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리는 창백한 얼굴로 구승훈을 잠시 바라보다가 힘없이 이마를 그의 어깨에 살짝 기대었다.“고마워.”그녀는 구승훈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구승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맙다는 인사를 왜 하냐며 따져 묻고 싶었지만 입가에 차오른 말을 곧바로 바꿨다.“천만에.”곧 경찰이 도착하고 강하리는 조사를 위해 구승훈의 차로 이동했다. 경찰서에 앉은 강하리는 여전히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뜨거운 물 한 컵을 손에 들고 있었다.“무서워?”시선을 내려 그녀를 바라보는 구승훈의 눈엔 가슴 아픈 기색이 가득했다.강하리는 입술마저 하얗게 질려 있었다.“복수를 하기 전에 죽을까 봐 무서워.”구승훈은 가슴이 저릿했다.“하리야, 너...”하지만 강하리는 아무 말 없이 눈앞에 있는 경찰만 바라보고 있었다.조사를 마친 경찰이 두 사람에게 말했다.“두 차가 미리 상의하고 이 아가씨를 노린 것 같은데요.”강하리가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고 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이건 청부 살인인데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을까요?”“최선을 다해 수사하겠습니다.”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였다.강하리를 경찰서 밖으로 데리고 나온 그는 전화 한 통을 걸었다.다른 사람들이 조사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보다 본인이 직접 알아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통화가 끝난 후 그는 강하리를 곧장 병원으로 데려갔다.강하리의 몸 상태를 철저하게 체크한 후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같은 시각 구승재 측에서 다시 전화가 왔고 전화기를 움켜쥔 구승훈의 표정이 굳어졌다.“문씨 가문이야?”강하리가 낮은 목소리로 묻자 구승훈은 침묵하며 그녀를 바라봤다.“문씨 가문이 왜 그랬는지 알지?”강하리는 고개를 들어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알아, 내가 문연진을 건드려서 그런 거잖아.”구승훈은 한숨을 내쉬었다.“알면서도 계속할 거야? 강하리, 네가 기어코 하겠다면 앞으로 이런 일은 수도 없이 일어날 거야. 복수는 너만 해? 네가 복수를 시작하면 그 사람들도 너한테 보복할 거야!”웃고 있는 강하리의 눈가에 눈
강하리는 창밖만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승훈이 강하리를 집에 데려다주며 막 차를 주차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강하리가 시선을 내리고 휴대폰을 바라보니 노진우의 전화였다.강하리가 그를 쳐다보자 구승훈은 자연스러운 태도로 전화를 끊었다.“노진우 씨 해고하지 않았어?” 강하리가 갑자기 묻자 구승훈이 답했다.“근데 애 키우는 게 너무 힘들다며 계속 돌아오고 싶대.”강하리의 입꼬리가 굳어지며 한참이 지나서야 말을 이어갔다.“오늘 노진우 씨를 봤어”구승훈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디서?”강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구승훈을 바라보기만 했다.“구승훈 씨, 나 어디서 만났어?”그녀는 연구소에서 막 나오기 바쁘게 구승훈의 연락을 받았던 것을 기억했다.구승훈은 시선을 돌렸다.“정신과 의사한테 상담받으러 갔어, 요즘도...”강하리는 멈칫하다가 곧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차에서 내렸다.구승훈은 극도로 복잡한 표정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휴대전화를 들고 노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당분간 연락하지 마.”노진우는 잠시 침묵했다. “강하리 씨가 의심해요?”구승훈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강하리가 의심하는지도 모르겠다.그녀는 너무 똑똑하고 지나치게 예민해서 의심하든 의심하지 않든 조심해야 했다.구승훈은 노진우의 전화를 끊고 나서 한참 뒤 미간을 꾹 눌렀다.강하리가 집으로 돌아오니 손연지가 게임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노민우, 이 멍청아. 대체 게임을 어떻게 하는 거야? 가서 때리라고, 왜 자꾸 나만 따라와?”방에서 손연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강하리는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괜한 생각이겠지.아이가 정말 살아있다면 구승훈이 그녀에게 숨길 이유가 없었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하지만 방으로 돌아와서도 그녀는 결국 나문빈에게 전화를 걸었다.“나문빈 씨, 연구소에 대해 알아봐 줘요. 네, 모든 정보와 연
구승훈의 말을 듣던 구승재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강하리가 이 사실을 알면 더 화를 내겠지?나중에 강하리가 진실을 알게 되면 형을 어떻게 대할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그는 살짝 한숨을 내쉬더니 바로 화제를 돌렸다.“문씨 가문에서 이번에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으니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구승훈의 짙은 눈동자가 가늘어졌다.“그럼 감히 움직이지 못하게 해.”문연진은 이틀 동안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특히 오늘은 강하리가 가벼운 상처만 입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저 나쁜 년은 매번 구승훈의 보호를 받는데 왜 그녀는 안 되는 걸까!문연진은 친구들과 술집에서 약속을 잡았고 술집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밖에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그녀는 비틀거리며 차로 가서는 옆에 있던 대리기사에게 차 키를 던졌다.대리기사는 차 키를 받으면서 잠시 눈을 번쩍이더니 곧바로 차 문을 열었다.차에 올라탄 문연진은 곧바로 시트에 기대앉았다.“임페리얼 팰리스.”대리 기사가 대답하고 시동을 걸며 차를 출발시켰다.“아가씨, 눈이 와서 길이 미끄러우니 속도가 느릴 수 있어요. 너무 급한 건 아니죠?”“안 급해.” 문연진이 어눌하게 대꾸하자 대리 기사는 더 말하지 않았다.고급 외제차가 얼마 지나지 않아 시내를 빠져나갔고 시트에 기대앉은 문연진은 진작 잠이 든 지 오래였다.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자신의 차가 외딴곳 한가운데에 주차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이윽고 그녀가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트럭 한 대가 옆으로 돌진해 오며 그대로 추돌했다.“꺄아악!” 처절한 비명이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문연진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문원진은 B시에서 급히 달려왔다.이마와 팔에 붕대를 감은 채 병실 침대에 누워 있는 문연진을 보자마자 그는 피를 토할 뻔했다.“할아버지!”문연진은 문원진을 보자 불쌍하게 외쳤다.문원진의 얼굴은 분노로 파랗게 질렸다.“걱정하지 마, 할아버지가 널 위해 반드시 처리해 줄게!”문원진은 분노에
“구승훈! 너 진짜 우리랑 등 돌릴 거야?”구승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전 이미 등 돌린 걸로 알고 있는데요.”문원진은 콧방귀를 뀌었다.“구승훈, 내가 정말 강하리를 죽일까 봐 두렵지 않아?”“그럼 제가 문연진을 죽이는 것도 각오하세요.”“너...”“보시다시피 강하리가 입은 모든 부상은 문연진에게 두 배로 돌려줄 겁니다. 그러니 어르신, 행동하기 전에 잘 생각하시고 움직이세요.”구승훈은 그렇게 말한 뒤 전화를 끊고 사무실 문을 열었다.그곳엔 최하영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비서 불러서 마실 것 좀 드릴까요?”최하영이 웃었다.“마실 건 됐고 오늘 좀 볼 일이 있어서 왔어요.”구승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말씀하세요.”최하영은 빙빙 돌리지 않고 구승훈 앞에 직접 기획안을 내밀었다.“그쪽 아내가 오늘 아침 저한테 보낸 거예요.”구승훈은 깜짝 놀라 황급히 그것을 집어 들고 살펴봤다.놀랍게도 문씨 가문 강북의 합병 기획안이었다.[문씨 가문의 강북 시장은 문연진의 부친이 쥐고 있는데 요즘 해외 에너지 시장에 눈독을 들이고 있으니 제가 덫을 놓아 큰 손해를 보게 하죠. 그러면 문씨 가문의 주식시장은 반드시 폭락할 것이고 그 기회를 틈타 그쪽이 강북의 시장을 집어삼키세요.]“아내분께서 직접 저한테 한 말 그대로예요.” 최하영은 구승훈을 바라봤고 구승훈은 꾹 누르더니 잠시 후 다소 씁쓸한 표정으로 기획안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계획서에는 문씨 가문을 유인하고 문씨 가문의 신뢰를 얻으며 사후에 책임을 회피할 방법까지 명확하게 적혀 있었다.그는 강하리가 똑똑하고 사업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문씨 가문의 강북에 눈독을 들이고 문씨 가문의 뿌리를 건드리며 심지어 이렇게 빠른 속도로 완벽한 계획까지 내놓았다는 사실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더 놀라운 건 그가 거절한 뒤 최하영을 찾아갔다는 거다.평소 최하영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이 일은 또다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진행됐을 것이다
최하영은 정안그룹 건물에서 나와 길가에 주차된 랜드로버로 곧장 향했다.강하리는 운전석에 앉아 눈썹을 치켜뜬 채 최하영을 바라봤다.“어때요?”최하영은 복잡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예상한 거 아닌가요?”강하리는 쓴웃음을 지었다.“네, 예상했죠.”그래도 시도해 보고 싶었다.아이 아빠인데 아이의 복수를 위해 누군가와 손을 잡아야 한다면 그 사람이 구승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은...“기획안 가져가세요.”최하영이 웃었다.“구승훈 씨가 앞으로 구씨 가문 남은 구역은 제 거라네요. 강하리 씨는 뭘 약속하실 거죠?”강하리는 눈을 내리깔고 차갑게 웃었다.“구씨 가문뿐만 아니라 문씨 가문도 당신 것이 될 수 있어요.”최하영은 웃음을 터뜨렸다.“오케이!”그렇게 말한 뒤 그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어 통화 중이던 전화를 끊었고 저쪽에서 구승훈이 눈썹이 찡그렸다.곧 빠르게 최하영의 휴대폰으로 메시지가 도착했다.[나도 똑같이 문씨 가문을 줄 수 있습니다.][늦었어요, 전 약속 지키는 사람입니다.]최하영이 떠난 후 강하리는 나문빈에게 곧장 전화를 걸었다.“L국에 좋은 에너지 프로젝트가 있는데 파트너를 찾고 싶다고 소문을 내봐요.”나문빈은 짧게 대답하며 물었다.“구승훈이 협력하기로 했어요?”강하리는 잠시 침묵했다.“꼭 그 사람과 협력할 필요는 없죠.”나문빈은 혀를 찼다.“그래요. 참, 알아보라고 한 연구소에 대한 정보 가져왔어요.”강하리가 멈칫했다.“어떤데요?”“노민준이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곳인데 미숙아를 전문으로 데려오는 곳이에요.”강하리는 전화기를 꽉 쥐었다.“노진우 씨 아이에 대한 정보는요?”나문빈 쪽에서 서류를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아빠가 노진우인 아이가 있긴 한데 아이는 열흘 전에 데려왔고 엄마가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미숙아로 태어났다고 나와 있어요.”“열흘 전에요?” 강하리의 마음속에 어렴풋이 피어오르던 희망은 순식간에 실망으로 바뀌었고 반짝이던 눈빛이 꺼져 들어갔다.“네.”강하리는 입술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고 문원진은 살짝 미간을 찌푸린 뒤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지?”저쪽에서 구정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르신, 우리 만날까요?” ...강하리가 집으로 돌아오자 손연지의 통화 소리가 들렸다.유난히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잠시 당황하다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아마 소 교수겠지.그녀는 손연지를 슬쩍 바라보고는 돌아서서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나문빈은 일 처리가 매우 빨랐고 북유럽 에너지 웹사이트에 L국의 동북구 유전이 개발을 앞두고 있다는 뉴스를 올렸으니 이제 문씨 가문이 미끼를 물기만 기다리면 되었다.그녀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이것은 첫걸음에 불과했다.문씨 가문이든 구씨 가문이든 반드시 피의 대가를 치르게 할 거다!손연지는 전화를 끊고 설렘 가득한 얼굴로 다가와 강하리를 안았다.“하리야! 나 소 교수님이랑 데이트하기로 했어!”강하리는 깜짝 놀랐다.“정말? 언제?”손연지는 윙크했다.“오늘 밤에.”강하리는 얼굴을 찌푸렸다.“둘만?”손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물론이지, 안 그러면 왜 데이트겠어?”강하리가 슬쩍 눈을 번뜩였다.“정말 노민우 씨는 별로야?”손연지는 입을 삐죽거렸다.“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미친놈은 아니야!”강하리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알았어, 그럼 소 교수님하고 데이트 잘해. 하지만 명심해, 술은 안 돼. 술 먹기 전에 주소 알려주면 내가 데리러 갈게.”손연지는 서둘러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넌 집에서 푹 쉬어, 알겠지?”손연지가 나간 뒤 강하리는 씻고 나와서 컴퓨터를 켰다.컴퓨터에는 주해찬이 다운해 놓은 영화 몇 편이 있었고 강하리가 무심하게 화면을 들여다보는데 잠시 후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손연지의 전화인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나문빈이었다.“정양철이 구정우와 함께 프로젝트를 입찰할 건데 내일 오전에 공개 입찰이 있으니 참석하려면 지금 당장 B시로 와야 해요.”강하리는 멈칫했다.“그걸 왜 지금 말해요?”“누가 우리 쪽으로 오는 정보를
그들의 대화를 듣던 노민우의 표정이 굳어지며 문을 열고 곧장 걸어 들어왔다.소영준은 노민우를 보고 처음에는 당황하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노민우 씨, 오늘 웬일로 여길 다 왔네요?”노민우가 웃었다.“마침 이렇게 만나네요. 소 교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왔어요.”소영준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영광이네요, 한잔하실래요?”노민우가 테이블에서 술잔을 하나 들어 올리는데 그가 마시기도 전에 옆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소리쳤다.“엇, 노민우 씨. 그 술잔은 당신을 위해 준비한 게 아니에요.”노민우가 멈칫하다가 곧 웃으며 말했다.“오호, 이 술은 특별한 건가 봐요?”남자가 히죽 웃었다.“오늘 소 교수님이 데리고 온 아가씨를 위해 준비한 거랍니다.”노민우의 얼굴에 싸늘한 기색이 스쳐 지나가며 술잔을 들어 올린 그는 무심하게 소영준의 얼굴에 부어버렸다.“미안해요, 손이 미끄러졌네요.”옆에 있던 여자와 농담을 주고받던 소영준은 갑자기 노민우가 술을 들이붓자 순식간에 안색이 어두워졌지만 그래도 노씨 가문의 체면을 봐서 화를 꾹 참았다. “노민우 씨, 뭐 하는 겁니까!노민우는 웃기만 했다. “이미 말했잖아요, 손이 미끄러졌다고.”그렇게 말하며 그는 와인 잔을 하나 더 집어 들었다.“소 교수님께 배상해 드리면 되잖아요.”소영준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졌지만 결국엔 노민우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테이블에서 휴지를 뽑아 얼굴을 닦은 뒤 와인 잔을 들고 노민우와 잔을 부딪치려는 순간 노민우가 이번에는 소영준의 바지에 술을 흘렸다.하필 액체가 중요 부위 쪽에 흘러내렸고 그제야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노민우, 너 이 자식...”소영준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노민우가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내리쳤다.“내가 뭐?”얼떨결에 맞은 소영준은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너한테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그런데 말을 꺼내기 바쁘게 그의 눈동자가 번뜩였다.“설마 손연지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니지?”소영준은 손
“노민우, 한 번만 더 때리면 내가 너 가만 안 둬!”멈칫하던 노민우는 움직이지 않았고 소영준은 이 틈을 타 노민우의 얼굴에 주먹 두 방을 날렸다.이미 시뻘겋게 물들어 있던 노민우의 얼굴은 순식간에 더욱 일그러졌다.그는 손연지를 힐끗 바라보다가 손을 들고 다시 소영준에게 주먹을 날렸다.손연지는 너무 화가 나서 그의 가슴을 때렸다.“너 미쳤어, 왜 소 교수님을 때려?”노민우가 차갑게 웃었다.“왜 때리겠어, 맞을 짓을 했으니까!”소영준은 옆에서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손 선생님, 앞으로는 감히 선생님과 데이트 못하겠네요.”그렇게 말한 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데 두 발짝도 떼기 전에 노민우가 그에게 발차기를 날렸다.“앞으로 또 손연지 건드리면 그땐 내가 너 죽여버릴 거야!”손연지가 서둘러 그를 끌어당겼다. “노민우, 그만해!”노민우는 손연지를 바라보며 화를 냈다.“저런 쓰레기 같은 자식이 뭐가 그렇게 좋아?”그렇게 말한 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손연지는 너무 화가 났고 소영준에게 다가가 사과를 하려는데 노민우가 갑자기 돌아와서 손연지를 잡아끌었다.밖으로 나온 뒤에야 노민우는 손연지를 노려보았다.“이제부터 소영준이랑 말도 섞지 마.”말을 마친 그가 잠시 멈칫했다.“아니, 앞으로 중앙병원에 출근도 하지 마. 그 쓰레기한테서 멀어져.”손연지는 화가 났다.“노민우, 오늘 제대로 미친 거야?”노민우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소영준이 네 술에 약을 탄 건 알고 있어? 손연지, 내가 조금만 늦게 왔어도 넌 오늘 큰일 났어!”멈칫하던 손연지가 반박했다.“말도 안 되는 소리, 소 교수님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하지만 전보다 한결 낮아진 목소리였다.노민우는 화가 나서 씩씩거렸다.“못 믿겠으면 룸 안에 있던 사람들한테 가서 물어봐. 손연지, 소영준한테 미쳐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손연지는 조금 씁쓸한 표정이었다.“입 다물어.”말을 마친 그녀가 돌아서서 가려는데 노민우는 곧장 그녀에게
최하영의 말에는 묘한 의미가 담겨 있었지만 강하리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앞자리에서 운전하던 노민우가 백미러로 뒷좌석을 흘깃 보며 가볍게 기침했다.“방금 공항에서 기다리는데 구승훈한테 전화가 와서 하리 씨 도착했는지 묻더라고요.”강하리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노민우는 혀를 차며 무언가 더 말하려다 강하리가 화제를 돌렸다.“최 대표님, 요즘 많이 바쁘세요?”최하영은 손에 들고 있던 염주를 천천히 굴리다 말고 흥미로운 듯 고개를 들었다.“왜요? 저랑 데이트하고 싶어요?”강하리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답했다.“제가 그런 영광을 누려도 될까요?”최하영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다른 사람이라면 힘들겠지만, 하리 씨라면 언제든지 가능하죠.”“좋아요. 그럼 그렇게 정해진 거예요. 일 끝나면 연락할게요.”강하리는 최씨 가문이 운영하는 호텔에서 묵기로 했다.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천아름에게서 영상 통화 요청이 들어왔다.전화를 받자마자 화면에는 불빛이 반짝이는 도시의 야경이 비쳤다.“예쁘지?”배경에서 손연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하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응, 예뻐.”“기분 좋아졌어?”“응.”손연지는 웃으며 덧붙였다.“그래, 행복해야 해. 쓸데없는 사람과 일에 너무 신경 쓰지 마. 친구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난 항상 곁에 있을 거야.”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고 강하리는 잠시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았다.그때 천아름이 나직하게 말했다.“오늘 연지가 구승훈을 봤대. 병원 앞에서 그 여자랑 말다툼하고 있었대.”강하리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천아름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그래도 좀 조심할 줄 알았는데, 오늘 저녁에 글쎄 구승훈이 그 여자 데리고 파티에 가고는 실시간 검색어에까지 올랐어. 흥!”강하리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그래? 둘 사이가 꽤 좋은가 보네.”“흥! 진짜 좋았다면 그 여자 욕먹게 그렇게 내버려뒀겠어? 난 구승훈이 뭔가 큰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아. 친구야,
“말도 안 돼요.”노민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하지만 강하리는 더 이상 이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차분하게 인수 건의 다음 단계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고 노민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듣고 있었다.“요즘 기명 제약 주식을 누군가가 계속 사들이고 있더라고요. 처음엔 하리 씨가 시킨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강하리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조사 안 해 봤어요?”노민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하리 씨가 한 줄 알았으니까 굳이 조사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죠.”강하리는 깊이 숨을 들이쉬며 뭔가 말하려던 순간, 어디선가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하리 씨,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마치 질기게 달라붙는 벌레처럼 그 혐오스러운 감각이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강하리를 따라다녔다.“안 대표님도 누구 데리러 오셨습니까?”노민우가 먼저 나서며 강하리 앞으로 살짝 몸을 움직여 그녀를 가렸다.하지만 안현우의 시선은 여전히 강하리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하리 씨, 오랜만이네요. 이제 인사도 안 해줘요? 아 깜빡했네요. 이제 심씨 가문의 아가씨죠?”그는 갑자기 피식 웃더니 일부러 한 마디 덧붙였다.“심씨 가문의 아가씨면 뭐 해요? 결국엔 남자한테 버려진 신세가 됐는데.”그 말을 들은 노민우의 얼굴빛이 변했다.“안현우, 그만둬!”하지만 안현우는 조롱 섞인 눈빛으로 비웃으며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왜? 아직도 이 여자랑 자고 싶어?”순간, 노민우는 안현우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안현우는 비틀거리며 손가락으로 입가의 피를 닦으며 계속 말했다.“내가 맞췄지? 아니면 둘이 이미 잤나? 어땠어, 좋았어?”눈이 뒤집힌 안현우는 당장이라도 다시 달려들 기세였다.“너 이 새끼, 미쳤어?”안현우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뭘 그렇게 흥분해? 우리 중에 그런 생각 안 해본 사람이 있기나 해?”노민우가 이를 악물며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강하리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그냥 가요. 저딴 놈이랑 말 섞을 필요 없어요.”강하리가 급히 차 문
병원을 나오자마자, 강하리는 주차장 한편에서 오토바이에서 내린 천아름을 발견했다.천아름은 그녀를 보자마자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무슨 일이야? 괜찮아?”강하리는 짧은 숨을 들이쉬고 정신을 다잡으며 대답했다.“괜찮아. 그런데 넌 여긴 왜 왔어?”천아름은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쓸어넘기며 말했다.“손연지 데리고 드라이브 가려고. 산에 올라가서 야경 보면 예쁠 것 같아서. 같이 갈래?”강하리는 살짝 입술을 깨물다 웃으며 천아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아니야. 나 비행기 타러 가야 돼. 먼저 갈게. 너희끼리 재밌게 놀고, 나중에 보자.”그녀가 발걸음을 돌리려 하자 천아름이 손목을 붙잡았다.“힘든 일 있었어?”솔직히 너무 힘들었지만 티 내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천아름이 갑자기 환하게 웃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너 돌아오면 내가 남자 소개해 줄게. 잘생긴 댕댕남이야.”바로 문을 열고 나오려던 구승훈이 발걸음을 멈췄고 천아름을 향해 분노의 눈빛을 던졌다.천아름은 그 시선을 느끼며 일부러 구승훈 옆에 선 임희주를 도발적인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아이고, 구 대표님, 이렇게 아무나 만나고 다니는 거예요?”임희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무슨 뜻이에요?”천아름은 입꼬리를 한쪽 올리고 강하리를 힐끔 보며 능청스럽게 덧붙였다.“봤지? 본인 얘기하는 건 아나 봐.”그녀는 장난스럽게 강하리의 턱을 살짝 잡아 들어 올렸다.“됐어. 가. 돌아와서 소개팅은 꼭 해.”강하리는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무런 미련 없이 돌아섰다.구승훈은 강하리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며 그녀의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도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그 후에야, 천아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천아름 씨, 남 일에 참견하지 마세요.”천아름은 비웃음을 흘렸다.“구 대표님은 이렇게 여자 데리고 다니면서, 우리 하리는 왜 안 돼요?”그러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임희주를 훑어보며 말했다.
구승훈이 목을 움찔거리며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강하리의 뒤편에서 임희주가 다가왔다.“구 대표님 아내분도 계셨네요?”문 앞에 선 임희주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강하리에게 인사했다.하지만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이 성큼성큼 진료실 안으로 들어서더니, 구승훈 옆으로 바짝 다가가 친근한 목소리로 말했다.“다 끝났어요? 끝났으면 가요.”구승훈은 강하리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짧게 대답했다.“곧 끝나니까 기다려요.”임희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멍든 복부에 손을 갖다 대더니 천연덕스럽게 눌러보았다.그 순간, 구승훈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고 임희주는 별것 아니라는 듯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문 앞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하리는 피식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그러곤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와 임희주를 바라보며 말했다.“임 선생님, 잠시 밖에서 기다려 주시겠어요?”임희주가 입을 떼려는 순간, 강하리는 바로 준봉에게 시선을 돌렸다.“임 선생님 모시고 나가 주세요.”준봉은 즉시 대답하고는 임희주에게 공손히 말했다.“임 선생님, 가시죠.”임희주는 구승훈을 한 번 노려보았지만 그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코웃음을 치며 돌아섰다.간호사는 강하리와 구승훈을 번갈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강 대표님, 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이제 진료실에 남은 건 둘뿐이었다.강하리는 말 없이 구승훈의 배에 난 상처를 내려다보고는 옆에 놓인 소독 거즈를 집어 들고 임희주가 손을 댔던 자리부터 강하게 닦기 시작했다.그러자 구승훈이 강하리의 손목을 움켜잡았다.강하리는 몇 번 뿌리쳤지만 그는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다.강하리의 눈은 벌써 붉어져 있었고 창백한 얼굴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으며 눈빛은 날카로운 칼날 같았다.구승훈은 피식 웃으며 낮게 말했다.“뭐 하자는 거지?”강하리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그 말을 해야 할 사람은 나인 것 같은데? 구승훈, 지금 뭐 하자는 거야?”구승훈은 강하리의 손을 놓아주고는 아무렇지
택시는 천천히 달렸다.강하리는 차에 앉아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불빛들을 바라보며 자기 행동에 의구심을 가졌다.구승훈은 확실하게 말했었다. 이제 강하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하지만 강하리는 그저 구승훈이 어떻게 지내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를 잊기 위한 행동일 지도 모른다.퇴근 시간의 정체 속에서 차는 병원 앞에 도착했고 강하리는 차에서 내려 깊은숨을 들이쉬며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응급실은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구승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이미 떠난 걸까? 강하리는 응급실을 둘러보며 끝내 찾을 수 없게 되자 결국 심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심준호는 강하리가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자 피식 웃으며 말했다.“아마 방금 엑스레이 찍었을 거야. 에휴, 너는 그 녀석을...”심준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하리는 전화를 끊었다.심준호의 맞은편에서 이를 지켜보던 심예진이 눈을 깜빡이며 웃었다.“하리가 전화 끊어버렸어?”심준호는 휴대폰을 무심히 치우고 천천히 스테이크를 썰어 접시를 심예진 앞으로 옮겼다.“이번에 한국에 얼마나 있을 거야?”심예진은 포크를 입에 물고 잠시 생각했다.“설 지나고 갈게. 하리 일 때문에 아빠랑 할아버지가 요즘 기분이 안 좋으셔.”심준호는 짧게 대꾸했다.“그래. 그 사람과는 헤어져.”심예진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오빠, 무슨 소리야? 왜 그래?”심준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아빠와 할아버지가 우리 결혼 재촉하는 거 알잖아. 그래서 요즘 기분이 안 좋으셔.”심예진은 조급한 듯 말했다.“하지만 오빠, 우리는 그냥 연기하는 거라고 했잖아. 부모님 기분 맞춰드리려고 한 거라면서.”심준호는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심예진을 보며 미소 지었다.“걱정하지 마. 결혼도 연기야. 네 사업에 영향 주지 않을 거야. 다만 네 남자 친구는...”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헤어지는 게 좋겠어. 안 그러면 부모님과 할아버지가 오해하실 수도 있으니까.”심예진은 입술을 꽉 깨물며 눈가에 눈물이
강하리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표면적인 평온함은 결국 깨져 버렸고 그녀는 심준호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삼촌, 구승훈에게 무슨 일이 있었어요? 삼촌은 알고 있죠?”심준호는 룸미러를 보며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오늘 승훈이가 내 사무실에 와서 유언장을 작성했어. 아마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확실해. 아니면, 누가 그 나이에 유언장을 쓰겠어?”강하리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졌고 손톱이 손바닥을 깊이 찔렀다.심준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어찌 됐든 너에게 숨긴 거잖아. 죽어도 싸. 안 그래?”강하리는 심준호를 묵묵히 바라보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심준호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굳이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차가 JM 건물 앞에 멈추자 심준호는 강하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출근해. 쓸데없는 놈 때문에 괜히 신경 쓰지 말고. 나중에 삼촌이 좋은 사람 소개해 줄게.”하지만 강하리는 바로 회사로 향하지 않았고 뒤돌아 정안 빌딩을 바라보았다.“삼촌도 구승훈이 왜 그런 건지 모르는 거예요?”심준호는 부정하지 않았다.“어쨌든 나는 승훈이에겐 남이니까.”강하리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저도 마찬가지예요.”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JM 건물로 향했다.심준호는 강하리가 사라지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분명 서로 마음이 있는데 왜 이렇게 서로를 괴롭히는 걸까?강하리는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회의실로 들어갔다.기명 제약 인수 건은 이미 시작되었고 강하리는 신중하게 모든 단계를 꼼꼼히 살폈다. 이것은 결국 손연지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이었기에 어떠한 실수도 용납할 수 없었다.앞으로의 진행 과정을 결정하고 나니, 어느덧 저녁 시간이 되었다.강하리는 회의실에서 나와 안예서에게 말했다.“오늘 저녁 연성시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예약해 줘.”안예서는 대답하며 바로 예약을 진행했다.그 순간, 강하리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역시 심준호였다.[아, 맞다. 깜빡했네. 그 녀석, 다친 것 같
강하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눈앞에 있는 차는 그녀에게 익숙했다.얼마 전 심준호 생일에 그녀가 직접 선물했던 차였다.심준호는 차에서 내려 석연란과 심연청을 바라보았고 그 시선에 두 사람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특히 심연청은 더욱 그랬다.심씨 가문 사람 중에서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바로 그녀의 사촌 오빠, 심준호였다.“오빠...”심연청은 매우 낮은 목소리로 인사했고 조금 전까지의 거만함은 온데간데없었다.석연란도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준호야, 무슨 일로 왔어?”심준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제 조카 데리러 왔어요.”그는 강하리를 바라보며 덧붙였다.“아, 방금 구승훈이 나를 찾아왔는데, 이혼하기 싫다고 징징거리더라. 그러니까 기다리지 마.”석연란과 심연청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굳어졌다.그들은 드디어 집안에서 한숨 돌릴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하며 결혼식 날 강하리가 혼자 남겨진 모습을 보며 속으로 통쾌함을 느꼈던 그들이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구승훈이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니?“준호는 참 자기 사람한테 잘해준다니까. 하지만 이 결혼을 후회한 사람은 다름 아닌 구승훈 당사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심준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그래서 이제 와서 아무리 후회해도 받아줄 수 없다는 거죠.”석연란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심준호는 이미 강하리를 데리고 차로 향하고 있었다.“삼촌이 그랬잖아. 이런 인간들 만나면 말로 싸울 필요가 없다고. 그냥 바로 한 대 갈기면 되는 일을 뭐 하러 목 아프게 말다툼해?”심준호는 말하면서 강하리를 차에 태운 후, 자신도 옆자리에 올라타고는 바로 자리를 떠났다.석연란은 심준호의 차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이를 갈았다.“엄마, 오빠 말이 진짜야? 구승훈, 후회하는 거야?”석연란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말도 안 돼. 구승훈이 뭐가 아까워서 강하리 같은 여자한테 매달리겠어? 그냥 한때의 감정이지. 곧 다른 여자 찾을 거야. 두고 봐. 남자들은 원래 다 그렇잖아.”그녀의 눈빛이
만약 진짜로 아직 희망이 있었다면 이혼하고 나중에 일이 해결되면 다시 그녀를 되찾으면 되는 거였다.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들의 유일한 연결고리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구승훈은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한참 후 쓴웃음을 지었다.그는 희망을 버린 것이 아니라 희망을 품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었다.여초연과의 문제는 해결책을 찾고는 있지만 해결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여초연은 차라리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의 행복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게다가, 그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고 있었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언젠가 갑작스레 생을 마감할 수도 있었다.그래서 그는 유언장을 쓰고 싶었다.그가 줬던 것들을 강하리는 모두 되돌려줬다. 하지만 유언장에 적힌 것이라면 돌려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구승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심준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절차에 따라 유언장을 작성해 주었다.일을 마치고 나서야 심준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네 가족이야. 도움이 필요하면 혼자 감당하려 하지 마.”구승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마워, 삼촌.”심준호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흥! 빨리 병원에 가서 치료나 받아. 피 냄새가 진동하네.”구승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심준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강하리 쪽은 내가 설득해 보겠지만, 하리 성격을 너도 알잖아. 만약 하리가 계속 이혼을 고집한다면 나도 굳이 강요하지 않을 거야.”구승훈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문손잡이를 꽉 쥐었다. 긴 침묵이 흐르고 그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알았어.”가정 법원 앞에서 강하리는 계단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그녀의 표정은 차분하고 침착한 모습에서 조용하고 쓸쓸한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결국 구승훈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그녀는 실망해야 할지, 아니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몰랐다.그러나 그녀는 알고 있었다.
심준호는 그 말을 듣고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어릴 적부터 구승훈과 함께 자랐고 그가 강하리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줬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항상 구승훈 편에 서서 도왔지만 이번만큼은 너무 지나쳤다.“이혼하기 싫다고? 난 네가 이혼하고 싶지 않아 하는 모습이 전혀 안 보이는데?”심준호는 비웃는 표정을 짓고는 이내 휴게실로 가서 약상자를 가져와 책상 위에 던졌다.“알아서 약 찾아 발라.”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넥타이를 쓰레기통에 내던졌고 구승훈은 문에 기대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약은 괜찮아. 그렇게 몸 약한 사람 아니야.”심준호는 그를 무시한 채 책상에 앉았다.“오늘 가정 법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었어?”구승훈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소파에 앉았다.심준호는 그 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 아무리 세게 때렸다고 해도 앉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다쳤을 리가 없었다.“다쳤어?”하지만 구승훈은 그 질문을 무시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강하리에게 전화해서 기다리지 말라고 해.”심준호는 전화를 걸지 않았고 그의 말에도 대답하지 않았다.“다쳤으면 병원에 가.”구승훈은 테이블 위에 놓인 리시안셔스 꽃다발을 내려다보다가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준호야.”이 망나니는 평소에는 뻔뻔하게 ‘삼촌’이라고 부르다가, 이럴 때는 다시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이혼할 마음을 먹은 것 같네.”구승훈은 손가락으로 꽃잎을 쓸며 말했다.“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심준호는 구승훈을 조용히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부탁인데?”구승훈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나, 유언장을 쓰고 싶어.”심준호는 깜짝 놀란 기색을 보이며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대체 무슨 일이야?”그는 구승훈이 강하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그가 강하리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구승훈이 이렇게 행동하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심준호뿐만 아니라 강하리도 분명히 구승훈에게 무슨 사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