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임정원에겐 익숙한 모습이었다.강하리는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다가 때마침 구승훈과 두 눈이 마주치고는 시선을 거두어 임정원을 바라보았다.“가요, 들어가서 얘기해요.”임정원은 강하리를 바라봤다.그는 강하리와 구승훈의 최근 상황에 대해 알지 못했고 유일하게 알고 있는 건 구승훈이 최근 인터넷에 올린 첫눈에 반했다는 내용의 고백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두 사람 사이도 그리 좋은 것 같지 않아 보였다.“괜찮아요? 하리 씨랑 저 사람...”강하리가 미소를 지었다.“신경 쓰지 마세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앞장서서 식당으로 들어갔다.구승훈은 정안그룹 대문 앞에 서서 강하리가 임정원과 함께 식당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얼굴이 지독하게 일그러졌다.강하리가 임정원을 찾아갈 줄은 몰랐다.게다가 일부러 보란 듯이 잘 꾸미고 나왔다.그는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비서를 바라보았다.“임정원 씨 결혼했나?”비서는 당황했다.“네?”구승훈은 한손을 주머니에 넣더니 한참 후에 말했다.“가서 정인 로펌 파트너 변호사 임정원이 결혼했는지 알아봐.”비서는 이걸 왜 확인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재빨리 대답을 하고 전화를 걸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측에서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아니요, 구 대표님. 정인 로펌 임정원 씨는 결혼하지 않았고 여자 친구도 없습니다.”구승훈이 웃었다.“그 나이가 되도록 왜 여자 친구가 없는 거지?”비서는 잠시 침묵했다.“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임 변호사님이 대표님과 비슷한 나이인 것 같은데 대표님도 미혼이고 여자 친구가 없지 않습니까?”구승훈은 고개를 숙인 채 미간을 꾹 누르다가 문득 이 여자가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곧 그는 실소를 터뜨렸다.정말 일부러 그랬다고 해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구 대표님, 식사 시간 다 됐습니다.”구승훈은 한숨을 살짝 내쉬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차로 향했다.다만 식사하는 내내 구승훈의 기분이 매우 좋지 않다는 것을 모두가 느낄
구승훈은 이마에 핏줄이 툭 튀어나올 정도로 화가 났지만 그는 지금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일부러 임정원과 정안그룹 밑에서 약속을 잡았다는 걸 알면서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구승훈은 아직도 그녀가 밤낮으로 임정원을 위해 통역을 고민하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이렇게 찾아왔고 그녀는 누가 봐도 그가 찾아오길 기다린 모습이었다.“임정원이랑 일하는 게 그렇게 좋아?”“구승훈 씨, 난 협력할 사람이 필요해. 난 복수를 해야 하는데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우린 각자의 길을 갈 수밖에 없어. 당신이 원하면 함께 아이의 복수를 하는 거고.”강하리는 붉어진 눈으로 말했다.“난 그저 아이의 원수를 갚고 싶을 뿐이야. 그러니 잘 생각해 보고 다시 날 찾아와.”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차 문을 열고 내렸다.구승훈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고 그의 눈빛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이 여자에겐 언제나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 같았다.집으로 돌아온 강하리는 주해찬의 전화를 받았다.“선배?”“하리야, 내일 정신과 의사랑 예약 잡았어.”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 “난 괜찮아요, 정신과 의사 안 만나도 돼요.”주해찬은 한숨을 내쉬었다.“다들 걱정시키기 싫으면 얌전히 가.”강하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네, 알았어요.”강하리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주해찬이 말한 정신과 상담소에 갔고 막 차를 세웠을 때 옆 건물 영아 연구소에 낯익은 차 한 대가 들어오는 것을 목격했다.강하리는 미간을 찌푸렸고 곧 노진우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았다.그의 손에는 유아용품이 잔뜩 들려 있었다.강하리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낮은 목소리로 노진우를 불렀다.“노진우 씨?”노진우는 강하리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몸이 굳어버린 채 강하리를 돌아보았다.“강하리 씨?”강하리는 입술을 다물고 얼굴이 다소 창백해진 채 노진우를 바라보았다.“왜 여기 있어요?”노진우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쳐
그녀는 연구소 입구에 한참을 서 있다가 들어가 보기로 했다.노진우의 아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았고 오랫동안 노진우의 보살핌을 받아왔기에 모른 척할 수 없었다.그래서 한번 찾아가 볼 생각이었는데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경비원에게 제지당했다.“여긴 면회가 허용되지 않습니다.”강하리는 입술을 달싹였다.“죄송합니다.”그러고는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어느 순간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고 강하리는 차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구승훈은 노진우의 전화를 받고 곧장 달려왔다.차에 앉아 멍하니 있는 강하리를 바라보던 그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도로에는 얇은 눈이 쌓여 있었고 강하리는 찰나의 순간 당황하던 노진우의 표정을 생각하며 얼굴을 찡그린 채 조심스럽게 운전했다.신호등 앞에 멈추고 나서야 그녀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다시 시동을 거는데 갑자기 강하리의 휴대폰이 울렸다.구승훈의 전화였다.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하리야, 어떤 차가 따라오고 있어.”강하리는 깜짝 놀랐고 구승훈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오른쪽 뒤에 있는 밴인데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가. 내가 처리할게, 알았지?”강하리는 전화기를 꽉 쥐었지만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알았어.”다시 차에 시동을 걸고 강하리가 천천히 앞으로 달리는데 구승훈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오른쪽으로 천천히 가.”강하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오른쪽 차선으로 직진했고 백미러를 통해 밴이 뒤따라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그녀는 조금도 한눈을 팔지 않으려고 핸들을 꽉 잡았다.하지만 심장은 금방이라도 가슴에서 튀어나올 것처럼 빠르게 뛰고 있었다.강하리는 핸들을 꽉 잡은 채 이따금 뒤따라오는 차를 살폈다.뒤의 차는 그녀가 발견한 걸 눈치챘는지 급가속을 하며 이쪽으로 들이박았고 강하리는 재빨리 액셀을 밟았다.하지만 뒤차는 바짝 뒤따라오고 있었다.“하리야, 속도 줄여!”강하리가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자 오히려 뒤차가 그녀를 향해 돌진했다.
강하리는 창백한 얼굴로 구승훈을 잠시 바라보다가 힘없이 이마를 그의 어깨에 살짝 기대었다.“고마워.”그녀는 구승훈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구승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맙다는 인사를 왜 하냐며 따져 묻고 싶었지만 입가에 차오른 말을 곧바로 바꿨다.“천만에.”곧 경찰이 도착하고 강하리는 조사를 위해 구승훈의 차로 이동했다. 경찰서에 앉은 강하리는 여전히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뜨거운 물 한 컵을 손에 들고 있었다.“무서워?”시선을 내려 그녀를 바라보는 구승훈의 눈엔 가슴 아픈 기색이 가득했다.강하리는 입술마저 하얗게 질려 있었다.“복수를 하기 전에 죽을까 봐 무서워.”구승훈은 가슴이 저릿했다.“하리야, 너...”하지만 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눈앞에 있는 경찰만 바라보고 있었다.조사를 마친 경찰이 두 사람에게 말했다.“두 차가 미리 상의하고 이 아가씨를 노린 것 같은데요.”강하리가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고 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이건 청부 살인인데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을까요?”“최선을 다해 수사하겠습니다.”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였다.강하리를 경찰서 밖으로 데리고 나온 그는 전화 한 통을 걸었다.다른 사람들이 조사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보다 본인이 직접 알아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통화가 끝난 후 그는 강하리를 곧장 병원으로 데려갔다.강하리의 몸 상태를 철저하게 체크한 후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같은 시각 구승재 측에서 다시 전화가 왔고 전화기를 움켜쥔 구승훈의 표정이 굳어졌다.“문씨 가문이야?”강하리가 낮은 목소리로 묻자 구승훈은 침묵하며 그녀를 바라봤다.“문씨 가문이 왜 그랬는지 알지?”강하리는 고개를 들어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알아, 내가 문연진을 건드려서 그런 거잖아.”구승훈은 한숨을 내쉬었다.“알면서도 계속할 거야? 강하리, 네가 기어코 하겠다면 앞으로 이런 일은 수도 없이 일어날 거야. 복수는 너만 해? 네가 복수를 시작하면 그 사람들도 너한테 보복할 거야!”웃고 있는 강하리의 눈가에 눈
강하리는 창밖만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이 강하리를 집에 데려다주며 막 차를 주차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강하리가 시선을 내리고 휴대폰을 바라보니 노진우의 전화였다.강하리가 그를 쳐다보자 구승훈은 자연스러운 태도로 전화를 끊었다.“노진우 씨 해고하지 않았어?” 강하리가 갑자기 묻자 구승훈이 답했다.“근데 애 키우는 게 너무 힘들다며 계속 돌아오고 싶대.”강하리의 입꼬리가 굳어지며 한참이 지나서야 말을 이어갔다.“오늘 노진우 씨를 봤어”구승훈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디서?”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보기만 했다.“구승훈 씨, 나 어디서 만났어?”그녀는 연구소에서 막 나오기 바쁘게 구승훈의 연락을 받았던 것을 기억했다.구승훈은 시선을 돌렸다.“정신과 의사한테 상담받으러 갔어, 요즘도...”강하리는 멈칫하다가 곧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차에서 내렸다.구승훈은 극도로 복잡한 표정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휴대전화를 들고 노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당분간 연락하지 마.”노진우는 잠시 침묵했다. “강하리 씨가 의심해요?”구승훈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강하리가 의심하는지도 모르겠다.그녀는 너무 똑똑하고 지나치게 예민해서 의심하든 의심하지 않든 조심해야 했다.구승훈은 노진우의 전화를 끊고 나서 한참 뒤 미간을 꾹 눌렀다.강하리가 집으로 돌아오니 손연지가 게임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노민우, 이 멍청아. 대체 게임을 어떻게 하는 거야? 가서 때리라고, 왜 자꾸 나만 따라와?”방에서 손연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강하리는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괜한 생각이겠지.아이가 정말 살아있다면 구승훈이 그녀에게 숨길 이유가 없었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하지만 방으로 돌아와서도 그녀는 결국 나문빈에게 전화를 걸었다.“나문빈 씨, 연구소에 대해 알아봐 줘요. 네, 모든 정보와 연
구승훈의 말을 듣던 구승재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강하리가 이 사실을 알면 더 화를 내겠지?나중에 강하리가 진실을 알게 되면 형을 어떻게 대할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그는 살짝 한숨을 내쉬더니 바로 화제를 돌렸다.“문씨 가문에서 이번에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으니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구승훈의 짙은 눈동자가 가늘어졌다.“그럼 감히 움직이지 못하게 해.”문연진은 이틀 동안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특히 오늘은 강하리가 가벼운 상처만 입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저 나쁜 년은 매번 구승훈의 보호를 받는데 왜 그녀는 안 되는 걸까!문연진은 친구들과 술집에서 약속을 잡았고 술집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밖에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그녀는 비틀거리며 차로 가서는 옆에 있던 대리기사에게 차 키를 던졌다.대리기사는 차 키를 받으면서 잠시 눈을 번쩍이더니 곧바로 차 문을 열었다.차에 올라탄 문연진은 곧바로 시트에 기대앉았다.“임페리얼 팰리스.”대리 기사가 대답하고 시동을 걸며 차를 출발시켰다.“아가씨, 눈이 와서 길이 미끄러우니 속도가 느릴 수 있어요. 너무 급한 건 아니죠?”“안 급해.” 문연진이 어눌하게 대꾸하자 대리 기사는 더 말하지 않았다.고급 외제차가 얼마 지나지 않아 시내를 빠져나갔고 시트에 기대앉은 문연진은 진작 잠이 든 지 오래였다.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자신의 차가 외딴곳 한가운데에 주차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이윽고 그녀가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트럭 한 대가 옆으로 돌진해 오며 그대로 추돌했다.“꺄아악!” 처절한 비명이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문연진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문원진은 B시에서 급히 달려왔다.이마와 팔에 붕대를 감은 채 병실 침대에 누워 있는 문연진을 보자마자 그는 피를 토할 뻔했다.“할아버지!”문연진은 문원진을 보자 불쌍하게 외쳤다.문원진의 얼굴은 분노로 파랗게 질렸다.“걱정하지 마, 할아버지가 널 위해 반드시 처리해 줄게!”문원진은 분노에
“구승훈! 너 진짜 우리랑 등 돌릴 거야?”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전 이미 등 돌린 걸로 알고 있는데요.”문원진은 콧방귀를 뀌었다.“구승훈, 내가 정말 강하리를 죽일까 봐 두렵지 않아?”“그럼 제가 문연진을 죽이는 것도 각오하세요.”“너...”“보시다시피 강하리가 입은 모든 부상은 문연진에게 두 배로 돌려줄 겁니다. 그러니 어르신, 행동하기 전에 잘 생각하시고 움직이세요.”구승훈은 그렇게 말한 뒤 전화를 끊고 사무실 문을 열었다.그곳엔 최하영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비서 불러서 마실 것 좀 드릴까요?”최하영이 웃었다.“마실 건 됐고 오늘 좀 볼 일이 있어서 왔어요.”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말씀하세요.”최하영은 빙빙 돌리지 않고 구승훈 앞에 직접 기획안을 내밀었다.“그쪽 아내가 오늘 아침 저한테 보낸 거예요.”구승훈은 깜짝 놀라 황급히 그것을 집어 들고 살펴봤다.놀랍게도 문씨 가문 강북의 합병 기획안이었다.[문씨 가문의 강북 시장은 문연진의 부친이 쥐고 있는데 요즘 해외 에너지 시장에 눈독을 들이고 있으니 제가 덫을 놓아 큰 손해를 보게 하죠. 그러면 문씨 가문의 주식시장은 반드시 폭락할 것이고 그 기회를 틈타 그쪽이 강북의 시장을 집어삼키세요.]“아내분께서 직접 저한테 한 말 그대로예요.” 최하영은 구승훈을 바라봤고 구승훈은 꾹 누르더니 잠시 후 다소 씁쓸한 표정으로 기획안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계획서에는 문씨 가문을 유인하고 문씨 가문의 신뢰를 얻으며 사후에 책임을 회피할 방법까지 명확하게 적혀 있었다.그는 강하리가 똑똑하고 사업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문씨 가문의 강북에 눈독을 들이고 문씨 가문의 뿌리를 건드리며 심지어 이렇게 빠른 속도로 완벽한 계획까지 내놓았다는 사실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더 놀라운 건 그가 거절한 뒤 최하영을 찾아갔다는 거다.평소 최하영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이 일은 또다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진행됐을 것이다
최하영은 정안그룹 건물에서 나와 길가에 주차된 랜드로버로 곧장 향했다.강하리는 운전석에 앉아 눈썹을 치켜뜬 채 최하영을 바라봤다.“어때요?”최하영은 복잡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예상한 거 아닌가요?”강하리는 쓴웃음을 지었다.“네, 예상했죠.”그래도 시도해 보고 싶었다.아이 아빠인데 아이의 복수를 위해 누군가와 손을 잡아야 한다면 그 사람이 구승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은...“기획안 가져가세요.”최하영이 웃었다.“구승훈 씨가 앞으로 구씨 가문 남은 구역은 제 거라네요. 강하리 씨는 뭘 약속하실 거죠?”강하리는 눈을 내리깔고 차갑게 웃었다.“구씨 가문뿐만 아니라 문씨 가문도 당신 것이 될 수 있어요.”최하영은 웃음을 터뜨렸다.“오케이!”그렇게 말한 뒤 그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어 통화 중이던 전화를 끊었고 저쪽에서 구승훈이 눈썹이 찡그렸다.곧 빠르게 최하영의 휴대폰으로 메시지가 도착했다.[나도 똑같이 문씨 가문을 줄 수 있습니다.][늦었어요, 전 약속 지키는 사람입니다.]최하영이 떠난 후 강하리는 나문빈에게 곧장 전화를 걸었다.“L국에 좋은 에너지 프로젝트가 있는데 파트너를 찾고 싶다고 소문을 내봐요.”나문빈은 짧게 대답하며 물었다.“구승훈이 협력하기로 했어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꼭 그 사람과 협력할 필요는 없죠.”나문빈은 혀를 찼다.“그래요. 참, 알아보라고 한 연구소에 대한 정보 가져왔어요.”강하리가 멈칫했다.“어떤데요?”“노민준이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곳인데 미숙아를 전문으로 데려오는 곳이에요.”강하리는 전화기를 꽉 쥐었다.“노진우 씨 아이에 대한 정보는요?”나문빈 쪽에서 서류를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아빠가 노진우인 아이가 있긴 한데 아이는 열흘 전에 데려왔고 엄마가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미숙아로 태어났다고 나와 있어요.”“열흘 전에요?” 강하리의 마음속에 어렴풋이 피어오르던 희망은 순식간에 실망으로 바뀌었고 반짝이던 눈빛이 꺼져 들어갔다.“네.”강하리는 입술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가자 연정이가 강하리를 보고 손을 내밀었다.손연지는 강하리의 쇄골에 난 이빨 자국을 보고는 혀를 찼다.“구승훈은 역시 개다.”강하리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나도 그렇게 생각해.’강하리가 연정이를 안을 때 손연지는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머뭇거렸고 강하리는 눈썹을 치켜올렸다.“왜 그래? 노민우가 연락했어?”손연지가 웃었다.“아니.”“지금까지 연락이 안 왔다고?”손연지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보고 싶지 않아.”강하리가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손연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내 일은 됐고 하리 너랑 주해찬은 어떻게 된 거야?”멈칫하던 강하리가 이내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어제 구승훈의 휴대폰에서 봤던 동영상과 협박 문자가 머릿속에 떠올랐다.“무슨 소문이라도 났어? 아니면 동영상인가?”강하리의 목소리는 눈에 띄게 차가워졌고 손연지는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화제를 바꾸려고 했다.그런데 강하리가 직접 휴대폰을 꺼냈다.“안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손연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강하리가 웃었다.“못 볼 것도 없어. 다른 사람이 날 어떻게 모함하는지 봐야지.”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휴대폰을 클릭한 뒤 보이는 조롱에 얼굴에 머금었던 웃음이 조금은 사라졌다.앞서 구승훈이 요란하게 프러포즈하기 바쁘게 그녀가 다른 남자와 있는 영상이 폭로되었고 인터넷에서는 온갖 험한 말들이 쏟아졌다.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뜨린 강하리가 휴대폰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보지 마, 배고프지? 내가 밥해줄게.” 손연지가 그녀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으려던 찰나 구승훈의 전화가 걸려 왔고 그녀는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구승훈이 오해하진 않겠지?”강하리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안 그래.”그렇게 말한 뒤 강하리는 구승훈의 전화를 받았다.“일어났어?”강하리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구승훈은 곧바로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픈 곳은 없는지, 밥은 먹었는지 물었다
한편, 진태형의 집에서 나온 진시연은 눈가에 맺혔던 눈물이 말끔히 사라졌고 아무도 나오지 않은 집을 돌아보며 가슴 한구석에 서늘한 기운이 올라왔다.결국 진태형에겐 강하리가 더 중요했던 거다.진시연의 눈동자가 내키지 않는 듯 번쩍이며 휴대폰을 꺼내 이정숙에게 전화를 걸려고 할 때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심씨 가문의 셋째 딸 심연청이었다.진시연과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그녀는 진시연의 복수를 위해 얼마 전 사람을 시켜 JM 홈페이지를 해킹하고 강하리를 욕하게 한 장본인이었다.진시연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연청아, 무슨 일이야?”심연청은 직격탄을 날렸다.“강하리랑 구승훈이 혼인 신고한 거 알아?”진시연은 굳어버렸다.“뭐라고?”심연청은 잔뜩 화가 나 있었다.분명 진시연은 구승훈이 강하리와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고 강하리가 구승훈에게 결혼을 거절당한 우스운 꼴을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오늘 할아버지 댁에 도착했을 때 강하리가 구승훈과 혼인신고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게다가 심준호는 그녀를 위해 그렇게 많은 결혼 선물까지 준비했다.분명 그녀야말로 심씨 가문 사람인데 이젠 강하리가 그녀보다 더 많은 걸 누리고 있었다.대체 왜?강하리 그 망할 년이 무슨 자격으로!몇 명의 남자랑 뒹굴었는지도 모를 걸레를 심씨 가문에선 그녀보다 더 귀하게 챙기고 있었다.밤새 화가 나 있던 심연청은 결국 참지 못하고 진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강하리와 구승훈이 혼인신고하고 검색어까지 올랐는데 설마 모르고 있었어?”진시연은 곧바로 전화를 끊고 SNS에 접속했다.인기 검색어에 두 이름이 나란히 걸려 있는 것을 본 진시연은 또다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아빠는 그녀를 버렸고 구승훈마저 강하리가 빼앗아 갔다.강하리.전부 강하리다.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강하리를 둘러싸고 있는 건지!대체 그녀가 강하리보다 못한 게 뭐가 있어서?게다가 구승훈은 정말로 강하리와 혼인신고를 했다. 강하리와 주해찬 사이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건가?진시
강하리를 몇 번이고 건드린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다만 자신을 키워준 진태형이 얼마나 정직하고 의리가 있는 사람인지 너무 잘 알았다.그렇지 않았다면 심미현 때문에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결혼조차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그러니 자신이 한 일을 설사 그가 안다 해도 어쨌든 그가 키운 딸이기에 화를 낼 뿐이라는 걸 알았지만 이번엔 강하리를 위해 그녀조차 버릴 줄이야.진시연은 내내 기다리다가 깊은 밤이슬을 맞으며 돌아오는 진태형을 보았고 눈물을 흘리며 소파에 앉아 있는 진시연을 보고 진태형은 걸음을 멈췄다.하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 그의 표정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야?”진시연은 계속해서 바닥으로 눈물을 떨구었다.“아빠, 이젠 날 버리는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난 아빠 딸이라고 했잖아!”진태형은 눈물을 흘리는 진시연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손을 들어 휴지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몇 살인데 아직도 그렇게 울어?”진시연은 진태형의 마음이 약하다는 것을 알았다.“아빠, 난 그냥 무서워서...”“빨리 눈물 닦고 돌아가서 자.” 진태형이 그녀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덧붙이자 진시연은 충격에 빠졌다.“아빠, 나보고 어딜 가라는 거야? 여기가 내 집이잖아.”진태형은 깊은 분노가 담긴 눈으로 진시연을 바라보았다.“시연아, 내가 기회를 줬잖아. 하리랑 화해하고 잘 지낼 수 있는데 네가 그렇게 안 하고 계속 괴롭혔잖아. 내가 했던 경고를 귓등으로 들은 거야?”진시연은 울어서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이젠 눈물을 치고 멍하니 진태형을 바라보았다.“아빠, 차별이 심하네. 강하리만 아빠 딸이고 난 아니야? 뭐가 됐든 핏줄은 이길 수 없나 봐. 내가 아무리 잘해도 그건 봐주지 않는 거야?”진태형의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갑자기 손을 들어 진시연의 뺨을 내리쳤다.“무슨 짓을 했는지 네가 누구보다 잘 알잖아! 내가 하나하나 나열해 줄까? 이 진태형이 키운 딸이 그런 사람일 줄은 나도 몰랐다.”진
정안그룹 공식 계정에 한 장의 사진이 빠르게 올라왔다.사진 속 여자의 손가락은 섬세한 옥처럼 하얗고 늘씬했지만 남자의 마디가 분명한 손은 소나무처럼 단단했다.깍지 낀 손 뒤에는 사랑스럽게 잠든 꼬마 공주님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전에 프러포즈했을 때 한마디씩 하던 공식 계정에서 또다시 찾아와 댓글은 축복이 쏟아지고 있었다.강하리가 단잠에 빠져 있을 때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이 구승훈과 함께 인기 검색어에 올랐다.구승훈은 SNS의 열기를 보며 눈빛이 암울하게 번뜩이다가 강하리의 입술에 입맞춤하고는 휴대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밖으로 나온 그는 나문빈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부터 진시연의 움직임을 잘 지켜봐요.”나문빈은 혀를 찼다.“구승훈 씨, 첫날밤을 보내지는 않고 왜 자꾸 날 귀찮게...”“남미에서 돌아오고 싶어요?”나문빈은 순간 멈칫하며 마음속으로 악랄한 부부라고 욕하면서도 정작 입 밖으론 아부 섞인 말을 뱉었다.“구 대표님, 결혼 축하드려요. 더 시키실 일은 없으신가요?”“진시연이 정양철과 연락한 적은 없는지 다시 알아봐요.”나문빈은 군말 없이 대답을 마친 뒤 전화를 끊었고 구승훈은 창가에 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한참 후 그는 노민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두 번째 주사를 맞았어.]멀리 연성에 있던 노민준은 그의 메시지를 보고 가슴이 살짝 철렁했다.원래 계획대로라면 첫 번째 주사를 맞으면 최소 열흘은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겨우 며칠이나 지났지?노민준은 순간 메시지에 어떻게 답장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오늘은 그가 혼인신고를 한 날인데 왜 일이 좋은 쪽으로 흘러가지 않는 걸까.노민준은 휴대폰을 든 채 마음이 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축하 메시지를 보내려다 다 지워버리고 다시 글을 썼다.[괜찮아, 안정적이기만 하면 돼.]구승훈은 노민준이 보낸 메시지를 보고 피식 웃었지만 그의 눈에는 웃음기가 조금도 없었다.노민준에게 전화를 걸려고 할 때 갑자기 서재의 문이 열리며 서재의 밝은 빛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몇 번이고 말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신경이 쓰였다.강하리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꼭 해야 하는 건 없어. 이미 했으면 후회하지 마.”손연지는 갑자기 눈물이 나 강하리를 껴안고 울었다.“그냥 그 아이한테 너무 미안해.”강하리는 손연지가 지금 어떤 마음인지 너무도 잘 알기에 부드럽게 토닥여주었다.뭐라 해도 그녀의 아이였다.자신이 어쩔 수 없이 첫 아이를 지웠을 때처럼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아이를 잊을 수 없었다.“앞으로 또 낳을 수 있어. 하지만 그러려면 적어도 지금은 감정을 추슬러야 해. 아니면 어른도 아이도 고통스러울 거야.”강하리가 조용히 한마디 하자 손연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닦았다.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갑자기 휴지가 그녀의 손에 건네졌고 연정이는 손연지를 잡고 일어서더니 휴지를 들고 얼굴에 마구 문질렀다.손연지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짓다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방으로 돌아온 강하리가 침대에 리시안셔스가 가득한 걸 보고 걸음을 멈칫했고 연정이는 침대의 꽃밭에 신나게 몸을 던졌다.구승훈이 문 앞에 서서 혀를 찼다.“밤새워 준비한 건데.”말은 그렇게 해도 목소리에 애정이 가득했고 말을 마친 그도 꽃밭에 뛰어들어 연정이와 장난을 쳤다.한동안 방 안에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고 잠시 후 연정이는 마침내 지쳐서 졸기 시작했다.강하리가 아이를 씻겨주고 달래서 재우는데 잠든 연정이를 본 구승훈은 강하리를 안고 화장실로 향했고 강하리는 깜짝 놀랐다.“그만해! 연정이 깨겠어.”하지만 구승훈은 그녀를 문에 바짝 밀착시켰다.“사모님, 오늘이 우리 첫날밤인데.”남자의 숨결이 순식간에 그녀를 감쌌고 강하리의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그녀는 발끝으로 서서 구승훈의 입술에 키스를 했지만 그저 키스만 하고 바로 떠날 생각이었는데 구승훈은 그녀가 입술을 떼기도 전에 갑자기 큰 손으로 그녀의 목뒤 쪽을 잡고 격렬하게 키스를 퍼부었다.잠깐 욕실에는 거친 숨소리와 강하리의 귀에 요란하게 들리는 심장 박동 소리만 남
심씨 가문에서 나왔을 때 하늘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강하리는 연정이를 안은 채 다소 넋이 나가 있었다.엄마가 살아 계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그녀가 결혼하는 모습을 엄마가 봤다면 얼마나 좋을까.강하리는 마음이 아팠다.심미현은 그토록 이 관계를 지켜주려 했지만 결실을 맺는 걸 보지 못했다.“무슨 생각해?” 구승훈이 갑자기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야.”이렇게 말하면서도 강하리는 갑자기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렀고 구승훈은 황급히 차를 옆에 세웠다.그는 휴지를 꺼내 그녀의 눈물을 계속해서 닦아주면서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그저 울게 내버려뒀다.마침내 강하리는 구승훈의 품으로 뛰어들었다.연정이는 강하리가 우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작은 입을 삐쭉거리더니 덩달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한동안 어른과 아이의 울음소리가 차 안에 울려 퍼졌고 구승훈이 강하리의 눈물을 닦아주는 데만 집중하자 강하리가 알아서 휴지를 뽑았다.“연정이 좀 달래줘.”구승훈은 혀를 찼다.“얘 남편이 아니라 나보고 달래라고? 우리 아내가 질투할까 봐 무서운데.”“좀 진지할 수는 없어?”그래도 구승훈의 말 덕분에 무거웠던 마음이 가벼워졌고 그녀는 눈물을 닦은 후 연정이를 꼭 안았다.연정이도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지만 강하리에게 안기자 고사리 같은 손으로 강하리의 눈물을 집요하게 닦아주었다.강하리는 순간 마음이 시큰거렸다.울어선 안 된다.이젠 엄마가 없지만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엄마, 나에겐 가족이 생겼어.”엄마가 마음속으로 속삭이며 손을 들어 연정이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행복할 거다.손연지는 연정이를 보고 무척이나 반가워했고 연정이도 낯을 가리지도 않는지 그녀를 보며 뭐라고 옹알이를 했다.하얀 얼굴에 큰 눈이 환하게 빛나고 작은 코는 차 안에서 울어서인지 아직 약간 분홍빛을 띠며 말할 때는 입안의 작은 이빨 몇 개가 슬쩍 보였다.손연지는 사랑스러움에 녹아내릴 것 같았다.어떻게 이렇게 귀여운 아이가 있지?아이가 이렇게 예
개자식, 항상 중요한 것만 말하지 않는다.하지만 강하리도 더 묻지 않았다.구승훈이 뭘 하든 그녀를 해칠 일은 없다고 믿었으니까.강하리는 휴대폰 속 영상 아래 적힌 글을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난 후 이렇게 말했다.“구승훈, 난 두렵지 않아.”멈칫한 구승훈은 그 말의 의미를 너무 잘 이해했다.그녀는 두렵지 않다고 했다. 영상이 폭로되는 것도, 남들이 수군거리는 것도.그러니 진시연의 한 마디 협박 때문에 물러서지 말라는 뜻이었다.“우리는 당당하게 서로 사랑하는데 왜 그 여자를 무서워하겠어?”강하리는 구승훈을 바라보았고 그 아름다운 눈동자엔 온통 남자의 모습만 비치고 있었다.구승훈은 마음속이 타들어 가는 듯 뜨거운 고통을 느꼈다.분명 그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누구와 결혼했든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녀는 자신을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여기서 어떻게 물러서겠나.진시연이 앞으로 또 어떤 수작을 부리든 그저 강하리만 지키면 그만이었다.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구승훈이 무기력한 웃음을 내뱉었다.“그럼 지금 혼인신고 하러 갈까?”필요한 서류는 일찌감치 준비해 놓았다.사진을 찍고, 서류를 작성하며 10분 만에 두 사람은 혼인신고를 마쳤고 구청을 나오는 강하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강 대표님, 그렇게 행복해?”강하리가 그를 흘겨보았다.“앞으로 얌전히 살아. 유부남이라는 것 잊지 말고.”구승훈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네, 사모님.”문득 강하리의 가슴에 파문이 일었다.한때는 영원히 가질 수 없는 호칭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이제 진짜로 구승훈의 아내, 사모님이 되었다.두 사람이 차에 올라탔을 때 강하리의 휴대폰이 울렸고 전화기 너머 심준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리야, 오늘 집으로 와.”강하리는 막 집으로 돌아갈 참이었다. 연정이를 본 지 이틀이 지났기 때문에 정말 보고 싶었는데 심준호가 특별히 당부하자 문득 마음이 조금은 불안해졌다.“삼촌, 무슨 일 있어요?”심준호는 낮은 웃음을 내뱉었다.
구승훈은 눈앞에 나타난 강하리를 바라보며 문득 웃음을 참지 못했다.그가 밤낮으로 결혼하길 고대하던 여자가 지금은 마치 그에게 최후통첩을 내리는 것 같았다.감히 거절하기만 하면 평생 후회하게 만들겠다는 듯이.강하리는 책상 뒤에 앉아 미소를 짓는 남자를 바라보면서 가슴이 아릿할 정도로 화가 나서 무심코 책상 위에 있던 물건을 집어 들어 구승훈에게 내리쳤다.구승훈은 깜짝 놀라 황급히 피했고 다시 고개를 들어보니 강하리의 눈은 이미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날 이렇게 가지고 노는 게 재밌어?”구승훈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굳어지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미안해.”그가 손을 뻗어 강하리를 끌어당기려고 했지만 강하리는 한 발짝 물러섰다.자신과 구승훈 사이엔 너무도 많은 우여곡절과 아쉬움이 있었기에 하루빨리 그들 관계를 확정 짓고 남은 날들은 그저 아름답게만 보내고 싶었는데 늘 일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강하리가 피식 웃었다.“이젠 강요 안 해.”말을 마친 그녀가 돌아서서 문밖으로 걸어 나가자 구승훈은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며 서둘러 다가가 강하리의 손을 잡아끌었다.“가지 마, 내가 설명할게.” 남자는 무력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고 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아니에요. 강요하지 않을게요, 구 대표님. 억지로 가져봤자 좋을 것 없으니까.”구승훈의 입꼬리가 파들 떨리며 몸을 굽혀 그녀를 안고 사무실 의자에 앉힌 뒤 두 손으로 의자 손잡이를 잡아 품 안에 가두었다.“일부러 약속 어긴 건 아니야. 먼저 처리할 일이 있었어.”강하리는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고 구승훈은 약간 복잡한 표정이었다.“문자를 하나 받았어.”강하리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그래서?”구승훈은 곧장 강하리에게 휴대폰을 건넸고 영상이 눈앞에서 재생되자 휴대폰을 잡은 그녀의 손이 떨렸다.이런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영상에서 그녀가 주해찬에게 한 말은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강하리는 피식 웃음이 났다.그토록 애정이 담긴
진시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뭐라고요?”구승훈이 비웃었다.“진시연, 계속 그런 식으로 해. 빈털터리로 만들어 줄 테니까.”말을 마친 구승훈은 뒤돌아 떠났고 다시 JM 건물로 왔지만 휴대폰을 손에 쥔 채 강하리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휴대폰에는 강하리가 보낸 답장이 와 있었다.[알았어, 기다릴게.]구승훈은 피식 웃으며 갑자기 주먹으로 차를 내리쳤고 차의 경보음이 순식간에 도심 전체로 울려 퍼졌다.구승재는 정안 그룹 건물에서 황급히 내려와 구승훈의 곁에 다가간 뒤 그의 손에 주사를 건넸고 차에 돌아와 주사를 놓으며 구승훈은 미간을 꾹 눌렀다.“형수님이랑 혼인신고 하러 간다며? 왜 안 갔어?”구승훈은 묵묵부답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우선 영상을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찾아낸 다음 마음 놓고 강하리와 혼인신고를 할 수 있었다.그 영상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았다.당시 강하리는 제정신이 아니었고 설령 그녀가 주해찬을 정말 사랑한다고 해도 그는 그녀를 곁에 두고 싶었다.하지만 강하리의 평판은 고려해야 했기에 남자의 눈이 섬뜩하게 번뜩였다.잠시 후 그는 나문빈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휴대폰 해킹 좀 해줘요.”강하리는 온라인에서 구승훈의 프러포즈를 본 순간부터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회사 직원들도 그녀를 보고 농담을 건네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중 구승훈이 보낸 메시지를 받고 나서야 입가에 번지던 미소가 조금 옅어졌다.강하리는 한참 동안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구승훈에게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기다리겠다고 했지만 문득 그를 기다릴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적어도 오늘은 아니었다.강하리는 휴대폰을 옆에 내려놓고 고개를 숙여 일을 처리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녀는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어 도대체 혼인신고보다 더 중요한 일이 무엇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끝내 전화를 걸지는 못했다.아래층에 있는 남자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고 강하리는 씁쓸한 웃음을 터뜨리며 가슴이 답답했다.남자는 아래층에 있으면서 그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