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Chapter 41 - Chapter 50

299 Chapters

제41화

윤청하는 그래도 성유리와 더 얘기해보려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럼 앞으로 어떻게 살지는생각해봤어? 다른 건 그렇다 쳐도 병원비 만으로도 너 충분히 힘들어질 거야. 네 아빠는...”“어차피 굶어 죽진 않아요.”“이건 어머니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에요. 앞으로는 그냥 저 같은 딸 찾은 적도 없는 셈 치고 사세요.”“어머니 딸 성유리는 5살 때 이미 죽었어요. 어머니가 저를 잃어버린 그날이요.”결국 윤청하는 밖으로 나갔고 그렇게 한참을 소파에 가만히 앉아있던 성유리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테니스라켓을 들고 체육관으로 향했다.중학교 근처의 체육관에서 라켓을 한참이나 휘두른 탓에 에어컨이 켜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격렬한 운동을 해서인지 성유리의 이마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그 땀방울이 성유리의 앞머리를 적셨고 또 시야도 흐려지게 했다.그때 상대방의 서브를 기다리고 있던 성유리에게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제가 한 게임 해도 될까요?”임시 파트너인 대학생은 남자의 제안에 순순히 라켓을 넘겨주고는 옆으로 가 물을 마셨다.“여기 있을 줄 알았어.”진무열의 목소리에도 성유리는 대답 없이 손에 들린 공만 보고 있었다.“땀도 많이 흘리는 것 같은데 좀 쉬었다 하자.”그런 진무열을 빤히 바라보던 성유리는 상대가 저랑 공을 칠 생각이 없어 보이자 뒤 돌아 다른 파트너를 찾기 시작했다.하지만 진무열은 빠르게 달려가 성유리의 손을 잡았다.“놔.”진무열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성유리를 끌고 다른 쪽으로 갔다.“이 손 놓으라고 진무열!”성유리는 계속해서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진무열의 힘이 너무 세서 끝끝내 손은 빼내지 못했고 오히려 힘을 잘못 주어 진무열의 품에 안겨버리기까지 했다.성유리가 또 빠져나가려 하자 진무열은 그녀를 가둔 팔에 힘을 주며 말했다.“힘들면 울어도 돼. 여기 너 보는 사람 없어.”진무열의 말에 성유리는 온몸이 굳어버렸다.성유리는 천천히 몸에 힘을 풀과 라켓까지 땅에 내려놓았다.이를 악물고 있던 성유리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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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화

박한빈과 성유리가 결혼을 한 지는 2년밖에 안 됐지만 둘이 알고 지낸 지는 오래되었었는데 지금껏 박한빈은 성유리가 감정 기복이 없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같이 살면서도 우는 모습을 별로 본 적이 없었는데 어쩌다 한 번 본 게 유산했을 때였디.박한빈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수술이 끝난 뒤였고 밤이 깊어진 탓에 두 집안의 가족들은 모두 돌아갔고 간호사는 옆에서 잠들었는데 성유리만은 가만히 침대에 앉아있었다.성유리는 대성통곡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소리 내 눈물을 훔친 것도 아니었다. 그냥 평온하게 창밖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려보냈었다.그때 박한빈은 뭘 하고 있었을까.박한빈 본인조차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그리고 성유리 뱃속에서 3개월 남짓 머무른 작은 생명에 대한 기억과 감정도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그렇게 모든 걸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성유리가 눈물을 흘리는 걸 다시 본 지금, 그날 병원에서 울던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도 또렷하게 기억났다.그게 박한빈이 본 중에서는 감정 기복이 제일 심한 성유리였다.물론 특별한 일을 할 때는 제외하고.그런데 아까의 성유리는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몸을 떨어가며 울고 있었다, 그것도 진무열의 품 안에서.“박 대표님?”그때 다시 들리는 목소리에 박한빈은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운동에 집중했다.1시간쯤 지나 탈의실에 가서 옷을 갈아입은 박한빈이 다시 1층으로 내려갔을 때는 성유리와 진무열이 이미 밖으로 나간 뒤였다.그때 문득 코트 옆 벤치에 있는 초록색 머리끈이 눈에 띄었다.박한빈은 그것이 성유리 것임을 알아봤지만 굳이 가서 챙기지 않고 그냥 밖으로 나가버렸다.미리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던 기사가 밖으로 나오는 박한빈을 보자마자 달려가 차 문을 열어주었다.“회사로 모실까요 대표님?”“그래.”박한빈은 차에 올라탄 뒤 바로 태블릿을 켜 처리해야 할 이메일들을 확인했다.그러던 박한빈이 무엇을 보기라도 한 건지 체육관을 금방 빠져나간 기사에게 말했다.“차 돌려.”“네?”순간 기사는 자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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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화

[자?][먹을 거 좀 사다가 집 앞에 놨으니까 일어나면 먹어.]나머지 문자들은 송효주가 보낸 것이었다.성유리의 소설연재로 인해 편집장과 싸워도 봤지만 아무래도 연재는 힘들 것 같다며 사과하는 내용의 문자였다.송효주에게 답장하며 현관문을 열어본 성유리는 문에 걸려있는 케익을 보게 되었다.달달한 초코향이 진하게 풍겨오는 그것은 성유리가 제일 좋아하는 케익이었다.성유리가 난데없는 케익을 보고 벙쪄있을 때 진무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깼어?”“응.”“물건은 잘 받았고?”“응.”“일단 냉장고에 넣어둬. 내가 지금 갈 테니까 우리 같이...”“무열아.”“오늘 고마웠어, 근데 나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그러니까 앞으로 이런 건 안 해도 돼.”제 말을 끊고 들려오는 성유리의 말에 수화기 너머의 진무열은 웃음을 터뜨렸다.“뭐 또 선이라도 그으려고? 전에는 결혼했다고 다가오지 말라더니 이번엔...”“나 이미 성씨 집안에서 나왔어.”“난 지금 성씨 집안 아가씨라는 이름도 없는 상태야. 이런 나를 너희 집안에서 받아줄까?”“너 이번에 힘들게 돌아온 거잖아. 나도 네가 무슨 포부를 갖고 있는지 아니까 말해주는 거야. 나한테 시간 낭비하지 마.”성유리의 말에 진무열은 잠깐의 정적을 유지하다가 입을 열었다.“유리야, 넌 진짜 하나도 안 변했구나. 여전히... 냉정하네.”“근데 너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는 알아?”성유리는 진무열이 가져다준 케익을 보며 답했다.“네가 원하는 게 다른 거라면 난 더더욱 줄 수가 없어.”또 한 번 말문이 막혀버린 진무열은 끝내 그 말을 내뱉었다.“넌 아직도 박한빈을 사랑하는 거지?”하지만 성유리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전화를 끊고 한참을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정신을 차린 성유리는 진무열과의 채팅창을 열어 아니라고 해명하려 했지만 그럼 일부러 신경 쓰면서 발뺌하는 것 같아 성유리는 다시 핸드폰을 무음으로 바꿔버렸다.오후에 푹 잔 덕분인지 성유리는 밤이 깊어지는 이 시각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어차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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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화

성유리와 윤청하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하면 성유리와 성시원 사이는 뭐 사이라고 정의할 것도 없었다.성씨 집안 가장이자 한 회사의 회장인 성시원은 남들 위에 군림하는 회사에서의 습관을 집에서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윤청하가 성유정을 무조건 편애한다면 성시원은 모두에게 똑같이 차가웠다.성시원은 집에 있는 날도 적었기에 아버지로서의 책임은 다하지 못했지만 자신의 지위에 도전하는 이는 절대 용납하지 않는 성격이었다.그래서 이번이 성유리가 처음으로 성시원관 단둘이 가지는 식사 자리였다.성유리가 룸에 도착했을 때 성시원은 못마땅한 듯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늦었어요.”성유리의 말에 성시원은 화는 내지 않고 그녀를 한번 보더니 옆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앉아.”하지만 성유리는 가만히 서서 테이블에 놓인 접시의 수를 세기 시작했다.성유리와 성시원의 것을 포함해서 모두 다섯 개였다.“좀 있다 다른 분들 더 오실 거야.”그런 성유리의 경계를 보아낸 성시원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고 그에 일전에 윤청하가 얘기하던 정략결혼이 떠오른 성유리는 목에 힘을 주며 물었다.“조씨 집안 사람들이에요?”“들었어? 네 엄마가 얘기했나 보구나. 그럼 더 잘됐네. 조 회장님이 마침 시간 난다고 하시니까 일단 그 집 아들과 만나보기라도 해.”“싫어요.”“제가 오늘 여기 나온 건 아버지한테 제 뜻을 똑바로 전하기 위해서예요. 더 이상 제 생활에 관여하지 마세요.”“저는 성씨 집안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우스운 짓은 그만하시라고요.”말을 마친 성유리가 돌아서서 방을 나가려고 하자 코웃음을 친 성시원이 입을 열었다.“성유리, 우스운 건 너야.”“너랑 성씨 집안의 관계가 말 한마디로 끊어낼 수 있는 거였어?”“그 여자 병원비만 대면 되는 줄 알았어? 순진하네. 내 말 한마디면 그 여자는 내일 당장이라고 병원에서 쫓겨나. 그리고 온 금성을 다 뒤져도 그 여자를 받아줄 병원은 없을 거야.”약점은 모두가 가지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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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화

“성 회장님, 오랜만입니다.”두 집안 어른들은 인사를 하며 자연스레 성유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무언의 협박을 하듯 저를 보는 성시원에 성유리는 주먹을 불끈 쥐더니 결국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여긴 제 딸아이 성유리라고 합니다.”“따님이 예쁘네요.”조재원이 웃으며 제 아들에게도 눈짓하자 그제야 옆에 있던 남자가 인사를 건네왔다.“안녕하세요, 조경우입니다.”깔끔한 정장을 입고 있던 남자는 그리 잘생긴 건 아니었지만 검은색 안경을 쓰고 있어 유난히 더 단정해 보였다.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는 남자와 달리 성유리는 여전히 억지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자자, 다 앉으시죠!”성시원의 말에 다들 자리에 앉았고 성시원은 바로 조재원과 백화점 일에 대한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그 분위기가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아버지의 의도를 정확히 몰랐다면 정말 그냥 양가의 식사 자리라고만 생각했을 것이다.성유리의 맞은편에 앉은 조경우는 아까의 인사 이후로는 성유리에게 그다지 큰 관심을 주지 않고 이따금 진중하게 어른들의 대화에 동참하며 얘기를 나눴다.그때 가만히 있던 조재원의 아내가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아가씬 올해 스물넷이라고 했죠?”“네.”“우리 사실 전에 봤었는데.”“작년에 로즈 호텔에서.”한혜진의 말을 들은 성유리는 잠시 당황한 듯했다.그날은 박한빈과 성유리의 첫 결혼기념일 파티였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화려한 드레스를 갖춰 입고 등장한 성유리는 그날 파티의 중심이 되었고 또 아직 결혼을 안 한 금성 재벌 집 딸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하지만 그날 박한빈이 나타나지 않아서 성유리는 그런 모습을 하고서도 모두의 웃음거리가 되어버렸다.김서영이 나서서 해명했지만 모두들 박한빈이 제 아내를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하지만 원체 해명 따윈 하지 않는 박한빈 때문에 성유리는 아직까지도 그가 그날 나타나지 않은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얘기하는 사람이 없어서 본인도 잊은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한혜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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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화

다행히 식사 자리는 무사히 끝이 났고 성유리는 보는 눈이 있어 성시원과 같이 차를 타긴 했지만 그 집에는 들어가기 싫었기에 기사더러 자신이 사는 아파트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그에 성시원의 눈치를 보던 기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성시원에 깜빡이를 켜고 방향을 틀었다.성시원과는 말조차 섞기 싫어진 성유리가 창밖만 바라보고 있을 때 그녀의 휴대폰이 울려왔다.성유리는 문자를 확인하지 않았지만 성시원이 경고하듯 말했다.“조씨 집안 아들이 보낸 것 같은데.”그 말에 성유리는 하는 수 없이 핸드폰을 들어봤고 역시나 조경우가 보낸 문자였디.[오늘 성유리 씨라는 분을 알게 돼서 너무 영광이에요.][혹시 오페라 좋아하세요? 티켓이 두 장 생겼는데 내일 같이 갈래요?][시간 없으시면 같이 안 가도 되니까 부담 갖지는 마세요.]당돌하진 않지만 목적성이 명확한 요청에 입술을 말아 물며 고민하던 성유리는 결국 승낙하고 답장을 보냈다.[좋아요.]문자를 보내고 난 성유리는 핸드폰을 성시원에게 보여주며 물었다.[이제 만족해요?]아무 대답도 없는 성시원에 성유리는 그 얼굴을 보기도 싫어졌는지 기사를 보며 말했다.“옆에 차 세워요. 제가 알아서 갈게요.”하지만 기사는 성시원의 명령이 아니라 차를 세우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그에 성유리가 성시원을 쳐다보자 성시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세워.”성유리가 차 문을 열려고 할 때 성시원이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조경우 씨 사람 좋아. 다리가 불편하긴 해도 그 정도면 아주 좋은 조건이야. 알지?”그 말에 성유리는 웃으며 답했다.“조건이 그렇게 좋으면 성유정더러 결혼하라고 하지 그래요?”성유리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성시원은 답을 하지 못했고 성유리 역시 그 답을 기다리지 않고 차 문을 열고 성큼성큼 걸어갔다.9시가 금방 넘은 지금은 거리의 불빛들이 찬란해지고 사람들의 밤 생활이 막 시작된 시각이었다.길가에 널린 차들이며 온통 사람들로 붐비는 영업장이며 모두 생기가 가득했지만 성유리는 이곳은 자신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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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화

그래서 식탁에는 박한빈과 김서영 둘만이 마주 앉게 되었다.“집에는 언제 들어올 거니?”수프를 마시며 묻는 김서영의 말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렸다.“전에는 유리랑 같이 사니까 여기 있으면 불편할 것 같아서 나가라고 한 거였어. 이젠 이혼도 했으니 들어와야지.”“괜찮아요.”“도연제가 더 편해요.”“뭐가 편한데? 새 여자친구 데려가는 게 편해?”말투는 평온했지만 단어마다에 조롱이 가득 배어있는 문장을 들은 박한빈은 수저를 내려놓고 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하지만 김서영은 그런 박한빈의 시선을 못 느낀 척 계속 말했다.“나 진지해. 네 아버지가 시킨 결혼이 마음에 안 들어서 이혼하고 새로운 여자 만나겠다면 난 반대 안 한다.”“하지만 성유정은 안돼. 걔는 절대 우리 집에 못 들여.”“왜요?”박한빈의 질문에 김서영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너 정말 그 아이랑 결혼할 생각이었니?”“그냥 어머니가 왜 유정이를 그렇게 싫어하는지 궁금한 것뿐이에요.김서영은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사람 싫어하는 데 이유가 필요하니?”김서영의 말에 박한빈이 대꾸를 못 하자 김서영은 한 번 더 쐐기를 박았다.“성유정 그 아이만 아니면 다 괜찮아.”“저는 어머니 눈에는...”말을 하다말고 멈칫하던 박한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버지가 저한테 골라주신 그 사람밖에 안 보이는 줄 알았어요.”성유리의 이름조차 입에 올리기 싫어하는 박한빈에 김서영은 웃으며 말했다.“유리?”“그래, 유리 좋아하지. 그런데 뭐 어쩌겠니, 너흰 이미 이혼을 했고 유리는 앞으로 나아가야지. 벌써 선보고 있던데.”김서영의 말에 박한빈이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선이요?”“그래, 오늘 오페라 보러 갔다가 만났어. 조경우 씨랑 같이 있더라.”“조경우면 그 절름발이 말하는 거예요?”“네.”“성씨 집안에서 많이 급하긴 했나 보네요.”그 말에 김서영은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박한빈, 너도 반성이란 걸 좀 해봐야 하지 않겠니? 왜 유리가 절름발이에게 가면서까지 너랑 이혼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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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화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웨이브를 넣은 머리카락은 어깨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었으며 그 입가에 핀 미소는 사람 자체가 한없이 온화해 보이게 했다.조경우가 뭐라고 했는지 성유리는 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어 조경우를 바라보았다.웃을 때마다 반짝이는 눈은 하나의 호수를 연상케 했다.성유리를 재미없고 조용한 사람이라고만 기억하고 있었던 박한빈은 처음 보는 환한 미소였다.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으니 문득 성유리가 스케치북을 뺏으려 하던 그 날 밤이 떠올랐다.그날은 성유리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키스한 날이었다.박한빈이 생각에 잠겨있을 때 조경우는 앞으로 몇 걸음 더 걸어갔고 고개를 돌려 성유리에게 또 뭐라 말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고개를 저었고 결국 조경우 혼자 차에 탄 뒤 성유리는 밖에 가만히 서 있었다.밤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누른 성유리는 다른 손을 들어 조경우를 향해 흔들어주었다.그렇게 조경우의 차가 떠나자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성유리는 얼굴에 남아 있던 웃음도 지우고 고개를 떨궜다.그 모습을 본 박한빈은 더 고민할 것도 없이 액셀을 밟아 성유리에게로 다가갔다.성유리는 제 앞으로 다가오는 더할 나위 없이 익숙한 검은색 맥세라티에 처음에는 두 눈을 의심했었다.하지만 창문이 내려지고 차분하다 못해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올 때 성유리는 제가 잘못 본 게 아님을 확신했다.“타.”“괜찮아요.”잠시 벙쪄있던 성유리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난 지하철 타고 가면 돼.”말을 마친 성유리가 박한빈 차 뒤로 돌아가려고 하자 박한빈은 차를 뒤로하며 성유리의 길을 막았다.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의도는 명확했다.그에 성유리는 입술을 말아 물더니 치마를 잡았다 놓으며 결국 차에 올라탔다.하지만 성유리는 조수석에 타지 않고 뒷좌석에 올라타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하실 말씀 있으세요, 박 대표님?”박한빈은 말없이 강하게 액셀을 밟았고 그 반동에 방심하고 있던 성유리는 앞 좌석에 머리까지 박을 뻔했다.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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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화

그걸 다 알면서 저도 모르게 농담을 뱉고 또 예상했던 혐오 가득한 말을 듣다니, 참 자학과 다름이 없어 보이는 행동이었다.“알겠어요.”“박 대표님 할 말 다 하셨으면 저 이만 내려도 될까요?”박한빈은 여전히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차는 서서히 속도를 줄이다가 옆에 멈춰 섰다.그에 바로 차에서 내리려고 하던 성유리의 귀에 다시금 박한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성유리.”박한빈의 목소리에 성유리는 문고리에 올린 손을 가만히 두었지만 굳이 고개를 돌리진 않았다.박한빈은 운전대를 매만지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우리가 그래도 한때는 부부였으니까... 성씨 집안에 무슨 일 생기면 나한테 말해도 좋아.”“이런 방식으로 나 역겹게 하지 말고.”마지막 말을 들은 성유리는 문고리를 꽉 쥐었고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대답을 할 수 있었다.“박 대표님 호의는 감사히 잘 받겠습니다.”말을 마친 성유리는 차에서 내린 뒤 고개도 돌리지 않고 지하철역으로 걸어갔고 박한빈은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성유리의 인영이 사라져가는 걸 지켜봤다.하지만 성씨 저택 근처에 지하철역 같은 건 없었기에 박한빈은 성유리가 이 시간에 지하철을 타고 어디로 갈지 궁금해졌다.하지만 그런 생각은 금세 사라졌다.아까 성유리의 그런 대답을 듣고 난 뒤 박한빈은 성유리가 진무열과 보란 듯이 함께 있고 이번에는 조경우까지 만나는 게 다 자신에게 손을 벌리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박한빈이 이런 가십거리에 엮이는 걸 제일 싫어한다는 걸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성유리였기 때문이다.정말 성유리는 이용할 수 있는 건 뭐든 다 써먹는 사람인 것 같았다....성유리는 빠르게 아파트로 돌아갔고 마침 조경우가 몇 분 전에 집에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내왔다.“오늘같이 얘기 나눈 거 너무 즐거웠어요. 다음에도 같이 밥 먹고 얘기할 기회가 있을까요?”조경우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그 뜻은 꽤나 직접적이었다.다들 성인이고 어차피 나와서 맞선까지 본 사이니 굳이 돌려 말할 필요도 없긴 했다.그리고 성유리도 조경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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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화

성유리는 밤이 깊어 가도록 잠을 청하지 못하고 있었다.눈을 감으면 멈추지 않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습기 가득한 방과 영원히 닫히지 않는 문, 그리고 유난히 더러운 옷과 도둑이 지나간 자리마냥 사정없이 뒤져진 서랍.마지막으로 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남자의 얼굴까지.8년 동안 성유리는 단 한 번도 그 악몽에서 헤여나온 적이 없었다.그런데 성유리에게 그런 지옥을 남겨준 남자가 오늘 교도소에서 나온 것이다.성유리의 번호는 어떻게 알았는지 전화를 걸어오는 남자도 그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도 모두 너무나 익숙했다.아무리 도망쳐도 남자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아 숨이 막혀왔다.금방 잡은 이 집도 안전하진 않은 것 같았다.한 쌍의 눈이 자신을 지켜보다가 금방이라도 덮쳐버릴 것만 같은 불안함에 성유리는 빨리 이 집에서 나가고 싶었다.하지만 집에서 나가도 마땅히 갈 곳이 없었던 성유리는 결국 병원으로 향했다.오승희가 자신에게 별 도움은 되지 않는단 걸 성유리도 알고 있었다.성유리에게 뭔가를 알려줄 수도 없는 상태의 사람이었지만 그녀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성유리는 뭔가 든든해지고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병원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금성에 온 그 남자가 제일 먼저 찾아갈 곳은 당연히 성씨 집안일 텐데 성씨 집안과 성유리의 관계로 보아 그들이 병원 주소를 알려줄 가능성이 충분했기에 이곳도 안전하진 않았다.그래서 성유리는 간호사에게 당부 몇 마디를 남기고는 당장 핸드폰을 꺼내 들어 항공권을 끊었다.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집도 계약을 한 상태로 간단히 필요한 것만 챙긴 성유리는 바로 공항으로 향했다.목적지는 중요하지 않았던 성유리는 가장 빠른 비행기로 예약을 하고 생전 처음 보는 도시에 도착해서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공항에 내려 핸드폰을 켜보니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는데 전부 성시원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성유리는 일단 택시를 잡아 예약해둔 호텔로 향했고 호텔 방에 들어오고 나서 다시 핸드폰을 꺼내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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