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연지가 짧게 대꾸하자 강하리는 할 말을 잃었다.무슨 말을 해야 할까.“어젯밤에 또 술 많이 마셨어?”“아니, 제정신이었어.”강하리가 멈칫했다.“근데 왜 또 노민우랑 잤어, 소 교수님은 어쩌고?”손연지는 잠시 침묵했다.“하리야, 내가 잘못 생각했나 봐. 난 소영준이 그래도 나한테 조금은 호감이 있는 줄 알았어.”강하리는 당황했다.“무슨 일 있었어?”손연지는 다소 멍한 표정으로 길가의 작은 돌멩이를 내려다보았다.소영준은 작년에 그녀가 일하는 병원에 왔고 당시 강하리가 유산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는데 그녀가 진료기록을 멋대로 바꾼 것에 대해 구승훈은 따지고 들지 않았지만 결국엔 누군가에 의해 그 일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당시 해고 위기에 처했던 그녀는 소영준이 나서서 그녀의 편을 들어준 덕분에 계속 병원에 남을 수 있었다.그 후에도 소영준은 여러 번 그녀를 도와줬고 왠지 모르게 그녀가 필요할 때마다 항상 소영준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 같았다.그래서 줄곧 소영준이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할 때쯤 그가 연수 신청까지 도와주자 의심은 확신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적어도 어젯밤 전까지는 말이다.데이트라고 해서 나갔는데 방 안에는 남자들이 한 무리 있었고 그들 옆에는 여자가 한 명씩이 앉아 있었다.수위를 가리지 않는 농담들이 마구 오갔지만 소영준은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고 그런 그의 모습이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괜찮아.” 손연지는 왠지 말하고 싶지 않았다.“그쪽 일은 끝났어?”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렸다.“정말 괜찮아? 소영준이라는 사람...”“하리야, 네 말대로 미리 주변에 알아볼 걸 그랬어.”강하리는 마음이 무거워졌다.“소영준이 너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어?”“아니야, 그 얘기는 네가 돌아와서 하자. 나 가서 쉬고 싶어. 노민우 그 멍청이가 밤새 날 괴롭혔어.”“...”원래는 손연지에게 노민우와 앞으로 어떻게 지낼 건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손연지가 얘기하길 꺼린다는 걸 알 수 있었다.전화를 끊은
“우리 층에 누가 임신했나 봐요!”“어떻게 알았어요?”“화장실 쓰레기통에 글쎄 임신 테스트기가 있더라니까요!”강하리는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동료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발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수군대는 두 명의 인턴을 바라봤다.그녀가 들어온 것을 발견한 인턴들은 안색이 확 변하면서 곧장 일하러 갔다. 그래서 그녀도 시선을 거두고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핸드폰은 오늘따라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단톡방에 들어가 보니, 화장실 쓰레기통에서 임신 테스트기가 발견됐다는 소식이 벌써 퍼지고 있었다. 회사는 이런 가십거리가 가장 환영받는 곳이기 때문이다.점점 더 많은 사람이 주목하는 것을 보고 강하리는 머리가 찌릿찌릿 아팠다.‘내가 소홀했어. 적어도 종이에 잘 싸서 버려야 하는 건데. 만약 구승훈 대표님이 알게 된다면...’끔찍한 상상에 강하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때 구승훈의 비서가 사무실에 노크하고 들어왔다.“부장님, 대표님께서 찾으세요.”강하리는 책상 아래에 있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강 부장님?”“네, 들었어요.”...대표이사실 앞에 멈춰 서서 강하리는 크게 심호흡했다. 하지만 그녀가 마음의 준비를 끝내기도 전에 구승훈의 전담 비서 신도윤이 사무실 문을 열고 나왔다.“대표님은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강하리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으면서 대답했다.“알겠어요.”대표이사실에는 우드 향 향초를 태우고 있었다. 점심부터 협력사 임원과 술 한 잔 마신 듯한 구승훈은 다리를 꼰 채 의자에 기대어 있었다.반듯한 검은색 셔츠를 입은 그의 모습은 유난히 방탕해 보였다. 지그시 감은 눈도, 여유롭게 힘 풀린 몸도, 마치 정성껏 만든 조각상과 같았다.강하리는 작게 한숨을 쉬면서 생각했다.‘이러니까 주변에 여자가 끊기지 않지. 어느 여자가 이토록 완벽한 남자를 거절할 수 있겠어?’구승훈은 완벽한 사람이었다. 얼굴도, 몸매도, 능력도... 적어도 겉으로는 흠이라고 할만한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오직 강하리만 그
강하리는 허리가 뻣뻣해져 우뚝 멈춰 섰다. 하지만 몸을 돌릴 때는 꽤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제가 맞으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구승훈의 눈빛은 아주 어두웠다. 조금 전 열정이 넘치던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는 듯이 안팎으로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어떡하긴, 병원에 가야지.”강하리의 안색은 약간 창백해졌다. 두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구승훈은 더욱 차가운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강하리, 우리가 정한 룰은 기억하지?”강하리는 몸을 흠칫 떨었다.‘그래... 룰... 우리 사이는 애초에 게임일 뿐이었어. 대표님이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할 리가 없으니까.’강하리는 아주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반대로 구승훈은 구씨 가문의 장손이자, SH그룹의 후계자이다.강하리가 구승훈과 만나게 된 것은 100% 우연이었다.3년 전, 어머니 정서원이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강하리는 급하게 돈이 필요했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친아버지를 찾아가 돈을 빌리려고 했다.하지만 화려한 별장 밖에 꼬박 하루 무릎 꿇고 있다가 기절까지 했는데도, 땡전 한 푼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지나가던 구승훈이 길고양이 줍듯이 그녀를 주운 것이었다.병원에서 눈을 뜬 그녀에게 구승훈은 ‘게임’을 제안했다. 마음 없이 몸만 쓰는 그런 게임 말이다.그때 강하리는 무의식적으로 물었다.“보수는 있어요?”구승훈은 그녀의 속물 같은 모습도 전혀 개의치 않은 듯 피식 웃으며 오히려 칭찬했었다.“똑똑하네.”그렇게 두 사람은 게임을 시작했다.강하리는 꽤 일찍 룰을 파괴했다. 비극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그녀는 게임 파트너를 짝사랑했다.가슴 속에서 퍼져가는 아픔을 애써 무시하고 강하리는 미소를 짜냈다.“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구승훈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그제야 입꼬리를 올리면서 말했다.“강 부장은 똑똑해서 참 좋아.”강하리는 꾸벅 인사하고 그가 눈치채기 전에 재빨리 대표이사실을 벗어났다. 부하직원 안예서는 벌써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릇한 분위기가 점차 무르익으면서 여자는 더욱 애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하리는 그저 힐끗 보기만 하고 바로 시선을 돌렸다.강하리가 들어온 것을 발견한 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리기만 할 뿐 딱히 움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곁에 앉아 있던 동생 구승재가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그는 구승훈의 눈치를 힐끗 보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먼저 말을 꺼냈다.“강 부장도 술 마시러 왔어요?”“네, 안 대표님과 계약을 성사한 기념으로요.”강하리는 그들 속에 끼어들지 않고 구석 자리를 골라 앉았다.“왜 그렇게 멀리 앉았어요? 가까이 와 봐요!”구승재는 겁도 없이 강하리를 부추겼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구승훈과 그녀의 관계를 알았기 때문이다.구승훈은 누가 봐도 곁에 있는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강하리가 들어온 후로부터 그 여자를 대하는 태도도 더욱 차가워졌다.강하리는 아주 예쁘게 생겼다. 분명히 청순한 인상이지만 묘하게 매혹적인 것이, 고리타분한 정장에 비즈니스적인 미소만 지어도 사람의 마음을 홀리기에 충분했다.‘역시 우리 형님 안목이란.’강하리와 같은 여자가 연예계에 진출한다면 거물들과 술자리 몇 번 가지는 것으로 톱스타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강하리는 구승재의 말을 듣고서도 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룸 안의 사람들 속에 섞일 마음은 전혀 없었다. 어차피 구승훈 곁에는 다른 여자가 있으니, 그녀가 다가갈 필요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안현우는 어느샌가 술 한잔 들고 강하리의 곁에 가서 물었다.“강 부장, 한잔할까요?”“아뇨, 저는 몸이 불편해서 물로 대신할게요.”술잔을 받지 않는 강하리에 안현우는 기분이 상했다. 힘들게 만든 자리에서 그녀가 술 한 잔 마셔주지 않으니 말이다.안현우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녀가 취한 틈을 타 무언가 해보려는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시크하게 한 모금도 마셔주지 않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구 대표님, 우리 강 부장 참 시크하죠? 이런 자리에서도 술 한 잔 안 마셔주네요.”구승훈은 천
강하리는 얼음 구덩이에 빠진 것만 같았다. 그래도 구승훈의 뜻은 명확했다. 만약 그녀가 머리를 끄덕인다면 그는 절대 말리지 않을 것이다.‘이제는 내가 떠나도 상관없구나.’강하리는 안현우에게 딱히 관심이 없었다. 예전 같으면 무조건 단호한 말로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따라 어쩐지 받아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이제는 변할 때가 되었다. 배 속에 아이도 생겼으니 말이다. 물론 아이를 이용해 구승훈을 협박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는 애초부터 게임일 뿐이었으니, 책임을 운운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구승훈은 그녀가 협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이번에 생긴 아이는 병원에 가서 지워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처음이 있으면 다음도 있기 마련이기에 문제였다.아이를 원하지 않았던 구승훈은 평소에 꽤 신중하게 피임했다. 번마다 꼭 콘돔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달 하도 거칠게 한 탓에 콘돔이 찢어진 적이 있었다. 비록 제때 피임약을 먹기는 했지만, 결국 아이가 생기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지금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지킬 수 없을 게 뻔했다. 하지만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계속 아이를 지우러 병원에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도 소중한 청춘과 건강을 이렇게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정서원의 병원비라면 이미 꽤 모였다. 구승훈의 냉정함에도 실망할 대로 실망했다.그녀는 더 이상 구승훈과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원래도 결심했던 일이기는 하지만, 그의 대답을 듣고 나니 더욱 명확해졌다.강하리는 구승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또박또박 되물었다.“저 진짜 떠나도 돼요?”“그렇게 묻는다는 건 너도 안 대표의 제안에 관심 있다는 건가?”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강하리는 피식 웃으면서 평소 같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을 했다.“안 대표님의 조건을 들어보고 생각해 볼 의향은 있어요.”쨍그랑!테이블 끝에 놓여 있던 술잔은 구승훈의 다리에 걸리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끄럽던 룸에는 순식간에 정적이 휩싸였다.구승훈의
겁먹은 여자는 이제야 슬슬 뒤로 물러났다.“죄, 죄송합니다.”여자가 떠난 다음 룸에 있던 다른 여자들도 하나둘씩 떠나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남자들만 남게 되었다.구승재는 조금 전 장난이 지나쳤던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예전에 같은 장난을 쳤을 때 강하리가 하도 잘 받아줘서 방심한 탓이었다.예전의 그녀는 떠나기는커녕 SH그룹에 뼈까지 묻을 모습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달라져 있었다.“형, 강 부장을 다시 데려와서 그냥 장난이었다고 하는 게 낫지 않아? 강 부장 일 잘하잖아. 갑자기 사직한다는 게 말이 돼? 오늘도 야근한 모양인데, 너무 피곤해서 말이 헛나왔을 거야.”구승훈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회사에 부장 자리 하나 대신할 사람이 없을까 봐? 간다는 사람을 잡아서 뭐 하게.”안현우는 어색하게 웃기만 할 뿐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이쯤이면 그도 구승훈과 강하리가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아냈다.“저는 장난으로 한 말이었어요. 구 대표님 직원을 제가 어떻게 함부로 데려가겠어요.”안현우의 말에도 구승훈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그래, 감히 내 사람을 건드릴 어리석은 인간은 없겠지. 하지만 그 여자 마음이 떠난걸, 남이 뭐 어쩌겠어?’... 클럽에서 나간 강하리는 택시를 타고 부모님 댁으로 향했다. 3년 전, 정서원이 입원한 후로 처음 돌아가는 것이었다.그녀의 계부 강찬수는 성격이 더러운 데다가 술까지 좋아했다. 그래서 쩍하면 모녀에게 손을 대고는 했다.그녀는 수도 없이 정서원을 설득해서 두 사람을 이혼시키려고 했었다. 하지만 마음이 약한 정서원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고, 결국 만취 상태인 강찬수를 데리러 간 어느 날 밤 길가에서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정서원이 입원한 다음 강찬수는 술을 점점 더 많이 마시기 시작했다. 대부분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돌아온다고 해도 제정신인 적이 없었다.강하리는 오늘 밤도 집이 텅 비어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정작 도착해보니, 그가 집에 있었을 뿐
욕을 내뱉자 손연지는 속이 후련했다. 그리고 그제야 가장 중요한 일을 얘기하기 시작했다.“애는 지울 거지? 내일 검사 끝나고 바로 시술 예약해 줘?”강하리는 아랫배를 만지작대다가 욱신대는 가슴을 애써 무시하고 짧게 대답했다.“응.”대답을 마친 동시에 눈물 한 방울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환영받지 못한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해도 어쩌겠는가? 그녀는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무책임하게 아이를 낳을 수도 없었다.그녀는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난 평범한 여자이다. 아이는 태어나봤자 평생 아빠 없이 손가락질만 받고 살 것이다. 그리고 구승훈은 아이에게 마땅한 명분도, 기회도 주지 않을 것이다.사랑, 결혼, 아이... 구승훈에게서는 절대 바랄 수 없는 것이었다.강하리는 눈을 꼭 감더니 눈물을 단호하게 닦아냈다....저녁에 강하리는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리는 어느 순간, 그녀는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어린 시절 강하리는 어머니 정서원과 함께 떠돌이 생활을 보냈다. 그중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곳이 강가의 어촌 마을이었다. 그 자그마한 마을은 그녀가 구승훈과 처음 만난 곳이기도 했다.어린 구승훈은 지금처럼 음침하지 않았다. 태생부터 잘생겼던 그는 마치 곱게 빚은 도자기 인형과 같았다. 후에 알고 보니 그는 이름 모를 병에 걸려 한적한 마을에서 요양 중이었다.요양 생활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는지 그는 강가에서 혼자 눈물을 훔치는 시간이 아주 많았다. 강하리는 그를 발견할 때마다 사탕 한 알을 들고 가서 위로해 주곤 했다.처음에 그는 강하리를 보는 체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천천히 친해진 다음에는 종종 대문 앞에 찾아와서 “하양아!”하고 큰 소리로 불러주고는 했다.얼마 후 그의 병이 다 나았는지 한 무리의 사람과 함께 마을을 떠났다. 떠나기 전에 그는 무조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강하리와 약속을 나눴다.하지만 그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10년 후의 재회는 거의 사고와 마찬가지였다. 강하
강하리는 당연히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구승훈은 이미 차에서 내려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은 발걸음으로 걸어오면서 분노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언제까지 성가시게 굴래?”강하리의 앞에 멈춰 선 구승훈은 차갑고도 오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시선을 피하면서 대답했다.“제가 언제 성가시게 굴었다는 거죠?”“그럼 진짜 안 대표를 따라가겠다는 건가? 둘이 언제부터 그런 사이였지?”“오해하셨어요. 이번에는 제가 떠나고 싶어서 떠나는 거지, 다른 사람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이유는?”강하리는 이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구승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결혼하고 싶어서요.”“정말이야?”“그럼요, 저도 이제 27살이잖아요.”구승훈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눈동자에는 위험한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결혼할 상대는 있고?”“...아뇨. 하지만 떠나기로 결심한 마당에 그게 그렇게 중요하나요?”“돈은?”구승훈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의 질문에 강하리는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애초에 그녀는 돈을 위해 구승훈과 만난 것이었다. 이는 그녀의 가장 큰 약점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구승훈은 번마다 이런 식으로 그녀의 약점을 건드렸다.젖 먹던 힘까지 짜내 부정적인 감정을 억누른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대답했다.“돈과 결혼 중에서, 저는 결혼을 선택하기로 했어요.”“그러면... 나는?”“의미 없는 질문이네요. 저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싶어요. 대표님이 그걸 해줄 수 있겠어요?”강하리는 구승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속으로는 혹시라도 그가 머리를 끄덕여주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그냥 성의 없는 대답뿐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아마 평생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그에게만 묶여서 살 것이다.하지만 구승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점점 차가워지는 안색이 대답을 대신해 주고 있었다. 그는 뒤로 두 발짝 물러서더니 강하리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대답했다.“난 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