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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화

Author: 송진
하지만 지석민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눈만 가늘게 뜬 채로 성유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에 성유리는 실소를 터뜨리며 물었다.

“왜 말을 못 해요?”

“유리 씨.”

점점 살얼음판 같아지는 분위기에 조경우가 일어나며 성유리의 손을 잡았지만 성유리는 그만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당신이 안 가면 내가 갈게요.”

성유리가 뒤돌아 나가려 하자 조경우도 다급히 따라나서려는데 지석민이 또 느긋하게 말을 걸어왔다.

“아가씨 노릇 몇 년 했다고 아주 기세가 장난 아니네.”

“그런데 유리야, 사람이 초심을 잃으면 안 되지. 그때 나 아니었으면 넌 진작에 굶어 죽었어. 지금 여기서 나한테 이래라저래라할 수도 없었다고!”

“근데 네가 지금 나를 내쫓아? 똑똑히 들어. 내가 우리의 부녀간의 정을 생각해서 일부러 말을 아끼는 것뿐이야. 그런데 네가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도 어쩔 수 없어. 시골에서 있었던 일들 다 까발릴 거야!”

지석민의 말이 끝나자 등을 돌리던 성유리의 행동도 멈췄다.

성유리가 고개를 돌려 바라본 지석민은 당당하게 웃고 있었다.

지석민이 이토록 자신만만할 수 있었던 건 지석민이 쥐고 있는 그 카드가, 그날 일이 성유리는 감히 언급도 하지 못할 일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지석민은 제가 그 일을 들먹이면 성유리가 고개를 숙이고 제 말에 따를 거라 생각했다.

그랬는데 지금의 성유리는 지석민을 향해 웃고 있었다.

그 웃음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은 지석민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성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요? 당신한테 강간당할 뻔한 일이요?”

평온하게 말하는 성유리는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손을 꽉 말아쥐었다.

온 힘을 다해 말아쥔 탓에 손바닥에 닿은 손톱은 부러졌고 그 통증은 손끝에서부터 심장에까지 전해졌다.

그 순간 성유리의 가슴도 갈기갈기 찢겨나가고 있었다.

몇 년간 애써 보듬은 덕분에 새로 돋아난 살들이 다 찢겨버리고 그 옛날의 곪아 터진 상처들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성유리의 말에 조경우도 바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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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사람은 아니야.”성유리가 단호하게 대답했다.하지만 곧 무언가 떠오른 듯 표정이 살짝 변했다.“그런데 연정우 씨는 지금 어떻게 됐어요?”“죽었어.”박한빈이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고는 곧바로 화제를 되돌렸다.“그러니까 그 사람이 누구냐고?”그러나 성유리는 그의 물음보다 죽었다는 대답이 더 신경이 쓰였다.순간적으로 멍해진 그녀에게 박한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성유리.”이번에는 한층 낮고 어두운 톤이었다.“내가 묻고 있잖아. 도대체 누구야? 너 도대체 남자가 몇이나 되는 거야?”“뭐라고요? 지금 그게 무슨 의도로 하는 질문이죠?”성유리는 황당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그냥 아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왜 그 사람이 남자라고 확신하세요?”“아니야?”박한빈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잠시 말을 멈춘 성유리는 다시 입을 열었다.“일단 연정우 씨가 정말 죽었는지부터 제대로 말해 줘요.”“그 미친놈을 왜 그렇게 신경 쓰는 건데? 먼저 너부터 말해. 그때 널 봤다는 사람이 누구야?”“지금 제정신이세요? 전 무대 위에 있었어요. 절 본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는데 그럼 그 사람들 다 찾아볼 건가요?”성유리가 단호하게 받아치자 박한빈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어서였을까, 아니면 단순히 화가 나서였을까.병실 안에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다.성유리는 박한빈이 연정우가 죽었다는 말을 너무 쉽게 내뱉은 걸 보며 사실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아마도 살아 있겠지만 상태가 어떤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하지만 그녀의 진심은 하나였다.연정우가 그렇게 쉽게 죽어버린다면 너무 쉬운 결말 아닌가.그가 겪어야 할 대가는 그 정도가 아닐 텐데.의사가 병실로 들어왔을 때, 분위기는 싸늘하게 얼어붙어 있었다.박한빈은 여전히 성유리를 부축하고 있었지만 그 사이에는 얼음 같은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의사는 자신이 들어온 타이밍이 적절한지 잠시 고민하다 결국 말을 꺼냈다.“환자 상태를 다시 한번 체크하겠습니다.”박한빈은 의사를 한 번 흘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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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한빈의 시선을 마주한 순간, 성유리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그저 눈을 맞추고 있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귀 끝이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왜 그렇게 빤히 보세요?”참다못해 성유리가 먼저 물었다.하지만 박한빈은 대답 대신 조용히 물었다.“그럼 다 기억난 거야? 우리 사이의 모든 것들.”“아니요.”성유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그러면서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머리가 아파요. 아까 의사 부른다고 하지 않았어요? 지금 가서...”성유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이 불쑥 그녀의 손을 잡았다.힘이 강하지는 않았다.그런데도 그의 손가락 끝이 살짝 스치는 때, 성유리는 온몸이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순간적으로 손을 빼려던 찰나 박한빈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사실 우리가 결혼하기 전에도 난 너를 여러 번 본 적이 있어.”성유리는 뜻밖의 말에 순간적으로 멍해졌다.그러다 이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알아요. 학교에서 몇 번 마주쳤잖아요.”“그것뿐만이 아니라 졸업 후에도 널 본 적이 있어. 네 대학 졸업 공연도 직접 가서 봤어.”그는 느릿하게, 마치 오래된 기억을 더듬듯 말했다.그리고 왠지 모르게 쑥스러운 듯한 기색도 묻어 있었다.이런 이야기는 박한빈이 성유리에게 한 번도 해준 적이 없었다.그래서인지 성유리는 순간적으로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졸업 공연이요?”“응. 네가 연극에 출연했잖아.”그 말에 성유리는 더듬더듬 기억을 떠올렸다.학교 축제 때 한 번 공연했던 연극을 졸업할 때도 다시 무대에 올렸었다.물론, 성유리는 단역이었다. 대사 한마디도 없는 엑스트라.“그걸 보러 왔었다고요?”그녀는 어리둥절했다.그게 대체 뭐라고? 박한빈이 그런 공연을 일부러 보러 올 이유가 있었을까?성유리는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그때, 박한빈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조용히 대답했다.“넌 졸업하자마자 나랑 결혼했어. 기억하지?”“알지. 그런데 그게...”성유리는 말하다가 문득 깨달았다.“설마 진짜 일부러 저 보러 오신 거예요?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862화

    “누구세요?”이것이 성유리가 눈을 뜨고 나서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박한빈은 그녀가 깨어난 기쁨에 잠겨 있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모든 표정이 사라졌다.“뭐라고?”묻는 그의 목소리는 많이 떨리고 있었다.성유리는 대답 없이 그저 조용히 박한빈을 바라볼 뿐이었는데 눈빛에는 분명한 의심과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박한빈은 순간적으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또다시 이런 일을 겪게 되어서일까.이번에는 꽤 빠르게 마음을 가다듬고 침착하게 말했다.“나는 네 남편, 박한빈이야.”그러고는 다시 물었다.“너... 네 이름은 기억해?”“남편?”성유리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되물었다.“저희가 결혼했다는 뜻인가요?”“그래. 우리에겐 하늘이라는 딸도 있어. 올해 세 살이야. 여기 사진도 있고.”박한빈은 급히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찾기 시작했다.하지만 성유리는 그보다 먼저 다시 입을 열었다.“그럼... 왜 전 당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죠?”“네가 좀 다쳤거든. 하지만 걱정 마. 곧 의사 불러서 검사받게 할 거니까.”박한빈이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였다.갑자기 성유리가 그의 옷소매를 살짝 붙잡았다.아주 약한 힘이었지만 박한빈은 즉시 그것을 감지하고 다시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왜?”“머리가 좀 아파요. 그렇지만 의사는 별로 보고 싶지 않네요.”“그래도...”“저희에겐 딸이 있다면서? 그럼... 언제 결혼한 건데요?”“우리는...”박한빈은 즉시  대답하려다가 문득 이 질문이 생각보다 너무 복잡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애초에 그들의 이야기는 몇 마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하지만 지금 성유리는 모든 기억을 잃었다.그렇다면 굳이 복잡한 과정을 설명할 필요는 없을지도 몰랐다.“우린 결혼한 지 7년 됐어.”“7년이요?”성유리는 잠시 멍해졌다.“그럼 그동안 줄곧 함께였나요?”“당연하지.”“그럼 저희가 왜 결혼한 거예요?”“그야 당연히...”박한빈은 자동으로 대답하려 했지만 말을 하다가 문득 뭔가 떠올랐다.그래서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861화

    연정우는 자신이 정말로 잘못한 것 같다.돈과 권력.사실 그건 애초에 그가 쫓아야 할 것이 아니었다.아무도 영원히 권력의 중심에 설 수 없고, 아무도 영원히 그것을 가지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연정우가 진짜로 쫓아야 했던 것은 오직 그 한 줄기 빛뿐이었다.늦은 밤까지도 자신을 위해 남아 있을 그 불빛 하나.하지만 이제 모든 것은 너무 늦어버렸다.눈을 감는 순간, 연정우는 문득 어머니가 떠올랐다.어릴 때 그는 새 그림 도구 세트를 너무나도 갖고 싶었다.부모님께 여러 번 얘기했고 세뱃돈을 모아 직접 사려고도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부모님은 그것이 지나친 낭비라 생각했고 그들의 검소한 삶의 방식과 맞지 않는다고 했다.그래서 결국 연정우는 문구점에서 몰래 그 그림 도구를 훔쳤다.그는 학자 집안 출신이었고 바깥에서는 항상 온화하고 품격 있는 모습을 유지해 왔다.덕분에 주인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그래도 나중에 부모님은 결국 진실을 알아버렸다.그리고 가장 가혹한 방법으로 연정우를 가르쳤다. 그 가르침은 바로 문구점 앞에 무릎 꿇리고 주인에게 용서를 빌게 만든 것이다.그때, 주변에는 그의 친구들도 있었다.그러나 부모님은 연정우의 체면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정직과 성실, 그게 연정우가 지켜야 할 가장 소중한 덕목이니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말뿐이었다.정직과 성실이라는 그 두 단어를 성인이 된 지금 떠올리며 연정우는 쓴웃음을 지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눈을 감으며 아주 나지막이 한마디를 내뱉었다.“엄마, 내가... 잘못했어.”...손목시계의 시침이 정확히 열 시를 가리켰다.박한빈은 이미 사람을 시켜 연정우의 차가 향한 방향을 알아냈고 지금 그 길을 따라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그 과정에서 그는 계속해서 연정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연정우와 협상할 기회만 생긴다면 반드시 설득해서 성유리를 놓아주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연정우의 휴대폰은 내내 꺼져 있었다.운전을 하던 박한빈이 무심결에 고개를 숙여보니 손목시계의 시침이 갑자기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860화

    “미쳤어? 성유리, 당장 손 놔!”연정우는 필사적으로 핸들을 되찾으려 했다.하지만 성유리는 마치 먹이를 물고 절대 놓지 않으려는 맹수처럼 손아귀에 힘을 주어 핸들을 꽉 붙잡았다.차의 속도는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광란의 질주를 이어갔다.이 모든 과정이 얼마나 지속되었을까?아마도 몇십 초 정도였을 것이다.그렇지만 연정우에게는 단지 한순간처럼 느껴졌다.왜냐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정면에서 엄청난 속도로 돌진해 오는 차가 보였기 때문이었다.연정우는 더 이상 총을 찾을 겨를도 없었다.그는 본능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으려 했다.그러나 그 찰나, 두 대의 차량이 엄청난 속도로 충돌했다.쾅!굉음이 울려 퍼졌고 차체가 한순간 공중으로 떠오른 후, 격렬한 충격과 함께 다시 도로로 떨어졌다.연정우는 크게 뜬 눈으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하지만 본능적으로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성유리였다.그녀는 이미 눈을 감고 있었다.마치 처음부터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사람처럼.성유리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연정우가 정말로 죽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는 걸.그가 그녀를 납치한 진짜 이유가 박한빈을 협박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걸.연정우는 생각했다.비록 계획대로 되지 않더라도 적어도 성유리와 단둘이 대화를 나눌 기회는 있을 것이라고.그녀가 자신을 배신하고 함정에 빠뜨린 것에 대한 감정도 이제는 조금 덜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그냥 단순히 한 번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라고.하지만 성유리는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단 한 마디의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그를 죽음으로 끌어들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 연정우는 그녀에게 별다른 원망을 느끼지 못했다.오히려 어딘가 후련한 기분마저 들었다.그때 연정우는 불현듯 자신과 성유리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그날, 성유리는 박한빈과 함께 연회에 참석했었다.그리고 연정우는 그 연회장에서 질식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도망치듯이 정원으로 나왔었다.그는 당시 명문대 교수였고 외할아버지는 존경받는 화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859화

    에릭이 다시 묻기 위해 입을 열려던 순간, 갑자기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선생님, 아내 분이 어디 있는지 알 것 같아요.”박한빈은 곧바로 뒤를 돌아보았다.이내 검은 머리에 커다란 눈을 가진 여자아이가 그들 앞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방금 뒤쪽에 있는 화단 쪽에서 아내 분이 누군가에게 끌려가는 걸 봤어요. 제 착각이 아니라면... 그 남자는 전에 마피 쪽에 있던 연정우 씨였던 것 같은데요?”연정우라는 이름이 나오자 박한빈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그리고 즉시 소녀 앞으로 다가섰다.“그들이 어디로 갔지?”“그건 잘 모르겠지만 대신 차 번호를 기억해 뒀어요. 필요하세요?”“어디 있는데?”박한빈이 다급하게 소리치자 소녀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천 달러요, 선생님.”박한빈은 현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하지만 고민할 것도 없이 즉시 자신의 카드를 그녀에게 건넸다.“번호!”소녀는 카드에 다소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박한빈이 누군지 생각해 보면 이 정도 돈을 떼먹을 사람은 아닐 터였다.결국 소녀는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보여주었다.박한빈은 주저 없이 그녀의 휴대폰을 빼앗았다.“선생님, 그건 제 휴대폰이에요!”소녀가 깜짝 놀라 소리치며 따라붙으려 했지만 에릭이 가로막았다.“넌 누구야?”그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더니 순식간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안녕하세요, 에릭 씨.”에릭은 대답하지 않은 채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넌 이곳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들어온 거지?”소녀는 오해하지 말라는 듯 손을 들어 보이며 가슴팍의 직원 명찰을 가리켰다.“저는 그냥 아르바이트생이에요. 서빙하러 들어온 거랍니다.”에릭은 코웃음을 쳤다.그리고 그녀를 향해 손가락을 뻗으며 조용히 말했다.“그럼 이제 네가 해고됐다는 걸 알려 주지.”...한편, 성유리는 연정우의 차 안에 있었다.그가 어디로 차를 몰고 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하지만 이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아주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858화

    “에릭 씨!”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에릭은 테라스에서 담배를 피우며 울적한 기분을 달래고 있었다.이번 ‘전쟁’에서 그들은 승리했으니 그는 상당한 보상을 손에 넣었다.하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속이 시원하지 않았다.아마도 박한빈이 억지로 그를 이 판에 끌어들였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이제 단순한 승패로는 에릭의 감정을 자극할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몰랐다.처음에는 그래도 기대감이 있었다.연정우라는 상대는 꽤 까다로운 인물이었고 엄청난 위기를 초래하며 심지어 그들을 완전히 박살 낼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그랬다면 정말 볼만한 구경거리였을 것이다.그러나 정작 모든 일이 지나치게 순조롭게 끝나 버렸다.별다른 기복도 없이.이건 정말 따분했다.오늘 밤의 축하 파티도 마찬가지였다.박한빈이 꼭 성유리를 이 연회에 참석시키겠다고 고집했기 때문이었다.그녀도 이번 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니 승리의 일부는 성유리의 몫이라는 말과 함께.그래서 오늘 밤의 축하는 유난히 ‘건전’했다.아니, ‘심심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에릭은 한숨을 쉬며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샴페인 잔에 던져 넣었다.한 잔에 5만 달러가 넘는 술이었지만 그는 신경 쓰지도 않았다.그리고 뒤쪽에서 자신을 부른 사람에게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뭐죠?”“로얀이라는 분이 데리고 오신 동반자가 누군가에게 끌려갔습니다.”상대가 낮은 목소리로 보고하자 에릭의 눈이 가늘어졌다.“뭐라고요?”“아까 경호원들이 순찰 중에 봤습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초대장을 가지고 있어서 특별히 의심하지 않았죠. 그런데 지금 보니 뭔가 이상합니다. 그래서...”“그래서 지금 그 사람은?”“이미 끌려갔습니다.”에릭은 보고한 사람을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그리고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빠르게 걸어가기 시작했다.그러다 몇 걸음 가지도 않아 문득 뭔가 떠오른 듯 멈춰 섰다.에릭은 다시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데려간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했습니까?”“방금 CCTV를 확인했습니다. 아마도... 마피

  •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제857화

    에릭은 여전히 불만이 가득했다.입속으로 뭐라고 계속 중얼거리는 듯했지만 성유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고 굳이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대신 고개를 돌려 연회장 안의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귀를 찢을 듯한 음악이 계속 흐르고 있었고 사람들은 여전히 들떠있었다. 하지만 성유리는 알고 있었다.원래 이들의 축하 파티는 이런 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이 모든 건, 박한빈이 성유리를 이곳에 적응시키고 받아들이게 만들기 위한 과정에 불과했다.이 사실을 모르는 것도, 처음 알게 된 것도 아니었지만 다시금 깨닫게 되자 왠지 모르게 기분이 언짢아졌다.그리고 문득, 며칠 전 연정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것은 그녀와 박한빈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였다.물론, 연정우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믿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보장도 없었다.연정우가 말한 과거들 중, 진실은 얼마이며 거짓은 얼마나 될까?성유리는 지금의 삶이 만족스러웠고 과거의 선택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박한빈의 감정을 믿고 싶었다.그렇게 믿고 싶을 때도 있었다.하지만 때때로 지금의 자신이 마치 허상처럼 느껴졌다.박한빈과의 관계조차 마치 보이지 않는 얇은 막이 가로막고 있는 듯했다.정작 그녀 자신도 자신의 본모습을 완전히 들여다볼 수 없는데 하물며 박한빈이 온전히 알 수 있을 리가 있을까?성유리는 손에 든 샴페인을 단숨에 들이켰다.달콤한 맛과 함께 과일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그녀는 빈 잔을 내려놓으며, 잠시 바람을 쐬러 나가기로 했다.이곳은 에릭이 통째로 빌린 사적인 공간이었다.주변에는 수시로 순찰을 도는 경호원들이 있어 안전은 보장된 곳이었다.그래서 성유리는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이곳에서 연정우와 딱 마주치게 된 것이다.그리고 그의 총구는 성유리의 허리에 거의 닿아 있었다.갑작스러운 상황에 성유리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고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으로 연정우를 바라보았다.그 반응이 오히려 연정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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