“그래.”지혁은 편하게 자세를 고쳐 앉으며 대답했고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오늘, 강현수의 새 여자친구가 가장 놀라운 발견이었다. ‘강현수가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이 임유진의 배다른 동생 임유라일 줄이야.’‘내가 보기엔 잘난 게 하나 없는 여자인데 현수는 대체 어디가 마음에 들었는지 몰라.’하지만 다른 사람의 연애사에 자신이 뭐라고 할 자격은 없었기에 지혁은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유라가 유진을 괴롭히지만 않는다면 다시 만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유라가 유진의 손끝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유라는 그날로 천만 배의 수모를 받게 될 것이다.“대표님, 진회장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먼저 자리를 비우신 게 어딘가 불쾌한 부분이 있어 그런 건 아닌지 걱정이 된 것 같습니다.”이준이 운전하다가 입을 열었다.“다시 전화를 걸어 오늘 저녁 약혼식에서 불쾌한 부분은 없었다고, 그냥 몸이 불편해서 먼저 돌아간다고 전해줘.”지혁이 대답했다.‘임유진의 전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와 정식으로 약혼한다는데 참석은 해야 할 것 아닌가?’차는 어느새 전셋집이 있는 동네에 도착했고 지혁이 차에서 내려 좁은 문 앞에 서서 열쇠를 꺼내 들었다.방안에는 어두운 불빛 하나만이 비춰 들고 있었다.유진은 그 어두운 빛을 빌려 뜨개질을 하고있었다. 지혁이 돌아오자 유진은 환하게 웃으며 지혁을 반겼다.“돌아왔어? 밖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
“그럼 어떻게 하면 끝내줄 건데요? 뭐 하룻밤 같이 자 줘요? 아니면 백연신 씨가 만족할 만큼 다시 연애하는 것처럼 연기라도 해줘요?”한지영이 비아냥거리며 말을 이어갔다.“백연신 씨 좋다는 여자들 많잖아요. 그런데 왜 꼭 나여야 해요? 아니, 그건 또 아니었지. 꼭 나여야 하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헤어지자고도 안 했을 테니까.”“너한테 나라는 인간은 대체 뭐야?”백연신이 한지영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한지영 역시 그 눈빛을 피하지 않으며 답했다.“한때 사랑했던 사람, 그리고 더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 나한테 백연신 씨는 딱 그 정도의 사람이에요. 우리 두 사람은 가는 길이 다른 사람이고 인생관도 너무 다른 사람이에요. 당신은 제일 중요한 게 사업이고 가문이지만 나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평범하고 단란하게 사는 게 더 좋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나는 백연신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약한 사람이라 같은 고통을 두 번은 못 겪어요.”두 사람은 살아온 환경, 그리고 그로 인한 인생을 대하는 태도, 이런 것들이 너무나도 다르기에 어쩌면 처음부터 이어지지 않을 인연이었는지도 모른다.백연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일어나더니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달빛 아래의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창백하고 또 어두웠다.“네 말이 맞아... 나 좋다는 여자들도 많고 꼭 너여야 하는 것도 아니야.”백연신은 시선을 내린 채 입꼬리를 조금씩 위로 올렸다.5년이다. 5년을 숨죽이고 드디어 고씨 가문을 사지까지 내몰았는데 그 시간 동안 한지영은 서서히 그의 존재를 지워가고 있었다.백연신은 분명히 웃고 있었지만 한지영은 그가 꼭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마음 한구석이 욱신거리며 숨이 가빠왔다.‘아파하지 마. 백연신 때문에 아파하지 마! 잊기로 했잖아. 이제는 다 잊기로 했잖아. 그러니까 흔들리지 마!’한지영은 속으로 끊임없이 이렇게 되뇌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게서 두 눈을 떼지 못했고 심장은 계속해서 아파 났다.백연신은 시선을 내린 채 끝까
한지영의 목소리를 참 좋아했던 백연신이었지만 오늘은, 지금은,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밉고 잔혹하게 들려와 귀를 막고 싶을 정도였다.충격이 컸던 건지 백연신의 얼굴은 서서히 하얗게 질려갔다.“날... 안 좋아해?”고작 다섯 글자를 내뱉는 건데도 그는 무척이나 힘이 들어 보였다.“백연신 씨를 계속 사랑하고 있었으면 소개팅 같은 건 나가지도 않았겠죠. 다시 연애할 생각 같은 것도 안 했을 거고요.”한지영이 말했다.“백연신 씨를 좋아했던 건 맞아요. 사랑도 했고요. 하지만 헤어졌잖아요.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에요. 어른이면 어른답게 질척거리지 말고 깔끔하게 끝내요.”“깔끔하게 끝내자고?”백연신이 쓰게 웃었다.‘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네가 다쳤을 때 내가 널 살리겠다고 무슨 짓을 했는지, 네 안전을 위해서 내가 어떤 일까지 했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내가 틀린 말 했어요?”“날 안 좋아하면 연우진 그놈을 좋아하는 건가?”백연신은 자기가 물어봐 놓고 한지영이 대답하기도 전에 자기가 다시 확신을 가지며 답했다.“아니. 넌 연우진 안 좋아해. 연우진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었으면 내가 너한테 키스했을 때 내 따귀를 때리고 살점을 물어뜯어서라도 날 멈추게 했을 거야.”한지영은 그 말에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꼭 맹수에게 쫓기다 궁지에 몰린 아기 고양이 같았다.하지만 심적으로 궁지에 몰린 건 그녀가 아닌 백연신이었다.“한지영, 너는 한순간도 연우진을 좋아해 본 적 없어. 아니야?”백연신은 얼른 그렇다고 말하라는 듯한 눈빛으로 한지영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한지영은 숨을 한번 들이켜더니 곧바로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그래서? 우진 씨를 좋아하지 않는 게 뭐? 내가 우진 씨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백연신 씨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요.”한지영은 말을 마친 후 갑자기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백연신은 그녀의 행동에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고 얼굴은 더 하얗게
백연신은 침대 바로 옆에까지 다가오더니 갑자기 몸을 아래로 기울이며 한지영을 가두듯 양손을 그녀의 몸 바로 옆에 올려놓았다.그러고는 타버릴 것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한지영, 나는 단 한 번도 너를 쉬운 여자라고 생각해 본 적 없고 단 한 번도 너를 멋대로 휘둘러도 되는 여자라고 생각해본 적 없어!”누가 감히 자기 목숨을 쉬운 거라고, 언제든지 휘두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한지영은 갑자기 코앞까지 다가온 그의 얼굴에 순간 몸이 굳으며 이성을 놓칠 뻔했다가 간신히 다시 정신을 다잡고 뒤로 몸을 움직였다.하지만 얼마 움직이지도 못하고 금방 벽에 부딪혀버렸다. 그리고 백연신은 벌어진 거리 만큼 다시 앞으로 몸을 움직이며 더 바짝 다가왔다.“하... 내가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알아?”낮게 깔린 목소리가 한지영의 귀를 간지럽히며 이내 그녀의 마음마저 뒤흔들려고 했다.그래서 한지영은 얼른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그와 눈을 마주하는 것을 피했다. 이대로 계속 그와 눈을 마주쳤다가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뛰어버릴 것 같았으니까.백연신은 한지영의 옆얼굴을 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지난 5년간, 단 하루도 네 생각을 안 했던 날이 없었어. 단 하루도 후회하지 않았던 날이 없었어. 내가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그때 내가 제대로 해결했으면 우리는 지금쯤 무사히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행복하게 살았을 테니까...”한지영은 그 말에 흠칫하더니 곧바로 다시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그만 해요. 이제 와서 그런 말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지영아, 나는 단 한 번도, 아니, 단 한 순간도 고은채를 사랑한 적이 없어. 좋아한 적도 없어.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한지영 너였어.”백연신은 5년을 꾹 참았던 말을 드디어 입 밖으로 꺼냈다.지난 5년간은 아무리 한지영이 보고 싶어도, 아무리 한지영을 안고 싶어도 그저 마음속으로만 그녀를 그리워하고 그녀를 껴
백연신은 앞머리를 전부 깔끔하게 뒤로 넘긴 채 검은색 슈트 셋업을 입고 있었다. 아까 한지영이 인터넷을 검색하며 봤던 기자들 앞에서의 모습과 똑같은 모습이었다.그래서일까, 한지영은 백연신이 눈앞에 있는 게 어쩐지 조금 현실감이 없게 느껴지기도 하고 또 이상한 느낌도 들었다.백연신과 한지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그러기를 몇 분, 더는 못 참겠던지 한지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12시가 넘었어요.”“알아.”그리고 곧이어 백연신의 입에서도 말이 흘러나왔다.‘안다고? 아는 사람이 왜 안 나가고 계속 거기 앉아있어? 아니, 애초에 내 방에는 왜 들어온 거야?’한지영은 이해를 못한 채로 그를 바라보다 이내 이 집은 원래 그의 것이라는 깨닫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늦었는데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왔어요?”“너 보러.”백연신은 이 방에 들어온 뒤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거의 한 시간 가까이 한지영을 바라보았다. 그저 자는 얼굴을 바라만 보는 건데도 마음이 녹고 또 행복했다.한지영의 잠버릇은 여전했다. 또 어떤 기이한 꿈을 꾸는지 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왔다 갔다 했다가 갑자기 이를 갈고, 또 어느 순간에는 헤벌쭉 웃어댔다.전에 그와 함께 취침했을 때와 다를 거 하나 없었다.그래서 더 좋았다.“잘 자더라.”백연신이 말을 이어갔다.“그런데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어. 다음에는 킹사이즈 침대로 주문할까 봐. 그러면 쉽게 떨어지지 못하겠지.”한지영은 그의 말에 땀이 삐질 흘렀다.‘고작 나 자는 거 보려고 이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왔단 말이야...?’“낮에 고은채 씨 기자회견 봤어요. 이제 다 해결됐으니까 이만 집으로 돌아가도 되죠?”한지영은 화제를 돌렸다. 언제쯤 돌아갈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기도 했고 말이다.“그렇게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당연한 거 아니에요? 행동을 제한받은 채로 생활하는 걸 즐기는 사람은 없잖아요.”백연신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한지영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백연신과 고은채가 진작 헤어진 거라면 한지영은 파렴치한 상간녀도 아니고 염치없는 세컨드도 아니니까.“응, 아마도.”한종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지영아, 이제 사건도 일단락됐으니까 밖에 있는 사람들한테 물어봐. 언제쯤 집에 갈 수 있는지.”“근데 여보, 연신이 말이에요. 혹시 우리 지영이한테 아직 마음이 남아있는 거 아닐까요? 지영아, 너 혹시 연신이랑 다시 잘해볼...”“엄마, 전에도 말했잖아요. 백연신 씨와는 두 번 다시 사귈 일 없다고. 그러니까 괜한 생각하지 마세요.”한지영이 단호한 목소리로 이해영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이해영은 그런 딸의 태도에 저도 모르게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사실 그녀는 처음 봤을 때부터 백연신을 꽤 좋게 보고 있었으니까. 물론 한지영이 아플 때 헤어짐을 고한 건 지금 생각해도 괘씸하지만 근 5년간 딸이 남자와의 만남을 피해온 것도 그렇고 백연신이 얼마 전에 한지영의 손을 사라진 것도 그렇고 어쩌면 두 사람 모두 아직 서로를 마음에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그래, 그만해. 그놈이 뭐가 좋다고 다시 우리 지영이와 이어주려고 그래? 지영이가 병상 위에 있을 때 헤어지자고 했던 놈이야. 아무리 지금 잘나간다고 해도 나는 그놈한테 우리 지영이 못 줘! 그놈 아니면 우리 딸이 시집 못 간다고 해도 평생 내가 끼고 살고 말지 그놈한테는 안 줘!”한종훈이 미간을 찌푸리며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그냥 해본 말이에요. 나라고 뭐 우리 지영이 안 소중한 줄 알아요?”한종훈과 이해영 사이에 팽팽한 분위기가 형성되자 한지영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말렸다.“자자, 그만 해요. 두 분 다 이곳에 오래 갇혀 있어서 지금 많이 예민해진 것 같아요. 아빠 말대로 이제 사건도 일단락됐으니까 내가 이따 밖에 있는 경호원한테 언제쯤 나갈 수 있는지 물어볼게요. 내 생각에는 아마 내일쯤이면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하지만 저녁 식사를 마치고 경호원에게 언제쯤이면 이곳에서 나갈 수 있냐고 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