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지금 기분 같아선 육시준의 얼굴 따위 보고 싶지 않았지만 육시준과 오래 알고 지냈다는 사실을 묘하게 자랑하는 듯한 고주영의 말투에 괜한 승부욕이 불타올랐다.“그럴 리가요.”강유리가 자연스레 육시준의 팔짱을 꼈다.“우리 남편이 어디 친구에 눈 팔려서 와이프를 내버려 둘 사람인가요. 그런데 오늘 동생은 왜 안 데리고 왔어요? 걔도 이런 파티 좋아하는데.”“...”강유리가 성신영을 언급하자 고주영의 표정이 바로 일그러졌다.성신영과 얽혔다는 것 사실만으로 고성그룹은 물론, 연예계에서 그녀의 이미지마저 타격을 입었으니 그 이름이 달갑게 느껴질 리가 없었다.“어머, 주영 씨, 표정이 왜 그래요? 내가 무슨 실수라도...”강유리가 괜히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글쎄요. 동생이 제대로 맞긴 한 건지... 아, 유리 씨, 우리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것 같은데 앞으로 언니, 동생으로 지내는 게 어때요?”의미심장한 표정, 뜬금없는 말에 강유리가 미간을 찌푸리던 그때... 가만히 있던 육시준이 문득 입을 열었다.“친구들 보러 간다면서?”“어?”“김찬석은 이혁이랑 친하고 김찬욱은 경서랑 친해. 난 뭐 대충 가끔씩 연락만 주고 받는 사이고. 딱히 인사 안 해도 되니까 그냥 네 친구들 만나러 가자.”어렸을 때부터 각별한 사이었다는 고주영의 주장을 반박하는 말이었으나 강유리의 포인트는 이상한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아까까지 날 잡던 사람이 고주영이 나타나니 바로 날 따라나서겠다. 왜?’“왜? 나도 당신 친구들 만나고 싶은데 당신은 싫은가 봐?”어젯밤 섭섭함까지 더해져서인지 말투에서 불쾌함이 그대로 들어났다.“강유리, 너 오늘따라 왜 이래?”누구보다 이성적이던 강유리가 왜 오늘은 이렇게 억지를 부리는 걸까? 섭섭한 것이 있는 것은 확실한데 그 이유가 짐작조차 가지 않으니 답답할 따름이었다.“당신이야말로 오늘따라 왜 이렇게 변덕이야?”“...”두 사람이 워낙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눈 탓에 대화내용을 들을 수 없는 고주영은 그저
“와... 와이프요?”“어머, 우린 전혀 몰랐어요. 어쩜 그렇게 감쪽같이 숨기실 수가 있어요.”“에이, 다들 정보력이 좀 딸리시네. 전 진작 알고 있었습니다. 형수님, 저 그 사이에 누구한테도 얘기 안 했습니다?”김찬욱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뭐야? 이렇게 뜬금없이...’갑작스러운 소개에 당황하던 강유리가 표정을 추스르고 대답했다.“찬욱 씨야 우리 도련님과 특별한 사이니까. 당연히 알고 있어야죠.”‘이런... 저분은 아직도 나랑 육경서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알고 있지.’“하하... 저랑 경서가 어려서부터 워낙 친하긴 했죠. 어? 그러고 보니까 걔가 왜 안 보이지?”“여자친구 만나러 갔을걸요?”“...”육시준이 강유리를 와이프라고 소개하자 방금 전까지 그저 무덤덤하게 인사를 건네던 사람들이 훨씬 더 친절하게 다가왔고 속셈이 빤히 보이는 그들의 친절에 강유리는 그저 친절한 미소로 응했다.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누군가 술자리 게임을 제안했다.게임의 룰은 이러했다.자기만 했을 법한 경험을 얘기하고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같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 있을 경우 벌주를 마셔야 하는 게임.게임을 제안한 사람이 먼저 입을 열었다.“난 바람을 피운 적 있다.”“...”‘시작부터 세게 나오네.’하지만 그녀가 보수적이었던 걸까? 놀랍게도 그의 말에 멀쩡하게 생긴 남자들 몇 명이 어색하게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허, 솔직한 건지 뻔뻔한 건지.’두 번째 차례는 김찬욱.주위를 살피던 그가 침을 꿀꺽 삼켰다.“난 내가 게이라고 거짓말을 한 적이 있다.”“...”어색한 침묵이 이어지고 김찬욱이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이 사실을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이런 황당한 경험을 가진 이가 또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 김찬욱이 술을 원샷하려던 그때,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송이한이 술잔을 들었다.모두의 의아한 시선에 그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해명했다.“저도 누군가를 거절하기 위해 똑같은 거짓말을 한 적
남의 연애사보다 더 좋은 안주거리가 있을까?모두의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육시준 대표님과 짝사랑이라니. 그런데 그런 거 치곤 너무 결혼을 일찍 하신 거 아닙니까? 아쉽네요.”“그러니까요. 회장님이 너무 재촉하신 거 아니에요?”“우리 집도 어찌나 닥달인지.”...다들 강유리도 이 자리에 있다는 걸 잊은 건지 한 마디씩 내뱉었고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은 육시준이 입을 열려던 그때, 김찬욱이 다급하게 끼어들었다.“자자, 게임 계속 합시다. 어차피 다 과거형 아닙니까.”“그래요.”다들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느새 묘하게 변한 분위기를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그중에서도 고주영은 육시준의 짝사랑 상대가 본인이라고 확신한 건지 비련의 여주인공이라도 된 듯 슬픈 표정을 지어보였다.한편, 지금 이 순간 입장이 가장 애매해진 강유리는 차갑게 식은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육시준... 그런 거였어?’몰래 주먹을 꽉 쥔 강유리는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누구일까? 우리 대단하신 육시준님께서 짝사랑까지 하게 만든 사람이. 아무리 생각해도 고주영은 아닌 것 같고...’강유리가 몰래 수사를 진행하고 있던 그때, 어느새 육시준의 차례가 되었다.잠깐 고민하던 육시준이 방금 전 김찬욱의 개입으로 하지 못했던 말을 내뱉었다.“엄밀히 말하면 짝사랑은 아니고 그냥 관심 정도?”하지만 너무 늦은 해명은 오히려 분위기를 더 어색하게 만들 뿐이었다.옆에 와이프가 있으니 어떻게든 넘어가려는 거겠지.모두가 동시에 든 생각이었다.“그럼요. 우리 대표님도 남자인데 여자한테 관심가는 거 자연스러운 거죠.”“뭐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아쉽긴 하지만...”“아쉽지 않습니다.”육시준이 단호하게 말했다.“제가 유일하게 관심을 가졌던 여자가 돌고 돌아 제 부인이 되었으니까요.”“허?”육시준의 해명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한 남자의 양심고백인 줄 알았더니 뭐야? 두 사람의 사랑을 자랑하는 거였어?깜짝 놀란 건 강유리 역시 마찬가지였다.육시준의 깊은
하지만 강유리의 머릿속에는 온통 육시준의 말뿐이었다.‘정말일까? 거짓말을 해서 육시준이 얻는 게 뭐지? 내가 어색할까 봐 일부러 그렇게 말한 건가?’온갖 복잡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그때...“피곤해?”귓가에 육시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대충 즐겼으면 이만 갈까?”‘뭐야. 이 말투는. 꼭 내가 떼써서 온 것 같잖아.”“그래. 가!”어차피 이런 유흥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육시준인지라 먼저 자리를 뜨는 것에 다들 딱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아니, 오히려 두 사람이 자리를 뜨면 마음 편히 뒷담화를 할 수 있으니 잘됐다 싶었다.역시나 두 사람이 자리를 뜨자마자 누군가 입을 열었다.“두 사람 전부터 아는 사이였다니. 이래서 인연이 있다는 건가 봐요. 어쩐지 전부터 여자는 가까이 안 하시더라니. 그래서 그런 소문까지 돌았잖아요.”“무슨 소문이요?”“혹시 성적 취향이 남다른 거 아니냐 그런 소문이요. 아니 찬욱 씨도 그런 소문 파다한 거 다 알면서 하필 게이라는 말을 꺼내요. 내가 다 당혹스러웠네.”“참나. 시준이 형 그렇게 쪼잔한 사람 아니거든요.”김찬욱이 어깨를 으쓱했다.“그리고 두 사람이 사귀는 거 진작 알고 있었다고요.”“하긴. 사실이 아닌데 소문 따위가 신경 쓰였겠어요.”“그럼 두 사람 어떻게 결혼한 거예요. 어쩜 그렇게 모두를 감쪽같이 속이고...”“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이중에서는 나름대로 내막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김찬욱이 어깨가 으쓱해져서 이야기 보따리를 풀려던 그때.탕!거칠게 컵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고주영이 심드렁하게 말했다.“그냥 와이프 체면 봐서 변명한 거예요.”그녀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고주영에게 쏠렸다.“오빠가 짝사랑했다는 그 사람, 해외에서 만났고 그 뒤론 만난 적도 없어요. 강유리일 리가.”육미경 역시 같잖다는 표정으로 눈을 흘겼다.“시준이 연애사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송이혁의 비아냥거림에도 고주영은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회장님께서 점찍었
피곤하다는 핑계로 룸을 나선 두 사람을 관리인은 호텔룸으로 안내했다.방에 들어서자마자 육시준은 타이밍 안 좋게 울린 휴대폰을 받기 위해 테라스로 향했고 강유리는 천불을 식히기 위해 냉수부터 벌컥벌컥 마셔댔다.잠시 후, 통화를 마친 육시준의 시선이 강유리의 얼굴을 스쳐 테이블 위에 놓인 빈 물컵으로 향했다.“뭘 봐. 물 마시는 거 처음 봐.”“너 마실 것만 따른 거야?”‘하, 참 기가 막혀서. 분위기 파악 안 돼? 손이 없어 발이 없어.’성질대로 쏘아붙이려던 강유리는 뭔가 떠올린 듯 벌떡 일어서 쿵쾅대며 주방으로 향했다.탁.다시 거실로 돌아온 강유리가 테이블 위에 물잔을 내려놓았다.휴대폰을 확인하며 물을 한 모금 마신 육시준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조금 시네.”‘하, 조금?’분명 식초를 반 컵이나 부었는데 반응이 마땅치 않으니 아예 식초로 물잔을 채울걸 싶었다.“앉아. 우리 얘기 좀 해.”‘하, 얘기? 얘기 좋지.’마침 할 얘기가 한보따리였던 강유리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요염하게 다리를 꼰 그녀가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물었다.“당신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이었네. 낯빛 하나 안 변하고 거짓말이 아주 술술 나와?”“그게 무슨 소리야?”“이제 와서 모르는 척이야? 아까는 이야기를 술술 잘도 지어내더니?”‘뭐? 짝사랑 했던 여자가 돌고 돌아 와이프가 됐다고? 허, 어디서 순정남 코스프레야. 너무 감쪽 같아서 내가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린 줄 알았네.’“우리 처음부터 얘기하자.”육시준이 차근차근 얘기를 이어나갔다.“아까, 뭐? 내가 널 친구들한테 소개하는 걸 피한다고? 왜 그런 말을 했어?”“맞잖아. 처음엔 날 어떻게든 잡으려고 하더니 고주영이 나타나자마자 뭐? 어차피 별로 친한 사람들도 아니니 내 친구들 만나러 가자고? 왜? 고주영이 당신 과거에 대해 다 알고 있으니까 기껏 쌓은 이미지가 무너질까 봐 걱정이라도 됐어?”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쏘아붙이는 강유리의 말을 듣고 있자니 육시준은 머리가 지끈거렸다.이 복잡
하지만 일어나려던 참에 육시준은 그녀를 자기 품속으로 잡아당겼다. 중심을 잃은 강유리는 순간 육시준의 다리 위로 앉아버렸다.화를 내고 있었던 강유리라 이런 육시준의 행동이 무례하게 느껴졌는지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그를 향해 내리쳤다.“짝!”반항할 마음도 없었던 지라 강유리한테 뺨을 맞아버렸다.이렇게 되니 도리어 강유리가 당황하기 시작했고 더는 반항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그의 품속에 안겨져 있었다.쥐 죽은 듯 주위는 조용했다.그녀는 손가락을 움츠리고는 육시준을 향해 물었다.“나…넌 왜 피하지 않았는데? 난 네가 나랑 싸우려는 줄 알고…”“화날 때 때리면 가정폭력이니까.”육시준은 덤덤했다.“조금 진정이 돼?”강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랑 고주영의 사이는 네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이렇게 화를 내는 거면 진짜 바보잖아.”“…”고주영의 꼼수는 애초부터 신경 쓰지 안았다.그녀가 신경이 쓰이는 사람은 그 이름도 모르고 뵌 적도 없지만 계속 육시준 마음 한 쪽에 자리 잡고 있는 사람이다.심지어 육시준은 예전에 그분을 짝사랑했다고 인정했기도 했으니까…“대답해.”강유리는 입을 삐쭉 내밀고 육시준과 눈을 마주쳤다.“네가 짝사랑했던 사람은 내가 아니잖아. 그런데 왜 다른 사람들 앞에서 거짓말한 거야?”“너 맞아. 내가 이런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잖아.”육시준의 대답은 단 일초의 망설임도 없었다.“말도 안 돼!”“네가 방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것 때문이야?”‘…”강유리는 대체 이걸 물어야 할지 넘어가야 할지 밤새워 고민했다.이미 지나 일이라 별거 아니라고 이성이 말하고 있지만 사랑은 이성으로만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서재에 놓인 물건처럼 그분이 항상 육시준 마음의 한쪽에 소중하게 놓여 있는 것만 같았다.심지어 이젠 거짓말을 해가며 날 속이려 하다니. 이렇게 된 이상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게다가 서재에 아직도 그분의 물건이 놓여 있잖아.”“뭐가?”“그 여성용 라이터
그게 중요한 게 아니긴 하다. 중요한 건 따로 있다.“릴리 라이터를 왜 너가 갖고 있어?”“그걸 나한테 물어?”“…”이렇게 뻔한데 물어보면 안 된다고?하지만 육시준의 차가운 눈빛과 마주치면 뭔가 묻지 말아야 할 질문을 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니까 짝사랑했다는 여자가 릴리인 거야?이건 더 말이 안 되잖아, 그럴 리가 없는데…육시준은 일 분에 팔백 번 정도 바뀌는 강유리의 표정을 보고 옆에서 귀띔해 주었다.“Lost클럽 글로벌매치 참가했었지? 그런데 너에 대한 정보를 내가 찾아내진 못했거든. 게다가 네가 쓰던 차가 캐번디시 가문 거야.”“왜 그걸 조사한 건데?”“VIP휴게실에서 누군가 너한테 약을 먹이고 원나잇 했잖아. 그걸 내가 참고만 있을 것 같아?”이 쪽팔린 일이 해외에서 일어난 거였구나.그런데 이거 육청수가 계획한 일 아니야?당한 여자는 고주영이고.잠깐만!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는 것 같은데!그 레이싱매치에서 누군가한테 추월당한 후 승부욕때문에 상대방이랑 사적으로 연락해 한 번 더 겨루기로 했으나 경기장에 도착하자마자 정신을 잃고 말았다.이 일, 그리고 육시준의 운전실력, 게다가 그가 갖고 있은 그 여성용 라이터.갑자기 어떤 생각이 들었다.“설마 네가 그 변태야?”강유리는 격분된 말투가 육시준을 짚으며 말했다.하지만 육시준이 굳은 표정에 다시 손가락을 거뒀다. 그러니까, 진짜 우리가 그 전부터 만났던 사이라고?“날 언제 알아봤는데?”강유리는 아직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지난번 반산 클럽 매치 후에.”“…”강유리는 생각이 났다. 소안영도 전에 그녀한테 육시준이 lost클럽매치 참석자리스트 찾고 있다고 말해줬었는데. 나랑 잔 사람을 찾아내려 했던게 아니라 의심하고 있었던 거였어?주위는 정적으로 가득 찼고 강유리는 방금 육시준이 방안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짝사랑까지는 아니고, 그저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라는 말.관심이 있었던 여자가 돌고 돌아 결국 그의 아내가 되었다니…거짓말이 아니고, 진짜였다
강유리는 삐쭉 내밀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내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내가 앞뒤가 다른 사람이라고 일부러 생각한 게 아니야?”“…”강유리는 입을 다물었다.“아니면 내가 거짓말하고 있는 것 같아? 내가 감정에 있어서 그렇게 솔직하지 못한 사람 같아?”“…”죄책감에 강유리는 고개를 푹 숙였다.화날 때 이런 걸 생각할 겨를이 어디 있겠어.그저 생각나는 대로 다 말해버리는 거지.“이건 그렇다 치자.”육시준이 웬일로 관대해서 그녀는 믿기지 않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림도 없다는 듯 육시준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우리가 한 약속 잊었어?”“약속? 무슨 약속?”전혀 모르는 눈치인 강유리를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육시준이다.“불필요한 다툼을 방지하고 우리 부부 사이의 화목을 유지하기 위해 상대방이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행동이나 말을 꺼냈을 때 특정된 말이나 암호로 신호를 주기.”그럼, 방금 뜬금없이 뽀뽀한 건 그 암호라는 건가?그의 돌발행동에 강유리는 어이가 없어서 더욱 화를 내고 말았는데.무덤덤하게 말하는 육시준을 보고 더 미안해지는 강유리였다.이건 반박할 여지도 없어서…강유리는 뭔가를 결심했다는 듯 다시 말했다.“내가 잘못했으니까, 너도 한 대 쳐.”그러고는 얼굴을 육시준쪽으로 가져갔다. “진심이야?”“응.”마음속의 상처는 메꿀 수 없어도 몸에 입힌 상처는 충분히 갚아줄 수 있다.일부러 한 짓이 아니라 해도 이미 저지른 일이니까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눈을 질끈 감고 한참 기다렸으나 육시준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강유리는 확인하려고 실눈을 떴지만 마침 육시준의 음침한 눈빛과 마주했다.“너…”“됐어.”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도 놓아버렸다.그러니 도리어 강유리가 당황했다.진짜 고작 이걸로 끝이라고?뭐가 됐다는 거지?십분 뒤, 노크소리가 들리고 육시준은 방문을 열어주었다.호텔의 스태프분들이 물건을 전달해 주는 것이 마땅한데 소식을 들은 김찬석이 웬일로 직접 물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