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후, 천억 재벌이 미쳐버렸다!의 모든 챕터: 챕터 11 - 챕터 20

30 챕터

제11화

큰 체구를 지닌 엄경준이 바닷가에 나른하게 서서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고현성의 시야를 벗어난 곳에서 엄경준은 빈정거림과 불신이 배어 있는 시선으로 엄지연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엄지연의 그림 실력을 폭로하지 않았다. 성월 별장에 있을 때 엄경준은 그녀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그는 고현성의 흥을 깨고 싶지 않았다.그림 그릴 줄 아는 엄지연은 임해시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 학교에 재학 중이었다.그렇다고 해서 천부적인 재능과 뛰어난 실력이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그 학교는 엄경준이 많은 돈을 내고 엄지연을 들여보낸 것이지 그녀가 자신의 실력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엄지연은 그림에 비해 춤을 정말 잘 췄다. 그조차 놀라게 했으니 말이다.‘화가도 아니니까.’엄경준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엄지연이 고개를 들어 엄경준과 시선을 마주했다.눈살을 살짝 찌푸린 엄경준의 시선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엄지연이 어떻게 화가 이미지를 계속 연기해 나가려는 지 보려는 것 같았다.비아냥거리는 엄경준의 시선이 너무 강렬했던 탓에 엄지연은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엄지연은 돌아서서 엄경준을 등지고 그를 무시한 채 눈을 흘겼다.‘일부러 무시하고 장점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뭔가 증명하려고 애쓸 필요 없어! 결과로 보여줄 거야!’고현성의 격려하에 엄지연은 보드라운 모래사장을 밟으며 화판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오른손으로 붓을 집어 들고 물감을 묻혀 디테일을 더하니 밋밋하게만 느껴졌던 그림이 금세 선명해지고 다채로워졌다.엄경준은 눈썹을 치켜뜨며 놀라움을 표했다.그의 시선에서는 저도 모르게 감탄의 눈빛이 흘러나왔다.‘의외네.’엄경준은 늘 엄지연의 얼굴에만 집중하며 그녀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연가희처럼 만들었다.어딘가 거슬리는 구석이 있다면 엄지연의 스타일을 바꿔서라도 연가희 흉내를 내게 했다.그래서 엄경준은 습관적으로 엄지연의 재능을 무시했고 그녀의 천부적인 재능마저 무시했다.엄경준은 줄곧 엄지연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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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그때부터 다른 남자랑 놀아났나?’고현성의 말을 듣고 멈칫하던 엄지연은 이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어르신께서 지금 뭐 하시는 거지? 엄경준과 맞선을 주선하시는 건가?’생각만 해도 몸서리를 치던 엄지연은 핑계를 대고 고현성과 작별했다.그녀는 리나를 찾아가 따져 물을 것이 있다.“어르신, 저는 볼일이 있어서 먼저 실례하겠습니다.”엄지연이 자리를 뜨는 것을 보고 엄경준도 예의 바르게 작별을 고했다.고현성은 허허 웃으며 손을 내저었는데 마치 그에게 빨리 엄지연을 쫓아가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다.“젊었을 때 노는 게 좋아. 나이가 드니 놀고 싶어도 몸이 따라주지 않는구나.”엄경준은 예의 바르게 고현성에게 인사하고 백사장을 떠났다.복도 모퉁이에서 엄경준은 빠른 걸음으로 엄지연을 뒤쫓아 가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잡았다.뻗은 손에 힘을 줘 엄지연을 돌려세운 그는 바로 구석진 곳에 가두었다.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비켜!”등이 아파 난 엄지연은 갑작스러운 엄경준의 행동에 놀라며 순간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그녀는 리나를 찾기 위해 자리를 뜬 것이었다.엄경준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큰 몸으로 엄지연의 퇴로를 막았다.그녀는 좁은 구석에서 진퇴양난이었다.불빛이 비치지 않는 구석에서 엄경준은 불빛을 등지고 복잡한 눈빛을 했다.“왜? 성씨 가문 그 자식 찾으러 가려고?”엄경준이 낮은 목소리로 다그쳤다.눈썹을 잔뜩 찌푸린 엄지연이 짜증 가득한 얼굴로 엄경준의 접근을 거부하고 있었다.엄경준은 이미 엄지연이 정한 안전거리를 넘어서 가까이 있었다.그녀는 불편하다 못해 엄경준을 밀어내고 싶었다.“내가 누굴 찾든 경준 씨랑 무슨 상관이야?”엄지연은 그의 어두운 기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하게 답했다.안 그래도 무표정하던 엄경준의 얼굴이 더욱 싸늘해졌다.그는 엄지연의 대답이 몹시 못마땅했다.“엄지연, 성연우는 너랑 안 어울려.”엄경준은 어두운 얼굴로 엄지연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며 사람 위에 군림하는 기세를 풍겨냈다.그는 부하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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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성연우는 엄경준의 팔을 잡아당겨 엄지연의 손목을 힘껏 잡아 뺐다.엄경준은 넋이 나간 건지 성연우와 실랑이하지 않고 순순히 손을 풀었다.성연우는 그 틈에 엄지연을 뒤로 끌어당겨 두 사람 사이에 서서 엄지연을 보호했다.‘괴롭힌다고? 나를 때린 건 엄지연인데 누가 누굴 괴롭힌다는 거야? 게다가, 이게 괴롭히는 거면 그전에는? 엄지연 위에서 주최하지 못하고 밤새 사랑을 이어간 적도 있는데 그럼 그것도 괴롭히는 건가? 그럼 엄지연이 내 등을 할퀸 것도 나를 괴롭힌 건가?’엄지연은 억울한 표정을 지은 채 성연우의 뒤에 숨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설마 두 사람도 같이 밤을 보낸 건가?’엄경준은 엄지연이 불쌍하고 연약하며 억울한 척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성연우의 뒤에 숨어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엄지연이 나를 때린 건데!’성연우는 엄지연을 엄경준과 더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 마치 역병을 피하는 것처럼 말이다.엄경준이 더 이상 거친 행동을 이어 나가지 않을 것 같자 성연우는 엄지연의 손을 살며시 잡고 세세히 들여다보았다.“누나, 어때요? 아프지는 않으세요? 다치거나 불편한 곳은 없으세요?”성연우가 세심하게 묻자 엄지연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괜찮아요.”손목 부상은 없었지만 조금 빨갛게 달아오르고 뼈가 시큰거릴 뿐이었다. 엄경준이 너무 꽉 잡고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내 탓이 아니야! 엄경준이 너무 심한 말을 하니까 그런 거였어!’“괜찮다더니 봐봐요. 빨개졌잖아요.”성연우가 엄지연의 손바닥을 펴서 그녀에게 보여주며 손목에 난 빨간 자국도 강조했다.“마침 저한테 약이 있는데 같이 가요. 약 발라 줄게요.”성연우는 엄지연을 데리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괜찮아요. 약 안 발라도 돼요. 이틀 후면 괜찮아질 거예요.”엄지연이 성연우가 잡은 손을 빼내며 그를 따라 자리를 떴다.“안 돼요. 하얀 피부에 난 빨간 자국은 사라지는 데 시간이 좀 걸려요. 다른 사람들이 보면 입방아를 찧어댈 거예요.”성연우는 약을 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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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흠뻑 젖은 양복이었지만 색이 짙어서 그래도 엄지연을 가려주기에는 충분했다.“콜록... 콜록...”수영장 물에 사레가 들린 엄지연이 얼굴이 붉어질 때까지 기침을 계속했다.성연우는 그녀의 등을 연신 토닥이며 코에 들어간 물을 빼주었다.“제가 부축해 드릴게요. 얼른 돌아가서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옷 갈아입으세요.”엄지연이 조금 숨을 돌리자 성연우가 입을 열었다.“그래요...”사레들린 엄지연은 다시 기침을 심하게 했고 목소리도 쉬었다.조금 전 그녀를 잡아당겨 물에 빠지게 한 웨이터도 수영장에서 올라와 연신 허리 굽혀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길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드레스는 제가 배상해 드리겠습니다.”이성호는 엄지연의 손목이 다친 걸 몰랐다.“제발 클레임만 걸지 말아 주세요. 매니저님께서 아시면 혼날 거예요...”이성호는 수심에 찬 표정으로 연신 허리를 굽혀 용서를 빌었다.엄지연은 한 손으로 양복을 잡았다.괜찮다고 생각했던 손목은 확실히 통증이 느껴졌다.물에서 나와 정신을 차린 엄지연은 더 이상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하지만 주위에서 구경하는 남자들이 거리낌 없이 훑어보는 시선에 그녀는 인상을 찌푸렸다.엄지연은 여기서 괜히 생계를 이어 나가는 이성호와 실랑이할 생각이 없었다.그녀는 그저 지금 룸으로 돌아가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손목에 약을 바르고 싶었다.손목에서 간간이 통증이 전해져 오는 걸 보니 삔 것 같다.그림 그리는 손을 다쳤다는 건 꽤 심각한 일이었다.게다가 그녀는 앞으로 그림으로 먹고살아야 하는 사람이었다.이렇게 큰 리조트에서 이성호가 이런 저급한 실수를 한다는 것은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미끄러져 물에 빠진 것과 고객을 함께 끌어들여 빠진 것은 별개였다.그녀가 클레임을 걸지 않더라도 이성호는 상사에게 혼날 것이었다.“드레스는 배상할 필요가 없어요. 앞으로...”엄지연이 눈살을 찌푸렸다.드레스는 비싸지 않았고 손목이 다친 건 며칠만 휴식하면 호전될 수 있어서 굳이 품위를 잃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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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엄경준의 팔을 잡고 수영장을 빠져나간 연가희는 너무 즐거워 발걸음이 가벼워지고입꼬리도 살짝 올라갔다.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고 성씨 가문에까지 이 소식이 전해지면 엄지연처럼 파렴치한 여자는 성씨 가문 문턱에 발도 들일 수 없을 것이었다.‘엄지연은 내연녀가 어울려! 빛도 못 보고 숨어 사는 게 딱이야.’...룸으로 향하는 복도에서 엄지연과 성연우가 함께 걷고 있었다.“아까 고마웠어요.”엄지연은 진심으로 고맙다고 인사했다.의식을 찾은 후 그녀는 물을 제일 무서워했는데 수영장에 빠진 그 순간 그녀는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하지만 그녀는 성씨 가문이 이 리조트의 투자자일 줄 생각지도 못했다.“아까 그 웨이터는...”이성호와 연가희의 거래를 모르는 엄지연은 단순 사고인 줄로만 알고 웨이터를 위해 말을 꺼냈다.“그 직원은 해고할 거예요. 모든 고객이 누나처럼 소통하기 쉬운 게 아니에요. 나중에 까다로운 고객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리조트는 물론 심지어 그룹에도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어요.”두 사람은 말하며 이내 엄지연의 묵고 있는 룸 앞에 다다랐다.성연우는 신사답게 문 앞에 멈춰 서며 부드럽게 말했다.“누나, 먼저 샤워하세요. 다 씻고 저한테 전화하거나 문자 보내면 약을 가져다줄게요.”“그러지 않아도 돼요. 핸드폰도 챙겨 오지 않아서...”핸드폰을 룸에 두고 나온 엄지연이 성연우의 호의를 거절했다.성연우가 수영장에서 물에 뛰어들어 그녀를 구한 후부터 엄지연은 그가 주차장에서 트러블 났을 때처럼 싫지 않았다.“제가 카카오 친구 추가했으니 확인하시고 문자 하세요.”성연우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얼른 들어가세요. 다 되면 연락하세요.”성연우는 신사답게 자리를 뜨며 엄지연에게 혼자 있을 시간을 주었다.엄징연은 지문 인식을 통해 방에 들어갔다.입실할 때 지문을 등록하고 퇴실하면 지문을 삭제하는 시스템을 사용하는 리조트였다.엄지연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검은 그림자가 갑자기 뒤에서 나타나 그녀를 방 안으로 밀어 넣은 후 재빨리 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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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엄경준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떠났다.‘엄지연, 왜 다른 남자랑 함부로 자면서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거야! 내 앞에서는 온갖 도도한 척을 다 하더니 뒤에서는 다른 남자랑 침대에 기어 올라가?! 남자가 한시라도 옆에 없으면 안 되나 보지?!’엄경준은 미간을 찌푸린 채 셔츠를 아래로 세게 끌어내리며 성큼성큼 걸어갔다.그러다 모퉁이에서 갑자기 나타난 섹시한 몸매의 여성과 그만 정면으로 부딪쳐버리고 말았다.엄경준과 정면으로 부딪친 여성은 인상을 쓰며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젠장, 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나.’여성은 한소리 하기 위해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하지만 눈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금세 인상을 펴며 눈을 반짝였다.아까 수영장 옆에서 봤었던 남자였다.여성은 그가 윤성 그룹의 대표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아까 봤을 때는 웬 여자랑 함께 있었는데?’윤성 그룹의 대표는 리조트에 있는 모든 남자를 통틀어 최상급이었다.“어머나, 죄송해요. 제가 앞을 제대로 봤어야 하는데.”여자가 애교스러운 말투로 사과했다.여자는 엄경준을 아래위로 쭉 훑어보다가 그의 목덜미에 피멍이 든 상처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빨 자국이 선명한 것으로 보아 여자가 깨물어버린 게 확실했다.그리고 엄경준의 흰색 셔츠의 가슴 부분에는 파운데이션 자국이 있었는데 이건 방금 그녀와 부딪히면서 생긴 자국 같았다.“어머... 제가 옷을 더럽혔네요. 어느 룸에 계시는지 알려주시면 세탁해서 돌려드릴게요.”여자가 파운데이션 자국을 가리키며 말을 걸었다.“그리고 목에 난 상처는 한시라도 빨리 약을 바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혼자 약 바르는 게 불편하면 제가 도와드리고요.”여자가 다정하게 말하며 그에게 윙크를 보냈다.“꺼져.”하지만 엄경준은 냉랭하게 한마디를 남긴 채 여자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다시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여자는 단호하게 거절당하자 다시 원래 표정으로 돌아와 콧방귀를 꼈다.“비싼 척하긴.”말을 마친 여자는 다시 또각또각 하이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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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백세훈은 연가희의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연가희의 방식은 그에게 통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평소에도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기에 지금 이렇게 단둘이 말없이 나란히 걷는 장면은 상당히 어색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복도에는 마침 발걸음 소리조차 나지 않게 카펫까지 깔려 있어 더더욱 어색했다.“몸은 좀 어때? 이마에 땀이 가득한 걸 보면 아직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은데.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기 전에는 영양소를 충분히 섭취하고 피로하지 않게 많이 쉬어야 해.”결국 백세훈이 먼저 말을 걸며 어색한 분위기를 깼다.연가희에게 이렇다 할 호감은 없었지만 엄경준이 좋아하는 여자이기 때문에 백세훈은 그녀에게 당부의 말을 건넸다.그녀의 몸에 문제가 생긴다면 팔불출인 엄경준은 분명 병원장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고 그러면 그때 가서 야근하며 고생하는 사람은 그가 될 테니까.엄경준은 자기 여자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챙기는 그런 사람이었다.그래서 백세훈은 연가희가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놀러 나온 것에 불만이 많았다.연가희는 백세훈의 당부에 담담하게 대꾸했다.“걱정해줘서 고마워. 건강은 많이 좋아졌어. 땀을 흘린 건 너무 더워서 그래.”밖에서 땀이 나는 건 그렇다 해도 실내에는 에어컨을 조금 추울 정도로 에어컨을 틀어놨는데?백세훈은 그녀의 거짓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왜 거짓말을 했는지는 구태여 묻지 않았다. 그저 다시 입을 꾹 닫은 채 말없이 앞으로 걸어갔다.어느새 엄경준의 방문 앞에 다다르고 두 사람의 발걸음은 그제야 멈췄다. 엄경준의 왼쪽 방은 백세훈의 방이고 오른쪽 방은 연가희의 방이었다.방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두 사람 모두 엄경준을 찾으러 온 게 분명했다.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그저 힐끔 바라볼 뿐 누구도 먼저 말하거나 노크하지 않았다.거실.엄경준은 탁자 위에 거울과 약상자를 올려놓았다.그러고는 소파에 앉아 약상자를 열고 안에서 빨간약을 꺼내 면봉에 적신 후 거울을 보며 상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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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누구야? 그 상처, 누가 그랬어?”연가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이에 엄경준은 입을 꾹 닫은 채 한껏 굳어진 표정으로 백세훈을 바라보며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두 사람을 구경하고 있던 백세훈은 갑작스러운 그의 눈빛에 눈살을 찌푸렸다.‘연가희를 버리고 다른 여자랑 놀다가 온 것도 모자라 자국까지 남겨놓고 나한테 도와달라고? 엄경준 이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쓰레기였네. 그런데 대체 어떤 여자랑 놀았길래 이래?’엄경준은 거의 눈으로 레이저 쏘듯 백세훈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그래, 친구가 아무리 멍청한 짓을 해도 끝까지 도와줘야지.’백세훈은 안경을 위로 밀어 올리며 연가희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가희야, 경준의 목에 난 상처는 내가 문 거야. 너 설마 뭐 오해한 건 아니지?”그 말을 들은 엄경준은 매서운 눈빛으로 백세훈을 바라봤다.‘상황을 더 안 좋게 만들면 어쩌자는 거야?!’백세훈은 콧잔등을 어색하게 긁으며 엄경준의 시선을 피했다.‘상처가 딱 봐도 이빨자국인데 내가 여기서 뭘 어떻게 더 도와줘.’“아니면 내가 여기서 어떻게 물었는지 다시 한번 보여줄까?”백세훈이 입을 열면 열수록 엄경준의 얼굴은 점점 더 험악해져 갔다.그때 입을 꾹 닫고 있던 연가희가 무척이나 서러운 얼굴로 엄경준을 바라보며 말했다.“경준아, 만약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차라리 그렇다고 솔직하게 얘기해줘. 내가 없는 게 네가 더 행복하다면 그렇게 해줄게...”말을 마치자마자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연가희는 터져 나오려는 서러움을 참기 위해 입을 가리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뛰어갔다.서러운 마음을 표출하려 했던 것인지 방문이 조금 세게 닫혔다.물론 움찔할 정도의 큰 소리는 아니었다.‘경준이 목에 난 상처는 엄지연의 짓인 게 분명해!’직접 본 건 아니었지만 연가희는 아주 직감적으로 엄지연이 한 짓이라는 것을 알아챘다.문 뒤에 기대 선 그녀의 두 눈이 질투와 분노로 일렁였다.‘엄지연, 경준이가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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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약을 다 바른 후 백세훈은 거즈로 상처를 싸맸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 지경까지 된 거야?”백세훈이 면봉 등 쓰레기를 휴지통에 버리며 말했다.그 말에 엄경준의 눈빛이 사나워졌다.“그 말 하려고 찾아왔어? 그런 거면 나가.”“알았어. 얘기 안 할게.”백세훈이 두 손 들어 항복하며 엄경준을 진정시켰다.그때 문자 알림 소리가 들려오고 잠금을 풀고 휴대전화를 확인하던 백세훈의 입꼬리가 위로 씩 올라갔다.“너 연가희 주려고 불꽃놀이 세트 많이 사뒀었지? 그거 어디 있어? 나한테도 좀 줘.”엄경준은 기분이 나빠 있던 터라 친구의 이상함도 눈치채지 못한 채 턱을 치켜들며 한 방향을 가리켰다.“비밀번호는 0000이야.”백세훈은 캐리어를 열고 막대 폭죽을 꺼내며 말했다.“고마워.”그러고는 떠나기 전 그는 친구가 곤란해지는 건 싫었는지 고개를 돌려 엄경준에게 귀띔해줬다.“셔츠에 핏자국 있으니까 갈아입어.”말을 마친 백세훈이 미련 없이 문을 닫고 가버린 후 엄경준은 바로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확실히 백세훈의 말대로 옷깃에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이에 엄경준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셔츠를 벗어 쓰레기통에 버리고 새 옷을 찾으러 갔다.잠시 후 그는 다시 거실로 돌아와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감기약, 진정제, 그리고 붓기를 가라앉히는 약을 구매했다.빠뜨린 게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그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새 셔츠로 갈아입은 후 막대 폭죽을 들고 문을 나섰다....엄지연은 엄경준이 떠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내려와 엄경준의 냄새를 없애려고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욕실에 가서 샤워하며 가글도 몇 번 했다.하지만 여전히 피 냄새가 진동해 입안에 상쾌한 느낌이 들 때까지 양치질을 두 번이나 더 했다.오른손을 움직일 때 약간의 통증이 있어 그녀는 왼손으로 서투르게 샤워를 한 후 거울을 비춰보았다.목 근처에 몇 곳이 빨갛게 부어올랐는데 가려워서 긁고 싶은 거로 보아 아마 모기에 물린 것 같았다.바닷가에는 흰색과 검은색의 줄무늬를 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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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엄지연은 약이 들어있는 봉투를 건네받았다.“고마워요.”‘카톡 추가하자마자 약을 보냈네.’그녀는 성연우가 이렇게 빨리 일을 처리할 줄 몰랐다.엄지연은 약을 받은 후 곧장 그에게 감사하다고 카톡을 보냈다.봉투를 열어보니 안에는 붓기를 가라앉히는 약 외에 감기약과 수면제도 있었다.감기약?며칠 전처럼 쌀쌀하기는커녕 날씨가 좋아 물도 차갑지 않았는데 감기약은 왜 넣었지?물론 수면제는 도움이 될 것 같았다.상처를 입고 기억을 잃은 후 줄곧 물을 두려워했었는데 오늘처럼 갑자기 수영장에 빠진 날 잠자기 전에 먹기 딱 좋았다.‘섬세한 사람이네.’엄지연은 마음속으로 성연우를 칭찬했다.그때 초인종 소리가 또다시 울렸고 그녀는 다시 문을 열었다.“성연우 씨?”직원이 이불을 갈러 온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문밖에는 성연우가 서 있었고 이에 엄지연은 깜짝 놀랐다.성연우는 손에 든 봉투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누나, 약 가져왔어요.”‘약? 약이라면 아까 보내 놓고 왜...’엄지연이 고개를 돌려 거실 탁자 위에 놓인 약 봉투를 바라보았다.성연우가 약을 보내온 게 아니면 대체 누가 약을 보내온 거지?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설마 엄경준...?’성연우 외에 그녀가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알고 물에 빠졌다는 것도 알고 있을뿐더러 방 번호도 알고 있는 사람은 엄경준밖에 없었다.‘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화를 내며 돌아간 인간이잖아. 혹시 모르니까 저 약은 버리는 게 좋겠어.’엄지연은 거실로 돌아와 탁자 위에 놓인 약을 다시 봉투에 넣고 잘 묶은 다음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렸다.만약 모르는 사람이 준 약이라면 함부로 먹으면 안 되고 엄경준이 보냈다고 하더라도 더더욱 버려야 한다.엄지연의 뒤에 섰던 성연우도 탁자에 놓인 약을 발견했다.그는 그녀가 약을 봉투째로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을 보고 무슨 상황인지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는지 미소를 지으며 못 본 척 소파에 앉아 자신이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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