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승재가 다시 강하리에게 전화를 걸어 소영준에 대해 간단히 설명한 뒤 전화를 끊었다.뒤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구승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형, 강하리 씨 정말 소영준이랑 뭐 있는 건 아니겠지?”구승훈은 잠시 침묵했다.“아니야.”그는 손연지가 소영준을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강하리가 절대 소영준과 이러저러한 일로 엮일 리 없다는 걸 잘 알았다.말을 마친 그는 창밖을 내다봤다.조금 전 강하리가 단지 소영준에 관해 물어보려고 했던 것 같지는 않았다.그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요즘 구정우 쪽에선 움직임 없어?”“구정우랑 문원진이 만났어, 둘이 손잡으려나 봐. 구정우는 똑똑해. 처음부터 문원진 찾아갈 수 있었는데 형이 문연진을 다치게 하고 나서야 찾아가잖아.”구승재가 말하며 백미러를 통해 구승훈을 바라보았다.“형, 형도 요즘 조심해. 구정우한테는 형이 타깃 1순위야. 지금 구정우는 서둘러 가주 자리를 이어받길 원하지만 할아버지와 집안 어르신들이 동의하지 않고 다들 형이 돌아오길 바라. 그러니까 구정우는 형한테 손을 쓰겠지.”짧게 대꾸한 구승훈은 손가락으로 손목에 차고 있는 염주를 만지작거렸다.“구정우가 가주 자리를 원한다면 실컷 앉으라고 해. 그리고 함께 부숴버리면 돼.”구승재는 미간을 찌푸리며 반문했다.“형, 정말 구씨 가문을 무너뜨릴 생각이야?”그는 줄곧 구승훈이 구씨 가문에서 나온 건 그저 할아버지를 위협해서 강하리를 받아들이게 만들려는 것이지 실제로 구씨 가문을 망치려 할 줄은 몰랐다.구승훈이 피식 웃었다.“난 처음부터 진심이었어.”“하지만...”“새로운 구씨 가문을 세울 거야. 구승재, 난 내 아내와 아이들에게 아무도 이래라저래라 하지 못하고 아무도 괴롭힐 수 없는 집을 만들어주고 싶어.”구승재는 목구멍이 꽉 막힌 느낌에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강하리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손연지는 막 잠에서 깨어났다.“하리야, 왔어?” 그녀는 무기력한 상태로 강하리 앞에 앉았다.“어땠어
손연지도 더 이상 말을 할 기분이 아니어서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걸어갔다.“뭐 먹고 싶어, 내가 만들어 줄게.”강하리가 고개를 저으며 말하려는데 갑자기 휴대폰 벨이 울렸다.주해찬의 전화였다.“선배?”주해찬의 목소리가 다소 무겁게 들렸다.“하리야, 너희 회사 입찰 실격된 거 알고 있었어?” 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피식 웃었다.“역시.”주해찬은 조금 당황한 듯했다.“알고 있었어?”강하리가 답했다.구승훈이 그녀의 발목을 잡기 시작한 순간부터 일이 순조롭게 풀리지 않을 거라는 걸 이미 예상했다.“구승훈은 내가 이 일에 끼어드는 걸 원치 않았어요.”강하리가 나지막이 말하자 주해찬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하리야, 사실 나도...”“알아요, 다들 내가 위험할까 봐 걱정하는 건 알지만 선배, 아무것도 안 하고는 편히 먹고 잘 수가 없어요. 엄마한테 일이 생겼을 때 난 능력도 없고 임신 중이어서 무척 조심했는데 이젠 아이마저 없으니 더는 조심할 필요가 없잖아요. 선배, 난 평생 숨어 지내기 싫어요. 그 사람들이 뭔데 날 멋대로 괴롭혀요?”주해찬은 문득 가슴이 아팠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강하리의 눈시울이 붉어지며 입꼬리를 끌어당겨 미소를 지었다.“고마워요, 선배.”주해찬은 가슴에 아릿한 통증이 밀려왔다.“하리야, 네가 조금이라도 괜찮아진다면 뭐가 됐든 난 기꺼이 도울 거야. 하지만 네가 행복해야 해. 이런 일을 할수록 너만 더 괴롭다면 그땐 나도 안 도와줄 거니까 나 원망하지 마.”강하리는 눈가가 붉게 물든 채 웃으면서 답했다.“그럼 이번 일은 어떻게 할 거야?”“걱정하지 마요, 다른 대안이 있으니까.”“알았어, 그럼 소식 기다릴게.”강하리는 전화를 끊고 욕실로 들어갔다.나왔을 때 그녀에게 영상 하나가 와 있었다.[오늘 그 연구소의 감시 시스템을 해킹했어요. 노진우 아이에 대해 계속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 내가 가져왔으니까 이걸로 일단 호기심 해소하라고요.]강하리의 손가락이 허공에 멈췄다가 잠시
강하리는 한참을 울고 나니 속이 후련해졌다.세수를 하러 갔다가 돌아와서는 또다시 영상 속 꼬맹이를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짧은 영상 하나를 몇 번이나 재생했는지 모른다.분명히 다른 사람의 아이였고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아인데 어쩐지 자꾸만 들여다보고 싶었다.손연지가 우유 한 잔을 가져왔다.“누구 아이야?”정신을 차린 강하리가 답했다.“노진우 씨 아이.”아이 침대 위에 있는 팻말에 노연정이라는 아이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보았다.손연지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그 운전기사 아이라고?”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소 씁쓸하게 웃었다.“웃기지 않아? 남의 애를 보고 그렇게 운다는 게.”손연지는 가슴이 아팠다.자식을 잃은 엄마들은 보통 남의 아이를 보면 자신의 아이를 떠올린다.“괜한 생각 말고 우유 마시고 푹 일찍 자. 난 당직이라 병원 가야 해.”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컵을 들어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병원에 가서 소영준 만나면 못 본 척하고 괜히 언성 높이지 마, 알았지?”손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알아, 나 바보 아니야. 좋은 사람이라서 좋아한 건데 하나도 그렇지 않으면 더 좋아할 이유가 없잖아?강하리는 얼굴을 찡그린 채 손연지를 바라보았다. 말은 대수롭지 않게 해도 두 눈엔 온통 슬픔이 가득했다.이런 일엔 원래 시간이 필요한 법이니까.손연지가 떠난 후 강하리는 우유를 마시고 약을 먹은 후 침대에 누웠다.하지만 누워 있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한참 후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나문빈에게 전화를 걸었다.“어때요, 그 아기 귀엽죠?”강하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나문빈 씨, 연구소에 등록된 아기 엄마 이름은 뭐예요?”나문빈은 한숨을 쉬었다.“그거 물어볼 줄 알았어요. 내가 정보 다 알아내서 보냈으니까 알아서 봐요.”그렇게 말한 후 나문빈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잠시 후 강하리의 휴대폰으로 한 장의 자료가 전송되었고 거기에는 아이 출생 연도부터 부모님 이름, 임신 시기, 검사기록, 심지어 교통사고가
하지만 왠지 모르게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익숙한 온도, 익숙한 냄새, 덕분에 처음으로 꿈에서 울지 않게 되었다.구승훈은 품에 안긴 여자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고 한참 동안 손가락으로 여자의 뺨을 어루만졌다.“미안해.”강하리는 몸을 뒤척였지만 깨어나지 않고 습관처럼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구승훈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이마에 부드러운 입맞춤을 하고 새벽이 되기도 전에 떠났다.밖으로 나온 그는 위층 창문을 올려다보다가 잠시 후 전화를 걸었다.“민준 형, 시스템이 해킹당한 거 알고 있어?”...병원에 도착한 손연지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노민우가 미모의 의사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발견했다.그녀가 눈을 흘기고는 안으로 들어가는데 노민우는 그녀가 오는 것을 보자마자 서둘러 이쪽으로 달려왔다.“밥은 먹었어?”“먹었어.” 손연지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뭐 먹었어?”손연지는 그를 돌아봤고 노민우는 웃으며 말했다.“맛있는 거 가져왔어.”그렇게 말한 후 그는 손연지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나 오늘 당직이야!”노민우가 짧게 대꾸했다.“교수님께 연락드렸어.”손연지는 잠시 멈칫하며 말했다.“노민우, 그렇게 한가해?”“어쩔 수 없지. 회사 경영이 잘 돼서 별문제 없으니까.”손연지는 입을 삐죽거렸다.“그래도 회사 경영으로 구승훈은 못 이기면서.”노민우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구승훈이랑 비교가 돼? 걘 괴물이야.”차에 도착한 노민우는 손연지에게 해물전골을 건넸다.“먹어봐, 정말 맛있어.”손연지는 슬쩍 보고 숟가락을 들어 한입 맛보았다.“맛있어?”손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괜찮네.”곧 노민우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다가와 귓가에 나지막이 물었다.“거기 아파?”멈칫한 손연지가 홱 그를 노려보았다.“닥쳐!”“안 아파? 방금 걷는 모습이 좀 이상하던데.”손연지가 곧바로 노민우의 입을 막았다.“닥쳐줄래?”노민우는 크게 웃으며 연고 한 통을 건네주었다.“아프면 아프다고 해,
손연지는 언뜻 잘못 들은 줄 알았다.스폰? 곧 정신을 차린 그녀가 노민우의 뺨을 때렸고 얼떨결에 맞은 노민우는 깜짝 놀랐다.“손연지, 뭐 하는 거야?”“너 때렸다 왜! 노민우, 이제부터 나한테서 멀리 떨어져!”손연지가 말하며 차에서 내리자 노민우도 서둘러 뒤를 따랐지만 아무 말도 하기 전에 안에서 소영준이 걸어 나오는 것을 봤다.두 사람을 보며 소영준은 웃음을 터뜨렸다.“손 선생님, 노민우 씨, 이런 우연이 있나.”얼굴은 멍투성이였지만 평소 본성을 숨기는 데 익숙해서인지 소영준의 표정은 마치 어젯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손연지의 얼굴이 살짝 굳어지자 노민우가 옆에서 콧방귀를 뀌었다.“소 교수님, 얼굴은 아직도 아프신가?”소영준은 자신의 볼에 난 상처를 살살 문지르며 손연지를 바라보았다.“손 선생님, 어젯밤에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주시겠어요?”손연지는 그를 바라보았다.“소 교수님, 저 당직이라서요. 이만 가볼게요.”그 후 그녀는 곧장 안으로 들어갔고 소영준은 잠시 미간을 찡그리며 두 눈에 놀란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그는 손연지가 자신을 거절했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놀랐다.어젯밤까지 분명 자신을 위해 노민우에게 화를 냈었는데.노민우는 옆에서 킥킥 웃었다.“소영준, 손연지에 대한 더러운 생각 접어, 알았어? 안 그럼 내가 너 이 바닥에서 발 못 붙이게 할 거야.”소영준이 피식 웃었다.“노민우, 진심이야?”“내가 진심인지 아닌지는 네가 상관할 바 아니고.”말을 마친 노민우가 그대로 자리를 떠나자 소영준의 눈에는 조롱이 가득했다.바람둥이가 무슨 진지한 척인지....강하리는 다음 날 일어난 뒤 침대에 앉아 여전히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옆자리를 만져보니 차가웠다.하지만 침대에 남자에게서 풍기는 독특한 향수 냄새가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강하리는 침대 가장자리에 한참을 앉아있다가 숨을 내쉬고 일어나 씻었다.욕실에서 나올 때쯤 나문빈의 전화가 걸려 왔다.“문씨 집안이 미끼를 물었어요.”강하리의 눈이 반짝였다.
누구 하나 죽여도 눈 깜박하지 않을 정도로 차갑게 잘생긴 모습인데 이런 말을 듣다니.이 세상에서 구승훈에 대해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강하리가 유일할 거다.구승훈은 어두운 표정으로 최하영을 바라보았다.“최하영 씨, 제대로 손잡을 거면 그런 지저분한 짓은 하지 말고 그게 싫으면 지금 당장 당신을 다른 사람으로 바꿀 겁니다. 그리고 그 여자와 같은 자리에 나타나지 마세요. 그 여자 위험하게 만들면 가만 안 둘 겁니다!”구승훈은 말을 끝내고 돌아서서 걸어 나갔다.밖에 도착한 그는 참지 못하고 차를 몰고 손연지의 집으로 향했다.의자에 기대어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던 그가 안에서 걸어 나오는 강하리를 발견했고 그녀는 걸어가며 나문빈과 통화하고 있었다.전화를 끊은 그녀의 걸음이 멈칫했지만 아주 잠깐일 뿐 이내 자신의 차로 향했다.그녀가 차를 몰고 나가자 구승훈이 그 뒤를 따랐다.강하리는 회사에 도착해 차를 주차하고 구승훈을 슬쩍 바라본 뒤 곧장 건물로 향했다.구승훈이 서둘러 그녀를 끌어당겼다.“최하영과 거리를 둬, 좋은 사람이 아니야.”강하리는 그를 바라보았다.“구승훈 씨, 당신이 내 입찰에 손댔어?”구승훈의 표정이 굳어졌고 강하리가 발을 들어 다리를 걷어차려 하자 무의식적으로 피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하이힐에 차인 다리에 생경한 고통이 밀려왔고 그는 다소 창백한 얼굴로 강하리를 바라보았다.“아파!”강하리가 그를 노려보았다.“쌤통이야.”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곧바로 엘리베이터로 들어갔고 구승훈은 순식간에 그 뒤를 따랐다.강하리는 그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구 대표님께선 뭐 하러 따라오세요?” 구승훈은 조용히 강하리를 바라보았다.“하리야, 우리 얘기 좀 해야 할 것 같아.”강하리의 얼굴에 비웃음이 번지더니 한 걸음씩 그에게 다가갔다.“무슨 얘기요? 당신이 몰래 우리 회사 건드린 얘기? 아니면 어젯밤 한밤중에 우리 집에 몰래 들어온 얘기?”강하리는 사실 구승훈이 그 집에 들어온 것이 전혀 놀랍지
구승훈의 걸음이 멈칫하며 안예서를 바라보았다.“저 꽃 누가 보낸 겁니까?”안예서는 미소를 지으며 구승훈을 바라보았다.“우리 부장님 쫓아다니는 사람이겠죠, 매일 보내요.”구승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주해찬? 아니면 임정원?”안예서는 어깨를 으쓱했다.“몰라요. 아무튼 부장님은 볼 때마다 무척 좋아하세요. 구 대표님도 아시겠지만 부장님 그동안 많이 힘들어하셨는데 다행히 매일 저 꽃을 볼 때면 그래도 조금씩 웃으시는 것 같아요.”구승훈은 말없이 안예서를 바라보았고 안예서가 서둘러 웃으며 말했다.“구 대표님, 전 일하러 가볼게요.”구승훈은 잠시 제자리에 서 있다가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이제부터 매일 리시안셔스 꽃다발을 JM으로 보내, 제일 좋은 걸로.”구승훈은 강하리의 사무실로 들어가지 않았다.지금 들어가도 별로 좋은 태도를 보이지 않을 것 같아 곧장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강하리는 구승훈이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손에 든 펜을 꽉 쥐었다.“부장님, 방금 구 대표님이 이제부터 매일 꽃을 보내겠다고 말하는 걸 들었어요.”강하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그럼 매일 거절해요.”“...”가끔은 구 대표가 조금은 불쌍했다.강하리는 눈앞에 계약서를 바라보면서도 정신은 다른데 팔린 상태였었다.구승훈 이 남자는 언제나 그녀에게 잔인하게 구는 것 같았다.그녀가 그를 사랑했을 때는 그녀의 사랑을 허락하지 않다가 이제 사랑하지 않으니 그녀에게 자신을 사랑하도록 강요한다.이젠 아기까지 잃었는데 그녀에게 피하도록 강요하고 있었다.강하리가 웃었다.대체 무엇 때문에 그녀만 계속 물러나야 하나.이번에는 아이를 위해서든 어머니를 위해서든 조금도 타협하지 않을 거다.구승훈의 차가 떠난 이후 한 차가 소리 없이 멀지 않은 길에 서 있었다.구정우는 옆에 있는 문연진을 바라보았다.이틀 전만 해도 문원진과 함께 손잡으려 했는데 문원진은 사생아인 그를 싫어했고 더 짜증 나는 건 구씨 집안 사람들이 슬슬 구승훈을 찾아 화해를 신청할 조짐이 보인다는 거
오늘 밤, 강하리는 제대로 몰락하게 될 거다.그녀가 구승훈과 밤을 보내는 동안 강하리는 여러 남자에게 둘러싸일 거라 생각하니 흥분을 주체할 수 없어 지금 당장 손을 쓰고 싶었다.그러나 문연진을 바라보는 구정우의 눈에 섬뜩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고 구승훈은 이런 두 사람의 행동을 전부 지켜보다가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보냈다.최하영의 휴대폰이 울리고 고개를 숙여 확인한 그가 강하리에게 말했다.“일이 좀 있어서요.”강하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나 반대편으로 걸어갔다.여러 재벌가 사모님이 서서 웃고 떠들고 있었는데 여초연의 시선이 줄곧 강하리에게 머물렀다.잠시 후 그녀가 걸음을 옮겨 강하리에게 다가왔다.“하리 양.”강하리가 뒤돌아보니 온화한 분위기에 미소를 머금은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달빛을 머금은 듯 은색 드레스가 그녀에게 감도는 분위기를 부드럽게 감싸주었다.강하리가 여초연과 만난 건 이번이 두 번째다.지난번 구동근의 생일 잔치에 갔을 때는 여초연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하지만 현재 구승훈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여초연이 특별히 인사하러 올 필요는 없어 보였다.“사모님, 무슨 일이죠?”여초연은 가슴 아픈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사고 소식은 들었는데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해요.”강하리의 입꼬리가 굳어지더니 잠시 후 시선을 내렸다.“다 지나간 일인걸요.”여초연은 한숨을 내쉬었고 두 눈엔 안타까운 감정이 한층 짙어졌다.“난 구씨 집안에서 입지가 있는 사람도 아니고 알다시피 승훈이 아빠가 사생아까지 데려와서 지금 구씨 가문에 있기 민망할 정도라 도와주지 못했어요. 하지만 하리 양, 그래도 우리 승훈이 포기하지 않아 줬으면 해요. 어렸을 때부터 고생도 많이 했고 힘들게 좋아하는 사람 만났는데 정말 잘 됐으면 좋겠어요.”강하리는 고개를 기울여 술 한 모금 마셨다.“저희는 이미 끝났어요.”그녀는 여초연에게 고개를 돌렸다.“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사모님.”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몸을 돌려 갑판으로 향했고 그녀를 바라보는 여초연의 눈동자가
최하영의 말에는 묘한 의미가 담겨 있었지만 강하리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앞자리에서 운전하던 노민우가 백미러로 뒷좌석을 흘깃 보며 가볍게 기침했다.“방금 공항에서 기다리는데 구승훈한테 전화가 와서 하리 씨 도착했는지 묻더라고요.”강하리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노민우는 혀를 차며 무언가 더 말하려다 강하리가 화제를 돌렸다.“최 대표님, 요즘 많이 바쁘세요?”최하영은 손에 들고 있던 염주를 천천히 굴리다 말고 흥미로운 듯 고개를 들었다.“왜요? 저랑 데이트하고 싶어요?”강하리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답했다.“제가 그런 영광을 누려도 될까요?”최하영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다른 사람이라면 힘들겠지만, 하리 씨라면 언제든지 가능하죠.”“좋아요. 그럼 그렇게 정해진 거예요. 일 끝나면 연락할게요.”강하리는 최씨 가문이 운영하는 호텔에서 묵기로 했다.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천아름에게서 영상 통화 요청이 들어왔다.전화를 받자마자 화면에는 불빛이 반짝이는 도시의 야경이 비쳤다.“예쁘지?”배경에서 손연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응, 예뻐.”“기분 좋아졌어?”“응.”손연지는 웃으며 덧붙였다.“그래, 행복해야 해. 쓸데없는 사람과 일에 너무 신경 쓰지 마. 친구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난 항상 곁에 있을 거야.”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고 강하리는 잠시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았다.그때 천아름이 나직하게 말했다.“오늘 연지가 구승훈을 봤대. 병원 앞에서 그 여자랑 말다툼하고 있었대.”강하리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천아름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그래도 좀 조심할 줄 알았는데, 오늘 저녁에 글쎄 구승훈이 그 여자 데리고 파티에 가고는 실시간 검색어에까지 올랐어. 흥!”강하리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그래? 둘 사이가 꽤 좋은가 보네.”“흥! 진짜 좋았다면 그 여자 욕먹게 그렇게 내버려뒀겠어? 난 구승훈이 뭔가 큰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아. 친구야,
“말도 안 돼요.”노민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하지만 강하리는 더 이상 이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차분하게 인수 건의 다음 단계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고 노민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듣고 있었다.“요즘 기명 제약 주식을 누군가가 계속 사들이고 있더라고요. 처음엔 하리 씨가 시킨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강하리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조사 안 해 봤어요?”노민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하리 씨가 한 줄 알았으니까 굳이 조사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죠.”강하리는 깊이 숨을 들이쉬며 뭔가 말하려던 순간, 어디선가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하리 씨,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마치 질기게 달라붙는 벌레처럼 그 혐오스러운 감각이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강하리를 따라다녔다.“안 대표님도 누구 데리러 오셨습니까?”노민우가 먼저 나서며 강하리 앞으로 살짝 몸을 움직여 그녀를 가렸다.하지만 안현우의 시선은 여전히 강하리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하리 씨, 오랜만이네요. 이제 인사도 안 해줘요? 아 깜빡했네요. 이제 심씨 가문의 아가씨죠?”그는 갑자기 피식 웃더니 일부러 한 마디 덧붙였다.“심씨 가문의 아가씨면 뭐 해요? 결국엔 남자한테 버려진 신세가 됐는데.”그 말을 들은 노민우의 얼굴빛이 변했다.“안현우, 그만둬!”하지만 안현우는 조롱 섞인 눈빛으로 비웃으며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왜? 아직도 이 여자랑 자고 싶어?”순간, 노민우는 안현우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안현우는 비틀거리며 손가락으로 입가의 피를 닦으며 계속 말했다.“내가 맞췄지? 아니면 둘이 이미 잤나? 어땠어, 좋았어?”눈이 뒤집힌 안현우는 당장이라도 다시 달려들 기세였다.“너 이 새끼, 미쳤어?”안현우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뭘 그렇게 흥분해? 우리 중에 그런 생각 안 해본 사람이 있기나 해?”노민우가 이를 악물며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강하리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그냥 가요. 저딴 놈이랑 말 섞을 필요 없어요.”강하리가 급히 차 문
병원을 나오자마자, 강하리는 주차장 한편에서 오토바이에서 내린 천아름을 발견했다.천아름은 그녀를 보자마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무슨 일이야? 괜찮아?”강하리는 짧은 숨을 들이쉬고 정신을 다잡으며 대답했다.“괜찮아. 그런데 넌 여긴 왜 왔어?”천아름은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쓸어넘기며 말했다.“손연지 데리고 드라이브 가려고. 산에 올라가서 야경 보면 예쁠 것 같아서. 같이 갈래?”강하리는 살짝 입술을 깨물다 웃으며 천아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아니야. 나 비행기 타러 가야 돼. 먼저 갈게. 너희끼리 재밌게 놀고, 나중에 보자.”그녀가 발걸음을 돌리려 하자 천아름이 손목을 붙잡았다.“힘든 일 있었어?”솔직히 너무 힘들었지만 티 내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천아름이 갑자기 환하게 웃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너 돌아오면 내가 남자 소개해 줄게. 잘생긴 댕댕남이야.”바로 문을 열고 나오려던 구승훈이 발걸음을 멈췄고 천아름을 향해 분노의 눈빛을 던졌다.천아름은 그 시선을 느끼며 일부러 구승훈 옆에 선 임희주를 도발적인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아이고, 구 대표님, 이렇게 아무나 만나고 다니는 거예요?”임희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무슨 뜻이에요?”천아름은 입꼬리를 한쪽 올리고 강하리를 힐끔 보며 능청스럽게 덧붙였다.“봤지? 본인 얘기하는 건 아나 봐.”그녀는 장난스럽게 강하리의 턱을 살짝 잡아 들어 올렸다.“됐어. 가. 돌아와서 소개팅은 꼭 해.”강하리는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무런 미련 없이 돌아섰다.구승훈은 강하리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며 그녀의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도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그 후에야, 천아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천아름 씨, 남 일에 참견하지 마세요.”천아름은 비웃음을 흘렸다.“구 대표님은 이렇게 여자 데리고 다니면서, 우리 하리는 왜 안 돼요?”그러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임희주를 훑어보며 말했다.
구승훈이 목을 움찔거리며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강하리의 뒤편에서 임희주가 다가왔다.“구 대표님 아내분도 계셨네요?”문 앞에 선 임희주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강하리에게 인사했다.하지만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이 성큼성큼 진료실 안으로 들어서더니, 구승훈 옆으로 바짝 다가가 친근한 목소리로 말했다.“다 끝났어요? 끝났으면 가요.”구승훈은 강하리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짧게 대답했다.“곧 끝나니까 기다려요.”임희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멍든 복부에 손을 갖다 대더니 천연덕스럽게 눌러보았다.그 순간, 구승훈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고 임희주는 별것 아니라는 듯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문 앞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하리는 피식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그러곤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와 임희주를 바라보며 말했다.“임 선생님, 잠시 밖에서 기다려 주시겠어요?”임희주가 입을 떼려는 순간, 강하리는 바로 준봉에게 시선을 돌렸다.“임 선생님 모시고 나가 주세요.”준봉은 즉시 대답하고는 임희주에게 공손히 말했다.“임 선생님, 가시죠.”임희주는 구승훈을 한 번 노려보았지만 그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코웃음을 치며 돌아섰다.간호사는 강하리와 구승훈을 번갈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강 대표님, 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이제 진료실에 남은 건 둘뿐이었다.강하리는 말 없이 구승훈의 배에 난 상처를 내려다보고는 옆에 놓인 소독 거즈를 집어 들고 임희주가 손을 댔던 자리부터 강하게 닦기 시작했다.그러자 구승훈이 강하리의 손목을 움켜잡았다.강하리는 몇 번 뿌리쳤지만 그는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다.강하리의 눈은 벌써 붉어져 있었고 창백한 얼굴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으며 눈빛은 날카로운 칼날 같았다.구승훈은 피식 웃으며 낮게 말했다.“뭐 하자는 거지?”강하리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그 말을 해야 할 사람은 나인 것 같은데? 구승훈, 지금 뭐 하자는 거야?”구승훈은 강하리의 손을 놓아주고는 아무렇지
택시는 천천히 달렸다.강하리는 차에 앉아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불빛들을 바라보며 자기 행동에 의구심을 가졌다.구승훈은 확실하게 말했었다. 이제 강하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하지만 강하리는 그저 구승훈이 어떻게 지내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를 잊기 위한 행동일 지도 모른다.퇴근 시간의 정체 속에서 차는 병원 앞에 도착했고 강하리는 차에서 내려 깊은숨을 들이쉬며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응급실은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구승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이미 떠난 걸까? 강하리는 응급실을 둘러보며 끝내 찾을 수 없게 되자 결국 심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심준호는 강하리가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자 피식 웃으며 말했다.“아마 방금 엑스레이 찍었을 거야. 에휴, 너는 그 녀석을...”심준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하리는 전화를 끊었다.심준호의 맞은편에서 이를 지켜보던 심예진이 눈을 깜빡이며 웃었다.“하리가 전화 끊어버렸어?”심준호는 휴대폰을 무심히 치우고 천천히 스테이크를 썰어 접시를 심예진 앞으로 옮겼다.“이번에 한국에 얼마나 있을 거야?”심예진은 포크를 입에 물고 잠시 생각했다.“설 지나고 갈게. 하리 일 때문에 아빠랑 할아버지가 요즘 기분이 안 좋으셔.”심준호는 짧게 대꾸했다.“그래. 그 사람과는 헤어져.”심예진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오빠, 무슨 소리야? 왜 그래?”심준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아빠와 할아버지가 우리 결혼 재촉하는 거 알잖아. 그래서 요즘 기분이 안 좋으셔.”심예진은 조급한 듯 말했다.“하지만 오빠, 우리는 그냥 연기하는 거라고 했잖아. 부모님 기분 맞춰드리려고 한 거라면서.”심준호는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심예진을 보며 미소 지었다.“걱정하지 마. 결혼도 연기야. 네 사업에 영향 주지 않을 거야. 다만 네 남자 친구는...”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헤어지는 게 좋겠어. 안 그러면 부모님과 할아버지가 오해하실 수도 있으니까.”심예진은 입술을 꽉 깨물며 눈가에 눈물이
강하리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표면적인 평온함은 결국 깨져 버렸고 그녀는 심준호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삼촌, 구승훈에게 무슨 일이 있었어요? 삼촌은 알고 있죠?”심준호는 룸미러를 보며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오늘 승훈이가 내 사무실에 와서 유언장을 작성했어. 아마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확실해. 아니면, 누가 그 나이에 유언장을 쓰겠어?”강하리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졌고 손톱이 손바닥을 깊이 찔렀다.심준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어찌 됐든 너에게 숨긴 거잖아. 죽어도 싸. 안 그래?”강하리는 심준호를 묵묵히 바라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심준호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굳이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차가 JM 건물 앞에 멈추자 심준호는 강하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출근해. 쓸데없는 놈 때문에 괜히 신경 쓰지 말고. 나중에 삼촌이 좋은 사람 소개해 줄게.”하지만 강하리는 바로 회사로 향하지 않았고 뒤돌아 정안 빌딩을 바라보았다.“삼촌도 구승훈이 왜 그런 건지 모르는 거예요?”심준호는 부정하지 않았다.“어쨌든 나는 승훈이에겐 남이니까.”강하리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저도 마찬가지예요.”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JM 건물로 향했다.심준호는 강하리가 사라지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분명 서로 마음이 있는데 왜 이렇게 서로를 괴롭히는 걸까?강하리는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회의실로 들어갔다.기명 제약 인수 건은 이미 시작되었고 강하리는 신중하게 모든 단계를 꼼꼼히 살폈다. 이것은 결국 손연지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이었기에 어떠한 실수도 용납할 수 없었다.앞으로의 진행 과정을 결정하고 나니, 어느덧 저녁 시간이 되었다.강하리는 회의실에서 나와 안예서에게 말했다.“오늘 저녁 연성시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예약해 줘.”안예서는 대답하며 바로 예약을 진행했다.그 순간, 강하리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역시 심준호였다.[아, 맞다. 깜빡했네. 그 녀석, 다친 것 같
강하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눈앞에 있는 차는 그녀에게 익숙했다.얼마 전 심준호 생일에 그녀가 직접 선물했던 차였다.심준호는 차에서 내려 석연란과 심연청을 바라보았고 그 시선에 두 사람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특히 심연청은 더욱 그랬다.심씨 가문 사람 중에서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바로 그녀의 사촌 오빠, 심준호였다.“오빠...”심연청은 매우 낮은 목소리로 인사했고 조금 전까지의 거만함은 온데간데없었다.석연란도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준호야, 무슨 일로 왔어?”심준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제 조카 데리러 왔어요.”그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덧붙였다.“아, 방금 구승훈이 나를 찾아왔는데, 이혼하기 싫다고 징징거리더라. 그러니까 기다리지 마.”석연란과 심연청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굳어졌다.그들은 드디어 집안에서 한숨 돌릴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하며 결혼식 날 강하리가 혼자 남겨진 모습을 보며 속으로 통쾌함을 느꼈던 그들이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구승훈이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니?“준호는 참 자기 사람한테 잘해준다니까. 하지만 이 결혼을 후회한 사람은 다름 아닌 구승훈 당사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심준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그래서 이제 와서 아무리 후회해도 받아줄 수 없다는 거죠.”석연란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심준호는 이미 강하리를 데리고 차로 향하고 있었다.“삼촌이 그랬잖아. 이런 인간들 만나면 말로 싸울 필요가 없다고. 그냥 바로 한 대 갈기면 되는 일을 뭐 하러 목 아프게 말다툼해?”심준호는 말하면서 강하리를 차에 태운 후, 자신도 옆자리에 올라타고는 바로 자리를 떠났다.석연란은 심준호의 차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를 갈았다.“엄마, 오빠 말이 진짜야? 구승훈, 후회하는 거야?”석연란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말도 안 돼. 구승훈이 뭐가 아까워서 강하리 같은 여자한테 매달리겠어? 그냥 한때의 감정이지. 곧 다른 여자 찾을 거야. 두고 봐. 남자들은 원래 다 그렇잖아.”그녀의 눈빛이
만약 진짜로 아직 희망이 있었다면 이혼하고 나중에 일이 해결되면 다시 그녀를 되찾으면 되는 거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들의 유일한 연결고리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구승훈은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한참 후 쓴웃음을 지었다.그는 희망을 버린 것이 아니라 희망을 품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었다.여초연과의 문제는 해결책을 찾고는 있지만 해결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여초연은 차라리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의 행복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게다가, 그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고 있었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언젠가 갑작스레 생을 마감할 수도 있었다.그래서 그는 유언장을 쓰고 싶었다.그가 줬던 것들을 강하리는 모두 되돌려줬다. 하지만 유언장에 적힌 것이라면 돌려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구승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심준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절차에 따라 유언장을 작성해 주었다.일을 마치고 나서야 심준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네 가족이야. 도움이 필요하면 혼자 감당하려 하지 마.”구승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마워, 삼촌.”심준호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흥! 빨리 병원에 가서 치료나 받아. 피 냄새가 진동하네.”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심준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강하리 쪽은 내가 설득해 보겠지만, 하리 성격을 너도 알잖아. 만약 하리가 계속 이혼을 고집한다면 나도 굳이 강요하지 않을 거야.”구승훈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문손잡이를 꽉 쥐었다. 긴 침묵이 흐르고 그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알았어.”가정 법원 앞에서 강하리는 계단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그녀의 표정은 차분하고 침착한 모습에서 조용하고 쓸쓸한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결국 구승훈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그녀는 실망해야 할지, 아니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몰랐다.그러나 그녀는 알고 있었다.
심준호는 그 말을 듣고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어릴 적부터 구승훈과 함께 자랐고 그가 강하리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줬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항상 구승훈 편에 서서 도왔지만 이번만큼은 너무 지나쳤다.“이혼하기 싫다고? 난 네가 이혼하고 싶지 않아 하는 모습이 전혀 안 보이는데?”심준호는 비웃는 표정을 짓고는 이내 휴게실로 가서 약상자를 가져와 책상 위에 던졌다.“알아서 약 찾아 발라.”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넥타이를 쓰레기통에 내던졌고 구승훈은 문에 기대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약은 괜찮아. 그렇게 몸 약한 사람 아니야.”심준호는 그를 무시한 채 책상에 앉았다.“오늘 가정 법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었어?”구승훈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소파에 앉았다.심준호는 그 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 아무리 세게 때렸다고 해도 앉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다쳤을 리가 없었다.“다쳤어?”하지만 구승훈은 그 질문을 무시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강하리에게 전화해서 기다리지 말라고 해.”심준호는 전화를 걸지 않았고 그의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다.“다쳤으면 병원에 가.”구승훈은 테이블 위에 놓인 리시안셔스 꽃다발을 내려다보다가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준호야.”이 망나니는 평소에는 뻔뻔하게 ‘삼촌’이라고 부르다가, 이럴 때는 다시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이혼할 마음을 먹은 것 같네.”구승훈은 손가락으로 꽃잎을 쓸며 말했다.“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심준호는 구승훈을 조용히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부탁인데?”구승훈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나, 유언장을 쓰고 싶어.”심준호는 깜짝 놀란 기색을 보이며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대체 무슨 일이야?”그는 구승훈이 강하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그가 강하리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구승훈이 이렇게 행동하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심준호뿐만 아니라 강하리도 분명히 구승훈에게 무슨 사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