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이는 아침에 일어나서야 그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았다.그녀는 눈썹을 찌푸리며 머리를 짜냈지만, 설영준이 그녀에게 ‘조심하라'고 한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마치 그녀가 아직도 그의 사람이고, 그녀를 통제할 권리가 있다는 듯이.송재이는 냉소를 지으며 처음에는 무시하려 했다.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그 메시지를 계속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학생들에게 수업을 마치고 의자에 앉아 설영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자세히 말해. 내가 어떤 점에서 조심성이 없었어? 그리고 당신이 누구라고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뜻밖에도 설영준이 빠르게 답장을 보냈다. 그는 자신이 그녀에게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은 대답하지 않고 단지 이렇게 썼다. [네가 아무나 집에 데려오니까. 누군가가 네 집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했어,]이 말을 보고 송재이는 3초간 멍해졌다가 정신을 차리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원래는 그를 더 비난하려고 했는데, ‘몰래카메라'라는 글자를 보자 더 이상 침착할 수가 없었다.퇴근 후 그녀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가는 길에 그녀는 누구를 집에 데려왔었는지 생각해 보았다.그때 몇 명이 모여 마작을 친 이후로는 한 사람만 왔었는데, 바로 지민건이었다.다만 그때도 그녀가 적극적으로 초대한 게 아니라, 그녀 얼굴에 발진이 났을 때 그가 보고 고집스럽게 와서 돌봐주겠다고 했던 것이다.송재이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사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그녀는 지난번 지민건이 왔을 때 어디를 돌아다녔는지 열심히 기억해 보았다.결국 거실의 TV 선반 위, 그 수많은 털 인형들 사이에서 아주 은밀한 몰래카메라를 발견했다.송재이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믿을 수가 없었다!그녀는 집에 혼자 있을 때 속옷을 입지 않았다.편하려고 엉덩이를 겨우 가리는 큰 티셔츠만 입고 아래는 맨다리로 걸어다녔다.자신의 그런 모습이 지민건에게 보였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었다!송재이는 갑자기 지난번 그가 집에서 그녀를 갑자기 안았던 이유를 깨달았다.그 장면을 녹화해서 설영준에게
어떤 사람들은 한두 번 만났을 뿐인데도 첫눈에 정이 가는 경우가 있다.하물며 송재이는 한때 도경욱이 자신의 친부이고 도정원이 오빠라고 생각했었다.결국 오해였다는 걸 알게 됐지만, 도씨 가문의 부자와 연우를 떠올리면 왠지 모르게 특별히 친근하고 마음이 따뜻해졌다.이제 아저씨가 뇌출혈로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속이 타들어갔다.예전 학창 시절, 친하게 지냈던 친구의 아버지도 같은 병을 앓았었다.그녀는 이 병이 얼마나 심각한지 잘 알고 있었다. 응급 처치로 살아났다 해도 재발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송재이는 당일 비행기 표를 구해 곧바로 형주로 날아갔다.......형주시 제일 병원.송재이가 도경욱의 병실에 도착했는데 도정원뿐만 아니라 설영준도 있어 놀랐다.그는 창가에 서 있었고, 역광으로 인해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송재이가 들어오자마자 그를 눈여겨봤지만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도경욱은 헐렁한 환자복을 입고 있었고, 몇 달 만에 보니 많이 야위어 있었다.뇌 수술을 막 마친 터라 머리카락이 밀려 있었고 두꺼운 붕대로 감겨 있었다.송재이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손을 잡고 “아저씨”라고 불렀다.도경욱도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눈앞의 송재이를 보며 그의 눈빛이 흐릿해졌다.그 순간 송재이는 이상하게도 도경욱이 자신을 통해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는 누구를 보고 싶어 하는 걸까?바로 그때, 문 밖에서 귀여운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송재이가 고개를 돌리자 연우가 문가에 서 있었다.온화한 인상의 중년 아주머니가 연우의 손을 잡고 있었는데, 아마도 도정원이 고용한 보모인 듯했다.송재이는 잠시 멍해졌다가 다시 연우를 보며 놀란 듯이 말했다. “연우, 너... 말을 할 줄 알게 됐구나?”연우도 송재이를 보고 분명히 놀란 듯했다. 순진한 얼굴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스쳤다.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기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달려와 허리를 껴안았다. “선생님!”송재이는 몸을 숙여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도진욱은 도정원이 자신의 손을 잡는 힘을 느꼈다.그는 눈을 내리깔고 한 번 보더니 다시 웃으며 말했다. “좋아.”떠나기 전 병상 옆으로 가 도경욱과 인사를 나누고 나서야 돌아섰다.도진욱은 친절하게 그를 동생이라고 부르며 남들 앞에서 형제 간의 정을 과시했다.도경욱과 도정원은 둘 다 말이 없었다.아마도 그들만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범상치 않은 기품을 지닌 이 남자가 사적으로는 어떤 면모를 지녔는지를.도진욱.도씨 가문의 장자로, 당시 도경욱이라는 사생아를 가장 심하게 억압했던 사람이었다.도정원이 어렸을 때는 이 큰아버지에게 암살당할 뻔한 적도 있었다.도정원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가문의 밑바닥에서 신분 상승까지 한 것은 거의 기적이나 다름없었다.......도진욱은 웃는 얼굴의 호랑이 같은 모습이었다.돌아서서 막 나가려는 순간, 그의 발걸음이 멈추더니 시선이 옆에 서 있는 송재이에게 향했다.그의 눈빛이 깊어지며 말했다. “당신은...”송재이도 그의 시선이 갑자기 자신에게 향할 줄은 몰랐다.그녀의 예민함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람이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어딘가 낯익었다.마치 그녀가 처음 도경욱을 만났을 때, 도경욱도 이렇게 탐색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던 것 같았다.비슷하면서도 달랐다.도경욱이 그녀를 바라볼 때는 마치 자체 발광하는 필터가 있는 듯했다.하지만 도진욱은... 눈빛이 날카로워 단 한 번의 시선으로 그녀를 산 채로 삼킬 것 같았다.송재이는 마음을 다잡고 그에게 억지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도정원의 친구고, 예전에 연우의 피아노 선생님이었어요.”“그래요?” 도진욱은 시선을 거두고 생각에 잠겼다가 잠시 후 고개를 들고 웃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정원이 큰아버지입니다.”“정원아.” 병상에 누워있던 도경욱이 갑자기 말을 꺼내 도진욱의 말을 끊었다.그는 침착한 어조로 도정원에게 말했다. “나 좀 쉬고 싶구나. 너 큰아버지를 모시고 나가 주렴.”도진욱은 나중에
도진욱이 자리를 뜬 후, 병실은 잠시 조용해졌다.송재이가 앞으로 나서며 아까보다 훨씬 피곤해 보이는 도경욱을 향해 말했다.“아저씨, 피곤하시면 저희 먼저 가보겠습니다. 편히 쉬세요.”“아닙니다, 송 선생님. 저를 위해 특별히 남도에서 돌아오신 거 압니다. 정원이가 괜히 호들갑을 떨어서는... 이왕 오셨으니 남으셔서 저랑 많은 대화를 나누시죠.”도경욱이 도진욱을 바라보는 눈빛에서는 경계심만 가득했는데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송재이를 바라보는 도경욱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송재이는 옆에 있는 병상에 앉아서 도경욱과 함께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설영준은 옆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차가운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다.그는 도정원이 왜 도경욱이 아플 때 송재이를 불렀는지 잘 알고 있었다.또한 도경욱이 송재이를 바라보는 눈빛이 왜 그리 자애롭고 복잡한지도 잘 알고 있었다.송재이가 친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상황에서도 도경욱은 여전히 그녀에게 진실을 알려주지 않고 있었다.도진욱을 본 그 순간, 설영준은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도진욱을 어렵사리 배웅하고 돌아온 도정원은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설영준을 마주했다.설영준이 입을 열었다.“재이는 아저씨랑 얘기 나누고 있어요. 방해하지 마시고 잠시 저 좀 보시죠.”도정원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설영준은 먼저 병실을 나섰다.복도 끝 문을 열자 밖에 큰 베란다가 나타났다.도정원이 올라올 때, 설영준은 막 담배를 피우려던 참이었다.뒤에서 인기척을 들은 그는 담배를 든 손을 자신도 모르게 멈추었다가 나중에야 불을 붙였다.“재이의 신분에 대해 알려주실 거예요?”설영준이 물었다.설영준은 송재이가 도정원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안 이후 처음으로 도정원과 허심탄회하게 이 화제에 관해 얘기를 나누는 것이었다.도정원도 놀라지 않았다.그는 평소에 담배를 잘 태우지 않았지만 도경욱이 수술하는 동안, 아버지가 죽을 고비를 넘기는 것을 보면서 아들인 그로서 겉으로는 담담해서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도정원은
돌려받은 설영준은 아연실색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도정원은 살짝 웃고 돌아서서는 빠른 걸음으로 떠났다.이번에 송재이는 도경욱을 보기 위해 특별히 돌아온 것이었다.그녀는 자신이 왜 도경욱에게 그렇게 알 수 없는 따뜻함과 친근감을 느끼는지 몰랐다.도경욱이 퇴원할 때까지 경주에 며칠 더 머무를 생각이었던 송재이는 이튿날 도정원의 연락을 받았다.“마침 오늘 남도로 출장 가야 하는데 오늘 돌아가실 거면 제가 바래다 드릴게요. 가실래요?”도정원이 친절한 태도로 물었다.‘어? 이렇게 빨리?’송재이가 답하기도 전에 도정원이 말을 이었다.“아버지의 상태는 안정되어 며칠만 더 병원에 입원해서 관찰하고 집으로 모시면 돼요. 만약 돌아가고 싶지 않으시다면 며칠 더 머무셔도 돼요. 송 선생님께서 경주에 미련을 갖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도정원의 마지막 말은 송재이의 마음이 찔리게 했다.그녀는 스스로 설영준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를 보지 못했을 때만 그런 것처럼 느껴졌다.어제 병원에서 만난 두 사람은 비록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어젯밤 잠든 후, 송재이는 뜻밖에서 밤새도록 설영준과 관련된 꿈을 꾸었다.설영준을 보기만 하면 그동안 정리했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무너질 것 같았다.송재이는 못난 자신이 매우 싫었다.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설영준과의 접촉을 줄이는 것이었다.어젯밤 꾼 꿈을 떠올린 송재이의 얼굴은 어느새 빨갛게 변했다.그녀는 한 손으로 자신의 뺨을 매만지며 도정원에서 답했다.“아닙니다. 경주에 미련은 없습니다. 오늘 몇 시에 남도로 가시는 거예요? 태워주세요.”도정원이 멈칫하더니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오후 세 시에 떠나려고 하는데 제가 데리러 갈까요?”“좋아요.”송재이가 답했다.핸드폰으로 시간을 살펴보니 이제 겨우 오전 10시였다.그녀는 떠나기 전에 묘원에 한 번 더 가고 싶었다.오랫동안 어머니 성묘를 못 했는데 성묘를 마치고 돌아와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오늘 남도로 돌아갈 수 있다는 송재이
송재이의 상상력이 풍부해서가 아니라 설영준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 정말 이 집안의 좋은 가장 같았다.친밀하고 네 것, 내 것 구분이 없는 듯한 느낌이었다.송재이는 설영준의 그런 당연한 듯한 태도가 불편하고 내키지 않았다.하지만 그녀는 그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설영준이 그녀를 바라볼 때야 그녀는 한마디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필요 없어!”설영준은 가볍게 웃었다. 마치 아이를 돌보는 어른처럼 송재이의 반응을 하나도 신경쓰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설영준은 집 안으로 들어서 수중의 아침을 한쪽에 내려놓았다.그는 사 온 아침을 하나둘 꺼내며 송재이에게 말했다.“일단 아침 좀 먹어. 다 먹고 마트 가서 전등 하나 사 오자.”송재이는 오후면 떠날 예정이어서 이 집에 살지 않아 등을 수리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그녀는 괜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하지만 설영준에게 더 반박하고 싶지도 않아 그저 그가 하려는 대로 내버려두었다.자리에 앉고 나서야 송재이는 그가 사 온 아침이 계란 후라이, 샐러드, 과일 주스 등 그녀가 좋아하는 메뉴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아침을 먹지 않은 설영준도 자리에 앉아 조용히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창밖의 햇살은 따뜻하고 눈부셨다.송재이는 시시때때로 설영준을 바라보았으나 마음속의 말은 굳이 먼저 꺼내지 않았다.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설영준의 질문이 들려왔다.“갑자기 트러블이 나기라도 한 거야?”송재이는 샐러드를 먹다 체할뻔했다.지난번 서유리와 영상통화 할 때의 모습도 설영준에게 들켰었다.송재이는 당연히 자신의 볼품없는 모습을 설영준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몰라.”송재이는 고개를 숙인 채 대충 대답했다.“그 며칠 동안은 지민건이 보살펴 준 건가?설영준이 또 물었다.송재이는 수중의 젓가락을 집어 던지며 고개를 들어 설영준을 바라보며 분노 섞인 말투로 물었다.“왜 또 그 사람 얘기야?”“물어보면 안 돼?”“그 사람이 우리 집에서 어떤 짓을 했는지 알잖아.”멈칫한 송재이가 말을
송재이가 힘껏 설영준의 입술을 깨물었다.그가 아픔을 느끼며 멈칫할 때, 송재이가 힘껏 그를 밀쳐냈다.“영준 씨! 우리는 이미 헤어졌어!”설영준이 가볍게 웃으며 송재이가 깨문 그 자리를 혀로 훑었다.“헤어졌다고 해서 잘 수 없는 건 아니잖아?”말을 마친 설영준이 송재이를 안고 그녀의 반항에도 불구하고 침실로 향했다.설영준의 뻔뻔한 말에 송재이의 얼굴이 빨개졌다. ‘헤어졌다는 의미를 모르는 건가?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나한테 이런 행동을 하는거지?’송재이는 설영준에 의해 침대에 눌려있었다.그의 얼굴은 침대 위로 멋대로 흩어진 머릿속에 박혀있었다.송재이의 향을 있는 대로 맡은 설영준은 익숙한 향을 느꼈다. 청량하고 향긋한 향은 깨끗하고 차분한 기운을 느끼게 했다. 설영준은 저도 모르게 몸을 잘게 떨었다.설영준의 손이 그녀의 옷 속을 막힘없이 파고들었다. 거리낄 것은 없었다. 그저 설영준 마음속 깊이 인정하기 싫은 그리움과 애틋함만이 있을 뿐이었다.비록 지금 상황이 갑작스럽기는 했으나 설영준의 기술은 좋았고 체력도 충분했다.침대 위에서 괴롭혀진 그녀는 끝나고 나서야 핸드폰이 계속 울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하지만 그녀는 이미 너무 지쳤다. 온몸이 탈진이라도 한 것처럼 땀에 절여져 있었다.지금과 같을 때 몸무게를 잰다면 한 번에 10킬로라도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았다.송재이는 일어나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일어날 힘조차 없었다. 귀가에서는 어렴풋이 설영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는데 그러고 나서 핸드폰은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그가 누구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지도 몰랐다.송재이도 더 신경 쓸 여유 없이 그대로 잠에 빠졌다.그녀가 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저녁이었다.송재이는 부스스해진 머리를 매만지며 비몽사몽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했다. 후들거리는 다리는 그녀에게 잠들기 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일깨워주는 듯했다.침실을 나설 때 마침 설영준은 작은 의자에 서서 전등을 갈아 끼우고 있었다.셔츠를 거둬 올려 탄탄한 팔이 드러나자 형
설영준이 침실에서 이불을 정리하고 있을 때 송재이가 분노에 찬 모습으로 들어와서 침대 주위를 헤집었다.송재이는 침대 아래에 있던 카펫에서 자신의 핸드폰을 찾을 수 있었다.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두 개의 부재중 전화는 모두 도정원에게서 온 것이었다.마지막 통화 기록을 확인해 보니 통화는 수신된 상태였다.불현듯 생각해 보니 당시 설영준이 받은 것 같았다.송재이는 몸을 일으켜 설영준을 바라보았다.“도 전무님한테 뭐라고 한 거야?”“아무 말도 안 했어.”말을 마친 설영준이 큰 보폭으로 침실을 나갔다.“영준 씨!”송재이는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듯한 설영준의 태도에 화가 치밀어 올라 설영준을 향해 다가갔다.그의 옷소매를 잡은 그 순간, 설영준의 핸드폰이 울렸다.“도 전무님이랑 무슨 얘기 했는지 얼른 알려 줘. 오늘 전무님 차 타고 남도로 돌아가기로 했는데 영준 씨 때문에...”“정말 내 탓이야?”분노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송재이를 바라보는 설영준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설영준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보일 듯 말듯 한 미소를 지었다.“먼저 가라고 했어. 네가 자고 있으니 못 일어난다고.”송재이는 눈을 크게 뜨며 말을 더듬었다.“어... 어떻게 그렇게 말해?”설영준은 그녀를 한 번 바라보며 웃고는 몸을 돌려 전화를 받았다.송재이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해졌다.송재이는 도정원이 오해할까 무서운 것보다 이미 설영준과 헤어진 상태에서 경주에 와서 옛 연인과 침대에 올랐다는 사실이 얼마나 헤프게 보일지 걱정되었다.다른 사람이 알게 된다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것 같았다.다행하게도 도정원이 입이 가벼운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다른 사람한테 얘기하지는 않겠지?’하지만 도정원 혼자서 안다고 해도 지금 상황은 무척이나 뻘쭘했다.‘쪽팔려 죽을 것 같아!’앞으로 도정원을 다시 마주할 생각을 하니 송재이는 쥐구멍이라도 찾아서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설영준을 원망하고 있을 때 그녀의 시선이 갑자기 그가 하고 있는 벨트로 향했다.
통화가 종료된 후 설영준은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는 다시 한번 송재이 병실로 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곤 창백한 얼굴로 고요히 잠든 송재이의 얼굴을 보았다.설영준은 마치 송재이에게 자신이 한 말이 들리는 것처럼 나직하게 말했다.“재이야, 내 말 들려? 나 여기 있어. 네 옆에 있어.”그는 조심스럽게 송재이의 손을 잡으며 미약해진 체온을 느꼈다.“어쩌면 지금 내 말이 안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이야.”설영준은 이내 심호흡을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우리 아직 함께 해보진 못한 일들이 많아. 혹시 기억해? 우리 그때 그랬었잖아. 함께 세계 곳곳에 있는 나라로 여행 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고 그곳의 음식을 먹어보자고. 네가 지금 눈만 떠준다면 난 지금 당장 너랑 함께 그 떠날 거야.”이때 누군가 노크하더니 도정원이 들어왔다. 그는 아주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영준 씨, 경찰들이 지금 출동했다고 하네요. 곧 도진욱의 거처로 들이닥칠 거예요.”설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가득한 눈길로 송재이를 보았다.“정원 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말씀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도와드릴게요.”“저 대신 재이 좀 잘 챙겨주세요. 전 누구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아서 그래요. 그 사람이 아마 이 사건에 아주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걱정하지 말고 가봐요. 여긴 제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아무도 재이를 건들지 못할 거예요.”설영준은 고마운 눈빛으로 도정원을 힐끗 보곤 몸을 돌려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 설영준은 나직하게 송재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재이야, 나 얼른 돌아올게. 그러니까 나 꼭 기다려줘야 해.”송재이의 병실에선 도정원만이 묵묵히 곁을 지키며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설영준은 이미 진상을 찾으러 떠났다.그는 오랜 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그 친구는 의학 부문에서 아
그러자 보안 요원이 말했다.“여긴 병원 CCTV를 관리하는 곳입니다. 외부인에게 함부로 영상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설영준은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전 송재이 씨 약혼자입니다. 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보안 요원은 다소 망설이더니 결국 그에게 영상을 보여주었다.영상 속에서 설영준은 세세한 부분까지 발견했다. 송재이가 쓰러지기 전 도진욱은 물잔을 송재이에게 건넸다. 그 순간 설영준은 의심을 하게 되었다.같은 시각 도정원은 병실에서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쪽지엔 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약물의 이름과 사용량이 적힌 쪽지였다. 그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설영준에게도 알렸다.두 사람은 각자 발견한 것을 공유하곤 분석하기 시작했다. 설영준은 도진욱이 송재이에게 건넨 물잔과 쪽지 위에 쓴 약물의 명칭을 보았다. 그는 순간 무언가 깨닫게 되었다.송재이가 검사실로 들어간 뒤 설영준과 도정원은 각자 단서를 찾으러 움직였기에 설영준은 다시 돌아와 송재이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도정원은 쪽지에 적힌 약물 이름을 보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설영준은 초조한 얼굴로 검사실 밖에서 송재이를 기다렸다.“재이야, 꼭 버텨야 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설영준은 마음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머릿속에 송재이의 미소와 웃음소리, 그리고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기도했다. 송재이가 무사히 나오길 바라며 말이다.설영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재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네가 그때 엄청 찬란한 미소를 지었었어. 네 찬란한 웃음이 온통 어둠뿐이던 내 세상을 환하게 빛내주었지. 그때 널 지켜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지금은...”바로 이때 문이 스르륵 열리고 의사가 나왔다. 설영준은 바로 다가가 물었다.“선생님, 재이는 어때요?”“저희가 최선을 다해 독이 퍼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독에 중독된 거라 독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데 시간이
송재이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도정원과 도진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수사관이 빠르게 다가와 상태를 살폈다. 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되어 얼른 입을 열었다.“저희가 바로 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도정원은 빠르게 긴급 호출 벨을 누르면서 송재이를 부축한 채 옆에 있던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혔다.의자에 앉히자마자 도정원은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재이야, 조금만 버텨줘. 의사가 금방 도착할 거야.”도진욱은 다소 복잡한 감정이 담긴 얼굴로 송재이를 보았다. 속으로 뭔가 갈등하고 있는 듯했다.그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독에 중독됐다고? 그럴 리가...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예리한 수사관은 그런 도진욱의 상태를 눈치채고 바로 심문했다.“도진욱 씨, 이 상황에 관해 설명하세요. 송재이 씨가 왜 갑자기 중독된 거죠?”도진욱의 안색은 더 창백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전 정말로 모릅니다. 제가 왜 제 조카를 죽이겠습니까?”바로 이때,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오며 송재이를 살펴보았다.의사가 엄숙하게 말했다.“아무래도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송재이는 급하게 검사받으러 갔다. 도정원과 도진욱이 그 뒤를 따라갔다. 수사관은 묵묵히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머릿속에 이미 사건의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도정원이 밖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송재이를 기다렸다. 그러나 도진욱은 홀로 구석으로 간 뒤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안에 있는 핸드폰만 불안한 마음으로 만지작거렸다.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했다.“나야. 일이 복잡하게 됐어. 송재이가 갑자기 독에 중독되어서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어. 나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하지만 우린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해.”전화기 너머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군요. 일단 절대 증거를 찾게 해서는 안 돼요.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끝장나게 되니까
화가 난 도정원은 이를 빠득 갈았다.“그게 무슨 의미죠? 설마 아버지 병이 당신과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정체 모를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곧 알게 될 거야. 참, 도진욱. 가문의 이익을 위해 네 동생 행복을 희생했었지? 이젠 네가 희생할 차례야.”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송재이와 도정원은 고개를 돌려 도진욱을 보며 설명을 바랐다.그러자 도진욱이 말했다.“난... 난 정말 몰랐어. 그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때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인정해. 하지만 전부 가문을 위해서였어. 난 너희들을 해칠 생각한 적 없다고.”송재이는 무력감이 들었다. 거짓과 배신으로 가득한 이 가족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절망에 빠진 송재이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 거예요?”도정원도 다소 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며 감정을 갈무리하려고 애를 썼다.“가문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셨다고요. 우리 도씨 가문이 언제부터 이익에만 눈멀어 가족을 버리는 가문이 된 거죠?”도진욱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는 힘이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정원아, 그땐 내 잘못이 맞아. 나도 인정해. 난 내 선택으로 우리 가문이 더 힘이 있는 가문이 될 줄 알았고 가족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난... 난 정말 미안하구나.”옆에서 듣고 있던 송재이는 막막하면서도 불안했다.“두 사람은 전부 제 가족이에요. 전 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송재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그 순간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면서 이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렸다.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다.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엄숙한 얼굴로 들어왔다.“안녕하세요. 저희는 경찰서 수사과에서 나왔습니다. 몇 가지 당신들이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도정원과 도진욱은 서로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진상을 알아내는 데 중요한 조사라는 것을“네, 협조하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도진욱이 입을 열었다.“그래, 알았다. 너희들한테... 해줄 얘기가 있단다. 네 아버지의 과거와 어머니에 관한 얘기란다.”도정원과 송재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의아하면서도 초조했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뭔가 알고 계신 거예요?”도진욱은 미간을 찌푸렸다.“곧 도착하니 얼굴을 보면서 얘기하자꾸나. 이 일은 내가 너희들 얼굴을 보면서 직접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전화를 끊은 후 도정원과 송재이는 생각에 잠겼다. 두 사람은 도진욱이 어떤 얘기를 들려줄지 몰랐고 도진욱이 그들에게 해줄 얘기가 그들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욱이 병원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엔 초조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었다.그는 송재이와 도정원의 얼굴을 보더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금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고 있단다. 하지만 더는 너희에게 숨길 수 없을 것 같구나. 너희들이 모르는 사실은 더 많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머리가 어질거렸다.“큰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가 아직도 모르는 비밀이 있는 건가요?”“그래, 그때 당시 나와 네 엄마는 확실히 그런 사이였었지. 하지만 그건 다 지나간 일이란다. 나중에 난 그 삼각관계에 빠지기로 했고 네 엄마랑 네 아빠를 이어주기로 했었지. 그때의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까지도 말이야.”송재이와 도정원은 충격받은 얼굴로 도진욱을 보았다. 그가 꺼낸 얘기는 도경욱이 꺼낸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었다.“큰아버지, 정말로... 정말로 그러셨어요?”“나도 알고 있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과거의 일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난 아직 살아 있을 때 너희들에게 진실을 말해주고 싶구나.”바로 이때 병실 안에서는 긴급 호출 벨이 울렸다.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하게 병실로 달려왔고 송재이와 도정원도 얼른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의사는 그들을 보더니 고
송재이는 얼른 도경욱의 손을 꼭 잡았다. 눈물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도정원도 눈시울이 붉어졌다.병실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저 일정한 의료 기기 소리만 들려오며 시간이 흘렀다.도경욱은 송재이를 빤히 보았다. 그의 두 눈엔 아쉬움과 죄책감만 남아 있었다.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기 전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미약한 목소리지만 그는 확고한 어투로 말했다.“재이야, 내 딸. 너에게 꼭 해줄 말이 있단다. 네 출생의 비밀과 네 엄마에 관한 얘기야.”송재이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그렁그렁 맺힌 그녀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엄마가 왜요?”도경욱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마치 온몸의 힘을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이 숨겨둔 진실을 정확하게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그때 네 엄마, 그러니까 서지원의 약혼 상대는 내 형이었단다. 네 큰아버지지. 하지만 운명이 장난을 쳤지. 서지원이... 네 엄마가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나였단다.”송재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생에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거죠?”도정원도 놀란 표정인 것을 보아 처음 알게 된 사실인 것 같았다.도경욱은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렇지만 전부 사실이란다. 난 지원이를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어.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하지만 그때는 이런 추문을 받아들이지 않던 시절이었지.”송재이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감정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아빠, 그럼 대체 왜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신 거예요? 왜 그동안 숨기고 계셨던 거예요?”도경욱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송
박정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박윤찬을 보았다.“그때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아주 똑똑하고 예쁘고 착한 사람이었지. 나한테 아주 특별한 사람이기도 했어. 하지만 어머니가... 어머니가 우리 사이를 반대하셨어.”박윤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어머니가 왜 반대하셨는데? 어머니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이 아니잖아.”박정후가 대답했다.“처음엔 나도 이해하지 못했어. 그때의 난 분명 어머니가 그 여자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또 어쩌면 내가 사랑놀이에 푹 빠져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까 봐 걱정하시는 건 줄 알았어.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어.”박윤찬은 초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어머니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반대하실 분은 아니야.”박정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선 슬픔이 느껴졌다.“그 여자는 성이 임 씨였어. 임씨 가문은 우리 성씨 가문과 오래전부터 원한이 있었지. 이 원한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어. 두 가문의 후대에도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어.”박윤찬은 놀란 모습이었다.“난 임씨 가문에 대해 들어본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어머니도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었다고.”박정후가 말했다.“어머니는 이 원한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길 바라셨던 거야. 하지만 사실상 잊히지 않았지. 임씨 가문과 성씨 가문은 지난 세대에서도 심각한 충돌이 있었어. 두 가문은 사업 경쟁을 벌이다가 더 틀어지게 되었지.”박윤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사업 경쟁이라니?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다는 거야?”“그래, 하지만 지난번 경쟁에서 임씨 가문은 파산당하게 되었지. 그 가문 어르신도 결국 그때 세상을 뜨게 되신 거야. 임씨 가문에서는 우리 성씨 가문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벌여 그런 비극을 만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박윤찬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러
박정후는 시선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더니 생각에 잠겨 버렸다.그는 나직하게 말했다.“제가 멀리 떠나기로 결정한 건 저와 윤찬이 사이에... 오해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랑 윤찬이 사이에 갈등이 있었는데 전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윤찬이 곁을 떠났죠. 하지만 혈연관계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거잖아요.”묵묵히 박정후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던 송재이는 박정후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느꼈다.송재이가 말했다.“가족 사이에 확실히 갈등이 생길 수도 있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서로 항상 응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죠.”설영준은 진지한 얼굴로 박정후를 보았다.“정후 씨는 정의를 위해, 동생을 위해 이미 많은 것을 했으니 윤찬 씨도 이해해줄 거예요.”장주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요. 정후 씨가 한 모든 것을 박윤찬 씨가 알게 된다면 분명 아주 자랑스러워할 거예요.”박정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확고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번에 돌아온 것도 윤찬이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서였어요. 그리고 윤찬이와 화해할 기회도 있었으면 좋겠네요.”그들을 도와준 정체 모를 인물은 바로 박정후였다.그는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이번 일로 동생과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고 싶었다.박정후가 말했다.“관계를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윤찬이가 저한테 기회만 준다면 형으로서 책임을 다할 거예요.”그는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박윤찬과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꼭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전 반드시 윤찬이한테 찾아가야 해요.”박정후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윤찬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하든 말든 상관없이 알려주고 싶어요. 전 단 한순간도 윤찬이를 포기한 적 없다고 말이에요.”송재이는 박정후의 손을 잡아
설영준과 송재이는 서도재의 비웃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방 안의 상황을 살펴본 뒤 도망칠 길이나 반격할 기회가 없는지 파악했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조용히 숨어서 행동을 개시하려고 했다.설영준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서도재, 이러면 네가 정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저지른 범죄는 이미 전부 드러났어. 밖엔 경찰들이 깔려 있다고.”서도재의 웃음이 사라지고 표정이 굳어졌지만 빠르게 다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경찰이 깔려 있다고? 넌 내가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거로 보이나 봐? 이 아지트는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거든. 너희들은 도망칠 수 없어.”송재이는 설영준이 방 한구석에 있는 창문에 힐끗 본 것을 발견하곤 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챘다.그녀는 일부러 서도재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럼 우린 여기서 그쪽과 시간을 끌 수밖에 없겠네요. 그쪽 아지트가 먼저 무너질지 아니면 밖에 경찰들이 먼저 쓰러지게 될지 한 번 지켜보자고요.”서도재는 손을 들어 올리며 부하들에게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이때 방 안의 불빛이 꺼지더니 어둠이 내려앉았다.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은 확성기로 말했다.“꼼짝 마!”설영준과 송재이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창문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설영준은 있는 힘껏 발로 창문을 깨버렸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깥엔 이미 에어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서도재는 갑자기 어두워진 주위에 당황스러워하면서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불빛이 다시 켜졌을 땐 설영준과 송재이는 이미 사라졌다.그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쫓아가! 반드시 두 사람 내 앞에 잡아 와!”그러나 서도재의 부하들이 아지트에서 나가자마자 이미 밖을 포위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게 되었다.알고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미리 익명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경찰은 확성기로 말했다.“안에 있는 사람 모두 들으세요. 당신들은 포위되었습니다.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