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은 한두 번 만났을 뿐인데도 첫눈에 정이 가는 경우가 있다.하물며 송재이는 한때 도경욱이 자신의 친부이고 도정원이 오빠라고 생각했었다.결국 오해였다는 걸 알게 됐지만, 도씨 가문의 부자와 연우를 떠올리면 왠지 모르게 특별히 친근하고 마음이 따뜻해졌다.이제 아저씨가 뇌출혈로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속이 타들어갔다.예전 학창 시절, 친하게 지냈던 친구의 아버지도 같은 병을 앓았었다.그녀는 이 병이 얼마나 심각한지 잘 알고 있었다. 응급 처치로 살아났다 해도 재발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송재이는 당일 비행기 표를 구해 곧바로 형주로 날아갔다.......형주시 제일 병원.송재이가 도경욱의 병실에 도착했는데 도정원뿐만 아니라 설영준도 있어 놀랐다.그는 창가에 서 있었고, 역광으로 인해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송재이가 들어오자마자 그를 눈여겨봤지만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도경욱은 헐렁한 환자복을 입고 있었고, 몇 달 만에 보니 많이 야위어 있었다.뇌 수술을 막 마친 터라 머리카락이 밀려 있었고 두꺼운 붕대로 감겨 있었다.송재이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손을 잡고 “아저씨”라고 불렀다.도경욱도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눈앞의 송재이를 보며 그의 눈빛이 흐릿해졌다.그 순간 송재이는 이상하게도 도경욱이 자신을 통해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그는 누구를 보고 싶어 하는 걸까?바로 그때, 문 밖에서 귀여운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송재이가 고개를 돌리자 연우가 문가에 서 있었다.온화한 인상의 중년 아주머니가 연우의 손을 잡고 있었는데, 아마도 도정원이 고용한 보모인 듯했다.송재이는 잠시 멍해졌다가 다시 연우를 보며 놀란 듯이 말했다. “연우, 너... 말을 할 줄 알게 됐구나?”연우도 송재이를 보고 분명히 놀란 듯했다. 순진한 얼굴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스쳤다.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기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달려와 허리를 껴안았다. “선생님!”송재이는 몸을 숙여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도진욱은 도정원이 자신의 손을 잡는 힘을 느꼈다.그는 눈을 내리깔고 한 번 보더니 다시 웃으며 말했다. “좋아.”떠나기 전 병상 옆으로 가 도경욱과 인사를 나누고 나서야 돌아섰다.도진욱은 친절하게 그를 동생이라고 부르며 남들 앞에서 형제 간의 정을 과시했다.도경욱과 도정원은 둘 다 말이 없었다.아마도 그들만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범상치 않은 기품을 지닌 이 남자가 사적으로는 어떤 면모를 지녔는지를.도진욱.도씨 가문의 장자로, 당시 도경욱이라는 사생아를 가장 심하게 억압했던 사람이었다.도정원이 어렸을 때는 이 큰아버지에게 암살당할 뻔한 적도 있었다.도정원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가문의 밑바닥에서 신분 상승까지 한 것은 거의 기적이나 다름없었다.......도진욱은 웃는 얼굴의 호랑이 같은 모습이었다.돌아서서 막 나가려는 순간, 그의 발걸음이 멈추더니 시선이 옆에 서 있는 송재이에게 향했다.그의 눈빛이 깊어지며 말했다. “당신은...”송재이도 그의 시선이 갑자기 자신에게 향할 줄은 몰랐다.그녀의 예민함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람이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어딘가 낯익었다.마치 그녀가 처음 도경욱을 만났을 때, 도경욱도 이렇게 탐색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던 것 같았다.비슷하면서도 달랐다.도경욱이 그녀를 바라볼 때는 마치 자체 발광하는 필터가 있는 듯했다.하지만 도진욱은... 눈빛이 날카로워 단 한 번의 시선으로 그녀를 산 채로 삼킬 것 같았다.송재이는 마음을 다잡고 그에게 억지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도정원의 친구고, 예전에 연우의 피아노 선생님이었어요.”“그래요?” 도진욱은 시선을 거두고 생각에 잠겼다가 잠시 후 고개를 들고 웃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정원이 큰아버지입니다.”“정원아.” 병상에 누워있던 도경욱이 갑자기 말을 꺼내 도진욱의 말을 끊었다.그는 침착한 어조로 도정원에게 말했다. “나 좀 쉬고 싶구나. 너 큰아버지를 모시고 나가 주렴.”도진욱은 나중에
도진욱이 자리를 뜬 후, 병실은 잠시 조용해졌다.송재이가 앞으로 나서며 아까보다 훨씬 피곤해 보이는 도경욱을 향해 말했다.“아저씨, 피곤하시면 저희 먼저 가보겠습니다. 편히 쉬세요.”“아닙니다, 송 선생님. 저를 위해 특별히 남도에서 돌아오신 거 압니다. 정원이가 괜히 호들갑을 떨어서는... 이왕 오셨으니 남으셔서 저랑 많은 대화를 나누시죠.”도경욱이 도진욱을 바라보는 눈빛에서는 경계심만 가득했는데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송재이를 바라보는 도경욱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송재이는 옆에 있는 병상에 앉아서 도경욱과 함께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설영준은 옆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차가운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다.그는 도정원이 왜 도경욱이 아플 때 송재이를 불렀는지 잘 알고 있었다.또한 도경욱이 송재이를 바라보는 눈빛이 왜 그리 자애롭고 복잡한지도 잘 알고 있었다.송재이가 친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상황에서도 도경욱은 여전히 그녀에게 진실을 알려주지 않고 있었다.도진욱을 본 그 순간, 설영준은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도진욱을 어렵사리 배웅하고 돌아온 도정원은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설영준을 마주했다.설영준이 입을 열었다.“재이는 아저씨랑 얘기 나누고 있어요. 방해하지 마시고 잠시 저 좀 보시죠.”도정원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설영준은 먼저 병실을 나섰다.복도 끝 문을 열자 밖에 큰 베란다가 나타났다.도정원이 올라올 때, 설영준은 막 담배를 피우려던 참이었다.뒤에서 인기척을 들은 그는 담배를 든 손을 자신도 모르게 멈추었다가 나중에야 불을 붙였다.“재이의 신분에 대해 알려주실 거예요?”설영준이 물었다.설영준은 송재이가 도정원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안 이후 처음으로 도정원과 허심탄회하게 이 화제에 관해 얘기를 나누는 것이었다.도정원도 놀라지 않았다.그는 평소에 담배를 잘 태우지 않았지만 도경욱이 수술하는 동안, 아버지가 죽을 고비를 넘기는 것을 보면서 아들인 그로서 겉으로는 담담해서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도정원은
돌려받은 설영준은 아연실색하여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도정원은 살짝 웃고 돌아서서는 빠른 걸음으로 떠났다.이번에 송재이는 도경욱을 보기 위해 특별히 돌아온 것이었다.그녀는 자신이 왜 도경욱에게 그렇게 알 수 없는 따뜻함과 친근감을 느끼는지 몰랐다.도경욱이 퇴원할 때까지 경주에 며칠 더 머무를 생각이었던 송재이는 이튿날 도정원의 연락을 받았다.“마침 오늘 남도로 출장 가야 하는데 오늘 돌아가실 거면 제가 바래다 드릴게요. 가실래요?”도정원이 친절한 태도로 물었다.‘어? 이렇게 빨리?’송재이가 답하기도 전에 도정원이 말을 이었다.“아버지의 상태는 안정되어 며칠만 더 병원에 입원해서 관찰하고 집으로 모시면 돼요. 만약 돌아가고 싶지 않으시다면 며칠 더 머무셔도 돼요. 송 선생님께서 경주에 미련을 갖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도정원의 마지막 말은 송재이의 마음이 찔리게 했다.그녀는 스스로 설영준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를 보지 못했을 때만 그런 것처럼 느껴졌다.어제 병원에서 만난 두 사람은 비록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어젯밤 잠든 후, 송재이는 뜻밖에서 밤새도록 설영준과 관련된 꿈을 꾸었다.설영준을 보기만 하면 그동안 정리했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무너질 것 같았다.송재이는 못난 자신이 매우 싫었다.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설영준과의 접촉을 줄이는 것이었다.어젯밤 꾼 꿈을 떠올린 송재이의 얼굴은 어느새 빨갛게 변했다.그녀는 한 손으로 자신의 뺨을 매만지며 도정원에서 답했다.“아닙니다. 경주에 미련은 없습니다. 오늘 몇 시에 남도로 가시는 거예요? 태워주세요.”도정원이 멈칫하더니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오후 세 시에 떠나려고 하는데 제가 데리러 갈까요?”“좋아요.”송재이가 답했다.핸드폰으로 시간을 살펴보니 이제 겨우 오전 10시였다.그녀는 떠나기 전에 묘원에 한 번 더 가고 싶었다.오랫동안 어머니 성묘를 못 했는데 성묘를 마치고 돌아와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오늘 남도로 돌아갈 수 있다는 송재이
송재이의 상상력이 풍부해서가 아니라 설영준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 정말 이 집안의 좋은 가장 같았다.친밀하고 네 것, 내 것 구분이 없는 듯한 느낌이었다.송재이는 설영준의 그런 당연한 듯한 태도가 불편하고 내키지 않았다.하지만 그녀는 그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설영준이 그녀를 바라볼 때야 그녀는 한마디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필요 없어!”설영준은 가볍게 웃었다. 마치 아이를 돌보는 어른처럼 송재이의 반응을 하나도 신경쓰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설영준은 집 안으로 들어서 수중의 아침을 한쪽에 내려놓았다.그는 사 온 아침을 하나둘 꺼내며 송재이에게 말했다.“일단 아침 좀 먹어. 다 먹고 마트 가서 전등 하나 사 오자.”송재이는 오후면 떠날 예정이어서 이 집에 살지 않아 등을 수리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그녀는 괜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하지만 설영준에게 더 반박하고 싶지도 않아 그저 그가 하려는 대로 내버려두었다.자리에 앉고 나서야 송재이는 그가 사 온 아침이 계란 후라이, 샐러드, 과일 주스 등 그녀가 좋아하는 메뉴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아침을 먹지 않은 설영준도 자리에 앉아 조용히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창밖의 햇살은 따뜻하고 눈부셨다.송재이는 시시때때로 설영준을 바라보았으나 마음속의 말은 굳이 먼저 꺼내지 않았다.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설영준의 질문이 들려왔다.“갑자기 트러블이 나기라도 한 거야?”송재이는 샐러드를 먹다 체할뻔했다.지난번 서유리와 영상통화 할 때의 모습도 설영준에게 들켰었다.송재이는 당연히 자신의 볼품없는 모습을 설영준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몰라.”송재이는 고개를 숙인 채 대충 대답했다.“그 며칠 동안은 지민건이 보살펴 준 건가?설영준이 또 물었다.송재이는 수중의 젓가락을 집어 던지며 고개를 들어 설영준을 바라보며 분노 섞인 말투로 물었다.“왜 또 그 사람 얘기야?”“물어보면 안 돼?”“그 사람이 우리 집에서 어떤 짓을 했는지 알잖아.”멈칫한 송재이가 말을
송재이가 힘껏 설영준의 입술을 깨물었다.그가 아픔을 느끼며 멈칫할 때, 송재이가 힘껏 그를 밀쳐냈다.“영준 씨! 우리는 이미 헤어졌어!”설영준이 가볍게 웃으며 송재이가 깨문 그 자리를 혀로 훑었다.“헤어졌다고 해서 잘 수 없는 건 아니잖아?”말을 마친 설영준이 송재이를 안고 그녀의 반항에도 불구하고 침실로 향했다.설영준의 뻔뻔한 말에 송재이의 얼굴이 빨개졌다. ‘헤어졌다는 의미를 모르는 건가?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나한테 이런 행동을 하는거지?’송재이는 설영준에 의해 침대에 눌려있었다.그의 얼굴은 침대 위로 멋대로 흩어진 머릿속에 박혀있었다.송재이의 향을 있는 대로 맡은 설영준은 익숙한 향을 느꼈다. 청량하고 향긋한 향은 깨끗하고 차분한 기운을 느끼게 했다. 설영준은 저도 모르게 몸을 잘게 떨었다.설영준의 손이 그녀의 옷 속을 막힘없이 파고들었다. 거리낄 것은 없었다. 그저 설영준 마음속 깊이 인정하기 싫은 그리움과 애틋함만이 있을 뿐이었다.비록 지금 상황이 갑작스럽기는 했으나 설영준의 기술은 좋았고 체력도 충분했다.침대 위에서 괴롭혀진 그녀는 끝나고 나서야 핸드폰이 계속 울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하지만 그녀는 이미 너무 지쳤다. 온몸이 탈진이라도 한 것처럼 땀에 절여져 있었다.지금과 같을 때 몸무게를 잰다면 한 번에 10킬로라도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았다.송재이는 일어나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일어날 힘조차 없었다. 귀가에서는 어렴풋이 설영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는데 그러고 나서 핸드폰은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그가 누구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지도 몰랐다.송재이도 더 신경 쓸 여유 없이 그대로 잠에 빠졌다.그녀가 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저녁이었다.송재이는 부스스해진 머리를 매만지며 비몽사몽 침대에서 내려오려고 했다. 후들거리는 다리는 그녀에게 잠들기 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일깨워주는 듯했다.침실을 나설 때 마침 설영준은 작은 의자에 서서 전등을 갈아 끼우고 있었다.셔츠를 거둬 올려 탄탄한 팔이 드러나자 형
설영준이 침실에서 이불을 정리하고 있을 때 송재이가 분노에 찬 모습으로 들어와서 침대 주위를 헤집었다.송재이는 침대 아래에 있던 카펫에서 자신의 핸드폰을 찾을 수 있었다.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두 개의 부재중 전화는 모두 도정원에게서 온 것이었다.마지막 통화 기록을 확인해 보니 통화는 수신된 상태였다.불현듯 생각해 보니 당시 설영준이 받은 것 같았다.송재이는 몸을 일으켜 설영준을 바라보았다.“도 전무님한테 뭐라고 한 거야?”“아무 말도 안 했어.”말을 마친 설영준이 큰 보폭으로 침실을 나갔다.“영준 씨!”송재이는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듯한 설영준의 태도에 화가 치밀어 올라 설영준을 향해 다가갔다.그의 옷소매를 잡은 그 순간, 설영준의 핸드폰이 울렸다.“도 전무님이랑 무슨 얘기 했는지 얼른 알려 줘. 오늘 전무님 차 타고 남도로 돌아가기로 했는데 영준 씨 때문에...”“정말 내 탓이야?”분노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송재이를 바라보는 설영준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설영준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보일 듯 말듯 한 미소를 지었다.“먼저 가라고 했어. 네가 자고 있으니 못 일어난다고.”송재이는 눈을 크게 뜨며 말을 더듬었다.“어... 어떻게 그렇게 말해?”설영준은 그녀를 한 번 바라보며 웃고는 몸을 돌려 전화를 받았다.송재이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해졌다.송재이는 도정원이 오해할까 무서운 것보다 이미 설영준과 헤어진 상태에서 경주에 와서 옛 연인과 침대에 올랐다는 사실이 얼마나 헤프게 보일지 걱정되었다.다른 사람이 알게 된다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것 같았다.다행하게도 도정원이 입이 가벼운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다른 사람한테 얘기하지는 않겠지?’하지만 도정원 혼자서 안다고 해도 지금 상황은 무척이나 뻘쭘했다.‘쪽팔려 죽을 것 같아!’앞으로 도정원을 다시 마주할 생각을 하니 송재이는 쥐구멍이라도 찾아서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설영준을 원망하고 있을 때 그녀의 시선이 갑자기 그가 하고 있는 벨트로 향했다.
정아현이 불쌍한 말투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애원했다.“먼 친척 아주머니인데 어렸을 때 저한테 정말 잘해주셨어요. 멀리서 찾아오셔서 애타게 사정하시는데 제가 어떻게 모른 척해요.”“정아현, 나는 네 돈주머니가 아니야.”설영준이 한 자 한 자 차갑게 내뱉었다.정아현은 지금 정말 돈이 필요했다.비록 먼 친척 아주머니라는 핑계를 댔지만, 사실 최근 새로 사귄 남자 친구 때문에 필요한 것이었다.사귀고 나서야 상대방이 도박에 나쁜 취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밖에서는 빚까지 져 빚 독촉이 집 앞까지 찾아왔다.금방 연애를 시작한 정아현은 사랑에 눈이 멀어 남자 친구의 눈물 어린 애원을 쉽사리 거부할 수 없었다.한 바퀴 생각해 봐도 돈을 마련할 만한 사람은 설영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설 대표님, 누가 감히 대표님을 돈주머니라고 생각하겠어요. 저는 빌리는 거예요. 정말이에요.”정아현의 마음을 꿰뚫어 본 설영준이 차갑게 웃었다.잠시 후,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좋아, 조금 있다 송금해 줄게.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어.”말을 마친 설영준이 고개를 돌려 문 하나 사이에 두고 자신을 애타게 쳐다보는 송재이를 봤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송재이는 정아현과 통화하면서 자신에게 웃어주는 설영준이 이해되지 않았다.‘양다리라니.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노네!’설영준이 송재이를 보고 웃어주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정아현에게 말했다.“조건은 간단해. 널 한 번 빌려줘.”“빌려달라고요? 저를요? 어떻게요?”정아현이 궁금하다는 듯이 질문했다.하지만 돈을 빌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설영준은 정아현에게 뭘 하라고 하는 대신 질문을 바꿨다.“송재이라는 여자 알아?”정아현이 멈칫하다 이내 반응했다.정아현은 가십 뉴스에서 송재이와 설영준의 사진을 본 적 있었고 남도에서 송재이를 레스토랑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청순하고 아름다운 외모는 한 번 봐도 잊기 어려웠다.“알죠. 정말 예쁜 피아노 선생님이시잖아요.”정아현이 기억을 되짚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