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승훈의 말을 듣던 구승재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강하리가 이 사실을 알면 더 화를 내겠지?나중에 강하리가 진실을 알게 되면 형을 어떻게 대할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그는 살짝 한숨을 내쉬더니 바로 화제를 돌렸다.“문씨 가문에서 이번에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으니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구승훈의 짙은 눈동자가 가늘어졌다.“그럼 감히 움직이지 못하게 해.”문연진은 이틀 동안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특히 오늘은 강하리가 가벼운 상처만 입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저 나쁜 년은 매번 구승훈의 보호를 받는데 왜 그녀는 안 되는 걸까!문연진은 친구들과 술집에서 약속을 잡았고 술집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밖에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그녀는 비틀거리며 차로 가서는 옆에 있던 대리기사에게 차 키를 던졌다.대리기사는 차 키를 받으면서 잠시 눈을 번쩍이더니 곧바로 차 문을 열었다.차에 올라탄 문연진은 곧바로 시트에 기대앉았다.“임페리얼 팰리스.”대리 기사가 대답하고 시동을 걸며 차를 출발시켰다.“아가씨, 눈이 와서 길이 미끄러우니 속도가 느릴 수 있어요. 너무 급한 건 아니죠?”“안 급해.” 문연진이 어눌하게 대꾸하자 대리 기사는 더 말하지 않았다.고급 외제차가 얼마 지나지 않아 시내를 빠져나갔고 시트에 기대앉은 문연진은 진작 잠이 든 지 오래였다.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자신의 차가 외딴곳 한가운데에 주차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이윽고 그녀가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트럭 한 대가 옆으로 돌진해 오며 그대로 추돌했다.“꺄아악!” 처절한 비명이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문연진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문원진은 B시에서 급히 달려왔다.이마와 팔에 붕대를 감은 채 병실 침대에 누워 있는 문연진을 보자마자 그는 피를 토할 뻔했다.“할아버지!”문연진은 문원진을 보자 불쌍하게 외쳤다.문원진의 얼굴은 분노로 파랗게 질렸다.“걱정하지 마, 할아버지가 널 위해 반드시 처리해 줄게!”문원진은 분노에
“구승훈! 너 진짜 우리랑 등 돌릴 거야?”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전 이미 등 돌린 걸로 알고 있는데요.”문원진은 콧방귀를 뀌었다.“구승훈, 내가 정말 강하리를 죽일까 봐 두렵지 않아?”“그럼 제가 문연진을 죽이는 것도 각오하세요.”“너...”“보시다시피 강하리가 입은 모든 부상은 문연진에게 두 배로 돌려줄 겁니다. 그러니 어르신, 행동하기 전에 잘 생각하시고 움직이세요.”구승훈은 그렇게 말한 뒤 전화를 끊고 사무실 문을 열었다.그곳엔 최하영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비서 불러서 마실 것 좀 드릴까요?”최하영이 웃었다.“마실 건 됐고 오늘 좀 볼 일이 있어서 왔어요.”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말씀하세요.”최하영은 빙빙 돌리지 않고 구승훈 앞에 직접 기획안을 내밀었다.“그쪽 아내가 오늘 아침 저한테 보낸 거예요.”구승훈은 깜짝 놀라 황급히 그것을 집어 들고 살펴봤다.놀랍게도 문씨 가문 강북의 합병 기획안이었다.[문씨 가문의 강북 시장은 문연진의 부친이 쥐고 있는데 요즘 해외 에너지 시장에 눈독을 들이고 있으니 제가 덫을 놓아 큰 손해를 보게 하죠. 그러면 문씨 가문의 주식시장은 반드시 폭락할 것이고 그 기회를 틈타 그쪽이 강북의 시장을 집어삼키세요.]“아내분께서 직접 저한테 한 말 그대로예요.” 최하영은 구승훈을 바라봤고 구승훈은 꾹 누르더니 잠시 후 다소 씁쓸한 표정으로 기획안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계획서에는 문씨 가문을 유인하고 문씨 가문의 신뢰를 얻으며 사후에 책임을 회피할 방법까지 명확하게 적혀 있었다.그는 강하리가 똑똑하고 사업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문씨 가문의 강북에 눈독을 들이고 문씨 가문의 뿌리를 건드리며 심지어 이렇게 빠른 속도로 완벽한 계획까지 내놓았다는 사실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더 놀라운 건 그가 거절한 뒤 최하영을 찾아갔다는 거다.평소 최하영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이 일은 또다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진행됐을 것이다
최하영은 정안그룹 건물에서 나와 길가에 주차된 랜드로버로 곧장 향했다.강하리는 운전석에 앉아 눈썹을 치켜뜬 채 최하영을 바라봤다.“어때요?”최하영은 복잡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예상한 거 아닌가요?”강하리는 쓴웃음을 지었다.“네, 예상했죠.”그래도 시도해 보고 싶었다.아이 아빠인데 아이의 복수를 위해 누군가와 손을 잡아야 한다면 그 사람이 구승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은...“기획안 가져가세요.”최하영이 웃었다.“구승훈 씨가 앞으로 구씨 가문 남은 구역은 제 거라네요. 강하리 씨는 뭘 약속하실 거죠?”강하리는 눈을 내리깔고 차갑게 웃었다.“구씨 가문뿐만 아니라 문씨 가문도 당신 것이 될 수 있어요.”최하영은 웃음을 터뜨렸다.“오케이!”그렇게 말한 뒤 그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어 통화 중이던 전화를 끊었고 저쪽에서 구승훈이 눈썹이 찡그렸다.곧 빠르게 최하영의 휴대폰으로 메시지가 도착했다.[나도 똑같이 문씨 가문을 줄 수 있습니다.][늦었어요, 전 약속 지키는 사람입니다.]최하영이 떠난 후 강하리는 나문빈에게 곧장 전화를 걸었다.“L국에 좋은 에너지 프로젝트가 있는데 파트너를 찾고 싶다고 소문을 내봐요.”나문빈은 짧게 대답하며 물었다.“구승훈이 협력하기로 했어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꼭 그 사람과 협력할 필요는 없죠.”나문빈은 혀를 찼다.“그래요. 참, 알아보라고 한 연구소에 대한 정보 가져왔어요.”강하리가 멈칫했다.“어떤데요?”“노민준이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곳인데 미숙아를 전문으로 데려오는 곳이에요.”강하리는 전화기를 꽉 쥐었다.“노진우 씨 아이에 대한 정보는요?”나문빈 쪽에서 서류를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아빠가 노진우인 아이가 있긴 한데 아이는 열흘 전에 데려왔고 엄마가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미숙아로 태어났다고 나와 있어요.”“열흘 전에요?” 강하리의 마음속에 어렴풋이 피어오르던 희망은 순식간에 실망으로 바뀌었고 반짝이던 눈빛이 꺼져 들어갔다.“네.”강하리는 입술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고 문원진은 살짝 미간을 찌푸린 뒤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지?”저쪽에서 구정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르신, 우리 만날까요?” ...강하리가 집으로 돌아오자 손연지의 통화 소리가 들렸다.유난히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잠시 당황하다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아마 소 교수겠지.그녀는 손연지를 슬쩍 바라보고는 돌아서서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나문빈은 일 처리가 매우 빨랐고 북유럽 에너지 웹사이트에 L국의 동북구 유전이 개발을 앞두고 있다는 뉴스를 올렸으니 이제 문씨 가문이 미끼를 물기만 기다리면 되었다.그녀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이것은 첫걸음에 불과했다.문씨 가문이든 구씨 가문이든 반드시 피의 대가를 치르게 할 거다!손연지는 전화를 끊고 설렘 가득한 얼굴로 다가와 강하리를 안았다.“하리야! 나 소 교수님이랑 데이트하기로 했어!”강하리는 깜짝 놀랐다.“정말? 언제?”손연지는 윙크했다.“오늘 밤에.”강하리는 얼굴을 찌푸렸다.“둘만?”손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물론이지, 안 그러면 왜 데이트겠어?”강하리가 슬쩍 눈을 번뜩였다.“정말 노민우 씨는 별로야?”손연지는 입을 삐죽거렸다.“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미친놈은 아니야!”강하리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알았어, 그럼 소 교수님하고 데이트 잘해. 하지만 명심해, 술은 안 돼. 술 먹기 전에 주소 알려주면 내가 데리러 갈게.”손연지는 서둘러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넌 집에서 푹 쉬어, 알겠지?”손연지가 나간 뒤 강하리는 씻고 나와서 컴퓨터를 켰다.컴퓨터에는 주해찬이 다운해 놓은 영화 몇 편이 있었고 강하리가 무심하게 화면을 들여다보는데 잠시 후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손연지의 전화인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나문빈이었다.“정양철이 구정우와 함께 프로젝트를 입찰할 건데 내일 오전에 공개 입찰이 있으니 참석하려면 지금 당장 B시로 와야 해요.”강하리는 멈칫했다.“그걸 왜 지금 말해요?”“누가 우리 쪽으로 오는 정보를
그들의 대화를 듣던 노민우의 표정이 굳어지며 문을 열고 곧장 걸어 들어왔다.소영준은 노민우를 보고 처음에는 당황하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노민우 씨, 오늘 웬일로 여길 다 왔네요?”노민우가 웃었다.“마침 이렇게 만나네요. 소 교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왔어요.”소영준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영광이네요, 한잔하실래요?”노민우가 테이블에서 술잔을 하나 들어 올리는데 그가 마시기도 전에 옆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소리쳤다.“엇, 노민우 씨. 그 술잔은 당신을 위해 준비한 게 아니에요.”노민우가 멈칫하다가 곧 웃으며 말했다.“오호, 이 술은 특별한 건가 봐요?”남자가 히죽 웃었다.“오늘 소 교수님이 데리고 온 아가씨를 위해 준비한 거랍니다.”노민우의 얼굴에 싸늘한 기색이 스쳐 지나가며 술잔을 들어 올린 그는 무심하게 소영준의 얼굴에 부어버렸다.“미안해요, 손이 미끄러졌네요.”옆에 있던 여자와 농담을 주고받던 소영준은 갑자기 노민우가 술을 들이붓자 순식간에 안색이 어두워졌지만 그래도 노씨 가문의 체면을 봐서 화를 꾹 참았다. “노민우 씨, 뭐 하는 겁니까!노민우는 웃기만 했다. “이미 말했잖아요, 손이 미끄러졌다고.”그렇게 말하며 그는 와인 잔을 하나 더 집어 들었다.“소 교수님께 배상해 드리면 되잖아요.”소영준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졌지만 결국엔 노민우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테이블에서 휴지를 뽑아 얼굴을 닦은 뒤 와인 잔을 들고 노민우와 잔을 부딪치려는 순간 노민우가 이번에는 소영준의 바지에 술을 흘렸다.하필 액체가 중요 부위 쪽에 흘러내렸고 그제야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노민우, 너 이 자식...”소영준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노민우가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내리쳤다.“내가 뭐?”얼떨결에 맞은 소영준은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너한테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그런데 말을 꺼내기 바쁘게 그의 눈동자가 번뜩였다.“설마 손연지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니지?”소영준은 손
“노민우, 한 번만 더 때리면 내가 너 가만 안 둬!”멈칫하던 노민우는 움직이지 않았고 소영준은 이 틈을 타 노민우의 얼굴에 주먹 두 방을 날렸다.이미 시뻘겋게 물들어 있던 노민우의 얼굴은 순식간에 더욱 일그러졌다.그는 손연지를 힐끗 바라보다가 손을 들고 다시 소영준에게 주먹을 날렸다.손연지는 너무 화가 나서 그의 가슴을 때렸다.“너 미쳤어, 왜 소 교수님을 때려?”노민우가 차갑게 웃었다.“왜 때리겠어, 맞을 짓을 했으니까!”소영준은 옆에서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손 선생님, 앞으로는 감히 선생님과 데이트 못하겠네요.”그렇게 말한 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데 두 발짝도 떼기 전에 노민우가 그에게 발차기를 날렸다.“앞으로 또 손연지 건드리면 그땐 내가 너 죽여버릴 거야!”손연지가 서둘러 그를 끌어당겼다. “노민우, 그만해!”노민우는 손연지를 바라보며 화를 냈다.“저런 쓰레기 같은 자식이 뭐가 그렇게 좋아?”그렇게 말한 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손연지는 너무 화가 났고 소영준에게 다가가 사과를 하려는데 노민우가 갑자기 돌아와서 손연지를 잡아끌었다.밖으로 나온 뒤에야 노민우는 손연지를 노려보았다.“이제부터 소영준이랑 말도 섞지 마.”말을 마친 그가 잠시 멈칫했다.“아니, 앞으로 중앙병원에 출근도 하지 마. 그 쓰레기한테서 멀어져.”손연지는 화가 났다.“노민우, 오늘 제대로 미친 거야?”노민우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소영준이 네 술에 약을 탄 건 알고 있어? 손연지, 내가 조금만 늦게 왔어도 넌 오늘 큰일 났어!”멈칫하던 손연지가 반박했다.“말도 안 되는 소리, 소 교수님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하지만 전보다 한결 낮아진 목소리였다.노민우는 화가 나서 씩씩거렸다.“못 믿겠으면 룸 안에 있던 사람들한테 가서 물어봐. 손연지, 소영준한테 미쳐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손연지는 조금 씁쓸한 표정이었다.“입 다물어.”말을 마친 그녀가 돌아서서 가려는데 노민우는 곧장 그녀에게
손연지가 목을 가다듬었다.“그래도 형이 의학 천재인데 넌 이런 것도 몰라? 노민우, 치질 연고가 부기와 멍을 가라앉히는 데 최고야.”“웃기지 마, 난 안 발라!” 노민우는 죽어도 치질 연고를 바르지 않으려 했다.“너 지금 복수하는 거지? 손연지, 난 오늘 너 때문에 다친 거야.”“네가 미친 걸 왜 내 탓을 해.”말은 그렇게 했지만 손연지는 내심 마음이 불편했다.사실 오늘 데이트 장소에 도착했을 때 소영준이 사람을 많이 부르는 걸 보고 진심으로 데이트하려는 게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속으로 줄곧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노민우가 그 술잔을 언급하기 전까지는.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이 정말 사람을 잘못 보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손연지의 눈동자에 암담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내가 거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어?”노민우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강하리 씨가 나한테 연락해서 너 데려다주라고 했어. 그래도 강하리 씨 눈에는 내가 믿을만한 사람이라는 거지.”손연지는 얼굴을 찡그렸다.“하리는 어디 있어?”“B시로 갔어.”노민우가 그녀를 바라봤다.“손연지, 앞으로는 승훈이한테 그러지 마. 걔가 강하리 씨 진심으로 사랑하는 건 누구나 다 알아.”손연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그래, 하리를 사랑하겠지. 근데 하리가 받은 상처는 전부 그 사람 때문이잖아. 엄마도 잃고 이젠 아이까지 잃었는데 그런 사랑을 누가 원해?”말문이 막힌 노민우는 순간 할 말을 잃었고 손연지는 자리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넌 몰라. 한밤중에 일어나면 하리 우는 소리가 들리는데 나도 어떻게 위로를 해줘야 할지 모르겠어.”노민우는 심장이 저릿했다.“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손연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래도 그 과정이 너무 힘들잖아. 난 하리가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질까 봐 무서워. 지금은 그래도 복수를 위해서 사는데 정말 언젠가 문씨 가문, 구씨 가문이 다 망하면 그땐 하리가 어떻게 살아갈지 모르겠어.”“그때쯤이면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지
노민우가 남자구실을 제대로 못 할 줄 알았는데 이 정도일 줄은...노민우는 얼굴부터 귀 끝까지 붉어진 손연지를 바라보면서 목울대가 크게 요동쳤다.“느껴져? 이래도 내 물건이 부실하다고 할 거야?”손연지는 자존심에 괜히 이렇게 말했다.“겉만 그럴듯하지 한두 번 하고 지치겠지 뭐.”노민우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그럼 오늘 밤에 제대로 해보자고.”그는 말을 마친 뒤 몸을 뒤집어 손연지의 위로 올라탔다.당황한 손연지가 손을 뻗어 그를 밀어내려는데 노민우는 꽉 껴안고 죽어도 놔주지 않았다.그동안 계속해서 손연지에게 모욕적인 말을 들었는데 오늘 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그런데 바로 그때 갑자기 하체에 한기가 느껴졌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손연지의 메스가 바로 그곳에 닿아 있었다.노민우는 순간 감히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손연지, 너 미쳤어? 정말 날 다치게 하면 네가 그 대가를 감당할 수 있어?”손연지가 그를 옆으로 밀쳤다.“말했잖아, 나한테 작업 걸지 말라고!”노민우는 날아간 화살처럼 벌떡 튀어 오르며 발끈했다.“왜, 아직도 소영준이랑 자고 싶어?”소영준을 언급하자 손연지는 속으로 짜증이 밀려왔다. 오늘 소영준의 기분을 상하게 했으니 앞으로 데이트하기는 그른 것 같았다.그녀는 짜증을 내며 노민우를 옆으로 밀쳐냈다.“저리 비켜, 너만 보면 짜증 나.”바로 그때 노민우가 그녀의 손을 낚아채 손에 들린 메스를 빼앗고는 몸을 뒤집어 그녀를 자신의 밑에 가두었다.“손연지, 해보고 싶지 않아? 어차피 한 번 같이 잤는데 그 기분 다시 느껴보고 싶지 않냐고. 그날 밤에 너도 계속 좋다고 했어.”손연지는 노민우를 잠시 노려보다가 곧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제대로 해.”노민우의 눈동자가 밝아지며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었다....비행기에 오른 강하리는 자기 자리를 찾아갔고 뜻밖에 고개를 들어보니 구승훈이 자신의 옆 좌석에 앉아 있었다.구승훈도 그녀를 보고 얼굴을 찡그리며 다소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아마 그녀도 내일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가자 연정이가 강하리를 보고 손을 내밀었다.손연지는 강하리의 쇄골에 난 이빨 자국을 보고는 혀를 찼다.“구승훈은 역시 개다.”강하리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나도 그렇게 생각해.’강하리가 연정이를 안을 때 손연지는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머뭇거렸고 강하리는 눈썹을 치켜올렸다.“왜 그래? 노민우가 연락했어?”손연지가 웃었다.“아니.”“지금까지 연락이 안 왔다고?”손연지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보고 싶지 않아.”강하리가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손연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내 일은 됐고 하리 너랑 주해찬은 어떻게 된 거야?”멈칫하던 강하리가 이내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어제 구승훈의 휴대폰에서 봤던 동영상과 협박 문자가 머릿속에 떠올랐다.“무슨 소문이라도 났어? 아니면 동영상인가?”강하리의 목소리는 눈에 띄게 차가워졌고 손연지는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화제를 바꾸려고 했다.그런데 강하리가 직접 휴대폰을 꺼냈다.“안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손연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강하리가 웃었다.“못 볼 것도 없어. 다른 사람이 날 어떻게 모함하는지 봐야지.”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휴대폰을 클릭한 뒤 보이는 조롱에 얼굴에 머금었던 웃음이 조금은 사라졌다.앞서 구승훈이 요란하게 프러포즈하기 바쁘게 그녀가 다른 남자와 있는 영상이 폭로되었고 인터넷에서는 온갖 험한 말들이 쏟아졌다.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뜨린 강하리가 휴대폰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보지 마, 배고프지? 내가 밥해줄게.” 손연지가 그녀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으려던 찰나 구승훈의 전화가 걸려 왔고 그녀는 강하리를 바라보았다.“구승훈이 오해하진 않겠지?”강하리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안 그래.”그렇게 말한 뒤 강하리는 구승훈의 전화를 받았다.“일어났어?”강하리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구승훈은 곧바로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픈 곳은 없는지, 밥은 먹었는지 물었다
한편, 진태형의 집에서 나온 진시연은 눈가에 맺혔던 눈물이 말끔히 사라졌고 아무도 나오지 않은 집을 돌아보며 가슴 한구석에 서늘한 기운이 올라왔다.결국 진태형에겐 강하리가 더 중요했던 거다.진시연의 눈동자가 내키지 않는 듯 번쩍이며 휴대폰을 꺼내 이정숙에게 전화를 걸려고 할 때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심씨 가문의 셋째 딸 심연청이었다.진시연과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그녀는 진시연의 복수를 위해 얼마 전 사람을 시켜 JM 홈페이지를 해킹하고 강하리를 욕하게 한 장본인이었다.진시연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연청아, 무슨 일이야?”심연청은 직격탄을 날렸다.“강하리랑 구승훈이 혼인 신고한 거 알아?”진시연은 굳어버렸다.“뭐라고?”심연청은 잔뜩 화가 나 있었다.분명 진시연은 구승훈이 강하리와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고 강하리가 구승훈에게 결혼을 거절당한 우스운 꼴을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오늘 할아버지 댁에 도착했을 때 강하리가 구승훈과 혼인신고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게다가 심준호는 그녀를 위해 그렇게 많은 결혼 선물까지 준비했다.분명 그녀야말로 심씨 가문 사람인데 이젠 강하리가 그녀보다 더 많은 걸 누리고 있었다.대체 왜?강하리 그 망할 년이 무슨 자격으로!몇 명의 남자랑 뒹굴었는지도 모를 걸레를 심씨 가문에선 그녀보다 더 귀하게 챙기고 있었다.밤새 화가 나 있던 심연청은 결국 참지 못하고 진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강하리와 구승훈이 혼인신고하고 검색어까지 올랐는데 설마 모르고 있었어?”진시연은 곧바로 전화를 끊고 SNS에 접속했다.인기 검색어에 두 이름이 나란히 걸려 있는 것을 본 진시연은 또다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아빠는 그녀를 버렸고 구승훈마저 강하리가 빼앗아 갔다.강하리.전부 강하리다.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강하리를 둘러싸고 있는 건지!대체 그녀가 강하리보다 못한 게 뭐가 있어서?게다가 구승훈은 정말로 강하리와 혼인신고를 했다. 강하리와 주해찬 사이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건가?진시
강하리를 몇 번이고 건드린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다만 자신을 키워준 진태형이 얼마나 정직하고 의리가 있는 사람인지 너무 잘 알았다.그렇지 않았다면 심미현 때문에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결혼조차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그러니 자신이 한 일을 설사 그가 안다 해도 어쨌든 그가 키운 딸이기에 화를 낼 뿐이라는 걸 알았지만 이번엔 강하리를 위해 그녀조차 버릴 줄이야.진시연은 내내 기다리다가 깊은 밤이슬을 맞으며 돌아오는 진태형을 보았고 눈물을 흘리며 소파에 앉아 있는 진시연을 보고 진태형은 걸음을 멈췄다.하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 그의 표정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야?”진시연은 계속해서 바닥으로 눈물을 떨구었다.“아빠, 이젠 날 버리는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난 아빠 딸이라고 했잖아!”진태형은 눈물을 흘리는 진시연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손을 들어 휴지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몇 살인데 아직도 그렇게 울어?”진시연은 진태형의 마음이 약하다는 것을 알았다.“아빠, 난 그냥 무서워서...”“빨리 눈물 닦고 돌아가서 자.” 진태형이 그녀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덧붙이자 진시연은 충격에 빠졌다.“아빠, 나보고 어딜 가라는 거야? 여기가 내 집이잖아.”진태형은 깊은 분노가 담긴 눈으로 진시연을 바라보았다.“시연아, 내가 기회를 줬잖아. 하리랑 화해하고 잘 지낼 수 있는데 네가 그렇게 안 하고 계속 괴롭혔잖아. 내가 했던 경고를 귓등으로 들은 거야?”진시연은 울어서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이젠 눈물을 치고 멍하니 진태형을 바라보았다.“아빠, 차별이 심하네. 강하리만 아빠 딸이고 난 아니야? 뭐가 됐든 핏줄은 이길 수 없나 봐. 내가 아무리 잘해도 그건 봐주지 않는 거야?”진태형의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갑자기 손을 들어 진시연의 뺨을 내리쳤다.“무슨 짓을 했는지 네가 누구보다 잘 알잖아! 내가 하나하나 나열해 줄까? 이 진태형이 키운 딸이 그런 사람일 줄은 나도 몰랐다.”진
정안그룹 공식 계정에 한 장의 사진이 빠르게 올라왔다.사진 속 여자의 손가락은 섬세한 옥처럼 하얗고 늘씬했지만 남자의 마디가 분명한 손은 소나무처럼 단단했다.깍지 낀 손 뒤에는 사랑스럽게 잠든 꼬마 공주님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전에 프러포즈했을 때 한마디씩 하던 공식 계정에서 또다시 찾아와 댓글은 축복이 쏟아지고 있었다.강하리가 단잠에 빠져 있을 때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이 구승훈과 함께 인기 검색어에 올랐다.구승훈은 SNS의 열기를 보며 눈빛이 암울하게 번뜩이다가 강하리의 입술에 입맞춤하고는 휴대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밖으로 나온 그는 나문빈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부터 진시연의 움직임을 잘 지켜봐요.”나문빈은 혀를 찼다.“구승훈 씨, 첫날밤을 보내지는 않고 왜 자꾸 날 귀찮게...”“남미에서 돌아오고 싶어요?”나문빈은 순간 멈칫하며 마음속으로 악랄한 부부라고 욕하면서도 정작 입 밖으론 아부 섞인 말을 뱉었다.“구 대표님, 결혼 축하드려요. 더 시키실 일은 없으신가요?”“진시연이 정양철과 연락한 적은 없는지 다시 알아봐요.”나문빈은 군말 없이 대답을 마친 뒤 전화를 끊었고 구승훈은 창가에 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한참 후 그는 노민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두 번째 주사를 맞았어.]멀리 연성에 있던 노민준은 그의 메시지를 보고 가슴이 살짝 철렁했다.원래 계획대로라면 첫 번째 주사를 맞으면 최소 열흘은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제 겨우 며칠이나 지났지?노민준은 순간 메시지에 어떻게 답장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오늘은 그가 혼인신고를 한 날인데 왜 일이 좋은 쪽으로 흘러가지 않는 걸까.노민준은 휴대폰을 든 채 마음이 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축하 메시지를 보내려다 다 지워버리고 다시 글을 썼다.[괜찮아, 안정적이기만 하면 돼.]구승훈은 노민준이 보낸 메시지를 보고 피식 웃었지만 그의 눈에는 웃음기가 조금도 없었다.노민준에게 전화를 걸려고 할 때 갑자기 서재의 문이 열리며 서재의 밝은 빛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몇 번이고 말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신경이 쓰였다.강하리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꼭 해야 하는 건 없어. 이미 했으면 후회하지 마.”손연지는 갑자기 눈물이 나 강하리를 껴안고 울었다.“그냥 그 아이한테 너무 미안해.”강하리는 손연지가 지금 어떤 마음인지 너무도 잘 알기에 부드럽게 토닥여주었다.뭐라 해도 그녀의 아이였다.자신이 어쩔 수 없이 첫 아이를 지웠을 때처럼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아이를 잊을 수 없었다.“앞으로 또 낳을 수 있어. 하지만 그러려면 적어도 지금은 감정을 추슬러야 해. 아니면 어른도 아이도 고통스러울 거야.”강하리가 조용히 한마디 하자 손연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닦았다.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갑자기 휴지가 그녀의 손에 건네졌고 연정이는 손연지를 잡고 일어서더니 휴지를 들고 얼굴에 마구 문질렀다.손연지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짓다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방으로 돌아온 강하리가 침대에 리시안셔스가 가득한 걸 보고 걸음을 멈칫했고 연정이는 침대의 꽃밭에 신나게 몸을 던졌다.구승훈이 문 앞에 서서 혀를 찼다.“밤새워 준비한 건데.”말은 그렇게 해도 목소리에 애정이 가득했고 말을 마친 그도 꽃밭에 뛰어들어 연정이와 장난을 쳤다.한동안 방 안에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고 잠시 후 연정이는 마침내 지쳐서 졸기 시작했다.강하리가 아이를 씻겨주고 달래서 재우는데 잠든 연정이를 본 구승훈은 강하리를 안고 화장실로 향했고 강하리는 깜짝 놀랐다.“그만해! 연정이 깨겠어.”하지만 구승훈은 그녀를 문에 바짝 밀착시켰다.“사모님, 오늘이 우리 첫날밤인데.”남자의 숨결이 순식간에 그녀를 감쌌고 강하리의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그녀는 발끝으로 서서 구승훈의 입술에 키스를 했지만 그저 키스만 하고 바로 떠날 생각이었는데 구승훈은 그녀가 입술을 떼기도 전에 갑자기 큰 손으로 그녀의 목뒤 쪽을 잡고 격렬하게 키스를 퍼부었다.잠깐 욕실에는 거친 숨소리와 강하리의 귀에 요란하게 들리는 심장 박동 소리만 남
심씨 가문에서 나왔을 때 하늘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강하리는 연정이를 안은 채 다소 넋이 나가 있었다.엄마가 살아 계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그녀가 결혼하는 모습을 엄마가 봤다면 얼마나 좋을까.강하리는 마음이 아팠다.심미현은 그토록 이 관계를 지켜주려 했지만 결실을 맺는 걸 보지 못했다.“무슨 생각해?” 구승훈이 갑자기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야.”이렇게 말하면서도 강하리는 갑자기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렀고 구승훈은 황급히 차를 옆에 세웠다.그는 휴지를 꺼내 그녀의 눈물을 계속해서 닦아주면서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그저 울게 내버려뒀다.마침내 강하리는 구승훈의 품으로 뛰어들었다.연정이는 강하리가 우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작은 입을 삐쭉거리더니 덩달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한동안 어른과 아이의 울음소리가 차 안에 울려 퍼졌고 구승훈이 강하리의 눈물을 닦아주는 데만 집중하자 강하리가 알아서 휴지를 뽑았다.“연정이 좀 달래줘.”구승훈은 혀를 찼다.“얘 남편이 아니라 나보고 달래라고? 우리 아내가 질투할까 봐 무서운데.”“좀 진지할 수는 없어?”그래도 구승훈의 말 덕분에 무거웠던 마음이 가벼워졌고 그녀는 눈물을 닦은 후 연정이를 꼭 안았다.연정이도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지만 강하리에게 안기자 고사리 같은 손으로 강하리의 눈물을 집요하게 닦아주었다.강하리는 순간 마음이 시큰거렸다.울어선 안 된다.이젠 엄마가 없지만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엄마, 나에겐 가족이 생겼어.”엄마가 마음속으로 속삭이며 손을 들어 연정이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행복할 거다.손연지는 연정이를 보고 무척이나 반가워했고 연정이도 낯을 가리지도 않는지 그녀를 보며 뭐라고 옹알이를 했다.하얀 얼굴에 큰 눈이 환하게 빛나고 작은 코는 차 안에서 울어서인지 아직 약간 분홍빛을 띠며 말할 때는 입안의 작은 이빨 몇 개가 슬쩍 보였다.손연지는 사랑스러움에 녹아내릴 것 같았다.어떻게 이렇게 귀여운 아이가 있지?아이가 이렇게 예
개자식, 항상 중요한 것만 말하지 않는다.하지만 강하리도 더 묻지 않았다.구승훈이 뭘 하든 그녀를 해칠 일은 없다고 믿었으니까.강하리는 휴대폰 속 영상 아래 적힌 글을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난 후 이렇게 말했다.“구승훈, 난 두렵지 않아.”멈칫한 구승훈은 그 말의 의미를 너무 잘 이해했다.그녀는 두렵지 않다고 했다. 영상이 폭로되는 것도, 남들이 수군거리는 것도.그러니 진시연의 한 마디 협박 때문에 물러서지 말라는 뜻이었다.“우리는 당당하게 서로 사랑하는데 왜 그 여자를 무서워하겠어?”강하리는 구승훈을 바라보았고 그 아름다운 눈동자엔 온통 남자의 모습만 비치고 있었다.구승훈은 마음속이 타들어 가는 듯 뜨거운 고통을 느꼈다.분명 그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누구와 결혼했든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녀는 자신을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여기서 어떻게 물러서겠나.진시연이 앞으로 또 어떤 수작을 부리든 그저 강하리만 지키면 그만이었다.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구승훈이 무기력한 웃음을 내뱉었다.“그럼 지금 혼인신고 하러 갈까?”필요한 서류는 일찌감치 준비해 놓았다.사진을 찍고, 서류를 작성하며 10분 만에 두 사람은 혼인신고를 마쳤고 구청을 나오는 강하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강 대표님, 그렇게 행복해?”강하리가 그를 흘겨보았다.“앞으로 얌전히 살아. 유부남이라는 것 잊지 말고.”구승훈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네, 사모님.”문득 강하리의 가슴에 파문이 일었다.한때는 영원히 가질 수 없는 호칭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이제 진짜로 구승훈의 아내, 사모님이 되었다.두 사람이 차에 올라탔을 때 강하리의 휴대폰이 울렸고 전화기 너머 심준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리야, 오늘 집으로 와.”강하리는 막 집으로 돌아갈 참이었다. 연정이를 본 지 이틀이 지났기 때문에 정말 보고 싶었는데 심준호가 특별히 당부하자 문득 마음이 조금은 불안해졌다.“삼촌, 무슨 일 있어요?”심준호는 낮은 웃음을 내뱉었다.
구승훈은 눈앞에 나타난 강하리를 바라보며 문득 웃음을 참지 못했다.그가 밤낮으로 결혼하길 고대하던 여자가 지금은 마치 그에게 최후통첩을 내리는 것 같았다.감히 거절하기만 하면 평생 후회하게 만들겠다는 듯이.강하리는 책상 뒤에 앉아 미소를 짓는 남자를 바라보면서 가슴이 아릿할 정도로 화가 나서 무심코 책상 위에 있던 물건을 집어 들어 구승훈에게 내리쳤다.구승훈은 깜짝 놀라 황급히 피했고 다시 고개를 들어보니 강하리의 눈은 이미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날 이렇게 가지고 노는 게 재밌어?”구승훈의 얼굴에 머금었던 미소가 굳어지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미안해.”그가 손을 뻗어 강하리를 끌어당기려고 했지만 강하리는 한 발짝 물러섰다.자신과 구승훈 사이엔 너무도 많은 우여곡절과 아쉬움이 있었기에 하루빨리 그들 관계를 확정 짓고 남은 날들은 그저 아름답게만 보내고 싶었는데 늘 일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강하리가 피식 웃었다.“이젠 강요 안 해.”말을 마친 그녀가 돌아서서 문밖으로 걸어 나가자 구승훈은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며 서둘러 다가가 강하리의 손을 잡아끌었다.“가지 마, 내가 설명할게.” 남자는 무력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고 강하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아니에요. 강요하지 않을게요, 구 대표님. 억지로 가져봤자 좋을 것 없으니까.”구승훈의 입꼬리가 파들 떨리며 몸을 굽혀 그녀를 안고 사무실 의자에 앉힌 뒤 두 손으로 의자 손잡이를 잡아 품 안에 가두었다.“일부러 약속 어긴 건 아니야. 먼저 처리할 일이 있었어.”강하리는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고 구승훈은 약간 복잡한 표정이었다.“문자를 하나 받았어.”강하리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그래서?”구승훈은 곧장 강하리에게 휴대폰을 건넸고 영상이 눈앞에서 재생되자 휴대폰을 잡은 그녀의 손이 떨렸다.이런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영상에서 그녀가 주해찬에게 한 말은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강하리는 피식 웃음이 났다.그토록 애정이 담긴
진시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뭐라고요?”구승훈이 비웃었다.“진시연, 계속 그런 식으로 해. 빈털터리로 만들어 줄 테니까.”말을 마친 구승훈은 뒤돌아 떠났고 다시 JM 건물로 왔지만 휴대폰을 손에 쥔 채 강하리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휴대폰에는 강하리가 보낸 답장이 와 있었다.[알았어, 기다릴게.]구승훈은 피식 웃으며 갑자기 주먹으로 차를 내리쳤고 차의 경보음이 순식간에 도심 전체로 울려 퍼졌다.구승재는 정안 그룹 건물에서 황급히 내려와 구승훈의 곁에 다가간 뒤 그의 손에 주사를 건넸고 차에 돌아와 주사를 놓으며 구승훈은 미간을 꾹 눌렀다.“형수님이랑 혼인신고 하러 간다며? 왜 안 갔어?”구승훈은 묵묵부답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우선 영상을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찾아낸 다음 마음 놓고 강하리와 혼인신고를 할 수 있었다.그 영상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았다.당시 강하리는 제정신이 아니었고 설령 그녀가 주해찬을 정말 사랑한다고 해도 그는 그녀를 곁에 두고 싶었다.하지만 강하리의 평판은 고려해야 했기에 남자의 눈이 섬뜩하게 번뜩였다.잠시 후 그는 나문빈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휴대폰 해킹 좀 해줘요.”강하리는 온라인에서 구승훈의 프러포즈를 본 순간부터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회사 직원들도 그녀를 보고 농담을 건네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중 구승훈이 보낸 메시지를 받고 나서야 입가에 번지던 미소가 조금 옅어졌다.강하리는 한참 동안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구승훈에게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기다리겠다고 했지만 문득 그를 기다릴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적어도 오늘은 아니었다.강하리는 휴대폰을 옆에 내려놓고 고개를 숙여 일을 처리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녀는 구승훈에게 전화를 걸어 도대체 혼인신고보다 더 중요한 일이 무엇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끝내 전화를 걸지는 못했다.아래층에 있는 남자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고 강하리는 씁쓸한 웃음을 터뜨리며 가슴이 답답했다.남자는 아래층에 있으면서 그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