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들어.”강지혁이 미소를 지으며 손에 쥔 상표를 내려놓았다.“누나, 앞으로 내가 수천수만 벌의 스웨터 사 줄게. ““수천수만 벌의 스웨터를 내가 다 어떻게 입어.”임유진이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 이리 와봐. 손 크기를 재야겠어.”그리고 유진은 지혁의 손을 잡아당겨 줄자로 지혁의 손 크기를 재기 시작했다.맞닿은 두 손에 지혁은 유진의 손이 아주 차갑다는 게 느껴져 인상을 썼다.“뜨개질 그만 해요. 손이 너무 차잖아요.”“난 괜찮아. 아, 손 좀 그만 움직여. 지금 크기 재고 있잖아.”유진은 중얼거리며 다시 지혁의 손을 잡아당겨 유진이 원하는 방향으로 고정시켰다.“이 정도면 너무 차가운 편도 아니야. 지금은 그래도 방 안에 있잖아. 전에 새벽이랑 밤에 길거리 청소하는 일을 했을 땐 장갑을 껴도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차가웠어.”유진의 말에 지혁은 눈앞이 조금 흐려졌다. 핑 도는 눈물이 지혁의 양심을 콕콕 찔렀다. 사실 지혁은 얼마든지 유진의 고달픈 생활을 반전시켜 줄 수 있었다.처음에는 그저 호기심 뿐이었다. 그래서 유진을 자신의 옆에 두고 누나라고 부르며 따랐지만 이젠 그런 호기심을 넘어선 감정이 찾아왔다. 지혁은 유진을 자신의 옆자리에 두고 싶어졌고 힘든 일 궂은일은 다시 하지 않게 하고 싶어 졌다.“자, 이제 됐어.”유진은 손 크기를 재고 나서 다시 뜨개질로 주의를 돌렸다. 하지만 전에 다쳤던 손가락 때문인지 유진의 손은 조금 굼떴고 뜨개질 속도도 아주 느렸다.“누나, 오늘 소민준과 진세령이 약혼하는 날이래.”지혁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돌아오는 길에 길이 막혀서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다들 약혼식 때문에 그쪽 길로 몰려든 거래.”“나도 알아. 아까 검색하다가 기사 읽었어. 약혼식 시작 전에도 사람들로 꽉 찼더라고.”유진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을 이어갔다.“누나는 서운하지 않아?”지혁은 고개를 살짝 올려 유진의 반응을 살폈다.“서운하냐고?”유진의 손이 뚝 멈춰 섰다.“만약 누나가 소민준이랑 헤
임유진은 이 말을 꺼냈을 때 강지혁의 몸이 조금 뻣뻣해진 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누나는 강지혁을 만나보고 싶어요?”지혁이 물었다.“만나보고 싶긴. 애초에 나와 다른 세상 속 사람인 걸 뭐.”유진이 말을 이었다.“그런데 슈트 입은 강지혁의 뒷모습이 왠지 네 뒷모습이랑 비슷해 보였어. 그러니까 우리 혁이가 슈트를 입으면 얼마나 예쁠지 상상이 가더라고.”지혁은 몰래 입술을 오므렸다.그러자 유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우리 돈 좀 모아서 봄이 되면 정장 한 벌 사자. 면접에서 정장 입으면 얼마나 좋아.”“누나, 언젠가 강지혁을 만나게 되면 하고 싶은 말이 있어?”지혁이 뜬금없는 물음을 했다.유진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유진은 한참이 지나서야 픽 웃음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날 이만 놓아 달라고 할 거야.”그 말에 지혁이 조금 멍하니 유진을 바라보았다.“그것 뿐이야?”“그래.”유진이 대답했다.“누나는 자신이 억울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아? 강지혁에게 사실을 알려야지.”“소용없어. 한지영이 나를 돕겠다고 회사까지 찾아가 하루 종일 애원해도 만나주지 않았고 내가 수감 중일 때 매일 같이 편지를 써서 약혼녀의 죽음은 나와 상관이 없으니 제발 나를 놓아 달라고 해도 소용이 없었어. 깊은 바다에 조약돌을 던져봤자 가라앉을 뿐이야.”유진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지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지혁의 눈빛도 한층 차가워졌는데 표정으로는 지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가 없었다.“아니다. 이미 지난 일은 그만 말하자. 적어도 출소 후에는 강지혁이 나한테 그 어떤 보복도 하지 않았는걸. 그게 아니라면 난 지금 미화원 일도 하지 못하겠지.”유진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지혁은 갑자기 굳은 살 가득 배긴 유진의 손을 자기 손 위로 올려 체온을 나눴다.이 사실을 진작 알았더라면 유진이 억울하게 감옥에 가고 자신의 비위를 맞추는 사람들이 감옥에서 유진을 공격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언젠가 지혁의 정체를 밝히는 날이 온다고 해도
임유진은 벌써 몇 번째 혁이가 남자친구가 아니라 동생이라고 해명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르신들은 혈연관계가 없는 사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아예 남자친구라고 단정을 지으셨다.“지금은 아니더라도 앞으로는 그렇게 될 사이이지. 누나 동생은 다 잠깐일 뿐이야.”어르신이 웃으면서 말했다.이에 유진은 대꾸하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다만 강지혁은 어르신들이 남자친구라고 말할 때 슬쩍 미소를 지었었다.지혁은 유진을 공원 벤치에 내려놓으며 말했다.“오늘은 어제보다 날씨가 쌀쌀한 것 같아. 내가 외투 가지고 올게, 누나.”“그래.”유진이 대답했다.그러나 외투를 가지고 돌아왔을 때 지혁은 유진이 동네 아줌마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걸 발견했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유진의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지혁은 발개진 유진의 볼을 보며 발걸음을 늦추었다. 마치 순수한 고양이 같은 유진의 모습에 지혁은 마음이 설레 왔다.동네 아줌마들은 지혁이 돌아오자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벗어났다. 떠나기 전까지도 그들은 유진을 향해 눈짓했고 유진은 볼을 더 붉혔다.“왜 그래?”지혁이 다가가 외투를 유진의 어깨에 걸쳐주며 물었다.유진의 까만 눈동자는 쑥스러워 하며 지혁과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눈동자는 반짝반짝 빛이 나고 두 볼은 발그레한게 마치 잘 익은 사과 같아 한 입 베어 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지혁은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내가 점점 더 임유진을 좋아하는 것 같아. 발그레한 볼만 보아도 이렇게 가슴이 뛰는데…….’“아주머니들은…… 네가 내 남자친구인 줄 알고.”유진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그래서 내가 아니라고 했는데…… 네가 너무 잘생겼다고.”유진은 쑥스러운 탓에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그래서?”지혁이 물었다.“네가 너무 잘생겨서 나한테 남자를 사로잡는 노하우 같은 걸 말씀해 주셨어.”노하우를 일일이 말하기에는 너무 부끄러웠다.“그래? 나한테 한번 해 봐봐. 그 노하우가 통하는지.”지혁이 말했다.
“돌아가 보려고?”강지혁이 묻자 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런데…… 넌…….”유진이 조금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나랑 같이 갈래?”그 말에 지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누나 설 연휴 기간에는 월급이 3배라고 했어. 아니면 누나가 외가 주소를 남겨줄래? 내가 설 전날에 누나 보러 갈게.”“그래.”유진이 대답하며 또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그런데 네가 내 옆에 있으면 친척들이 눈치를 줄 텐데 그건 하나도 신경 쓰지 마!”지혁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걱정하지 마, 신경 쓰지 않을게.”‘지금 신경 쓰이는 건 누나뿐이니까.’설 연휴가 가까워질수록 거리에는 사람들이 적어졌다. 이 동네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모두 고향으로 내려갔다.유진의 외가는 S 시의 변두리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고 차로 한 시간 반 정도의 거리라 버스 예매에는 큰 애를 먹지 않았다.유진은 버스표를 예매하며 지혁에게 말했다.“혁아, 내가 차표 예매해 줄게. 신분증 줘봐.”그러고 보니 유진은 아직 지혁의 신분증을 본 적이 없었다.“이미 예매해 뒀어.”지혁이 심드렁하게 말했다.그 말에 유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이 며칠 동안 뜨개질한 목도리를 지혁의 목에 걸쳐주었다.“좀 짧지 않아?”유진이 목도리를 살피며 물었다.“아니, 딱 좋아.”지혁은 목도리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목도리에서 유진의 향이 났다. 목도리를 하고 있으면 온통 유진의 향에 잠긴 것 같았다.“그래, 그럼 목도리 마지막 부분을 마무리하고 다시 줄게. 목도리는 설 기간동안 하면 되겠다. 장갑은 아직도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아. 내가 설 연휴 동안 열심히 해볼게.”한지영은 설 연휴 동안 유진이 사는 전셋집에 놀러 올 계획이었다. 그러나 유진이 외가로 간다는 말에 오히려 걱정하기 시작했다.“혼자 가는 거야?”“혁이 설 전날 내려온다고 했어.”유진이 말했다.“그래도 외가 친척들이…….”지영은 외가 친척들이 얼마나 매정한 사람들인지를 알고 있었다.이득을 취할 때는 좋은 얼굴이었다가
강지혁은 임유진이 떠난 좁은 전세방을 보며 허전한 마음을 느꼈다.지혁은 유진이 탁자 위에 올려놓은 목도리를 다시 목에 두르며 입꼬리를 올렸다.지혁이 전세방을 나서자 보이는 건 이미 한참을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고이준이었다. 이준은 자기 대표가 목도리를 두르고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지혁은 평소 목도리를 자주 두르는 사람이 아니었다.‘대표님이 지금…… 베이지색 목도리를 하는 거지?’지혁이 가까이 다가오자, 이준은 목도리를 찬찬히 살폈다. 털실과 무늬를 보았을 때 이 목도리는 누군가 직접 뜨개질한 목도리임을 알 수 있었다.‘뜨개질한 목도리라……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아마 임유진 씨가 만든 목도리일 테지!’“대표님, 지금 어디로 갈까요?”“병원으로 가. 오늘 할아버지와 식사라도 함께 해야지.”지혁이 말했다.“네.”이준은 씩씩하게 대답하고 병원으로 운전했다.-유진이 탄 버스는 작은 마을과 멀리 떨어지지 않는 큰길에 정차했고 유진은 차에서 내렸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작은 마을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진흙 길이던 이 길도 어느새 넓은 도로가 되어있었다.외가로 돌아가는 길에 이웃 사는 사람들은 유진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렸지만, 유진은 이런 것에 이미 무뎌졌다.출소한 유진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수군거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외가에 도착하자 집안에 친척들이 가득 들어서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둘째 삼촌이 유진을 보자마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유진이구나. 자자, 빨리 들어와 앉거라. 온종일 너만 기다렸지 뭐니.”유진은 조금 의아해졌다. 유진이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둘째 삼촌은 유진에게 자신까지 연루시키지 말라고 선을 그었었다.“그래, 빨리 들어와 앉거라.”셋째 숙모도 반갑게 유진을 맞으며 자신의 옆자리에 앉혔다. 이어 큰삼촌, 작은삼촌, 셋째 이모부까지…… 모두 유진을 반갑게 맞았다.유진은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일단 외할머니부터 찾았다.“외할머니는요?”“지금 낮잠 주무시고 계셔. 조금 있다가 일어나시면 인
셋째 숙모는 일전에 제 아버지와 형제를 설득해 5천만 원에서 5백만 원을 가지기로 했었다.5백만 원은 셋째 숙모의 일 년 치 월급이었다!그러나 셋째 숙모와 임유진의 외할아버지가 김애순을 아무리 설득해도 애순은 절대로 이 일을 승낙하지 않았다. 그러자 셋째 숙모는 끝끝내 심한 말을 뱉고 말았다.“엄마, 큰오빠랑 작은오빠가 그랬는데 이 일을 망쳐서 자식들이 집을 사지 못해 장가를 못 가게 된다면 평생 엄마를 원망할 거라고 했어요.”애순은 그 말에 화가 나 펄쩍 뛰었다.“너희들…… 양심이 있는 인간들인 게냐! 유진이가 우리한테 얼마나 잘해줬는지 벌써 다 잊었어?”셋째 숙모가 웃으며 말했다.“예전은 예전이고 지금은 지금이에요, 엄마. 그 애 좋자고 우리 가족 미래를 망칠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지금 큰손주와 작은 손주가 돈이 없어 장가를 못 가는 건 고사하고,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아이가 감옥을 다녀왔다고 하면 누가 유진이와 만나주겠어요? 거기에 모아둔 돈도 없으면 앞으로 결혼은 다 갔다고 해야죠!”애순은 화를 참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너…… 너 앞으로 네 동생 얼굴을 어떻게 보려고 그러는 게냐.”셋째 숙모는 그 말에도 대수롭지 않은 듯해 보였다. 자기 동생은 이미 죽은 지 한참이나 지났고 얼마 없던 정도 시간이 흘러 기억에서 사라져갔지만 돈은 눈에 보이는 존재가 아닌가!유진은 거실에서 여러 조카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사촌 언니인 배여진이 눈꼬리가 휘어지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할아버지한테서 말 들었어. 지금 미화원 일 하고 있다며?”여진은 유진보다 한 살 많다 보니 어릴 때부터 둘은 늘 비교당하며 자랐다. 유진은 공부를 잘해 그야말로 엄친아 신세였고 여진은 대학도 못 나왔으며 대장간에서 일하는 남자에게 시집을 갔었다.여진이 시집을 가던 해에 유진은 소민준을 만나고 있었고 민준은 재벌가의 도련님이었으니 여진은 자기 남편과 유진의 남자친구를 비교해 가며 체면이 깎였다고 생각했었다.오늘날 유진이 이 모양 이 꼴이 나자 가장 고소해하는
임유진은 여전히 생긋 웃으며 말했다.“셋째 숙모, 저 술 끊은 걸 아시잖아요. 제가 음주 운전으로 감옥도 갔다 왔는데 어떻게 또 술을 마실 수 있겠어요.”유진의 말에 셋째 숙모는 헛헛해서 마른기침했다.그러자 큰삼촌이 이어 말했다.“유진아, 오늘은 설날이잖니. 운전도 하지 않을 것이고 한 잔만 마셔.”“그래, 삼촌들 얼굴 보아서라도 마셔!”둘째 삼촌도 말을 보탰다.“그만하거라!”김애순이 호통을 쳤다.“너희들 양심을 어디에 팔아먹은 게냐! 정말 지옥 불에 떨어질 것들!”그 말에 식사 자리는 물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유진만이 깜짝 놀라 외할머니를 바라보았다.애순이 유진을 바라보며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유진아, 네 삼촌들 지금 이러는 거 절대 좋은 마음으로 하는 거 아니란다. 박씨 가문의 바보 아들에게 널 팔아 5천만을 가지려고 저러는 게다…….”애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준태가 소리쳤다.“박씨 가문이 어디가 어때서? 유진이는 또 뭐가 그렇게 잘났는데? 감옥 갔다 온 흠도 괜찮다고 받아준 가문이야. 유진이 어딜 가면 이렇게 좋은 가문에 시집을 가겠냐고!”“그래 그 5천만 원으로 큰오빠와 작은오빠가 집도 사고 얼마나 좋아. 이건 네가 우리 집에 빚진 거잖아. 네가 감옥만 가지 않았어도 오빠들은 진작 장가를 갔을 텐데.”배여진이 불난 집에 부채질했다.“전 절대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유진이 몸을 벌떡 일어 세우고 차갑게 주위의 친척들을 바라보았다.“내가 빚진 게 있다고 해도 댁들한테 빚진 건 하나도 없어요!”그리고 유진은 애순을 바라보며 말했다.“외할머니, 제가 다음에 또 보러올게요.”말을 마치고 유진은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했으나 큰삼촌과 작은삼촌이 막아섰다.“가긴 어딜 가.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건 이미 결정된 일이야!”큰삼촌이 호통쳤다.유진은 멀리 떨어져 않은 큰 사촌 오빠와 작은 사촌 오빠를 바라보았다. 어렸을 땐 함께 놀기도 하고 좋은 추억이 많았었다.“오빠들도 제가 바보한테 시집가길 바라는 거예요?”큰
휴게실에서는 밥 먹는 소리 외 다른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고, 두 사람은 말없이 음식만 삼켰다.어르신의 간병인은 둘의 관계에 이상함을 느꼈지만, 감히 묻지는 못했다. 어쨌든 S 시에서 그들의 권력은 하늘을 찔렀으니.어르신이 식사를 거의 마치고 드디어 입을 열었다.“요즘 별장에서 지내지 않는다고 들었다.”“네.”강지혁은 짧게 대답했다. 할아버지가 이 일을 아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주변에 할아버지가 심어 놓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으니.“어디에서 지내는 거니?”“밖에서요.”지혁이 대답했다.“왜 갑자기 밖에서 지내는 게냐?”강문철이 물었다.“별장이 너무 커서요.”지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새우 하나를 집고 천천히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네 나이면 여자친구도 사귈 때가 되었지. 비서한테 S 시에서 걸맞은 여자를 찾아 두라고 시킬 테니 그중에서 한 명 고르거라.”문철은 옷을 고르듯 간단하게 말했다. 그 말에 지혁은 새우를 까던 손을 잠시 멈추고 말했다.“괜찮습니다.”문철이 되물었다.“왜 그러는 게냐?”“여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는 걸 바라시는 거면 제가 알아서 할게요.”예전의 지혁은 어쨌든 가업을 이어받기 위해 가정을 꾸려야 하는 거면 아무 여자라도 상관이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지혁은 반드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야 한다면 아이의 엄마는 임유진이 되길 바랐다.유진이 낳은 아이가 자신을 똑 닮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퍽 좋아졌다.“알아서 한다라…….”문철이 조금 놀란 듯 말했다.“너 설마…….”바로 그때 지혁의 전화가 진동했다. 지혁은 조금 표정을 굳히더니 주머니에서 액정이 다 깨진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수신자를 확인한 지혁은 바로 몸을 일으켜 세워 전화를 받았고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었을 때 지혁의 얼굴빛이 차갑게 변했다.“혁아…… 살…… 살려줘…….”갈라진 목소리였지만 지혁은 유진의 목소리라는 것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지혁이 되묻기도 전에 통화는 끊겼고 다시 걸었을 때는 받는 이가 없었다.‘설마 임유진에게
하지만 아무리 내리쳐도 고통은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윽...”이경빈의 머릿속으로 당시의 장면이 하나둘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탁유미는 그때 이경빈에게 자신은 억울하다고, 자신이 그런 게 아니라고 수백 번을 더 말했다.하지만 그 말을 들었음에도 그는 전혀 믿어주지 않았고 오로지 탁씨 가문에 복수할 것만을 생각하며 공수진이 그렇게 된 게 전부 탁유미 때문이라고 확정을 지었다.그때는 그렇게 해야만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다. 비참한 그녀의 말로를 봐야만 가슴속의 응어리가 다 사라질 줄 알았다.그는 법을 무기로 그녀의 몸을 잔인하게 찔러댔다.그리고 이윽고 그녀의 자존심과 순박함 그리고 세상을 믿는 그 맑은 눈을 완전히 부숴버렸다.“경빈이 너는 운명을 믿어?”“글쎄. 너는?”“나는 믿어. 그리고 그 운명과 평생 함께한다는 얘기도 믿어. 운명이라면 서로 말고는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없을 거야. 만약 다른 누군가가 눈에 들어오면 이전 사람은 운명이 아니었던 거지. 경빈아, 나는 네가 내 운명의 사람이라고 믿어.”“날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거야?”“응. 나는 이번 생에 이경빈이 아닌 다른 남자를 좋아하고 사랑할 계획은 없거든. 난 너만 사랑할 거야!”너만 사랑할 거라는 말을 했던 탁유미의 얼굴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그녀는 정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그에게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하지만 그는 그런 그녀의 사랑을 짓밟고 더럽히고 또 처참하게 버렸다.임유진은 면회실에서 나와 천천히 이경빈의 앞으로 다가갔다.바닥에 엎드린 채 몸을 덜덜 떠는 그를 보며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이경빈 씨는 언니한테 목숨을 한번 빚졌어요. 그 목숨 다시 언니한테 줄 수 있어요?”이경빈은 그 말에 고개를 들더니 처연하게 웃었다.“내 목숨 같은 거 유미한테 큰 가치가 없을 거예요... 하지만 만약 유미가 원한다면 내 목숨 따위 언제든지 내어줄 수 있어요.”만약 탁유미가 그의 목숨을 원한다면 그는 몇백 번이고 죽어줄 수 있다.
또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돈을 받아? 공수진이 원하는 대로 해줘?”이경빈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의사를 바라보았다.“당신 의사잖아. 사람 목숨을 살리는 의사잖아! 그런데 그 간사한 혀로 죄 없는 사람을 감옥으로 보내?!”의사는 이경빈의 호통에 깜짝 놀란 듯 몸을 웅크리며 그의 눈을 피했다.“제가 보냈다뇨. 저... 저는 그냥 공수진 씨가 유산했다는 말밖에 안 했어요. 그 여자가 공수진 씨를 계단에서 밀었다고 증언한 건... 이경빈 씨잖아요.”그의 말에 이경빈은 순간 할 말이 없어졌다.의사 말대로 탁유미가 공수진을 계단에서 밀었다고 증언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였으니까.그 어떤 증거보다 그의 한마디가 제일 크게 작용했다.이경빈은 한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고 은이 얼어붙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이경빈 씨는 그때 공수진 씨의 치마가 피로 물든 것을 봤다고 했어요. 그런데 공수진 씨는 임신하지 않았죠. 그러니 유산은 더더욱 없을 일이고요. 그렇다면 그 피는 대체 뭐였을까요?”임유진이 이경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이경빈은 덜덜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눈을 감자마자 당시의 화면이 하나둘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어떻게 임신도 아니고 유산도 아닌데 피를 흘릴 수 있었을까요. 그것도 하필 유미 언니랑 얘기하다가 마침 계단에서 떨어져서요. 제 생각은 이래요. 애초에 공수진 씨는 유미 언니를 모함하기 위해 미리 피가 든 팩을 준비했고 언니를 계단으로 불러 일부러 마치 언니한테 밀쳐진 것처럼 계단에서 구른 거죠.”임유진은 계속해서 이경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이경빈 씨, 그날 정말 유미 언니가 공수진 씨를 밀었나요? 그걸 확실히 두 눈으로 보셨어요? 사실은 공수진 씨가 언니가 밀었다고 하니까 그렇겠거니 한 건 아니고요? 사실 그 사건은 조금만 제대로 조사해보면 금방 진실이 뭔지 알 수 있는 사건이에요. 그런데 이경빈 씨는 그때 복수심에 눈이 멀었고 마침
“가 보면 알아요.”임유진은 담담하게 대꾸했다.조금 있으면 이경빈도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가 탁유미에게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얼마나 멍청한 짓을 저질렀는지 역시 알게 된다.그때가 되면 이번에는 뭐로 보상하겠다고 할까.어쩌면 강지혁의 말대로 모든 진실을 알게 되면 그는 남은 생을 평생 후회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게 살아갈지도 모른다.병원에서 나온 후 이경빈은 임유진을 따라 차에 올라탔다.가는 길, 이경빈이 임유진을 보며 물었다.“주원호를 병실로 보낸 것도 임유진 씹니까?”“네.”임유진은 그간 줄곧 강지혁의 도움으로 주원호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공항에 간다는 것을 듣자마자 바로 그를 잡아 왔다.사실 그녀의 계획대로라면 주원호를 등장시킬 필요도 없었다. 이경빈에게만 조용히 따로 진실을 얘기해주려고 했었으니까.그런데 그사이 공수진이 또다시 일을 저질렀고 탁유미는 그로 인해 큰 상처를 입게 됐다.이경빈은 가만히 있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유미가 나한테 골수를 기증해줬다는 것도 훨씬 전에 이미 알고 있었겠네요.”“네. 사실은 그걸 알게 되고 나서 유미 언니한테 얘기를 했었어요. 어쩌면 이경빈 씨를 구한 사람이 언니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이경빈 씨한테 얘기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그런데 언니가 그러더라고요. 어차피 자신이 말해봤자 이경빈 씨는 믿지 않을 거라고요.”이경빈은 그 말에 심장이 또다시 욱신거리며 아파 났다.탁유미는 이미 모든 걸 다 파악하고 있었다.그가 믿지 않을 거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대체 탁유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자기가 구한 사람이 화를 내고 사과하라고 윽박지르고 강제로 무릎까지 꿇으라고 명령하는 걸 보며.이경빈이 또다시 자책하고 있을 그때 차량이 드디어 목적지인 구치소 앞에 도착했다.이경빈은 차에서 내린 후 의문 섞인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여기는 왜 온 거지?대체 누가 있길래?이경빈은 임유진을 따라 구치소 안 면회실에 도착했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어딘가 낯이 익은 한 남자
이경빈이 손을 다쳤나 하는 의문이 아주 잠깐 들었지만 탁유미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멈췄다.이경빈과 관련된 일은 이제 그 무엇도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까.“언니를 찾아와서 뭐라 하던가요?”임유진이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골수를 기증해준 사람이 나라는 걸 아는 눈치였어요. 그리고 공수진이 유산한 게 나 때문이 아니라 공수진의 자작극 때문이라는 것도요.”탁유미가 담담하게 말했다.“보상을 해주겠다고는 하는데 이경빈한테는 그 어떤 것도 받고 싶지 않아요.”태연한 얼굴로 얘기하고 있지만 임유진은 알고 있다.이 반응은 상처를 너무나도 많이 받아 모든 것이 공허해진 표현이라는 것을.“공수진은 언니를 모함한 것뿐만이 아니라 이경빈도 속였어요. 몇 년을 속았으니 이경빈은 무조건 공씨 일가에게 자신의 당한 것의 몇 배를 갚아줄 거예요.”“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에요.”임유진은 탁유미가 이경빈의 얘기를 썩 반기지 않자 얼른 화제를 바꿨다.“윤이는 유치원에 갔나 봐요?”“네. 엄마가 등원시켜줬어요.”요 며칠 김수영은 매일 밤 윤이와 함께 이곳으로 와 탁유미의 곁을 지켰다.‘아주머니랑 윤이도 이경빈이 병실 밖에 있는 걸 봤을 텐데... 아주머니는 보나 마나 화를 내셨겠지만 윤이는...’임유진은 속으로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언니, 정말 항암치료 안 받을 거예요?”“네, 항암 치료를 시작하면 그때는 정말 병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거예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고 싶지는 않아요. 참, 나 내일이면 퇴원할 수 있대요. 유진 씨, 그날은 정말 고마웠어요.”만약 임유진이 타이밍 좋게 쳐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더 끔찍한 일을 당했을 것이다.“벌써요?”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언니, 그러지 말고 며칠 더 입원하는 게 어때요?”아무래도 병원에 있으면 의료진들의 케어를 바로바로 받을 수 있을 테니까.“아니요. 그냥 퇴원할래요. 계속 입원해 있으면...”계속 입원해 있으면 생명의 카운트다운이 더 빨리 흘러가는 느낌이니까.탁유미는
“응. 친구가 앞으로는 건강하게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어. 간절하게 기도했으니 부처님도 분명히 들어주실 거야.”“친구? 친구 누구?”“나도 아직 본 적 없는 친구야. 아마 기회가 되면 그 어디선가 만날 수도 있겠다.”탁유미가 환하게 웃었다.“친군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뭐 인터넷으로만 아는 친구야?”“비밀. 나중에 얘기해줄게.”탁유미는 그날 미소를 지으며 끝내 친구에 관해서 얘기해주지 않았다.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녀가 말한 친구는 바로 그였다.탁유미는 기증을 하고 나서도 여전히 이름도 모르는 그 젊은이를 위해 건강해지기를 빌어주고 있었다.정작 그 기도 덕에 살아난 그는 그녀의 인생을 처참하게 무너트렸는데 말이다.어쩌면 그날 그녀에게 친구가 누군지 조금만 더 자세하게 물어봤더라면 기증 사실에 대해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이경빈은 당시 그녀를 그저 복수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있었고 그녀와는 미래를 꿈 꿀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에 그 친구에 관해서도 크게 관심이 없었다.그때 이경빈의 경호원이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대표님, 괜찮으십...”경호원은 말을 하다 말고 조금 벙찐 얼굴로 이경빈을 바라보았다.그도 그럴 것이 이경빈의 모습이 꼭 영혼이 다 빠져나간 듯한 사람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임유진이 탁유미를 보러 찾아왔을 때도 이경빈은 여전히 병실 앞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것이 꼭 죽은 사람 같았다.임유진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아주 조금이라도 공수진을 의심했으면 이렇게까지는 안 됐을 텐데.’하지만 그의 초췌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쩌면 이경빈은 정말 탁유미를 진심으로 사랑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사랑이 아니면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을 테니까.“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어요?”임유진이 병실을 지키고 있는 경호원들에게 물었다.“어젯밤부터 줄곧 이곳에 있으셨습니다.”임유진은 이경빈을 힐끔 보더니 별말 없이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실 안에는 탁유미 혼자
탁유미는 차갑게 말을 내뱉은 후 이경빈의 손에 잡힌 자신의 옷을 반대로 잡아당겼다.하지만 아무리 잡아당겨도 도저히 잡아당겨 지지를 않았다.이경빈은 이대로 그녀의 옷을 놓쳐버리면 두 번 다시 그녀를 만나지 못할 것 같아 손이 하얘질 때까지 꽉 쥐고 놓지 않았다.탁유미는 이에 미간을 찌푸리며 강지혁의 경호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이거 놔. 손 다치고 싶지 않으면.”경호원은 그녀의 눈빛에 얼른 앞으로 다가가 탁유미의 옷을 꽉 잡고 있는 이경빈의 손을 잡았다.하지만 이경빈은 경호원의 엄청난 손아귀 힘에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계속해서 탁유미를 바라보았다.“네가 나 원망하는 거 알아. 당연해. 네가 날 싫어하는 것도, 날 증오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 하지만 내 말 좀 들어줘. 너랑 단둘이서 얘기를 나누고 싶어. 너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아!”“난 너랑 할 얘기 없어.”그녀의 단호한 대답에 이경빈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옷을 꽉 잡은 손이 경호원의 힘으로 하나둘 펴지며 서서히 고통이 일고 있는데도, 얼마나 힘을 줬는지 손가락이 꺾여서는 안 될 방향으로 꺾이고 있는데도 그는 여전히 그녀의 옷을 놓아주지 않았다.이대로 놓아주면 다시는 그녀 가까이 갈 수조차 없을까 봐, 그녀와는 이로써 모든 게 다 끝이 날까 봐 그는 너무나도 두려웠다.탁유미는 제 옷을 꽉 잡은 채 놓아주지 않는 그를 보며 경멸의 눈길을 보냈다.“너는 항상 이런 식이야. 너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야. 너는 네가 다 맞다고 생각하지? 만약 네가 조금이라도 남을 배려하는 인간이었다면 억지로 끌고 가 무릎을 꿇리고 머리를 조아리게 하는 짓은 강요하지 않았을 거야. 너는 항상 네 기분만 중요하고 네 생각만 중요한 사람이었어! 존중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는 최악의 인간이라고!”이경빈은 그 말에 마치 몸이 얼어버린 것처럼 제자리에 굳어버렸다.크나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손아귀의 힘을 스르르 풀었다.탁유미는 옷을 정
이경빈의 말에 그의 뒤에 있던 경호원들이 한발 앞으로 나섰다.인수로만 놓고 보면 이경빈 쪽이 훨씬 우세였지만 그럼에도 강지혁의 경호원들은 비켜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특정 인원들의 출입은 무슨 수를 써서든 막으라는 강지혁의 명령을 받았으니까.“비켜드릴 수는 없습니다. 돌아가세요.”긴장감이 흐르고 상황은 일촉즉발이었다.그런데 그때 갑자기 병실 문이 열리고 안쪽에서 탁유미가 걸어 나왔다.강지혁의 경호원들은 그녀를 보자마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소란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이경빈 대표님은 저희가 금방 되돌려보내겠습니다.”그들은 말을 마친 후 다시 이경빈을 바라보며 경계태세를 갖췄다.탁유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들어 이경빈을 바라보았다.그는 마지막으로 봤던 때와 달리 깔끔한 차림이기는 했으나 턱 쪽에 수염이 까끌까끌 나 있었고 머리도 헝클어져 있었으며 다크서클은 물론이고 눈가도 엄청 빨개 있었다.이제껏 줄곧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자신을 세팅하고 다니던 남자였는데 말이다.이경빈은 탁유미가 문을 열고 나온 순간부터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며칠 만에 보는 그녀는 환자복을 입고 있었고 얼굴은 더 야위어 있었으며 길게 늘어트린 머리카락은 오늘따라 유독 더 힘이 없어 보였다.게다가 이마에는 까진 상처가 있었는데 복도 조명 때문에 더 잘 보였다.이경빈은 그 상처를 보는 순간 심장에 마치 칼에 찔린 듯한 고통이 일었다.그녀의 이마에 난 상처는 그날 그의 명령으로 머리가 조아려졌을 때 생긴 상처가 분명했다.그렇게도 사과하는 것을 거부했는데 그는 억지로 그녀의 무릎을 꿇리고 강제로 머리를 조아리게 했다.이경빈은 그날 경호원의 손에 의해 몇 번이고 바닥에 머리를 박는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왜 바보같이 그녀에게 그런 수모를 줬을까.왜 등신처럼 그녀의 고통과 절망을 외면하고 공수진에게 사과하게 했을까.이경빈이 과거의 자신을 질책하던 그때 탁유미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늦은 시간에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야. 왜, 또
주원호의 말에 이경빈의 몸이 움찔 떨렸다.탁유미는 그저 복수대상일 뿐이라고?아니. 탁유미는 그에게 단지 복수대상뿐인 여자가 아니었다. 그가 유일하게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자였다.이경빈은 심장이 점점 더 세게 아파 와 이윽고 벽에 몸을 기댔다.꼭 이 통증에 잠식되어가는 듯한 기분이다.그는 멀고 먼 길을 돌아 이제야 자신이 탁유미를 아직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한때는 고작 원수 집안의 딸일 뿐인 여자라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 따위는 금방 지워질 줄 알았다. 그녀를 감옥에 보내 복수를 하고 나면 아주 손쉽게 그녀를 마음속에서 떨쳐낼 수 있을 줄 알았다.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희망했을 뿐 그는 줄곧 그녀를 마음에 담고 있었다.만약 탁유미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녀가 허름한 모습으로 있는 게 신경이 쓰일 리도 없고 그녀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이 질투 날 리도 없다.또한 상처만 줬던 그녀에게 배신감이 들 리도 없다.이경빈은 항상 공수진의 편에만 서고 한 번도 탁유미의 얘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그는 자신의 감정을 직면하는 것에서 늘 도망쳐왔다.죽도록 미운 원수의 딸을 사랑하게 됐다는 것을 인정할 용기가 없었다.이경빈은 몸 옆으로 축 늘어진 자신의 두 손에 서서히 힘을 가했다.얼마나 세게 주먹을 쥐었는지 손톱이 살을 뚫어버리고 이내 바닥으로 피까지 뚝뚝 흘러내렸다.하지만 그는 고통 따위 전혀 느껴지지 않는 듯 텅 비어 버린 얼굴로 탁유미의 병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탁유미를 만나 그간 상처를 줘서 미안했다고, 아무것도 모른 채 멍청하게 굴어서 정말 미안했다고 사과를 해야만 한다.그녀의 아버지를 향한 증오를 그따위 비열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화풀이해서는 안 됐다고 사과해야만 한다.또한 앞으로는 정말 잘 해주겠다고, 지금까지의 고통을 전부 다 잊을 수 있을 만큼 잘해주겠다고 말을 해야만 한다.이경빈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해놓고는 막상 탁유미의 병실에 점점 가까워지자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탁유미가 전과 같은 원망과 증오가 서
이경빈은 말 그대로 공수진에게 생지옥이라는 게 무엇인지 맛보게 해줄 생각이다.그와 탁유미의 인생을 가지고 논 대가를 평생에 걸쳐 갚게 할 생각이다....병실에서 나온 이경빈은 심장께가 무언가에 짓눌린 것처럼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그는 탁유미를 모함하려고 한 공수진도 물론 증오스러웠지만 그녀의 거짓말에 넘어가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여자에게 무자비했던 자신이 더 증오스러웠다.아까 병실로 들어간 순간 이경빈은 억지로 탁유미의 무릎을 꿇리고 그녀에게 머리까지 조아리게 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바닥에 쿵쿵 부딪히던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해 마음이 짓이겨지는 것 같았다.왜 그렇게 못되게 굴었을까?정말 공수진을 위해서였을까?사실은 그저 그런 방식으로 탁유미에게 상처를 줘 그녀를 향한 마음을 애써 덮으려고 했던 건 아닐까?윤이를 이용해 이씨 집안 재산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음에도, 공수진이 어렵게 생긴 아이를 유산했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자꾸 상처받은 듯한 탁유미의 얼굴들이 떠올라 더 모질게 굴었던 건 아닐까?탁유미는 그에게 등신이라고 했다.맞는 말이다.그는 정말 구제 불능의 등신이었다.“저... 저기, 저는 그저 공수진의 부탁을 들어준 것뿐이에요. 제가 아는 건 다 털어놨으니 이제 그만 저 풀어주세요...”주원호가 이경빈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몇십 분 전 그는 비행기에 탑승하려는 찰나 검은색 정장의 사람들에 의해 강제로 병원으로 데려와 졌고 이경빈의 앞에서 공수진에 관한 모든 얘기를 실토하라는 협박을 받았다.만약 사실대로 얘기하지 않으면 평생 감방에서 썩게 할 수도 있다면서 말이다.주원호는 솔직히 그저 공수진에게 돈만 조금 얻어낼 생각이었는데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다.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돈이고 뭐고 공수진 근처로는 절대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대체 누가 날 데리고 온 거지? 상황을 볼 때 이경빈은 아닌 것 같은데.’“풀어달라고?”이경빈은 그 말에 헛웃음을 쳤다.공수진을 도와 진실을 덮어버린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