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 앞에 도착한 박한빈은 기사가 말해주어서야 성시원과 대화 중인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성시원은 한눈에 봐도 아주 귀찮아하며 남자를 지나쳐갔지만 지석민은 포기하지 않고 그 뒤를 따라갔다.성시원이 차에 탈 때는 아예 큰 소리로 소리까지 질러댔다.“성 회장님이 동의하지 않으시면 저는 어쩔 수 없이 박 대표님을 찾아가서 그날 서연이랑 있었던 일을 알려줄 수밖에 없어요.”성유리든 성씨 집안이든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겨 자리를 뜨려 했던 박한빈은 지석민의 마지막 한마디를 듣고 난 뒤 다시 차를 세웠다.“대표님?”서훈의 부름에도 박한빈은 대답하지 않고 그냥 고개만 살짝 옆으로 돌릴 뿐이었다.지석민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까 매정하게 차에 올라탔던 성시원은 지석민도 같이 차에 태웠다.“대표님, 저분이 말씀하시는 서연이가...”서훈이 움직이지 않는 박한빈을 보며 어렵게 한마디 내뱉었는데 박한빈은 그 말엔 대꾸조차 하지 않고 바로 차에 타버렸다.서훈은 기사와 눈이 마주쳤지만 그 역시 박한빈의 의중은 모르는 것 같아 포기하고 그냥 따라서 차에 올랐다.저녁에 술을 마신 탓에 박한빈은 차에 타자마자 눈을 감았고 조수석에 앉은 서훈은 박한빈이 깨기라도 할까 봐 고개도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그런데 차가 한창 달리는 와중에 박한빈이 나지막하게 말했다.“알아봐.”그 말에 놀란 서훈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뭘요?”그에 박한빈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며 말했다.“성유리 양부.”...한편 낯선 곳에 떨어진 성유리는 지독한 몸살에 걸렸다.전날 밤에 잠을 자지 못한 탓인지 호텔에 들어온 뒤로 성유리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성유리가 하루 동안 밖에 나오지 않은 것에 이상함을 느낀 직원과 청소를 위해 문을 두드렸던 아주머니가 아니었으면 성유리는 그 잠에 빠져들어 다시는 눈을 못 뜰 수도 있었다.“여기에 친구나 가족 있어요?”“없어요.”“그럼 직장동료분께라도 연락을 드릴까요?”“괜찮아요.”걱정스레 묻는 직원에 성유리는 해열제를 넘기며 말했다.“그냥
다시 금성에 돌아온 성유리는 성시원이 감시를 붙였는지 안 붙였는지는 몰랐지만 붙여도 상관없었기에 굳이 지석민과의 만남을 피하지는 않았다.기복루, 금성에서 꽤 유명만 식당이며 성유리와 지석민이 만나기로 한 장소였다.성유리가 도착하기도 전에 미리 와있던 지석민은 다리를 꼬고 서빙을 해주는 여직원을 희롱하고 있었다.세상 두려울 게 없는 눈과 더러운 말을 내뱉는 입 앞에서 여직원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벌벌 떨며 메뉴판만 꽉 쥐고 있었다.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온 거긴 하지만 막상 이런 광경을 두 눈에 담으니 성유리는 다시 한번 숨을 참았다.그때 성유리를 본 지석민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서연아!”주먹을 꽉 쥔 성유리는 결국 지석민에게로 다가갔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여직원은 구세주라도 만난 양 메뉴판을 내려놓고 도망가버렸다.그런 여직원의 다리를 끝까지 보고 있던 지석민은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성유리를 보며 이빨을 다 드러내고 웃었다.“오랜만이야 서연아! 넌 어쩜 점점 더 예뻐지니?”말을 하면서 지석민은 성유리의 손을 잡으려고 팔을 뻗었지만 성유리는 그 손을 빠르게 피하고는 차갑게 지석민을 노려봤다.“하하,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내가 그래도 네 아빤데.”“서연아, 내가 그래도 너를 10년이나 키웠는데 어쩜 그리 매정하니. 성씨 집안 아가씨 됐다고 이렇게 나 모른 척하기야?”성유리는 여전히 무표정으로 지석민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테이블 밑에 놓인 손은 하얗게 질리도록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저 역겨운 말에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갈 것 같았다.“너도 알잖아. 내가 뭐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또 감옥에서 몇 년 살다 보니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겠어.”“다른 자식도 없고... 내 노후는 네가 보장해줘야지.”지석민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그래서 돈 달라고 여기까지 온 거예요?”“그깟 돈 몇 푼이 뭐라고 그러니? 넌 지금 성씨 집안...”“성시원 찾
그러고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그래요. 가서 말해요.”말을 마친 성유리는 지석민이 넋이 나가 있는 사이에 밖으로 나갔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지석민이 테이블을 '탁' 치며 쫓아나가려고 할 때 한 남자 직원이 그를 붙잡으며 말했다.“손님, 계산을 아직 안 하셨어요.”“밥도 안 시켰는데 무슨 계산이야!”“밥은 안 시키셨지만 차를 드셨잖아요. 그건 계산하셔야죠.”직원은 말을 하면서도 지석민을 위아래로 훑었는데 그 눈빛에는 무시가 가득했다.그에 화가 난 지석민이 벌벌 떨며 1억이 들어있는 카드를 던져주려 했는데 그 순간 또 다른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제가 계산하죠.”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지석민이 고개를 돌렸고 마침 직원에게 제 카드를 건네준 성유정이 지석민을 보며 웃고 있었다.“지석민 아저씨 맞으시죠?”“당신은...”“저는 성유리 씨 동생 성유정이에요.”“아 성씨 집안에서 주워왔다는 그 잡종?”성유정을 보며 웃음을 흘린 지석민은 그녀를 훑어보며 물었다.“왜요, 나한테 할 말 있어요?”지석민의 시선이 아주 불쾌했지만 성유정은 그런 감정을 애써 억누른 채 웃으며 말했다.“아저씨가 아까 성유리랑 하던 얘기 저도 다 들었어요.”“그래서요?”“돈 필요하시죠?”성유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성유리가 아저씨를 고분고분하게 모실 수 있게 만들 방법이 하나 있는데, 들어보실래요?”...한편 식당에서 나온 성유리는 아주 빠른 걸음으로 그곳으로부터 멀어져갔다.마치 아주 무시무시한 것에 쫓기듯 한 발걸음이었다.지석민이 더는 저를 해칠 수 없다는 건 성유리도 알고 있었다.저도 이젠 반항할 힘이 있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멍청하게 당하고만 있진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성유리는 두려웠다.어릴 때 나무에 묶인 코끼리처럼 성유리는 아직까지도 어릴 때의 그 기억이라는 나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하도 조급하게 걸은 탓에 차가 지나가는 걸 못 본 성유리는 하마터면 차에 치일뻔하기까지 했다.“야, 너 미쳤어?!”차
조경우와 성유리는 그렇게 프라이빗한 식당에서 만나게 되었다.금성에 오랫동안 성유리도 처음 와본 곳이었다. 조경우가 안내하지 않았더라면 금성이 이런 곳이 있다는 것도 몰랐을 것 같았다.금성 시내와 교외의 경계선에 위치한 식당인데 하얀 벽돌에 짙은 녹색의 기와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이었다.식당 내부에는 연꽃이 잔뜩 피어있는 호수와 빽빽하게 들어선 대나무도 있어 성유리는 이곳이 관광지로 쓰이는 원림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식당의 사장은 여자였는데 미모는 그렇게 출중하지 않으나 특유의 분위가 아주 온화했다.조경우가 미리 예약을 해서인지 메뉴를 고르지도 않았기에 여자는 차만 올려주고는 밖으로 나갔다.“여기는 식재료를 다 당일 들어온 걸로 쓰거든요. 그래서 먹고 싶은 건 전날 미리 말해야 되요. 어젠 급해서 제가 혼자 정했는데 괜찮으세요?”성유리를 향해 다정하게 웃는 조경우의 얼굴에서는 털끝만큼의 분노도 느껴지지 않았다.그에 성유리는 빠르게 대답했다.“괜찮아요.”“이건 이곳에서만 마실 수 있는 특색 차에요. 사장님의 할아버지께서 직접 채집한 찻잎이라 다른 곳에 팔지도 않거든요.”조경우는 친절히 설명하며 차를 따라주었지만 할 말이 있던 성유리는 차 맛을 음미할 겨를이 없어 대충 입만 갖다 댈 뿐이었다.조경우는 곧바로 다른 얘기들을 꺼냈다.영화, 음악, 그리고 음식들까지 꺼내는 얘기마다 조급해하지 않고 나긋나긋하게 묻는 조경우에 성유리는 하나하나 다 흥미를 가지고 대답할 수 있었다.사실 조경우랑 만나는 게 성유리는 꽤나 즐거웠다.그래서 성유리는 조경우가 아직까지도 결혼을 하지 않은 게 의아했다.다리가 불편하긴 하지만 신분이 남달랐기에 결혼을 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그때 조경우가 갑자기 건넨 말에 성유리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우리 전에 봤었어요.”“2년 전인가 금성대학에 다닐 때 유리 씨가 뮤지컬을 하나 했었죠? 그때 저도 무대 아래에 있었거든요.”“로미오와 줄리엣이요?”“네.”성유리의 질문에 조경우
“박 대표님도 오실 줄 알았으면 미리 같이 식사하자고 요청이라도 할 걸 그랬네요.”자연스럽게 말을 하며 웃는 조경우는 박한빈 앞에서도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악수를 마친 박한빈은 자연스레 조경우 앞에 앉아있는 사람에게로 시선을 옮겼다.하지만 성유리는 고개만 숙인 채 인사를 할 생각이 없어 보였기에 박한빈도 시선을 거두고 조경우를 보며 말했다.“데이트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이만 가볼게요. 두 분 방해하지 않겠습니다.”“네, 그럼 다음에 봬요.”짤막한 인사를 나눈 뒤 박한빈은 계속 앞으로 걸어갔고 조경우는 다시 성유리 앞에 앉았다.“오늘 박한빈도 여기 오는지는 저도 몰랐어요.”“괜찮아요.”혹시 성유리가 불편했을까 봐 해명하는 조경우를 향해 성유리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그러자 조경우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둘 사이에서 먼저 얘기를 시작하는 쪽은 항상 조경우였기에 그가 입을 다물고 있으니 분위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그에 성유리가 입술을 달싹이며 조경우에게 제 뜻을 전하려고 할 때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게 누구야, 서연아!”그 목소리에 몸을 부르르 떤 성유리가 고개를 들어보니 지석민이 이미 성유리가 앉아있는 테이블 옆에까지 와서 웃고 있었다.“밥 먹고 있었어?”“누구시죠?”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조경우가 지석민을 보며 묻자 지석민은 대뜸 조경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안녕하세요! 조씨 집안 아드님이시죠? 정말 잘 생기셨네요!”“저는 유리 아빠에요, 시골에 있을 때 유리 키워준 양아빠요.”유난히 큰 지석민의 목소리에 식당에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자 난감해진 조경우가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유리 씨, 진짜 유리 씨 양 아버님이세요?”“그렇다니까요! 몇 년 동안 외국에 있느라 유리 어떻게 사는지 와보지도 못했는데 둘이 결혼한다는 소리를 듣고 이렇게 찾아왔어요! 뭐 비록 이미 한번은 실패했지만 그래도 이번 결혼생활은 잘 보내야죠! 그래서 제가...”“지석민 씨.”그때 성유리가 차가운 목소리로 지석민의 이름을 불렀
하지만 지석민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눈만 가늘게 뜬 채로 성유리를 주시하고 있었다.그에 성유리는 실소를 터뜨리며 물었다.“왜 말을 못 해요?”“유리 씨.”점점 살얼음판 같아지는 분위기에 조경우가 일어나며 성유리의 손을 잡았지만 성유리는 그만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당신이 안 가면 내가 갈게요.”성유리가 뒤돌아 나가려 하자 조경우도 다급히 따라나서려는데 지석민이 또 느긋하게 말을 걸어왔다.“아가씨 노릇 몇 년 했다고 아주 기세가 장난 아니네.”“그런데 유리야, 사람이 초심을 잃으면 안 되지. 그때 나 아니었으면 넌 진작에 굶어 죽었어. 지금 여기서 나한테 이래라저래라할 수도 없었다고!”“근데 네가 지금 나를 내쫓아? 똑똑히 들어. 내가 우리의 부녀간의 정을 생각해서 일부러 말을 아끼는 것뿐이야. 그런데 네가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도 어쩔 수 없어. 시골에서 있었던 일들 다 까발릴 거야!”지석민의 말이 끝나자 등을 돌리던 성유리의 행동도 멈췄다.성유리가 고개를 돌려 바라본 지석민은 당당하게 웃고 있었다.지석민이 이토록 자신만만할 수 있었던 건 지석민이 쥐고 있는 그 카드가, 그날 일이 성유리는 감히 언급도 하지 못할 일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지석민은 제가 그 일을 들먹이면 성유리가 고개를 숙이고 제 말에 따를 거라 생각했다.그랬는데 지금의 성유리는 지석민을 향해 웃고 있었다.그 웃음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은 지석민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성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무슨 일이요? 당신한테 강간당할 뻔한 일이요?”평온하게 말하는 성유리는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손을 꽉 말아쥐었다.온 힘을 다해 말아쥔 탓에 손바닥에 닿은 손톱은 부러졌고 그 통증은 손끝에서부터 심장에까지 전해졌다.그 순간 성유리의 가슴도 갈기갈기 찢겨나가고 있었다.몇 년간 애써 보듬은 덕분에 새로 돋아난 살들이 다 찢겨버리고 그 옛날의 곪아 터진 상처들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성유리의 말에 조경우도 바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눈을
이 세상의 사람들은 모두 똑같았다.사실을 말해도 그 누구도 성유리를 피해자라 생각하지는 않았다.하지만 이미 제 친어머니에게도 똑같은 눈빛을 받아본 성유리는 아무렇지도 않았다.성유리는 조경우를 한번 보고 나서 뒤돌아 밖으로 향했다.“지서연! 성유리! 너 거기 안 서?! 이런 미친년!”등 뒤에서 들려오는 폭언에도 성유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다.원래는 아무 택시나 잡아서 집으로 가려고 했지만 식당은 도로와 꽤 거리가 있었다.그제야 성유리는 이곳에 오는 사람은 다 돈 좀 있는 집 사람이라 택시를 탈 일이 없다는 걸 생각해냈다.그렇게 텅 빈 거리에 홀로 서 있던 성유리는 핸드폰으로 택시를 부르려고 했지만 손이 제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몸과 함께 손도 떨려와 핸드폰 잠금을 해제하는 것도 몇 분이나 걸렸다.그렇게 겨우 잠금을 풀고 핸드폰을 뒤져봤지만 이번에는 택시를 잡는 어플이 보이지 않았다.그렇게 하얘진 머리 때문에 성유리가 손을 떨고 있을 때 차의 방향지시등이 성유리를 비춰왔다.갑자기 비춰진 강한 불빛에 놀란 성유리는 저도 모르게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있었는데 그때 뒷좌석에 앉은 사람이 창문을 내리더니 말했다.“타.”목소리에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지만 성유리는 아까 식당에서 일어난 소동 때문에 박한빈도 제 이야기를 다 들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래서 고개를 들어 박한빈의 눈에도 드러났을 혐오와 놀라움을 찾아보았지만 그의 눈에는 어떠한 감정도 비쳐있지 않았다.이미 다 놀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정말 아무 감정도 들지 않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던 성유리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그때 박한빈의 시선이 창백해진 성유리의 얼굴에 닿았다.그리고 천천히 핸드폰을 꽉 잡고 있는 성유리의 손에도 닿았다.얼마나 힘을 주고 있었으면 새파란 핏줄이 도드라져있었다.그에 보다 못한 박한빈이 차에서 내려서 성유리의 손목을 잡았다.박한빈이 성유리를 차에 태울 때 까지도 성유리는 아무런 반
박한빈이 성유리 말에 대답을 하지 않자 기사도 당연히 성유리 말을 들을 수 없었기에 차를 세우지 못했다.박한빈은 저를 신경 쓰지 않을지 몰라도, 아니 어쩌면 박한빈 눈에 성유리는 항상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을지 몰라도 성유리는 박한빈에게만큼은 이렇게 망가진 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저도 모르게 또 주먹을 꽉 쥐었다.박한빈이 다른 사람들처럼 저를 조롱하고 멸시한다 해도 아무렇지 않았다.그저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라도 지킬 수 있다면 그걸로 성유리는 만족할 수 있었다.그리고 지금은 이 차에서 조용히 내리는 게 성유리의 자존심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다.하지만 박한빈은 성유리의 그 자그마한 요구도 그냥 들어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기사 역시 차를 세우지 않고 있었기에 성유리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할 때 예상했던 사람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성유리, 당장 집으로 와!”성시원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핸드폰을 뚫고 나와 조용한 차 안에 울려 퍼졌지만 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고는 박한빈을 바라보았다.“성씨 집안 저택으로 가.”성유리가 입을 열기도 전에 박한빈이 기사를 향해 말했다.그에 마음이 가라앉은 성유리는 이내 옅은 웃음을 흘렸다.박한빈은 성유리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지켜주지 않았다.하지만 생각해보면 박한빈의 행동도 이해는 갔다.박씨 집안과 결혼할 때 성씨 집안에서 그 얘기를 했을 리가 없는데 그런 사실이 오늘 까발려 졌으니 이미 이혼을 했다 해도 앞으로 둘의 이름이 같이 떠돌게 될 것이다.그건 박한빈이 가장 질색하는 일이었으니 당장이라도 성씨 집안에 찾아가 따지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언니!”성유리가 차에서 내리자 성유정이 한달음에 달려왔다.그런데 성유정은 그 뒤에 따라오는 박한빈을 보더니 다급히 하려던 말을 바꾸었다.“한빈 오빠, 여긴 어떻게 왔어? 설마... 오빠가 언니 데려다준 거야?”말을 하며 성유리에게로 돌린 성유정의 시선이 어딘가 날카로웠지만 성유리는 그런 성유정을 상대해주지 않고 그녀를 지나쳐
잠시 망설이던 하늘이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고 그제야 연정우는 성유리의 손에서 드라이기를 받아 들었다.연정우는 이런 일을 처음 해보기에 다소 서툴렀지만 하늘이는 전혀 불평하지 않았고 머리를 말리는 내내 조용히 있었다.성유리는 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다 문득 이 장면이 너무나 따뜻하다고 느꼈다.그녀는 알고 있었다. 연정우가 바로 자신에게는 최고의 선택이라는 것을.그래서 연정우를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를 설득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조용히 그들을 바라보던 성유리는 휴대폰을 들어 사진 한 장을 찍었다.조명이 비추는 아래에서 연정우는 다정하게 하늘이의 머리를 말려주고 있었고 하늘이는 인형을 품에 꼭 끌어안고 있었다.사진 속 두 사람은 누가 봐도 다정한 부녀처럼 보였다.성유리는 더 이상 지켜보지 않고 주방으로 돌아가 내일 아침을 준비하기 시작했다.반죽은 이미 미리 만들어 두었기에 이제 고기소를 넣고 찜기에서 찌기만 하면 되었다.성유리가 이렇게 직접 음식을 준비하는 이유는 하늘이가 달걀노른자에 약간의 알레르기가 있기 때문이었다.외부에서 파는 만두에는 대부분 달걀물이 들어가 있어서 하늘이를 위해 성유리는 직접 만들 수밖에 없었다.원래 성유리는 조금만 기다리면 자신을 부를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아이는 평소에 잠자리에 들 때 늘 엄마를 찾곤 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주방에서 한참 동안 기다려도 자신을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모든 준비를 마친 성유리가 하늘이 방으로 향하려 하는 순간, 연정우가 아이의 방에서 나왔다.“하늘이 잠들었어.”연정우가 나지막한 소리로 말하자 성유리는 순간 멈칫하더니 그에게 물었다.“뭐라고?”“방금 잠들었다고.”연정우는 웃으며 말했다.“책을 조금 읽어줬더니 졸린다고 하더니 바로 잠들었어.”성유리는 연정우의 말이 믿기지 않아 방을 열어 직접 확인해 보았고 그의 말대로 하늘이는 정말 침대에 누워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아까 너무 많이 놀아
연정우는 할 말을 마친 뒤 조용히 성유리를 바라보았다.반면 성유리는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긴장한 듯 주먹을 더 꽉 쥐었다.연정우는 그녀의 손을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성유리의 손을 꼭 잡았다. 성유리는 놀란 듯 연정우를 힐끗 쳐다보았지만 그의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그 순간, 연정우는 그것만으로도 성유리에게 다가갈 더 큰 용기를 얻은 듯했다.더 이상 망설이지 않기로 한 연정우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그녀에게 조금씩 가까이 대기 시작할 무렵.“엄마!”집안을 울리는 하늘이의 목소리가 거실에서 들려왔고 그 소리는 마치 번개가 되어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은 것 같았다,성유리는 깜짝 놀라 연정우를 급히 밀쳐버렸고 너무 갑작스러운 힘에 연정우는 반응할 틈도 없이 옆에 있던 찬장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다.쾅!맑은소리가 주방에 울려 퍼졌고 성유리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바로 다가가 그의 상태를 살폈다.“괜찮아? 미안해. 정말 괜찮아?”“응.”연정우는 걱정하는 성유리에게 손사래를 치며 웃어 보였다.“걱정하지 마. 별로 안 아팠어.”그의 말에도 성유리는 안심이 되지 않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서 있었다.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하늘이가 궁금한 듯 물었다.“엄마, 둘이 지금 뭐 하고 있었어?”성유리는 그제야 하늘이의 존재를 떠올리고 아이를 향해 돌아서며 대답했다.“아무것도 아니야. 하늘이는 무슨 일 있었어?”“아저씨가 준 인형 어떻게 말하는 건지 물어보고 싶었어.”하늘이는 말하면서 손을 뻗어 연정우의 손을 잡아끌었고 연정우는 할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아이의 손에 이끌려 거실로 향했다.혼자 주방에 남은 성유리는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천천히 밖으로 나섰다.식사 시간이 되었을 때, 연정우의 여행 가방은 여전히 현관에 놓여 있었다.그때 하늘이가 갑자기 물었다.“아저씨, 오늘 밤 여기서 주무실 거예요?”연정우는 아이의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의 결정에 모든 것을 맡기겠다
갑작스러운 성유리의 행동에 연정우는 제자리에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고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린 듯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물었다.“왜? 나 많이 보고 싶었어?”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장난스러웠지만 어딘가 우울한 듯한 느낌이 숨겨지지 않았다.성유리는 입술을 꼭 다물고 잠시 연정우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연정우는 조용히 성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망설이던 성유리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더니 먼저 연정우에게 물었다.“너... 요즘 많이 힘들어?”“그냥 좀 바빴어.”“무슨 일이 있었던 거 아니고?”성유리는 지금 연정우에게 질문을 하는 것 같았지만 어딘가 확신에 찬 뉘앙스가 그득히 섞여 있었다.연정우는 성유리의 물음에 표정이 잠시 굳어지는 듯했으나 금세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걱정 마. 별일 아니야. 다 해결됐어.”그는 성유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고는 하늘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넌? 요즘 잘 지냈어?”하늘이는 연정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잘 지냈어요.”“그럼 됐어. 내가 하늘이 줄 선물 사 왔는데 뭔지 보고 싶어?”선물이라는 말에 하늘이는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처음 연정우가 선물을 줄 때는 다소 어색해하던 하늘이도 이후 연정우가 선물을 고르는 순간이 더 즐겁다고 말한 뒤로는 더 이상 거부하지 않았다.이번에도 하늘이는 연정우의 선물을 거절하지 않았고 그제야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고 성유리는 얼른 돌아서서 문을 열었다.연정우는 여행 가방을 현관에 두 따로 준비한 가방을 열어 하늘이에게 준비한 선물을 보여주었다. 그 안에는 약 30cm 크기의 인형이 들어 있었다.성유리는 한눈에 그 인형이 유명 영화의 협업 한정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불티나게 팔린 인형은 이곳 경운시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제품이었다.잠시 망설이던 성유리가 연정우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하늘이는 이런 거 잘 몰라. 굳이 비싼 거 살 필요 없어. 그냥 간단한 걸로도 괜찮아.”“이
그날 밤 연정우는 끝내 식사 장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심지어 다음 날 성유리와 하늘이를 공항에 데려다주겠다는 약속조차 지키지 않았다.이를 본 사하나는 화가 난 듯 연정우를 나무라며 몇 마디 욕설까지 퍼부었다.“괜찮아. 아마... 무슨 중요한 일이 있겠지.”“아무리 중요한 일이 있어도 언니랑 하늘이를 이렇게 내버려두면 안 되는 거죠!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니에요? 나중에 꼭 연정우 씨한테 한마디 해야겠어요.”사하나는 말하면 할수록 화가 나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말할까 말까 잠시 망설이던 성유리가 화가 나 있는 사하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회사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무슨 문제요?”사하나가 되물었다.“글쎄 지금 내가 너한테 물어보는 거잖아.”사하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무슨 일이 생겼다는 건 듣지도 못했는데요? 언니 혹시 무슨 얘기 들으신 거 있으세요?”“아니. 그냥... 걱정돼서.”“뭐가 걱정되는데요?”긴장 탓에 경직돼 있던 사하나는 성유리의 대답을 듣고 금세 긴장을 풀었다.“연정우 대표님 회사는 이제 안정기에 접어들었잖아요. 대기업이랑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은 꽤 단단해진 상태예요. 그러니까 별일은 없을 거고요.”“저도 아무 얘기 못 들었으니까 괜히 걱정하지 마세요.”사하나의 말을 듣고 나서야 성유리는 겨우 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사하나는 원래 화를 빨리 내고 빨리 풀리는 다혈질이었다.성유리와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눈 뒤, 연정우를 욕하겠다던 일은 까맣게 잊은 채 하늘이와 애니메이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그렇게 차 안은 다시 평화로운 분위기로 돌아왔다.요즘 사하나는 집안 회사 일을 물려받느라 바빴기 때문에 성유리와 하늘이를 공항 터미널 앞까지만 데려다주고 떠나버렸다.성유리는 하늘이와 함께 짐을 부치고 안전 점검까지 마친 후, 빈자리를 찾아 앉아서는 연정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하나 씨가 우리를 공항까지 데려다줬어. 지금 대기 중이야.]하지만 연정우는 평소와 다르게 바로 답장
사실 오늘 성유리는 연정우와 함께 김난희의 빈소를 찾을 예정이 아니었다.박한빈에 대해 아무 감정이 없다고 해도 성유리는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한다고 생각했다.그의 전처의 신분으로 장례식을 찾는 것만으로 이미 민망한 상황인데 연정우까지 함께 간다면 박씨 가문에게 수치를 안겨줄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연정우는 누구한테서 성유리의 일정을 전해 들은 건지 몰래 따라왔고 그녀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연정우와 딱 마주쳐버렸다.연정우는 자신 또한 김난희를 추모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말했으니 성유리는 그를 쫓아낼 수가 없었다.게다가 연정우도 아예 성유리를 만날 것을 예상치도 못한 사람처럼 행동했으니 그녀는 받아들여야만 했다.차 안에서 연정우는 이 일에 대해 다시 한번 얘기를 꺼냈고 성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손만 내려다보고 있었다.운전대를 잡고 있던 연정우는 성유리를 힐끔 쳐다보고는 말했다.“사실 나도 꼭 무슨 일을 벌이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니었어. 그냥... 너 혼자 오면 위험할까 봐. 그리고 혹시 어색할까 봐 걱정돼서 같이 오려고 한 거였어.”연정우의 핑계는 누가 들어도 거짓이었다. 하지만 성유리는 굳이 그를 들춰내지 않았고 고개만 끄덕였다.“그래서 아까 박한빈 씨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한 건데?”그러자 연정우가 다시 물었다.“별거 아니야. 그냥 흔한 말들이었어.”성유리는 아주 평온하게 대답했고 연정우는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하려던 말들을 꾹 삼키기로 했다.‘이런 상태로 말하면 안 돼.’박한빈은 이미 성유리에게 있어 과거로 남은 사람이었으니 연정우는 그녀 앞에서 박한빈이라는 사람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려 했다.혹시나 박한빈을 잊고 살던 성유리가 자기 때문에 그의 존재를 다시 떠올릴까 봐 말이다.하지만 연정우는 쉽게 자신을 통제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토록 많은 일을 겪은 성유리가 박한빈에 대해 아무 감정이 없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성유리는 전에 마음속 깊은 곳에는 깊은 상처가 남아있다는
사실 박한빈도 안다. 이제 와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이미 성유리의 입에서 직접 답을 들은 상황이니 더더욱 물을 필요가 없었지만 박한빈은 그래도 묻고 싶었다.박한빈은 지금 마치 고집을 부리는 어린아이처럼 어른의 다리를 부여잡고 몇 번이나 답을 알려달라고 조르는 것 같았다.한번, 또 한 번 자신이 사랑을 받았었다는 사실을 증명받고 싶었고 누군가가 알아주길 바랐다.박한빈의 말에 박세빈은 멈칫하더니 비웃듯 웃으며 물었다.“그래서 이게 바로 형님이 저한테 연락한 이유인가요?”박한빈은 침묵했지만 박세빈은 그 침묵 속에서 정답을 알아차렸다. 정신이 나간 듯 깔깔 웃던 박세빈은 한참이 지나서야 진정했고 이내 말을 이어갔다.“형님은 뭐인 것 같습니까? 설마 그때 성유리 씨가 형님이랑 이혼한 게 제가 협박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시나요?”“박한빈 씨, 제대로 된 답을 알려드리죠. 사실 그때 저희는 아주 간단한 대화만 나눴습니다.”박세빈은 낮은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하늘이 맞죠? 제가 아이 이름을 한 번 말하니까 바로 제 의도를 알아차리더군요. 그러더니 당장 떠나겠다고 결정을 내렸습니다.”“솔직히 말하면 다른 일도 이용해 협박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빨리 동의할 줄은 몰랐습니다.”“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건 형님은 성유리 씨에게 그다지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박한빈 씨, 형님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해도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지금 형님 주위에 있는 사람들 다 형님의 돈과 권력을 보고 접근한 것 아닌가요? 그 누구도 진심으로...”박세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은 전화를 끊어버렸다.답. 그토록 듣고 싶었던 정답은 박한빈이 알고 있던 사실과 다를 점이 없었다.우스운 건 박한빈이 스스로 성유리의 선택에 대한 이유도 다 지어내고 확신했지만 그녀가 말한 것과 똑같다는 점이었다.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을 속이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녀는 그를 속일 마음도 없었던 것 같다.
“더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성유리는 고개를 들어 시계를 한번 쓱 쳐다보고는 박한빈에게 물었다.아무 대답 없는 박한빈을 가만히 보고만 있던 성유리는 그의 침묵이 곧 수긍이라고 생각해 뒤돌아 떠나버렸다.박한빈은 전혀 주저하거나 망설이지도 않고 떠나는 성유리의 뒷모습을 보던 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그때, 박세빈 쪽에 있던 사람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박 대표님, 깨어났습니다.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박한빈은 그 말에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대답했다.“네.”몇 초 뒤, 박한빈은 수화기 너머에서 박세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어머나, 이게 누구십니까? 한빈 형님 아니신가요?”박세빈은 웃음기 가득한 말투로 말하고 있었지만 평소보다 훨씬 나약했고 힘없어 보였다.“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 형님이 아직 저 같은 동생을 기억하고 계실 줄 몰랐습니다.”박한빈은 자신을 조롱하려는 의도가 가득한 박세빈의 말을 들은 체도 안 하며 말했다.“할머니 돌아가셨다.”그의 말이 끝나자 수화기 너머에는 약간의 정적이 흐르더니 박세빈이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대답했다.“그래요? 어쩐지 전에 쓰러졌을 때 꿈에서 할머니가 나타난다 했는데...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찾아오셨나 보군요.”박한빈은 옛날 박세빈이 박씨 저택에 들어왔을 때, 김난희에게 아부하던 모습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비록 당시에도 박한빈은 박세빈이 별로 좋은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지만 김난희의 부고 소식에도 흔들리지 않을 줄은 몰랐다.그러나 박한빈은 굳이 이런 문제로 박세빈에게 따지고 싶지 않아 낮은 소리로 말했다.“할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너를 많이 보고 싶어 하셨다. 아쉽게도 볼 기회가 없었지만. 3일 뒤에 장례식이 끝날 예정인데 오고 싶으면 와도 돼.”박한빈의 말에 박세빈은 자기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입을 꾹 닫아버렸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박세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형, 지금 제 상황이 어떤지는 알고 계십니까?”“최근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박세빈이 전에 너한테 찾아간 적 있지? 걔가 무슨 말을 했었어?”인적이 드문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마자 박한빈이 단도직입적으로 성유리에게 물었다.조급해 보이는 그의 목소리와 자신을 응시하는 눈빛에 성유리는 잠시 굳었다 미간을 찌푸리고는 되묻기 시작했다.“무슨 뜻이에요?”“내가 지금 묻잖아. 그때 내가 구치소에 있을 때 말이야. 박세빈이 너 찾아간 적 있지? 찾아와서 뭐라고 했는데? 협박이라도 한 거야?”“걔가 너한테 한 말 때문에 나랑 이혼하려고 했어? 혹시 나한테 영향을 끼칠까 봐? 맞아?”박한빈은 지금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고 침착하게 말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성유리만 뚫어져라 보는 박한빈은 며칠 밤 내내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 이런 결론을 내렸다. 마치 이 결론이어야만 당시 성유리의 선택이 이해가 된다는 듯이.박한빈은 어쩌면 박세빈이 정말 성유리를 협박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고 정말 성유리가 재물을 중요시하게 여기는 여자였다면 떠날 때 박한빈이 준 모든 물건을 두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늘 모순적이던 성유리의 행동이 그제야 퍼즐 조각처럼 맞아가는 것 같았기에 박한빈은 꽉 막혀있는 속이 풀리는 기분마저 들었다.마음 같아서 박한빈은 당장이라도 성유리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왜 자신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고 알려주지 않은 건지, 왜 홀로 그런 감정을 떠안고 살았는지.분명히 남편이던 자신에게 알릴 수 있었지만 왜 숨겼는지도 궁금했다. 하지만 답을 안 들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성유리가 정말 박세빈의 협박 때문에 자신을 떠난 것이 맞다면 말이다.“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네요.”침묵하던 성유리가 입을 열었다.짧디짧은 한마디에 박한빈의 머릿속을 채우던 생각들이 일제히 사라져 버렸고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성유리를 쳐다보았다.“박세빈 씨가 저한테 찾아왔던 건 맞아요.”성유리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근데 저를 협박하거나 위협적인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어요.”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박한빈을
성유리와 박한빈에 관한 소문들이 업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연정우는 갑자기 떠오르는 샛별처럼 업계에 등장한 사람이고 성유리는 엄연한 박한빈의 전 아내였다.이런 두 사람이 연인으로 발전했다는 소식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도 없이 퍼졌고 자연스레 그들이 어디를 가도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연정우와 성유리 둘 다 겸손하고 관심받기를 즐기지 않는 사람인지라 업계 사람들은 두 사람이 같이 있는 모습을 잘 보지 못했다.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은 들리는 소문이 다 거짓이라고 생각하며 웃어넘기기 일쑤였다.하지만 지금 판은 완전히 뒤집어져 버렸다. 오늘은 박한빈의 할머니, 즉 김난희를 추모하기 위한 날이었는데 연정우와 성유리가 함께 나타난 것이다.그저 그런 형식들이 오가며 차가운 분위기 속에 진행되던 추모회는 두 사람의 등장으로 갑자기 후끈 달아오른 것 같았다.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은 일제히 박한빈에게 시선을 돌렸고 다들 그의 사소한 표정 변화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사람들은 마음 같아선 앞으로 달려가 박한빈의 시선을 가로막고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린 것 같아 그저 가만히 서 있기를 선택했다.그러나 성유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도 않는지 고개를 푹 숙인 채 향을 피우고 애도하고는 연정우와 함께 박한빈의 앞으로 다가갔다.“많이 비통하시겠습니다. 진심으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성유리의 행동들은 마치 기계로 찍어낸 것 같았다. 얼굴에는 어떠한 표정도 드러나지 않았고 목소리에도 전혀 파동이 없었다.박한빈은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성유리의 말을 다 들어줬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성유리는 개의치 않았고 연정우와 함께 떠나려고 뒤를 돌았다. 그 순간, 박한빈이 굳게 닫았던 입을 천천히 열었다.“할 말이 있어.”박한빈은 잘 안다.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던 사람들이 다 귀를 기울일 것이고 무슨 행동을 하던 다 지켜볼 것이라는 사실을.그리고 한 말과 행동들은 또다시 “도마” 위에 올라 사람들의 “심판”을 받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