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Chapter 21 - Chapter 30

299 Chapters

제21화

박한빈이 보낸 그 눈빛의 의미를 성유리는 알고 있었다.그것은 경고였고 또 혐오였다.겉으로 보면 겸손하고 온화해 보이는 박한빈의 겉모습에 가려진 진짜 박한빈은 차갑기 그지없는 냉혈한이었다.원래도 알고 있었지만 오늘 그것을 더욱 뼈저리게 느낀 성유리는 눈을 아래로 해 쓰레기통에 꽂힌 반으로 찢긴 이혼서류를 주시했다.백번을 망설이다 마침내 건넨 서류였건만 박한빈은 그것에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박한빈은 애초에 성유리를 신경 쓰지 않았으니까, 성유리의 감정 그리고 그녀가 내린 결정에도 역시 관심이 없었다.그로부터 이틀 동안 성유리는 박한빈은 본 적이 없었다. 가장 최근에 전해 들은 소식은 공식회의에 박한빈이 참석했다는 것이었다.짙은 색의 정장을 입은 박한빈은 코앞에 들이닥친 카메라 앞에서도 변함없는 미모를 유지했는데 입꼬리까지 살며시 올라가 있어 마치 영화배우를 연상케 했다.그런 기사를 보고서야 성유리는 박한빈이 지금 도성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성유리는 달갑지 않은 그 얼굴을 더 보지 않고 자신의 홈페이지로 넘어가 연재를 재촉하는 댓글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성유리는 만화가였지만 성유리가 속한 상류사회에서는 별로 인정해주지 않는 직업이었다.돈 좀 있다 하는 사람들은 다들 미술을 배웠지만 그들이 접하는 건 국화나 유화지 성유리가 그리고 있는 달달한 사랑 이야기가 가미된 만화는 아니었다.하지만 온라인에서는 성유리의 만화를 기다려주는 사람이 많았기에 성유리는 답글을 좀 달다가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그런데 핸드폰을 내려놓기 바쁘게 성유리의 핸드폰 화면이 다시 밝아졌다.진무열에게서 온 문자 때문이었다.“내일 진씨 집안에서 저를 위해 파티를 열어준대요, 유리 씨도 올래요?”미간을 한번 찌푸린 성유리가 답장하려고 하는데 진무열이 두 번째 문자를 보내왔다.“올 거죠? 며칠 전에 내가 공항에서 유리 씨 다섯 시간이나 기다려줬는데.”진무열의 말에 타자를 하던 성유리의 손가락이 공중에 머물렀다.이미 데리러 가지 않을 거라고 말했었는데, 거기서 다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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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시선을 아래로 한 성유리는 신문에 나온 제 얼굴을 들여다봤다.참 교양 없고 추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그걸 보고 난 성유리는 이상하게도 차분해졌다.성유리는 허리를 숙여 신문을 줍고는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차에 올라탔다.“출발하세요.”성유리의 높낮이 없는 말이 들렸음에도 기사는 바로 출발하지 못하고 박한빈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박한빈은 무표정으로 성유리를 보고 있었지만 성유리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차창까지 올려버렸다.그러자 박한빈도 매정하게 돌아서서는 별장 안으로 들어갔고 박한빈이 성유리를 보고 있지 않을 때, 성유리는 멀어져가는 박한빈의 뒷모습을 똑똑히 보았다.성유리는 박한빈이 돌아섬으로 성유리와 함께 가지 않겠다는 뜻을 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러니 망신을 당한다 해도 그건 박한빈과는 상관없는 오로지 성유리만의 몫이었다.하지만 늘 혼자였던 성유리는 이런 상황이 이미 익숙해져 버렸다.그다지 좋지 않은 기분으로 도착한 파티장은 생각보다 많이 떠들썩했다.오랜 시간 동안 진씨 집안은 진무열이라는 혼외자를 숨기진 않았지만 그를 냉대하며 외국으로 쫓아 보내기까지 해 혼외자에 대한 진씨 집안의 태도를 여실히 보여줬었는데 이번에 돌아오고 나서 이렇게 성대한 파티까지 열어주는 걸 보면 무언가 일이 생기긴 한 것 같았다.진무열이 알려주지 않으니 성유리는 어차피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겨 그것에 대해 묻지도 않았었다.그렇게 소란스러운 곳에 홀로 떨어진 성유리가 진무열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이게 누구야, 너 진짜 왔어?”성유리는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었기에 대꾸하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는데 그때 그 사람에 의해 성유리의 팔이 잡혀버렸다.“뭘 그렇게 급해 해? 내 말 못 들었어?”원유진이 앙칼진 목소리로 떠들어댈 때 원유진과 함께 다니던 동생들은 성유리의 팔이 잡히자마자 그 앞에 나서며 길을 막아버렸다.학교 다닐 때와 다름없는 모습에 성유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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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성유리의 표정은 전혀 장난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진지했지만 진무열은 그럼에도 웃음을 터뜨렸다.“가자, 이번에 돌아오면서 파티시엘 몇 명 데려왔거든. 디저트들이 딱 네가 좋아할 만한 것들이야.”말을 마친 진무열은 성유리를 데리고 앞으로 걸어갔다.진무열이 오늘 파티의 주인공이니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향해 있었지만 진무열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성유리만을 데리고 앞으로 나아갔다.그리고는 테이블에 놓인 디저트를 성유리에게 건네주었다.자신이 인정한 좋은 것은 같이 나누려고 하는 순진한 어린 아이 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진무열이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다 해서 성유리도 똑같이 굴 수는 없었다.눈앞에 들이 밀어진 케익을 한참 동안 보고 있던 성유리는 마침내 그걸 받아들고는 말했다.“의도가 너무 눈에 잘 보이잖아.”그 말에 진무열은 눈썹은 꿈틀거리며 물었다.“뭐가?”“내가 방패가 되어주길 바라는 거잖아.”성유리는 케익을 한입 베어 물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정말 한참 만에 먹는 케익인 것 같았다.박한빈과 성유리가 함께 사는 도연제에도 파티시엘은 있었지만 그들은 상류사회에선 별로 환영받지 않는 이렇게 달고 느끼한 케익은 잘 만들지 않았다.그들에게 케익은 그저 특별한 날 분위기를 내기 위해 준비하는 것일 뿐이었다.특별한 날에만 만들고 또 그걸 진짜로 먹는 사람이 없었기에 파티시엘들은 당연히 맛보다는 겉모습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하지만 열세 살에 처음 케익을 먹어본 성유리한테는 케익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 되어버렸기에 성유리는 지금도 오랜만에 먹어본 달콤한 케익을 천천히 녹이며 음미하고 있었다.은은한 우유 향과 상큼한 과일 향에 기분까지 좋아지는 것 같았다.그리고 아까보다 조금 펴진 성유리의 미간을 주의 깊게 본 진무열은 웃음을 짓고는 말했다.“너는 여전히 전이랑 달리진 게 없네.”“그래서 이게 나한테 주는 뇌물이야?”케익을 삼킨 성유리가 묻자 진무열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역시 너는 못 속이겠다.”그때 성유리의 눈에 맞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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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박한빈의 팔짱을 끼고 있는 성유정과 박한빈은 맞추기라도 한 듯 파란색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멀리서 보면 한 쌍의 원앙이 따로 없었다.그 순간 성유리는 제 삶을 가리고 있던 포장지가 뜯어진 것뿐 아니라 누군가가 제 뺨을 내려치는 듯 머리가 띵해졌다.그리고 그 뺨을 내리친 사람은 역시나 남편인 박한빈이었다.지금 입안에서 피어오르는 씁쓸함은 아무리 많은 케익을 먹어도 달래지지 않는 씁쓸함이었다.그래서 성유리는 더 이상 진무열과 말을 섞지 않고 케익을 내려놓고 뒤 돌아 가려 했는데 그 순간 성유정이 하필 그런 성유리를 봐버리고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언니!”그 맑고 높은 목소리를 성유리가 못 들었을 리가 없었기에 진무열도 그녀가 도망가게 두지 않고 아예 그 앞을 막아섰다.성유리는 그런 진무열을 따지들 올려보았지만 진무열은 미소를 띠며 박한빈과 악수를 했다.“박 대표님, 오랜만이네요.”박한빈은 다시 한번 저를 마주한 익숙한 뒷모습을 무시하며 진무열의 손을 잡았다.“반가워요.”“무열 오빠, 너무 오랜만이에요!”“오늘 좀 늦게 나와서 파티에 저만 안 온 줄 알았는데 이 앞에서 형부를 만난 거예요. 다행이죠 진짜.”“근데 언니는 왜 형부랑 같이 안 왔어?”성유정은 교묘하게 제가 박한빈과 함께 들어온 걸 해명하는 듯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뒤에 던진 질문이었다.그제야 성유리도 뒤돌아서 성유정의 말에 답했다.“별거 아니야.”성유리의 말은 너무나도 간결해 그 말에 대꾸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평소에 그렇게 말을 잘하던 성유정조차 말문이 막혀버렸다.하지만 성유정은 이내 눈을 반짝이더니 화제를 돌렸다.“이 케익은 무열 오빠가 언니를 위해서 준비한 거죠? 근데 언니는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던데. 형부가 언니한테 케익 사주는 걸 한 번도 못 봤거든요.”성유정의 연기는 너무나도 비열해서 그 연기에 맞춰주고 싶지 않았던 성유리는 구역질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미안한데 나 화장실 좀.”그 말에 성유정이 같이 가겠다고 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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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화

성유리가 힘을 주어 다음 손가락을 떼어낼 때 박한빈은 오히려 다른 손으로 성유리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그에 깜짝 놀란 성유리가 앞으로 조금 다가서자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성유리 박한빈에게 안긴 것처럼 이상한 모양새가 되어버렸다.그때 박한빈은 성유리의 잔뜩 어두워진 표정을 보더니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쓸었다.성유리가 방금 케익을 먹긴 했지만 입에 묻힐 정도로 열심히 먹진 않았을 텐데 박한빈의 행동은 성유리가 자신까지 의심하게 만들었다.미간을 아까보다 더 찌푸린 성유리가 박한빈을 밀어내려고 할 때 박한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케익 맛있었어?”갑작스러운 질문에 성유리가 당황하는 사이 박한빈이 몸을 앞으로 숙이더니 성유리의 입술에 입을 맞춰왔다.갑자기 부딪친 입술에서도 박한빈 특유의 강압적이고 상남자다운 성격이 느껴졌다.맞물린 입술 사이로 달콤한 케익의 향기가 퍼져나갔지만 그 향이 별로 달갑지 않았던 박한빈은 더 거칠게 성유리의 입술을 빨아들이며 허리에 얹은 손에도 힘을 주었다.이미 성유리의 허리에는 박한빈의 손자국이 선명히 찍혀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점점 숨이 가빠지던 성유리는 그런 걸 헤아릴 새도 없이 박한빈을 밀어내려 그의 가슴팍을 쳐댔지만 박한빈은 성유리를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이토록 격렬한 키스를 다른 사람이 봤다면 서로 죽고 못 사는 부부 사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성유리는 알고 있었다.박한빈은 그저 기분이 나빠서 그 분풀이를 자신에게 하고 있다는 것을.개도 제 밥을 건들면 화를 내는데 박한빈 같은 인간은 오죽할까.이 세상에는 박한빈이 버리는 것만 있지 박한빈이 버려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얼굴을 마주했을 때 박한빈이 한 말을 성유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그래서 성유리는 어차피 이기지 못할 상대임을 알기에 박한빈의 가슴을 내리치던 손을 아래로 떨어트리고는 두 눈을 뜨고 박한빈을 바라보았다.그때 박한빈이 입을 벌리더니 갑자기 성유리의 입술을 깨물어버렸다.따가운 느낌과 함께 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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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화

저 스케치북은 성유리가 오랫동안 찾지 못하던 것이어서 성유리는 그냥 어디 구석에 넣어두고 까먹은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런 걸 왜 원유진 손에서 보게 된 건지 의아했다.그래서 좀 더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정말로 스케치북 커버에 성유리 이름까지 적혀있는 성유리의 것이 맞았다.“어머, 성유리!”그에 입이 째지게 웃던 원유진은 성유리를 부르며 말했다.“얼른 와서 이것 좀 봐봐, 이거 네 거지?”“유정이가 너 그림 잘 그린다고 해서 뭐 얼마나 대단한 걸 그리나 했는데, 고작 이런 거였어?”“일진이 나를 사랑한다고?”원유진이 말을 뱉자마자 주위에 있던 원유진 무리들이 따라 웃었다.성유리는 그들을 상대하기도 귀찮아 아무 말 없이 스케치북만 뺏으려 했다.지금의 성유리는 스케치북이 어떻게 원유진한테 있는지 따져 물을 용기도 없었다.그리고 그걸 눈치챈 원유진이 성유리가 다가오자 바로 옆 사람에게 스케치북을 던져주었다.그리고 스케치북을 받은 사람을 바로 다음 사람에게 넘겨주며 무슨 릴레이 전달 시합을 하는 것처럼 다들 원을 그리며 서 있었다.그 중간에 끼어 있는 성유리는 그들의 장난감이 되어버린 강아지 같았지만 성유리는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지금의 성유리는 그들이 뒤 내용을 읽는 게 가장 두려웠다.그건 성유리가 아주 오래전에 그린 건데 거기에는 청춘멜로뿐 아니라 성유리가 박한빈을 혼자 짝사랑하며 끄적인 것들도 적혀있었다.그래서 스케치북이 다시 원유진 손에 들어간 틈을 타 성유리는 재빠르게 낚아챘지만 원유진은 여전히 손에 힘을 풀지 않고 있었다.성유리와 원유진 둘 다 힘을 빼지 않으니 스케치북은 버티지 못하고 두 쪽으로 갈라져 버렸다.성유리 손에 절반이 들려있었고 원유진의 손에 들려있던 다른 절반은 원유진에 의해 하늘로 뿌려졌다가 바람을 타고 땅에 떨어졌다.성유리는 고민할 새도 없이 주저앉아 스케치북의 다른 절반을 주워들었고 그 소동에 주변 사람들도 하나둘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원유진은 당연히 사람들에게 제가 성유리를 괴롭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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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화

그래서 진무열이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르지만 박한빈의 지금 눈빛은 무언의 경고였다, 더는 성유리에게 다가가지 말라는 경고.그에 진무열이 옅은 웃음을 흘리자 박한빈은 더 이상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성유리의 허리에 손을 두른 채 파티장을 빠져나갔다.그리고 차에 탄 박한빈은 “펑” 소리가 나도록 차 문을 세게 닫았다.그 분노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는 세기에 괜한 불똥이 튈까 두려웠던 성유리는 구석으로 몸을 피했지만 손에 든 종잇장들은 어김없이 손을 뻗는 박한빈에게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그에 성유리는 동공이 확 작아지며 다급히 외쳤다.“돌려줘!”그건 박한빈이 2년 동안이나 같이 살았지만 성유리가 이토록 화를 내는 건 처음 봤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성유리는 화가 나 털이 곤두선 고양이마냥 달려들어 손가락을 펼치며 박한빈 손에 들린 종잇장들을 빼앗으려 했다.처음에는 그저 무엇인지 확인만 하고 싶었던 박한빈도 성유리의 태도를 보니 자연스레 미간이 찌푸려지며 그녀에게 종이를 빼앗을 기회를 주지 않으려 제 큰 손을 들어 성유리의 두 손을 고정시켰다.“놓으라고! 그건 내 거야!”박한빈은 아까보다 더 흥분한 성유리를 무시하며 종잇장을 높게 들어 올렸다.때는 차가 이미 떠난 뒤라 차 안의 어두워진 불빛 때문에 박한빈이 불을 켜려 했다.그런데 그때 성유리가 박한빈 쪽으로 몸을 기울더니 박한빈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춰왔다.그 순간 박한빈은 하던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이건 박한빈이 기억하건대 성유리가 처음으로 주동적으로 맞춰온 입이었다.자라온 환경 탓인지 아니면 사람이 원체 보수적인 탓인지 이런 쪽에선 한 번도 주동적인 적이 없던 성유리의 예상을 벗어나는 행동에 박한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박한빈이 벙찐 그 잠깐의 틈을 타 성유리는 손쉽게 스케치북을 앗아갔고 바로 제 등 뒤로 숨겼다.그제야 성유리의 의도를 알아차린 박한빈이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꺼내.”“이건 내 거야.”더 이상 성유리와 실랑이를 하기엔 인내심이 바닥나 버린 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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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화

저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린 성유리는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지금 도연제에 있니?”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여전히 평온한 김서영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성유리가 대답했다.“네.”“내가 지금 그리로 갈게. 할머님 아프시단다, 나랑 같이 병원에 가자.”어젯밤 성유정의 인스타를 보니 박한빈과 둘이 같은 곳에 간 것 같은데 그럼에도 박한빈이 성유리에게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는 건 성유리가 굳이 올 필요가 없다는 뜻인 것 같이 성유리는 김서영의 제안도 거절하려 했다.괜히 반기지도 않는 곳에 억지로 얼굴을 들이미는 것 같아 내키지 않았지만 김서영 앞에서 거절의 말을 하려니 그것 또한 막막했던 성유리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네, 알겠어요.”김서영의 성격은 박한빈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엄마에 그 아들 아니랄까 봐 방금도 그냥 성유리에게 통보를 하기 위해 연락한 것이었다.성유리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끊긴 전화가 그걸 증명해주고 있었다.십 분이 지나고 도연제에 도착한 차에서 내린 김서영은 성유리가 걸치고 있는 옷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하지만 뭐라 말은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손에 들렸던 걸 성유리에게 건네주었다.“이건 내가 사람 시켜서 준비하라고 한 생선 죽이야, 좀 있다가 네가 직접 할머님한테 드려.”“신문에 난 일 할머님도 아셨어. 평소에도 박씨 집안 명성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시는 분이니까 네가 한 일도 너도 다 못마땅하실 거야 지금은. 그러니까 좀 있다 무슨 말을 해도 너무 마음에 담아두진 마.”김서영이 차분히 말을 마치자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성유리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김서영을 보며 물었다.“어머님도... 아셨어요?”“신문 헤드라인에 걸렸는데 어떻게 모르겠니.”성유리는 김서형의 반문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런 성유리를 가만히 보고 있던 김서영은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말을 이었다.“원씨 집안 딸도 어릴 때부터 안하무인이었어. 하지만 이번 일은 네가 과했던 게 맞아. 네 신분도 생각했어야지. 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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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화

“한빈아, 내가 한 말 들었어?”어르신의 이어지는 말에 성유리는 그제야 안에 박한빈도 함께 있다는 걸 알고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할머니, 그 얘긴 안 꺼내시기로 하셨잖아요.”“그건 걔가 제 일은 잘했을 때의 얘기지, 봐봐, 지금 무슨 일을 저질렀나.”말을 하던 어르신은 갑자기 연신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할머니!”“괜찮아.”하지만 이내 안정을 되찾은 어르신은 하던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한빈아, 넌 내 하나뿐인 손자야. 나는 당연히 네가 잘 되길 바라고 있어.”“네 엄마가 그때는 지화의 주식으로 널 협박해서 결혼시켰지만 이젠 아니잖니. 넌 더 이상 네 엄마한테 고개 숙일 필요가 없어. 그러니 이혼하는 게 어때?”어르신의 말에 박한빈은 대답하지 않았다.성유리도 바라던 바였기에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좀 전까지만 해도 아련한 눈으로 박한빈을 보던 성유정은 갑자기 들어오는 성유리를 보자마자 낯빛이 변해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언니.”성유리는 그 부름에 대답하지 않고 들고 온 음식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이건 어머님이 갖다 주라고 하신 생선 죽이에요.”“너 이게 무슨 경우야?”미간을 찌푸리며 묻는 김난희에 성유리는 고개를 들고 그녀를 향해 웃어 보였다.“왜요?”“오기 싫으면 오질 말 것이지. 누구 보라고 그런 얼굴을 하고 들어와, 난 진짜 너 같은...”“알겠습니다 그럼.”김난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는 대답하며 몸을 돌렸다.이건 전혀 예상 못 한 행동이라 자리에 있던 모두가 당황했는데 그래도 반응이 제일 빨랐던 박한빈이 바로 성유리의 팔목을 잡으며 말했다.“성유리.”그저 이름 한번 불렀을 뿐인데 그 속에 담긴 경고는 너무나도 선명했다.성유리는 피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박한빈과 눈을 맞추며 물었다.“왜? 여긴 날 별로 환영하지 않는 것 같아서 가겠다잖아. 아니야?”“할머니께 사과드려.”성유리의 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또 제 할 말만 하는 박한빈에 화가 난 성유리는 그와 마주친 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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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화

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은 잡고 있던 손을 힘없이 떨어뜨렸다.처음 말했을 때는 홧김에 한 말이라도 칠 수 있어도 두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는 걸 보니 장난이 아닌 것 같았다.“언니, 지금 뭐라고 했어?”성유정은 입가에서는 벌써 웃음이 새어 나오고 있었지만 그녀는 애써 놀란 척을 하며 물었다.“어떻게 이혼이란 말을 이렇게 경솔하게 해? 언니랑 형부...”성유정을 상대하기도 귀찮았던 성유리는 침대에 앉아있는 김난희만을 응시하고 있었다.그리고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린 김난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너 이거 지금 나 협박하는 거야?”며칠 전 박한빈과 똑같은 반응에 옅은 웃음을 흘린 성유리가 입을 열었다.“아니요, 진심입니다.”성유리는 마침내 다시 박한빈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더는 감정도 속박도 없는 사인데, 같이 살면서 서로를 증오하는 것보다는 깔끔하게 헤어지는 게 낫죠.”“안돼!”김난희가 뭐라 하기도 전에 김서영이 들어오면서 소리쳤다.성유리가 어르신을 잘 달래서 점수를 따길 바랐던 김서영은 들어오자마자 들은 황당한 소리에 소리부터 질렀다.“결혼 같은 대사를 어떻게 그렇게 대충 결정해? 이건 두 집안이 20년 전부터 약속했던 결혼이야. 네가...”“진짜 이혼할 거야?”김서영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이 말을 끊으며 질문을 던졌다.당연히 김서영이 아니라 성유리를 향한 질문이었다.“응, 할 거야.”“그래, 그럼 후회하지마.”“서류는 언제 낼 거야?”평온한 둘의 대화를 보던 김서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소리쳤다.“박한빈!”“사모님.”김서영의 외침에 대답한 건 박한빈이 아니라 성유리였다.“이 년 동안 저 보살펴주시고 잘 대해주셔서 감사했어요. 하지만 오늘 이 결정은... 저도 오랫동안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에요.”“전에 그렇게 말씀하셨죠, 결혼이랑 감정은 다 오랫동안 정성 들여 가꿔야 하는 거라고. 근데 전 이미... 최선을 다한 것 같아요.”“안 맞는 건 그냥 평생 안 맞는 것 같아요.”“기대 저버려서 죄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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