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명의 대화에 갑자기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날 죽이겠다고?”“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그럴 수는 없을 텐데.”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국제킬러들이 벙찐 채 서 있었다.“누구야!”그들은 서둘러 총과 칼을 꺼내 들며 경계했지만 모든 건 이미 늦은 뒤였다.달빛 아래에서 검은 인영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더니 세 킬러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 인영은 오른손을 들어 휘둘렀다.그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칼이 되어 순식간의 삼 인의 목과 몸을 갈라놓는 탓에 세 명은 모두 두 동강이 난 채 숨이 끊어져 버렸다.하지만 오늘 밤 죽여야 하는 게 셋뿐이 아니었기에 윤구주는 시간을 낭비할 수 없어 불빛이 아른거리는 밤길을 스파이더맨처럼 헤쳐가며 고층 건물을 발판 삼아 십 미터씩 뛰어올랐다.아직 윤구주의 기력이 전성기 때처럼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국제킬러 몇십 명쯤 죽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60층 높이의 호텔에 다다랐을 때는 곰 같은 백인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노트북을 펼치고 앉아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 옆에는 마찬가지로 옷을 다 벗어낸 묘령의 여인 둘이 누워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이미 숨이 끊어져 시체마저 차갑게 식어있었다.자세히 보니 바닥에는 속옷들과 채찍 같은 도구들이 널브러져 있었다.두 명의 여자 몸에 울긋불긋하게 난 상처들로 보아 저 백인 남자에게 갖은 수모를 당한 게 분명했다.백인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위스키를 마시며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노트북에 떠 있는 게 바로 윤구주가 탁시현을 죽이는 영상이었다.그 백인 남자가 바로 다크 사이트 랭킹 7위의 파멸자 쿠카였던 것이다.그가 이번에 화진에 온 것도 물론 윤구주에게 걸린 현상금 10억 달러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다.그리고 지금 보고 있는 영상도 쿠카가 6억이라는 큰돈을 들여 어렵게 구한 영상이었다.영상 속의 윤구주는 손가락을 튕기는 것만으로 손쉽게 탁시현을 죽였을 뿐만 아니라 그 시체까지 재로 만들어 버렸다.그 모습을 보건 쿠카는 비록 자신이 다크 사이트 랭킹
다크 사이트 랭킹 7위의 파멸자가 자신이 직접 제작한 총알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총에 넣을 때 갑자기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인영이 유리를 뚫고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Fuck!”“뭐야, 너 어떻게 한 거야! 여기 60층이 넘는데 어떻게 들어왔어!”역시 랭킹 7위의 파멸자답게 쿠카는 윤구주를 보자마자 바닥으로 구르더니 바로 특수제작 총알을 장전한 총을 윤구주를 향해 겨눴다.“너, 너, 누구야!”그리고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묻자 윤구주가 냉소를 흘리며 답했다.“왜, 그걸로 날 죽이기라도 하려고?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윤구주의 말에 벙찐 쿠카가 그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까 영상 속의 남자와 동일인물이었다.그에 쿠카는 눈을 크게 뜨며 말을 더듬었다.“너... 네가 그 현상금 10억의 화진인이야?”“그걸 알았으면 넌 이제 죽어야겠네.”자신을 담담히 쳐다보며 말하는 윤구주에 탑 킬러인 쿠카는 1초도 허투루 쓰지 않고 바로 방아쇠에 손을 올렸다.여기서 더 망설이면 죽는 건 본인이 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이어서 미련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무시무시하게 빠른 속도로 총구를 빠져나간 총알이 윤구주를 향해 날아갔다.C4 화약보다 더 강하고 탱크도 한 번에 폭파시킬 수 있는 총알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데도 윤구주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제 자리에 서서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딸랑!그리고 맑고 청아한 소리가 들리더니 총알이 윤구주의 두 손가락 사이로 안착했다.수천 도가 넘는 붉게 달아오른 총알이 마치 돌덩이마냥 차갑게 식어버린 모습을 보고 다크 사이트 랭킹 7위인 국제킬러는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었다.“이게... 어떻게 가능해?”“이건 탱크도 부숴버릴 수 있는 티탄합금 총알인데?”“그래? 그럼 이거 너한테 돌려줄게.”가소롭다는 듯 웃은 윤구주가 손가락을 튕기자 폭파 소리가 하늘도 울릴 만큼 크게 나며 총알이 윤구주 손에서 터져버렸다.폭발하면서 터져 나온 기운에 호텔의 절반이 날아가 버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총알이었
말을 마친 윤구주가 손가락을 들어 지현을 쿠카의 미간을 향해 던지자 또 한차례의 폭파음이 들리더니 세계 랭킹 7위인 파멸자가 머리부터 산산조각이 나며 죽어버렸다.“한 시간에 스물일곱이네.”윤구주는 칠흑 같은 밤사이로 다시 몸을 숨기며 60층의 호텔을 벗어났다.그 하룻밤 사이에 서남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큰 호텔, 작은 여관, 주민 구역, 목욕탕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그리고 죽은 사람들은 전부 외국인들이었다.죽임당한 모습도 각양각색이었는데 누구는 허리가 잘려있었고 누구는 몸이 다 갈려있었으며 누구는 사지가 멀쩡하지 않았다.그 다양한 시체보다 더 놀라운 건 이 모든 일이 1시간 사이에 일어났다는 것이다.그 짧은 한 시간 사이에 서른 명이 넘는 외국인들이 몰살당했다.그리고 하필 오늘 경찰서가 전체 휴가라 당직을 서는 경찰이 없어 누구도 신고를 할 수가 없었다.그리고 또 지현으로 한 국제킬러를 죽인 윤구주가 이번에는 나이트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그 재수 없는 킬러는 윤구주의 인영도 보지 못한 채 피바다 속에 잠겨버렸다.나이트를 나온 윤구주가 고개를 들어 아직도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이게 64번째네.”“백화궁을 나와서부터 지금까지 64명의 국제킬러를 죽였으니 이만하면 경고가 되었겠지?”윤구주가 이토록 대범하게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는 건 다크 사이트에 경고하기 위함이었다.화진은 모든 고용인과 킬러들의 무덤이 될 거라는 경고.그건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진리였다.그 진리를 알려주고자 윤구주는 모든 경찰들에게 휴가를 준 것이고 또 다들 알 수 있게 킬러들을 잔인하게 죽여버린 것이다.“아직 부족한 것 같은데.”윤구주는 시린 눈으로 차가운 말을 뱉어냈다.“이런 조무래기들 말고 그 대가리를 잡아야겠어. 그래야 국제킬러들에게 제대로 알려주지.”윤구주는 윗사람을 잡을 생각으로 다시 신념술을 썼다.하지만 이번에는 사람을 찾기 위해 쓴 신념술이 아니었다.윤구주는 두 손을 모아 신념에 올챙이
그는 자신의 신식혼인을 이용하여 킬러들의 신해에 각인시켰다.마치 목소리 하나가 그들의 귓가에 윤구주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는 것 같았다.윤구주가 그렇게 하자 서남 여러 지역에 숨어있던 국제 킬러들의 머릿속에 그 목소리가 들렸다.동시에 그들은 윤구주의 위치를 알게 되었다.“현상금이 10억이라고?”“그놈이 드디어 나타났어. 어서 그놈을 죽여야겠어!”이곳저곳의 국제 킬러들이 미친 듯이 윤구주를 향해 달려들었다.백화궁.윤구주가 국제 킬러들을 학살하고 있을 때, 정태웅은 다리를 꼬고 앉은 채로 편하게 백화궁 마당 중앙에 놓인 의자 위에 누워있었다.옆 테이블에는 고급 와인 한 병과 두 가지 음식이 놓여 있었다.“오늘 밤경치가 정말 아름다워. 살인하기 딱 좋은 날이야. 그런데 저하께서는 그 자식들을 몇 명쯤이나 죽이셨을까?”정태웅은 중얼거리면서 땅콩 하나를 입안에 쑥 넣었다.이때 누군가 소리 없이 정태웅의 앞에 나타났다.“지휘사님!”정태웅의 앞에 선 사람은 암부 제36여단 여단장 원건우였다.원건우가 온 걸 봤음에도 정태웅은 여전히 누운 채로 물었다.“조사는 어떻게 됐어?”“지휘사님, 지금까지 저희 암부 구성원들은 64곳에서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죽은 자들은 전부 국제 랭킹에 이름을 올린 킬러들이었습니다.”정태웅은 원건우의 말을 듣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육중한 몸이 빠르게 움직였다.“뭐라고? 64곳? 세상에나, 겨우 1시간 안에 국제 킬러 64명을 죽였다고?”정태웅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그는 윤구주가 1시간 이내에 기껏해야 10여 명을 죽일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킬러들을 일일이 찾아내서 죽여야 했기 때문이다.그러나 64곳에서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말을 들으니 말문이 막혔다.“네. 게다가... 죽은 사람은 64명뿐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총 83명입니다.”원건우가 한마디 보탰다.정태웅은 입을 떡 벌렸다.“세상에, 우리 저하는 신이 틀림없어. 겨우 1시간 사이에 국제 킬러 83명을 죽이다니. 사람을 무 썰듯 썰어버
밤이 되었다.윤구주가 백화궁을 떠난 지 1시간 30분쯤 되었다.이때 서남 외곽 지역의 황량한 언덕에 한 사람이 책상다리를 하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그의 머리카락이 찬 바람에 휘날렸다.환한 달빛이 그의 조각처럼 날카로운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남자는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마치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말이다.그런데 바로 이때, 먼 곳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사람이 그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마치 사냥감을 노리듯 말이다.그들은 윤구주의 신식혼인에 이끌려 국제 킬러들이었다.대충 봐도 3, 40명은 될 듯했다.국제 킬러로서 그들의 몸을 숨기는 실력과 암살 실력은 수준급이었다.어떤 이는 저격총을, 어떤 이는 다른 암살 무기를 들고 있었다.심지어 어떤 이들은 독약을 지니고 윤구주의 주변에 잠복해 있었다.“젠장, 바로 저놈이야?”윤구주에게서 1km 정도 떨어진 풀숲에 엎드려서 배럿 대물저격총을 들고 있던 남자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그의 옆에 엎드려 있는 건 붉은색 머리의 여자였다.여자는 군용 망원경으로 윤구주를 지켜보면서 말했다.“그런 것 같아.”“겨우 저놈 한 명인데 10억을 준다고? 잘못 안 거 아냐?”배럿 저격총을 든 백인 남자가 물었다.“아닌 거 같은데?”“자료에 따르면 저놈이야.”붉은색 머리의 여자가 진지하게 말했다.“젠장, 일단 죽이고 보자.”풀숲에 엎드려 있던 백인 남자는 그렇게 말한 뒤 윤구주에게로 총구를 겨누었다.“거리 1,100야드. 풍속 0.3m/초.”군용 망원경을 든 붉은색 머리의 여자가 엎드린 채로 수치를 읊었다.백인 남자는 조준을 시작했다.윤구주의 머리에 총구가 겨눠지는 순간, 붉은색 머리의 여자가 말했다.“정확해. 쏴도 돼.”탕!귀를 찌르는 소리가 어둠을 뚫었다.총알이 윤구주의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다.눈앞의 두 킬러는 국제 다크 사이트 랭킹에서 유명한 킬러 듀오였다.남자는 특수부대 출신이었고 여자는 남자의 파트너였다.두 사람이 함께 나서서 실패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그러나
정말로 귀신 곡할 노릇이었다.두 사람이 경악하고 있을 때 윤구주가 갑자기 빛나는 두 눈을 번쩍 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이젠 나오지 그래?”그는 말을 마친 뒤 허공에 대고 손가락을 움직였다.그 순간 눈에 보이는 현기가 긴 청색 검의 형태를 갖추었고 그 검은 허공에 호선을 그리며 두 킬러가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아아!”비명이 들렸고 곧 반으로 갈라진 시체 두 구가 풀숲에 널브러졌다.윤구주는 단칼에 두 킬러를 죽인 뒤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하나, 둘, 셋... 총 38명이네. 날 죽여서 상금을 받을 생각이면서 왜 감히 나오지 못하는 거지?”윤구주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밤하늘을 울렸다.캄캄한 어둠 속, 몸을 숨기고 있던 38명의 킬러 중 감히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 모두 윤구주가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다.저격총으로도 죽이지 못하는데 무엇으로 그를 죽인단 말인가?킬러들이 하나같이 꼼짝도 못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앞의 작은 도랑에서 킬러 하나가 소란을 피웠다.“다들 두려워하지 말아요. 여기까지 온 이상 다 같이 저놈을 죽이자고요! 우리가 힘을 합쳐 이놈을 죽인다면 상금 10억 달러를 나눠 갖는 거예요.”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웃통을 벗은 건장한 금발 남자가 사람들 속에서 걸어 나왔다.그가 우지 기관단총을 들고나오자 숨어있던 킬러들도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그들 모두 10억 달러의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누가 10억을 원하지 않겠는가?어떤 킬러는 나무 위에 숨어있었고 어떤 킬러는 풀숲에 숨어있었으며 또 어떤 킬러는 바닥에 구덩이를 파고 숨어있었다.30여 명의 킬러들이 윤구주의 앞에 나타났다.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었으며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계도 있었다.주위에 숨어있던 킬러들은 모습을 드러낸 뒤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윤구주를 바라보았다.그들은 각양각색의 무기를 들고 있었는데 그중 총기가 가장 많았다.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우지 기관단총을 들고 있던 금발의 남자가 먼저 입을 뗐다.
윤구주는 손가락을 움직여 검결을 시전했다. 그의 주위에 있던 현기가 한데 뭉쳐져 청색의 검으로 변했다. 검이 윙윙거리면서 소리를 내자 윤구주는 손가락으로 가리켰다.“죽여!”검은 순식간에 날아갔다.촤악!날카로운 검이 독사처럼 국제 킬러들의 목을 연달아 꿰뚫었다.그렇게 서남 외곽은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했다.처참한 비명과, 죽이라고 외치는 소리, 그리고 총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그러나 이내 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윤구주의 어검술과 함께 그 자리에 있던 킬러들 대다수가 죽었다.윤구주가 킬러들을 학살하고 있을 때, 어둠 속에서 검은색 독뱀 한 마리를 몸에 두른 요염한 여자가 나타났다.그녀는 화진 전 세계 다크 사이트 랭킹 3위인 살모사 아리나였다.잔혹하기 그지없는 그녀는 지금 이 순간, 눈이 휘둥그레진 채 겁에 질린 얼굴로 눈앞의 학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몸을 흠칫 떨었다.“젠장, 젠장! 더는 화진에 남아있을 수 없겠어. 10억은 포기해야겠어!”그녀는 말을 마친 뒤 서둘러 어둠 속으로 달려갔다.도망쳐야 했다.어쩔 수 없었다.백여 명 넘는 킬러가 윤구주의 손에 죽었다. 그러니 아무리 10억이 욕심 나도 감히 덤벼들 수 없었다.아리나가 어둠을 헤치며 도망치고 있을 때 윤구주의 현기로 이루어진 검이 마지막 남은 흑인 킬러를 죽였다. 동시에 윤구주는 신해를 통해 아주 강렬한 정신이 먼 곳에서 도망치고 있는 걸 발견했다.“응? 드디어 고수가 나타났네! 도망치려고? 하지만 과연 내게서 도망칠 수 있겠어?”윤구주는 살모사 아리나가 도망치는 방향을 바라보면서 냉소를 흘렸다. 그는 두 다리에 힘을 줘서 빠르게 아리나를 쫓아갔다.어두운 밤, 누군가 빠르게 도망치고 있었다.그자는 다름 아닌 살모사 아리나였다.아리나는 이미 단숨에 10km 넘게 달렸다. 그녀는 한 어두운 골목길 안으로 숨어 들었다.그녀는 파란색 눈동자로 깜깜한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두려움에 질린 채로 헐떡거리며 말했다.“야크, 어서, 어서 배를 한 척 준비해 줘. 내일, 아니,
살모사 아리나가 은색 나이프를 빼 든 것을 본 윤구주는 덤덤히 말했다.“당신이 바로 전 세계 다크 사이트 랭킹 3위의 살모사야?”“날 알아?”살모사 아리나는 아주 놀란 듯 보였다.“당신 이름이 우리 화진 천망수배록에 나타난 적이 있어. 그래서 기억하고 있지.”윤구주는 계속해 말했다.살모사는 침묵했다.“이제 공격해 봐. 다크 사이트 킬러들이 얼마나 실력이 대단하길래 감히 화진에 쳐들어온 건지 궁금하네.”윤구주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마치자마자 살모사는 곧바로 움직였다.업계 톱이라고 인정받는 킬러로서 살모사는 지금 이 순간 목숨 걸고 싸울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다.모든 기회를 틀어쥐어야 했다.그녀는 은색 나이프를 들고 번개처럼 빠르게 움직여 윤구주의 목을 노렸다.윤구주는 뒷짐을 진 채로 순식간에 몸을 움직였다. 그는 살모사의 나이프가 가까워지자 곧바로 3m 거리를 움직였다.솨아악!다섯 번의 공격이 이어졌다.다섯 번의 공격 모두 번개처럼 빠르고 뱀처럼 무자비했다.번뜩이는 칼날이 윤구주의 몸 위를 지나쳤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매번 공격할 때마다 윤구주는 그녀의 공격을 정확히 피했다.마치 그녀의 공격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말이다.“젠장, 정말 강하네!”살모사는 자신의 공격이 먹혀들지 않자 낮게 읊조리면서 몸을 굴리며 동시에 입에서 녹색 독을 뿜어댔다.윤구주는 자신에게로 뿜어진 독을 향해 손을 움직였다. 그 순간 펑 소리와 함께 독은 차가운 벽으로 날아가서 부딪혔다.견고한 벽 위에 독이 묻는 순간 치지직 소리와 함께 벽이 부식되었다.잠시 뒤, 돌 부스러기가 후드득 떨어졌다.“독? 재밌네!”윤구주는 벽에 묻은 녹색 독을 바라보며 말했다.살모사는 계속해 공격했다. 그는 나이프를 쓰면서 입에서는 녹색 독을 뿜었다.살모사는 독으로 윤구주를 완전히 제압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윤구주가 대충 휘두른 손에서 현기가 손바닥 모양이 되어 살모사의 가슴을 강타했다.쾅 소리와 함께 살모사는 차에 치인 사람처럼 멀리 날아가면서 피를 토했다.
그래서 그가 처음부터 고수했던 길은 결국 결실을 맺지 못한 것인가? 특히 그가 희망을 걸었던 두 장로가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임정설은 큰 충격을 받았다. 혈액이 거꾸로 솟구쳐 올라와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고 그 자리에서 곧장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같은 시각 서울 왕실 피난처. 왕실 일행을 지하 피난처로 호위하던 이홍연은 갑자기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뭐야? 왜 이렇게 마음이 불안하지?” “저기! 아버지는 어디 계셔? 아버지가 곧 온다고 하지 않았나? 어디에 계신 거지?” 이홍연은 왕실의 한 전장 장수를 붙잡고 추궁했다. “전하, 소인도 알지 못합니다. 전하를 피난처로 호송하라는 조서만 받았을 뿐 그 외의 일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공주에게 급하게 질문을 받자 전장 장수는 당황한 나머지 실수로 입을 열었다. “뭐라고? 나를 피난처로 호송한다고?” 이홍연은 경악했다. 그녀가 받은 조서는 분명 왕실 구성원들을 호송하라는 내용이었다. “뭔가 일이 생겼구나.” 이홍연은 상황을 깨닫고 즉시 이곳을 떠나려 했다.“전하!” 수천 명의 금위군이 이홍연을 필사적으로 막아섰다. “다들 물러가라.” 이홍연은 강제로 뚫고 나갈 수 없었고 명령도 듣지 않자 그 자리에서 칼을 빼어 사람을 처치하려 했다. “누가 내 길을 막으면 죽여버리겠다.” 금위군의 병사들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이 받은 명령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홍연을 여기 남겨두는 것이었다. 여섯 번째 공주가 이런 것에 신경 쓸 리 없었다. 바로 칼을 휘둘러 병사들을 베었지만 병사들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여전히 막혀서 안 되자 이홍연은 더욱 단호하게 행동하려 했다. 길을 열지 않으면 피의 길을 열어야 했다. “화진 여섯 번째 공주, 명령을 받들라.”이때 한 명의 전장이 국주가 미리 준비해 놓은 성지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종문 동맹은 우리 화진을 삼천 년간 어지럽혔다. 최근 몇 년 동안 종문 동맹은 끊임없이 여론을 조
단 한 번의 공격으로 화진 역사상 가장 강하다고 불리던 국주 임정설이 단 한 합 만에 패색이 짙어졌다. ‘구구제일 그 경지가 이토록 압도적인 것이었던가.’ 애초에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에 임정설은 자신이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도망칠 시간은 충분했지만 그는 왕궁에 남아 맞서기로 했다. 그는 화진의 국주이기 때문이다. 화진 백성의 신념을 계승한 자이자 백성들이 인정한 왕이며 대통일의 이상을 실현할 자이다. ‘이런 내가 어떻게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칠 수 있단 말인가?’“선비도 기개를 지키거늘. 하물며 국주라면 당연한 일이지.” “하하. 내가 바로 그걸 노린 거다.” “임정설, 너는 네 자존심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될 거다.” “하지만 나는 널 죽이지 않겠다. 우리와 손을 잡아라. 화진에는 진정한 왕이 존재한 적이 없다. 영웅이란 것은 단지 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허상일 뿐. 그리고 이야기는 승자가 써나가는 법이지.” “세상의 본질은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것이다. 고통을 견디는 것만으로 강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거냐?”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며 목소리를 낮췄다. “장수 하나가 패왕이 되려면 수만의 목숨이 희생되는 법. 하나의 통일이란 것은 수많은 시체 위에서 이루어진다.” “오직 분열과 균형만이 화진을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는 길이다.” “백성? 하하. 천하의 흥망이 백성의 뜻에 달렸다고 믿는 거냐?” “화진의 왕이여, 나에게 무릎을 꿇어라.”해청현은 손바닥을 아래로 내리찍었다. 굉음과 함께 강대한 위압이 폭발하며 임정설을 짓눌렀다. “건방진 놈! 화진의 국가는 백성이 있기에 존재하는 법이다. 대나무는 불에 타도 그 절개를 잃지 않으며 옥은 깨져도 그 빛을 잃지 않는다. 나더러 너희 같은 반역자들에게 굴복하라고? 어림도 없다.” 임정설의 외침이 금전 안을 울렸다. “설령 너희가 역사를 조작할 수 있다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반드시 누군가는 오늘 내가 세운 업적을
“너의 근위가 나를 막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아예 그들을 철수시키고 온 거군?”“그런데 왜 너는 떠나지 않았지? 지하 궁전에 숨으면 나조차도 쉽게 찾을 수 없을 텐데.”해청현은 손을 뒤로 모은 채 천천히 국주 앞에 다가갔다. 금계단에 가까워지자 멈춰 서서 의도적으로 국주에게 경례를 올리며 말했다.왕좌에 앉아 있던 임정설은 서서히 일어나며 그와 동시에 헌원검이 검집을 벗어났다.“왕실 근위가 아무리 많아도 결국 무용지물이다.”“내가 왜 도망가지 않냐고? 하하. 네 놈은 내가 왕궁을 떠날 리 없다는 걸 확신했기에 나를 찾으러 온 거 아닐까?” 임정설은 차분히 입을 열며 말했다.금계단 위에서 양손으로 헌원검을 잡고 서 있는 임정설은 마치 태산처럼 해청현 앞에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고 그 자체로 위엄을 풍기고 있었다. “그래? 나한테 이렇게 압박을 줄 수 있다니. 역시 화진의 국주답군. 정말 강한 기세를 지닌 자로구나.” 해청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했다.해청현은 말하며 금전을 천천히 훑었다. “이게 바로 화진의 왕궁인가? 이 궁전은 천 년을 자랑하는 역사를 지니고 있지. 세 번의 왕조가 교체되었지만 여전히 서울에 우뚝 서 있는 이 궁전은 대단한 상징이지.” “화진의 국주가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한 사람의 의지가 수억 명의 생사를 좌지우지하고 온 나라의 재물이 그 사람의 보물이 된다니. 그야말로 즐겁지 않겠어?”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이 생애에 화진의 왕이 될 수 없어. 그래도 두 주를 차지하고 작은 나라의 왕이라도 되는 건 문제없겠지.” 해청현은 자부심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의 말 속에는 종문 동맹의 의도 즉 국토를 분할하고 토를 나누자는 계획이 담겨 있었다. 화진을 다시 삼국시대처럼 만들어 각지의 제후들이 패권을 다투는 시대를 재현하겠다는 것이다. “쿵.” 해청현의 말에 임정설은 분노를 억누르지 못했다. 원래 태산처럼 흔들림 없던 그는 해청현의 말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
경고음이 폭발적으로 울려 퍼졌다. 암부 삼대 거두는 모두 잠시 멈추어 서며 당황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무언가가 고속으로 이동하고 있다.” “레이더에서 아예 사라졌어” “레이더 출력을 강화해.” 통신에서 조종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위 전투기가 이미 배치되어 수송기를 위한 미사일 방어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보고가 이어졌다. “이게 뭐야? 종문 동맹의 자식들이 미사일까지 가지고 있다고? 이런 상황이면 군부 고위직들은 모두 총살감이야.” 정태웅이 격분하며 욕을 내뱉었다. “진정해. 국주가 없다고 생각해? 군부 대원들은 은용위의 감시를 받고 있어. 이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어.” “종문 동맹이라기보다는 외부 세력이 관련된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화진의 중심에 있어. 그들이 어떤 무기를 써서 위성 감시를 피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설령 다른 나라의 땅에서 한 나라의 중요 인물을 암살하려 한다면 그건 국가 전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어.” 천현수가 차분히 분석했다. 민규현은 이미 조사를 시작했고 국토 방어 부서에서는 아무런 이상 징후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당황하지 마라. 이건 종문 동맹이나 외부 세력과는 아무 상관없다.” 윤구주가 차분하게 말했다. “뭐라고요? 저하, 그럼 저 자는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죠?” 정태웅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 자는 내가 불러온 무기다. 다만 아쉽게도 이번 한 번만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윤구주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바로 그때 구름 속에서 천둥이 울려 퍼지며 한 인물이 번개를 가르며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인물은 불꽃과 번개를 뒤로하며 서울을 향해 날아갔다. “훔!” 정태웅과 다른 두 사람은 그 장면을 보고 눈이 저절로 커지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게 사람이야?’ ‘뭐야! 사람이 맞잖아.’ “세상에! 저하, 구구제일이 이렇게 괴물 같습니까? 우리는 지금 만 미터 고공에 있잖습니까.” 정태웅은 혀를 찼다. 이 장면은 인
멀리서 전투기 편대의 굉음이 점점 다가왔다. 그 소리를 들은 현문 시조, 구구제일 해청현마저도 미묘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비록 이곳의 병사들을 손쉽게 도륙낼 수 있을지언정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군대와 강철같은 전력을 상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인간의 힘에는 한계가 있는 법. 그날 전략 미사일이 현문을 폭격하던 순간이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만약 그때 그가 빠르게 달아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재가 되어 사라졌을 것이다. “다행히 서울이 바로 코앞이군. 너희가 감히 서울 한복판에서 그런 무기를 쓸 깡이라도 있겠느냐?” 해청현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현기를 발동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서울 왕궁. 임정설은 해청현의 행방이 포착되었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받았다. “현재 방위군이 총력을 다해 저지하고 있지만 최신 정보에 따르면 그 자는 기갑 합성 부대를 전멸시킨 후 행방을 감췄습니다.” “전문 분야는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맞죠. 암부와 은용위가 이미 출동했습니다...” 아래에서 보고하던 육도진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바보가 아니면 정면으로 맞서지 않겠지. 해청현은 구구제일. 나타날 때는 그림자처럼, 사라질 때는 흔적도 없이. 강철 대군과 정면으로 싸울 이유가 뭐가 있겠어.’ “암부와 은용위로는 역부족이다. 그 자를 찾는다 해도 목숨을 내놓는 것밖에 안 되겠지.” “강철 대군을 동원하는 건 더 말도 안 돼. 저 늙은 여우는 이미 우리 약점을 다 파악하고 있어. 우리가 서울에서 함부로 무력을 사용할 수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임정설은 천천히 일어나 용포를 떨쳐내고 그 아래의 황금 용갑을 드러냈다. “휘익!” 금검이 날카롭게 뽑히자 검의 기운이 퍼지며 왕궁이 강렬한 검의 압박감에 휘청였다. “헌원검.” “그 검은 국주께서 구주왕에게 하사하지 않으셨습니까?” 육도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하. 내가 언제 구주에게 이 검을 줬다고 했나? 그저 잠시 맡겨둔 것뿐
서울에서 삼백 리 떨어진 황량한 산자락. 이름조차 없는 이 산자락에는 은용위와 암부원 백여 명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엄숙했고 어떤 이는 비통과 분노가 뒤섞인 얼굴로 이를 악문 채 피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그들 앞에 선 이는 다름 아닌 견배영. 윤구주는 떠나기 전 서울에 남는 암부를 모두 견배영에게 맡겼다. 윤구주가 견배영에게 남긴 명령은 단 하나. 국주를 지키는 것. 견배영은 그 말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국주가 서울에 남은 이유는 서울을 지키고 윤구주의 남은 혈육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위협하는 존재가 있었다. 바로 도망친 현문 시조. 지난 사흘간 암부와 은용위는 힘을 합쳐 현문 시조의 행방을 쫓아 밤낮없이 움직였다. 그렇게 흔적을 쫓아 도달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견지휘사님, 저희 왕께서 이전에 현문 시조 추격을 중지하라고 명령하셨으나 형제들이 그 명을 어겼습니다...”옆에 있던 한 암부 대장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이곳에 모인 은용위와 암부원들이 이렇게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유는 구주왕의 명령을 어긴 형제들이 이곳까지 추적해 현문 시조의 행방을 알아냈지만 그들이 겨우 소식을 전한 순간 불행히도 참변을 당하고 말았다. 백여 명의 은용위와 암부원들은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모두 전사했다. 각각의 암부와 은용위 대원들은 자신이 속한 부서에 입대할 때부터 언제든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다졌다. 나라를 위해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 죽음은 반드시 의미 있게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현장에 있는 두 부서의 대원들이 분노에 치를 떨고 있는 이유는 그들의 형제들이 죽기 전에 비인간적인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이었다. 백여 명의 형제들이 시체로 나뒹굴며 그들의 몸은 이곳에 처참하게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죽인 자는 다름 아닌 현문 시조였다. 당초 십만 대군이 출동했으나 각종 중무장 대살기조차 현문 시조를 어찌할 수 없었다. 하물
윤구주는 그렇게 말하면서 임정설을 향해 예를 갖추었고 이내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곧장 공항으로 향했다.“구주야.”윤구주의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임정설은 눈가가 촉촉해졌다.두 사람은 단순히 군신의 관계가 아니었다. 임정설은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윤구주를 아들처럼 여겼다.이때 임정설의 뒤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임정설은 손을 움직여 신식을 차단할 수 있는 법기를 치웠다. 그곳에 숨어 있던 소채은의 모습이 드러났다.이때 소채은의 뺨은 눈물로 잔뜩 젖어 있었다.그녀는 윤구주가 출정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화진의 평화를 위한 싸움인데 이런 때일수록 그녀의 존재가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됐기에 반드시 충동을 참아야 했다.“국주님, 구주를 알지 못했던 때로 돌아가고 싶어요. 전 너무 소용없어요. 구주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구주의 발목만 잡으니까요. 그리고 저 때문에 국주님도 서울에 있어야 하잖아요.”소채은은 목 놓아 울었다.윤구주의 곁에 있는 다른 여자들과 비교했을 때 그녀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채은아, 내 제자야. 나는 그동안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많은 것들을 깨달았단다. 지금의 너는 아마 알지 못할 수도 있어. 하지만 때가 된다면 자연스럽게 깨닫게 될 거다. 사랑 때문에 가끔 거사가 지체될 때가 있기는 해. 하지만 생각을 달리 해본다면, 만약 네가 없었다면, 구주가 너처럼 착하고 선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구주는 어떻게 됐을까? 구주는 서슴없이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야. 적을 상대할 때는 심지어 잔인할 정도지. 가장 사랑하는 여자에게 배신당하고, 전우들은 구주 때문에 박해를 받다가 비참하게 죽어갔어. 네가 없었더라면 구주는 정말로 매정하고 무자비한 사람이 됐을 거야. 네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내가 구주를 죽였을지도 몰라. 왕실과 구주왕이 싸우는 것, 그것이 문씨 일가가 가장 처음 계획했던 일이야. 문아름은 교활하지만 너 같은 사람이 나타날 줄은 몰랐을 거야. 너의 존재가 문아름의 계획들을 망친 거야.”임정설이 많은 말을
하지만 심각한 사안이었기에 윤구주는 반드시 상황을 완벽히 장악해야 했다. 이 일에 그의 휘하에 있는 수많은 병사들의 생사가 달려 있었고, 화진 백성들의 존망이 달려 있었기에 절대 경솔하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몇백만 명의 백성들이 피해를 볼 것이다.“국주님, 이제야 국주님이 왜 그동안 매일 수심 가득한 얼굴을 했는지 알 것 같네요. 이 일이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어요.”윤구주가 진국왕이 되는 걸 거절했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구주왕은 정무에 관여하지 않고 싸움만 했다.예전에는 국주가 배후에서 많은 걸 계산하고 획책해 주면 그는 싸움만 했다.그러나 진국왕으로서 병권을 손에 쥐게 된 그는 수많은 일들을 처리해야 했고 그 생각만 하면 윤구주는 머리가 아팠다.다른 한편, 서울 왕궁.임정설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줄곧 윤구주 쪽의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비록 궁 안에 있었지만 화진, 그리고 해외의 일부 상황까지 그는 완벽히 파악하고 있었다.그러나 갑자기 소식이 멈춰서 천옥을 공격한 건지, 안 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서울의 삼십만 병사들도 각 주둔지에서 초조하게 명령을 기다렸다.“구주야, 네 판단이 맞아. 이럴 때일수록 조급해해서는 안 돼. 충분히 고려한 뒤 결정을 내려야 해. 이 결정을 내리는 건 아주 어려울 거야. 나라고 해도 그 정도의 박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아. 네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우리 임씨 일가는 널 전폭적으로 지지할 거야.”비는 계속 내렸고 임정설은 그렇게 왕좌에 앉아 밤을 지새웠다. 날이 밝을 때쯤 육도진이 새로운 소식을 안고 대전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국주님! 구주왕께서 천옥을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저희는 곤륜을 적으로 돌렸습니다!”육도진은 매우 당황했다. 예로부터 각 종문, 심지어 왕실까지 곤륜을 언급할 때는 조심스러웠다.곤륜은 전 세계와 대항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왕실이라고 해도 감히 그들을 적으로 돌릴 수가 없었다.그 말을 듣자 미리
“저하! 서요산 검종에서 말하길 서요산은 칠수방과 연합하여 자운각을 멸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운각의 시조가 서요산 검종 종주의 검에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희 서부 대군이 현문을 함락했습니다. 하지만 현문 시조가 너무 막강했습니다. 현문 시조는 홀로 서부 대군의 포위를 뚫고 도망쳤고 은용위와 암부 쪽에서 사람을 보내 현문 시조를 추격하고 있다고 합니다.”밖에 있던 암부 구성원이 보고했다.“알겠어. 각 종문의 시조들은 대부분 최소 반폭 지존 경지니까 이해해. 은용위와 암부에 추격하러 간 부하들을 철수시키라고 해. 그들로는 그 늙은 괴물들을 잡을 수가 없어.”윤구주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네. 저하, 그리고 은용위 지휘사 견배영이 천옥을 공격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그쪽은 곤륜과 인연이 있기 때문에 저하께서 명령을 내리셔야 움직일 수 있다고 합니다.”암부 구성원이 또 물었다.“조급해할 것 없어. 내가 직접 나설 테니까. 언제 움직여야 하는지 미리 통지할 거야.”윤구주가 대답했다.윤씨 일가의 저택. 윤구주는 선조들의 위패 앞에서 한참을 고민했다. 조금 전 그것이 우연이었을지 아니면 암시였을지 알 수 없었다.“윤상, 우리 윤씨 일가의 시조로 천 년 전 화진 무도의 최강자였지. 심지어 몇 년 연속 무도 도주였어. 윤씨 일가의 기록에 따르면 조상님께서 화진의 무도를 주름잡았을 때 종문 동맹은 무척이나 얌전했다고 했어. 하지만 조상님께서는 도의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이라 종문 동맹을 감화시킬 수 있을 거라고, 그들을 귀순시킬 수 있을 거로 생각하셨지.”“조상님, 어떤 이들은 영원히 개과천선할 수 없어요. 죽이는 게 답이에요. 좋은 기회를 잃어버린 뒤에 다시 손을 쓴다면 너무 늦어요.”윤구주는 작게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당시 손을 썼더라면 지금 같은 일들이 없었을 것이다.더욱 안타까운 것은 당시 윤상이 무도 도주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홀로 성전을 찾으러 서역으로 향했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윤상의 실종으로 윤씨 일가는 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