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걸 다 알면서 저도 모르게 농담을 뱉고 또 예상했던 혐오 가득한 말을 듣다니, 참 자학과 다름이 없어 보이는 행동이었다.“알겠어요.”“박 대표님 할 말 다 하셨으면 저 이만 내려도 될까요?”박한빈은 여전히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차는 서서히 속도를 줄이다가 옆에 멈춰 섰다.그에 바로 차에서 내리려고 하던 성유리의 귀에 다시금 박한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성유리.”박한빈의 목소리에 성유리는 문고리에 올린 손을 가만히 두었지만 굳이 고개를 돌리진 않았다.박한빈은 운전대를 매만지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우리가 그래도 한때는 부부였으니까... 성씨 집안에 무슨 일 생기면 나한테 말해도 좋아.”“이런 방식으로 나 역겹게 하지 말고.”마지막 말을 들은 성유리는 문고리를 꽉 쥐었고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대답을 할 수 있었다.“박 대표님 호의는 감사히 잘 받겠습니다.”말을 마친 성유리는 차에서 내린 뒤 고개도 돌리지 않고 지하철역으로 걸어갔고 박한빈은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성유리의 인영이 사라져가는 걸 지켜봤다.하지만 성씨 저택 근처에 지하철역 같은 건 없었기에 박한빈은 성유리가 이 시간에 지하철을 타고 어디로 갈지 궁금해졌다.하지만 그런 생각은 금세 사라졌다.아까 성유리의 그런 대답을 듣고 난 뒤 박한빈은 성유리가 진무열과 보란 듯이 함께 있고 이번에는 조경우까지 만나는 게 다 자신에게 손을 벌리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박한빈이 이런 가십거리에 엮이는 걸 제일 싫어한다는 걸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성유리였기 때문이다.정말 성유리는 이용할 수 있는 건 뭐든 다 써먹는 사람인 것 같았다....성유리는 빠르게 아파트로 돌아갔고 마침 조경우가 몇 분 전에 집에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내왔다.“오늘같이 얘기 나눈 거 너무 즐거웠어요. 다음에도 같이 밥 먹고 얘기할 기회가 있을까요?”조경우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그 뜻은 꽤나 직접적이었다.다들 성인이고 어차피 나와서 맞선까지 본 사이니 굳이 돌려 말할 필요도 없긴 했다.그리고 성유리도 조경우가
성유리는 밤이 깊어 가도록 잠을 청하지 못하고 있었다.눈을 감으면 멈추지 않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습기 가득한 방과 영원히 닫히지 않는 문, 그리고 유난히 더러운 옷과 도둑이 지나간 자리마냥 사정없이 뒤져진 서랍.마지막으로 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남자의 얼굴까지.8년 동안 성유리는 단 한 번도 그 악몽에서 헤여나온 적이 없었다.그런데 성유리에게 그런 지옥을 남겨준 남자가 오늘 교도소에서 나온 것이다.성유리의 번호는 어떻게 알았는지 전화를 걸어오는 남자도 그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도 모두 너무나 익숙했다.아무리 도망쳐도 남자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아 숨이 막혀왔다.금방 잡은 이 집도 안전하진 않은 것 같았다.한 쌍의 눈이 자신을 지켜보다가 금방이라도 덮쳐버릴 것만 같은 불안함에 성유리는 빨리 이 집에서 나가고 싶었다.하지만 집에서 나가도 마땅히 갈 곳이 없었던 성유리는 결국 병원으로 향했다.오승희가 자신에게 별 도움은 되지 않는단 걸 성유리도 알고 있었다.성유리에게 뭔가를 알려줄 수도 없는 상태의 사람이었지만 그녀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성유리는 뭔가 든든해지고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병원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금성에 온 그 남자가 제일 먼저 찾아갈 곳은 당연히 성씨 집안일 텐데 성씨 집안과 성유리의 관계로 보아 그들이 병원 주소를 알려줄 가능성이 충분했기에 이곳도 안전하진 않았다.그래서 성유리는 간호사에게 당부 몇 마디를 남기고는 당장 핸드폰을 꺼내 들어 항공권을 끊었다.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집도 계약을 한 상태로 간단히 필요한 것만 챙긴 성유리는 바로 공항으로 향했다.목적지는 중요하지 않았던 성유리는 가장 빠른 비행기로 예약을 하고 생전 처음 보는 도시에 도착해서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공항에 내려 핸드폰을 켜보니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는데 전부 성시원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성유리는 일단 택시를 잡아 예약해둔 호텔로 향했고 호텔 방에 들어오고 나서 다시 핸드폰을 꺼내 들
성유리는 홀로 소파에 앉아 두 손으로 제 몸을 감싸 안았다.그때 핸드폰이 또다시 울렸고 역시나 아까의 그 번호였다.딱 한 번 본 번호였지만 이미 성유리의 머릿속에 깊이 박혀버린 그 번호에 성유리는 핸드폰을 냅다 바닥에 내리꽂았다.한편 도연제에서는 숙자 아주머니가 대문을 사이에 두고 한 남자를 상대하고 있었다.“누구라고요?”“전 지석민이고요, 서연이... 아니, 성유리 아빠예요.”남자는 노래진 이빨을 드러내며 말했다.“유리 여기 있는 거 아니까 한 번만 나와 보라고 전해 주세요.”성씨 집안에서 성유리를 잃어버린 뒤 성유리가 시골에서 자랐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기에 숙자 아주머니도 남자의 행색을 보고 단번에 그의 말을 이해했다.숙자 아주머니는 눈살을 찌푸리며 남자를 아래 우로 훑어보더니 말했다.“유리 아가씨는 이미 집으로 돌아가셨어요.”“집으로 갔다고요? 왜요? 이 집...”“우리 도련님이랑 이미 이혼하셨어요.”숙자 아주머니는 귀찮은 티를 팍팍 내며 말했다.“그러니까 아가씨 찾으려면 성씨 집안에나 가봐요. 얼른 나가요.”“이혼이라고요?”성유리의 이혼은 지석민이 미처 예상 못 한 일이었다.뉴스에서 성유리와 박한빈의 결혼 소식을 보고 성유리가 박한빈 같은 재계 1위 재벌한테 시집갔다고 좋아했는데 이혼이라니!“네, 진작에 이혼했으니까 빨리 나가요. 안 그러면 경호원 부를 거예요!”숙자 아주머니는 눈앞의 남자를 아주 더럽게 여기며 마지막까지 눈을 흘기다가 문을 걸어 잠갔다.숙자 아주머니가 집 안으로 들어갈 때 마침 2층에서 내려오던 박한빈이 소매를 걷어 올리며 물었다.“밖에 누구예요?”“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집을 잘 못 찾은 사람이에요.”숙자 아주머니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은 말없이 고개를 들어 아주머니를 바라봤다.물론 박한빈이 커가는 걸 같이 지켜보기도 하고 나이도 박한빈보다 스무 살은 더 많은 숙자 아주머니였지만 박한빈의 그 날카로운 눈빛만 보면 심장이 철렁하곤 했다.그래서 아주머니는 사실 그대로 얘기할 수밖에 없
숙자 아주머니의 말이 박한빈에게 자신의 생일이 곧 다가오고 있음을 상기해주었다.차에 올라탄 박한빈은 저도 모르게 지니고 다니던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검은색과 금색으로 된 라이터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었고 밑부분에 박한빈의 이름이 새겨진 게 전부였다.이 작은 라이터가 결혼 기간 동안 성유리가 박한빈에게 준 유일한 선물이었다.다음 해에는 박한빈이 말도 안 하고 결혼기념일에 나타나지 않아서인지 성유리는 이런 보여주기식 선물조차도 준비하지 않았었다.올해 역시...박한빈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에 라이터를 다시 넣어두고 눈앞의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그런데 그때 기사가 갑자기 급정거를 한 탓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치켜뜬 채 기사를 바라봤다.그 눈빛에 기사는 다급히 해명하기 시작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그런데 앞에...”기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 앞을 가로막았던 남자는 어느새 박한빈이 앉아있는 자리의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오십은 넘어 보이는 남자는 유난히 짧은 머리에 노란 이빨을 드러낸 채 웃고 있었다.원래 이런 사람은 상대도 하지 않는 박한빈이었지만 숙자 아주머니가 아침에 한 말이 생각나 이번에는 창문을 내려보았다.“박 대표님이시죠?”“안녕하세요! 역시 대표님 인물 하나는 끝내주시네, 신문에서 보던 것보다 더 잘생긴 것 같아요!”얼굴을 들이밀며 말하는 지석민에도 박한빈은 차분하게 대꾸했다.“누구시죠?”“저요? 저는 서연이, 아니 유리 아빠죠! 제가 금방 금성에 와서 유리부터 만나려고 했는데 사람을 못 찾았거든요. 근데 이렇게 대표님 먼저 만나다니 정말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무슨 일이시죠?”“아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요. 그냥 오랫동안 못 봐서 잘 지내나 하고 와 봤는데 이 년... 아, 애가 연락이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대표님 찾아온 겁니다. 근데 우리 유리는...”“어딨는지는 저도 모릅니다.”박한빈은 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답했다.“진짜 이혼하셨어요?”“네.”“아니, 무
식당 앞에 도착한 박한빈은 기사가 말해주어서야 성시원과 대화 중인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성시원은 한눈에 봐도 아주 귀찮아하며 남자를 지나쳐갔지만 지석민은 포기하지 않고 그 뒤를 따라갔다.성시원이 차에 탈 때는 아예 큰 소리로 소리까지 질러댔다.“성 회장님이 동의하지 않으시면 저는 어쩔 수 없이 박 대표님을 찾아가서 그날 서연이랑 있었던 일을 알려줄 수밖에 없어요.”성유리든 성씨 집안이든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겨 자리를 뜨려 했던 박한빈은 지석민의 마지막 한마디를 듣고 난 뒤 다시 차를 세웠다.“대표님?”서훈의 부름에도 박한빈은 대답하지 않고 그냥 고개만 살짝 옆으로 돌릴 뿐이었다.지석민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까 매정하게 차에 올라탔던 성시원은 지석민도 같이 차에 태웠다.“대표님, 저분이 말씀하시는 서연이가...”서훈이 움직이지 않는 박한빈을 보며 어렵게 한마디 내뱉었는데 박한빈은 그 말엔 대꾸조차 하지 않고 바로 차에 타버렸다.서훈은 기사와 눈이 마주쳤지만 그 역시 박한빈의 의중은 모르는 것 같아 포기하고 그냥 따라서 차에 올랐다.저녁에 술을 마신 탓에 박한빈은 차에 타자마자 눈을 감았고 조수석에 앉은 서훈은 박한빈이 깨기라도 할까 봐 고개도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그런데 차가 한창 달리는 와중에 박한빈이 나지막하게 말했다.“알아봐.”그 말에 놀란 서훈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뭘요?”그에 박한빈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며 말했다.“성유리 양부.”...한편 낯선 곳에 떨어진 성유리는 지독한 몸살에 걸렸다.전날 밤에 잠을 자지 못한 탓인지 호텔에 들어온 뒤로 성유리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성유리가 하루 동안 밖에 나오지 않은 것에 이상함을 느낀 직원과 청소를 위해 문을 두드렸던 아주머니가 아니었으면 성유리는 그 잠에 빠져들어 다시는 눈을 못 뜰 수도 있었다.“여기에 친구나 가족 있어요?”“없어요.”“그럼 직장동료분께라도 연락을 드릴까요?”“괜찮아요.”걱정스레 묻는 직원에 성유리는 해열제를 넘기며 말했다.“그냥
다시 금성에 돌아온 성유리는 성시원이 감시를 붙였는지 안 붙였는지는 몰랐지만 붙여도 상관없었기에 굳이 지석민과의 만남을 피하지는 않았다.기복루, 금성에서 꽤 유명만 식당이며 성유리와 지석민이 만나기로 한 장소였다.성유리가 도착하기도 전에 미리 와있던 지석민은 다리를 꼬고 서빙을 해주는 여직원을 희롱하고 있었다.세상 두려울 게 없는 눈과 더러운 말을 내뱉는 입 앞에서 여직원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벌벌 떨며 메뉴판만 꽉 쥐고 있었다.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온 거긴 하지만 막상 이런 광경을 두 눈에 담으니 성유리는 다시 한번 숨을 참았다.그때 성유리를 본 지석민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서연아!”주먹을 꽉 쥔 성유리는 결국 지석민에게로 다가갔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여직원은 구세주라도 만난 양 메뉴판을 내려놓고 도망가버렸다.그런 여직원의 다리를 끝까지 보고 있던 지석민은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성유리를 보며 이빨을 다 드러내고 웃었다.“오랜만이야 서연아! 넌 어쩜 점점 더 예뻐지니?”말을 하면서 지석민은 성유리의 손을 잡으려고 팔을 뻗었지만 성유리는 그 손을 빠르게 피하고는 차갑게 지석민을 노려봤다.“하하,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내가 그래도 네 아빤데.”“서연아, 내가 그래도 너를 10년이나 키웠는데 어쩜 그리 매정하니. 성씨 집안 아가씨 됐다고 이렇게 나 모른 척하기야?”성유리는 여전히 무표정으로 지석민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테이블 밑에 놓인 손은 하얗게 질리도록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저 역겨운 말에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갈 것 같았다.“너도 알잖아. 내가 뭐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또 감옥에서 몇 년 살다 보니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겠어.”“다른 자식도 없고... 내 노후는 네가 보장해줘야지.”지석민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그래서 돈 달라고 여기까지 온 거예요?”“그깟 돈 몇 푼이 뭐라고 그러니? 넌 지금 성씨 집안...”“성시원 찾
그러고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그래요. 가서 말해요.”말을 마친 성유리는 지석민이 넋이 나가 있는 사이에 밖으로 나갔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지석민이 테이블을 '탁' 치며 쫓아나가려고 할 때 한 남자 직원이 그를 붙잡으며 말했다.“손님, 계산을 아직 안 하셨어요.”“밥도 안 시켰는데 무슨 계산이야!”“밥은 안 시키셨지만 차를 드셨잖아요. 그건 계산하셔야죠.”직원은 말을 하면서도 지석민을 위아래로 훑었는데 그 눈빛에는 무시가 가득했다.그에 화가 난 지석민이 벌벌 떨며 1억이 들어있는 카드를 던져주려 했는데 그 순간 또 다른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제가 계산하죠.”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지석민이 고개를 돌렸고 마침 직원에게 제 카드를 건네준 성유정이 지석민을 보며 웃고 있었다.“지석민 아저씨 맞으시죠?”“당신은...”“저는 성유리 씨 동생 성유정이에요.”“아 성씨 집안에서 주워왔다는 그 잡종?”성유정을 보며 웃음을 흘린 지석민은 그녀를 훑어보며 물었다.“왜요, 나한테 할 말 있어요?”지석민의 시선이 아주 불쾌했지만 성유정은 그런 감정을 애써 억누른 채 웃으며 말했다.“아저씨가 아까 성유리랑 하던 얘기 저도 다 들었어요.”“그래서요?”“돈 필요하시죠?”성유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성유리가 아저씨를 고분고분하게 모실 수 있게 만들 방법이 하나 있는데, 들어보실래요?”...한편 식당에서 나온 성유리는 아주 빠른 걸음으로 그곳으로부터 멀어져갔다.마치 아주 무시무시한 것에 쫓기듯 한 발걸음이었다.지석민이 더는 저를 해칠 수 없다는 건 성유리도 알고 있었다.저도 이젠 반항할 힘이 있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멍청하게 당하고만 있진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성유리는 두려웠다.어릴 때 나무에 묶인 코끼리처럼 성유리는 아직까지도 어릴 때의 그 기억이라는 나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하도 조급하게 걸은 탓에 차가 지나가는 걸 못 본 성유리는 하마터면 차에 치일뻔하기까지 했다.“야, 너 미쳤어?!”차
조경우와 성유리는 그렇게 프라이빗한 식당에서 만나게 되었다.금성에 오랫동안 성유리도 처음 와본 곳이었다. 조경우가 안내하지 않았더라면 금성이 이런 곳이 있다는 것도 몰랐을 것 같았다.금성 시내와 교외의 경계선에 위치한 식당인데 하얀 벽돌에 짙은 녹색의 기와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이었다.식당 내부에는 연꽃이 잔뜩 피어있는 호수와 빽빽하게 들어선 대나무도 있어 성유리는 이곳이 관광지로 쓰이는 원림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식당의 사장은 여자였는데 미모는 그렇게 출중하지 않으나 특유의 분위가 아주 온화했다.조경우가 미리 예약을 해서인지 메뉴를 고르지도 않았기에 여자는 차만 올려주고는 밖으로 나갔다.“여기는 식재료를 다 당일 들어온 걸로 쓰거든요. 그래서 먹고 싶은 건 전날 미리 말해야 되요. 어젠 급해서 제가 혼자 정했는데 괜찮으세요?”성유리를 향해 다정하게 웃는 조경우의 얼굴에서는 털끝만큼의 분노도 느껴지지 않았다.그에 성유리는 빠르게 대답했다.“괜찮아요.”“이건 이곳에서만 마실 수 있는 특색 차에요. 사장님의 할아버지께서 직접 채집한 찻잎이라 다른 곳에 팔지도 않거든요.”조경우는 친절히 설명하며 차를 따라주었지만 할 말이 있던 성유리는 차 맛을 음미할 겨를이 없어 대충 입만 갖다 댈 뿐이었다.조경우는 곧바로 다른 얘기들을 꺼냈다.영화, 음악, 그리고 음식들까지 꺼내는 얘기마다 조급해하지 않고 나긋나긋하게 묻는 조경우에 성유리는 하나하나 다 흥미를 가지고 대답할 수 있었다.사실 조경우랑 만나는 게 성유리는 꽤나 즐거웠다.그래서 성유리는 조경우가 아직까지도 결혼을 하지 않은 게 의아했다.다리가 불편하긴 하지만 신분이 남달랐기에 결혼을 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그때 조경우가 갑자기 건넨 말에 성유리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우리 전에 봤었어요.”“2년 전인가 금성대학에 다닐 때 유리 씨가 뮤지컬을 하나 했었죠? 그때 저도 무대 아래에 있었거든요.”“로미오와 줄리엣이요?”“네.”성유리의 질문에 조경우
성유리는 그때 말했다.하늘이는 이날을 정말 손꼽아 기다리고 있으니까 꼭 하루 종일 시간을 내서 함께 있어 달라고.박한빈은 그 약속을 지켜야 했다.하지만 지금, 이 모든 것이 여전히 의미가 있는 걸까?“생일 선물로 뭐 갖고 싶어?”결국, 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물었다.그러자 하늘이는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바라보다 금세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요.”박한빈은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하늘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박한빈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그렇지만 그토록 자신 있던 일조차 이제는 확신할 수 없었다.박한빈도 안다.하늘이를 엔젤 월드에 두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다는 것을.그는 너무 바빴고 아이와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도 몰랐다.하지만 박한빈은 하늘이를 데려오고 싶었다.실버 포레스트, 그들의 집으로.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혼자 돌아오는 집, 텅 빈 공간, 모든 것이 그대로인 듯 보이지만 단 하나만이 비어 있는 공간.그곳은 오직 하나를 끊임없이 상기시켰다.성유리는 이곳에 없다.그리고 만약 하늘이까지 없어진다면 박한빈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어쩌면 그 모든 순간이 박한빈의 행복이 그저 환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 갇히게 될 테니까 말이다.하지만 하늘이를 데려온 것이 정답이 아니었음을 그는 곧 깨달았다.아이는 좀처럼 말을 하지 않았고 박한빈 역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커다란 식탁,단둘이 앉아 조용히 식사를 했다.들려오는 것은 오직 숟가락과 젓가락이 부딪히는 소리뿐.박한빈은 새우를 까서 하늘이의 그릇에 놓으려 했지만 아이는 피해버렸다.그리고 담담히 말했다.“안 먹어요.”아이가 정말 새우를 싫어했었나?박한빈은 기억나지 않았다.그러나 분명 전에 성유리는 하늘이에게 새우를 까주곤 했다.그렇다면 하늘이는 정말 새우를 싫어하는 걸까? 아니면 박한빈이 까준 것을 먹기 싫은 걸까?그는 더 깊이 묻지 않았다. 그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조용히 새우를 먹었다.그렇게
장성 그룹은 최근 금성에서 가장 주목받는 기업이 되었다.몇 건의 대형 프로젝트를 따낸 것은 물론 해외 기업과의 협력 프로젝트가 국제적으로 상을 받으며 명성을 쌓았다.그 결과, 마치 지화 그룹조차 그 빛에 가려지는 듯했다.박한빈은 알고 있었다.이 모든 것이 사씨 가문의 지원 덕분이라는 것을.그렇지 않고서야 유효정이 연정우에게 남긴 자금만으로 이 정도 성과를 이루기는 불가능했다.하지만 아무렴 어떤가.사씨 가문이라 해도 박한빈에게는 눈엣가시일 뿐이었다.사실 지금 당장이라도 직접 손을 쓸 수 있었다.하지만 에릭이 말한 것처럼 국내의 법과 규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그가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면 몇 달, 길게는 일 년도 걸릴 수 있었다.그런데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한 달.그것이 그의 인내심이 닿을 수 있는 한계였다.성유리의 소식이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다면 박한빈은 정말 미쳐버릴지도 모른다.차가 도착한 곳은 엔젤 월드.박한빈이 집 안으로 들어섰을 때, 하늘이는 뒷마당에 서 있었다.나무 아래에서 무언가를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는 뒷모습.그는 아이를 부르지 않고 천천히 다가갔고 가까이 다가가서야 깨달았다.하늘이의 시선이 머물러 있는 것은 한 마리 나비였다.그러나 그 나비는 이미 사마귀에게 붙잡혀 있었다.가만히 놔둔다면 나비는 이제 곧 먹혀버릴 운명이었다.“구해주고 싶어?”박한빈이 하늘이에게 물으며 손을 뻗으려 하자 하늘이가 바로 대답했다.“아니요.”그 순간, 박한빈의 손이 멈췄다.“약육강식.”하늘이는 담담한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자연의 법칙이에요.”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는 고개를 숙여 하늘이를 바라보았다.그러나 아이의 얼굴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물론 하늘이는 또래 아이들보다 성숙한 편이었다.하지만 성유리 앞에서는 언제나 밝고 천진난만한 모습이었다.그런데 지금 그 표정이 사라져 버렸다.둘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그사이 나비의 날개는 찢겨 나가고 몸뚱이는 천천히 먹혀 사라졌다.그렇
박한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무표정하게 홍지은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곁에 있던 경비원을 쓱 쳐다보았다.사실 경비원은 막 홍지은을 제지하려던 참이었다.하지만 그녀는 만삭이었다.둥글게 부푼 배가 눈에 띄었고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는 문제가 생길까 봐 선뜻 손을 뻗지 못하고 있었다.그런데도 박한빈의 시선이 느껴지자 아무리 홍지은이 잘못될까 두려워도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놔! 네가 뭔데? 당장 이 손 떼라고!!”경비원에 의해 제지당한 홍지은이 더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그러나 그녀를 붙잡은 손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결국, 홍지은은 그 자리에서 속수무책으로 박한빈이 자신을 지나쳐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그 순간, 홍지은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러다 갑자기 더욱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알겠다! 그 계집애 죽었지? 그래, 아주 잘됐네. 원래부터 죽어 마땅한 년이었으니까.”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박한빈의 걸음이 뚝 멈췄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홍지은을 바라보았다.홍지은은 더욱 독하게 그를 저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어차피 이제 자신에겐 남은 것도 없었다.집도, 회사도, 공장도 모조리 압류당했다.심지어 남편마저 그녀를 재수 없는 존재라며 외면했다.모두가 그렇게 믿었다.홍지은이 성유리를 건드린 탓에 이런 비참한 상황이 벌어졌다고. 박한빈을 적으로 돌렸기 때문에 모든 걸 잃었다고.하지만 그녀는 억울했다.공장을 살리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한 것도 자신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걸 잃게 된 건 자신뿐이었다.그런데도 사람들에게는 비난할 자격이 있었다.그리고 박한빈과 성유리.그 둘이야말로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장본인이었다.홍지은의 눈에 분노와 원망이 서렸고 더욱 많은 독설을 퍼붓기 위해 입을 열려던 순간, 그대로 얼어버렸다.박한빈의 눈을 마주친 순간, 마치 무언가가 목을 조여 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숨이 막혀 손끝과 머리까지 싸늘히 식어갔다.그러나 박한빈은 아
“한빈아?”김서영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박한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눈빛을 마주한 순간, 김서영의 몸이 움찔했다.“무슨 일입니까?”박한빈이 물었다.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잠시 망설이던 김서영이 입을 열었다.“한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했잖아. 우선 돌아가서 좀 쉬어. 하늘이는 내가 곁에서 봐줄게.”“그럴 필요 없습니다.”박한빈은 망설임도 없이 거절했다.“전 괜찮습니다. 그리고... 하늘이에게 여기 있어 주겠다고 약속했어요.”“그래도...”“먼저 돌아가세요.”박한빈은 김서영의 말을 자르며 단호하게 대답했다.그러고는 다시 시선을 돌려 침대 위에 누워 있는 하늘이를 바라보았다.김서영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잠시 고민하더니 결국 조용히 먼저 물었다.“성유리는 아직도 소식이 없어?”그 말이 끝나자 박한빈의 몸이 미세하게 굳어졌으나 이내 담담하게 대답했다.“괜찮습니다. 찾을 수 있어요.”“설령 찾지 못한다고 해도... 유리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분명히 있을 거예요.”성유리의 실종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사씨 저택 내 모든 감시 카메라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었다면 그만큼 이 집안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뜻이다.게다가 성유리의 교통수단 이용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그 말은 즉, 누군가가 그녀를 데리고 사씨 저택을 빠져나간 후 바로 차에 태웠다는 뜻이었다.그리고 이 모든 것은 분명 연정우가 미리 계획해 둔 것임이 분명했다.심지어 자신을 에릭의 문제로 떠나게 만든 것조차 그가 미리 계산한 수단일 가능성이 높았다.사씨 부부 두 사람 또한 혹시 이 일에 개입한 걸까?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굳이 그들이 입을 열지 않아도 상관없었다.박한빈은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두 사람이 입을 열게 만들 수 있었으니까.생각에 잠겨있던 그의 눈빛이 한층 더 차가워졌다.그 변화를 감지한 김서영이 조심스럽게 불렀다.“한빈아?”그제야 박한빈이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김서영의 말을 듣고서야 박한빈은 비로소 정신을 차린 듯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려 했다.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같은 자세로 있어서인지 일어나는 순간 어지러움이 몰려와 그는 잠시 가만히 서서 정신을 가다듬고 난 후에야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하늘이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이전에는 많이 회복된 상태였지만 재발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사소한 감기나 열조차도 재발의 신호일 수 있었다.이런 하늘이의 상황을 잘 알기에 김서영은 초조함에 눈가까지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박한빈을 보자마자 늦게 온 걸 책망하려던 참이었으나 그가 초췌한 모습을 하고 있는 걸 보고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대신, 낮은 목소리로 아들인 박한빈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가서 하늘이 좀 봐.”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곧장 병실로 향했고 그 시각 하늘이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며칠 만에 마주하는 얼굴이었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살이 빠진 게 느껴졌다. 산소마스크를 착용한 채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모습이 박한빈의 가슴을 죄어왔다.그는 조심스럽게 침대 곁에 앉아 나지막이 불렀다.“하늘아.”그제야 하늘이가 천천히 눈을 떴고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던 박한빈을 하늘이가 입을 열었다.“엄마는요?”박한빈은 대답할 수 없었다.원래도 가라앉아 있던 목소리가 이 순간에는 아예 막혀버린 듯했다.“일이 좀 있어서... 며칠 뒤엔 돌아올 거야.”결국 박한빈이는 하늘이한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그런 서툰 거짓말로 자신조차 속일 수 없었는데 하물며 하늘이가 믿을 리 없었다.하늘이는 묵묵히 그를 바라보다 잠시 후,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엄마가... 저를 버린 거예요?”그 말을 꺼내자마자 하늘이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고 커다란 물방울들이 베개 위로 떨어지며 금세 얼룩을 만들었다.아이의 눈물에 박한빈은 순간 당황했고 황급히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주면서도 뭐라도 말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적어도, 단 하나의 거짓말이라도.하지만 무슨 말을 할 수
박한빈과는 달리 연정우의 표정은 한없이 차분했다. 오히려 박한빈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약간의 의문마저 섞여 있었다.그러다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박 대표님, 그걸 저한테 물어보는 게 맞으십니까? 유리는 당신 아내잖아요. 그런데 지금 저한테 와서 유리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이게... 적절한 질문입니까?”연정우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런 말을 다시 덧붙였다.“아니면 무슨 증거라도 있나요? 제가 유리를 데려갔다는.”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선 채로 연정우를 노려볼 뿐이었다.단단히 쥐어져 있던 박한빈의 두 손이 서서히 풀어지더니 이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좋아요. 연정우 씨. 이건 당신이 선택한 겁니다.”말을 마친 그는 주저 없이 몸을 돌렸다.하지만 연정우는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박한빈의 뒷모습을 한 번 바라본 후, 입가에 얕은 미소를 띠며 주위의 직원들에게 시선을 돌렸다.“다들 할 일 없으면 어서 돌아가서 업무들 보세요.”그 한마디가 떨어지자, 직원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서둘러 제자리로 돌아갔다.한편, 박한빈은 이미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금성은 그리 큰 도시가 아니었다.도시 전체를 뒤집어 찾는다면 성유리를 못 찾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일이 흘러갔다.“죄송합니다. 박 대표님. 여전히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습니다.”그 대답이 또다시 들려오는 순간, 박한빈의 표정에서는 어떤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그는 아무 말 없이 천천히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성유리는 정말로... 사라져 버렸다.아무런 흔적도 없이.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건, CCTV에 찍힌 성유리의 손끝뿐.그 외에는 마치 처음부터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그 어떤 행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처음엔 불안과 분노가 그를 집어삼켰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감정조차 사라지고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어두운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는 생각했다.‘뭔가 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유리는 나를
박한빈은 단 한 번도 그들을 돌아보지 않고는 몸을 돌려 뒤쪽에 서 있는 사람들을 향해 짧게 명령했다.“찾아.”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안으로 들이닥쳤다.그러자 류수미가 다급히 외쳤다.“박한빈 씨! 여긴 사씨 저택입니다! 지금 당신이 하는 짓이 무단 침입이라는 거 모르세요?”“제 아내가 당신들께서 주최한 파티에 참석하러 왔는데 실종됐습니다.”“그런데 제가 이곳을 수색하는 게 뭐가 문제죠?”“설마 저희가 유리를 숨겼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박한빈은 그들의 반응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곧장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경찰 측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성유리 씨는 누군가에게 끌려갔을 가능성이 큽니다.”상대방의 말에 박한빈의 안색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범인은 사씨 저택의 구조를 아주 잘 아는 사람입니다.”“CCTV가 설치된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성유리 씨를 데려갈 때 모든 감시를 피해 움직였습니다.”그들이 포착한 건 단 한 장의 장면이었다.카메라 구석에 스치듯 찍힌 아주 잠깐 드러난 손목 한 조각.성유리는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었는데 축 늘어진 팔이 순간적으로 화면에 포착된 것이었다.고작 2초 남짓한 짧은 영상이었지만 박한빈은 그 한순간을 보고도 확신했다.“이건 성유리가 맞습니다.”그의 목소리는 냉정했지만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그럼 지금 유리는 어디에 있는 겁니까?”“현재 차량 소유자를 추적 중입니다.”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는 바로 경찰과의 통화를 끝냈다.그리고 마치 한순간 힘이 빠진 풍선처럼 옆 벽에 쓰러지듯 몸을 기대었다.그 순간, 류수미의 날 선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이제 확실해졌죠? 유리는 여기 없습니다! 그러니까 당장 사람들을 데리고 나가주세요!”그러나 박한빈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런 태도에 류수미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참다못한 그녀가 박한빈을 향해 다가와 뺨을
박한빈은 현재 도한시에 머물고 있었고 그 무렵 에릭은 막 보석으로 풀려난 참이었다.사실 이번 일은 그에게도 꽤 억울한 일이었다. 애초에 초대받은 손님일 뿐이었고 문제의 물건을 가져온 것도 그가 아니었다.정작 그걸 들고 온 사람은 죽었고 에릭과 함께 있던 사람들만 모조리 곤경에 빠졌다. 하지만 에릭은 신경 쓰지 않았다.어차피 자신의 결백만 입증하면 이곳 사람들은 그에게 어찌할 수 없었다.문제는 박한빈이었다.그의 기본적인 사업들은 여전히 국내에 있었고 만약 이번 사건과 관련된 소문이라도 퍼진다면 그에게 미칠 영향은 치명적일 터였다.그래서 직접 금성에서 이곳으로 넘어와 경찰 수사에 협조한 것이다.이곳 경찰이 그의 결백을 증명해 준다면 박한빈을 음해하려던 언론 보도는 모두 허위 사실 유포가 될 테니까.박한빈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다는 걸 알면서도 에릭은 진지하게 말했다.“이번 일은 정말 고마워.”박한빈은 그를 쓱 쳐다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그저 휴대폰을 들고 화면 속의 문자를 바라보고 있었다.에릭은 한국어를 말하기는 가능했지만 글자는 읽을 줄 몰랐다.그래서 박한빈의 휴대폰 화면에 떠 있는 메시지를 봐도 내용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상대방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했다.그제야 에릭은 상황을 눈치챘다.“네 아내야?”침묵하던 박한빈이 이번엔 고개를 끄덕였다.그 모습을 본 에릭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설마 화난 거 아니야? 솔직히 말해서 그냥 나랑 같이 해외로 가는 게 어때? 여기는 제약이 너무 많잖아. 이런 것만 없었어도 너도 굳이 이렇게까지... 야, 내 말 듣고 있긴 해?”박한빈은 에릭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핸드폰을 손에 쥔 채 몇 초 더 기다려 봤지만 성유리의 답장은 끝내 오지 않았다. 그러자 곧바로 휴대폰을 들고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에릭이 뒤에서 뭐라고 말했는지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걸어가면서 전화를 걸었지만 전원이 꺼져 있었다.걱정스러운 마음에 박한빈의 미간이 점점 더 잔뜻 찌푸
비록 그때의 연정우는 단순한 ‘공범’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당연하게도 친척이기에 어쩔 수 없이 그런 오해를 받아야 했다.하지만 정말로 선하고 올곧은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그들을 돕는 선택 자체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건이 터졌을 때도,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무마하고 수습하려 하지 않았을 거고.권력이라는 것은 중독성 강한 독과도 같아서 한 번 손을 대면 점점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된다. 그렇지만 피라미드 꼭대기에 설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그 자리에 오르는 유일한 방법은 결국... 제일 위에 있는 사람을 끌어내리는 것, 그리고 성유리의 존재로 인해 연정우가 바라보게 된 대상은 박한빈이었다.더군다나 박한빈 때문에 한때 잃어버린 것들이 있었으니 연정우가 그를 증오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심지어 성유리는 나중에 연정우가 자신에게 그렇게 집착한 것도 단순한 감정 때문만이 아니라 박한빈을 이기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사업적인 수법과 벌이로는 박한빈을 뛰어넘기 어려웠지만 만약 성유리와 함께한다면?어떤 의미에서는 그것도 일종의 승리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그래서였을까. 박한빈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연정우가 끝까지 자신과 함께 장례식에 가려 했던 이유는 그저 모든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뿐이었다.박한빈이 원했지만 가질 수 없었던 사람을 결국 자신이 가졌다는걸.성유리는 생각하고 있던 그대로 연정우에게 말했다.그 말투는 마치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내듯 지극히 차분한 목소리였다.감정이 배제된 그저 객관적인 관찰자 같은 어조로.“그러니까 네가 피해자라고 착각하지 마.”성유리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어쩌면 넌... 단 한 번도 날 진짜로 좋아한 적이 없을지도 몰라. 네가 좋아했던 건 박한빈을 이긴다는 그 감정이었을 뿐이야.”그 말이 끝나자 연정우가 잡고 있던 손이 천천히 풀렸다.“정말... 너무하네.”그가 힘없이 웃으며 계속 말했다.“어찌 됐든 우리는 함께했던 사이였어. 심지어 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