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사람들은 모두 똑같았다.사실을 말해도 그 누구도 성유리를 피해자라 생각하지는 않았다.하지만 이미 제 친어머니에게도 똑같은 눈빛을 받아본 성유리는 아무렇지도 않았다.성유리는 조경우를 한번 보고 나서 뒤돌아 밖으로 향했다.“지서연! 성유리! 너 거기 안 서?! 이런 미친년!”등 뒤에서 들려오는 폭언에도 성유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다.원래는 아무 택시나 잡아서 집으로 가려고 했지만 식당은 도로와 꽤 거리가 있었다.그제야 성유리는 이곳에 오는 사람은 다 돈 좀 있는 집 사람이라 택시를 탈 일이 없다는 걸 생각해냈다.그렇게 텅 빈 거리에 홀로 서 있던 성유리는 핸드폰으로 택시를 부르려고 했지만 손이 제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몸과 함께 손도 떨려와 핸드폰 잠금을 해제하는 것도 몇 분이나 걸렸다.그렇게 겨우 잠금을 풀고 핸드폰을 뒤져봤지만 이번에는 택시를 잡는 어플이 보이지 않았다.그렇게 하얘진 머리 때문에 성유리가 손을 떨고 있을 때 차의 방향지시등이 성유리를 비춰왔다.갑자기 비춰진 강한 불빛에 놀란 성유리는 저도 모르게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있었는데 그때 뒷좌석에 앉은 사람이 창문을 내리더니 말했다.“타.”목소리에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지만 성유리는 아까 식당에서 일어난 소동 때문에 박한빈도 제 이야기를 다 들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래서 고개를 들어 박한빈의 눈에도 드러났을 혐오와 놀라움을 찾아보았지만 그의 눈에는 어떠한 감정도 비쳐있지 않았다.이미 다 놀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정말 아무 감정도 들지 않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던 성유리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그때 박한빈의 시선이 창백해진 성유리의 얼굴에 닿았다.그리고 천천히 핸드폰을 꽉 잡고 있는 성유리의 손에도 닿았다.얼마나 힘을 주고 있었으면 새파란 핏줄이 도드라져있었다.그에 보다 못한 박한빈이 차에서 내려서 성유리의 손목을 잡았다.박한빈이 성유리를 차에 태울 때 까지도 성유리는 아무런 반
박한빈이 성유리 말에 대답을 하지 않자 기사도 당연히 성유리 말을 들을 수 없었기에 차를 세우지 못했다.박한빈은 저를 신경 쓰지 않을지 몰라도, 아니 어쩌면 박한빈 눈에 성유리는 항상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을지 몰라도 성유리는 박한빈에게만큼은 이렇게 망가진 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저도 모르게 또 주먹을 꽉 쥐었다.박한빈이 다른 사람들처럼 저를 조롱하고 멸시한다 해도 아무렇지 않았다.그저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라도 지킬 수 있다면 그걸로 성유리는 만족할 수 있었다.그리고 지금은 이 차에서 조용히 내리는 게 성유리의 자존심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다.하지만 박한빈은 성유리의 그 자그마한 요구도 그냥 들어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기사 역시 차를 세우지 않고 있었기에 성유리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할 때 예상했던 사람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성유리, 당장 집으로 와!”성시원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핸드폰을 뚫고 나와 조용한 차 안에 울려 퍼졌지만 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고는 박한빈을 바라보았다.“성씨 집안 저택으로 가.”성유리가 입을 열기도 전에 박한빈이 기사를 향해 말했다.그에 마음이 가라앉은 성유리는 이내 옅은 웃음을 흘렸다.박한빈은 성유리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지켜주지 않았다.하지만 생각해보면 박한빈의 행동도 이해는 갔다.박씨 집안과 결혼할 때 성씨 집안에서 그 얘기를 했을 리가 없는데 그런 사실이 오늘 까발려 졌으니 이미 이혼을 했다 해도 앞으로 둘의 이름이 같이 떠돌게 될 것이다.그건 박한빈이 가장 질색하는 일이었으니 당장이라도 성씨 집안에 찾아가 따지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언니!”성유리가 차에서 내리자 성유정이 한달음에 달려왔다.그런데 성유정은 그 뒤에 따라오는 박한빈을 보더니 다급히 하려던 말을 바꾸었다.“한빈 오빠, 여긴 어떻게 왔어? 설마... 오빠가 언니 데려다준 거야?”말을 하며 성유리에게로 돌린 성유정의 시선이 어딘가 날카로웠지만 성유리는 그런 성유정을 상대해주지 않고 그녀를 지나쳐
성유리는 피했다.꽃병은 바닥에 떨어지면서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났고 튄 파편이 그녀의 종아리를 스치자 곧바로 피가 흘러나왔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성시원이 그녀에게 삿대질했다.“너 일부러 그런 거지? 네 이미지를 망쳐서 금성 전체에 네가 쓰레기라는 걸 알리려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일부러 그렇게 한 거지? 내가 어떻게 너같이 수치심도 모르는 딸을 낳았을까? 이럴 줄 알았더라면 네가 태어났을 때 산 채로 목을 졸라 죽여야 했어! 괜히 우리 집안 망신시키지 못하게 널 데리고 오지 말아야 했어!”주위의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고 성시원의 목소리는 커다란 거실에 큰 소리로 계속 울려 퍼졌다.마치 성유리의 몸을 한 대씩 내리치는 칼날 같았지만 성유리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그녀는 성시원의 눈을 피하지도 않고 그저 그 자리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어딜 감히 눈 똑바로 뜨고 쳐다봐? 좋아! 내가 오늘 널 때려죽이지 않으면 성시원이 아니다!”그 말과 함께 성시원이 벨트를 풀어 성유리에게 휘두르려고 할 때 문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회장님.”그 목소리를 듣자 성시원의 움직임이 멈췄고 곧바로 성유정도 놀라며 소리쳤다.“언니!”그러고는 곧장 달려와 성유리를 껴안았다.“언니, 괜찮아? 아빠, 어떻게 이럴 수가...”성유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가슴 아픈 표정으로 금세 눈물을 뚝뚝 흘렸지만 성유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들어온 사람을 바라보며 입술만 다물고 있었다.박한빈은 그녀를 그저 힐끗 쳐다보고는 성시원에게 눈길을 돌렸다.“얘기 좀 하시죠.”성시원은 박한빈이 찾아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렇다면 지금쯤 이미 소문이 사방으로 퍼졌고 날이 밝기도 전에 성유리의 못난 일들이 까밝혀진다는 건가?성시원의 얼굴은 점점 더 추해졌지만 차마 박한빈의 앞에서 대놓고 면박을 줄 수 없어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돌아섰다.“이쪽으로 오지.”박한빈은 바로 그 뒤를 따랐다.줄곧 옆에 있던 윤청하는 조금 전 성시원이 너무 세게 때린 탓인지 이 순간
“언니, 어떻게 엄마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윤청하의 말을 기다릴 새도 없이 성유정이 먼저 다가와서 성유리를 붉어진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언니를 진심으로 아끼는데 왜 그렇게 생각해!”하지만 성유리는 더 이상 그들과 얽히고 싶지 않았다.이젠 보기만 해도 역겨운 사람들이라 성유정의 말에도 대꾸하지 않고 바로 돌아서서 나가려던 참이었다.“언니!”성유정이 쫓아오려는 듯했지만 윤청하가 말리면서 성유리의 등에 대고 이렇게 소리쳤다.“좋아, 성유리! 이 문밖으로 나가는 순간부터 네가 밖에서 굶어 죽든 말든 여기 돌아올 생각 마!”그녀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의 발걸음이 멈칫했고 윤청하는 성유리가 마음을 바꾼 줄 알았다.그런데 성유리가 고개를 돌리더니 이렇게 받아쳤다.“그것참 고맙네요.”성유리의 표정은 여느 때처럼 차분했다.하지만 그 평온함이 윤청하의 눈엔 서늘함으로 보였고 마치 독사가 먹잇감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침을 뱉는 것 같았다.윤청하는 순식간에 얼굴이 창백해지며 저도 모르게 두 걸음 뒤로 물러섰고 성유정이 황급히 그녀를 붙잡았다.“엄마, 괜찮아?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윤청하는 계속해서 고개를 저으며 성유정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녀의 손을 밀어내더니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자리에 서 있던 성유정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표정이 금세 사라졌고 바로 그때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돈은 언제 줄 거야?”거친 남자의 목소리에 성유정은 눈을 흘기면서도 태연하게 대답했다.“걱정 마요, 내일 카드로 돈 보낼 테니까. 하지만 명심해요. 당신은 날 본적도 없는 거고 나한테 다시는 전화도 하지 마요, 알아들었어요?”...박한빈이 저택에서 나왔을 때는 거의 새벽 열두 시쯤이었다.운전기사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가 나오는 것을 보고는 바로 내려서 문을 열었고 놀랍게도 성유리는 여전히 차 안에 있었다.그녀는 차창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는데 박한빈이 차에 타는 순간 바로 눈을 떴다.그리고는 고개를 숙여 머리를
예상치 못한 그의 질문에 성유리는 순간 자기 귀를 의심했다.몇 초가 지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그녀는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말했다.“박 대표님, 지금 그걸 묻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나요?”박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처음 그녀가 이혼을 제기했을 때만 해도 단순히 떼를 쓰는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아무리 기분이 안 좋은 거라고 해도 딱 한 번만 참아줄 생각이었고 그래서 두 번째 언급했을 땐 그녀의 뜻대로 해주었다.홧김에? 조금은 그랬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때만 해도 박한빈은 그녀가 분명 후회할 거라고 확신했는데 지금 보니 자신이 틀렸던 것 같다.박한빈은 이틀 전에 이미 그녀의 과거에 대해 알게 되었다.실형을 선고받은 양아버지와 병원에서 혼수상태에 빠진 양어머니.이 모든 것들은 성유리로부터 들은 적이 없었고 박한빈은 그제야 자신이 그녀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다는 걸 깨달았다.“이유가 뭐였든 이제 다 의미 없어요.”성유리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렸다.“걱정 마요. 오늘 밤 일로 조경우는 절대 나랑 다시 만나지 않을 거고 당신이 걱정했던 일들도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우리도 아마 더 만날 일 없겠죠. 뭐가 됐든 그래도 한때는 부부로 지냈으니 앞으로 박 대표님 하시는 일 바라는 대로 다 잘 되길 바랄게요.”말을 마친 성유리의 말투와 눈빛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고 박한빈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차 세워.” 그가 말하자 성유리는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 더 이상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그대로 돌아섰다.그런데 그녀가 차 문을 열었을 때 박한빈은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그때 일 넌 잘못 없어.”마치 길가에 버려진 불쌍한 새끼 고양이나 강아지에게 하는 듯한 그저 동정 섞인 말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는 가벼운 한마디였다.성유리는 그가 결코 친절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그래도 방금 그녀가 말한 것처럼 그래도 한때는 부부로 지냈던 두 사람이었고 결혼 이후 처음으로 그의 입에서 듣는 ‘위
성유리는 돌아와서 바로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고 예외 없이 악몽을 꾸었다.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베개가 상당 부분 젖어 있었고 날은 이미 밝아진 뒤였다.성유리는 한참을 침대에 앉아 있다가 휴대전화를 꺼냈다.메시지와 전화가 폭주하듯 쏟아질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아무것도 없었다.인터넷 뉴스는 물론이고 주변 지인들의 연락도 전혀 없었다.다른 사람은 몰라도 원유진이 이 일을 알았다면 분명 당장 달려와서 실컷 조롱하고 막말을 해댔을 텐데 그녀조차도 움직임이 없다는 것은... 누군가에 의해 뉴스가 막혔다는 뜻이다.그리고 이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은 단번에 떠올랐지만 곧바로 성유리는 그 생각을 차단해 버렸다.어차피... 그럴 리가 없으니까.하지만 성유리는 그 말고는 다른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그 후에도 한동안 성유리는 비슷한 뉴스에 계속 관심을 기울였지만 자신에 대한 가십 대신 진무열이 성유정과 약혼한다는 소식을 들었다.이 소식을 접한 성유리는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자신이 이미 성씨 집안을 나왔으니 그쪽에서 정략결혼을 계속 원한다면 남은 건 성유정뿐이었다.진씨 집안에서도 정략결혼에 대한 소식을 내비친 적이 있었기에 그 둘의 결합은 그다지 놀랍지도 않았다.하지만 인터넷을 통해 접한 소식이라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송효주가 인쇄소에서 이미 책을 인쇄했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성유리의 지난번 작품은 잘렸지만 앞선 두 작품의 출간 계획은 계속 진행 중이었고 책을 보낸 후에도 사인을 해야 했기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배달 음식을 주문하려는데 진무열의 전화가 걸려 왔고 그의 이름이 뜨자 성유리의 손가락이 저도 모르게 굳어졌다.지난번 단호하게 그의 고백을 거절했던 이후로 둘은 전혀 연락하지 않았다.사실 성유리는 가능하다면 여전히 그와 친구로 지내고 싶었지만 진무열은 그러고 싶지 않은 게 분명했다.성유리가 받을까 말까 망설이는 순간 전화는 알아서 끊겼고 성유리는 괜스
진무열은 성유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덧붙였다.“들었어? 나 너희 집이랑 약혼해.”성유리는 포크를 들고 케이크를 한 입 베어 물려다가 그의 말을 듣고는 천천히 포크를 다시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성유정이랑.”성유리는 대답했다.“알아.”“넌 이제 성씨 집안과 인연 끊었다며?”진무열이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사실 그게 아니었다면 내 정략결혼 상대가 너였을 수도 있어.”지금 진무열이 짓는 미소는 진짜였다.다만 아무리 애를 써도 눈마저 속일 수 없었던 미소는 그저 씁쓸하게 입가에만 남아 있었다.성유리는 잠시 멈칫하다가 말했다.“네가 원하지 않으면 가서 얘기해도 돼...”진무열은 고개를 저었다.“어떻게든 날 이용해 먹으려고 데려온 사람들이야. 그거 알아? 스무날 넘게 내가 만난 사람만 열댓 명이야.”“이용?” 성유리는 인상을 찌푸렸다.“네가 정말 정략결혼에 성공하면 그 사람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까? 어떻게...”진무열이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너 아직 모르지? 지난번 교통사고 이후로 진무혁은 불구가 됐어. 이제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그러니 내가 말한 이용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겠지?”성유리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고 룸 안의 분위기도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아마 오늘이 우리 둘만 식사하는 마지막이 될 것 같아.”진무열이 다시 잔을 들었다.“그리고 조금 늦었지만 그래도 얘기할게. 축하해, 드디어 그곳에서 벗어나서 그 사람들과 엮이지 않게 됐잖아.”성유리도 별다른 말 없이 잔을 들어 그와 술잔을 부딪쳤다.“고마워.”...한편 성유정 역시 레스토랑에 있었고 휴대폰의 시간은 이미 8시 30분이 지났지만 맞은편 자리는 아직 비어 있었다.웨이터가 음식을 데워주러 세 번째 들어왔을 때 성유정은 마침내 당황스러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박한빈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하지만 전화를 걸기도 전에 이미 룸 문이 열렸고 들어온 사람을 본 성유정의 눈이 반짝거렸다.“한빈 오빠!”짧게 대꾸한 박한빈은 자기 손을 잡으려는
박한빈이 직설적으로 묻자 성유정은 오히려 머뭇거렸고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 동안 치마 끝을 만지작거리더니 나지막이 말했다.“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학교 다닐 때는... 언니랑 아주 친한 사이였어.”박한빈은 말이 없었고 성유정은 그가 오해할까 봐 두려운 듯 서둘러 설명을 덧붙였다.“근데 진무열이 얼마 지나지 않아 유학 가면서 언니랑 아마... 아무 사이는 아니었을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 사람이랑 약혼하는 건 아닌 것 같아. 오빠, 내가 너무 이기적이고 나쁜 걸까? 분명 우리 집에 내가 필요한 건 알지만 난...”말을 이어가던 성유정의 눈시울이 갑자기 다시 붉어졌다.박한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무슨 생각인지 시선만 바닥으로 보내고 있었다.성유정은 입술을 깨물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한빈 오빠, 저번에... 우리 아빠랑 무슨 얘기 했어? 나... 난 지금 결혼하고 싶지 않은데 나 좀 도와줄 수 있어?”그 말과 함께 성유정이 손을 내밀어 박한빈의 소매를 잡아당기려는 순간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고 타이밍을 아주 잘 잡은 그녀는 벨 소리가 울리자 놀란 듯 재빨리 손을 거두더니 허둥지둥 전화를 받았다.“뭐라고?”성유정이 언성을 높이며 맞은편에 앉은 사람을 홱 돌아보았다.“내... 내가 지금 바로 갈게.”전화를 끊은 성유정의 시선이 다시 박한빈에게 향했다.“미안해 한빈 오빠, 나... 나 먼저 갈게.”“무슨 일이야?” 박한빈이 느긋한 목소리로 묻자 성유정은 이를 꽉 깨물고 속으로 한참을 망설이는 척하다가 입을 열었다.“유진이가 진무열을 봤다는데... 여자랑 호텔로 갔대. 나 가봐야겠어.”“그래, 누구랑?”박한빈이 계속해서 물었고 무심한 듯 들리는 말투에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묻어났다.“그게...” 성유정은 곤란한 상황에 부닥친 듯 눈을 내리깔고 이를 꽉 깨물었다.하지만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결국 입을 열었다.“유진이 말로는... 우리 언니 같대.”...“유정아, 여기야!”성유정이 막 호텔에 들어왔을 때 원유진이 그녀를 끌고
가운데에 있어야 할 벽이 보이지 않았다.그렇게 안방과 서재가 하나로 합쳐져 있었고 그 덕에 작은 방과 거실이 넓어졌다.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던 성하늘은 성유리에게 안기자마자 그녀의 어깨 위에 기대어 잠들어 버렸다. 아이는 지금 자신이 어디로 와 있는지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침구는 다 깨끗한데, 더 필요한 거 있어?”방 문 앞에 서 있던 박한빈이 물었다.“필요 없어요, 고마워요.”“너... 씻고 나서 잠옷으로 갈아입을 거야?”박한빈의 말에 성유리가 미간을 찌푸렸다.그녀의 반응에 박한빈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미안해,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그럼... 잘 자. 나는 앞방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생기면 언제든지 불러.”말을 마친 그는 곧장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의 뒤를 곧바로 따라나섰다.그때까지만 해도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에게 할 말이 있어서 그런 건 줄로 알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성유리는 매정하게 방 문을 닫았다.뒤이어 문을 잠그는 듯한 소리까지 들려왔다.박한빈은 걸음을 멈추고 참았던 웃음을 피식 터뜨렸다.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이렇게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성유리는 여전히 순진하기 그지없었다.아무리 문을 잠근다고 해도 이곳은 박한빈의 집이었고, 집주인인 그에게 스페어 키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하지만 박한빈 역시 성유리에게 허튼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지금이 적절한 때가 아닌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 지금 이대로도 박한빈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수없이 박한빈은 거부했던 예전에 비하면 지금은 엄청난 진전이나 다름없었으니까.박한빈은 계속 걸음을 옮겨 자신의 침실로 들어갔다.서재의 컴퓨터 책상 위에는 수많은 자료들이 쌓여 있었지만 박한빈은 그 자료들을 확인해 볼 의지도 없다는 듯 곧바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그날 밤, 박한빈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깊은 잠에 들었다.쓸데없는 꿈을 꾸지도 않았고,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나지도 않았다.눈을 떴을 때, 해는 이미 중천에
“CCTV는 내가 설치한 거야.”박한빈은 성유리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재빨리 말했다.“저걸 설치한 이유는 너희의 안전을 위해서야. 오늘 밤처럼, 내가 없었으면...”“대표님이 굳이 이사 안 왔으면 저 사람이 우리 모녀의 삶에 등장하는 일도 없었겠죠.”성유리가 그의 말을 끊고 말했다.그 말에 박한빈이 잠시 멍해지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그게 무슨 뜻이야? 설마 이것도 내 잘못이라는 거야?”“그럼 아니에요?”성유리가 되물었다.“저 사람, 대표님이 부른 사람들이잖아요.”“난 그냥 이삿짐센터를 불렀을 뿐이야. 거기서 어떤 사람을 보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하지만 근본적으로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대표님이었잖아요. 대표님만 굳이 이사 안 왔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걸요.”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성유리는 무슨 일이 생기든 모든 책임을 다 박한빈에게 떠넘기려 하고 있었고 박한빈은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가 아무리 반박하고 변명해보려 해도 아무 소용없었다.성유리도 더는 박한빈은 신경 쓰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하지만 성유리가 뒤늦게 깨달은 점이 하나 있었다.전선이 여전히 끊긴 상태가 집 안은 여전히 칠흑같이 어두웠다는 점이다.성유리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결국, 그녀는 성하늘을 안고 다시 밖으로 나와야 했다.박한빈은 여전히 앞집 문 앞에 서 있었다.그는 성유리를 바라보며 이 모든 일을 예상했다는 듯 눈썹을 치켜들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조금 전과는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치 성유리가 곤란해지길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느껴졌다.“이 시간에 업체 부르긴 힘들 거야.”박한빈이 말했다.성유리는 그의 말에 아무 대꾸로 하지 않은 채 성하늘을 데리고 앞으로 걸어갔다.이미 한 시간 동안이나 시달리며 잘 시간이 훌쩍 지나버린 탓에 성하늘의 눈꺼풀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아이는 한 손으로 성유리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계속해서 눈을 비비적대고 있었다.“이 늦은 시간에 애 데리고 어딜 가려는
그 광경에 성유리의 낯빛이 곧바로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재빨리 다가가 박한빈의 손에 들려있던 열쇠를 빼앗듯 가져갔다.“너...”성유리는 설마 훔친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한빈은 성유리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곧장 입을 열었다.“아까 네가 밖에서 물건 꺼내다가 떨어뜨린 거야. 그걸 내가 주운 거고.”“그럼 왜 진작 안 줬는데요?”“네가 말할 틈을 안 줬잖아.”박한빈은 조금 억울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게다가 애가 그렇게 급하다는데, 병이라도 나면 안 되잖아.”박한빈의 말은 나름대로 그럴듯하게 들렸다.잠시 할 말을 잃은 성유리는 가만히 박한빈을 노려보다가 성하늘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주스... 안 마실 거야?”박한빈이 뒤에서 물었다.하지만 성유리는 단 한 번도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박한빈이 일부러 이런 짓을 한다는 것쯤은 성유리도 눈치챘다. 그런 게 아니었다면 엘리베이터에서 만났을 때 열쇠부터 건넸을 것이다.이런저런 생각에 열이 올랐던 건지 문을 닫던 성유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그런 엄마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성하늘이 조심스레 물었다.“혹시 하늘이가 잘못한 거야?”이의 말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성유리가 다급히 사과했다.“아니야, 그런 거. 엄마가 실수로 문을 너무 세게 닫아서 그래. 엄마 화 안 났어.”성하늘은 그렇게 성유리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그제야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이 일로 성유리는 집까지 찾아와 준 업체 직원에게 오랫동안 상황 설명을 해줘야 했고, 먼 길 달려온 그에게 교통비까지 물어주고 나서야 상황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그렇게 박한빈을 향한 성유리의 원망이 한층 더 추가됐다.그때까지만 해도 성유리는 그저 지나가면 끝일 작은 해프닝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자기 전, 샤워를 준비하던 그때, 머리 위에서 전등이 갑자기 깜빡이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집안 전체가 어둠에 휩싸여 버렸다.침대 위에서 놀고 있던 성하늘 역시 깜짝 놀
“잠깐만요.”엘리베이터 문밖에서 누군가의 소리가 들려왔다.다른 사람이었다면 성유리도 곧바로 열림 버튼을 눌러줬을 터였다.하지만 지금 성유리는 여느 때와 달리 고개를 푹 숙인 채 미친 듯이 닫힘 버튼만 연속으로 눌러대고 있었다.그런데도 엘리베이터 밖의 사람보다 한발 늦고 말았다. 문이 천천히 닫히려던 그 순간, 남자가 닫히려는 문을 손으로 잡았던 탓이다.닫히려던 문이 다시 열렸다.성유리의 입술은 열려버린 엘리베이터 문과는 반대로 꽉 다물어졌다.남자는 분명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왔음에도 성유리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성유리는 그런 남자의 인사에도 아무런 대답 없이 그저 성하늘을 데리고 옆으로 물러섰다.그녀는 마치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선 남자를 무서운 바이러스라도 되는 양 취급하며 최대한 그와 멀어지려 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런 모녀를 보면서도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인 채 점점 올라가는 숫자판만 바라보고 있었다.곧이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성유리와 성하늘이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현관 앞으로 도착한 성유리는 열쇠를 찾기 위해 가방을 뒤적였다.그녀는 그제야 뒤늦게 자신의 열쇠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엄마, 나 화장실 가고 싶어.”성하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성유리는 대충 아이의 말에 대답해준 후 더욱 다급한 손길로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찾아보아도 가방 안에 있어야 할 그 열쇠들이 보이지 않았다.“엄마, 나 화장실 가고 싶다니까.”시간이 꽤 걸리자 성하늘의 목소리도 더욱 다급해져 더 끌었다가는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들렸다.성유리가 아이를 달래기 위해 입을 열려던 그때, 모녀의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집에서 해결할래?”그 소리에 가방을 뒤적이던 성유리의 손이 순간적으로 멈췄지만 아이는 여전히 곁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박한빈은 더 고민할 틈도 주지 않은 채 곧장 성하늘을 안아 들어 자신의 집으로 걸어 들어갔다.성유리는 다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이게 지금 무슨 짓
서훈은 박한빈의 비서실장으로서 평소 박한빈과 거의 붙어 다니는 사이였다. 그런 서훈을 시켜 짐을 옮기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지는 뻔할 뻔 자였다.역시 예상했던 대로 성유리는 집 안에서 걸어 나오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셔츠 하나만 걸친 채 소매를 걷어 올린 남자의 소매에는 먼지가 묻어 있었다.그의 머리카락은 어느 정도 흐트러져 있었지만 오히려 그 허술함이 남자의 생기를 더 돋보이게 해주었다.성유리는 차갑게 식은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박한빈은 그 상태로 한참이나 성유리와 눈을 마주치다가 입을 열었다.“이런 우연이 다 있네.”우연이라니?성유리는 당장이라도 박한빈의 얼굴이 뭔가를 집어 던져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이런 상황을 보고도 박한빈의 말을 믿을 사람은 바보가 아닌 이상 존재할 리 없었다.성유리는 박한빈은 더 상대하지도 않은 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곧장 하늘이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성하늘 역시 당연하게도 박한빈을 알아보았다.아이는 유심히 박한빈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는 순간, 성하늘은 곧장 성유리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엄마, 저 사람이 왜 여기 있어?”“나도 몰라.”성유리의 대답은 아이의 마음에 드는 대답이 아니었다. 성하늘은 곧장 고개를 숙여 땅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난 저 사람 진짜 싫어. 자꾸 거머리처럼 달라붙잖아.”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곧장 휴대폰을 꺼내 근처의 임대 정보를 확인하며 이사 갈 만한 집이 있는지 찾아보았다.이사가 번거롭긴 했지만 이미 이 동네에 익숙해진 성유리에게는 별 큰 문제도 아니었다.적어도 그녀는 자신만 이사하면 박한빈이 계속 따라붙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마음에 드는 집을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성유리는 오전 시간이 다 지나도록 웹사이트는 찾아봤지만 마음에 드는 집이 없었다. 집 창문 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구조가 너무 별로였고, 동네가 너무 낡았다.무엇보다 성하늘이 이미 이곳에서 사귄 친구
하지만 진행자는 여전히 그 화제에서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관련 질문이 나올 때마다 성유리는 한 마디로 모든 것을 부정하며 다른 억측들까지 차단해 버렸다.처음부터 끝까지 성유리는 단 한 번도 박한빈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성유리가 비협조적이라고 느껴졌던 탓인지 1시간으로 예정되어 있던 인터뷰는 30분도 진행되지 못한 채 흐지부지 끝나버렸다.인터뷰가 끝난 뒤, 성유리는 송효주에게서 사과의 메시지를 받았다.“나도 저쪽에서 이런 의도를 갖고 있을 줄은 몰랐어. 저 사람들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지금 주인공들 인기가 어느 정도인데, 캐릭터 얘기나 할 것이지 왜 네 사생활까지 다 언급하고 난리래?”송효주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묻어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그런 송효주의 연락에도 아무런 감흥 없이 묵묵히 듣기만 했다.한참이나 말을 이어나가던 송효주는 아무 대답 없는 성유리의 반응에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혹시... 화 난 거야?”“두 번 다시는 이런 일 없었으면 좋겠네.”그 말을 끝으로 성유리는 전화를 끊어버렸다.일을 마친 그녀는 다시 불을 끄고 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솔직히 말하자면 어느 정도 화가 나는 것도 맞긴 했지만 그렇다고 오래 기억될 정도도 아니었다.다음 날 아침, 눈을 뜬 그녀는 전날 밤에 있었던 일을 거의 다 까먹어 버렸고 뒤늦게 뉴스를 통해 자신이 어제 진행했던 라이브 방송의 채널이 정지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정지된 그 채널은 무려 출판사의 공식 계정이었다.곧 출판사에서도 다른 소셜 미디어를 통해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에는 전날 진행했던 인터뷰의 진행자가 사적인 감정으로 무례한 행동을 감행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내용과, 어제 인터뷰를 진행했던 그 진행자와는 계약을 해지했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성유리는 어젯밤 진행했던 인터뷰 질문이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 결국, 그녀는 조용히 휴대폰을 내려놓은 채 식사를 이어나갔다.잠시 후, 앞집에서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어젯밤보다는 훨씬 조용하
두 팬덤의 싸움은 점점 더 걷잡을 수 없이 커졌지만 제작사와 영상 플랫폼 측은 오히려 그런 팬덤 싸움을 반기는 모양이었다.요즘은 다들 그렇듯 차라리 시끄럽게 이슈가 되는 게 조용히 묻히기보다는 수익성이 더 크니 그럴 만도 했다.그러던 중, 편집자가 성유리에게 연락해 원고를 요청해왔다.최근 두 달 동안 성유리는 딱히 새로운 작품을 낸다기보다는 이런저런 곳에서 들어오는 작은 일만 맡아왔다. 하지만 이번 드라마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는 만큼, 회사에서는 이 틈을 타 성유리를 한껏 밀어줄 계획이었다.“요즘은 시간도 없고 딱히 떠오르는 아이디어도 없어. 나중에 다시 얘기해.”“난 이 말만 벌써 몇 번째 듣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나도 알아. 그런데 어쩌겠어, 하늘이도 아직 어리고. 그렇다고 이 어린 애가 하루아침에 커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알겠어, 신작은 없다 치고, 인터뷰나 하나 잡아줄게. 이 정도는 괜찮지?”“무슨 인터뷰인데?”“웹에서 생방송으로 송출되는 인터뷰야. 전에 우리랑 협업한 적 있는 출판사인데, 드라마가 인기를 끄니까 원작자라도 인터뷰해서 판매량 좀 올릴 생각인가 봐.”성유리는 대충 들어주는 척만 하고 거절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그런 성유리의 생각을 미리 읽기라도 한 것인지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말을 꺼냈다.“걱정 마. 언니만의 원칙은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앞으로도 언니 얼굴이 세상에 공개되는 일은 없을 거야. 이번 인터뷰도 굳이 얼굴을 노출할 필요는 없어.”그 말에 성유리는 뒤늦게 마음을 누그러뜨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오케이, 그럼 답장 보내둔다? 구체적인 시간은 내가 나중에 다시 연락해서 알려줄게.”편집자는 잔뜩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만 성유리도 하늘이의 생체 리듬을 지켜주며 일을 해야 했던 탓에 인터뷰 시간은 밤 11시로 정해두고 아이가 완전히 잠든 후에야 인터뷰를 진행했다.성유리는 진행자가 단순히 드라마의 구상이나 여자 주인공의 성장 과정에 대한 질문만 할 것이라 예상
점심시간이 다 되었지만 앞집에서는 계속 이삿짐을 옮기고 있었다.성유리는 현관문을 꼭 잠가두었지만 일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꽤 시끄러웠고, 새로운 입주자는 집을 다시 리모델링이라도 하는지 짐 옮기는 소리와 공사 소리까지 계속해서 들려왔다.피곤했던 성하늘도 소음 때문에 침대에서 한참이나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성유리는 그런 성하늘의 곁에 누워 아이의 등을 살살 두드려주었다.성하늘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성유리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성유리는 웃음을 터뜨리며 어쩔 수 없다는 말투로 말했다.“그래서, 뭘 하고 싶은데?”“잠이 안 와.”“눈 감고 가만히 있으면 잠이 올 거야.”성유리의 말에 성하늘은 순순히 눈을 감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감고 있던 눈을 뜨며 말했다.“엄마, 그래도 잠이 안 와.”“그럼 뭘 하고 싶은데?”“그림도 그리고 싶고, 책도 보고 싶어.”“그러니까, 자기 싫다는 뜻이네?”그 말에 성하늘은 민망한 듯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성유리가 무슨 말을 더 꺼내려던 그때, 누군가가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기 싫다며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던 성하늘은 바로 성유리의 품에 파고들어 그녀의 팔을 꽉 껴안은 채 두 눈을 질끈 감았다.그런 아이의 반응에 성유리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며 아이의 손등을 살살 두드려주었다.“괜찮아, 엄마가 나가서 확인해 볼게.”“안돼, 엄마. 나가지 마.”성하늘은 그런 성유리의 손을 꽉 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성유리는 어쩔 수 없이 아이를 품에 안고 함께 밖으로 나갔다.그녀는 현관문 앞까지 가 스코프를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복도에서는 여전히 이삿짐센터 사람들이 바쁘게 짐을 옮기고 있었다.한 건장한 남자가 문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어린 딸과 단둘이 살다 보니 성유리의 경계심은 자연스레 높아져 있었다. 그녀는 현관문을 꼭 잠근 채 큰 소리로 물어보았다.“무슨 일이시죠?”“저희 대표님께서 이삿짐 때문에 시끄럽게 해드려서 죄송하다고, 케이크라도 드리고 싶다
“그렇긴 하죠. 노인 네 명에 어린애 둘 딸린 집인데 부부 중 한 명은 해고당하고 다른 한 명은 월급이 깎였다잖아요. 집 안 팔면 못 살죠.”“그러게요. 그러니까 직장을 들어가도 대기업으로 들어가라고 하잖아요. 대우도 좋고 안정적이니까!”“맞아요, 맞아.”“맞다, 하늘이 엄마. 그 친구분... 은 회사 운영하시죠? 요즘 어떻게 지낸대요?”성유리는 곁에서 그녀들의 대화를 한참이나 듣고 있었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수다 화제가 성유리로 바뀔 때, 그녀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은 생각만 들었다.성유리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되물었다.“어떤 친구요?”“그냥...”“하늘이 아빠요!”곁에 있던 누군가가 마침내 적절한 표현을 찾았다는 듯 말을 꺼냈다. 하지만 곧이어 후회가 들었는지 다시 조심스레 물었다.“그 사람... 하늘이 아빠 맞죠?”“그 사람 일이라면 저도 잘 몰라요.”성유리의 대답은 단호했다.“이혼한 지도 꽤 됐고, 연락도 거의 안 하고 지내니까요.”“그래요? 그렇다고 하기엔... 꽤 자주 오는 것 같던데요? 혹시 모르죠, 그분이 아직도 유리 씨한테 관심이 있을지.”“제가 보기엔 두 분 꽤 어울리는 것 같던데요! 저희 시어머니도 그러셨어요. 하늘이가 예쁜 건 다 하늘이 부모님이 예쁘고 잘생겨서라고요!”“저희는 더 이상 부부가 아니에요.”성유리가 대답했다.얼핏 듣기엔 평범했지만 그녀의 말투에는 분명 약간의 경고가 담겨 있었다.갑자기 날카로워진 성유리의 말투에 시끄럽게 수다를 떨던 엄마들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이윽고 성유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저는 애 밥 차려줘야 해서요, 먼저 가 볼게요.”“저... 저기, 하늘이 엄마. 다음에 그 친구분 또 오시면 저한테도 얘기 좀 해줄래요? 우리 남편이 할 얘기가 했다고 그래서...”뒤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성유리는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걸음을 이어나갔다.하늘이도 충분히 놀았는지 성유리가 가까이 다가오자 얌전히 그녀의 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