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혁은 줄곧 임유진을 사랑하고 있었다.“유진아, 나는 네가 나만 바라보고 나만 사랑해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나도 너만 바라보고 너만 좋아하고 너만 사랑할게...”강지혁은 말을 이어가다 서서히 잠이 들어버렸다.임유진의 손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안정감이 들고 만족감이 찾아왔다.몇 분 후, 임유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바닥에서 곤히 자고 있는 강지혁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아침.임유진은 자기가 언제 잠이 든 건지 기억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계속 강지혁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이다.그럼 그렇게 계속 바라보다가 잠이 들었다는 건가?강지혁이 지금 방에 없어 천만다행이었다. 아니면 상당히 민망한 상황이 펼쳐졌을 테니까.임유진은 침에서 일어나 씻은 후 방에서 나왔다.아래로 내려가니 강지혁이 부엌에서 아침을 만들고 있었다.“일어났어? 지금 아침 만들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임유진은 부엌에서 바삐 움직이는 그를 가만히 지켜보았다.강지혁이 아팠던 날을 제외하면 두 사람의 식사는 항상 강지혁이 책임졌다.임유진이 그가 요리하는 것을 지켜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지금 꽤 새로운 기분이었다.몇 분 후, 강지혁은 식탁 위에 음식을 하나하나 올려놓았다.흰쌀밥에 계란말이, 그리고 소시지볶음에 콩나물국까지, 일반 가정집에서 먹는 아침상 그대로였다.임유진은 앞에 차려진 음식을 바라보다가 문득 강지혁이 직접 차린 상을 받은 사람은 어쩌면 자신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어제... 그렇게 자고 나서 나 이상한 짓 하지는 않았지?”임유진은 계란말이를 입에 넣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그건 내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 어제는 내가 너보다 더 먼저 잠들었잖아.”“...”“물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네 모습이...”강지혁은 뜸을 들이며 말을 잇지 않았다.이에 임유진이 다급하게 물었다.“내 모습이 왜?”“아침에 눈을 떠보니까 네가 얼굴을 내 쪽으로 향한 채로 자고 있더라고. 꼭
“너는 지금 그저 무서울 뿐인 거야. 내가 너한테 다시 상처 줄까 봐, 그게 무서워서 날 사랑하는 걸 주저하는 것뿐인 거야. 내 말이 맞아?”강지혁이 부드럽게 물었다.임유진은 순간 그에게 마음을 들킨 기분이었다. 어쩌면 정말 그의 말대로 단지 무서운 것일지도 모른다. 상처받을까 봐 두려워 줄곧 그를 사랑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유진아,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을게.”강지혁은 진지한 얼굴로 돌아와 말했다.그러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임유진의 앞으로 걸어와 그녀와 두 눈을 마주쳤다.“믿기 힘들어?”“그런 건 누구도 보장 못 해.”“믿기 힘들면 네 앞에서 맹세할게.”“그럴 필요는...”임유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지혁은 허리를 숙이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얼굴에는 장난기 하나 없는 그 어느 때보다 더 결연한 표정이 어려있었다.“맹세할게. 만약 너를 조금이라도 아프게 하면 그때는 그 열 배보다 더한 고통으로 갚을게. 만약 네가 나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면 그날은 내 마음도 죽는 날일 거야.”임유진의 눈은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강지혁이 이런 식으로 무릎 꿇을 줄도 몰랐고 이렇게 얘기할 줄도 몰랐다.그녀는 고개를 숙여 그를 바라보았다.강지혁은 시선을 내리더니 머리를 더 숙이고 낮게 속삭였다.“그거 알아? 아직도 세상 어떤 곳에서는 내 모든 충성과 마음을 다 바치겠다는 뜻으로 상대방의 발등에 입을 맞춘대.”임유진은 그 말에 두 눈이 흔들렸다.방금 뭐라고 한 거지?그리고 그런 말을 한다는 건 지금 설마...?!순간 심장이 억제할 수 없을 만큼 세차게 뛰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오른발에서 천천히 슬리퍼를 벗겼다. 그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발등 위에 자신의 입술을 맞췄다.“유진아, 사랑해. 내 모든 걸 너한테 줄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너를 사랑해.”강지혁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맴돌았다.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굳은 맹세가 묻어 있었다.임유진의 머리는 이 순간 완전히 새하얗게 되어버
“여기는 어떻게... 왔어요?”임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현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야 그가 조금 야위었다는 것을 눈치챘다.게다가 그의 오른손에는 아직 붕대가 감겨 있었다.임유진은 문득 그날 강지혁이 그의 손가락을 부러트렸던 것이 생각났다.“손가락은 좀 어때요?”“괜찮아요. 큰 상처도 아니었어요.”강현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그보다 유진 씨 찾기까지 애먹었어요. 어제 선생님이 이곳으로 데려와 지지 않았더라면 아마 계속 막막했을 거예요.”그는 걱정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강지혁이 이곳으로 데려와 유진 씨를 난감하게 만들지는 않았어요?”“네, 그러지는 않았어요.”임유진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이곳에서 보냈던 나날을 회상하는 건지 그녀의 표정에 미세한 변화가 일었다.강현수는 그 모습을 보고는 또다시 초조함과 불안함이 들끓었다. 그럴 일 없다고,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상황이 어느새 현실이 되었을까 봐 두려운 모양이었다.“여기서 나가요.”강현수는 왼손을 내밀어 임유진의 손을 덥석 잡았다.“이 저택 주위에 시큐리티 시스템이 깔려있어요. 해킹하는 데 성공해 지금은 보안이 잠시 해제한 상태지만 곧 다시 회복될 거예요. 그래서 지금 빨리 떠나야 해요.”그 말에 임유진이 멈칫했다.“이곳을 떠난다고요?”강현수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왜요. 설마 떠나기 싫어요?”임유진의 머릿속에 순간 어제 강지혁이 무릎을 꿇은 채 발등에 입술을 맞추며 맹세하던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임유진은 그때 분명히 흔들렸고 설렜다. 강지혁 때문에 설렜다.그녀를 지독하게 상처를 준 남자지만 그래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줄곧 저도 모르게 어쩌면 이번에는 그와 함께하면 행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강지혁은 그녀를 믿겠다고 했고 그녀를 사랑하겠다고 했으며 다시는 상처 주지 않을 거라고 했다.그러니 어쩌면 이번은 다를 수 있지 않을까?임유진의 망설임이 강현수의 눈에도 훤히 보였다.강현수는 심장이 철렁해 나며 마
임유진이 이상함을 느끼기도 전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내 허락 없이는 누구도 여기를 못 떠나.”임유진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몸이 경직되어버렸다.이건 강지혁의 목소리였다.고개를 들어보자 불과 5m도 안 되는 거리에 강지혁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로는 검은색 양복 차림의 남자들이 무섭게 줄지어 있었다.꼭 이런 상황이 생길 줄 알고 여기서 줄곧 대기하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하, 나 지금 완전히 네 손바닥 안에서 놀아난 거지?”강현수는 차가운 눈길로 강지혁을 노려보았다.“선생님을 일부러 여기로 부른 거야? 날 끌어들이려고?”만약 소영훈이 아니었다면 강현수는 애초에 여기를 찾아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강지혁은 그 말을 무시하고 강현수의 뒤에 있는 임유진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내가 내 모든 걸 준다고 했는데도 강현수와 함께 떠나는 걸 선택한 거야?”임유진은 강지혁이 이쪽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았다.지금 그의 얼굴은 싸늘하지 그지없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다정함이 흘러넘치던 두 눈이 지금은 무섭게 변해 있었다.“내가 떠날 생각이 없었다고 하면 믿을 거야?”임유진의 질문에 강지혁이 코웃음을 쳤다.“강현수랑 같이 이 저택에서 나와 놓고, 그리고...”강지혁은 임유진과 강현수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두 사람이 잡고 있는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둘이 이러고 있는데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고?”임유진의 심장이 철렁했다. 쓸쓸하고 아릿한 느낌이 온몸에 퍼졌다.“내 말 못 믿어?”“이 상황에서 내가 널 어떻게 믿어야 하는데?”강지혁이 되물었다.그리고 이번에는 임유진이 코웃음을 쳤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쩌면 강지혁과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건 착각에 불과했다.“내가 하는 말은 전부 다 믿겠다며. 멋대로 의심하고 멋대로 추측하지 않겠다며?”임유진은 입안이 썼다.그의 말이 아직도 이렇게 선명하게 귓가에서 맴돌고 있는데 정작 그 말을 내뱉은 강지혁은 지금 그녀를 믿지 않
“못할 건 없지.”강현수는 물러서지 않았다.S 시의 꼭대기에 있는 두 남자가 지금 서로를 원수 보듯 노려보고 있다.“만약 유진 씨가 이곳에서 떠나기를 원하면 나는 오늘 무슨 수를 써서든 이곳에서 유진 씨를 데리고 떠날 거야.”강현수가 말했다.“이번에는 아예 손을 부러트려야겠네.”강지혁은 말을 마치고는 강현수에게 주먹을 휘둘렀다.강현수는 이런 상황이 생길 줄 이미 예상했기에 가볍게 옆으로 피했다. 두 남자는 서로 주먹을 휘두르며 싸우기 시작했다.언뜻 비등해 보였지만 강현수는 오른손에 상처를 입고 있어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했다.강지혁은 강현수를 빠르게 제압하더니 그의 왼손을 잡고 금방이라도 부러트릴 것처럼 뒤로 꺾었다.하지만 그때 임유진이 다가와 강지혁의 손을 꽉 잡았다.“그만해! 강지혁, 그만해!”강지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만약 내가 기어이 오늘 이 손을 부러트려야겠다면?”“사람 손 하나 부러트리는 게 너한테는 그렇게 쉬운 일이야?”임유진이 물었다.그녀는 순간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손을 이렇게 만들어놨던 진세령과 소민준이 떠올랐다.그들의 한낱 가벼운 행동이 그녀에게는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강현수를 지켜주고 싶어?”강지혁이 물었다.“그래.”임유진은 단호하게 대답했다.강현수는 이미 자신 때문에 손가락을 다쳤다. 그러니 또다시 자신 때문에 그를 다치게 할 수는 없었다.강현수에게는 더 이상 빚지고 싶지 않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그렇게도 강현수가 신경 쓰여?”임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만약 강현수가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강현수는 어릴 적 함께 생사의 고비를 넘겼던, 꼭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던 친구니까.물론 결과적으로 임유진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기억이 돌아왔음에도 그가 계속 착각하게 내버려 두었다.하지만 지난번 그 절벽에서 다시 강현수와 만났을 때, 강현수는 그녀를 구해줬다. 만약 그때 그대로 떨어졌다면 어쩌면 지금쯤 영원히 눈을 감
“꼭 약속 지킬 거니까 너도 날 잊으면 안 돼, 알겠지?”아이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맴돌았다.하지만 임유진은 그 약속한 게 무색하게 너무나도 쉽게 그를 잊어버렸고 그와의 약속을 져버렸다.털썩.임유진은 강지혁에게 무릎을 꿇었다.그녀의 돌발 행동에 두 남자 모두 깜짝 놀랐다.“너...!”강지혁의 얼굴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강현수 때문에 무릎을 꿇어? 네가 이러면 내가 강현수를 봐줄 것 같아?!”“강현수 씨 때문이 아니야.”임유진은 깊게 숨을 한번 들이켰다. 그녀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무릎을 꿇은 순간부터 줄곧 마음속을 헤집었던 혼란이 점차 옅어져 갔다.“너랑 나 사이의 일에 다른 사람을 끼워 넣지 마. 날 사랑한다고 했지? 하지만 나는 네 사랑이 감당이 안 돼. 그러니까 강지혁... 이제 그만 날 놓아줘.”“널... 놓아달라고?”강지혁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이제까지 중에서 제일 어둡게 변했다.그는 그녀가 무릎을 꿇는 게 그녀를 놓아달라는 이유가 아닌 차라리 강현수 때문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건지 알아?”강지혁은 강현수를 풀어주고 고개를 돌려 임유진을 내려다보았다.“알아.”임유진의 짤막한 두 글자에 강지혁은 순간 누군가가 총이라도 맞은 것만 같았다.그녀에게 모든 걸 다 주겠다고 했는데, 발등에 맹세까지 하며 충성을 바치겠다고 했는데 임유진은 지금 무릎을 꿇고 자신을 놓아달라고 말하고 있다.“임유진, 너한테 나는 대체 뭐였어? 대체 뭐였냐고!”강지혁은 그녀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야수가 울부짖듯 원망과 분노가 가득 섞인 채로 그녀에게 소리를 질렀다.그녀는 어떻게 이렇게도 쉽게 놓아달라고 할 수 있는 거지? 또 어떻게 이렇게도 쉽게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거지?임유진은 고개를 들어 아무런 감정 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너랑 나는 애초부터 만나면 안 되는 사람이었어. 너는 그때 나를 구해주지 말았어야 했고 나도 너를 집에
하지만 임유진은 아니었다.그녀에게는 그와 만난 것이, 그와 함께했던 순간들이 그저 단순히 일어나서는 안 될 ‘착오’에 불과했다.모든 걸 다 내줄 정도로 사랑한 여자가 지금은 무릎을 꿇고 놓아달라고 하고 있다.세상에 이것보다 더 잔인한 일이 또 있을까?“그래. 놓아줄게.”강지혁의 입에서 해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이 순간부터 너랑 나는 철저하게 모르는 남인 거야.”두 사람은 이제 연인도 아니고, 누나 동생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그런 사이다.두 사람은 결국 얼마나 길게 뻗어도 결코 만날 수 없는 그런 평행선 같은 사이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을 데리고 그녀의 집에 도착했다.집 안은 먼지가 조금 쌓인 것 외에 큰 변화는 없었다.“강지혁한테 무릎까지 꿇을 필요는 없었어요.”강현수가 말했다.“그렇게 하지 않아도 그 상황을 벗어나게 할 수 있었어요.”임유진은 쓰게 웃었다.어제 강지혁은 그녀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오늘은 도리어 그녀가 강지혁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물론 두 사람이 원하는 건 정반대였다.한 사람이 원하는 건 사랑이었고 다른 한 사람이 원하는 건 자유였으니까.“오늘 고마웠어요. 하지만...”임유진은 복잡한 얼굴로 그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다행히 강지혁은 강현수의 왼손을 부러트리지 않았다.만약 정말 부러트렸으면 임유진은 강현수를 향한 죄책감이 더 커졌을 것이다.“나 때문에 이럴 필요까지는 없었어요.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현수 씨를...”“좋아하지 않는다고요?”강현수가 대신 대답했다.“물론 오늘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내일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죠. 하지만 1년 뒤에도, 2년 뒤에도, 심지어 10년, 20년 뒤에도 그럴까요?”임유진은 흠칫했다.“나는 유진 씨를 기다릴 수 있어요. 유진 씨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이상 나는 계속 이렇게 기다릴 거예요.”“만약 내 마음이 평생 바뀌지 않는다면요?”임유진의 질문에 강현수는 미소를 지었다.“그럼 평생 서로 독신으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강현수가 떠난 후 임유진은 그제야 자신의 휴대폰이 아직 강지혁에게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저택에 갇혔을 때 강지혁은 제일 먼저 그녀의 휴대폰부터 가져갔고 그 뒤로 임유진은 휴대폰을 볼 수가 없었다.휴대폰 때문에 다시 강지혁을 찾을 수는 없으니 내일 새로운 휴대폰을 사고 유심도 바꿔야 했다.하지만 새로운 휴대폰으로 바꾸게 되면 그만큼 돈이 들었다.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임유진은 강현수가 다시 온 건가 싶어 별다른 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그러나 거기에는 강현수가 아닌 고이준이 서 있었다.“임유진 씨 휴대폰입니다. 대표님께서 돌려주시라고 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고이준은 임유진에게 휴대폰을 건네주었다.그리고 임유진이 휴대폰을 건네받은 다음 고이준은 별다른 말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임유진은 문을 닫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휴대폰 전원을 켜보니 아직 배터리가 조금 남아있었다. 그리고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와 있었다.제일 많게는 한지영이었고 일부는 로펌에서 온 것이었다.임유진은 무사하다는 걸 알리기 위해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한지영은 드디어 걸려온 임유진의 전화에 흥분해서 물었다.“너 나왔어? 괜찮은 거야? 강지혁은 대체 널 어디로 데려갔던 건데? 너한테 이상한 짓은 안 했고? 너 지금 어디야?!”쏟아지는 질문에 임유진은 그녀의 걱정이 느껴져 미소를 지었다.“응, 나 괜찮아. 그리고 강지혁은 앞으로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야.”“그게 무슨 뜻이야?”한지영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강지혁이랑 나랑 이제 더는 볼 일 없다고.”“너...”임유진의 목소리는 분명 평온하기 그지없었지만 한지영은 왠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만 같았다.“너 정말 괜찮은 거야...?”“응, 정말 괜찮아. 나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고 얘기해주려고 전화 한 거야. 앞으로 이런 일 없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나 배터리가 된 것 같아. 그럼 이만 끊을게.”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다시 확인했다.휴대폰은 강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