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혁은 임유진이 주는 건 먹을 수 있다고 했다.이건 그녀를 믿고 있다는 표현인 걸까?그렇다면 왜 그녀가 주는 약은 덥석 받아먹으면서 그녀의 마음은 그렇게도 의심했던 거지?만약 강지혁이 그녀의 마음을 믿었더라면 두 사람은 애초에 헤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물론 지금에 와서 이런 생각을 되뇌어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겠지만...강지혁은 자고 있을 때조차도 미간을 살짝 찡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계속 흘러내렸다.임유진은 욕실로 가 타올을 들고 와 그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엄마.. 엄마...”강지혁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끊임없이 엄마를 불렀다.임유진은 그의 얼굴 가까이 다가가서야 그가 뭐라고 하는지 들을 수 있었다.꿈속에서 엄마를 만나기라도 한 건가?임유진은 움직임을 멈추고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강지혁이 아직 어렸을 때 그의 엄마는 구질구질한 생활이 싫어 그와 강선우를 버리고 집을 떠났다고 했다.그리고 그렇게 집을 나간 뒤로 단 한 번도 강지혁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임유진은 강지혁의 가슴팍에 있던 흉터를 아직 기억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 지금은 많이 옅어진 상태였지만 당시 그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어린아이에게 이런 상처는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을 정도의 치명상이 될 수도 있었다.이런 상처가 생긴 이유는 강지혁이 떠나는 엄마를 붙잡으려 했기 때문이다.“엄마... 싫어... 나 두고 가지 마.... 나랑 아빠 두고 가지 마... 제발...”그의 미간은 점점 더 세게 찌푸려졌고 속눈썹은 파르르 떨렸다.금방이라고 부서질 것 같은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방금 닦아낸 땀이 다시 한번 그의 이마에 맺혔다.강지혁은 지금 마치 도움의 손길을 간절히 원하는 아이 같았다.아니... 어릴 때 꿈을 꾸고 있을 테니 꿈속에서 그는 지금 아이일 테지...임유진은 그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며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아무도 너 두고 어디 안 가.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자. 착하지...”임유
방안은 쥐죽은 듯이 조용했고 이곳에 강지혁 외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서서히 시선을 내려 자신의 텅 빈 두 손을 바라보았다.강제로 이 집에 가둬 놓아도 임유진은 여전히 그의 곁에 있어 주지 않았다.떠나지 말라고, 옆에 있어 달라고 그렇게 외쳐도 결국 그들만의 방식으로 곁을 떠나버린 그의 엄마와 아빠처럼 임유진도 떠나버렸다.결국 돌고 돌아 그는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언제부터 혼자인 걸 신경 썼다고...임유진을 만나기 전 그는 늘 혼자였다. 이 세상에서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 스스로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제 와서 다시 혼자가 됐다고 마음이 허전할 필요는 없었다.하지만, 분명 그러한데 자꾸 고통이 마음의 틈을 비집고 나와 온몸에 뿌리를 내린다.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걸어들어왔다.강지혁은 자신을 향해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을 보며 눈동자가 점점 흔들렸다.“벌써 일어난 거야? 죽 끓여왔어.”임유진은 손에 든 죽을 침대 협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만졌다.아직도 조금 뜨겁기는 했지만 전보다는 많이 나았다.“열은 조금 내린 것 같은데... 체온은 이따 다시 재줄게.”“방금... 죽 끓이러 갔었던 거야?”강지혁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응, 너 깨고 나면 배고플까 봐. 반 시간쯤 뒤에나 깰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깼네?”임유진은 그의 얼굴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죽은 아직 뜨거우니까 조금 식히고 먹어.”“알았어.”강지혁은 죽을 한번 보고는 다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그럼 그 전까지는... 계속 이 방에 있었던 거야?”“아니면?”임유진은 줄곧 그의 옆에 있었다.강지혁이 악몽 때문에 몸을 뒤척이며 힘없이 중얼거릴 때면 그녀는 옆에서 다정하게 그의 말에 일일이 대답해주며 그를 안심시켰다. 그러면 강지혁은 그제야 다시 편안한 얼굴을 했다.그렇게 그가 완전히 편히 잠든 후에야 임유진은 조용히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향했다.강지혁은 눈앞에 있는 여
“손에... 힘이 안 드네.”강지혁은 말을 하고는 다시 한번 그릇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임유진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그릇을 자기 쪽으로 가져가며 말했다.“됐어. 너 그러다 죽을 침대에 엎어버릴지도 모르니까 내가 먹여줄게.”말을 마친 그녀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죽을 한 숟가락 뜨고는 후후 불어 강지혁의 입가에 가져갔다.강지혁은 순순히 입을 열어 그녀가 먹여주는 대로 가만히 받아먹었다.지금 그는 마치 주인 앞의 온순한 강아지처럼 죽을 먹었다. 하지만 그 눈빛은 전혀 온순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임유진을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이글거렸다.그 시선을 그대로 받은 임유진은 어쩐지 이 상황이 무척이나 불편하게 느껴졌다.“저번에 말했던 그 여자 말이야. 진짜 그 방에서 남자를 죽였어?”임유진은 아무 화제나 꺼내 이 불편한 침묵을 깼다.“응, 진짜야.”“하지만 그 여자가 죽인 건 강씨 가문 사람이잖아. 가문 사람들이 그 여자를 가만히 내버려 뒀어?”70년 전이라고 해도 강씨 가문은 큰 가문이었을 테니까.“그 남자가 유서를 남겼거든. 자기가 죽어도 그 여자는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임유진은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그러면 남자는 여자가 자기를 죽일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건가?그런데도 그런 편지를 남긴 건가?70년 전이면 지금처럼 법망이 촘촘하지 않던 시대라 강씨 가문에서 그 일을 함구하면 그 여자는 무사히 도망갈 수 있었을 것이다.“그래서 그 여자는 그 후에 어떻게 됐어?”임유진은 이상하게 자꾸 그 여자의 마지막이 궁금했다.“다시 이곳으로 돌아왔어. 네가 지금 있는 방, 그게 그 여자가 그때 머물렀던 방이었거든. 그 여자는 이곳으로 다시 돌아와 그대로 여기서 생을 마감했어.”“생을 마감했다고? 혼자?”“둘이라고 해야겠지. 임신한 채로 이 집에 돌아왔으니까. 여기서 그 여자는 남자애를 낳았고 그 남자애는 커서 강씨 가문을 이어받았어.”임유진은 이 이야기의 결말이 이렇게 될 줄은 몰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강지혁은 임유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챈 듯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걱정하지 마. 노인네가 너한테 해를 끼칠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거야.”임유진은 시선을 내리고 어느새 비어버린 그릇을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이만 쉬어. 나는 이제 내 방으로 돌아갈게.”하지만 임유진이 몸을 돌리기도 전에 강지혁이 더 빠르게 그녀의 옷을 잡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촉촉한 두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지금 뭐 하는 거야?”“너 아직 나 완전히 잊은 거 아니지? 그게 아니면 내 옆에서 밤새 병간호를 해주지도 않았을 거고 약도 주지 않았을 거며 죽도 끓여주지 않았을 거야. 그치?”잔뜩 잠긴 목소리가 강지혁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의 두 눈은 애원과 갈망을 담아 그렇게 그녀를 바라보았다.“유진아, 다시 날 사랑해주면 안 돼? 나는 내가 정말 이렇게까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될 줄은 몰랐어. 이렇게까지 깊게 사랑하게 될 줄 정말 몰랐어...!”사람들 꼭대기에만 있던 강지혁이 지금은 자존심이고 뭐고 싹 다 내려놓고 오직 임유진의 사랑 하나만을 바라고 있다.임유진은 그의 말에 순간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버렸다....한편, 강현수는 지금 자신의 모든 인맥을 이용해 임유진의 행방을 찾고 있다.하지만 그게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가 인맥을 쓸 수 있는 만큼 강지혁 또한 임유진을 찾지 못하게 인맥을 쓸 수 있으니 말이다.게다가 임유진이 사라진 뒤로 강지혁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아 더더욱 찾기 어려웠다.아주 작은 단서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것마저 없었다.강현수는 이제껏 이렇게까지 불안하고 답답하고 신경이 곤두선 적이 없다. 심지어 바로 눈앞에서 배여진이 뭐라고 얘기하는 데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은 온통 임유진의 행방에 관한 생각뿐이었다.강현수가 부모님 앞에서 임유진에 대한 마음을 고백했을 때 그의 부모님은 처음에는 놀랐다가 바로 반대했고 심지어는 임유진에게 집착하지 말라며 화를 내고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하지만 강현수는 이미 그녀에게 푹
강현수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그러다 얘기를 전해 듣고는 갑자기 얼굴이 심각해졌다.“네? 선생님이 사라져요?”“그래, 너도 알다시피 그 양반이 환자를 오게 했으면 했지 절대 치료하러 밖으로 나가는 사람은 아니었잖아. 그런데 오늘 갑자기 나한테 전화가 와서 환자 치료해주러 가야 한다면서 어쩌면 오래 걸릴지도 몰라 전화하는 거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라. 그런데 몇 시간 뒤에 다시 연락해보니까 전화를 안 받는 거야!”강현수에게 전화를 건 사람은 소영훈의 아내인 김영애였다.그녀는 불안한 마음에 지금 발을 동동 구르며 전화하고 있다.강현수는 소영훈과 친했기에 자연스럽게 그의 아내와도 친분을 쌓게 되었다.“환자 보러 나가신다고 했다고요?”강현수가 미간을 찌푸렸다.“그래. 현수야, 이 양반 설마 누구한테 원한산 거 아닐까? 그래서 무서운 사람들한테 납치된 걸까?”김영애는 지금 별의별 나쁜 생각이 다 들었다.하지만 강현수는 그 말을 듣고 순간 무언가가 떠올랐다.만약 임유진이 강지혁에게 데려가 지지 않았더라면 오늘이 바로 그녀가 손가락을 치료하게 될 두 번째 날이다.강지혁의 짓일까?임유진의 치료 때문에 강지혁이 소영훈을 데려간 걸까?강현수는 김영애를 안심시키고 전화를 끊은 다음 곧바로 부하에게 전화를 걸었다.“누가 선생님을 데려갔는지 알아봐.”“네, 알겠습니다.”강현수는 전화를 끊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네? 하지만 우리 이제 온 지 10분도 안 됐는데...!”배여진은 다급하게 그를 말렸다. 그와 오랜만에 식사하러 나왔는데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강현수가 가겠다고 자리에서 일어서니 그녀로서는 황당할 따름이었다.“미안, 밥은 너 혼자 먹어.”강현수는 그녀가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소영훈이 사라진 게 정말 강지혁과 관련이 있는 걸까?임유진은 대체 강지혁에게 어디로 데려가진 거지?!강현수는 가슴이 쿵쿵 뛰는 것이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만약 하루빨리 임유진
“죄송해요. 설마 선생님을 이곳으로 데려올 줄은 몰랐어요...”임유진은 민망해하며 고개를 숙였다.소영훈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살다 보면 뭘 봐도 보지 않은 척해야 하는 때가 있고 뭘 들어도 듣지 않은 척해야 할 때가 있다.그는 손에 든 치료 도구를 책상 위에 펼쳐놓고는 임유진에게 오른손을 내밀라고 얘기했다.임유진은 다양한 사이즈의 침들을 보며 순간 지난번 치료했을 때의 고통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소영훈은 침을 들어 임유진의 손등으로 가져갔다. 그때 강지혁이 갑자기 소영훈의 손목을 잡으며 물었다.“지금 뭐 하는 겁니까?”“뭐하긴요. 치료하는 중이죠.”소영훈은 치료 중에 방해받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었기에 바로 눈썹을 찌푸렸다.“치료하는데 마취는 왜 안 합니까?”강지혁이 미간을 치켜세우며 물었다.“마취하면 손가락 반응을 제대로 알 수 없어요. 반응을 제대로 알아야 치료가 제대로 됩니다!”소영훈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설명했다.하지만 강지혁은 그의 설명에도 크고 두꺼운 침 때문에 망설여졌다.“하지만...”“괜찮아. 전에도 이렇게 치료했어.”임유진을 고개를 들어 강지혁에게 말했다.“그리고 이 정도 고통은 잠깐 참으면 금방 지나니까 괜찮아.”감옥에 있었을 때처럼 잠깐만 참으면 금방 지나간다.다만 감옥에 있었을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는 절망 속에서 고통을 참았다면 지금은 희망 속에서 고통을 참고 있다.손가락이 아무 일도 없었던 때처럼 멀쩡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저 지금보다 조금만 더 나아지기를 바랄 뿐이다. 그 정도만 돼도 충분히 기쁠 테니까.강지혁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그녀의 말을 듣고 뭔가 떠오른 듯했다.강지혁은 소영훈을 잡던 손을 풀고 이번에는 임유진의 왼손을 잡았다. 깍지를 낀 채 아주 꽉 잡았다.“뭐 하는 거야?”임유진이 놀라며 물었다.“아프면 내 손 꽉 잡아. 내가 옆에서 네가 받는 고통을 덜어줄게.”“됐어. 나 혼자 참을 수 있어.”임유진은 손을 움직이며 그의 손
그리고 전에도 이런 식으로 꽉 잡은 바람에 강현수의 손목에 피가 난 적이 있다.“너... 너 손 놔.”임유진은 소영훈이 침을 다른 것으로 바꿀 틈을 이용해 강지혁에게 말했다.“나 좀 있으면 지금보다 더 세게 잡을지도 몰라.”“그게 왜?”강지혁은 왼손을 들어 임유진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강현수 손은 잡았으면서 내 손은 못 잡아?”임유진은 그 말에 흠칫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뭐라 대꾸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하지만 그때 소영훈이 예고도 없이 또다시 침을 놓았다.“윽!”아프다. 정말 아프다.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이를 꽉 깨물고 고통을 참을 수밖에 없다.보송해진 이마에 또다시 땀이 맺혔다. 그리고 한 방울 한 방울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강지혁은 옆에서 임유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임유진이 고통 때문에 손등에 손톱을 세게 찔러넣어도, 슬슬 피가 고여도 그는 마치 고통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어쩌면 강지혁의 머릿속이 지금 온통 임유진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그는 임유진의 얼굴에 인 고통과 열심히 그 고통을 참는 모습, 그리고 이를 꽉 깨문 탓에 이마와 손등에 힘줄이 생긴 것까지 하나하나 다 눈에 담았다.잠시 후, 길고도 짧았던 치료가 드디어 끝이 났다.임유진은 지금 온몸에 힘이 다 빠진 것 같았다.“오늘 치료는 여기까지고 일주일 뒤에 세 번째 치료를 진행할 겁니다.”소영훈은 치료 도구를 정리하며 말했다.“그리고 24시간 동안 손에 물 묻히지 마세요.”“네... 감사합니다...”임유진은 창백해진 얼굴로 호흡을 가다듬으며 힘들게 인사를 건넸다.그리고 그제야 강지혁과 맞잡고 있는 손으로 시선을 돌렸다.강지혁의 손등은 그녀가 남긴 손톱자국으로 가득했다.잡는 사람도 아픈데 잡히는 사람은 얼마나 더 아플까.두 사람의 손은 치료가 끝났는데도 마치 한 몸이 된 것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임유진은 서둘러 손을 빼려고 해봤지만 진이 다 빠진 것인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강지
강지혁은 임유진이 감옥에 있을 때 수많은 괴롭힘 속에 힘들게 지냈다는 걸 그간 그저 자료로만 알고 있었다. 그때도 안타까운 마음이 많이 들었지만 오늘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직접 보게 되니 마음이 한층 더 괴로웠다.강지혁은 지금 심장이 아려와 호흡도 제대로 못 할 정도였다.그간 임유진이 감옥에 가게 되는 걸 그저 지켜만 봤던 자신과 타인이 그녀를 괴롭히는 걸 방관한 자신을 무수히도 많이 후회했지만 오늘은 유독 더 깊은 후회가 밀려왔다.과거의 자신이 미치도록 원망스럽고 후회스러웠다.강지혁은 몸을 낮추고 임유진의 손을 잡은 다음 그녀의 손가락 마디마디에 입을 맞췄다.“왜 나는 네가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 너를 만나지 못했을까...”잔뜩 잠긴 목소리가 후회를 싣고 강지혁의 입에서 흘러나왔다.강지혁은 할 수만 있다면 임유진이 감옥 가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가 애초에 그런 고통을 받지 않게 무죄를, 그리고 결백을 주고 싶었다.하지만 지난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이미 그녀는 고통을 받을 대로 다 받았다.임유진은 자신의 손가락에 입을 맞추고 있는 남자를 복잡한 눈길로 바라보았다.그의 입술이 닿은 곳이 점점 뜨거워 났다. 아니, 손가락뿐만이 아니라 몸 전체가 뜨거워 나기 시작했다.“너...!”“내가 잘못했어.”강지혁은 그녀의 말을 끊고 진지한 얼굴로 사과했다.여태껏 한 번도 잘못을 인정해본 적 없던 그가 지금 임유진의 앞에서 잘못을 빌었다.“유진아, 내가 잘못했어. 그때 너랑 헤어지는 게 아니었어...”그리고 그녀가 누명을 썼을 당시 못 본 척 지나치는 게 아니었다.당시 강지혁의 눈에 임유진은 그저 버려진 패에 불과했고 그녀가 그저 재수 없게 걸려들었을 뿐이라고만 생각했다.그때 당시의 행동이 결국 돌고 돌아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임유진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강지혁이 지금 잘못했다고 한 건가...?!“너를 믿었어야 했어. 네가 나를 언젠가는 배신할 거라는 생각에 상처
탁유미는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이경빈의 모습이 그저 우습게만 느껴졌다.모든 걸 망쳐놓고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날 때려도 돼. 욕해도 돼. 벌을 줘도 돼. 네가 주는 벌이라면 달갑게 받을게. 과거의 내 행동과 언행에 대해 제대로 사과하고 싶어. 나한테 그럴 기회를 줘. 그리고 널 곁에서 지켜주줄 수 있는 기회도...”“그만!”탁유미가 이경빈의 말을 끊었다.“이경빈, 네가 인간이면 나한테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공수진을 밀지 않았다고 내가 몇백 번을 말했는데도 너는 결국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았어. 들어주려고 하지도 않았지. 네가 지금 이러는 건 골수를 기증해준 게 공수진이 아닌 나라는 걸 알아서야. 만약 널 구한 게 정말 공수진이었으면 너는 지금도 여전히 나한테 죄가 있다고 생각했을 거잖아. 내 말이 틀려?”이경빈은 그 말에 순간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 말문이 막혔다.“이경빈, 네가 지금 이러는 건 그저 자기만족일 뿐이야. 나한테 사과라도 해야 네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이러는 거잖아. 내가 모를 것 같아? 난 너 용서 안 해. 네가 날 감옥에 보낸 것도 그 일로 감옥에서 감기에 걸려 어쩔 수 없이 감기약을 먹어 윤이가 청력을 잃은 것도, 나는 용서할 생각이 없어.”탁유미의 말에 이경빈은 휘청이며 옆에 있는 벽을 짚었다.당시 그녀를 감옥에 보낸 건 그에게는 그저 간단한 복수에 불과했지만 그녀에게는 모든 고난의 시작이었다.게다가 그 일 때문에 윤이의 청력이 사라진 거라니...‘대체 나는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보상하겠다고 했지? 아니, 넌 보상 못 해.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네가 하는 사과도 나한테는 그저 역겨울 뿐이야!”탁유미는 말을 마친 후 그를 지나쳐 빠르게 걸어갔다.하지만 얼마 못 가 이경빈에게 팔이 잡혀 그대로 그의 품속에 안기고 말았다.탁유미는 그의 냄새가 코를 확 덮치는 순간 마치 그에게 꽁꽁 둘러싸인 기분이 들었다.“뭐 하는 짓이야! 이거 안 놔?!”놓아
지금의 그는 탁유미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받고 싶었지만 어떻게 하면 그녀에게 용서를 받을 수 있을지를 몰랐다....탁유미는 김수영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 후 강지혁이 붙여준 경호원 두 명에게 집을 지킬 필요는 없다고, 이만 가봐도 된다고 했다.작은 집이라 건장한 남성 두 명까지 들이게 되면 집이 꽉 찰 테니까.경호원 두 명이 떠난 후 김수영은 창밖을 힐끔 바라보았다.“저거 설마...”그녀는 창밖으로 보이는 이경빈의 차량에 미간을 찌푸렸다.“저거 이경빈 차 아니야? 기어이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엄마,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여기서 밤을 새우든 말든 우리랑은 상관없는 일이잖아요.”탁유미의 태도는 무척이나 태연했다.“그래, 네 말이 맞아. 그런데 갑자기 왜 저래? 뭐 잘못 먹기라도 한 거야?”김수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공수진이 유산한 게 네 탓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고 해도 사과하려고 이렇게까지 할 인간은 아니잖아.”공수진 일은 비단 인터넷에서만 뜨거운 일이 아니었기에 가십거리에는 일절 관심이 없는 김수영도 공수진과 주원호 일에 대해 아주 잘 알게 되었다.“그것도 그거지만 아마 몇 년 전에 골수를 기증해준 게 나라는 걸 알게 돼서 저러는 걸 거예요.”“뭐?!”김수영은 그 말에 깜짝 놀라더니 이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이경빈이었어? 네가 골수를 기증해준 사람이?! 너한테서 받을 건 다 받아놓고 간 기증 좀 해달라니까 딱 잘라 거절한 인간이 쟤라고? 뭐 이런 배은망덕한 인간이 다 있어?!”김수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이경빈에게 따지려는 듯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엄마!”그러자 탁유미가 서둘러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난 괜찮으니까 그러지 마세요. 기증하겠다고 한 건 나예요.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라고요. 이경빈이 간 기증을 거절했다고 한들 배신감이 들 이유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고 간이식 수술을 받는다고 해서 꼭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수술을 받고 또다시 재발해 수명이 오히려 단축된 케이스도 많아요.”탁유
이경빈은 이제야 그날 탁유미가 웃으며 고맙다고 했던 말의 의미가 뭔지 알아챘다.아주 조금의 감정마저 남지 않게 만든 그에게 철저하게 실망하고 그로 인해 그를 완전히 내려놓게 된 게 틀림없었다.정말 그는 너무나도 멍청한 사람이었다!차량이 멈춘 후 기사는 이경빈에게 도착했다고 하려다가 그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대표님, 입술에 피가...!”이경빈은 그 말에 천천히 눈을 뜨더니 기사의 시선을 따라 손으로 입술을 매만졌다.얼마나 세게 깨물었던 건지 입술에 피가 흥건했다.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손으로 피를 닦아내더니 아무 말 없이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입원 병동으로 들어가려는 그때 탁유미와 김수영, 그리고 일전 그녀의 병실을 지켰던 경호원 두 명이 함께 병동에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경호원들의 손에 짐이 들려있는 것으로 보아 퇴원하려는 것 같았다.이경빈은 서둘러 그들 앞으로 다가가 탁유미에게 물었다.“퇴원하려고? 벌써?”탁유미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데 경호원들이 빠르게 그를 제지했다.탁유미는 이경빈의 얼굴을 보고는 금방 미간을 찌푸렸다.‘그날 알아듣게 얘기한 것 같은데 왜 또 여기 있는 거야?’“너랑 상관없는 일이니까 비켜.”“하지만 네 몸은 아직 입원해있는 게...!”이경빈은 말을 끝까지 하려다가 멈칫했다.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안색이 갑자기 안 좋아진 것이 이 이상 말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그녀가 아프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니까.“며칠 더 입원해있는 게 좋지 않을까? 치료도 안 끝났을 것 같은데.”이경빈은 억지로 말을 끝마쳤다.“필요 없어. 내 몸이 어떤지는 내가 제일 잘 아니까.”탁유미는 싸늘하게 말을 내뱉은 후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잘 안다고? 그런 사람이 이렇게 빨리 퇴원하려고 해? 너 정말 이대로 죽고 싶기라도 한 거야?!”이경빈이 다급하게 그녀의 팔을 잡으려 하자 경호원들이 더 빨리 다가와 그의 어깨를 잡았다.탁유미는 발걸음을 멈추고 조금 의아한 눈으로 이경빈을 바라보더니 이내
철썩.둔탁한 마찰음 소리에 공수진은 휘청거리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옆으로 힘껏 돌아간 그녀의 얼굴에는 빨간 손자국이 그대로 나 있었다.하지만 공수진은 아픔을 못 느끼는 건지 빈정거림을 멈추지 않았다.“그 여자 결백을 찾아주고 싶지? 하지만 그럴 시간은 없을 거야. 네가 찾아주기도 전에 저세상으로 가버릴 테니까!”이경빈은 그 말에 눈을 부릅뜨고 공수진을 노려보았다.“유미가 병에 걸린 걸 알고 있었어? 언제부터?”공수진은 이경빈의 얼굴을 보며 미친 듯이 웃어댔다.“하하하하. 이경빈 너 진짜 등신이구나? 너 정말 그 여자 좋아하는 거 맞아? 그런데 어떻게 나보다 더 몰라?”그녀의 말대로 이경빈은 등신이 맞다. 누가 진정한 은인인지도 모르는데 등신이 아니고 뭘까?그래서 지금 벌을 받는 것이다. 멍청했던 대가를 이제야 받고 있는 것이다.“그래, 나 등신 맞아. 하지만 그렇다고 네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 너희 집안은 평생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이경빈은 말을 마친 후 공수진의 얼굴을 더 보고 싶지 않다는 듯 성큼성큼 차로 다가갔다.공수진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마치 미친 사람처럼 외쳐댔다.“이경빈, 탁유미가 죽는 날 네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내가 꼭 지켜볼 거야! 네가 어떤 말로는 맞이하는...”탁.이경빈은 평소보다 세게 차 문을 닫으며 공수진의 목소리를 차단했다.그는 천천히 눈을 감은 후 기사에게 지시를 내렸다.“병원으로 가지.”“네, 대표님.”차량에 시동이 걸리자 그는 시트에 등을 기댔다.“간암 3기예요. 현재로서는 간이식 수술을 받는 것밖에 언니 목숨을 살릴 길이 없어요. 만약 언니한테 사죄하고 싶다면 언니한테 이경빈 씨 간 일부를 기증해주세요.”임유진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간 일부를 기증하라고? 탁유미를 위해서라면 그는 간 전부를 기증할 수도 있다.간암 3기가 어떤 상태인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경빈은 알고 있다.그간 탁유미가 보였던 고통을 참는 듯한 증상은 모두 간에 암이 퍼지고 있는 신호였다.
공한철은 이경빈의 기에 눌려 손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경빈 씨, 혹시 아직도 화 나 있는 거예요? 기증 일은 내가 거짓말한 게 맞지만 그건 다 경빈 씨를 사랑해서 그런 거예요. 나는 경빈 씨가 나를 모르고 있을 때부터 쭉 경빈 씨를 좋아하고 있었어요. 아니, 사랑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거짓말도 무릅쓰고 내가 기증해줬다고 한 거예요! 내가 경빈 씨를 속인 건 맞지만... 그게 범법 행위까지는 아니잖아요...”공수진은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는 얼굴로 당당하게 말을 했다.이에 이경빈은 시선을 돌려 공수진을 빤히 바라보았다.“내가 아닌 우리 집안을 사랑하는 거겠지. 더 정확히는 우리 집 재산을. 공수진, 네 그 욕심 때문에 나는 인생이 망가졌어!”“거짓말한 건 미안하게 생각해요. 사과할게요. 그러니까 우리 다시 시작해요. 네?”공수진은 전과 같은 유약한 얼굴을 하며 그를 붙잡았다.“나 정말 경빈 씨 사랑해요. 경빈 씨 속상하게 만든 거 내가 다 잘못했어요. 탁유미 씨한테 사과하라고 하면 얼마든지 사과할게요. 보상도 할게요! 그러니까 우리 다시 잘해봐요. 나 정말 경빈 씨 없으면 못살아요!”“사랑이라고? 사랑한다는 사람을 그렇게도 감쪽같이 속여? 다른 사람에게 피해까지 주면서? 탁유미를 범죄자로 몰아가 결국 감방에까지 보낸 게 나를 향한 사랑의 표현이야? 탁유미만 사라지면 우리 집 며느리로 들어오는 게 쉬울 것 같았어? 그래?!”이경빈은 공수진을 턱을 으스러질 듯 잡으며 분노를 표출했다.손아귀 힘이 어찌나 센지 공수진은 자신의 턱뼈가 이대로 부서질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고통도 고통이지만 이경빈이 그때 당시의 진상을 모두 알아버렸다는 것에 그녀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어떻게 된 거지? 이경빈이 그때 일을 다 알아버렸다고? 증거는 이미 내가 다 소거했는데?! 그래, 그냥 추측일 뿐일 거야. 실질적인 증거는 없는 게 분명해!’“오, 오해예요.”공수진이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나는 탁유미 씨를 범죄자로 몰아간 적 없어요. 나는
네티즌들은 공수진과 주원호에게 각종 비난과 욕을 해댔고 대대적으로 기사가 난 탓에 병원 관계자들도 공수진의 병실을 지나칠 때마다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냈다.공수진은 그들의 눈빛에 제대로 고개를 들 수 가 없었고 이를 깨물며 하루빨리 퇴원하기만을 기다렸다.하지만 드디어 다가온 퇴원하는 날,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병원을 나섰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건 아침부터 진을 치고 기다린 기자들이었다.“공수진 씨, 현재 인터넷에서 떠돌고 있는 동영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이강 그룹 대표의 약혼녀로 알고 있는데 이경빈 씨는 동영상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요? 결혼식은 예정대로 진행하시는 겁니까?”“유산한 아이가 이경빈 씨의 아이가 아니라 영상 속 남자분의 아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맞습니까?”“탁유미 씨를 음해하려고 일부러 밀쳐진 척 넘어져 유산했다고 들었는데 사실입니까?”연이은 날카로운 질문에 공수진의 얼굴은 흙빛이 되어버렸다.“찍지 마세요! 찍지 마시라고요!”공씨 부부는 공수진이 지나갈 수 있게 고용한 경호원들과 함께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기자들을 뚫고 간신히 차에 오른 후 공수진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탁유미 때문에 이게 뭐야!”만약 탁유미가 아니었으면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할 일도 없었을 거라며 그녀는 모든 걸 다 탁유미 탓으로 돌렸다.“일단 S 시를 떠나는 게 좋겠다. 며칠 뒤에 사태가 조금 잠잠해지면 그때 다시 경빈이 불러서 얘기하는 거로 해.”공한철의 말에 차량은 고속도로로 향했다.그렇게 20분쯤 달렸을까,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건지도 모를 검은 차들이 거리를 바짝 좁혀오며 공수진네 차를 에워싸기 시작했다.끼익.“뭐야, 저것들은!”공한철이 눈을 부릅뜨며 화를 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정차된 앞차에서 내린 사람을 보고는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공씨 일가를 막아선 건 다름 아닌 이경빈이었다.이경빈이 내리자 검은 차에서 내린 부하직원들이 하나둘 공수진 일가를 차에서 끌어내기 시작했다.“경, 경빈 씨,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예요?
“하지만...”임유진은 말을 하려다가 순간 깜짝 놀라며 두 손으로 자신의 배를 끌어안았다.“왜 그래?”강지혁이 잔뜩 긴장한 채로 물었다.“방금 아이가 내 배를 찼어!”임유진은 이쯤이면 태동이 느껴질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전까지는 거의 착각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태동이 미약했는데 방금 그건 정말 누가 뭐라 해도 확실한 태동이었다.심지어 지금도 계속해서 배를 차고 있다.“아이가 네 배를 찼다고?”강지혁은 시선을 그녀의 배로 옮겨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바라보았다.“응! 한번 만져봐.”임유진은 그의 손을 들어 자신의 복부를 만지게 했다.강지혁은 확실하게 느껴지는 태동에 조금 놀랍기도 하고 또 신기하기도 해 그만 몸이 경직되어버렸다.태동이라는 게 무엇이고 언제쯤 느낄 수 있는지에 대해 그도 임유진 못지않게 잘 알고 있다.하지만 이론은 어디까지나 이론으로 실제로 이렇게 태동을 느끼게 되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이제야 진정으로 이 작은 배속에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게 머리에 박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이 조그마한 아이들은 머지않아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될 거고 크게 울고 또 활짝 웃으며 서서히 커가게 될 것이다.임유진은 강지혁의 넋을 잃은 표정에 피식 웃었다.평소에도 물론 상당히 귀엽지만 지금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귀여워 보였다.이런 얼굴은 아마 그녀밖에 보지 못했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녀밖에 보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임유진은 소파에 앉아 편한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아이가 차고 있는 곳이 어딘지 그의 손을 이곳저곳 움직이며 알려주기 시작했다.아이들은 큼지막한 아빠의 손길을 느껴서 그런지 그에 보답하듯 더 세게 발길질을 해댔다.덕분에 임유진의 배는 계속해서 꿈틀거렸다.강지혁은 무릎을 꿇고 그녀의 복부를 쓰다듬으며 진지한 얼굴로 태동을 느꼈다.임유진은 그 모습을 보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갑자기 사진은 왜 찍어?”강지혁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기념하려고. 나중에
강지혁은 꼭 무엇을 무서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대체 뭘?혹시 진기태와 연관이 있는 건가?아까 진기태는 분명...임유진은 순간 뭔가 알아차린 듯 고개를 들며 그에게 물었다.“혁아, 너 혹시 내가 화낼까 봐 무서워서 이러는 거야?”그녀의 말에 강지혁은 몸은 또다시 굳어졌고 호흡도 다시 거칠어졌다.그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닌 조금 더 그녀를 제 품에 끌어안았다.‘정답인가 보네.’강지혁은 지금 진기태가 마지막에 한 말 때문에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다.‘하긴 아까 엄청 세게 화를 내기는 했지.’강지혁은 아까 꼭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모습으로 진기태를 협박했다.꼭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이 건드려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화 안 낼 거니까.”강지혁이 떨리는 목소리로 임유진에게 물었다.“정말...? 정말 화 안 내?”“응. 안 내.”임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쌌다.“진 회장이 너 찾아온 거 진가원 프로젝트 때문이지? 네가 내 복수를 해주겠다고 이러는 거, 나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고작 그 사람 말 때문에 우리 사이가 흔들릴 일은 없으니까.”강지혁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그 인간이 했던 말, 정말 신경 안 써?”“응. 그때는 너도 내가 누군지 몰랐을 때잖아. 그때의 나는 그저 너한테 네 약혼녀를 차로 죽인 사람일 뿐이었어. 너한테 잘 보이겠다고 사람들이 일부러 나를 더 괴롭히기는 했지만 그게 네 탓은 아니니까. 그러니까 너 원망할 생각 없어.”임유진은 강지혁을 빤히 바라보며 그의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사실 너랑 사귀고 너를 정말 사랑하게 됐던 순간부터 나는 그 일을 이미 내 마음속에서 지웠어. 그리고 너도 그랬잖아. 만약 조금만 더 빨리 나를 알게 됐으면 절대 내가 그런 고통을 겪게 하지 않았을 거라고.”그녀의 말에 강지혁의 눈빛이 더욱 심하게 흔들렸다.그녀는 그가 무서워하는 게 그저 그 이유일 뿐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방관한 것으로 여태 이렇게까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고 진기태가 안에서 걸어 나왔다.다만 진기태는 몸을 비스듬히 한 채 앞이 아닌 사무실 안을 바라보고 있어 임유진의 존재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강지혁, 네가 뭘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임유진이 그렇게 된 건 네 탓도 있어!”진기태의 분노 어린 말에 임유진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으며 저도 모르게 앞으로 두어 걸음 걸어갔다.그러자 그때 사무실 안에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거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그때는 진화 그룹과 당신 가문을 완전히 없애버릴 거야.”임유진은 비스듬히 열린 문틈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강지혁은 평소와 달리 분노가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었고 심지어 그 예쁜 두 눈에 살기도 어려 있었다.‘살기...? 내가 뭘 잘 못 본 건가?’진기태는 강지혁의 위협에 겁을 먹고는 그의 눈을 피하려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드디어 임유진과 눈이 마주쳤다.그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더니 금세 험악한 표정을 지었고 곧바로 씩씩거리며 자리를 떠났다.강지혁도 그때쯤 임유진이 밖에 있다는 것을 눈치챘고 그는 그녀를 보더니 그대로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서둘러 분노를 지우고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려고 해봤지만 눈가에 서린 당황함과 초조함은 감춰지지 않았다.진기태와의 대화를 들은 걸까?만약 들었으면 어떡하지?임유진이 이상함을 눈치채고 멀리하려고 들면...강지혁은 그 생각에 순간 호흡하는 것조차 곤란해지며 온몸이 차갑게 식었다.임유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혁아, 방금 진기태 회장이랑...”“일 얘기 했어. 일 얘기만...”강지혁은 서둘러 대답하며 평정심을 되찾으려고 애썼다.하지만 심장은 여전히 비정상적으로 빨리 뛰고 호흡은 점점 더 딸리기 시작했다.“너 얼굴이 왜 그래? 괜찮아?!”임유진은 창백한 그의 얼굴이 걱정돼 쓰다듬으려 손을 뻗었다.하지만 얼굴에 닿기도 전에 강지혁에 의해 손이 저지당하고 말았다.“난... 괜찮아.”임유진은 강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