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손에 들고 있던 벽돌을 꽉 쥐고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허지호, 네가 하는 말이 어느 정도 진실인지 모르겠어. 하지만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해도 네가 남을 해칠 이유가 될 수는 없어.”“아버지의 빚은 자식이 갚는 거야. 못 들어봤어?”허지호는 비꼬듯 내 말에 반박했다.나는 비웃으며 그를 조롱했다.“그럼 네 말대로라면 서은희 아버지도 네 어머니를 해쳤다고 할 수 있겠네?”“서은희를 아는구나? 네 반응이 이상한 이유가 있었어. 하하, 뭐, 상관없어. 서은희는 자업자득이야.”내 발이 무의식적으로 바닥을 쓸고 있었다.“뭐? 자업자득이라니? 그저 네 손에 잡힌 불쌍한 여자애잖아.”“그년이 내 은서를 죽였어. 내 은서를 죽였다고.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몇 번이나 거절했는데. 그 독한 년이 은서를 죽인 거야. 그렇게 남자가 필요하니까 내가 찾아준 거야. 평생 개처럼 살라고.” 허지호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고, 그 말투에는 원한이 가득했다.“말도 안 돼, 서은희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반박했다.우리 집과 서씨 집안은 오래된 친분이 있었다. 나는 서은희와 거의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다.그런데 중학교 때 서씨 집안이 이사 가면서 우리도 헤어지게 되었다.그 후 가끔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대학에 가고 나서 연락이 줄어들었다.2년 전, 갑자기 어머니가 서은희가 실종됐다고 말했을 때 나는 믿을 수 없었다.그런데 알고 보니 허지호에게 팔려 여기까지 오게 된 거였다.“하하! 그래서 한 말이야. 너희들처럼 가식적인 인간들이 많아! 겉으로는 도덕적이고 의리 있는 척하면서 뒤에서는 더럽고 비열한 짓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몰라.”허지호는 갑자기 문을 세게 쳤다. 문이 “쿵” 하고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벌써 25분이 지났다.하지만 문 밖에는 허씨 집 사람들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강지유, 나와라. 이렇게 계속 안에서 잠겨 있는 것도
나는 초조하게 휴대폰을 꺼냈다. 이미 29분이 지나갔다.‘민서우, 너는 왜 아직 안 오니?’아마도 이 기억들과 이야기들이 허지호를 더 짜증나게 만든 것 같았다. 그는 문을 세게 두드리며 말했다.“강지유, 너 문 열어! 안 열면 내가 문 부술 거야.”나는 침을 삼키며 말했다.“허지호, 네 말 대로면 우리 이복 남매가 된 거야?”“뭐? 남매? 나는 너 같은 위선자랑 남매 아니야! 강지유, 빨리 문 열어! 그만 좀 말하고 문이나 열어.”나는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그래서 네가 3년 동안 사귀고도 입 맞추지 않은 거였어? 난 네가 게인 줄 알았어.”“강지유, 너도 그 여자들처럼 더러워. 그렇게 남자 부족하냐? 그럼 내가 찾아준 이 남자 어때?”허지호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변하며 문을 더 세게 두드렸다.내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그때 허지호 어머니가 갑자기 크게 말했다.“지호야, 빨리 나와봐!”허지호는 두드리는 걸 멈추고 밖으로 나갔다.나는 속으로 기뻤다. ‘민서우가 드디어 온 건가?’하지만 그 다음 순간, 나는 한 남자의 거대한 손에 허리를 붙잡혔다.“더러운 년, 감히 나를 때려? 오늘 내가 가만히 있으면 남자도 아니야.”나는 비명 지르며 깜짝 놀랐다.‘이 개자식, 언제 풀려났지? 내가 그렇게 꽉 묶어놨는데!’다행히 내 손엔 벽돌이 여전히 있었다.나는 벽돌로 그의 손에 내리쳤다.“아! 이년이!” 남자는 고통에 손을 풀었다.나는 서둘러 몇 걸음 물러섰다.당황한 나머지 나는 무언가에 걸려 넘어졌다.“툭!” 소리와 함께 나는 바닥에 쓰러졌다.손에 쥐었던 벽돌도 옆으로 굴러갔다.내 머리는 하얘졌다.그렇게 반응할 시간도 없을 정도로 그 남자는 달려들었다.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옆으로 구르며 일어나려고 애썼다.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 남자가 한 손으로 내 코트를 잡아당기고 있었다.나는 발버둥 치며 핸드폰도 땅에 떨어졌다.남자는 그것을 보고 더욱 흥분한 표정으로 말했다.“도망가지 마! 너 절대 도망 못 간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세게 열렸다.내 위에 눕고 있던 남자가 중얼거렸다. “지호야, 나가. 나가. 아저씨는 괜찮으니까 이 여자를 처리하고 나서 들어와. 걱정하지 마, 돈은 적지 않...”나는 멍하니 문 쪽을 바라봤다. 그 사람을 보자마자 내 눈물이 터져 나왔다. 민서우가 드디어 온 것이다.한 경찰이 나한테 다가와서 남자를 내 몸에서 밀어내고는 손을 뻗어 나를 일으켜 세웠다. “괜찮아요. 우리가 왔어요.”거대한 공포와 두려움 뒤에 감정이 폭발했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그의 품에 뛰어들어 크게 울었다. 그는 잠시 멈칫한 뒤 어색하게 내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만 울어요.”나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살아 돌아왔다는 기분에 이 사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관없이 오직 안전하다는 것, 그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만이 중요했다. 한참 뒤, 그는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만 좀 울어요. 아니면 지은 누나한테 가볼래요? 나...나 해야 할 일이 남았거든요.”내가 고개를 들고 눈물을 닦았다. 흐릿한 눈앞에 각이 진 얼굴과 짧은 머리를 한 평범한 남자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손으로 눈물을 닦고 “푸흣” 하고 웃어버렸다. “미안해요. 저 그냥 좀 놀랐어요.”“괜찮아, 서훈이 여자친구 없어. 몇 분 안겨주는 건 괜찮아. 이리로 와.” 한 중년의 여경이 나를 그녀 쪽으로 이끌었다. 그때 그 '서훈'이라는 경찰이 돌아서서 뛰쳐나갔다.“놀랐죠?” 지은 언니이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또 눈물을 터뜨리고 싶었다. 애써 참으면서 입술을 쭈욱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제야 왔어요? 오늘 여기서 죽을 줄 알았어요. 너무 무서웠어요. 민서우 그 자식은요? 그거 30분이면 온다고 해놓고, 얼마나 늦었는지 알아요?”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렸다. 눈물은 마치 끊어진 구슬처럼 떨어지기 시작했다. 지은 언니는 나를 꽉 안아주며 말했다. “괜찮아,
그날 밤, 진술을 마친 후 나는 경찰서 앞 벤치에 앉아 지은 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은 언니는 나를 걱정하며 오늘 밤은 함께 모텔에 묵자고 했다. 이때 유서훈이 내 옆에 앉으며 말했다. “저기...걱정하지 말고, 슬퍼하지도 마세요.” 나는 조금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한참 뒤에야 나는 조용히 말했다. “네, 이제 안 무서워요. 여러분들이 있으니까 안심돼요. 슬프지도 않고요.” 그의 믿지 못하는 표정을 보고 나는 입술을 올리며 말했다. “정말이에요. 허지호한테서 느낀 실망과 슬픔, 난 이미 1년 전에 다 겪었어요. 그때부터 내가 아는 그 사람이랑 점점 멀어졌거든요. 솔직히 나 민서우한테 고마워요. 걔가 날 계속 붙잡고 설득하지 않았으면 나는 허지호의 진짜 모습을 몰랐을 거예요. 아마 오늘 이렇게 팔려갔을 수도 있어요.” 유서훈이 내 어깨를 톡톡 쳤다. “이제 그만 생각해요. 다 지나간 일이에요.” “네.” 나는 한참 뒤에야 낮게 대답했다. ‘정말 지나간 걸까?’ 나는 거의 밤새 깨어 있었다. 지은 언니와 함께 경찰서로 돌아갔을 때 나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 사람들이 자백했나요?” 유서훈이 상황을 간단히 설명했다. “허지호와 그의 어머니는 몇 년 동안 수많은 소녀들과 여성들을 팔았는데 주로 민산 쪽으로 팔렸대요. 그들이 조직적으로 범행을 저질렀으니 추적하면 더 많은 사람들을 잡을 수 있을 거예요.” “마을에 사는 집만 50이 넘는데 그 중 절반 이상의 여자들이 팔려온 사람들이었어요. 팔려온 사람들이 도망가지 않도록 마을마다 개를 키운 거고요. 도망간 사람이 있으면 마을 사람들이 전부 나서서 쫓아가고, 잡으면 가벼운 폭행으로 끝날 수도 있고, 심하면 죽을 수도 있었어.” 말이 끝나고 유서훈이 한숨을 크게 쉬었다. 내 얼굴도 창백해졌다. 이 가운데서 조금이라도 일이 잘못되면 나는 아마 평생 그곳에 갇히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지호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나는 유서훈을
5일 후, 나는 유서훈과 함께 A시로 돌아갔고, 서은희는 지은 언니의 도움을 받아 B시로 돌아갔다.유서훈은 먼저 나를 데리고 가까운 경찰서에 갔다. 그 후 현지 경찰과 같이 내 집으로 갔다.그 사람들은 아버지를 경찰서에 데려갔다.어머니는 깜짝 놀라셨다.내가 눈을 붉힌 채로 그동안 있었던 일을 전하자 어머니도 눈물이 그렁그렁했다.“다행이야. 네가 돌아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네가 무슨 일이 생기면 나도 따라 죽었을 거야. 네 아버지가 그때 그렇게 헤어진 거였어? 진짜 짐승도 아니야. 나 그 사람하고 이혼할 거야.”어머니는 그제야 나에게 20년 동안 숨겨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그때 어머니는 나를 임신하고 아버지가 바람을 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바람이 몇 년 동안 이어졌고, 그 여자가 어머니보다 먼저 임신한 상태였다.어머니는 화가 나서 나를 없애고 이혼하기로 결심했다.그 당시 어머니는 외동딸로 할아버지의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상속자였고, 아버지는 시골 출신의 가난한 청년에 불과했다.아버지는 절대 이혼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어머니한테 애원했다. 그 여자랑 헤어지겠다고.어머니는 나를 포기할 수 없어서 아버지가 정말 그 여자와 끊었다는 것을 알고 서서히 아버지를 용서했다.그런데 그 처리 방법이 이렇게 악랄할 줄은 몰랐다.결국 어머니는 아버지와 이혼을 했고 아버지는 7년형을 선고받았다.나는 아버지를 한 번 찾아간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눈물을 글썽이며 “미안하다”고 했다.나는 그런 아버지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생활 용품만 내려놓고 떠났다.그리고 나중에 민서우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허지호는 사형을 선고받고, 그의 어머니는 무기징역이고, 삼촌은 8년형을 선고받았다고 한다.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내게 큰 위안은 없었다.그들이 납치했던 여자들의 한평생은 이미 무너졌으니까.나는 민서우를 보고 물었다.“은희는 어쩌고?”민서우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답했다.“은희... 은희는 부모님에 의해
음력 12월 15일.비행기를 타고 버스를 갈아타 내려서 마지막엔 10킬로미터를 걸어 마침내 허지호와 함께 그의 집에 도착했다.나는 무릎을 짚으며 숨을 헐떡이면서 그의 집을 바라보았다.생각보다 낡지는 않았고, 그냥 평범한 마을 집이었다. 오래된 느낌이었지만 어쨌든 마을을 지나며 본 집들보다 훨씬 나았다.“들어가자.” 허지호는 내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가면서 외쳤다. “어머니, 나 돌아왔어. 누굴 데려왔는지 나와봐!”허지호의 말이 끝나자 안에서 한 사람이 달려왔다. “아이구, 우리 지호가 돌아왔구나. 기다리고 있었어.”나온 사람은 중년의 여성으로 얼굴은 허지호와 비슷하게 생겼다. 그저 오랫동안 일을 해서 그런지 피부가 그을린 상태였다.이분이 아마도 허지호의 어머니일 것이다.나는 긴장돼서 목이 잠겼다. 그리고 웃으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강지유입니다. 지호의 여자친구예요.”허지호의 어머니는 나를 한 번 훑어보았다.그 순간, 나는 몸서리치듯 한 기운이 올라왔다.그러나 잠시 후, 허지호의 어머니는 웃으며 말했다. “지유구나, 지호한테서 네 얘기를 많이 들었어. 그래, 잘 왔어. 어서 들어와.”말하면서 내 짐을 챙겨주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아마도 그 순간의 불쾌감은 그냥 피로에서 오는 착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허지호의 집으로 들어가니 마당의 처마 아래에는 열댓 살 정도로 보이는 소녀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신발 깔개를 바느질하며, 우리가 들어오는 걸 보았지만 고개를 들지 않았다.나는 약간 어색한 마음으로 허지호를 쳐다봤다. 그 소녀에게 인사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었다.허지호는 나를 보지도 않고, 그 소녀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어머니와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그들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집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다시 한 번 그 소녀를 쳐다봤고, 그때 딱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정말로 소름이 돋았다.어떤 눈이라고 표현할 수 없었다. 냉담
“지유야, 너희들 무슨 얘기하고 있어?” 허지호가 웃으며 다가와 물었다.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인사하려고 했는데 나를 무시하네.”허지호는 그 소녀를 슬쩍 쳐다보더니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신경 쓸 필요 없어. 얘 말 못해.”나는 잠시 멈칫하고 동정 어린 눈빛으로 그 소녀를 바라봤다.그 소녀는 말이 끝나자 고개를 들고 우리를 힐끗 쳐다봤다가 잠시 후 다시 고개를 숙였다.나는 무의식적으로 허지호를 쳐다봤다.허지호는 그 소녀의 눈빛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내 손을 잡고 들어가자고 했다.나는 잠시 멈추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지호야, 쟤 누구야?”허지호는 잠시 망설이다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내 동생이야. 어릴 때부터 좀 이상해. 신경 쓰지 마. 우리 들어가자. 어머니가 나보고 돕지 말고 너랑 같이 있으라고 했어.”나는 큰 충격으로 받았다.‘동생이라고?’처음에는 그들이 무관심한 태도로 보였기에 그냥 이웃이나 관계가 별로 좋은 사람인 줄 알았다.허지호의 태도를 보니 내 마음 속 의문이 점점 커져만 갔다.나는 허지호가 항상 부드럽고 인내심 많으며, 밝고 웃음이 많은 사람이어서 나와 모든 게 맞는 그런 남자라고 생각했었다.하지만 지금 허지호가 여동생에게 보여주는 태도가 내 마음속의 차가운 기운을 불러일으켰다.그 순간, 허지호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생각은 그만 하고 내가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할게.”나는 고개를 끄덕였다.허지호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갔다.“아린은...음...내 동생 이름이 아린이야. 어렸을 땐 이러지 않았는데 갑자기 아프고 나서 머리가 잘못됐어. 말도 할 수 없게 되고. 병이 나은 후에도 많이 달라졌어. 말도 안 듣고, 혼자서 도망가거나 사람을 때리기도 했어.”“내가 학교에 가야 하니까 어머니 혼자서는 돌볼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방에 가두거나 묶어 놓기도 했어.”“그 후 조금씩 나아지긴 했지만 지금처럼 변한 거야. 정말...”허지호는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나는 깊
부엌에서 아린이가 팔꿈치를 걷어 올리고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내가 조용히 물었다.“도와줄까?”아린은 놀란 듯이 손에 쥔 그릇을 물에 떨어뜨렸다. 물이 퍼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손을 흔들며 필요 없다고 말했다.내가 다가가자 아린은 두 걸음 물러섰다.내 시선은 그녀의 팔꿈치로 향했다.옷소매를 걷어 올린 그녀의 팔에 깊고 얕은 붉은 자국들이 보였다.내 표정이 어두워지며 그녀의 손을 잡고 물어보려던 참이었는데 그때 허지호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지유, 뭐 하고 있어?”내 몸이 굳어졌다.아린은 재빨리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곧 부드럽게 고개를 흔들며 다시 소매를 내려 붉은 자국을 가렸다.그리고는 고개를 숙여 설거지를 계속했다.내 눈에서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났다.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그걸 삼키고 허지호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아린이 혼자 설거지하는 걸 봐서 도와줄까 했는데 내가 놀라게 한 것 같아.”이때 아린이가 몸을 움츠리고 등을 구부린 채 허지호를 조심스럽게 쳐다보았다.허지호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괜찮아. 얘 혼자도 할 수 있어. 살다 보면 뭔가는 해야 해.”그 말이 끝나자 허지호는 내 손을 잡고, 힘껏 부엌에서 끌어냈다.나는 돌아서서 아린을 한 번 더 봤다. 그녀의 눈 속에 깃든 두려움이 여전히 선명했다.나는 눈을 내리깔며 마음이 불안해졌다.밤새도록 악몽에 시달려 나는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그래서 다음 날 늦게 일어났다.마당은 조용하고 고요했다.나는 안방으로 걸어갔다.“그쪽과는 연락이 됐어?”“응, 설 지나고 데려가기로 했어.”“그래, 그럼 조심해서 잘 지켜.”나는 문을 열다 말고 멈췄다.내 마음속의 의문과 불안이 다시 깊어졌다.무의식적으로 허지호의 이름을 불렀다.방 안이 잠시 고요해졌고, 곧 이어서 허지호 어머니의 불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X발, 걷는데 왜 소리가 없어!”문이 열리면서 허지호의 굳어진 얼굴이 내 앞에 나타났다.“언제 왔어?”나는 불안한 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