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한번 호기심으로 여러 알 먹은 적이 있었고 그때 3일 내리 잠만 자고 결국 병원으로 실려 가 위세척도 했어. 그리고 그날 그 도우미가 여태 약을 바꿨다는 사실을 듣게 됐지.”강지혁은 임유진을 바라보며 쓸쓸하게 웃었다.“그거 알아? 그 여자는 내가 그 집에 들어갔을 당시 나한테 제일 잘해줬던 사람이었어. 매일 나한테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고 나를 보살펴줬어. 그리고 그렇게 다정하게 웃으면서 매일 나한테 수면제를 건넸던 거야.”임유진은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어떻게 제 한 몸 편해지겠다고, 어떻게 고작 데이트 때문에 애한테 그런 짓을 해? 수면제를 많이 먹이면 너한테 어떤 영향이 가는지 생각 안 했대?”만약 강지혁이 계속해서 수면제를 받아먹었다면 아마 어릴 때부터 질병을 달고 살았을 수도 있다.“이 세상에 자기 이익을 위해 쉽게 남한테 해를 끼치는 사람은 많아.”“그 도우미는 나중에 어떻게 됐는데?”임유진이 물었다.“바로 잘렸어.”강지혁은 그저 잘렸다고만 했지만 강문철이라면 아마 더 한 벌을 내렸을 게 분명했다.“그래서 넌 그때부터 약 먹는 걸 싫어했던 거야?”“응.”강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약을 먹으려고 할 때면 그날 위세척했던 고통과 아무런 힘도 없이 병상에 며칠을 누워있어야만 했던 끔찍한 기억이 떠오르게 된다.심지어 그때 강문철은 그의 병실로 와서는 병상에 누워있는 손자에게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그저 약이 바뀌었다는 사실만 알려주었다.“이번에는 운이 좋았을 뿐이다. 하지만 앞으로 또다시 누군가를 그렇게 쉽게 믿었다가는 그때는 병원에 누워있는 것이 아닌 차가운 바닥에 묻히게 될 거다. 네가 아무리 내 손자라고 해도 나는 멍청한 놈을 도와주지 않아. 이런 기본적인 경계심도 없는 인간은 우리 집에 있을 자격 없다.”강지혁은 그날 확실히 깨달았다. 강문철이 얼마나 매정한 사람인지.어쩌면 강문철은 처음부터 도우미가 약을 바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남들의 눈에 그는 강씨 가문의 사랑받는 도련님으로 보였겠지만 실
강지혁은 임유진이 주는 건 먹을 수 있다고 했다.이건 그녀를 믿고 있다는 표현인 걸까?그렇다면 왜 그녀가 주는 약은 덥석 받아먹으면서 그녀의 마음은 그렇게도 의심했던 거지?만약 강지혁이 그녀의 마음을 믿었더라면 두 사람은 애초에 헤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물론 지금에 와서 이런 생각을 되뇌어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겠지만...강지혁은 자고 있을 때조차도 미간을 살짝 찡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계속 흘러내렸다.임유진은 욕실로 가 타올을 들고 와 그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엄마.. 엄마...”강지혁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끊임없이 엄마를 불렀다.임유진은 그의 얼굴 가까이 다가가서야 그가 뭐라고 하는지 들을 수 있었다.꿈속에서 엄마를 만나기라도 한 건가?임유진은 움직임을 멈추고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강지혁이 아직 어렸을 때 그의 엄마는 구질구질한 생활이 싫어 그와 강선우를 버리고 집을 떠났다고 했다.그리고 그렇게 집을 나간 뒤로 단 한 번도 강지혁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임유진은 강지혁의 가슴팍에 있던 흉터를 아직 기억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 지금은 많이 옅어진 상태였지만 당시 그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어린아이에게 이런 상처는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을 정도의 치명상이 될 수도 있었다.이런 상처가 생긴 이유는 강지혁이 떠나는 엄마를 붙잡으려 했기 때문이다.“엄마... 싫어... 나 두고 가지 마.... 나랑 아빠 두고 가지 마... 제발...”그의 미간은 점점 더 세게 찌푸려졌고 속눈썹은 파르르 떨렸다.금방이라고 부서질 것 같은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방금 닦아낸 땀이 다시 한번 그의 이마에 맺혔다.강지혁은 지금 마치 도움의 손길을 간절히 원하는 아이 같았다.아니... 어릴 때 꿈을 꾸고 있을 테니 꿈속에서 그는 지금 아이일 테지...임유진은 그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며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아무도 너 두고 어디 안 가.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자. 착하지...”임유
방안은 쥐죽은 듯이 조용했고 이곳에 강지혁 외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서서히 시선을 내려 자신의 텅 빈 두 손을 바라보았다.강제로 이 집에 가둬 놓아도 임유진은 여전히 그의 곁에 있어 주지 않았다.떠나지 말라고, 옆에 있어 달라고 그렇게 외쳐도 결국 그들만의 방식으로 곁을 떠나버린 그의 엄마와 아빠처럼 임유진도 떠나버렸다.결국 돌고 돌아 그는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언제부터 혼자인 걸 신경 썼다고...임유진을 만나기 전 그는 늘 혼자였다. 이 세상에서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 스스로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제 와서 다시 혼자가 됐다고 마음이 허전할 필요는 없었다.하지만, 분명 그러한데 자꾸 고통이 마음의 틈을 비집고 나와 온몸에 뿌리를 내린다.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걸어들어왔다.강지혁은 자신을 향해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을 보며 눈동자가 점점 흔들렸다.“벌써 일어난 거야? 죽 끓여왔어.”임유진은 손에 든 죽을 침대 협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만졌다.아직도 조금 뜨겁기는 했지만 전보다는 많이 나았다.“열은 조금 내린 것 같은데... 체온은 이따 다시 재줄게.”“방금... 죽 끓이러 갔었던 거야?”강지혁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응, 너 깨고 나면 배고플까 봐. 반 시간쯤 뒤에나 깰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깼네?”임유진은 그의 얼굴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죽은 아직 뜨거우니까 조금 식히고 먹어.”“알았어.”강지혁은 죽을 한번 보고는 다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그럼 그 전까지는... 계속 이 방에 있었던 거야?”“아니면?”임유진은 줄곧 그의 옆에 있었다.강지혁이 악몽 때문에 몸을 뒤척이며 힘없이 중얼거릴 때면 그녀는 옆에서 다정하게 그의 말에 일일이 대답해주며 그를 안심시켰다. 그러면 강지혁은 그제야 다시 편안한 얼굴을 했다.그렇게 그가 완전히 편히 잠든 후에야 임유진은 조용히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향했다.강지혁은 눈앞에 있는 여
“손에... 힘이 안 드네.”강지혁은 말을 하고는 다시 한번 그릇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임유진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그릇을 자기 쪽으로 가져가며 말했다.“됐어. 너 그러다 죽을 침대에 엎어버릴지도 모르니까 내가 먹여줄게.”말을 마친 그녀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죽을 한 숟가락 뜨고는 후후 불어 강지혁의 입가에 가져갔다.강지혁은 순순히 입을 열어 그녀가 먹여주는 대로 가만히 받아먹었다.지금 그는 마치 주인 앞의 온순한 강아지처럼 죽을 먹었다. 하지만 그 눈빛은 전혀 온순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임유진을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이글거렸다.그 시선을 그대로 받은 임유진은 어쩐지 이 상황이 무척이나 불편하게 느껴졌다.“저번에 말했던 그 여자 말이야. 진짜 그 방에서 남자를 죽였어?”임유진은 아무 화제나 꺼내 이 불편한 침묵을 깼다.“응, 진짜야.”“하지만 그 여자가 죽인 건 강씨 가문 사람이잖아. 가문 사람들이 그 여자를 가만히 내버려 뒀어?”70년 전이라고 해도 강씨 가문은 큰 가문이었을 테니까.“그 남자가 유서를 남겼거든. 자기가 죽어도 그 여자는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임유진은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그러면 남자는 여자가 자기를 죽일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건가?그런데도 그런 편지를 남긴 건가?70년 전이면 지금처럼 법망이 촘촘하지 않던 시대라 강씨 가문에서 그 일을 함구하면 그 여자는 무사히 도망갈 수 있었을 것이다.“그래서 그 여자는 그 후에 어떻게 됐어?”임유진은 이상하게 자꾸 그 여자의 마지막이 궁금했다.“다시 이곳으로 돌아왔어. 네가 지금 있는 방, 그게 그 여자가 그때 머물렀던 방이었거든. 그 여자는 이곳으로 다시 돌아와 그대로 여기서 생을 마감했어.”“생을 마감했다고? 혼자?”“둘이라고 해야겠지. 임신한 채로 이 집에 돌아왔으니까. 여기서 그 여자는 남자애를 낳았고 그 남자애는 커서 강씨 가문을 이어받았어.”임유진은 이 이야기의 결말이 이렇게 될 줄은 몰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강지혁은 임유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챈 듯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걱정하지 마. 노인네가 너한테 해를 끼칠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거야.”임유진은 시선을 내리고 어느새 비어버린 그릇을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이만 쉬어. 나는 이제 내 방으로 돌아갈게.”하지만 임유진이 몸을 돌리기도 전에 강지혁이 더 빠르게 그녀의 옷을 잡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촉촉한 두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지금 뭐 하는 거야?”“너 아직 나 완전히 잊은 거 아니지? 그게 아니면 내 옆에서 밤새 병간호를 해주지도 않았을 거고 약도 주지 않았을 거며 죽도 끓여주지 않았을 거야. 그치?”잔뜩 잠긴 목소리가 강지혁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의 두 눈은 애원과 갈망을 담아 그렇게 그녀를 바라보았다.“유진아, 다시 날 사랑해주면 안 돼? 나는 내가 정말 이렇게까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될 줄은 몰랐어. 이렇게까지 깊게 사랑하게 될 줄 정말 몰랐어...!”사람들 꼭대기에만 있던 강지혁이 지금은 자존심이고 뭐고 싹 다 내려놓고 오직 임유진의 사랑 하나만을 바라고 있다.임유진은 그의 말에 순간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버렸다....한편, 강현수는 지금 자신의 모든 인맥을 이용해 임유진의 행방을 찾고 있다.하지만 그게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가 인맥을 쓸 수 있는 만큼 강지혁 또한 임유진을 찾지 못하게 인맥을 쓸 수 있으니 말이다.게다가 임유진이 사라진 뒤로 강지혁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아 더더욱 찾기 어려웠다.아주 작은 단서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것마저 없었다.강현수는 이제껏 이렇게까지 불안하고 답답하고 신경이 곤두선 적이 없다. 심지어 바로 눈앞에서 배여진이 뭐라고 얘기하는 데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은 온통 임유진의 행방에 관한 생각뿐이었다.강현수가 부모님 앞에서 임유진에 대한 마음을 고백했을 때 그의 부모님은 처음에는 놀랐다가 바로 반대했고 심지어는 임유진에게 집착하지 말라며 화를 내고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하지만 강현수는 이미 그녀에게 푹
강현수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그러다 얘기를 전해 듣고는 갑자기 얼굴이 심각해졌다.“네? 선생님이 사라져요?”“그래, 너도 알다시피 그 양반이 환자를 오게 했으면 했지 절대 치료하러 밖으로 나가는 사람은 아니었잖아. 그런데 오늘 갑자기 나한테 전화가 와서 환자 치료해주러 가야 한다면서 어쩌면 오래 걸릴지도 몰라 전화하는 거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라. 그런데 몇 시간 뒤에 다시 연락해보니까 전화를 안 받는 거야!”강현수에게 전화를 건 사람은 소영훈의 아내인 김영애였다.그녀는 불안한 마음에 지금 발을 동동 구르며 전화하고 있다.강현수는 소영훈과 친했기에 자연스럽게 그의 아내와도 친분을 쌓게 되었다.“환자 보러 나가신다고 했다고요?”강현수가 미간을 찌푸렸다.“그래. 현수야, 이 양반 설마 누구한테 원한산 거 아닐까? 그래서 무서운 사람들한테 납치된 걸까?”김영애는 지금 별의별 나쁜 생각이 다 들었다.하지만 강현수는 그 말을 듣고 순간 무언가가 떠올랐다.만약 임유진이 강지혁에게 데려가 지지 않았더라면 오늘이 바로 그녀가 손가락을 치료하게 될 두 번째 날이다.강지혁의 짓일까?임유진의 치료 때문에 강지혁이 소영훈을 데려간 걸까?강현수는 김영애를 안심시키고 전화를 끊은 다음 곧바로 부하에게 전화를 걸었다.“누가 선생님을 데려갔는지 알아봐.”“네, 알겠습니다.”강현수는 전화를 끊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네? 하지만 우리 이제 온 지 10분도 안 됐는데...!”배여진은 다급하게 그를 말렸다. 그와 오랜만에 식사하러 나왔는데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강현수가 가겠다고 자리에서 일어서니 그녀로서는 황당할 따름이었다.“미안, 밥은 너 혼자 먹어.”강현수는 그녀가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소영훈이 사라진 게 정말 강지혁과 관련이 있는 걸까?임유진은 대체 강지혁에게 어디로 데려가진 거지?!강현수는 가슴이 쿵쿵 뛰는 것이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만약 하루빨리 임유진
“죄송해요. 설마 선생님을 이곳으로 데려올 줄은 몰랐어요...”임유진은 민망해하며 고개를 숙였다.소영훈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살다 보면 뭘 봐도 보지 않은 척해야 하는 때가 있고 뭘 들어도 듣지 않은 척해야 할 때가 있다.그는 손에 든 치료 도구를 책상 위에 펼쳐놓고는 임유진에게 오른손을 내밀라고 얘기했다.임유진은 다양한 사이즈의 침들을 보며 순간 지난번 치료했을 때의 고통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소영훈은 침을 들어 임유진의 손등으로 가져갔다. 그때 강지혁이 갑자기 소영훈의 손목을 잡으며 물었다.“지금 뭐 하는 겁니까?”“뭐하긴요. 치료하는 중이죠.”소영훈은 치료 중에 방해받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었기에 바로 눈썹을 찌푸렸다.“치료하는데 마취는 왜 안 합니까?”강지혁이 미간을 치켜세우며 물었다.“마취하면 손가락 반응을 제대로 알 수 없어요. 반응을 제대로 알아야 치료가 제대로 됩니다!”소영훈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설명했다.하지만 강지혁은 그의 설명에도 크고 두꺼운 침 때문에 망설여졌다.“하지만...”“괜찮아. 전에도 이렇게 치료했어.”임유진을 고개를 들어 강지혁에게 말했다.“그리고 이 정도 고통은 잠깐 참으면 금방 지나니까 괜찮아.”감옥에 있었을 때처럼 잠깐만 참으면 금방 지나간다.다만 감옥에 있었을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는 절망 속에서 고통을 참았다면 지금은 희망 속에서 고통을 참고 있다.손가락이 아무 일도 없었던 때처럼 멀쩡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저 지금보다 조금만 더 나아지기를 바랄 뿐이다. 그 정도만 돼도 충분히 기쁠 테니까.강지혁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그녀의 말을 듣고 뭔가 떠오른 듯했다.강지혁은 소영훈을 잡던 손을 풀고 이번에는 임유진의 왼손을 잡았다. 깍지를 낀 채 아주 꽉 잡았다.“뭐 하는 거야?”임유진이 놀라며 물었다.“아프면 내 손 꽉 잡아. 내가 옆에서 네가 받는 고통을 덜어줄게.”“됐어. 나 혼자 참을 수 있어.”임유진은 손을 움직이며 그의 손
그리고 전에도 이런 식으로 꽉 잡은 바람에 강현수의 손목에 피가 난 적이 있다.“너... 너 손 놔.”임유진은 소영훈이 침을 다른 것으로 바꿀 틈을 이용해 강지혁에게 말했다.“나 좀 있으면 지금보다 더 세게 잡을지도 몰라.”“그게 왜?”강지혁은 왼손을 들어 임유진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강현수 손은 잡았으면서 내 손은 못 잡아?”임유진은 그 말에 흠칫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뭐라 대꾸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하지만 그때 소영훈이 예고도 없이 또다시 침을 놓았다.“윽!”아프다. 정말 아프다.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이를 꽉 깨물고 고통을 참을 수밖에 없다.보송해진 이마에 또다시 땀이 맺혔다. 그리고 한 방울 한 방울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강지혁은 옆에서 임유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임유진이 고통 때문에 손등에 손톱을 세게 찔러넣어도, 슬슬 피가 고여도 그는 마치 고통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어쩌면 강지혁의 머릿속이 지금 온통 임유진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그는 임유진의 얼굴에 인 고통과 열심히 그 고통을 참는 모습, 그리고 이를 꽉 깨문 탓에 이마와 손등에 힘줄이 생긴 것까지 하나하나 다 눈에 담았다.잠시 후, 길고도 짧았던 치료가 드디어 끝이 났다.임유진은 지금 온몸에 힘이 다 빠진 것 같았다.“오늘 치료는 여기까지고 일주일 뒤에 세 번째 치료를 진행할 겁니다.”소영훈은 치료 도구를 정리하며 말했다.“그리고 24시간 동안 손에 물 묻히지 마세요.”“네... 감사합니다...”임유진은 창백해진 얼굴로 호흡을 가다듬으며 힘들게 인사를 건넸다.그리고 그제야 강지혁과 맞잡고 있는 손으로 시선을 돌렸다.강지혁의 손등은 그녀가 남긴 손톱자국으로 가득했다.잡는 사람도 아픈데 잡히는 사람은 얼마나 더 아플까.두 사람의 손은 치료가 끝났는데도 마치 한 몸이 된 것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임유진은 서둘러 손을 빼려고 해봤지만 진이 다 빠진 것인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강지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