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전에도 이런 식으로 꽉 잡은 바람에 강현수의 손목에 피가 난 적이 있다.“너... 너 손 놔.”임유진은 소영훈이 침을 다른 것으로 바꿀 틈을 이용해 강지혁에게 말했다.“나 좀 있으면 지금보다 더 세게 잡을지도 몰라.”“그게 왜?”강지혁은 왼손을 들어 임유진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강현수 손은 잡았으면서 내 손은 못 잡아?”임유진은 그 말에 흠칫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뭐라 대꾸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하지만 그때 소영훈이 예고도 없이 또다시 침을 놓았다.“윽!”아프다. 정말 아프다.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이를 꽉 깨물고 고통을 참을 수밖에 없다.보송해진 이마에 또다시 땀이 맺혔다. 그리고 한 방울 한 방울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강지혁은 옆에서 임유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임유진이 고통 때문에 손등에 손톱을 세게 찔러넣어도, 슬슬 피가 고여도 그는 마치 고통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어쩌면 강지혁의 머릿속이 지금 온통 임유진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그는 임유진의 얼굴에 인 고통과 열심히 그 고통을 참는 모습, 그리고 이를 꽉 깨문 탓에 이마와 손등에 힘줄이 생긴 것까지 하나하나 다 눈에 담았다.잠시 후, 길고도 짧았던 치료가 드디어 끝이 났다.임유진은 지금 온몸에 힘이 다 빠진 것 같았다.“오늘 치료는 여기까지고 일주일 뒤에 세 번째 치료를 진행할 겁니다.”소영훈은 치료 도구를 정리하며 말했다.“그리고 24시간 동안 손에 물 묻히지 마세요.”“네... 감사합니다...”임유진은 창백해진 얼굴로 호흡을 가다듬으며 힘들게 인사를 건넸다.그리고 그제야 강지혁과 맞잡고 있는 손으로 시선을 돌렸다.강지혁의 손등은 그녀가 남긴 손톱자국으로 가득했다.잡는 사람도 아픈데 잡히는 사람은 얼마나 더 아플까.두 사람의 손은 치료가 끝났는데도 마치 한 몸이 된 것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임유진은 서둘러 손을 빼려고 해봤지만 진이 다 빠진 것인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강지
강지혁은 임유진이 감옥에 있을 때 수많은 괴롭힘 속에 힘들게 지냈다는 걸 그간 그저 자료로만 알고 있었다. 그때도 안타까운 마음이 많이 들었지만 오늘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직접 보게 되니 마음이 한층 더 괴로웠다.강지혁은 지금 심장이 아려와 호흡도 제대로 못 할 정도였다.그간 임유진이 감옥에 가게 되는 걸 그저 지켜만 봤던 자신과 타인이 그녀를 괴롭히는 걸 방관한 자신을 무수히도 많이 후회했지만 오늘은 유독 더 깊은 후회가 밀려왔다.과거의 자신이 미치도록 원망스럽고 후회스러웠다.강지혁은 몸을 낮추고 임유진의 손을 잡은 다음 그녀의 손가락 마디마디에 입을 맞췄다.“왜 나는 네가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 너를 만나지 못했을까...”잔뜩 잠긴 목소리가 후회를 싣고 강지혁의 입에서 흘러나왔다.강지혁은 할 수만 있다면 임유진이 감옥 가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가 애초에 그런 고통을 받지 않게 무죄를, 그리고 결백을 주고 싶었다.하지만 지난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이미 그녀는 고통을 받을 대로 다 받았다.임유진은 자신의 손가락에 입을 맞추고 있는 남자를 복잡한 눈길로 바라보았다.그의 입술이 닿은 곳이 점점 뜨거워 났다. 아니, 손가락뿐만이 아니라 몸 전체가 뜨거워 나기 시작했다.“너...!”“내가 잘못했어.”강지혁은 그녀의 말을 끊고 진지한 얼굴로 사과했다.여태껏 한 번도 잘못을 인정해본 적 없던 그가 지금 임유진의 앞에서 잘못을 빌었다.“유진아, 내가 잘못했어. 그때 너랑 헤어지는 게 아니었어...”그리고 그녀가 누명을 썼을 당시 못 본 척 지나치는 게 아니었다.당시 강지혁의 눈에 임유진은 그저 버려진 패에 불과했고 그녀가 그저 재수 없게 걸려들었을 뿐이라고만 생각했다.그때 당시의 행동이 결국 돌고 돌아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임유진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강지혁이 지금 잘못했다고 한 건가...?!“너를 믿었어야 했어. 네가 나를 언젠가는 배신할 거라는 생각에 상처
이번에는 평생 잘할 자신이 있다....소영훈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강현수는 그 소식을 듣고는 서둘러 소영훈의 집으로 찾아왔다.“선생님, 오늘 누구한테 끌려간 겁니까? 어디로 끌려간 겁니까?”강현수의 얼굴에는 초조함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소영훈은 그런 그를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강현수가 이토록 초조해하고 불안해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그리고 그를 이렇게 만든 건 아마...“임유진 씨 때문이지?”강현수의 동공이 흔들렸다.“그래서 오늘 정말 유진 씨 손 치료해주러 간 겁니까?”“그래. 눈이 가려진 채 누군가에게 그렇게 데려가진 건 이번이 처음이다!”소영훈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그 아가씨 옆에 남자가 한 명 있더구나. 그 남자, 강지혁 맞아?”강현수는 주먹을 꽉 말아쥐고 대답했다.“네, 맞아요.”“하필이면 그런 놈을 라이벌로 뒀으니, 쯧쯧.”소영훈은 혀를 차며 강현수를 바라보았다.임유진의 마음이 누구를 향하는 건지는 몰라도 어쩐지 강현수는 꽤 힘든 사랑을 하게 될 것 같았다.“선생님, 그곳이 어딘지 혹시 아시겠어요?”“아까도 말했다시피 가는 길 내내 시야를 차단당했어. 하지만 시간을 대충 계산해봤을 때 의원으로부터 20분 정도 되는 거리였다. 그리고 다시 시야가 확보됐을 때는 오래된 한옥에 도착해 있었고. 나도 그 저택을 자세히 둘러본 건 아니지만 일단 큰 규모의 집이었어.”소영훈은 열심히 기억을 더듬어보았다.강현수는 그의 말을 토대로 생각에 잠겼다. 오래된 한옥에 의원으로부터 20분 정도의 거리...범위가 좁혀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너무 넓다.그리고 강지혁의 사람들이 그 20분간 일부러 소영훈을 데리고 주위를 뺑뺑 돌았을 수도 있다.“그래서 유진 씨는 거기서 어때 보였어요?”한참 뒤 강현수가 물었다. 하지만 호기롭게 물어본 것 치고는 표정이 어쩐지 조금 어두웠다. 꼭 듣기 싫은 걸 듣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말이다.“뭐 특별할 건 없었어. 그 강지혁이라는 놈이 끔찍이 챙겨주고 있더구나.”소영훈은 말을 마
“헉!”임유진은 눈을 번쩍 뜨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악몽인가? 또 악몽을 꾼 건가?쿵쿵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숨을 고르고 있는 그때 옆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꿈을 꿨길래 이래?”임유진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보니 거기에는 강지혁이 있었다.“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너는 왜 여기 있어?”“잠이 안 와서.”강지혁은 티슈를 들어 그녀의 이마에 맺혀있는 땀을 닦아주었다.“땀 좀 봐. 낮에 손을 치료했을 대보다 더 많이 흘린 것 같아. 혹시 감옥에 있었을 때 꿈을 꾼 거야?”그 말에 임유진은 흠칫하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어떻게 안 거지?!“아까 네가 꿈결에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어.”그녀가 고통스럽게 내뱉은 말 때문에 강지혁은 더더욱 죄책감에 휩싸였다.임유진은 쓰게 웃었다. 지난번에는 그녀가 강지혁이 꿈꾸는 것을 들어버렸고 이번에는 강지혁이 그녀의 악몽을 들어버렸다.“맞아. 그때 일들이 갑자기 꿈에 나왔어. 전에는 조금 더 자주 꿨었는데 지금은 많이 나아진 편이야.”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다.이에 강지혁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나랑 헤어진 뒤로 다시 불을 켜고 자기 시작한 거야?”임유진은 그 질문에 침묵했다.전에 강씨 저택에 있었을 당시 그녀는 불을 끄고 잘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강지혁과 헤어진 뒤로는 다시 불을 켜야만 잠들 수 있었다.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미 답을 들은 거나 마찬가지였다.“미안해.”강지혁이 나지막이 속삭였다.어쩌면 이 세상에서 그에게 ‘미안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임유진밖에 없을지도 모른다.임유진은 그의 사과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늦었어. 이만...”“나 오늘 이 방에서 자도 돼?”강지혁은 그녀의 말을 자르고 물었다.이에 임유진은 눈을 깜빡거렸다.“여기서?”여기서 자겠다는 게 대체 무슨 뜻이지? 설마...?“손만 잡고 잘게. 걱정하지마. 네가 날 다시 사랑하기 전까지 너한테 아무
강지혁은 줄곧 임유진을 사랑하고 있었다.“유진아, 나는 네가 나만 바라보고 나만 사랑해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나도 너만 바라보고 너만 좋아하고 너만 사랑할게...”강지혁은 말을 이어가다 서서히 잠이 들어버렸다.임유진의 손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안정감이 들고 만족감이 찾아왔다.몇 분 후, 임유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바닥에서 곤히 자고 있는 강지혁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아침.임유진은 자기가 언제 잠이 든 건지 기억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계속 강지혁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이다.그럼 그렇게 계속 바라보다가 잠이 들었다는 건가?강지혁이 지금 방에 없어 천만다행이었다. 아니면 상당히 민망한 상황이 펼쳐졌을 테니까.임유진은 침에서 일어나 씻은 후 방에서 나왔다.아래로 내려가니 강지혁이 부엌에서 아침을 만들고 있었다.“일어났어? 지금 아침 만들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임유진은 부엌에서 바삐 움직이는 그를 가만히 지켜보았다.강지혁이 아팠던 날을 제외하면 두 사람의 식사는 항상 강지혁이 책임졌다.임유진이 그가 요리하는 것을 지켜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지금 꽤 새로운 기분이었다.몇 분 후, 강지혁은 식탁 위에 음식을 하나하나 올려놓았다.흰쌀밥에 계란말이, 그리고 소시지볶음에 콩나물국까지, 일반 가정집에서 먹는 아침상 그대로였다.임유진은 앞에 차려진 음식을 바라보다가 문득 강지혁이 직접 차린 상을 받은 사람은 어쩌면 자신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어제... 그렇게 자고 나서 나 이상한 짓 하지는 않았지?”임유진은 계란말이를 입에 넣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그건 내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 어제는 내가 너보다 더 먼저 잠들었잖아.”“...”“물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네 모습이...”강지혁은 뜸을 들이며 말을 잇지 않았다.이에 임유진이 다급하게 물었다.“내 모습이 왜?”“아침에 눈을 떠보니까 네가 얼굴을 내 쪽으로 향한 채로 자고 있더라고. 꼭
“너는 지금 그저 무서울 뿐인 거야. 내가 너한테 다시 상처 줄까 봐, 그게 무서워서 날 사랑하는 걸 주저하는 것뿐인 거야. 내 말이 맞아?”강지혁이 부드럽게 물었다.임유진은 순간 그에게 마음을 들킨 기분이었다. 어쩌면 정말 그의 말대로 단지 무서운 것일지도 모른다. 상처받을까 봐 두려워 줄곧 그를 사랑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유진아,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을게.”강지혁은 진지한 얼굴로 돌아와 말했다.그러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임유진의 앞으로 걸어와 그녀와 두 눈을 마주쳤다.“믿기 힘들어?”“그런 건 누구도 보장 못 해.”“믿기 힘들면 네 앞에서 맹세할게.”“그럴 필요는...”임유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지혁은 허리를 숙이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얼굴에는 장난기 하나 없는 그 어느 때보다 더 결연한 표정이 어려있었다.“맹세할게. 만약 너를 조금이라도 아프게 하면 그때는 그 열 배보다 더한 고통으로 갚을게. 만약 네가 나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면 그날은 내 마음도 죽는 날일 거야.”임유진의 눈은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지혁이 이런 식으로 무릎 꿇을 줄도 몰랐고 이렇게 얘기할 줄도 몰랐다.그녀는 고개를 숙여 그를 바라보았다.강지혁은 시선을 내리더니 머리를 더 숙이고 낮게 속삭였다.“그거 알아? 아직도 세상 어떤 곳에서는 내 모든 충성과 마음을 다 바치겠다는 뜻으로 상대방의 발등에 입을 맞춘대.”임유진은 그 말에 두 눈이 흔들렸다.방금 뭐라고 한 거지?그리고 그런 말을 한다는 건 지금 설마...?!순간 심장이 억제할 수 없을 만큼 세차게 뛰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오른발에서 천천히 슬리퍼를 벗겼다. 그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발등 위에 자신의 입술을 맞췄다.“유진아, 사랑해. 내 모든 걸 너한테 줄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너를 사랑해.”강지혁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맴돌았다.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굳은 맹세가 묻어 있었다.임유진의 머리는 이 순간 완전히 새하얗게 되어버
“여기는 어떻게... 왔어요?”임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현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야 그가 조금 야위었다는 것을 눈치챘다.게다가 그의 오른손에는 아직 붕대가 감겨 있었다.임유진은 문득 그날 강지혁이 그의 손가락을 부러트렸던 것이 생각났다.“손가락은 좀 어때요?”“괜찮아요. 큰 상처도 아니었어요.”강현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그보다 유진 씨 찾기까지 애먹었어요. 어제 선생님이 이곳으로 데려와 지지 않았더라면 아마 계속 막막했을 거예요.”그는 걱정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강지혁이 이곳으로 데려와 유진 씨를 난감하게 만들지는 않았어요?”“네, 그러지는 않았어요.”임유진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이곳에서 보냈던 나날을 회상하는 건지 그녀의 표정에 미세한 변화가 일었다.강현수는 그 모습을 보고는 또다시 초조함과 불안함이 들끓었다. 그럴 일 없다고,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상황이 어느새 현실이 되었을까 봐 두려운 모양이었다.“여기서 나가요.”강현수는 왼손을 내밀어 임유진의 손을 덥석 잡았다.“이 저택 주위에 시큐리티 시스템이 깔려있어요. 해킹하는 데 성공해 지금은 보안이 잠시 해제한 상태지만 곧 다시 회복될 거예요. 그래서 지금 빨리 떠나야 해요.”그 말에 임유진이 멈칫했다.“이곳을 떠난다고요?”강현수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왜요. 설마 떠나기 싫어요?”임유진의 머릿속에 순간 어제 강지혁이 무릎을 꿇은 채 발등에 입술을 맞추며 맹세하던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임유진은 그때 분명히 흔들렸고 설렜다. 강지혁 때문에 설렜다.그녀를 지독하게 상처를 준 남자지만 그래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줄곧 저도 모르게 어쩌면 이번에는 그와 함께하면 행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강지혁은 그녀를 믿겠다고 했고 그녀를 사랑하겠다고 했으며 다시는 상처 주지 않을 거라고 했다.그러니 어쩌면 이번은 다를 수 있지 않을까?임유진의 망설임이 강현수의 눈에도 훤히 보였다.강현수는 심장이 철렁해 나며 마
임유진이 이상함을 느끼기도 전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내 허락 없이는 누구도 여기를 못 떠나.”임유진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몸이 경직되어버렸다.이건 강지혁의 목소리였다.고개를 들어보자 불과 5m도 안 되는 거리에 강지혁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로는 검은색 양복 차림의 남자들이 무섭게 줄지어 있었다.꼭 이런 상황이 생길 줄 알고 여기서 줄곧 대기하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하, 나 지금 완전히 네 손바닥 안에서 놀아난 거지?”강현수는 차가운 눈길로 강지혁을 노려보았다.“선생님을 일부러 여기로 부른 거야? 날 끌어들이려고?”만약 소영훈이 아니었다면 강현수는 애초에 여기를 찾아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강지혁은 그 말을 무시하고 강현수의 뒤에 있는 임유진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내가 내 모든 걸 준다고 했는데도 강현수와 함께 떠나는 걸 선택한 거야?”임유진은 강지혁이 이쪽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았다.지금 그의 얼굴은 싸늘하지 그지없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다정함이 흘러넘치던 두 눈이 지금은 무섭게 변해 있었다.“내가 떠날 생각이 없었다고 하면 믿을 거야?”임유진의 질문에 강지혁이 코웃음을 쳤다.“강현수랑 같이 이 저택에서 나와 놓고, 그리고...”강지혁은 임유진과 강현수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두 사람이 잡고 있는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둘이 이러고 있는데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고?”임유진의 심장이 철렁했다. 쓸쓸하고 아릿한 느낌이 온몸에 퍼졌다.“내 말 못 믿어?”“이 상황에서 내가 널 어떻게 믿어야 하는데?”강지혁이 되물었다.그리고 이번에는 임유진이 코웃음을 쳤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쩌면 강지혁과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건 착각에 불과했다.“내가 하는 말은 전부 다 믿겠다며. 멋대로 의심하고 멋대로 추측하지 않겠다며?”임유진은 입안이 썼다.그의 말이 아직도 이렇게 선명하게 귓가에서 맴돌고 있는데 정작 그 말을 내뱉은 강지혁은 지금 그녀를 믿지 않
탁유미는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이경빈의 모습이 그저 우습게만 느껴졌다.모든 걸 망쳐놓고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날 때려도 돼. 욕해도 돼. 벌을 줘도 돼. 네가 주는 벌이라면 달갑게 받을게. 과거의 내 행동과 언행에 대해 제대로 사과하고 싶어. 나한테 그럴 기회를 줘. 그리고 널 곁에서 지켜주줄 수 있는 기회도...”“그만!”탁유미가 이경빈의 말을 끊었다.“이경빈, 네가 인간이면 나한테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공수진을 밀지 않았다고 내가 몇백 번을 말했는데도 너는 결국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았어. 들어주려고 하지도 않았지. 네가 지금 이러는 건 골수를 기증해준 게 공수진이 아닌 나라는 걸 알아서야. 만약 널 구한 게 정말 공수진이었으면 너는 지금도 여전히 나한테 죄가 있다고 생각했을 거잖아. 내 말이 틀려?”이경빈은 그 말에 순간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 말문이 막혔다.“이경빈, 네가 지금 이러는 건 그저 자기만족일 뿐이야. 나한테 사과라도 해야 네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이러는 거잖아. 내가 모를 것 같아? 난 너 용서 안 해. 네가 날 감옥에 보낸 것도 그 일로 감옥에서 감기에 걸려 어쩔 수 없이 감기약을 먹어 윤이가 청력을 잃은 것도, 나는 용서할 생각이 없어.”탁유미의 말에 이경빈은 휘청이며 옆에 있는 벽을 짚었다.당시 그녀를 감옥에 보낸 건 그에게는 그저 간단한 복수에 불과했지만 그녀에게는 모든 고난의 시작이었다.게다가 그 일 때문에 윤이의 청력이 사라진 거라니...‘대체 나는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보상하겠다고 했지? 아니, 넌 보상 못 해.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네가 하는 사과도 나한테는 그저 역겨울 뿐이야!”탁유미는 말을 마친 후 그를 지나쳐 빠르게 걸어갔다.하지만 얼마 못 가 이경빈에게 팔이 잡혀 그대로 그의 품속에 안기고 말았다.탁유미는 그의 냄새가 코를 확 덮치는 순간 마치 그에게 꽁꽁 둘러싸인 기분이 들었다.“뭐 하는 짓이야! 이거 안 놔?!”놓아
지금의 그는 탁유미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받고 싶었지만 어떻게 하면 그녀에게 용서를 받을 수 있을지를 몰랐다....탁유미는 김수영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 후 강지혁이 붙여준 경호원 두 명에게 집을 지킬 필요는 없다고, 이만 가봐도 된다고 했다.작은 집이라 건장한 남성 두 명까지 들이게 되면 집이 꽉 찰 테니까.경호원 두 명이 떠난 후 김수영은 창밖을 힐끔 바라보았다.“저거 설마...”그녀는 창밖으로 보이는 이경빈의 차량에 미간을 찌푸렸다.“저거 이경빈 차 아니야? 기어이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엄마,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여기서 밤을 새우든 말든 우리랑은 상관없는 일이잖아요.”탁유미의 태도는 무척이나 태연했다.“그래, 네 말이 맞아. 그런데 갑자기 왜 저래? 뭐 잘못 먹기라도 한 거야?”김수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공수진이 유산한 게 네 탓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고 해도 사과하려고 이렇게까지 할 인간은 아니잖아.”공수진 일은 비단 인터넷에서만 뜨거운 일이 아니었기에 가십거리에는 일절 관심이 없는 김수영도 공수진과 주원호 일에 대해 아주 잘 알게 되었다.“그것도 그거지만 아마 몇 년 전에 골수를 기증해준 게 나라는 걸 알게 돼서 저러는 걸 거예요.”“뭐?!”김수영은 그 말에 깜짝 놀라더니 이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이경빈이었어? 네가 골수를 기증해준 사람이?! 너한테서 받을 건 다 받아놓고 간 기증 좀 해달라니까 딱 잘라 거절한 인간이 쟤라고? 뭐 이런 배은망덕한 인간이 다 있어?!”김수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이경빈에게 따지려는 듯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엄마!”그러자 탁유미가 서둘러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난 괜찮으니까 그러지 마세요. 기증하겠다고 한 건 나예요.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라고요. 이경빈이 간 기증을 거절했다고 한들 배신감이 들 이유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고 간이식 수술을 받는다고 해서 꼭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수술을 받고 또다시 재발해 수명이 오히려 단축된 케이스도 많아요.”탁유
이경빈은 이제야 그날 탁유미가 웃으며 고맙다고 했던 말의 의미가 뭔지 알아챘다.아주 조금의 감정마저 남지 않게 만든 그에게 철저하게 실망하고 그로 인해 그를 완전히 내려놓게 된 게 틀림없었다.정말 그는 너무나도 멍청한 사람이었다!차량이 멈춘 후 기사는 이경빈에게 도착했다고 하려다가 그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대표님, 입술에 피가...!”이경빈은 그 말에 천천히 눈을 뜨더니 기사의 시선을 따라 손으로 입술을 매만졌다.얼마나 세게 깨물었던 건지 입술에 피가 흥건했다.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손으로 피를 닦아내더니 아무 말 없이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입원 병동으로 들어가려는 그때 탁유미와 김수영, 그리고 일전 그녀의 병실을 지켰던 경호원 두 명이 함께 병동에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경호원들의 손에 짐이 들려있는 것으로 보아 퇴원하려는 것 같았다.이경빈은 서둘러 그들 앞으로 다가가 탁유미에게 물었다.“퇴원하려고? 벌써?”탁유미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데 경호원들이 빠르게 그를 제지했다.탁유미는 이경빈의 얼굴을 보고는 금방 미간을 찌푸렸다.‘그날 알아듣게 얘기한 것 같은데 왜 또 여기 있는 거야?’“너랑 상관없는 일이니까 비켜.”“하지만 네 몸은 아직 입원해있는 게...!”이경빈은 말을 끝까지 하려다가 멈칫했다.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안색이 갑자기 안 좋아진 것이 이 이상 말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그녀가 아프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니까.“며칠 더 입원해있는 게 좋지 않을까? 치료도 안 끝났을 것 같은데.”이경빈은 억지로 말을 끝마쳤다.“필요 없어. 내 몸이 어떤지는 내가 제일 잘 아니까.”탁유미는 싸늘하게 말을 내뱉은 후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잘 안다고? 그런 사람이 이렇게 빨리 퇴원하려고 해? 너 정말 이대로 죽고 싶기라도 한 거야?!”이경빈이 다급하게 그녀의 팔을 잡으려 하자 경호원들이 더 빨리 다가와 그의 어깨를 잡았다.탁유미는 발걸음을 멈추고 조금 의아한 눈으로 이경빈을 바라보더니 이내
철썩.둔탁한 마찰음 소리에 공수진은 휘청거리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옆으로 힘껏 돌아간 그녀의 얼굴에는 빨간 손자국이 그대로 나 있었다.하지만 공수진은 아픔을 못 느끼는 건지 빈정거림을 멈추지 않았다.“그 여자 결백을 찾아주고 싶지? 하지만 그럴 시간은 없을 거야. 네가 찾아주기도 전에 저세상으로 가버릴 테니까!”이경빈은 그 말에 눈을 부릅뜨고 공수진을 노려보았다.“유미가 병에 걸린 걸 알고 있었어? 언제부터?”공수진은 이경빈의 얼굴을 보며 미친 듯이 웃어댔다.“하하하하. 이경빈 너 진짜 등신이구나? 너 정말 그 여자 좋아하는 거 맞아? 그런데 어떻게 나보다 더 몰라?”그녀의 말대로 이경빈은 등신이 맞다. 누가 진정한 은인인지도 모르는데 등신이 아니고 뭘까?그래서 지금 벌을 받는 것이다. 멍청했던 대가를 이제야 받고 있는 것이다.“그래, 나 등신 맞아. 하지만 그렇다고 네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 너희 집안은 평생 감옥에서 썩게 될 거야.”이경빈은 말을 마친 후 공수진의 얼굴을 더 보고 싶지 않다는 듯 성큼성큼 차로 다가갔다.공수진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마치 미친 사람처럼 외쳐댔다.“이경빈, 탁유미가 죽는 날 네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내가 꼭 지켜볼 거야! 네가 어떤 말로는 맞이하는...”탁.이경빈은 평소보다 세게 차 문을 닫으며 공수진의 목소리를 차단했다.그는 천천히 눈을 감은 후 기사에게 지시를 내렸다.“병원으로 가지.”“네, 대표님.”차량에 시동이 걸리자 그는 시트에 등을 기댔다.“간암 3기예요. 현재로서는 간이식 수술을 받는 것밖에 언니 목숨을 살릴 길이 없어요. 만약 언니한테 사죄하고 싶다면 언니한테 이경빈 씨 간 일부를 기증해주세요.”임유진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간 일부를 기증하라고? 탁유미를 위해서라면 그는 간 전부를 기증할 수도 있다.간암 3기가 어떤 상태인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경빈은 알고 있다.그간 탁유미가 보였던 고통을 참는 듯한 증상은 모두 간에 암이 퍼지고 있는 신호였다.
공한철은 이경빈의 기에 눌려 손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경빈 씨, 혹시 아직도 화 나 있는 거예요? 기증 일은 내가 거짓말한 게 맞지만 그건 다 경빈 씨를 사랑해서 그런 거예요. 나는 경빈 씨가 나를 모르고 있을 때부터 쭉 경빈 씨를 좋아하고 있었어요. 아니, 사랑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거짓말도 무릅쓰고 내가 기증해줬다고 한 거예요! 내가 경빈 씨를 속인 건 맞지만... 그게 범법 행위까지는 아니잖아요...”공수진은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는 얼굴로 당당하게 말을 했다.이에 이경빈은 시선을 돌려 공수진을 빤히 바라보았다.“내가 아닌 우리 집안을 사랑하는 거겠지. 더 정확히는 우리 집 재산을. 공수진, 네 그 욕심 때문에 나는 인생이 망가졌어!”“거짓말한 건 미안하게 생각해요. 사과할게요. 그러니까 우리 다시 시작해요. 네?”공수진은 전과 같은 유약한 얼굴을 하며 그를 붙잡았다.“나 정말 경빈 씨 사랑해요. 경빈 씨 속상하게 만든 거 내가 다 잘못했어요. 탁유미 씨한테 사과하라고 하면 얼마든지 사과할게요. 보상도 할게요! 그러니까 우리 다시 잘해봐요. 나 정말 경빈 씨 없으면 못살아요!”“사랑이라고? 사랑한다는 사람을 그렇게도 감쪽같이 속여? 다른 사람에게 피해까지 주면서? 탁유미를 범죄자로 몰아가 결국 감방에까지 보낸 게 나를 향한 사랑의 표현이야? 탁유미만 사라지면 우리 집 며느리로 들어오는 게 쉬울 것 같았어? 그래?!”이경빈은 공수진을 턱을 으스러질 듯 잡으며 분노를 표출했다.손아귀 힘이 어찌나 센지 공수진은 자신의 턱뼈가 이대로 부서질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고통도 고통이지만 이경빈이 그때 당시의 진상을 모두 알아버렸다는 것에 그녀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어떻게 된 거지? 이경빈이 그때 일을 다 알아버렸다고? 증거는 이미 내가 다 소거했는데?! 그래, 그냥 추측일 뿐일 거야. 실질적인 증거는 없는 게 분명해!’“오, 오해예요.”공수진이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나는 탁유미 씨를 범죄자로 몰아간 적 없어요. 나는
네티즌들은 공수진과 주원호에게 각종 비난과 욕을 해댔고 대대적으로 기사가 난 탓에 병원 관계자들도 공수진의 병실을 지나칠 때마다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냈다.공수진은 그들의 눈빛에 제대로 고개를 들 수 가 없었고 이를 깨물며 하루빨리 퇴원하기만을 기다렸다.하지만 드디어 다가온 퇴원하는 날,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병원을 나섰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건 아침부터 진을 치고 기다린 기자들이었다.“공수진 씨, 현재 인터넷에서 떠돌고 있는 동영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이강 그룹 대표의 약혼녀로 알고 있는데 이경빈 씨는 동영상에 대해 뭐라고 하던가요? 결혼식은 예정대로 진행하시는 겁니까?”“유산한 아이가 이경빈 씨의 아이가 아니라 영상 속 남자분의 아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맞습니까?”“탁유미 씨를 음해하려고 일부러 밀쳐진 척 넘어져 유산했다고 들었는데 사실입니까?”연이은 날카로운 질문에 공수진의 얼굴은 흙빛이 되어버렸다.“찍지 마세요! 찍지 마시라고요!”공씨 부부는 공수진이 지나갈 수 있게 고용한 경호원들과 함께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기자들을 뚫고 간신히 차에 오른 후 공수진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탁유미 때문에 이게 뭐야!”만약 탁유미가 아니었으면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할 일도 없었을 거라며 그녀는 모든 걸 다 탁유미 탓으로 돌렸다.“일단 S 시를 떠나는 게 좋겠다. 며칠 뒤에 사태가 조금 잠잠해지면 그때 다시 경빈이 불러서 얘기하는 거로 해.”공한철의 말에 차량은 고속도로로 향했다.그렇게 20분쯤 달렸을까,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건지도 모를 검은 차들이 거리를 바짝 좁혀오며 공수진네 차를 에워싸기 시작했다.끼익.“뭐야, 저것들은!”공한철이 눈을 부릅뜨며 화를 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정차된 앞차에서 내린 사람을 보고는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공씨 일가를 막아선 건 다름 아닌 이경빈이었다.이경빈이 내리자 검은 차에서 내린 부하직원들이 하나둘 공수진 일가를 차에서 끌어내기 시작했다.“경, 경빈 씨,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예요?
“하지만...”임유진은 말을 하려다가 순간 깜짝 놀라며 두 손으로 자신의 배를 끌어안았다.“왜 그래?”강지혁이 잔뜩 긴장한 채로 물었다.“방금 아이가 내 배를 찼어!”임유진은 이쯤이면 태동이 느껴질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전까지는 거의 착각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태동이 미약했는데 방금 그건 정말 누가 뭐라 해도 확실한 태동이었다.심지어 지금도 계속해서 배를 차고 있다.“아이가 네 배를 찼다고?”강지혁은 시선을 그녀의 배로 옮겨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바라보았다.“응! 한번 만져봐.”임유진은 그의 손을 들어 자신의 복부를 만지게 했다.강지혁은 확실하게 느껴지는 태동에 조금 놀랍기도 하고 또 신기하기도 해 그만 몸이 경직되어버렸다.태동이라는 게 무엇이고 언제쯤 느낄 수 있는지에 대해 그도 임유진 못지않게 잘 알고 있다.하지만 이론은 어디까지나 이론으로 실제로 이렇게 태동을 느끼게 되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이제야 진정으로 이 작은 배속에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게 머리에 박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이 조그마한 아이들은 머지않아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될 거고 크게 울고 또 활짝 웃으며 서서히 커가게 될 것이다.임유진은 강지혁의 넋을 잃은 표정에 피식 웃었다.평소에도 물론 상당히 귀엽지만 지금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귀여워 보였다.이런 얼굴은 아마 그녀밖에 보지 못했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녀밖에 보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임유진은 소파에 앉아 편한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아이가 차고 있는 곳이 어딘지 그의 손을 이곳저곳 움직이며 알려주기 시작했다.아이들은 큼지막한 아빠의 손길을 느껴서 그런지 그에 보답하듯 더 세게 발길질을 해댔다.덕분에 임유진의 배는 계속해서 꿈틀거렸다.강지혁은 무릎을 꿇고 그녀의 복부를 쓰다듬으며 진지한 얼굴로 태동을 느꼈다.임유진은 그 모습을 보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갑자기 사진은 왜 찍어?”강지혁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기념하려고. 나중에
강지혁은 꼭 무엇을 무서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대체 뭘?혹시 진기태와 연관이 있는 건가?아까 진기태는 분명...임유진은 순간 뭔가 알아차린 듯 고개를 들며 그에게 물었다.“혁아, 너 혹시 내가 화낼까 봐 무서워서 이러는 거야?”그녀의 말에 강지혁은 몸은 또다시 굳어졌고 호흡도 다시 거칠어졌다.그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닌 조금 더 그녀를 제 품에 끌어안았다.‘정답인가 보네.’강지혁은 지금 진기태가 마지막에 한 말 때문에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다.‘하긴 아까 엄청 세게 화를 내기는 했지.’강지혁은 아까 꼭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모습으로 진기태를 협박했다.꼭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이 건드려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화 안 낼 거니까.”강지혁이 떨리는 목소리로 임유진에게 물었다.“정말...? 정말 화 안 내?”“응. 안 내.”임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쌌다.“진 회장이 너 찾아온 거 진가원 프로젝트 때문이지? 네가 내 복수를 해주겠다고 이러는 거, 나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고작 그 사람 말 때문에 우리 사이가 흔들릴 일은 없으니까.”강지혁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그 인간이 했던 말, 정말 신경 안 써?”“응. 그때는 너도 내가 누군지 몰랐을 때잖아. 그때의 나는 그저 너한테 네 약혼녀를 차로 죽인 사람일 뿐이었어. 너한테 잘 보이겠다고 사람들이 일부러 나를 더 괴롭히기는 했지만 그게 네 탓은 아니니까. 그러니까 너 원망할 생각 없어.”임유진은 강지혁을 빤히 바라보며 그의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사실 너랑 사귀고 너를 정말 사랑하게 됐던 순간부터 나는 그 일을 이미 내 마음속에서 지웠어. 그리고 너도 그랬잖아. 만약 조금만 더 빨리 나를 알게 됐으면 절대 내가 그런 고통을 겪게 하지 않았을 거라고.”그녀의 말에 강지혁의 눈빛이 더욱 심하게 흔들렸다.그녀는 그가 무서워하는 게 그저 그 이유일 뿐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방관한 것으로 여태 이렇게까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고 진기태가 안에서 걸어 나왔다.다만 진기태는 몸을 비스듬히 한 채 앞이 아닌 사무실 안을 바라보고 있어 임유진의 존재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강지혁, 네가 뭘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임유진이 그렇게 된 건 네 탓도 있어!”진기태의 분노 어린 말에 임유진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으며 저도 모르게 앞으로 두어 걸음 걸어갔다.그러자 그때 사무실 안에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거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그때는 진화 그룹과 당신 가문을 완전히 없애버릴 거야.”임유진은 비스듬히 열린 문틈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강지혁은 평소와 달리 분노가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었고 심지어 그 예쁜 두 눈에 살기도 어려 있었다.‘살기...? 내가 뭘 잘 못 본 건가?’진기태는 강지혁의 위협에 겁을 먹고는 그의 눈을 피하려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드디어 임유진과 눈이 마주쳤다.그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더니 금세 험악한 표정을 지었고 곧바로 씩씩거리며 자리를 떠났다.강지혁도 그때쯤 임유진이 밖에 있다는 것을 눈치챘고 그는 그녀를 보더니 그대로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서둘러 분노를 지우고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려고 해봤지만 눈가에 서린 당황함과 초조함은 감춰지지 않았다.진기태와의 대화를 들은 걸까?만약 들었으면 어떡하지?임유진이 이상함을 눈치채고 멀리하려고 들면...강지혁은 그 생각에 순간 호흡하는 것조차 곤란해지며 온몸이 차갑게 식었다.임유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혁아, 방금 진기태 회장이랑...”“일 얘기 했어. 일 얘기만...”강지혁은 서둘러 대답하며 평정심을 되찾으려고 애썼다.하지만 심장은 여전히 비정상적으로 빨리 뛰고 호흡은 점점 더 딸리기 시작했다.“너 얼굴이 왜 그래? 괜찮아?!”임유진은 창백한 그의 얼굴이 걱정돼 쓰다듬으려 손을 뻗었다.하지만 얼굴에 닿기도 전에 강지혁에 의해 손이 저지당하고 말았다.“난... 괜찮아.”임유진은 강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