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겁니까, 말 겁니까?”“사람은 그쪽에서 보내는데 이득은 내 쪽에서 취하는 겁니까?”“구씨 가문은 그쪽이, 문씨 가문은 내가 맡는 걸로 하죠. 어차피 결국 내 결혼 선물이 될 텐데 나한테서 뺏지 마시죠, 최하영 씨?”최하영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결혼 선물이라는 말까지 나왔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전화를 끊은 구승훈은 옷을 갈아입고 심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점심때 밥이나 먹자. 입찰에 대해 할 얘기가 있어.”한편 강하리는 방으로 돌아와 손연지에게 전화를 걸었다.손연지는 비몽사몽인 상태로 전화를 받았고 입을 열자마자 자신의 목소리에 충격을 받았다.강하리도 당황했다.“연지야, 너...”손연지는 2초 동안 멍한 표정을 짓다가 그제야 상황 파악을 마쳤다.노민우는 여전히 긴 팔을 그녀의 허리에 얹은 채 잠들어 있었고 그녀가 뒤를 돌아보니 노민우가 마침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손연지의 머릿속이 요란하게 돌아갔다.그녀가 움직이려는데 노민우가 곧바로 몸을 뒤집어 그녀를 자신의 밑에 짓눌렀다.“또 날 발로 차려고?”손연지는 황급히 전화를 끊고 노민우를 밀어냈다.“비켜!”노민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짓궂게 웃었다.“어젯밤 어땠어, 나쁘지 않았지?”손연지는 그를 향해 눈을 흘기고는 가서 자기 옷을 들쳤다.“그냥 그랬어!”그녀는 노민우 말고는 다른 남자와 경험을 한 적이 없었기에 단순히 느낌으로만 말한다면 나쁘지 않았다.“허!” 노민우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다시 한번 그녀를 품 안에 가두었다.“만족하지 못했어? 네가 내 몸 할퀸 자국을 봐, 좋아서 그런 거 아니었어?”손연지는 그의 어깨에 난 긁힌 자국과 이빨 자국을 흘끗 쳐다보았다.“자기도 즐겼으면서.”노민우는 웃으며 그녀를 놓아주었다. “나도 좋았어, 아주 좋았지. 앞으로 자주 할래?”손연지는 그를 발로 차버리고는 옷을 입기 시작했다.“꺼져!”노민우가 등 뒤에서 혀를 차며 말했다.“좋은데 왜 안 해?”손연지는 그대로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사실 그녀
손연지가 짧게 대꾸하자 강하리는 할 말을 잃었다.무슨 말을 해야 할까.“어젯밤에 또 술 많이 마셨어?”“아니, 제정신이었어.”강하리가 멈칫했다.“근데 왜 또 노민우랑 잤어, 소 교수님은 어쩌고?”손연지는 잠시 침묵했다.“하리야, 내가 잘못 생각했나 봐. 난 소영준이 그래도 나한테 조금은 호감이 있는 줄 알았어.”강하리는 당황했다.“무슨 일 있었어?”손연지는 다소 멍한 표정으로 길가의 작은 돌멩이를 내려다보았다.소영준은 작년에 그녀가 일하는 병원에 왔고 당시 강하리가 유산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는데 그녀가 진료기록을 멋대로 바꾼 것에 대해 구승훈은 따지고 들지 않았지만 결국엔 누군가에 의해 그 일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당시 해고 위기에 처했던 그녀는 소영준이 나서서 그녀의 편을 들어준 덕분에 계속 병원에 남을 수 있었다.그 후에도 소영준은 여러 번 그녀를 도와줬고 왠지 모르게 그녀가 필요할 때마다 항상 소영준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 같았다.그래서 줄곧 소영준이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할 때쯤 그가 연수 신청까지 도와주자 의심은 확신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적어도 어젯밤 전까지는 말이다.데이트라고 해서 나갔는데 방 안에는 남자들이 한 무리 있었고 그들 옆에는 여자가 한 명씩이 앉아 있었다.수위를 가리지 않는 농담들이 마구 오갔지만 소영준은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고 그런 그의 모습이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괜찮아.” 손연지는 왠지 말하고 싶지 않았다.“그쪽 일은 끝났어?”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정말 괜찮아? 소영준이라는 사람...”“하리야, 네 말대로 미리 주변에 알아볼 걸 그랬어.”강하리는 마음이 무거워졌다.“소영준이 너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어?”“아니야, 그 얘기는 네가 돌아와서 하자. 나 가서 쉬고 싶어. 노민우 그 멍청이가 밤새 날 괴롭혔어.”“...”원래는 손연지에게 노민우와 앞으로 어떻게 지낼 건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손연지가 얘기하길 꺼린다는 걸 알 수 있었다.전화를 끊은
강하리는 잠시 고민하다가 승낙했다.한편 연미숙은 차에 앉아 정양철이 강하리에게 접근한 시점부터 강하리가 구승훈의 보호를 받을 때까지의 전 과정이 담긴 감시카메라 영상을 반복해서 보고 있었다.그동안 그녀는 줄곧 강하리에 대해 뒷조사했고 의심이란 게 한번 싹이 트면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는 법이었다.심씨 가문 생일잔치가 끝난 그날부터 그녀의 마음속에는 그런 의심의 씨앗이 뿌리를 내렸다.왠지 모르게 정양철이 강하리만 다르게 대하는 것 같았지만 두 사람이 하는 행동에서는 아무런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특히 얼마 전 강하리에게 그런 일이 생겼을 때도 정양철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괜한 의심인가 싶었는데 며칠 전에 아들 정주현으로부터 정양철이 강하리에 대한 마음을 접으라고 했다는 말을 들으니 의심의 불길이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그래서 오늘 떠보려고 했는데 그 물을 구승훈이 고스란히 막아낼 줄은 몰랐다.연미숙이 얼굴을 찡그리며 휴대폰을 치우려던 찰나 정주현의 전화가 걸려 왔다.강하리가 옷에 관해 물었다는 것을 듣자 그녀의 눈빛이 번뜩였다.“주현아, 강하리 씨랑 식사 약속 한번 잡아.”레스토랑에 도착한 강하리는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정주현뿐만이 아니라 연미숙까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심호흡을 한 뒤 계속해서 걸어왔다.“안녕하세요, 사모님.”연미숙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강하리 씨 얼굴 보기 참 힘드네요.”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정주현은 혀를 찼다.“엄마, 하리 씨 엄청 바빠. 그리고 엄마가 왜 하리 씨를 만나? 두 사람 말도 안 통할 텐데. 만나도 내가 하리 씨랑 만나야지.”연미숙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미소만 지으며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강하리의 시선이 연미숙의 옷으로 향했다.“사모님께서도 오늘 행사장에 오셨어요?”연미숙 역시 부정하지 않았다.“강하리 씨 똑똑하네요.”정주현은 두 사람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두 사람 지금 뭐 하는 거야?”연미숙은 곧바로 웨이터
강하리는 눈앞에 있는 여자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이쯤 되니 정양철에 대한 의심이 좀 더 확실해졌다.정양철은 처음부터 그녀를 겨냥하고 접근한 거다.컵을 잡은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표정만은 태연했다.“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조금 의아해요, 사모님. 정 회장님은 왜 굳이 저를 대양에 데려가신 걸까요? 저와 정 회장님이 불륜 사이라고 의심하는 거면 그런 생각은 일찌감치 접으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전 구승훈도 있는데 정 회장님이 눈에 들어올 리가요. 사모님께서 정 의심이 간다면 본인 남편분에 대해 알아보세요. 왜 하필 연성에 가야 했는지, 왜 저를 끌어들였는지도요.”연미숙의 표정이 어두워졌지만 강하리의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상대의 표정을 살펴보던 강하리는 손을 들어 연미숙에게 물 한 잔을 따라주었다.“사모님께서는 혹시 저의 어머니에 대해 아시나요?”연미숙은 얼굴을 찡그렸다.“강하리 씨 어머님이요?”“네, 저희 어머니도 정 씨거든요, 정서원.”연미숙은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강하리에 대해 이미 뒷조사했기에 당연히 강하리 어머니의 사진도 본 적이 있었다.아주 아름다운 여성이었지만 그녀의 삶은 엉망이었다.혼전임신으로 송씨 가문의 아이를 뱄다가 알코올 중독자 도박꾼과 결혼하고는 교통사고를 당해 오랫동안 혼수상태에 누워 있었다.정양철이 연성에 와서도 그녀와 아무런 접점이 없는 줄 알았는데 강하리가 이렇게 말하자 문득 조바심이 들었다.연미숙은 한참을 찡그리다가 부드러운 웃음을 터뜨렸다.“강하리 씨는 설마 우리 그이가 잘해주는 게 그쪽 어머니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강하리가 웃었다.“저도 추측일 뿐이에요.”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연미숙을 바라보았고 상대도 그녀를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강하리가 입술을 달싹이며 몇 마디 더하려고 할 때 정주현이 밖에서 돌아왔고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었다.각자의 생각에 잠긴 채 식사는 계속됐다. 정주현만 계속해서 강하리에게 안부를 묻고 강하리가 일일이 대답하는 식이었다.연미숙
정주현도 일이 바빠 자리에 더 머물지 않았고 심준호는 떠나는 강하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구승훈을 돌아봤다.“그때 널 도와서 하리 씨를 붙잡은 게 살짝 후회되네.”구승훈은 고개를 숙이고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한참 후 피식 웃었다.“솔직히 나도 후회해.”그때 그렇게 그녀를 놓아줬더라면 지금쯤 그녀와 아이가 무사히 잘 지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심준호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그래도 이미 이렇게 됐는데 후회해봤자 소용없잖아. 현실적으로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하는 게 답이야. 솔직히 나도 하리 씨가 위험해지는 건 싫어. 하지만 지금 하리 씨는 복수에 혈안이 돼 있고 네가 나서서 한 번은 막을 수 있을지 몰라도 계속 막는 건 불가능해.”구승훈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꺼냈다.“한 번이라도 막으면 최소한 그 한번은 위험을 피해 갈 수 있잖아.”심준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 둘 중 대체 누구를 말렸으면 좋을지 모르겠다.구승훈은 강하리를 따라 호텔로 돌아왔고 강하리가 문을 열고 있는데 구승훈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연미숙 만나러 갔어?”그의 말을 무시한 채 강하리는 곧바로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문이 닫히려는 것을 본 구승훈은 곧장 달려가 문을 손으로 잡았다.“강하리, 정씨 집안 사람들이 무슨 목적을 가졌는지 아무도 몰라. 앞으로 따로 혼자서 만나지 마.”강하리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구승훈 씨, 오늘 행사장에서 끓는 물 부으라고 시킨 게 그 여자야. 내가 안 만난다고 그 여자가 날 안 찾아올까? 문제는 무작정 피한다고 해결되지 않아. 그리고 난 이미 충분히 숨고 피해 다녔잖아. 그렇게 피해 다녔어도 우리 엄마, 내 아이까지 결국엔...”그녀는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자 아예 화제를 돌렸다.“정양철에 대해선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겹겹이 쌓여 있어. 하지만 내가 풀려고 하지 않으면 영원히 풀리지 않을 문제야. 내 복수에는 우리 아이뿐만 아니라 엄마도 있어.”구승훈이 미간을 확 찌푸렸
구승재가 다시 강하리에게 전화를 걸어 소영준에 대해 간단히 설명한 뒤 전화를 끊었다.뒤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구승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형, 강하리 씨 정말 소영준이랑 뭐 있는 건 아니겠지?”구승훈은 잠시 침묵했다.“아니야.”그는 손연지가 소영준을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강하리가 절대 소영준과 이러저러한 일로 엮일 리 없다는 걸 잘 알았다.말을 마친 그는 창밖을 내다봤다.조금 전 강하리가 단지 소영준에 관해 물어보려고 했던 것 같지는 않았다.그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요즘 구정우 쪽에선 움직임 없어?”“구정우랑 문원진이 만났어, 둘이 손잡으려나 봐. 구정우는 똑똑해. 처음부터 문원진 찾아갈 수 있었는데 형이 문연진을 다치게 하고 나서야 찾아가잖아.”구승재가 말하며 백미러를 통해 구승훈을 바라보았다.“형, 형도 요즘 조심해. 구정우한테는 형이 타깃 1순위야. 지금 구정우는 서둘러 가주 자리를 이어받길 원하지만 할아버지와 집안 어르신들이 동의하지 않고 다들 형이 돌아오길 바라. 그러니까 구정우는 형한테 손을 쓰겠지.”짧게 대꾸한 구승훈은 손가락으로 손목에 차고 있는 염주를 만지작거렸다.“구정우가 가주 자리를 원한다면 실컷 앉으라고 해. 그리고 함께 부숴버리면 돼.”구승재는 미간을 찌푸리며 반문했다.“형, 정말 구씨 가문을 무너뜨릴 생각이야?”그는 줄곧 구승훈이 구씨 가문에서 나온 건 그저 할아버지를 위협해서 강하리를 받아들이게 만들려는 것이지 실제로 구씨 가문을 망치려 할 줄은 몰랐다.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난 처음부터 진심이었어.”“하지만...”“새로운 구씨 가문을 세울 거야. 구승재, 난 내 아내와 아이들에게 아무도 이래라저래라 하지 못하고 아무도 괴롭힐 수 없는 집을 만들어주고 싶어.”구승재는 목구멍이 꽉 막힌 느낌에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강하리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손연지는 막 잠에서 깨어났다.“하리야, 왔어?” 그녀는 무기력한 상태로 강하리 앞에 앉았다.“어땠어
손연지도 더 이상 말을 할 기분이 아니어서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걸어갔다.“뭐 먹고 싶어, 내가 만들어 줄게.”강하리가 고개를 저으며 말하려는데 갑자기 휴대폰 벨이 울렸다.주해찬의 전화였다.“선배?”주해찬의 목소리가 다소 무겁게 들렸다.“하리야, 너희 회사 입찰 실격된 거 알고 있었어?” 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피식 웃었다.“역시.”주해찬은 조금 당황한 듯했다.“알고 있었어?”강하리가 답했다.구승훈이 그녀의 발목을 잡기 시작한 순간부터 일이 순조롭게 풀리지 않을 거라는 걸 이미 예상했다.“구승훈은 내가 이 일에 끼어드는 걸 원치 않았어요.”강하리가 나지막이 말하자 주해찬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하리야, 사실 나도...”“알아요, 다들 내가 위험할까 봐 걱정하는 건 알지만 선배, 아무것도 안 하고는 편히 먹고 잘 수가 없어요. 엄마한테 일이 생겼을 때 난 능력도 없고 임신 중이어서 무척 조심했는데 이젠 아이마저 없으니 더는 조심할 필요가 없잖아요. 선배, 난 평생 숨어 지내기 싫어요. 그 사람들이 뭔데 날 멋대로 괴롭혀요?”주해찬은 문득 가슴이 아팠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강하리의 눈시울이 붉어지며 입꼬리를 끌어당겨 미소를 지었다.“고마워요, 선배.”주해찬은 가슴에 아릿한 통증이 밀려왔다.“하리야, 네가 조금이라도 괜찮아진다면 뭐가 됐든 난 기꺼이 도울 거야. 하지만 네가 행복해야 해. 이런 일을 할수록 너만 더 괴롭다면 그땐 나도 안 도와줄 거니까 나 원망하지 마.”강하리는 눈가가 붉게 물든 채 웃으면서 답했다.“그럼 이번 일은 어떻게 할 거야?”“걱정하지 마요, 다른 대안이 있으니까.”“알았어, 그럼 소식 기다릴게.”강하리는 전화를 끊고 욕실로 들어갔다.나왔을 때 그녀에게 영상 하나가 와 있었다.[오늘 그 연구소의 감시 시스템을 해킹했어요. 노진우 아이에 대해 계속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 내가 가져왔으니까 이걸로 일단 호기심 해소하라고요.]강하리의 손가락이 허공에 멈췄다가 잠시
강하리는 한참을 울고 나니 속이 후련해졌다.세수를 하러 갔다가 돌아와서는 또다시 영상 속 꼬맹이를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짧은 영상 하나를 몇 번이나 재생했는지 모른다.분명히 다른 사람의 아이였고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아인데 어쩐지 자꾸만 들여다보고 싶었다.손연지가 우유 한 잔을 가져왔다.“누구 아이야?”정신을 차린 강하리가 답했다.“노진우 씨 아이.”아이 침대 위에 있는 팻말에 노연정이라는 아이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보았다.손연지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그 운전기사 아이라고?”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소 씁쓸하게 웃었다.“웃기지 않아? 남의 애를 보고 그렇게 운다는 게.”손연지는 가슴이 아팠다.자식을 잃은 엄마들은 보통 남의 아이를 보면 자신의 아이를 떠올린다.“괜한 생각 말고 우유 마시고 푹 일찍 자. 난 당직이라 병원 가야 해.”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컵을 들어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병원에 가서 소영준 만나면 못 본 척하고 괜히 언성 높이지 마, 알았지?”손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알아, 나 바보 아니야. 좋은 사람이라서 좋아한 건데 하나도 그렇지 않으면 더 좋아할 이유가 없잖아?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린 채 손연지를 바라보았다. 말은 대수롭지 않게 해도 두 눈엔 온통 슬픔이 가득했다.이런 일엔 원래 시간이 필요한 법이니까.손연지가 떠난 후 강하리는 우유를 마시고 약을 먹은 후 침대에 누웠다.하지만 누워 있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한참 후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나문빈에게 전화를 걸었다.“어때요, 그 아기 귀엽죠?”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나문빈 씨, 연구소에 등록된 아기 엄마 이름은 뭐예요?”나문빈은 한숨을 쉬었다.“그거 물어볼 줄 알았어요. 내가 정보 다 알아내서 보냈으니까 알아서 봐요.”그렇게 말한 후 나문빈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잠시 후 강하리의 휴대폰으로 한 장의 자료가 전송되었고 거기에는 아이 출생 연도부터 부모님 이름, 임신 시기, 검사기록, 심지어 교통사고가
“말도 안 돼. 우리 시연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해? 시연이는...”“주해찬 씨로부터 이미 충분한 증거를 확보했습니다.”말을 마친 기자는 두 어르신을 향해 입술을 삐죽이며 자리를 떠났고 노부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무슨 말이야? 당신들 이 영상을 어디에 내보내려는 거야? 당신들...”이정숙이 기자를 따라잡기도 전에 기자와 카메라맨은 함께 차를 몰고 떠났다.이정숙은 화가 나서 발을 굴렀다. 만약 이 일이 알려지거나 인터넷에 영상이 공개되면 이시연이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겠나.“태형이한테 전화해. 이 일이 알려지면 태형이도 망신당할 거야.”진강석이 서둘러 말하자 이정숙은 망설이지 않고 서둘러 진태형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진태형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전화를 받은 강하리가 서둘러 회사로 달려가는데 그녀가 도착하기도 전에 기자들이 먼저 와 있었고 기자 앞에서 말문이 막힌 진강석 내외를 보며 한참 후 그녀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번졌다.누가 시킨 건지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구승훈 말고는 이렇게 할 사람이 있을까.강하리는 문득 이제 정말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는 걸 느꼈다.여전히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녀의 모든 안정감은 이 남자로부터 온다는 것을.마치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 앞에 굳건히 버티고 서 있어 줄 것 같았고 두 사람이 함께 있는 한 어떤 고통과 어려움이 닥쳐도 이겨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강하리는 운전대를 꽉 움켜쥐고 알 수 없는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휴대폰을 꺼내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었다.“강 대표님, 시키실 일이라도 있나?”시선을 떨군 강하리가 결심한 듯 말했다.“구승훈, 혼인신고 하러 가자.”전화기 너머 구승훈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그래.”그가 웃으며 답했다.“내가 데리러 갈 테니 기다려.”강하리는 구승훈과 통화를 마치고 사무실로 들어갔는데 문에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하리야, SNS 봐!”강하리의 발걸음이 멈칫했다.“왜 그래? 또 무
JM회사 아래층에서 늘 정교하게 치장하던 석미란은 지금 전혀 화장하지 않은 상태였다.창백한 안색에 피곤함을 감추기 어려웠지만 눈빛에는 증오가 가득했다.불과 며칠 만에 아들은 유치장에 들어갔고 남편은 해당 부문에서 조사받고 있다.멀쩡하던 가정이 여자 하나 때문에 파괴되었는데 이젠 그 여자에게 사과까지 해야 한다.석미란은 내키지 않았고 여전히 강하리가 미웠다.어디선가 튀어나온 잡종이 어느새 그녀의 머리 위로 기어오르고 있었다.석미란의 뒤에 서 있던 석연란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석미란과 석연란 외에도 진씨 가문 어르신 내외가 경호원 몇 명까지 대동하고 찾아와 열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함께 JM회사 입구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왜 아직도 안 와?”이정숙이 다소 짜증스럽게 물었다.원래는 곧장 심씨 가문으로 가서 강하리를 만나고 싶었지만 놀랍게도 강하리가 심씨 가문에 없어서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회사까지 찾아왔다.하지만 한 시간 넘게 기다렸지만 여전히 강하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이정숙의 말애 석씨 자매의 표정도 한층 더 일그러졌다.누가 봐도 강하리가 일부러 나타나지 않는 게 분명했다.“누구 앞에서 텃세를 부리는 거야!”이정숙의 얼굴이 차가워지면서 당장이라도 화를 낼 기세였고 진강석이 막 말을 하려는 순간 앞에 차 한 대가 멈춰 섰다.다들 강하리가 오는 줄 알았지만 차에서 내린 사람이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고 다가올 줄이야.그들의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기자가 일행의 앞으로 다가왔다.“여러분들은 인터넷에서 강하리 씨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사과하기 위해 여기 계신 건가요?”그 말에 석미란의 표정이 확 바뀌었고 그녀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기자가 다시 물었다.“게다가 얼마 전에 강하리 씨 출신에 대한 루머를 퍼뜨려서 고소당해 법원까지 갔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석미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무, 무슨 헛소리에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 망할...”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석연란이 옆에서 끌어당겼고 석미란
다시 입을 연 구승훈의 목소리가 살짝 갈라져 있었다.“자기야, 한 번만 더 불러봐. 응?”강하리의 표정이 어색함으로 물들었다.조금 전에는 몰랐는데 이제야 얼굴에 열기가 치솟는 게 느껴졌다.“내 남편이라고.”그녀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했고 구승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네 남편은 나잖아?”강하리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를 바라보았다.“누가 나랑 결혼하면 그 사람이 내 남편이지.”구승훈은 홧김에 그녀를 콱 끌어안았다.“우리 강 대표님이 주방에서 하고 싶나 봐?”남자가 말하며 그녀의 옷 속으로 손을 뻗자 놀란 강하리가 순간적으로 몸부림을 쳤다.두 사람은 부엌을 난장판으로 만들었고 손연지가 내려와서 그 광경을 목격했다.그녀는 부엌에 있는 두 사람을 조용히 바라보며 말로 표현 못할 감정을 느꼈다.부러움?아마도 부러운 거겠지.하지만 사실 그녀는 강하리의 결단이 더 부러웠다.구승훈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을 때도 강하리는 망설임이 없었다.매번 노민우와 깨끗이 손절하려고 마음먹었어도 몇 번이나 다시 엮이고 타협하는 자신과 달리.그래서 이런 결과가 나온 거다.손연지는 마음이 답답했다. 사실 누구도 탓할 수가 없었고 탓하려면 결단력이 부족했던 자신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심호흡한 뒤 마음을 추스르며 아래로 내려갔고 강하리는 손연지가 내려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구승훈에게서 떨어졌다.“연지야, 아침 뭐 먹을래?”손연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애정 행각에 이미 배가 불러.”강하리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밥 먹고 연정이 데리러 갈 거야.”손연지의 눈빛이 순식간에 밝아졌다.“좋아. 내가 연정이 선물도 챙겨왔어.”하지만 그다음 순간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그녀의 얼굴에 머금은 미소엔 씁쓸함이 섞여 있었다.강하리는 그걸 분명히 알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때론 본인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 것들이 있다.지금 손연지를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손연지를 돌봐주는 것뿐이고 손연지가 몸을 추스르고 나면 일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었다.
구승훈은 강하리가 보낸 메시지를 보며 세 식구라는 단어를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다가 피식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좋아.]그의 의견을 묻다니, 어떻게 감히 싫다고 하겠나.답장을 마친 구승훈은 욕실로 들어갔고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휴대폰이 울리고 있었다.쉬지 않고 울리는 휴대폰을 바라보던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전화가 끊어지려고 할 때쯤 통화 버튼을 눌렀다.전화기 너머에서 구동근의 연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정안그룹과 에비뉴를 강하리한테 다 넘겼어?”구승훈은 비웃었다.“네, 왜요? 불만 있으세요, 어르신?”구동근은 그의 말에 피를 토하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다.“구승훈, 그건 다 우리 구씨 가문 재산이야! 네가 뭔데 그 여자한테 줘!”강하리가 심씨 가문 출신이라는 사실을 안 후 구동근은 더 이상 구승훈과 강하리의 만남을 반대하지 않았고 심지어 몸을 굽혀 심씨 가문에게 사죄할 수도 있었지만 구씨 가문의 재산이 그렇게 쉽게 넘어갔다는 사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게 다 구씨 가문의 재산이었는데!이 망할 자식이 그렇게 쉽게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다니!구승훈은 여전히 나른한 목소리로 가볍게 웃었다.“왜요? 벌써 잊으셨어요? 구씨 가문 재산은 어르신 귀한 손주가 다 망쳐버렸어요.”“너!” 말을 꺼내지 않으면 모를까, 그 말을 하자 구동근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차갑고 냉정한 손자가 한 여자 때문에 자기 가족을 내팽개칠 줄은 상상도 못 했다.구승훈은 웃음을 터뜨리며 목소리가 점점 더 차가워졌다.“다시는 나랑 강하리 사이 방해하지 마세요. 저한테도 할아버지가 꼭 필요한 건 아니니까요.”구승훈이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자 저쪽에서 구동근은 너무 화가 나서 전화기를 부술 뻔했다.전화를 끊자 옆에 서 있던 구씨 가문의 둘째가 다소 불안한 듯 물었다.“아버지, 어떻게 됐어요? 정말 그 두 회사를 강하리한테 다 줬대요?”구씨 가문의 둘째는 노인의 표정을 보고 순간적으로 불안해졌다.“그놈이 무슨 권리로 두 회사를 망할 년에게 넘겨줘요? 거기
거칠게 원하던 구승훈이 마침내 움직임을 멈춘 순간 강하리는 비틀거렸고 구승훈이 단숨에 그녀를 품에 낚아챘다.“너무 좋아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겠어?”강하리는 너무 화가 나서 그를 발로 차버리고 싶었다.“좋기는 개뿔!”구승훈은 웃으며 강하리를 안고 화장실로 들어갔다.“응, 나도 좋았어.”“...”개자식과 더 실랑이를 벌일 기운도 없었다. 뻔뻔한 걸로는 절대 그를 이길 수 없었다.구승훈은 강하리를 씻겨주고 그녀를 안아 침대로 돌아왔다.강하리는 손가락을 들 수 없을 정도로 피곤했지만 그래도 꿋꿋이 옷을 끌어당겨 입었고 구승훈은 그녀의 움직임을 보며 눈썹을 치켜들었다.“어디 가?”“연지 보러 갈 거야. 오늘 밤엔 연지랑 잘 거야.”구승훈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강하리, 넌 내 아내야.”강하리가 그를 슬쩍 보았다.“아직 결혼 안 했잖아.”구승훈이 그녀를 껴안았다.“그러면 내일 혼인신고 하러 갈래?”강하리의 몸이 경직되며 문득 지난번에 구승훈이 혼인신고 하자는 말을 했던 게 떠올랐다.그러다 그녀에게 돌아온 건 심미현의 죽음과 오지 않는 구승훈이었다.강하리의 몸이 눈에 띄게 굳어지자 구승훈은 무거운 마음으로 그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지난번 같은 일은 없어.”강하리가 그를 돌아보았다.“만약 또 그런 일이 생기면...”구승훈의 짙고 검은 눈동자에 밝은 빛이 비쳤다.“또 그런 일이 생기면 난 고자가 될 테지만 걱정하지 마, 강 대표님. 내가 손으로도 잘 모실 수 있으니까.”“... 닥쳐!”말을 마친 그녀가 잠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가다가 두 걸음도 못 가서 갑자기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보았다.“또 콘돔 안 썼어?”강하리는 말하며 지난번에도 구승훈이 콘돔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구승훈, 미쳤어? 난 지금...”구승훈이 그녀의 턱을 그러쥐었다.“걱정하지 마, 임신 안 해.”강하리는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는 눈빛으로 구승훈을 바라봤고 구승훈은 손으로 강하리의 턱을 어루만지기만 했다.“나 묶었어.”
손연지는 식사를 마치고 잠을 청하기 위해 방으로 돌아갔다.아직 몸조리가 필요한 그녀는 도저히 찾아갈 데가 없어 결국 강하리를 찾으러 B시까지 왔다.강하리는 구승재에게 전화를 걸었다.손연지는 자신이 겪은 일을 몇 마디로 설명했지만 강하리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구승재도 별말 없이 바로 손연지에 대해 알아본 사실을 강하리에게 전했고 대충 손연지가 말한 내용과 거의 같았지만 몇 가지 세부적인 내용이 빠져 있었다.손연지가 병원에서 손가락질받고 있었다는 것, 노민우의 약혼녀라는 사람이 손연지를 머물 곳도 없게 궁지로 내몰았다는 것 등등...손연지는 노민우를 그냥 두지 않았다고 했지만 사실은 노민우의 어머니가 노민우 몰래 손연지를 노씨 가문으로 데려와 심한 모욕을 준 것뿐이었다.그래도 손연지가 고분고분 말을 듣는 성격은 아니라 노씨 가문에서 한바탕 소란을 피웠고 상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손연지에게 수표를 던지며 연성을 떠나라고 했다.손연지는 자신이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했고 노민우의 결혼을 파탄 낼 생각도 없었기에 처음엔 연성을 떠나지 않았지만 놀랍게도 노민우의 어머니가 그녀의 부모님까지 찾아갔다.강하리는 죄책감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손연지에게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는데도 그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구승훈이 강하리를 뒤에서 껴안았다.“나를 이렇게 걱정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어떻게 같아?”구승훈은 납득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뭐가 다른데?”강하리는 시선을 떨구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많은 일을 겪었지만 그녀를 정말로 기쁘게 만드는 건 별로 없었다.어릴 적 강찬수의 가정 폭력부터 나중에 구승훈에게 받은 상처까지,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손연지가 곁에 있었고 그녀에게 손연지는 가족이었다.강하리는 대답이 없었고 구승훈도 더 묻지 않아 거실은 무척 조용했다.하지만 조용한 시간은 얼마 가지 않았고 구승훈이 귓불을 깨물며 그녀의 몸을 달구기 시작했다.강하리는 조금 긴장한
구승훈은 강하리를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도 결국 순순히 입을 다물었고 손연지는 구승훈을 보고 웃었다.구승훈은 굳어진 표정으로 두 사람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다가 모퉁이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강하리를 한 손으로 잡아당긴 뒤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오늘 밤에 보상해 줄 거야?”강하리는 순간 조금 전 당황스러운 장면이 떠올랐고 손연지가 지금 슬픈 상황에서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싶지 않았다.“가만히 있어.”구승훈의 입술이 그녀의 귀에 닿았다.“그러면 손으로만 하는 건?”남자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가로질러 그녀가 승낙할 때까지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이 꽉 감싸자 강하리는 결국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이따가 내려가선 얌전히 있어.”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아내 말은 들어야지.”손연지는 식사 내내 먹는 둥 마는 둥 했고 식사가 끝날 무렵 강하리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노민우였다.강하리는 손연지를 바라보며 바로 전화를 끊었고 손연지는 못 본 척했지만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다.하지만 잠시 후 구승훈의 휴대폰도 울렸고 그는 눈썹을 치켜들며 전화를 집어 든 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다.바깥에 도착하고 나서야 구승훈은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노민우가 아닌 노민준의 전화였고 그는 뒤를 돌아보고는 전화를 받았다.“그 주사 효과가 어때?”구승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괜찮아. 지난 이틀 동안 상태가 전보다 훨씬 안정됐어.”거짓말이 아니었다. 구승훈은 노민준이 건넨 주사를 맞고 나서부터 지난 이틀 동안 단 한 번의 이상도 느끼지 못했고 그것이 그가 오늘 유난히 기분이 좋았던 이유였다.노민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포기하지 말라고 했잖아.”짧게 대꾸한 구승훈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말을 마친 노민준이 잠시 멈칫했다.“참, 내 동생이 할 말이 있대.”곧이어 저쪽에서 노민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승훈아, 손연지는 지금 어때?”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네 여자를 왜 나한테 물어봐?”“승훈아, 나도 네가 강하리 씨
강하리는 사실 자신이 꽤 한심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거듭되는 상처에도 수없이 용서했다.마치 구승훈이 없으면 모든 게 그대로 멈춰버릴 듯이.구승훈이 사라져도 세상은 여전히 잘 돌아가지만 구승훈이 없는 세상이 되어버리고 그건 그녀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또 무슨 일이 생기면 난 당해도 싸.”강하리는 손연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손연지는 다가와 강하리를 껴안았다.“구승훈 이 개자식이 전생에 우주라도 구한 거야?”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손연지의 어깨에 기대었다. 의지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위로에 가까웠다.“그러는 넌, 대체 무슨 일인데?”자기 일을 언급하자 손연지는 순식간에 흥미가 사라진 표정이었다.“별건 아니야. 사실... 하리야, 나 임신했었어.”강하리는 깜짝 놀랐다.“뭐? 그래서? 지금은 어떤데? 아기는?”손연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노민우는 다른 여자와 약혼하고 있었어. 노민우에게 말할 생각도 없었고 사실 아이도 남길 생각 없었어. 노씨 가문이나 노민우에겐 관심 없어. 40일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수술하려고 했는데 그날 밤 내가 당직일 때 노민우 약혼녀가 병원에 찾아와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난동을 부렸어. 병원에서도 노씨 가문에 밉보일 수 없어서 날 해고했어.”강하리의 표정이 차가워졌다.“그러고 나서?”손연지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그리고 다음 날 아이를 지웠는데 노민우가 어떻게 알았는지 낙태한 걸 알고는 나한테 화를 냈어.”강하리의 가슴에 고통이 밀려왔다.노민우가 약혼한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때 손연지에게 연락했을 때만 해도 그녀는 멀쩡했었다.고작 얼마나 됐다고 노민우 그 개자식이 손연지를 이렇게 힘들게 한 건지!“왜 나한테 말 안 했어?”손연지는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웃었다.“말해도 달라질 게 뭐가 있어. 그래도 노민우를 그냥 두지는 않았어. 자기가 뭐라고 나한테 화를 내? 약혼까지 했는데 내가 아이를 낳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노씨 가문에 찾아가서 업무에
강하리의 눈빛이 번쩍이며 구승훈의 말에 담긴 의미를 순식간에 알아차렸다.그가 오늘 인터넷 속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녀에게 매달리는 역할을 자처했으니 이젠 그녀가 자신을 데려가야 한다는 말이었다.강하리는 구승훈의 목에 팔을 걸고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속삭였다.“보답이라, 문제없지. 구 대표님이 우선 그 쓸데없는 여자들 먼저 해결하면!”이번 일에 진시연이 연루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석미란이 심준호에게 고소당한 이후 석연란조차 한동안 잠잠했고 그녀가 대외적으로 자신에 대한 악담을 퍼뜨릴지 몰라도 온라인에 증거를 남기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니 누가 이 모든 일을 주도하고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개자식, 하여간 여자가 너무 많이 꼬인다.강하리는 계속해서 구승훈과 사무실에서 꽁냥거리진 않았다.집에 손연지가 있었기에 가는 길에 백아영에게 전화를 건 강하리는 구승훈을 따라 별장으로 돌아왔다.어두운 별장을 보며 강하리는 손연지가 아직 자는 줄 알았다.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인공지능이 불을 켜자 갑자기 별장 전체가 환하게 밝아졌다.강하리가 가방을 내려놓고 손연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위층으로 올라가려는 순간 갑자기 구승훈이 뒤에서 안았고 곧이어 그녀가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소파에 쓰러뜨렸다.강하리가 말하기도 전에 구승훈은 그녀의 입술을 막았고 남자의 손이 불순하게 그녀의 다리를 어루만졌다.“자기야, 다리 예쁘다.”강하리는 남자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챘다.이 개자식!머릿속엔 그 짓밖에 없는 건지.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그녀는 손연지에 대해 말하는 것도 잊어버렸다.“당신... 읍...구승훈은 거침없이 그녀의 스타킹을 찢어버리고는 그녀의 손을 끌어 벨트로 가져갔다.“도와줘, 자기야.”강하리의 얼굴이 화끈거렸다.“일단 기다려.”구승훈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종아리를 잡고 부드럽게 주물렀다.“못 기다려.”강하리는 그를 세게 밀었다.“아니, 내 말은...”“어머!”강하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계단 너머에서 손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