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게실에서는 밥 먹는 소리 외 다른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고, 두 사람은 말없이 음식만 삼켰다.어르신의 간병인은 둘의 관계에 이상함을 느꼈지만, 감히 묻지는 못했다. 어쨌든 S 시에서 그들의 권력은 하늘을 찔렀으니.어르신이 식사를 거의 마치고 드디어 입을 열었다.“요즘 별장에서 지내지 않는다고 들었다.”“네.”강지혁은 짧게 대답했다. 할아버지가 이 일을 아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주변에 할아버지가 심어 놓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으니.“어디에서 지내는 거니?”“밖에서요.”지혁이 대답했다.“왜 갑자기 밖에서 지내는 게냐?”강문철이 물었다.“별장이 너무 커서요.”지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새우 하나를 집고 천천히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네 나이면 여자친구도 사귈 때가 되었지. 비서한테 S 시에서 걸맞은 여자를 찾아 두라고 시킬 테니 그중에서 한 명 고르거라.”문철은 옷을 고르듯 간단하게 말했다. 그 말에 지혁은 새우를 까던 손을 잠시 멈추고 말했다.“괜찮습니다.”문철이 되물었다.“왜 그러는 게냐?”“여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는 걸 바라시는 거면 제가 알아서 할게요.”예전의 지혁은 어쨌든 가업을 이어받기 위해 가정을 꾸려야 하는 거면 아무 여자라도 상관이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지혁은 반드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야 한다면 아이의 엄마는 임유진이 되길 바랐다.유진이 낳은 아이가 자신을 똑 닮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퍽 좋아졌다.“알아서 한다라…….”문철이 조금 놀란 듯 말했다.“너 설마…….”바로 그때 지혁의 전화가 진동했다. 지혁은 조금 표정을 굳히더니 주머니에서 액정이 다 깨진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수신자를 확인한 지혁은 바로 몸을 일으켜 세워 전화를 받았고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었을 때 지혁의 얼굴빛이 차갑게 변했다.“혁아…… 살…… 살려줘…….”갈라진 목소리였지만 지혁은 유진의 목소리라는 것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지혁이 되묻기도 전에 통화는 끊겼고 다시 걸었을 때는 받는 이가 없었다.‘설마 임유진에게
지금 임유진은 박씨 가문 사람들에 의해 어느 방안에 갇혔고 방안에는 낯선 남자와 함께 있었다. 이 사람이 바로 그들이 말한 박씨 가문 바보겠지…….유진은 애써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도망가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도망가야 해!’그러나 지금 몸 상태로는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더구나 몰래 혁이한테 전화를 걸다가 들켜 삼촌들에게 전화도 뺏겼다.‘신고를 할 수 있는 기회도 놓쳐버렸어!’왜 하필 혁이한테 먼저 전화를 걸었는지 유진도 알지 못했다. 혁은 지금 S 시에 있는데.그리고 혁이 이 상황에서 뭘 해줄 수 있겠는가. 전화해도 한지영에게 걸었어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경찰에 신고했어야 했다.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점점 혁에게 의지하고 있었다.유진은 시선이 점점 흐려지는 게 느껴졌고 낯선 남자는 바보처럼 웃으며 유진을 덮쳤다. 유진은 아등바등했지만 피할 수 없었다.문밖에서 박씨 가문과 노씨 가문은 화기애애하게 돈 계산이나 하고 있었다.유진의 큰 삼촌이 입을 열었다.“박 씨, 사람을 데리고 왔으니 5천만은 확실히 줘야 할걸세.”“그래그래, 알겠네. 조금 있다가 거사가 끝나면 바로 사람 시켜 송금시키겠네.”박씨 가문 사람들도 바보 아들을 결혼시키고 손자를 보기 위해 이판사판 직진이었다.박 씨의 아내는 조금 불안한 듯 말했다.“저 여자애가 도망이라도 가면 어떻게 해요?”“일단 사진이라도 여러 장 찍어서 도망 못 가게 발 좀 잡아 두고 1년은 가두어 두게나. 아이가 태어나면 도망갈 생각은 다시 못할 테니.”큰삼촌이 말했다. 그들은 유진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하나도 없이 오직 돈 생각뿐이었다.“맞아요. 아이만 낳으면 도망갈 생각을 절대 못 할 걸요. 당신도 여자이니 잘 알 것 아닙니까.”둘째 삼촌도 말을 보탰다.박현규의 아내는 조금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과연…… 될지 모르겠네요. 반항이라도 하면 우리 아들이…….”“반항할 힘이 어디 있겠어요!”둘째 삼촌이 빠르게 말했다.현규도 입
박현규 부부와 큰외삼촌, 둘째 외삼촌은 갑자기 당황했다. 그 방을 수색하려는 것을 본 현규가 황급히 고함치기 시작했다.“너희들이 무슨 근거로 여기에 들어오는 거야, 경찰…… 경찰이면 함부로 들어와도 되는 거야?”현규와 아내가 달려들려 했지만, 누군가 앞을 막았다.그리고 사람들은 곧 방의 문이 열리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그때 또 차 한 대가 현규 집 앞에 도착하더니 훤칠한 키를 자랑하는 누군가가 차에서 내려 마당에 들어섰다. 경찰 한 명이 그의 곁으로 다가가더니 조금 전 상황을 보고했다.“문이 잠겨있는 방이 있는데 사람이 안에 있을 것 같습니다.”그 경찰은 보고하면서 남자를 잠긴 방문 앞으로 안내했다.현규 부부와 큰삼촌, 둘째 삼촌은 지금 필사적으로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문을 열려 하지 않고 있었다.“문을 부숴.”강지혁은 문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곧 누군가가 도끼를 들고 와서 문을 내리쳤다.“들어가면 안 돼, 당신들 이거 무단 침입이야! 나 당신들을 고소할 거야!”그러나 현규 부부가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도 소용이 없었다. 문이 열리는 순간 지혁은 방으로 뛰어들었다.다른 사람들이 따라 들어가려고 할 때 갑자기 고함이 안에서 들려왔다.“아무도 들어오지 마!”안으로 들이닥치던 사람들의 발걸음이 순간 멈추었다.지혁은 거의 눈이 벌겋게 된 채 눈 앞에 펼쳐진 장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임유진의 옷이 여기저기 찢어졌다. 유진은 모퉁이에 웅크리고, 자신을 향해 바보같이 웃는 남자에게 주먹질과 발길질을 당하고 있었다.그 연약한 몸은 새우 모양으로 움츠러들었는데, 손에는 깨진 거울 조각을 꽉 쥐고 있었다. 하지만 유진은 이미 반격도 할 힘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유진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이 기절하지 않도록 하는 것뿐이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통으로 자신을 자극하려 했다.검붉은 피가 끊임없이 유진의 손에서 흘러나와 옅은 색의 침대 시트 위에 떨어져, 마치 한 송이 한 송이 활짝 핀 양귀비꽃 같았다.그리고 유진을
강지혁은 갑자기 마음이 아팠다. 분명, 오늘 아침 떠날 때만 해도 멀쩡했는데 지금은…… 이런 꼴로 지혁의 앞에 나타났다. 만약 오늘 임유진과 함께 왔다면, 유진은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지혁이 유진에게 다가가려고 할 때, 유진의 몸은 더 심하게 떨리고 있었고 깨진 거울 조각을 든 손에 힘을 더 꽉 줬다. 순간 유진의 손에서 피가 더욱 심하게 흘러나왔다.“누나, 나야. 빨리 손 풀어. 이제 안전해. 아무도 누나한테 그런 짓 못 해.”지혁이 황급히 말했다.지혁은 한 번도 피를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 설사 누군가 지혁의 앞에서 피투성이로 나타난다고 해도 지혁은 아무렇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지혁은 유진의 피를 두려워하고 있다. 유진이 더 심하게 다칠까 봐, 유진의 피가 더 많이 흘러 버릴까 봐 두려웠다.이런 두려움에 지혁은 몸이 떨려왔다.유진은 점점 정신이 몽롱해졌고 더움을 빼면 아픔이 유일한 감각이었다.더 아파야 한다. 더 아파야 유진은 자신을 보호하고 기절해 버리지 않을 수 있다.‘잠들면 안 돼, 절대 안 돼!’고립무원이었다. 감옥에서 나오면 유진은 자신의 인생을 컨트롤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감옥에서처럼 일이 발생하면 아무도 유진을 도울 수 없다! 오직 자신만이 이 아픔을 짊어지고 가야 했다…….“누나…… 누나…….”누군가의 목소리가 유진의 귓가에 들려왔다.‘누구지? 누가 부르고 있는 거지?’유진은 누가 유진을 부르고 있는지 똑똑히 보려고 열심히 눈을 크게 떴다.“누나, 겁내지 마, 내가 데리고 갈게!”상대방이 말했다.초점을 잃어가던 두 눈이 마침내 조금씩 맑아졌고, 유진의 칠흑 같은 눈동자가 마침내 지혁의 모습을 비추었다.“혁…… 혁…… 혁아…….”유진은 어렵게 지혁의 이름을 불렀고, 쉰 목소리는 모래를 씹은 것처럼 힘겨웠다.“나야, 내가 왔어. 아무도 누나를 다치게 할 수 없어!" 지혁이 말했다. 잘생긴 얼굴에는 진지함과 아까움, 그리고 다짐도 있었다.유진은 물끄러미 지혁을 바라보았다. 지금의 혁이는
강지혁이 여자를 안고 있는 조심스러운 모습을 본 그들은 이 여자가 지혁에게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리고 지혁의 진정한 신분을 아는 일부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속으로 의아해했다.S 시에서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는 대단한 사람이 뜻밖에도 한 여자를 위해 새벽에 이런 곳에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많은 사람을 동원했다.이 여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여자가 S 시의 절반을 휘저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이 일이 도대체 누구와 관련돼 있는지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알아내.”지혁이 말했다.“알겠습니다.”지혁의 옆에 있던 부하가 대답했다.그리고 지금, 박현규 부부는 아프다고 소리치고 있는 아들과, 마당에 가득 찬 경찰을 보고, 울고 싶어도 눈물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부부는 임유진의 큰 외삼촌과 둘째 외삼촌을 노려보았다.“당신들 나에게 도대체 무슨 여자를 준 거야!”큰외삼촌과 둘째 외삼촌도 지금은 얼굴이 창백한 채 서로를 쳐다보고 있다. 그들의 조카딸은 출소한 지 반년도 안 되어 의지할 데가 없는 여자였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그렇지 않으면, 그들도 유진을 해칠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지금…… 조카 뒤에 분명 대단한 사람이 있다! 그럼 전에…… 그들은 섣달그믐날 저녁 식사 때 했던 말들이 떠올랐고, 조카딸에게 약을 먹인 일을 생각하고 갑자기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유진이가 어떻게 이렇게 대단한 사람을 알게 된 걸까? 미리 말해줬다면 그들이 이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유진의 상황이 점점 이상해 보였다.지혁은 품속에 있는 유진을 보면서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빌어먹을!’만약 지혁이 조금만 더 늦게 왔다면, 혹은 오늘 유진이가 지혁에게 그 전화를 하지 않았다면, 유진이는 지금쯤 더 비참한 꼴을 당했을 것이다.“대표님, 물어봤더니 현지 작은 술집에서 몰래 판매하는 알약이랍니다. 이미 사람을 시켜 약의 성분을 알아내라고 했습니다.”고이준은 지혁을 향해 최신 소식을 보고하고 있다.“누가 유진에
“아직 15분 정도 남았어요.”고이준이 말했다.“임유진 씨 지금 상황으로 보면 일반적인 작은 병원에서는 안 돼요. 시내에 있는 큰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아요.”차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준 쪽도 마침내 약 안에 도대체 어떤 성분이 있는지 알게 되었다.의사는 가는 길에 유능한 의사들에게 미리 연락했다.오늘 한자리에 모인 의사들을 사람들이 보면 아마 깜짝 놀랄 것이다. 이 의사들을 한곳에 모일 수 있게 하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인데 아주 큰 사건이 생겼을 때만 가능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주 잠깐이라도 모이기 어려웠다.그런데 지금 이 의사들은 약물 조제서를 훑으며…… 싸구려 옷을 입은 여자를 위해 긴급 회진을 하고 있다.“별문제는 없어요. 진정제를 맞은 다음 땀을 많이 흘리게 하고 수분을 빌려 체내의 약성을 배출하면 될 거예요. 이 약은 장기간 대량으로 복용하지 않는 한 몸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아요.”약물학 쪽으로 이름이 있는 의사 중 한 명이 말했다.“다른 약을 지어 앞으로 3일간 복용하여 대사를 가속할 수 있어요”“그럼 빨리 진정제를 놔줘요.”강지혁이 말했다.진정제 한 대가 곧 유진의 몸에 들어가자 갑자기 유진은 잠든 것처럼 조용해졌다.이 상황을 보고 있던 지혁은 마침내 한숨을 돌렸다.“하지만 이 약은 임상 데이터가 없으므로 진정제의 양이 충분한지 모르겠어요. 잠시 후에 환자분이 다시 조금 전의 증상이 계속 나타난다면 진정제를 하나 더 보충해야 할 거예요.”의사가 말했다.의사가 병실을 떠난 후 지혁은 이준에게 분부했다.“밖에서 기다려.”“그럼 대표님은요?”“난 여기서 지키고 있을 거야.”지혁이 말했다.이준은 혼수상태에 빠진 유진을 힐끗 보고는 지혁에게 물었다.“그냥 제가 지켜줄까? 오늘 이렇게 갑자기 떠나셔서 어르신께서…….”“할아버지 쪽에선 아마 사람을 찾아서 조사할 거니 숨길 필요도 없어. 어차피 조만간 유진이의 존재를 알게 될 거야.”지혁이 말했다.“넌 나가 있어, 내가 옆에 있을 거야.”그 말을 들은 이
“혁아…….”중얼거리는 소리가 임유진의 입에서 흘러나와, 마치 천근만근이나 되는 듯 강지혁의 가슴을 힘껏 내리치는 것 같았다.유진은 턱을 들고 깨끗한 얼굴에 미소를 짓더니 갑자기 지혁에게 키스했다.지혁은 눈앞에 있는 유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분명, 지혁은 이 키스를 피할 수 있었는데, 그러나…… 그러기 싫었다.지혁을 이렇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유진밖에 없을 것이다.유진이 조금 쉰 목소리로 지혁의 이름을 부를 때에야 지혁은 갑자기 정신을 차렸다. 방금, 지혁은 하마터면 잘못할 뻔했다.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난 지혁은 간호사 벨을 눌렀다.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와 간호사가 모두 달려와 또 유진에게 진정제를 주사했고, 유진은 그제야 겨우 조용해졌다.다른 사람들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지만, 고이준은 오랫동안 지혁을 따라 일했기 때문에 자신의 보스가 지금 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혹시…… 이준은 침대에 누워 있는 유진을 바라보며 마음속에 갑자기 한 줄기 빛이 스쳤다.대표님 같은 남자가 유진을 위해 이 정도까지 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대표님은 아마 유진을 뼛속까지 사랑하고 있을지 모른다!이준은 병실을 떠날 때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섣달그믐날 저녁, 소씨 가문과 진씨 가문 두 집은 함께 식사했다. 진세령은 밥을 먹은 후 소민준과 함께 소 씨네 정원에 왔다.“너와 강지혁 사이에 무슨 일이 있어?”세령이 갑자기 물었다.민준은 갑자기 흠칫하더니 얼굴이 창백해진 채 세령을 바라보았다.“무슨 소리야, 나와 강지혁 사이에 뭐가 있겠어?”“아무 일 없다고? 그런데 그날 우리의 약혼식에서 강지혁과 이야기를 나눈 후 네 안색이 왜 그렇게 안 좋았을까? 그리고 민영이가 다친 것도 그렇고, 전에 소씨 가문의 은행 대출 심사가 통과되지 않았다가 또 갑자기 통과된 것도 그래. 이런 일들은 모두 뭔가 있는 거지?”세령이 던진 일련의 질문들은 하나같이 민준의 안색을 더욱 창백하게 만들었다.“됐어, 이 일들은 아무런 연관이
이건 민준이 임유진에 대한 미련이 아니었다.하지만 민준은 지금 아무리 괴로워도 말할 수 없는데, 진세령이 오해할까 걱정되기도 했다.“세령아, 내가 말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소민준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세령은 민준을 쳐다보며 말했다.“민영이가 다친 것이 임유진과 관련이 있는 거야?”민준은 아연실색하더니 약혼녀를 바라보며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 민준의 이 표정을 본 세령은 자기 생각이 맞았다고 느꼈다.“관련이 있긴 하구나. 설마 임유진이 감옥에서 어떤 사람을 알게 된 거야? 그리고 이 사람의 세력이 대단하고?”세령은 계속 추측하고 있다.민준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또 다른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그렇구나, 내가 다친 게 임유진 때문이었네!”소민영이 절룩거리며 걸어왔다. 민영은 오빠와 세령 언니를 불러 함께 거실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결국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민영은 상처를 입은 것에 대해 억울해 죽을 지경이었다. 발이 골절되었고, 병원에 입원하여 고생한 것도 모자라 친구들의 놀림이 되었다.하지만 결국 누가 민영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빠 약혼식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민영은 마음속으로 화가 부글거리고 있었는데 마침 자신의 이 상처가 유진이 사람을 시켜 꾸민 것이라는 것을 듣게 된 것이다. 순간 민영은 화가 치밀어 올라 당장 유진을 찾아서 한바탕 따지고 싶었다.“오빠, 오빠가 계속 임유진 편에 선다면 나 앞으로 오빠를 만나지 않을 거야. 내 발은 언제 나을지도 몰라. 후유증이라도 생긴다면, 나는 절름발이가 될 거야. 오빠, 임유진이 이렇게 다른 사람을 시켜 나를 해쳤는데, 나도 반드시 임유진의 다리를 분질러 놓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내 이름 석 자를 거꾸로 쓸 거야!”민영은 독설을 퍼부으며 휴대폰을 꺼내 사람을 부르려 했다.“내가 말했잖아, 너 아무 일 없이 지내고 싶으면 이제는 임유진을 찾아 귀찮게 하지 말라고!”민준이 호통쳤다.“왜 그래야 하는데? 임유진이 뭐라고!
그리고 예쁜 눈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히 이렇게도 예쁜 눈인데 그 눈동자 속에 담긴 감정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아니, 감정이 담겨있지도 않는 것 같았다.강지혁은 아들의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강선율의 입에서 이런 헛소리가 나왔다는 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이런 얘기를 흘리고 있기 때문임이 틀림없었다.“아니.”강지혁이 단호한 얼굴로 답했다.“네, 알겠어요.”아이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그리고 이것으로 부자의 대화는 끝이었다.도우미가 강선율을 씻겨주기 위해 방으로 들어오자 강지혁은 발걸음을 옮겨 서재로 향했다.그는 한 서랍 앞에 멈춰서고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이내 천천히 서랍을 열었다.안에는 당시 강지혁과 임유진이 혼인 신고하고 갔을 때 포토 부스에서 찍었던 사진이 들어있었다.강지혁은 사진 속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청초하고 깨끗한 느낌을 주는 여자였다. 옅게 지은 미소는 온갖 짜증도 다 날려줄 만큼 온화하고 또 부드러웠다.다만 지금의 그에게는 그녀의 얼굴이 단지 편안하게만 다가올 뿐이지 심장이 뛸 만큼의 느낌은 전해져오지 않았다.게다가 깜짝 놀랄 만큼의 미모도 아니었기에 더더욱 무난하게만 느껴졌다.그런데 기억을 잃기 전의 그는 이토록 평범한 여자를 사랑까지 했고 심지어 이 여자와 결혼해 아이까지 나았다.사실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방식을 따랐으면 이름 있는 가문의 여자와 결혼을 했어야 했다. 이런 집안도 변변찮고 심지어 옥살이까지 하고 나온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매번 이렇게 사진을 볼 때면 강지혁의 머릿속으로 파편 같은 짤막한 기억들이 떠오르곤 한다. 하지만 파편 속 여자의 얼굴은 언제나 모호했다.고이준은 그 여자가 바로 임유진이고 강선율의 엄마라고 했다.강지혁은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작은 기억의 파편들과 고이준이 그에게 얘기해준 그가 잊은 것들을 조합해 당시 그와 임유진이 어떤 사이였는지 대충 파악은 했다.하지만 그저 파악만 했을 뿐 여전히 특별한 느낌은 없었다.사람들이
“나가봐.”강지혁의 말에 선생님은 물건을 챙기고 방을 나갔다.그렇게 방안에는 오직 강지혁과 강선율 두 부자만 남게 되었다.강지혁은 천 피스는 족히 넘어 보이는 퍼즐을 하나하나 묵묵히 맞춰나가는 아들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이렇게 큰 퍼즐은 어른이라도 최소 열흘을 있어야 맞출 수 있다. 그런데 강선율을 마치 생각을 하지 않고도 아는 것처럼 퍼즐을 놓고 맞추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다만 강지혁은 거의 다 완성되어 가는 퍼즐을 보고 잠깐 흠칫했다.퍼즐의 그림이 두 명의 남자아이와 한 명의 여자아이가 손을 잡고 있는 그림이었기 때문이다.혹시 동생들이 보고 싶어서 이 퍼즐을 고른 걸까?강지혁은 당시 병원에서 정신을 차린 후 고이준에게서 그에게는 임유진이라는 아내가 있고 그녀의 뱃속에 세쌍둥이가 들어있었다는 것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임유진이 절벽에서 떨어진 바람에 안타깝게도 세쌍둥이 중 오직 한 명만 살아남았다는 것도 들었다.그 뒤로 몇 년이 지나고 아이가 말을 할 수 있게 됐을 무렵, 강선율은 세쌍둥이 얘기를 어디서 들은 것인지 어느 순간부터 자신에게는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강지혁은 이에 아들에게 물었다.“그런데 왜 남동생 한 명과 여동생 한 명이라고 하는 거지? 두 동생 모두 남동생일 수도 있고 여동생 두 명일 수도 있잖아.”“이유는 없어요.”아이는 강지혁의 의문에 이렇게만 대답해주었다.꼭 남동생 한 명과 여동생 한 명인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이다.강지혁은 강선율의 옆에 앉아 아이가 퍼즐을 완성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다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남동생이 필요하면 아빠가 남동생도 입양해 올게.”애초에 소안나를 입양한 건 강선율이 길에서 괴롭힘당하고 있는 소씨 모녀를 보고 갑자기 여동생이 갖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강지혁은 아들의 한마디에 바로 사람을 시켜 소씨 모녀를 데려왔다. 그러고는 소민아에게 만약 딸을 양녀로 삼게 해주면 앞으로 소안나가 성인이 될 때까지에 필요한 모든 금전적인 지원을 다 해주겠
그래서 소민아는 어떻게든 그 전에 강지혁의 마음을 잡아야만 했다.소민아는 남자들을 꼬실 때 쓰던 청순한 미소를 지으며 강지혁을 맞이했다. 그녀는 원체 얼굴도 예쁘고 또 몸매도 좋았다.만약 예쁜 얼굴이 아니었으면 애초에 돈 많은 남자의 시선을 끌지도 못했을 것이다.하지만 시선을 끈 것까지는 좋았지만 혼전임신으로 부잣집에 시집가려 했던 그녀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했다.남자 쪽 집안에서 그녀의 배가 잔뜩 불러있는데도 그녀에게 그 어떤 기회도 주지 않았으니까.소민아는 당시 아이를 이미 밴 상태였기에 자신이 조금만 더 노력하면 반드시 돌아봐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어코 아이까지 낳았다.하지만 그럼에도 남자 쪽 집안은 그녀를 받아주지 않았고 그녀의 딸까지도 모른 척했다.“회장님, 오셨어요? 안나가 회장님 보고 싶다고 계속 졸라서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왔어요. 얘도 참, 나한테는 안 이러면서 회장님은 엄청 좋아한다니까요.”소민아가 말했다.그리고 소민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소안나가 강지혁에게 안기려는 듯 활짝 웃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지나치게 쌀쌀맞은 강지혁의 눈빛에 소안나는 결국 겁을 먹고 중간에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러고는 조금 눈치 보는 말투로 얘기했다.“아빠, 보고 싶었어요...”강지혁은 소씨 모녀를 한번 훑더니 별다른 감정이 섞이지 않은 말투로 한마디 했다.“늦었으니 이만 가봐.”“하지만... 안나는 아빠랑 여기서 같이 자고 싶어요... 그래도 돼요?”소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민아가 가르쳐줬던 그대로 얘기했다.소민아는 아이에게 반드시 양부인 강지혁에게 잘 보여야 한다고 하며 그를 진짜 아빠로 만들어야만 앞으로도 이렇게 맛있는 음식도 먹고 예쁜 옷도 입으며 마치 공주님처럼 살 수 있다고 했다.아이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기는 했지만 어떻게 해야 그를 진짜 아빠로 만들 수 있을지 몰랐다. 그래서 일단은 소민아가 시키는 건 뭐든 하기로 했다.아이는 공주가 되고 싶었고 그 누구에게도 무시당하고 싶지 않았으니까.강지혁은 아
아마 지금의 강지혁이 유일하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그의 아들인 강선율일 것이다.물론 겉으로는 그런 모습이 전혀 드러나지 않지만 말이다.고이준은 두 부자지간의 평소 모습을 떠올리면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만약 임유진이 살아있었다면, 만약 강지혁이 그녀를 향한 감정을 잊어버리지 않았다면 강지혁은 아마 아들에게 사랑한다는 표현도 하며 더 많이 사랑해줬을 것이다. 보통의 아버지들처럼 그렇게 아들과 친밀한 사이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찬 바람이 쌩쌩 부는 듯한 분위기가 아니라 말이다.하지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고 강지혁은 임유진을 잊어버린 대가로 살 수 있게 됐으니 여러모로 다행인 결과였다.“회장님은 사모님을... 정말 많이 사랑하셨습니다.”고이준이 답했다.“내가?”강지혁이 코웃음을 쳤다. 주위에서 임유진과 그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그는 마치 책이라도 읽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분명히 자기 얘기인데도 전혀 다가오는 바가 없었다.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만약 내가 정말 그 여자를 그토록 사랑했다면 이렇게도 쉽게 잊어버리지 않았겠지. 그런데 난 그 여자와의 모든 기억을 다 잊었어. 그렇다는 건 내 기억에 남을 만한 여자는 아니었다는 소리야.”강지혁이 차갑게 말했다.고이준은 그 말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의 기억이 사라진 게 김재호 때문이라는 걸 그는 말할 수 없었다.기억을 잃은 것으로 그때의 감정을 다 지울 수 있게 됐는데 만약 다시 기억이라도 났다가는 강지혁이 또다시 무너질 테니까.차량이 강씨 저택에 멈춰서고 강지혁이 차 안에서 내렸다.그리고 집사는 그런 강지혁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을 건넸다.“소안나 아가씨와 소민아 씨가 와 계십니다.”집사가 말한 소안나가 바로 강지혁이 입양한 딸이었다. 그런데 입양이라고는 하나 생모가 살아있어 합법적인 입양절차는 밟지 못했다. 그러나 강씨 가문은 대외적으로 소안나를 입양했다고 얘기했기에 사람들은 입양절차 같은 것이 없어도 그녀가 강씨 저택에 양녀인 것을
“강지혁, 너...!”강현수가 뭐라 말하려는데 이한이 다급하게 달려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지혁아, 신경 쓰지 마. 현수 이놈이 아까 술을 좀 많이 마셔서 헛소리하는 것뿐이야.”이한은 말을 마친 후 얼른 강현수의 손을 잡으며 옆으로 잡아당겼다.하지만 그의 손에 끌려갈 강현수가 아니었다.“놔. 강지혁한테 확실하게 물어야 할 게 있으니까.”“현수야. 너 오랜만에 돌아온 거잖아. 안 그래도 너랑 가고 싶었던 곳이 있는데 지금 갈까? 기왕이면 다른 애들도 부르자, 어때?”이한이 필사적으로 화제를 바꾸며 강현수를 설득했다.그런데 그때 가만히 있던 강지혁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한아, 현수 놔줘. 나 때문에 일부러 왔다는데 궁금한 거 다 해결하게 하고 보내야지 않겠어?”이한은 그 말에 속으로 제발 싸움이 일어나지 않게 빌며 강현수의 손을 놓아주었다.강현수는 웃는 듯 마는듯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강지혁을 보며 눈앞에 있는 사람이 정말 강지혁이 맞나 싶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어쩌면 이런 느낌이 드는 게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서로 연락 한번 주고받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강현수는 지난 5년간 일부러 더 강지혁과 만나는 것을 피했고 그에게 먼저 연락도 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임유진의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한데 강지혁과 만나면 더 고통스러워질 게 뻔했으니까.“유진이를 아직도 사랑해?”강현수가 물었다.“아니. 안 사랑해.”시원하고도 명쾌한 대답이 강지혁의 입에서 흘러나왔다.“대답 들었으니 이제 만족해?”강현수는 그의 대답에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는 강지혁의 두 눈이 말도 안 될 정도로 정말 아무런 동요도 없었으니까.정말 더 이상 임유진을 사랑하지 않는다고?강현수는 좀처럼 이 상황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강지혁한테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강지혁이 파티장에서 나오자 고이준이 예를 갖춰 차량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고이준은 오늘 처리해야 할 일 때문에 강
이한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하지만 되도록 강지혁 앞에서 유진 씨 얘기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더 이상 유진 씨에게 별다른 마음이 없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남들 입에서 유진 씨 이름이 나오는 걸 썩 좋아하는 눈치는 아닌 것 같았으니까.”“강지혁이 정말 유진이를 잊었다고...?”강현수의 표정이 완전히 일그러졌다.“그럼 뭐 이미 죽은 사람을 계속 마음에 담아두고 있을까? 현수야, 고작 여자 하나가 곁에서 사라진 것뿐이잖아. 물론 강지혁의 아들까지 낳은 여자는 흔하지 하지만...”이한은 강지혁의 아들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이는 이제 고작 5살밖에 안 됐음에도 불구하고 강지혁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그런지 머리는 지나치게 똑똑하고 또 또래 아이들답지 않게 냉랭한 구석이 있었다.실제로 이한은 강지혁의 아들과 한번 만났다가 뼈도 못 추리고 벙찐 얼굴로 5살짜리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어야만 했다.그리고 그날 그는 그 꼬맹이가 제 아들이 아닌 것이 천만다행으로 느껴졌다. 만약 자신에게 그런 아들이 있었으면 아마 평생을 아들에게 잔뜩 눌린 채로 살았을 테니까.강지혁의 아들을 제압할 수 있는 건 강지혁뿐이었다.강현수는 이한의 말에 표정이 점점 급격히 어두워졌다.고작 여자 하나가 곁에서 사라진 것뿐이라고?그 여자 때문에 강지혁은 하마터면 미친놈이 될 뻔했는데 그렇게도 사랑했던 여자를 고작 5년도 안 돼서 잊어버렸다고?강현수는 와인을 한입에 마셔버리더니 이내 잔을 내려놓고 강지혁 쪽으로 걸어갔다.“야, 현수야!”이한이 뒤에서 강현수를 불렀다.‘저 녀석 설마 지혁이 앞에서 유진 씨 얘기를 꺼낼 생각인가? 설마... 저 녀석이야말로 아직도 유진 씨를 잊지 못한 거 아니야?!’이한은 즐거운 파티장에서 임유진 때문에 두 사람이 괜한 소란이 일으킬까 봐 얼른 강현수의 뒤를 따라갔다.실제로 두 사람은 임유진 때문에 하마터면 치고받고 싸울 뻔하기도 했으니까.강현수가 강지혁의 앞에 멈춰 서자 강지혁과 얘기를 나누던 남자가 얼
강지혁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태도를 보이다가도 또 이렇게 마치 임유진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울분과 속상함을 잔뜩 털어놓았다.그런 그를 보며 강현수는 하고 싶었던 말들을 결국 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다.그 뒤로 강현수는 해외 시장을 넓히는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하며 S 시를 떠났다. 사실 충분히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되는 일이었지만 그는 당시 S 시에 있는 게 숨이 막히고 또 너무 고통스러워 자신이 직접 가기로 했다.하지만 해외로 가서도 그는 여전히 임유진 생각밖에 머릿속에 없었다. 그는 당시 질투 때문에 그녀를 모른 척했던 자신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 지속해서 죄책감에 시달렸다. 만약 그때 차에서 내려 그녀의 사정을 들어줬으면 그녀가 강지혁과 결혼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지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그리고 차라리 그때 임유진이 아무리 원치 않아도, 아무리 강지혁을 사랑한다며 버텨도 억지로라도 그녀를 데리고 갔어야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그렇게 했으면 임유진은 꽤 오랜 시간 그를 미워했을 테지만 적어도 이 세상과 완전히 작별하지는 않았을 테니까.강현수가 시선을 내리며 조금 어두운 얼굴로 과거를 회상하던 그때 익숙한 누군가가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강현수의 바로 옆으로 다가온 남자는 다름 아닌 그와 강지혁의 오랜 친구인 이한이었다.이한은 조금 의외라는 얼굴로 강현수를 바라보았다.“언제 돌아온 거야?”“며칠 전에.”강현수가 술을 한 모금 마시며 답했다.“돌아왔으면 왔다고 얘기를 해줬어야지. 오늘 파티에 참석 안 했으면 너 왔는지도 몰랐을 거 아니야.”이한이 불만인 듯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이제 알았잖아.”강현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더니 다시 시선을 돌려 강지혁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딸을 하나 입양했다고 하던데... 정말이야? 그리고 그 딸의 친모랑 꽤 사이가 가깝다지?”강현수는 줄곧 해외에만 있었지만 강지혁의 소식은 계속해서 듣고 있었다.그래서 강지혁이 2년 전에 웬 여자아이를 한 명 입양하고 그 아이의 엄
모든 건 다 강문철의 시나리오대로였다. 딱 한 가지, 임유진이 정말 강지혁을 위해 목숨을 내걸었다는 사실을 빼고 말이다.물론 임유진이 천만분의 일의 확률로 정말 그런 선택을 했을 때를 대비해 미리 대책을 마련해두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임유진의 목숨을 살려주라는 것까지만 얘기했을 뿐 그 뒤의 일은 김재호에게 얘기해주지 않았다.그래서 김재호는 어쩔 수 없이 지금부터는 자기가 직접 이후의 일을 설계해야만 했다. 물론 그의 선택이 옳은 것인지는 그조차도 모르지만 말이다.강문철은 강지혁에게 약점이 없기를 바랐다. 그래서 제일 큰 약점이자 유일한 약점이 임유진을 처리해버렸다. 그러나 결국 강문철은 내기에서 지고 말았다. 강지혁에게도 졌고 임유진에게도 졌다.‘만약 회장님이 살아계셨다면 지금 이 상황을 보고 생각을 달리하시지는 않았을까?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일은 정말 맞는 일일까?’김재호는 속으로 되뇌다 쓰러진 강지혁을 잠깐 바라보더니 이내 그의 곁으로 다가가 강지혁만 들을 수 있게 나지막이 속삭였다.“만약 임유진 씨가 대표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게 맞다면 그 언젠가 다시 대표님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겠죠. 하지만 만약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그저 그 정도의 마음이었다는 뜻이겠죠.”...5년 후.화려한 파티장 안은 늘 그렇듯 S 시의 부잣집 자제들이 가득 몰려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더 눈에 띄는 건 단연코 GH 그룹의 회장인 강지혁이었다.이제 고작 34세밖에 안 된 나이로 회장직에 오르게 된 그였지만 그는 강문철이 세상을 떠난 후 5년간 완벽하게 회사를 운영해 나가며 진정으로 회사의 주인이 되었다.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에게는 아들과 양녀가 각각 한 명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여자들은 늘 그의 눈에 들고 싶어 하며 틈틈이 강씨 가문의 안주인 자리를 노렸다.그리고 오늘도 역시 여자들은 파티라는 훌륭한 교류 장소를 빌려 그와 거리를 좁혀가며 강지혁과 인사를 나눌 때 은근히 눈빛을 던졌다.하지만 강지혁은 마치 감정이라고는 없
고이준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유골함이라니... 설마...!’그는 잔뜩 긴장한 마음으로 강지혁 쪽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강지혁은 마치 얼어붙기라도 한 듯 김재호의 손에 든 유골함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유진이는...?”그러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입을 열고 말을 내뱉었다.“바로 앞에 계시잖아요.”김재호가 유골함을 가리키며 말했다.하지만 강지혁은 그의 말을 듣지 못한 것인지 다시 한번 큰소리로 물었다.“유진이는 어디 있냐고!”그러자 김재호가 피식 웃었다.“대표님, 상식적으로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 높은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임산부였던 몸으로 정말 살아날 수 있었겠습니까? 그 상황에서 아이 하나 남긴 것도 천운이었습니다.”강지혁은 그 말이 끝나자마자 마치 들어서는 안 될 얘기를 들은 것처럼 흥분하며 김재호를 향해 달려들었다.그런데 그때 그의 행동을 예상한 건지 김재호가 유골함을 위로 번쩍 치켜들었다.“유골함이 산산조각이 나고 안에 담긴 임유진 씨의 유골이 아무렇게나 흩뿌려져도 괜찮으시면 얼마든지 주먹을 휘두르세요.”그 말에 강지혁의 주먹이 멈췄다.그는 이를 꽉 깨물며 김재호를 노려보더니 이내 그의 손에서 유골함을 빼앗아 들었다. 그러고는 유골함이 부서질 듯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유골이라니,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당시 아버지의 유골함을 품에 안아 들었을 때가 세상에서 제일 힘든 순간인 줄 알았는데 임유진의 유골함을 품에 안아 드니 그때보다 더한 고통이 밀려드는 게 느껴졌다.임유진의 화사했던 미소와 그녀의 달콤했던 목소리가 아직도 이렇게도 생생한데 이제는 두 번 그녀를 다시 만날 수도 없고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다고?“혁아, 사랑해.”“혁아, 나는 너랑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싶어. 너도 있고 나도 있고 우리 아이들도 있는 행복한 가정을 꼭 이루고야 말 거야.”“혁아, 널 용서할게.”“널 용서하기로 한 거 아이들 때문이 아니야. 그러니까 잘 살아.”진지했던 얼굴, 행복해하며 웃던 얼굴, 조금은 힘들게 미소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