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고 문원진은 살짝 미간을 찌푸린 뒤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지?”저쪽에서 구정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르신, 우리 만날까요?” ...강하리가 집으로 돌아오자 손연지의 통화 소리가 들렸다.유난히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잠시 당황하다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아마 소 교수겠지.그녀는 손연지를 슬쩍 바라보고는 돌아서서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나문빈은 일 처리가 매우 빨랐고 북유럽 에너지 웹사이트에 L국의 동북구 유전이 개발을 앞두고 있다는 뉴스를 올렸으니 이제 문씨 가문이 미끼를 물기만 기다리면 되었다.그녀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이것은 첫걸음에 불과했다.문씨 가문이든 구씨 가문이든 반드시 피의 대가를 치르게 할 거다!손연지는 전화를 끊고 설렘 가득한 얼굴로 다가와 강하리를 안았다.“하리야! 나 소 교수님이랑 데이트하기로 했어!”강하리는 깜짝 놀랐다.“정말? 언제?”손연지는 윙크했다.“오늘 밤에.”강하리는 얼굴을 찌푸렸다.“둘만?”손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물론이지, 안 그러면 왜 데이트겠어?”강하리가 슬쩍 눈을 번뜩였다.“정말 노민우 씨는 별로야?”손연지는 입을 삐죽거렸다.“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미친놈은 아니야!”강하리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알았어, 그럼 소 교수님하고 데이트 잘해. 하지만 명심해, 술은 안 돼. 술 먹기 전에 주소 알려주면 내가 데리러 갈게.”손연지는 서둘러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넌 집에서 푹 쉬어, 알겠지?”손연지가 나간 뒤 강하리는 씻고 나와서 컴퓨터를 켰다.컴퓨터에는 주해찬이 다운해 놓은 영화 몇 편이 있었고 강하리가 무심하게 화면을 들여다보는데 잠시 후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손연지의 전화인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나문빈이었다.“정양철이 구정우와 함께 프로젝트를 입찰할 건데 내일 오전에 공개 입찰이 있으니 참석하려면 지금 당장 B시로 와야 해요.”강하리는 멈칫했다.“그걸 왜 지금 말해요?”“누가 우리 쪽으로 오는 정보를
그들의 대화를 듣던 노민우의 표정이 굳어지며 문을 열고 곧장 걸어 들어왔다.소영준은 노민우를 보고 처음에는 당황하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노민우 씨, 오늘 웬일로 여길 다 왔네요?”노민우가 웃었다.“마침 이렇게 만나네요. 소 교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왔어요.”소영준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영광이네요, 한잔하실래요?”노민우가 테이블에서 술잔을 하나 들어 올리는데 그가 마시기도 전에 옆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소리쳤다.“엇, 노민우 씨. 그 술잔은 당신을 위해 준비한 게 아니에요.”노민우가 멈칫하다가 곧 웃으며 말했다.“오호, 이 술은 특별한 건가 봐요?”남자가 히죽 웃었다.“오늘 소 교수님이 데리고 온 아가씨를 위해 준비한 거랍니다.”노민우의 얼굴에 싸늘한 기색이 스쳐 지나가며 술잔을 들어 올린 그는 무심하게 소영준의 얼굴에 부어버렸다.“미안해요, 손이 미끄러졌네요.”옆에 있던 여자와 농담을 주고받던 소영준은 갑자기 노민우가 술을 들이붓자 순식간에 안색이 어두워졌지만 그래도 노씨 가문의 체면을 봐서 화를 꾹 참았다. “노민우 씨, 뭐 하는 겁니까!노민우는 웃기만 했다. “이미 말했잖아요, 손이 미끄러졌다고.”그렇게 말하며 그는 와인 잔을 하나 더 집어 들었다.“소 교수님께 배상해 드리면 되잖아요.”소영준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졌지만 결국엔 노민우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테이블에서 휴지를 뽑아 얼굴을 닦은 뒤 와인 잔을 들고 노민우와 잔을 부딪치려는 순간 노민우가 이번에는 소영준의 바지에 술을 흘렸다.하필 액체가 중요 부위 쪽에 흘러내렸고 그제야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노민우, 너 이 자식...”소영준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노민우가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내리쳤다.“내가 뭐?”얼떨결에 맞은 소영준은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너한테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그런데 말을 꺼내기 바쁘게 그의 눈동자가 번뜩였다.“설마 손연지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니지?”소영준은 손
“노민우, 한 번만 더 때리면 내가 너 가만 안 둬!”멈칫하던 노민우는 움직이지 않았고 소영준은 이 틈을 타 노민우의 얼굴에 주먹 두 방을 날렸다.이미 시뻘겋게 물들어 있던 노민우의 얼굴은 순식간에 더욱 일그러졌다.그는 손연지를 힐끗 바라보다가 손을 들고 다시 소영준에게 주먹을 날렸다.손연지는 너무 화가 나서 그의 가슴을 때렸다.“너 미쳤어, 왜 소 교수님을 때려?”노민우가 차갑게 웃었다.“왜 때리겠어, 맞을 짓을 했으니까!”소영준은 옆에서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손 선생님, 앞으로는 감히 선생님과 데이트 못하겠네요.”그렇게 말한 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데 두 발짝도 떼기 전에 노민우가 그에게 발차기를 날렸다.“앞으로 또 손연지 건드리면 그땐 내가 너 죽여버릴 거야!”손연지가 서둘러 그를 끌어당겼다. “노민우, 그만해!”노민우는 손연지를 바라보며 화를 냈다.“저런 쓰레기 같은 자식이 뭐가 그렇게 좋아?”그렇게 말한 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손연지는 너무 화가 났고 소영준에게 다가가 사과를 하려는데 노민우가 갑자기 돌아와서 손연지를 잡아끌었다.밖으로 나온 뒤에야 노민우는 손연지를 노려보았다.“이제부터 소영준이랑 말도 섞지 마.”말을 마친 그가 잠시 멈칫했다.“아니, 앞으로 중앙병원에 출근도 하지 마. 그 쓰레기한테서 멀어져.”손연지는 화가 났다.“노민우, 오늘 제대로 미친 거야?”노민우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소영준이 네 술에 약을 탄 건 알고 있어? 손연지, 내가 조금만 늦게 왔어도 넌 오늘 큰일 났어!”멈칫하던 손연지가 반박했다.“말도 안 되는 소리, 소 교수님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하지만 전보다 한결 낮아진 목소리였다.노민우는 화가 나서 씩씩거렸다.“못 믿겠으면 룸 안에 있던 사람들한테 가서 물어봐. 손연지, 소영준한테 미쳐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손연지는 조금 씁쓸한 표정이었다.“입 다물어.”말을 마친 그녀가 돌아서서 가려는데 노민우는 곧장 그녀에게
손연지가 목을 가다듬었다.“그래도 형이 의학 천재인데 넌 이런 것도 몰라? 노민우, 치질 연고가 부기와 멍을 가라앉히는 데 최고야.”“웃기지 마, 난 안 발라!” 노민우는 죽어도 치질 연고를 바르지 않으려 했다.“너 지금 복수하는 거지? 손연지, 난 오늘 너 때문에 다친 거야.”“네가 미친 걸 왜 내 탓을 해.”말은 그렇게 했지만 손연지는 내심 마음이 불편했다.사실 오늘 데이트 장소에 도착했을 때 소영준이 사람을 많이 부르는 걸 보고 진심으로 데이트하려는 게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속으로 줄곧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노민우가 그 술잔을 언급하기 전까지는.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이 정말 사람을 잘못 보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손연지의 눈동자에 암담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내가 거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어?”노민우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강하리 씨가 나한테 연락해서 너 데려다주라고 했어. 그래도 강하리 씨 눈에는 내가 믿을만한 사람이라는 거지.”손연지는 얼굴을 찡그렸다.“하리는 어디 있어?”“B시로 갔어.”노민우가 그녀를 바라봤다.“손연지, 앞으로는 승훈이한테 그러지 마. 걔가 강하리 씨 진심으로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알아.”손연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그래, 하리를 사랑하겠지. 근데 하리가 받은 상처는 전부 그 사람 때문이잖아. 엄마도 잃고 이젠 아이까지 잃었는데 그런 사랑을 누가 원해?”말문이 막힌 노민우는 순간 할 말을 잃었고 손연지는 자리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넌 몰라. 한밤중에 일어나면 하리 우는 소리가 들리는데 나도 어떻게 위로를 해줘야 할지 모르겠어.”노민우는 심장이 저릿했다.“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손연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래도 그 과정이 너무 힘들잖아. 난 하리가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질까 봐 무서워. 지금은 그래도 복수를 위해서 사는데 정말 언젠가 문씨 가문, 구씨 가문이 다 망하면 그땐 하리가 어떻게 살아갈지 모르겠어.”“그때쯤이면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지
“우리 층에 누가 임신했나 봐요!”“어떻게 알았어요?”“화장실 쓰레기통에 글쎄 임신 테스트기가 있더라니까요!”강하리는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동료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발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수군대는 두 명의 인턴을 바라봤다.그녀가 들어온 것을 발견한 인턴들은 안색이 확 변하면서 곧장 일하러 갔다. 그래서 그녀도 시선을 거두고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핸드폰은 오늘따라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단톡방에 들어가 보니, 화장실 쓰레기통에서 임신 테스트기가 발견됐다는 소식이 벌써 퍼지고 있었다. 회사는 이런 가십거리가 가장 환영받는 곳이기 때문이다.점점 더 많은 사람이 주목하는 것을 보고 강하리는 머리가 찌릿찌릿 아팠다.‘내가 소홀했어. 적어도 종이에 잘 싸서 버려야 하는 건데. 만약 구승훈 대표님이 알게 된다면...’끔찍한 상상에 강하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때 구승훈의 비서가 사무실에 노크하고 들어왔다.“부장님, 대표님께서 찾으세요.”강하리는 책상 아래에 있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강 부장님?”“네, 들었어요.”...대표이사실 앞에 멈춰 서서 강하리는 크게 심호흡했다. 하지만 그녀가 마음의 준비를 끝내기도 전에 구승훈의 전담 비서 신도윤이 사무실 문을 열고 나왔다.“대표님은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강하리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으면서 대답했다.“알겠어요.”대표이사실에는 우드 향 향초를 태우고 있었다. 점심부터 협력사 임원과 술 한 잔 마신 듯한 구승훈은 다리를 꼰 채 의자에 기대어 있었다.반듯한 검은색 셔츠를 입은 그의 모습은 유난히 방탕해 보였다. 지그시 감은 눈도, 여유롭게 힘 풀린 몸도, 마치 정성껏 만든 조각상과 같았다.강하리는 작게 한숨을 쉬면서 생각했다.‘이러니까 주변에 여자가 끊기지 않지. 어느 여자가 이토록 완벽한 남자를 거절할 수 있겠어?’구승훈은 완벽한 사람이었다. 얼굴도, 몸매도, 능력도... 적어도 겉으로는 흠이라고 할만한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오직 강하리만 그
강하리는 허리가 뻣뻣해져 우뚝 멈춰 섰다. 하지만 몸을 돌릴 때는 꽤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제가 맞으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구승훈의 눈빛은 아주 어두웠다. 조금 전 열정이 넘치던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는 듯이 안팎으로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어떡하긴, 병원에 가야지.”강하리의 안색은 약간 창백해졌다. 두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구승훈은 더욱 차가운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강하리, 우리가 정한 룰은 기억하지?”강하리는 몸을 흠칫 떨었다.‘그래... 룰... 우리 사이는 애초에 게임일 뿐이었어. 대표님이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할 리가 없으니까.’강하리는 아주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반대로 구승훈은 구씨 가문의 장손이자, SH그룹의 후계자이다.강하리가 구승훈과 만나게 된 것은 100% 우연이었다.3년 전, 어머니 정서원이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강하리는 급하게 돈이 필요했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친아버지를 찾아가 돈을 빌리려고 했다.하지만 화려한 별장 밖에 꼬박 하루 무릎 꿇고 있다가 기절까지 했는데도, 땡전 한 푼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지나가던 구승훈이 길고양이 줍듯이 그녀를 주운 것이었다.병원에서 눈을 뜬 그녀에게 구승훈은 ‘게임’을 제안했다. 마음 없이 몸만 쓰는 그런 게임 말이다.그때 강하리는 무의식적으로 물었다.“보수는 있어요?”구승훈은 그녀의 속물 같은 모습도 전혀 개의치 않은 듯 피식 웃으며 오히려 칭찬했었다.“똑똑하네.”그렇게 두 사람은 게임을 시작했다.강하리는 꽤 일찍 룰을 파괴했다. 비극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그녀는 게임 파트너를 짝사랑했다.가슴 속에서 퍼져가는 아픔을 애써 무시하고 강하리는 미소를 짜냈다.“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구승훈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그제야 입꼬리를 올리면서 말했다.“강 부장은 똑똑해서 참 좋아.”강하리는 꾸벅 인사하고 그가 눈치채기 전에 재빨리 대표이사실을 벗어났다. 부하직원 안예서는 벌써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릇한 분위기가 점차 무르익으면서 여자는 더욱 애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하리는 그저 힐끗 보기만 하고 바로 시선을 돌렸다.강하리가 들어온 것을 발견한 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리기만 할 뿐 딱히 움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곁에 앉아 있던 동생 구승재가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그는 구승훈의 눈치를 힐끗 보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먼저 말을 꺼냈다.“강 부장도 술 마시러 왔어요?”“네, 안 대표님과 계약을 성사한 기념으로요.”강하리는 그들 속에 끼어들지 않고 구석 자리를 골라 앉았다.“왜 그렇게 멀리 앉았어요? 가까이 와 봐요!”구승재는 겁도 없이 강하리를 부추겼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구승훈과 그녀의 관계를 알았기 때문이다.구승훈은 누가 봐도 곁에 있는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강하리가 들어온 후로부터 그 여자를 대하는 태도도 더욱 차가워졌다.강하리는 아주 예쁘게 생겼다. 분명히 청순한 인상이지만 묘하게 매혹적인 것이, 고리타분한 정장에 비즈니스적인 미소만 지어도 사람의 마음을 홀리기에 충분했다.‘역시 우리 형님 안목이란.’강하리와 같은 여자가 연예계에 진출한다면 거물들과 술자리 몇 번 가지는 것으로 톱스타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강하리는 구승재의 말을 듣고서도 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룸 안의 사람들 속에 섞일 마음은 전혀 없었다. 어차피 구승훈 곁에는 다른 여자가 있으니, 그녀가 다가갈 필요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안현우는 어느샌가 술 한잔 들고 강하리의 곁에 가서 물었다.“강 부장, 한잔할까요?”“아뇨, 저는 몸이 불편해서 물로 대신할게요.”술잔을 받지 않는 강하리에 안현우는 기분이 상했다. 힘들게 만든 자리에서 그녀가 술 한 잔 마셔주지 않으니 말이다.안현우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녀가 취한 틈을 타 무언가 해보려는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시크하게 한 모금도 마셔주지 않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구 대표님, 우리 강 부장 참 시크하죠? 이런 자리에서도 술 한 잔 안 마셔주네요.”구승훈은 천
강하리는 얼음 구덩이에 빠진 것만 같았다. 그래도 구승훈의 뜻은 명확했다. 만약 그녀가 머리를 끄덕인다면 그는 절대 말리지 않을 것이다.‘이제는 내가 떠나도 상관없구나.’강하리는 안현우에게 딱히 관심이 없었다. 예전 같으면 무조건 단호한 말로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따라 어쩐지 받아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이제는 변할 때가 되었다. 배 속에 아이도 생겼으니 말이다. 물론 아이를 이용해 구승훈을 협박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는 애초부터 게임일 뿐이었으니, 책임을 운운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구승훈은 그녀가 협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이번에 생긴 아이는 병원에 가서 지워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처음이 있으면 다음도 있기 마련이기에 문제였다.아이를 원하지 않았던 구승훈은 평소에 꽤 신중하게 피임했다. 번마다 꼭 콘돔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달 하도 거칠게 한 탓에 콘돔이 찢어진 적이 있었다. 비록 제때 피임약을 먹기는 했지만, 결국 아이가 생기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지금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지킬 수 없을 게 뻔했다. 하지만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계속 아이를 지우러 병원에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도 소중한 청춘과 건강을 이렇게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정서원의 병원비라면 이미 꽤 모였다. 구승훈의 냉정함에도 실망할 대로 실망했다.그녀는 더 이상 구승훈과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원래도 결심했던 일이기는 하지만, 그의 대답을 듣고 나니 더욱 명확해졌다.강하리는 구승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또박또박 되물었다.“저 진짜 떠나도 돼요?”“그렇게 묻는다는 건 너도 안 대표의 제안에 관심 있다는 건가?”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강하리는 피식 웃으면서 평소 같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을 했다.“안 대표님의 조건을 들어보고 생각해 볼 의향은 있어요.”쨍그랑!테이블 끝에 놓여 있던 술잔은 구승훈의 다리에 걸리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끄럽던 룸에는 순식간에 정적이 휩싸였다.구승훈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