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은 강지혁이 샤워할 동안 그의 방 안에서 기다렸다.기다리지 않으려 해도 어차피 이 저택은 그의 것이고 그녀가 갈 곳이라고는 그녀의 방밖에 없으니 따로 도망칠 공간도 없었다.그러니 괜히 힘 뺄 필요가 없다.강지혁의 방은 그녀의 방과 크기가 비슷했다. 가구 역시 나무색으로 되어 있었다. 다만 그의 방 한 벽면에는 커튼이 쳐져 있었다.이 벽도 설마 ‘피의 방’처럼 피로 물들어 있는 건 아닐까?임유진은 소름이 돋은 채로 벽을 향해 다가갔다. 무서운 마음도 있었지만 솔직히 열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그저 인테리어용일 지도 모른다.그때 욕실 문이 열리고 샤워를 마친 강지혁이 안에서 걸어서 나왔다.그는 허리춤에 타올 하나만 달랑 두르고 있었고 그 덕에 근육질의 다부진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그리고 그의 두 눈은 나오자마자 임유진을 쫓았다.임유진은 순간 포식자 앞에 선 소동물이 된 느낌이 들었다.강지혁은 한 걸음 한 걸음 그녀를 향해 다가왔고 임유진은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다 발이 뭔가에 걸려 몸 전체가 뒤로 넘어가게 되었다.“꺄!”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녀는 본능적으로 옆에 있는 커튼을 아래로 끌어내렸다.커튼이 아래로 흘러내린 동시에 강지혁의 팔이 넘어지는 그녀의 몸을 덥석 받아냈다.임유진과 강지혁의 두 눈이 마주쳤다.“고... 마워.”깜짝 놀란 마음을 진정시킨 후 그녀는 어색하게 몸을 바로 세우며 그의 시선을 피하고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그러다 옆에 있는 벽을 보는 순간 다시 몸이 굳어버렸다. 임유진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서서히 나머지 커튼도 열어젖혔다.벽에는 사진들이 빼곡히 붙여져 있었고 그 사진 속의 주인공은 오직 한 사람, 임유진이었다.“내 사진이 왜...”“왜 저기 붙어 있냐고?”강지혁은 그녀 대신 말을 이으며 이글거리는 눈으로 임유진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임유진은 그의 시선을 받고는 목이 타며 입술이 바싹 말라왔다.강지혁은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매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다. 지금 이렇게 임유진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임유진은 그가 기댄 어깨가 오늘따라 유난히 더 무겁게 느껴졌다. 그는 지금 몸무게의 절반 정도 되는 무게를 전부 다 그녀의 어깨에 실었다.강지혁은 마치 피곤이 극에 달한 사람처럼 어디 편히 기댈 곳을 찾고 있는 듯했다. 잠깐이어도 좋으니 기대기만 해도 좋다는 것처럼 말이다.그리고 임유진은 지금 그의 기댈 곳이 되었고 이 순간만큼은 이 세상을 통틀어 그녀가 유일한 기댈 곳인 것 같았다. 만약 이대로 그를 밀어내면 강지혁은 망망대해에 버려진 아이처럼 혼자 남겨질지도 모른다.세상에.임유진은 자기가 생각하고도 말도 안 된다며 스스로를 비웃었다.강지혁의 유일한 기댈 곳이 그녀일 리가 없다. 지금 그는 단지 피곤함 때문에 이러는 것뿐이다.“그럼 쉬어. 나는 이만 방으로 돌아갈게.”임유진은 천천히 그를 밀어내고 발걸음을 돌렸다.하지만 막 한걸음 내디디려는 찰나 갑자기 몸이 뒤로 넘어가더니 강지혁에 의해 순식간에 침대와 그의 몸 사이에 갇혀버렸다.“이거 놔!”임유진이 화들짝 놀라 서둘러 그를 밀어냈지만 강지혁은 그럴수록 더 세게 안아왔다.“아무 짓도 안 해. 그냥... 이렇게 안고만 있을게.”강지혁은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완전히 파묻은 채 그녀의 숨결과 체온을 느꼈다.이렇게 해야만 비어있는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고 나아가 안심하고 잠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임유진은 강지혁이 자신을 강제로 취하기라도 할까 봐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의 말대로 그저 꼭 끌어안고 있기만 했다.다만 지금 그의 두 팔은 마치 애착 인형이라도 품에 끌어안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그를 다시 밀어내보려고도 생각해봤지만 그랬다가는 그가 정말 어떻게 할지도 몰라 임유진은 그저 그의 품에 안긴 채 가만히 있었다.그녀의 몸은 여전히 굳어 있었고 두 손은 강지혁의 가슴팍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아까 샤워하고 나온 뒤 그가 위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잠든 그는 평소와 달리 날카로워 보이지도 않았고 압박감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기도 했고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충동마저 들었다.다만 지금 그는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유약해 보였다.유약하다고?임유진은 바로 실소를 터트렸다.그러고는 이제 그만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의 품에서 완전히 몸을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강지혁이 무의식중에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고 이윽고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이에 놀란 임유진이 서둘러 손을 빼려고 하자 강지혁은 점점 더 세게 조여오기 시작했다. 마치 간신히 손에 넣은 보물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것처럼 말이다.임유진은 이 상황이 기가 막혔다.아무리 움직여도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설마 이대로 함께 자야 하는 건가?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다시 한번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손을 이리저리 움직였다.그러기를 몇 번, 임유진은 이쯤 되니 강지혁이 사실 이미 깬 건 아닌지 의심이 되기 시작했다.물론 깨어있을 때처럼 힘이 셌지만 그는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고 그저 손을 꽉 잡는 것 외에 다른 짓은 하지 않았다.결국 임유진은 스스로와 타협하기로 했다.강지혁과 한 침대에서 잔 것이 처음도 아니니 문제 될 건 없다고 말이다.임유진은 잠깐 망설이다 옆에 있는 이불을 끌어와 서로에게 덮어주었다. 그러고는 최대한 그와 거리를 벌려 침대 끝쪽 자리로 갔다.오늘은 어쩌면 제대로 자지 못할지도 모르겠다.하지만 그런 걱정과는 달리 임유진은 금방 잠이 들었고 심지어 해가 중천에 걸려서야 눈을 떴다.그녀는 눈을 비스듬히 뜬 채 한참이나 가만히 있었다.지금이 몇 시지? 그리고 여기는 또 어디지?임유진은 아직 몽롱한 채로 낯선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익숙하게 손을 들어 눈을 비비려고 했다.하지만 그때 오른팔이 뻣뻣한 느낌과 함께 누군가에게 잡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이에 임유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바로 앞에 강지혁의 얼굴이 있었다. 그리고 어젯밤의
“내가 여기서 나갈 수 있기는 하고?”임유진이 되물었다.그러자 강지혁은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열 때문인지 그 웃음마저 허약해 보였다.“아니. 내 동의 없이 넌 여기서 못 나가.”임유진은 미간을 찌푸렸다.지금 이런 말을 할 때인가?“그래서 약은? 너 지금 얼굴 불덩이야. 당장 약 먹어야 한다고.”이렇게 된 건 다 밤새 비를 맞고 있어서일 것이다.“없어.”강지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럼 너 휴대폰 어디 있어? 고 비서님한테 연락해서 지금 당장 병원으로 가겠다고 전해.”“병원 안 가도 돼. 며칠 쉬면 괜찮아 질 거야.”“그러면 해열제라도 사 오라고 해.”강지혁은 이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이불을 열어젖히더니 침대에서 내려왔다.“너 설마 약 먹기 무서워서 그래?”그저 한번 해본 말이었는데 강지혁은 몸을 흠칫하더니 꽤 복잡한 눈길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가뜩이나 빨개진 얼굴이 지금은 한층 더 빨개진 것 같기도 했다.설마 진짜 약 먹기 무서웠던 건가?임유진은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전에 약을 사다 줬을 그는 잘만 받아먹었다.“너 나 사랑해?”강지혁이 대뜸 자기를 사랑하냐고 물어왔다.임유진은 그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몰랐지만 그래도 순순히 대답해주었다.“아니.”그 대답에 강지혁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더니 자조하듯 웃어다.“그런데 내 걱정은 왜 해? 내가 이렇게 열이 나는 게 너한테는 속 시원하고 좋은 거 아니야?”“내가 속 시원해지길 바란다면 날 여기서 내보내 줘.”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을 이를 꽉 깨물더니 그녀를 세게 노려보았다.“날 사랑하기 전까지 넌 여기서 못 나가. 나갈 생각 같은 거 꿈도 꾸지 마.”임유진은 어쩐지 강지혁이 마치 떼쓰는 아이 같아 보였다. 그것도 어지간히 고집부리는 3살짜리 아이 말이다.열 때문인 걸까?강지혁은 말을 마치고는 욕실로 걸어갔다.이에 임유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팔을 홱 잡아당겼다.“너 지금 네가 얼마나...”
“너야말로 괜찮아? 머리는? 안 아파?”임유진은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이리저리 쓰다듬었다.아까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는 꽤 큰 거로 보아 어쩌면 머리가 그대로 바닥에 부딪힌 것일 수 있다.그녀는 그의 머리를 체크하는 데만 여념이 없어 지금 두 사람이 어떤 모습인지 잊고 있었다.그리고 임유진이 그의 몸 위에 기댄 채 손을 뻗어 머리를 매만지는 바람에 두 사람의 몸은 더욱더 세게 밀착되었다.강지혁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내가 아프다고 대답하면 속상해할 거야? 나 걱정해줄 거야?”임유진은 그 말에 움직이던 손을 멈칫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제야 둘 사이가 얼마나 가까운지 깨달았다.그녀의 입술은 지금 아슬아슬하게 그의 볼 가까이에 있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정말 아픈 거면 지금 당장 고 비서님한테 전화해. 그리고 병원 가서 제대로 검사해. 가는 김에 너 열 나는 것도 의사한테 보이고. 아픈 거 억지로 참으려고 하지 마. 너 목숨 여러 개 아니야.”강지혁은 그녀의 진지한 말에 갑자기 씩 웃었다.“역시 너는 내가 죽는 건 싫은 거야. 그렇지?”열 때문에 빨개진 얼굴에 미소까지 지어지니 예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유약해 보이기도 했다.임유진은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고 그의 웃음 때문에 심장이 망치로 얻어맞은 듯 아파 났다....다행히도 강지혁은 결국 고이준에게 전화를 걸었고 열이 나고 있음을 알린 뒤 체온계와 해열제를 가져오라고 했다.고이준은 혹시 몰라 의사도 함께 데려왔다.의사는 강지혁의 상황을 체크한 후 두 가지 약을 건넸다. 그러고는 만약 이틀 정도 지켜보다 계속 열이 내리지 않으면 그때는 병원으로 가 다시 검사해야 한다고 전했다.그 말에 강지혁은 미간을 찌푸렸다.병원으로 가기 싫은 눈치였다.“이제 그만 나가.”고이준은 강지혁의 말에 그를 한번 쳐다보다 옆에 있는 임유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저희 대표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임유진은 아무런
“언제 한번 호기심으로 여러 알 먹은 적이 있었고 그때 3일 내리 잠만 자고 결국 병원으로 실려 가 위세척도 했어. 그리고 그날 그 도우미가 여태 약을 바꿨다는 사실을 듣게 됐지.”강지혁은 임유진을 바라보며 쓸쓸하게 웃었다.“그거 알아? 그 여자는 내가 그 집에 들어갔을 당시 나한테 제일 잘해줬던 사람이었어. 매일 나한테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고 나를 보살펴줬어. 그리고 그렇게 다정하게 웃으면서 매일 나한테 수면제를 건넸던 거야.”임유진은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어떻게 제 한 몸 편해지겠다고, 어떻게 고작 데이트 때문에 애한테 그런 짓을 해? 수면제를 많이 먹이면 너한테 어떤 영향이 가는지 생각 안 했대?”만약 강지혁이 계속해서 수면제를 받아먹었다면 아마 어릴 때부터 질병을 달고 살았을 수도 있다.“이 세상에 자기 이익을 위해 쉽게 남한테 해를 끼치는 사람은 많아.”“그 도우미는 나중에 어떻게 됐는데?”임유진이 물었다.“바로 잘렸어.”강지혁은 그저 잘렸다고만 했지만 강문철이라면 아마 더 한 벌을 내렸을 게 분명했다.“그래서 넌 그때부터 약 먹는 걸 싫어했던 거야?”“응.”강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약을 먹으려고 할 때면 그날 위세척했던 고통과 아무런 힘도 없이 병상에 며칠을 누워있어야만 했던 끔찍한 기억이 떠오르게 된다.심지어 그때 강문철은 그의 병실로 와서는 병상에 누워있는 손자에게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그저 약이 바뀌었다는 사실만 알려주었다.“이번에는 운이 좋았을 뿐이다. 하지만 앞으로 또다시 누군가를 그렇게 쉽게 믿었다가는 그때는 병원에 누워있는 것이 아닌 차가운 바닥에 묻히게 될 거다. 네가 아무리 내 손자라고 해도 나는 멍청한 놈을 도와주지 않아. 이런 기본적인 경계심도 없는 인간은 우리 집에 있을 자격 없다.”강지혁은 그날 확실히 깨달았다. 강문철이 얼마나 매정한 사람인지.어쩌면 강문철은 처음부터 도우미가 약을 바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남들의 눈에 그는 강씨 가문의 사랑받는 도련님으로 보였겠지만 실
강지혁은 임유진이 주는 건 먹을 수 있다고 했다.이건 그녀를 믿고 있다는 표현인 걸까?그렇다면 왜 그녀가 주는 약은 덥석 받아먹으면서 그녀의 마음은 그렇게도 의심했던 거지?만약 강지혁이 그녀의 마음을 믿었더라면 두 사람은 애초에 헤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물론 지금에 와서 이런 생각을 되뇌어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겠지만...강지혁은 자고 있을 때조차도 미간을 살짝 찡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계속 흘러내렸다.임유진은 욕실로 가 타올을 들고 와 그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엄마.. 엄마...”강지혁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끊임없이 엄마를 불렀다.임유진은 그의 얼굴 가까이 다가가서야 그가 뭐라고 하는지 들을 수 있었다.꿈속에서 엄마를 만나기라도 한 건가?임유진은 움직임을 멈추고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강지혁이 아직 어렸을 때 그의 엄마는 구질구질한 생활이 싫어 그와 강선우를 버리고 집을 떠났다고 했다.그리고 그렇게 집을 나간 뒤로 단 한 번도 강지혁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임유진은 강지혁의 가슴팍에 있던 흉터를 아직 기억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 지금은 많이 옅어진 상태였지만 당시 그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어린아이에게 이런 상처는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을 정도의 치명상이 될 수도 있었다.이런 상처가 생긴 이유는 강지혁이 떠나는 엄마를 붙잡으려 했기 때문이다.“엄마... 싫어... 나 두고 가지 마.... 나랑 아빠 두고 가지 마... 제발...”그의 미간은 점점 더 세게 찌푸려졌고 속눈썹은 파르르 떨렸다.금방이라고 부서질 것 같은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방금 닦아낸 땀이 다시 한번 그의 이마에 맺혔다.강지혁은 지금 마치 도움의 손길을 간절히 원하는 아이 같았다.아니... 어릴 때 꿈을 꾸고 있을 테니 꿈속에서 그는 지금 아이일 테지...임유진은 그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며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아무도 너 두고 어디 안 가.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자. 착하지...”임유
방안은 쥐죽은 듯이 조용했고 이곳에 강지혁 외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서서히 시선을 내려 자신의 텅 빈 두 손을 바라보았다.강제로 이 집에 가둬 놓아도 임유진은 여전히 그의 곁에 있어 주지 않았다.떠나지 말라고, 옆에 있어 달라고 그렇게 외쳐도 결국 그들만의 방식으로 곁을 떠나버린 그의 엄마와 아빠처럼 임유진도 떠나버렸다.결국 돌고 돌아 그는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언제부터 혼자인 걸 신경 썼다고...임유진을 만나기 전 그는 늘 혼자였다. 이 세상에서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 스스로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제 와서 다시 혼자가 됐다고 마음이 허전할 필요는 없었다.하지만, 분명 그러한데 자꾸 고통이 마음의 틈을 비집고 나와 온몸에 뿌리를 내린다.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걸어들어왔다.강지혁은 자신을 향해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을 보며 눈동자가 점점 흔들렸다.“벌써 일어난 거야? 죽 끓여왔어.”임유진은 손에 든 죽을 침대 협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만졌다.아직도 조금 뜨겁기는 했지만 전보다는 많이 나았다.“열은 조금 내린 것 같은데... 체온은 이따 다시 재줄게.”“방금... 죽 끓이러 갔었던 거야?”강지혁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응, 너 깨고 나면 배고플까 봐. 반 시간쯤 뒤에나 깰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깼네?”임유진은 그의 얼굴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죽은 아직 뜨거우니까 조금 식히고 먹어.”“알았어.”강지혁은 죽을 한번 보고는 다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그럼 그 전까지는... 계속 이 방에 있었던 거야?”“아니면?”임유진은 줄곧 그의 옆에 있었다.강지혁이 악몽 때문에 몸을 뒤척이며 힘없이 중얼거릴 때면 그녀는 옆에서 다정하게 그의 말에 일일이 대답해주며 그를 안심시켰다. 그러면 강지혁은 그제야 다시 편안한 얼굴을 했다.그렇게 그가 완전히 편히 잠든 후에야 임유진은 조용히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향했다.강지혁은 눈앞에 있는 여
탁유미는 깨끗이 청소를 마친 후 슬슬 윤이를 데리러 갈 시간이 되자 김수영에게 얘기한 후 곧바로 집을 나섰다.탁유미가 밖으로 나온 순간, 멀지 않은 곳에 정차된 차량이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몰래 따라붙기 시작했다.이경빈은 잔뜩 마른 탁유미의 뒷모습을 보며 가슴이 욱신거려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탁유미는 그가 눈앞에 나타나는 걸 좋아하지 않기에 이경빈은 이런 식으로밖에 그녀를 지켜볼 수 없었다.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어떻게 하면 그녀가 간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그 방법을 알지 못했다.“유미 언니는 이미 마음을 굳힌 것 같아요. 아마 당분간은 그 결정을 돌리는 게 쉽지 않겠죠. 하지만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언제든지 언니한테 간을 기증할 수 있게 준비해줘요. 이경빈 씨가 언니를 정말 사랑하는 거라면요.”며칠 전 임유진이 건넨 이 말에 이경빈은 바로 술을 끊었고 간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엄격하게 식단관리도 하고 몸 관리도 했다.이경빈은 탁유미가 유치원 앞에 멈춰서자 이내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웠다.유치원 앞에는 그녀 말고 다른 학부모들도 기다리고 있었다.그중에서 그녀는 유독 더 말라보였고 얼굴은 가뜩이나 작은데 병세로 인해 더 수척해 보였다.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옷만큼은 무척이나 단정하고 또 깔끔했다.탁유미는 아무리 아파도 윤이를 데려올 때만큼은 늘 자신의 겉모습을 신경 썼다.화려하게 치장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타인이 윤이를 낮잡아 보지는 못하게 최대한 깔끔하게 자신을 꾸몄다.이경빈은 그녀의 생각을 눈치채고는 조금 웃기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쓸쓸하기도 했다.자신의 아들을 낮잡아 볼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지만 그런 빌미를 만들어 준 사람은 결과적으로 그였으니까.만약 당시 탁유미를 감옥으로 보내지 않았으면 윤이가 감옥에서 태어나는 일도 없었을 거고 청력을 잃게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윤이는 누구보다 풍족한 생활을 누렸을 것이다.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유치원 문이 열리고 아이들이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학
“나는 더 이상 이경빈과 엮이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간이식 수술을 받는다고 해서 결과가 좋을 거라는 보장도 없고요. 알아보니 실패한 사례들이 꽤 많더라고요.”탁유미가 담담하게 말했다.사실 1기나 2기 정도였으면 간이식 수술을 생각해봤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녀는 발견 당시 벌써 3기였고 몸도 하루가 다르게 나빠져 가고 있었기에 수술에 대한 큰 희망을 품을 수가 없었다.“혁이한테 부탁해서 이쪽으로 제일 유명한 교수님을 찾아올게요. 분명히 성공할 수 있을 거예요!”임유진이 다급하게 말하자 탁유미가 가볍게 웃었다.“유진 씨, 고마워요. 하지만 이제는 됐어요. 나는 나머지 몇 개월을 병상 위에서 보내고 싶지 않아요. 만약 수술하게 되면 계속 병원에만 있게 되잖아요.”“하지만...!”“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 있는 시간을 큰 의미 없는 수술에 쓰고 싶지 않아요.”탁유미의 몸은 지금 이 순간에도 빠르게 나빠지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탁유미였다.그래서 그녀는 무의미한 노력을 하고 싶지 않았다.임유진은 죽음을 받아들인 것 같은 탁유미를 빤히 바라보았다.탁유미가 이토록 쉽게 포기하는 건 수술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경빈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언니한테는 윤이도 있고 아주머니도 있잖아요. 언니가 이대로 포기해버리면 두 사람은 어떡해요? 남게 될 사람도 생각해야죠.”“유진 씨,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어요. 마지막 몇 개월을 수술 하나에 의존하는 거, 나는 못 해요.”그 말에 임유진은 고개를 푹 숙였다.탁유미가 현재 어떤 마음인지 사실 이해를 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수술이 백 퍼센트 성공적으로 끝난다는 보장도 없고 설사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해도 재발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으며 후유증 같은 것도 생길 수 있으니까.임유진이 떠난 후 김수영이 다가와 말했다.“유미야, 그냥 이경빈이 간을 기증한다고 할 때 받는 게 어때? 그러면 살 수 있는 희망이라도 생기잖아.”방금 임유진과 탁유미의 대화로 김수영은 일전 간
그때 강지혁이 다가와 뒤에서 임유진을 감싸며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만약 그 어느 날 내가 너한테 큰 잘못을 저질러서 방금 이경빈이 그랬던 것처럼 울어버리면 너는 어떡할 거야? 용서해줄 거야?”임유진은 그 말에 실소를 터트렸다.“무슨 소리야. 갑자기 그런 가정을 왜 해. 그리고 네가 나한테 잘못할 질을 할 리가 없잖아.”“그냥 만약에... 만약에 내가 그러면 어떡할 거야?”강지혁은 고개를 살짝 들어 입술로 그녀의 귓불을 간지럽혔다.그는 임유진을 너무나도 많이 사랑해 그녀가 너무나도 무서웠다.임유진은 그의 뜨거운 숨결과 입술 촉감이 그대로 전해져 저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그녀는 진지한 얘기 중에 은근히 스킨십을 해오는 그가 괘씸한데도 또 그게 너무나도 유혹적이라 괜히 심술이 나 몸을 돌리고 그를 노려보았다.“용서해줄 거야? 아니면 탁유미 씨처럼 더 이상...”강지혁은 ‘더 이상 나와 엮이고 싶어 하지 않아 할 거야?’라는 말을 하려다가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 나면 정말 그렇게 될 것 같아 결국 입을 다물었다.이딴 사소한 것을 신경 쓸 정도로 그는 임유진과 관련된 일이면 늘 이렇게 겁쟁이가 되고 만다.임유진은 강지혁의 눈빛을 마주 보고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아련해졌다.임신하고 난 뒤 모성애가 폭발하기라도 한 건지 귀가 축 처진 강아지 같은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찡해 나며 당장이라도 끌어안아 주고 싶었다.“못 살아 진짜. 너 이러다 나중에 아주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바로 울겠다? 그래도 아빠가 될 사람인데 그렇게 쉽게 눈물을 보이면 안 되지.”임유진은 두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매만지며 다정한 목소리로 얘기했다.“하지만 만약 네가 정말 이경빈처럼 그렇게 울어버린다면 나는 아마... 매우 속상해할 거야. 어쩌면 그때는 네가 무슨 짓을 하든 간에 다 용서해주겠다고 할지도 모르지.”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그녀의 손을 잡고 손바닥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응, 꼭 용서해줘야 해. 약속한 거야.”
이경빈은 갑자기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었다.하지만 웃고 있다기에는 눈이 너무 슬퍼 보였다.“부럽네. 서로 옆에 딱 붙어 있잖아. 반면에 나랑 유미는...”강지혁은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이경빈은 잔뜩 취한 눈빛으로 강지혁을 바라보다 다시 임유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임유진 씨는 유미 친구잖아... 그러니까 말해줘. 내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유미가 내 간 기증을 받아들이고 수술을 받게 할 수 있는지...”임유진은 그의 말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네? 언니가 수술을 안 하겠대요? 아니, 이경빈 씨한테 간 기증을 안 받겠다고 했어요?”이경빈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나한테 뭔가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달갑지 않고 더 이상 나랑은 엮이기 싫다고 했어... 이대로라면 얼마 안가 죽는데도... 그래도 내 간은 싫대.”그는 탁유미가 살기를 원하고 있다. 용서는 둘째치고 일단 그녀가 목숨은 부지하기를 바라고 있다.그 말에 임유진의 얼굴이 한순간에 어두워졌다.탁유미가 살 방법은 현재로서는 간이식 수술밖에 없다. 그런데 거절이라니...임유진은 생각도 못 한 전개에 고민에 빠졌다.“뭐라고 말 좀 해봐. 임유진 씨 똑똑하잖아. 어떻게 하면 유미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지 얘기 좀 해보라고!”이경빈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임유진을 간절하게 바라보았다.임유진은 그런 그가 안쓰럽기도 하고 또 그의 꼴이 화가 나기도 했다.“그러게 조금만 더 일찍 언니를 향한 마음을 깨닫지 그랬어요. 아니면 감옥에 보낸 것으로 복수를 끝냈으면 두 번 다시 찾지 말던가 왜 다시 나타나서 또 언니한테 상처를 줘요!”“그래... 내 탓이야... 내가... 내가 다 잘못했어. 내가 등신이라 내 마음을 인정하지 않았어...”이경빈은 주먹을 말아쥐더니 이내 자신의 가슴팍을 퍽퍽 두드리기 시작했다.“날 증오한다고 했어... 유미가... 유미가...”이윽고 그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하더니 몇 초도 안 돼 얼굴 전체가 눈물로 뒤덮였다.지
“이경빈 씨가요?”임유진은 깜짝 놀라며 10시가 넘어가는 시계를 바라보았다.이 시간에 여기까지 찾아왔다고? 그것도 술에 취해서?“지금 바로 내려갈게요.”임유진은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잠깐.”그러자 강지혁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내가 만나고 올 테니까 넌 여기 있어.”“아니, 내가 만나는 게 나을 것 같아. 갑자기 찾아온 걸 보면 분명히 언니 일일 테니까.”임유진의 단호함에 강지혁은 한숨을 한번 내쉬더니 집사를 향해 말했다.“금방 내려갈 테니까 일단 안으로 들여.”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외투부터 걸쳐. 그리고 슬리퍼도 신고.”강지혁은 말을 마친 후 한쪽 무릎을 꿇으며 임유진의 다리를 들어 슬리퍼를 신겨주었다.집사는 침실을 떠나기 전 그 모습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이 세상에 강지혁을 무릎 꿇릴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임유진밖에 없을 것이다.예로부터 강씨 집안 사람들은 극도로 비정하거나 극도로 감성적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강문철은 비정하다 못해 한여름에도 녹지 않을 얼음장 같은 사람이었고 그의 아들인 강선우는 지독한 낭만파로 사랑에 목을 맨 사람이었다.그리고 강지혁은 두 사람 중 하필이면 강선우를 닮았고 강선우처럼 한 여자를 위해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집사는 강문철이 젊었을 때부터 이 집에서 집사로 일했던 사람이라 강지혁은 강선우의 전철을 따르지 않고 임유진과 깨가 쏟아질 만큼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다.임유진은 고개를 숙인 채 슬리퍼를 신겨주는 강지혁을 보며 마음이 따뜻해졌다.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가족이 아닌 강지혁에게서 느끼게 될 줄은 정말 생각도 못 했다.임유진은 가만히 구경하다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강지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이에 강지혁은 손을 잠깐 멈추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사람을 녹일 것 같은 그의 눈빛과 마주하니 어쩐지 세상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왜?”강지혁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이경빈은 혼이 다 빠진 듯한 얼굴로 차에 앉아 탁유미가 유치원에서 윤이를 데리고 나오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이경빈이 아주 조금이라도 일찍 자신의 마음을 알아챘으면 어쩌면 지금쯤 탁유미 곁에 나란히 서서 함께 윤이를 데리러 갔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고 그들과 함께 있을 기회를 자기 발로 걷어찼다.이경빈은 두 모자를 이렇게도 시야 안에 꽉 담고 있으면서도 그들에게 한 걸음도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그의 복수는 언뜻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유일하게 사랑했던 사람을 잃었으니 실패한 거나 다름없었다.게다가 건강하게 태어났어야 했을 아이가 장애를 가진 채 태어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이경빈은 과거의 행동을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욱신거리며 숨이 가빠왔다.언제쯤이면 이 고통이 나아질 수 있을지 그는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어쩌면 이렇게 평생 고통 속에서 살다가 목숨을 거둘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고통이 조금은 줄어들지도 모른다.이경빈은 손을 들어 자신의 심장께를 꽉 잡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강씨 저택.저녁 식사를 마친 후 강지혁은 임유진에게 족욕을 시켜준 다음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아 침대로 데려왔다.임유진은 마치 자신을 유리구슬처럼 대하는 그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그렇게까지 조심하지 않아도 돼. 아직 못 걸을 정도로 힘든 건 아니니까. 그리고 요즘 우리 아이들도 엄청 조용하고 말이야.”이제 그녀는 어느덧 5개월을 넘기고 있어 입덧도 가라앉고 잠도 잘 왔다.그리고 참으로 다행히도 정기 검진 결과도 늘 양호한 편이었고 아이들도 아주 얌전히 잘 자라주고 있었다.하지만 강지혁은 마치 전쟁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특히 그녀의 배가 점점 불러오고 나서는 매일매일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며칠 전 임유진이 화장실이 가고 싶어 새벽에 잠에서 깼을 때 그녀는 강지혁이 자고 있는 줄 알고 조심스럽게 움직였다가 등 뒤에서 어디 가냐는 그의 말이 들려오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깜짝이야! 너 안 자고 있었어?!”강지혁의 목소리는 막 자
“내가... 그렇게도 싫어?”이경빈은 속으로 그녀가 아니라고 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그의 귓가에 들려온 말은...“응. 더 이상 네 얼굴 보고 싶지 않아.”“만약... 그날 내가 너를 병원으로 끌고 가지 않고 너를 공수진 앞에서 무릎을 꿇리고 머리를 조아리게 시키지 않았으면 나에게도 기회가 있었을까? 너한테 용서를 빌 기회가 있었을까...?”잔뜩 잠긴 그의 목소리가 애처롭게 들려왔다.하지만 탁유미의 얼굴은 표정 변화 하나 없었다.“네가 겪은 수모와 고통... 내가 돌려받을게. 내가 다 돌려받을 테니까 한 번만 용서해줘... 아니, 최소한 내 간을 거절하지는 말아줘!”이경빈은 말을 마친 후 차가운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탁유미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눈을 크게 뜨며 그를 내려다보았다.설마 이경빈이 이렇게도 쉽게 무릎을 꿇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사람들이 언제 지나갈지도 모르는 밖에서 말이다.하지만 이내 그녀를 더 놀라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이경빈이 무릎을 꿇은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기 때문이다.한 번, 두 번, 세 번....바닥과 부딪히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오후 3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라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주민들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주민들은 두 사람 근처를 지나가다가 이경빈이 머리를 조아린 것을 보고는 발걸음을 멈추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탁유미는 아직도 머리를 조아리는 이경빈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솔직히 놀랍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그도 그럴 것이 이경빈처럼 자존심이 강한 남자가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는 아니니까.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것이 바로 눈앞에 펼쳐졌다.얼마나 세게 머리를 박은 건지 처음에는 그저 이마 쪽에 스치듯 껍질이 까지기만 했는데 이제는 슬슬 피가 나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바닥으로 피가 뚝뚝 떨어지기까지 했다.탁유미는 그 모습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네가 이런다고 내 마음이 달라지지는 않아. 나한테 정말 미안하다면
그 모든 것들이 다 그녀를 향한 사랑의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당시의 이경빈은 몰랐다.“유미야, 사랑해.”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는 드디어 줄곧 마음속에 품어왔던 마음을 입 밖으로 꺼냈다.탁유미는 힘껏 반항하다가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고는 마치 인형처럼 그의 품에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이에 이경빈은 더욱더 그녀를 세게 끌어안았다.마치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사랑해. 줄곧 사랑하고 있었어. 이제야 전해서 미안해. 그때 네가 유리 파편을 네 복부에 찔러넣었을 때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었어. 피를 흘리는 게 네가 아닌 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면서 너무 무서웠어.”사실 그는 그때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어야 했다.“복수 때문에 눈이 멀어서 너를 향한 내 마음이 얼마나 큰지 몰랐어. 앞으로는 잘할게. 내 모든 걸 걸고 너를 지켜줄게! 네 억울함도 풀어주고 내 간도 너한테 줄게! 한 번으로 안 된다면 될 때까지 너한테 간을 기증할게!”이경빈은 탁유미가 더 이상 아프지 않고 멀쩡하게 살 수만 있다면 뭐든 해주고 싶었다.탁유미는 간 얘기에 조금 흠칫했다.‘...다 알고 온 거네.’사실 그녀도 이경빈에게 희망을 걸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어쩌면 이라는 기대를 아주 조금은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의 말과 행동으로 그건 잘못된 기대고 잘못된 희망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나 이제 너 안 사랑해.”차가운 목소리가 이경빈의 귓가에 들려왔다.그 말을 듣는 순간 이경빈은 온몸이 굳어지며 심장 고동이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이경빈, 나 너 안 사랑해.”탁유미는 두 손으로 이경빈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이경빈을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은 무서울 정도로 차분했다.“너는 그때 복수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척했어. 그리고 지금은 네 목숨을 구해줬다고 또다시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어. 네 기분 하나로 쉽게 바뀔 사랑을 내가 원할 거라고 생각해?”이경빈의 얼굴은 무척이나 창백했다.“아니야...
탁유미는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이경빈의 모습이 그저 우습게만 느껴졌다.모든 걸 망쳐놓고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날 때려도 돼. 욕해도 돼. 벌을 줘도 돼. 네가 주는 벌이라면 달갑게 받을게. 과거의 내 행동과 언행에 대해 제대로 사과하고 싶어. 나한테 그럴 기회를 줘. 그리고 널 곁에서 지켜주줄 수 있는 기회도...”“그만!”탁유미가 이경빈의 말을 끊었다.“이경빈, 네가 인간이면 나한테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공수진을 밀지 않았다고 내가 몇백 번을 말했는데도 너는 결국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았어. 들어주려고 하지도 않았지. 네가 지금 이러는 건 골수를 기증해준 게 공수진이 아닌 나라는 걸 알아서야. 만약 널 구한 게 정말 공수진이었으면 너는 지금도 여전히 나한테 죄가 있다고 생각했을 거잖아. 내 말이 틀려?”이경빈은 그 말에 순간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 말문이 막혔다.“이경빈, 네가 지금 이러는 건 그저 자기만족일 뿐이야. 나한테 사과라도 해야 네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이러는 거잖아. 내가 모를 것 같아? 난 너 용서 안 해. 네가 날 감옥에 보낸 것도 그 일로 감옥에서 감기에 걸려 어쩔 수 없이 감기약을 먹어 윤이가 청력을 잃은 것도, 나는 용서할 생각이 없어.”탁유미의 말에 이경빈은 휘청이며 옆에 있는 벽을 짚었다.당시 그녀를 감옥에 보낸 건 그에게는 그저 간단한 복수에 불과했지만 그녀에게는 모든 고난의 시작이었다.게다가 그 일 때문에 윤이의 청력이 사라진 거라니...‘대체 나는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보상하겠다고 했지? 아니, 넌 보상 못 해.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네가 하는 사과도 나한테는 그저 역겨울 뿐이야!”탁유미는 말을 마친 후 그를 지나쳐 빠르게 걸어갔다.하지만 얼마 못 가 이경빈에게 팔이 잡혀 그대로 그의 품속에 안기고 말았다.탁유미는 그의 냄새가 코를 확 덮치는 순간 마치 그에게 꽁꽁 둘러싸인 기분이 들었다.“뭐 하는 짓이야! 이거 안 놔?!”놓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